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누는 어린 시절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던 니노를, 중학교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던 니노를, 다른 사람의 시선에 개의치 않는 자유로운 옷차림의 니노를, 큰 키에 마른 몸의 니노를, 헝클어진 머리카락의 니노를, 가느다란 손가락의 니노를 사랑했다. 니노를 사랑했다.
여자친구가 있는데도, 입술에 키스하고, 손깍지를 끼며 호감을 표시하는 니노 때문에 레누는 여름 내내 설레이는데, 니노는 레누가 아닌 릴라와 사랑에 빠진다. 뜨거운 여름, 한껏 불붙은 사랑은 한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최악의 위험 속으로 두 사람을 밀어 넣고, 릴라는 현재의 안락함을 버리고 태양처럼 뜨거운 열정을 선택한다. 니노를 선택한다.
They had been living together for twenty-three days, a cloud in which the gods had hidden them so that they could enjoy each other without being disturbed. (360)
23일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23일이라면, 3주 보다 이틀이 많고, 한 달에서는 일주일이 부족하다. 과거와 미래를 모두 뒤로 하고, 현재만을 추구하고자 선택한 금지된 사랑은 각자의 여자친구와 남편을 떠나는 것으로 결실을 맺은 듯 했지만, 그 사랑은, 그 뜨겁고 행복한 사랑은 겨우 23일만에 그렇게 끝난다.
릴라가 사랑한 것이 니노의 젊음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릴라는 니노와 니노의 지성을 사랑했다. 니노만큼 니노의 글을 원했고, 니노에게 열망한 것처럼 그가 읽는 책들을 열망했다. 읽고 말하고 쓰고, 또 다시 읽고 말하고 쓰는 삶을 원했다. 니노와 그 일을 함께하길 원했고, 니노를 통해 그 일을 계속하길 원했다. 불쌍한 릴라가 몰랐던 건 니노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니노가 그들의 초라한 거처를 떠나던 그 밤의 말다툼에서도 니노의 그런 생각이 드러난다. 니노는 릴라가 자신의 생각을 망쳤다고 생각한다. 그녀 때문에, 그녀의 조언 때문에, 다시 써 보라는 그녀의 제안 때문에 자신의 작업이 방해 받았다고 생각한다.
내 관심은 니노가 아니다. 니노는 정말 릴라를 사랑했을까. 사랑한다 말했으면서 왜 그녀를 떠났을까. 싸우고 떠나서는 왜 돌아오지 않았을까. 니노는 왜 그랬을까. 이런 질문은 내 질문이 아니다. 이런 니노를 레누는 왜 사랑하는가. 니노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레누는 왜, 그를 사랑하는가. 내 질문은 이것 뿐이다.
니노의 외모에 대한 레누의 언급을 기억하면서, 이런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아름답다는 것은 곧 ‘성공하는 자식을 낳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어떤 여성이 한 남성을 보고 ‘와! 정말 잘생겼다!’라고 생각할 때, 그리고 암컷 공작이 수컷 공작을 보고 ‘어머! 꼬리가 너무 멋져!’라고 생각할 때, 그 여성과 암컷 공작은 자판기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남성 또는 수컷 공작의 몸에서 반사된 빛이 여성 또는 암컷 공작의 망막에 가닿을 때 수백만 년의 진화를 통해 연마된 초강력 알고리즘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 ‘십중팔구 이 수컷은 건강하고 생식력 있는 수컷이고 우수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이 수컷과 짝짓기를 한다면 내 자식도 우수한 유전자를 지닐 것이고 건강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론은 언어나 숫자로 표현되지 않고, 강한 성적 끌림으로 표현된다. 암컷 공작들 그리고 대부분의 여성들은 펜과 종이를 놓고 이런 확률을 계산하지 않는다. 단지 느낄 뿐이다. (126쪽)
실비아가 낳은 니노의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니노의 아이들을 만났을 때, 레누는 니노의 아이, 니노의 자식에 대해 묘한 감정을 느낀다. 어쩌면 레누는 정말 니노의 아이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바로 그 이유 너머로, 레누는 니노의 아이, 니노를 닮은 아이를 자신이 낳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어쩌면 레누는 니노의 지성을 사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출판기념회에서 곤란에 빠진 자신을 도와준 그 니노를, 레누는 사랑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 크고, 더 위대한, 더 중요한 일들을, 그렇게 믿겨지는 일들을 말하는 니노. 논리 정연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니노. 레누는 니노의 그런 면에 반했는지도 모른다. 레누를 빼앗기 위해 아이들 앞에서 레누의 남편을 놀리고, 골리고, 심지어 냉담한 언사를 퍼붓는 니노를 보며, 레누는 나폴리 시골 마을에서 자신과 함께 자란 니노가 이탈리아 명문가의 아들에게서 거두는 승리를 통쾌하게 생각한다. 레누는 똑똑한 니노, 명석한 니노를 사랑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궁금한 것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됐음에도 니노를 계속 원하는 레누의 마음이다. 니노는 금방 식어버리는 열정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이고,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선택한 여자에게 무책임한 사람이고, 사랑하는 여자와의 관계에서 잉태된 아이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사랑하는 레누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가끔 감정은 판단을 넘어선다. 레누는 마음이 원하는 것, 진심이 원하는 것을 선택한다. 그녀는 니노를 사랑한다.
나는, 레누가 자신과 니노와의 사랑은 릴라와 니노와의 사랑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을 거라 추측한다. 니노와 릴라의 사랑이 서로의 육체적 아름다움에 이끌린 열정에 근거한 사랑이었다면, 니노와 자신의 사랑은 서로의 지적 매력에 고무된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랑이라고 믿었을거라 생각한다. 자신의 사랑은 세상의 것과는 전혀 다른 종, 완전하고 진실한 사랑이라고 믿었을거라 예상한다.
왜 레누는 니노를 사랑하는가.
열정적인 구애를 했던 마르첼로, 남편 스테파노, 애인 니노, 집착남 미켈레를 뒤로 하고 순박한 엔초와 정착한 후 릴라는 오히려 사랑에 초연한 자세를 취한다. 이 세상 어떤 남자도 믿지 못하게 되었고, 이 세상 어떤 남자와도 사랑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레누는 달랐다. 레누는 남자친구 안토니오, 애인 프랑코, 남편 피에트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남자들과 연인으로 지냈다. 하지만, 그녀는 한결같이 니노를 사랑했다. 니노를 원했고, 니노를 원했다.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릴라와 사랑에 빠진, 다른 여자를 임신시키는 니노를, 레누는 변함없이 사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얻었다.
서글픈 내 사랑에는 업그레이드가 없었다. 사건사고가 없었다. 내 사랑에는 과거, 과거 진행, 대과거, 과거 완료 진행만 존재했다. 기억만으로 만들어진 사랑이었다. 만남 없는 연애였고, 연애 없는 사랑이었다. 아무 일이 없는데도 ‘사랑에 빠진’ 나에게는 ‘사랑의 사건’이 존재했고, 그건 한결같이 내 사랑의 여정에 중요한 일정이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 남자가 아니라, 사랑하고 있는 내 자신 혹은 사랑의 감정 그 자체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 사랑이 현실화된 대상은 그 사람이었다. 나는 한결같이 그를 사랑했고 또 그를 원했다.
밀어내고 도려내도 매일 새롭게 돋아나는 사랑의 새 살 때문에 나는 자주, 절망에 빠졌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 사람은 오히려 매일 아침, 내게 새로운 사랑을 만들어갈 힘을 공급해 주었다. 사랑은 그렇게 내 안에서 싹트고 자라나 새로운 모습으로 만들어져 갔다. 사랑은 나를 압도했다. 그의 존재가 내 사랑의 시작이었고, 사랑을 이어갈 힘이 되었고, 그리고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무거운 그물이 되었다. 나는 그를 사랑했는데, 그 사랑의 이유를 나는 단 한 가지도 찾을 수가 없었다. 레누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나는 왜, 너를
너, 니노를 사랑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