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정보 없이 『눈먼 암살자』를 읽고 싶다면 앞에서 뒤로 읽으면 된다. 1권을 읽고 나서 2권을 읽으면 된다.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면 책 뒷면의 소개가 딱이다.
20세기 초 캐나다의 명망 있는 가문에서 태어난 아이리스는 아버지가 도산 위기에 처하자 정략결혼을 통해 탈출구를 마련한다. 소녀는 여동생과 함께 남편의 집으로 들어가지만, 그곳에서 자매를 기다린 것은 타락한 욕망과 비극적인 운명의 예감이다. 병들고 쇠락한 아이리스의 노년과 과거 회상이 교차하는 가운데, 죽은 여동생의 이름으로 출간된 소설 <눈먼 암살자>가 곳곳에 삽입된다. 명망 있는 집안의 젊은 여인과 과격한 노동 운동가가 밀회를 즐기며 자이크론이라는 행성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이 소설은 점차 현실과 얽히며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책소개>
노년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비교적 젊은 지금 읽을 수 있어서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필립 로스가 그려내는 노년은 어디까지나 ‘선택한’ 삶이다. 일체의 사회활동을 중지하고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세상에 대한 모든 소식을 끊고, 오로지 읽고 쓰는 삶은 깊은 산 속 수도사의 삶을 연상시킨다. 『유령 퇴장』에서 네이션이, 나는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는다고 말할 때(13쪽), 나는 그런 삶을 원했다. 고독 그리고 고립.
마거릿 애트우드의 노년은 이와 다르다. 설정된 노년의 나이가 다르기 때문에 더 약해져 버린 육체를 가지고 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노년은 도움 받아야 하는 노년이다. 혼자 있을 때는 손가락으로 땅콩잼을 퍼먹고, 빨래감을 가지고 계단을 내려가다가 빨래통을 놓치는 삶. 좀 더 죽음에 가깝고 좀 더 무기력한 삶이다.
일상 생활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아이리스가 남아 있는 힘을 그러모아 하는 일은 글을 쓰는 일이다.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다. 왜, 그녀는 왜 이야기를 남기려 할까.
나는 누구를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가? 나 자신을 위해서? 그건 아니다. 나중에 이것을 읽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나중’이라는 시간 자체가 불확실한 상황이니까. 미래에, 내가 죽은 이후, 어떤 낯선 사람을 위하여 쓰는 것인가? 내겐 그런 야심, 그런 소망이 없다.
어쩌면 누군가를 위해 이것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눈 위에 자신의 이름을 갈겨 쓸 때처럼.
나는 예전처럼 민첩하지 못하다. 손가락은 뻣뻣하고 서투르며, 펜은 흔들리면서 두서없이 흘러가고, 글자를 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나는 달빛 아래서 바느질을 하는 것처럼 구부린 자세로 앉아서 계속해서 쓴다. (1권, 76쪽)
작가와 화자를 등치시키는 건 순진한 소설읽기법이겠지만, 나는 자꾸 아이리스와 마거릿 애트우드를 동일시한다. 그녀는 왜 쓰는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쓰는가. 전하려는 이야기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녀는, 우리는 왜 전하려 하는가. 무얼 말하고 싶은가.
두번째 이야기 액자 속의 연인은 두 사람의 관계가 탄로났을 때의 위험을 무릅쓰고 만남을 계속한다. 보고 싶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지만, 두 사람은 서로 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마주 선 그 사람을 보기 위해 여기에 왔다. 연락을 취하고, 만날 장소를 정하고, 그리고 그 장소로 간다. 그, 그녀를 만나기 위해. 보기 위해. 안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
<Friends>는 내가 좋아하는, 혹은 좋아했던 유일한 미드다. 시즈 9의 이야기다. 로스와 레이첼은 연인이었는데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던 중, 뜨거운 밤 아이를 갖게 되고, 아이를 키우는 동안 함께 살기로 한다. 한 집에 살고 있지만 둘 사이는 정리되지 않은 묘한 부분이 있었는데, 레이첼이 로스에게 아이를 맡기고 외출했던 밤, 바에서 레이첼의 번호를 받은 남자가 전화를 한다. 메시지를 남기겠다고 했지만, 서로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레이첼이 다른 남자를 찾고 있다고 생각한 로스는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에 다른 여자를 만나려고 노력한다. 로스가 데려온 여자 때문에 다툼이 생겼을 때, 레이첼에게 왔던 전화 메시지를 로스가 전하지 않았던 사실이 밝혀지고. 화가 난 레이첼이 말한다.
“Why didn’t I get the message?”
이 문단을 읽을 때, 레이첼의 이 말이 겹쳐졌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전보 다섯 통을 보냈대요. 당신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어요. 나는 말했다.
“메아 쿨파(‘나의 잘못’이라는 뜻의 라틴어). 말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당신의 걱정을 덜어 주고 싶었어, 여보. 그에 대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고, 장례식에 시간을 맞춰 돌아갈 길도 없었잖아. 그리고 당신을 위해 계획한 일이 어긋나는 것도 원하지 않았고. 내가 이기적인 탓도 있었지. 잠시만이라도 당신을 나 혼자 독점하고 싶었던 거야. 이제 앉아서 기운 내고 이걸 좀 마셔. 그리고 나를 용서해 줘. 아침이 되면 모든 일을 처리할 거야.” (2권, 55쪽)
참고로 레이첼은 로스와 대판 싸우고 조이의 집으로 이사한다. 그녀에게는 직업과 친구가 있었다.
가엾은 아이리스는…
‘걱정.’ ‘시간.’ ‘어긋나는.’ ‘이기적.’ ‘용서해 줘.’
거기에 대고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2권, 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