35쪽 정도 읽었을 때였다. 배아의 성장을 조정하는 부분을 읽다가 순간 멈추고 책날개를 다시 펼쳤다. 1932. 이 책은 1932년에 발표되었다. 1932년이면 엄마도 아빠도 태어나기 전이다. 경술국치가 1910, 해방이 1945년이니 잔인한 일제의 강권통치가 극에 달했을 무렵. 영국의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는 인간의 미래를 예측하는 디스토피아 소설을 완성했다.

 


계급이 낮으면 낮을수록 그에 따라서 산소를 더 적게 공급합니다.” 포스터가 말했다.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기관은 두뇌였다. 다음으로는 뼈대. 정상적인 수준의 산소 가운데 75퍼센트만 공급을 받으면 난쟁이들이 태어난다. 70퍼센트 이하로 내려가면 눈이 없는 괴물들이 태어나고. (46)


폭발이 그치고, 종소리가 멈추고, 사이렌의 울부짖음이 차츰차츰 낮아지더니 결국 잠잠해졌다. … “아기들에게 다시 꽃과 책을 주도록 해.” 보모들이 지시에 따랐지만 장미꽃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새끼 고양이와 꼬꼬댁 닭과 음매 검정 어린 양을 알록달록한 빛깔로 그려놓은 그림들이 그냥 눈에 띄기만 해도 아기들은 겁에 질려 움츠러들며 뒤로 물러났고, 그들의 아우성 소리가 갑자기 한꺼번에 높아졌다. (55)

 


미래사회 멋진 신세계에서는 난자와 정자의 수정이 이루어지는 때부터 외과적, 화학적 관리를 통해 알파, 베타, 감마, 델타 그리고 입실론이라는 다섯 계층의 인간을 제조해낸다’. 출생 후에는 각기 다른 자극과 세뇌과정을 통해 각 계층의 인간에게 필요한 육체적, 정신적 특성을 소유하도록 조정한다.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사랑(48)하도록 훈련하며,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만족하는 인간상으로 성장하도록 만들어낸다.

 

작가가 그려내는 야만 세계의 모습이 얼마나 아시아적인지에 대해서는 더 하고 싶은 말이 없다. 인디안과 아시아인, 흑인의 특징이 공존하는 거주민들, 오물과 쓰레기, 먼지와 개들 그리고 파리떼와 생활하는 환경에 대한 묘사가 반복된다. 옮긴이의 말을 읽어보니, 헉슬리는 1920년대에 인도와 동양을 방문했고, 후반기에는 힌두 철학과 신비주의에 매료되어 이런 경향이 작품에도 반영되었다고 한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과학적 문학적 배경 속에서 광범위한 지식을 소유했던 영국의 소설가에게 야만 세계라는 환상에 대한 재료는 아시아 일거라 추측할 뿐이다.

 


궁금한 지점은 여기. 문명세계에서는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을 공유한다라는 모토 아래, 원하는 상대와 언제든지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 특정한 사람과의 친밀하고 지속적인 1:1 관계를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규정한다. 정열적이거나 오래 질질 끄는 모든 관계를 경멸한다.(83) 더 많은 사람과 더 자주, 더 자유롭게 성관계를 가지도록 독려한다. 이에 반해 야만세계는 문명인들이 미개하다고 여겨지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데, 결혼은 원주민 말로는 영원히라는 뜻이다. 결혼한 두 사람은 깨뜨릴 수 없는 관계에 들어선다고 믿어진다.

 

 

나는, 내가 선 자리에서 읽는다.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소마라는 신경안정제를 통해 해결하는 문명세계도 천혜의 아름다움이 깃든 야만세계도 여자들에게는 살기 어려운 곳이다. 다른 모든 사람을 공유할 수 있는 문명세계에서는 언제든 다른 사람을, 다른 사람의 육체를 더듬을 수 있다’. 작가는 남자다. 작품 속, 더듬는 손길은 남자들의 것이고 여자들은 이 행위를 당연하게 여긴다. 여자가 남자를 더듬는 장면은 서술되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호감 있는 남성에 대한 유혹으로만 제한된다.  

 


버나드는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침침한 빛을 틈타 전에는 완전히 캄캄한 어둠 속에서조차 감히 엄두도 못 냈을 대담한 행동을 감행했다. 새롭게 부여된 중요한 신분으로 인해 자신이 강력한 인물이 되었다고 느낀 그는 여교장의 허리를 팔로 끌어안았다. 그녀의 허리가 나긋나긋하게 응했다. 그가 한두 번쯤 도둑 키스를 하고 한 번 슬쩍 꼬집어주기까지 하려던 참에 덧문들이 짤깍거리며 다시 열렸다. (252)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는 야만세계에 떨어진 문명인 린다’. 마을 남자들이 그녀를 찾아온다. 문명세계에서처럼 그녀는 그들과 자율적인 성관계를 가진다. 하지만 남자들이 찾아오는 얼마간의 밤이 지나자, 여자들이 나타난다. 린다의 손목을 부여잡고 다리를 깔고 앉아 채찍으로 린다를 때린다. 린다를 찾아왔던 남자들이 자기들 남편이라고 말하며, 그들은 린다를 때린다.

 

 


문명세계는 자신의 위치에만 만족한다면 걱정도 고민도 없는 세상이다.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에 충실하게 살면서 배급되는 소마를 통해 만족감을 얻으면 그만이다. 자연을 누리며 살아가는 야만세계는 이야기와 추억이 있는 곳이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가 가능하며, 아이를 낳고 그리고 아이와 함께 자라가는 세상이다.

 

문명세계와 야만세계의 중간, 그 어디쯤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생각한다. 문명세계도 야만세계도 여자들이 살기엔 잔인하다고. 남자들의 삶도 쉽지 않겠지만(적어도 그렇게 인정은 해 주겠지만), 여자들의 삶이 더 처참하다고. 양쪽 세상이 모두 그렇다고. 멋진 신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마치 그녀가 무슨 고깃덩어리라도 되는 듯 얘기를 하는구나." 버나드는 이를 악물었다. "그 여자 여기를 맛보고, 저기를 즐기고, 마치 양고기처럼 말이야. 그녀를 양고기 정도로 몰락시키다니. 그녀는 생각해보겠다고 하고는 이번 주일에 대답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오, 포드 님이여, 포드 님이여, 포드 님이여." 버나드는 그들에게로 달려가서 면상을 냅다 갈기고 또 후려갈겨주고 싶었다.
"그래요, 정말 그 여자 한번 먹어볼 만해요." 헨리 포스터가 말했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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