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놀랍다. 올해 읽은 책 중에 최고(는 페란테 시리즈)라고는 못하겠지만, 올해의 베스트 5 안에 당당히 속하고도 남는다. 저자는 이현. 어린이문학 작가이다. 제10회 전태일 문학상, 제13회 창비좋은어린이책 공모 대상, 제2회 창원아동문학상 등을 받았다. 초등학교 1,2학년 필독서인 『짜장면 불어요!』를 비롯해 그녀의 작품들은 아래와 같다.
<짜장면 불어요!>, <로봇의 별>, <악당의 무게>,
<푸른사자 와니니>, <플레이 볼>, <일곱 개의 화살>
책을 펼 때, 독자는 일정한 기대감을 가진다. 이 책은 무엇에 대한 책이겠거니 하는 예상 말이다. 이 책의 제목은 『동화 쓰는 법』이고 작가는 『짜장면 불어요!』의 저자인 어린이동화 작가다. 책 내용의 68.7% 예상 가능하다. 하지만, 한 장, 두 장, 그렇게 세 장을 넘기다 보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먼저, 이 책은 어린이책 안내서이다. (적어도 여기까지는 예상 범위 이내다.) ‘이야기’라는 공통점을 뒤로 하고, 어린이문학과 소설이 기본적으로 다른 지점에 대해 설명하는데, 나로서는 처음 듣는 해석이었다. 놀랍고 신기했다.
동화는 어린이를 위한, 그러니까 ‘수신’의 장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다. ‘너에게 전하는’ 이야기다.
소설은 동화와 다르다. 소설은 수신이 아닌 발신의 장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물론 소설가도 독자를 의식하겠지만 그건 현상일 뿐, 소설의 본질은 전달이 아닌 ‘표현’이다. (26쪽)
저자에 따르면, 동화는 ‘어린이가 읽는 이야기’이고, 소설은 ‘어른이 읽는 이야기’라는 내 이해는 틀렸다. 동화는 ‘어린이에게 전해지는’ 이야기고, 소설은 내가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다. 놀람의 시간 20초. 그래, 이 책은 정말 동화의, 동화에 의한, 동화를 위한 책인가 보다 감탄하는 순간, 이런 구절을 만나게 된다. 어머나, 이 책은 페미니즘 도서가 분명하다.
많은 동화에서 기껏 학원 다니느라 지친 얘기만 백만 번 되풀이하며 엄마를 비하하는 한편, (아빠가 아닌) 아버지는 대단한 권위를 가진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과묵하고 엄하지만 지혜롭고 올곧은 아버지, 아니 가부장. … 동화 속에서는 부부 사이에 남편은 반말, 아내는 높임말을 쓰고는 한다. 현실에서는 동등한 말투를 쓰는 부부가 많을 텐데 말이다. (63쪽)
감탄도 잠시, 책을 읽던 사람은 금방 자기 생각을 고쳐 먹게 된다. 이런 구절 때문이다.
아이는 부모를 부정하고 극복하면서 자란다. 햇빛을 향해 자라나는 덩굴처럼, 자식은 안간힘을 다해 부모의 그늘과 반대 방향으로 자란다. 그래야 억세고 푸른 줄기로 자라날 것이다. 부모의 마음은 쓸쓸하지만, 이는 축하할 일이다. 아이는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64쪽)
이 책은 육아서다. 아이가 건강한 어른으로 자라는데 부모가 해야할 일, 부모가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 이렇게 핵심을 찔러주는 이 책이 육아서가 아니라면 대체 어떤 책이 육아서란 말인가.
감동과 찬탄은 쉼 없이 계속된다. 어쩌면 이 놀라운 작품의 놀라운 여정은 목차에서 예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스토리와 플롯
탈탈 털면 나오는 것들: 설정
전망 좋은 그 자리: 절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말
특히 마음에 드는 부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결말>에 대한 설명이다. 먼저 고백하자면, 내가 사랑하는 그림책, 어린이 책은 이런 류다.
<꼬마 곰>, <구름빵>, <줄줄이 꿴 호랑이>
나도 어린이책 좀 읽어본 사람으로서, 아니 정확히 말해야겠다. 그림책 좀 읽어본 사람으로서, 나는 그림책, 어린이 책의 ‘교훈 주기’에 지쳤다. 행동 수정이나 사회 속에서 필요한 예절을 가르치기 위한 ‘책’을 우리가 사랑하는, 내가 사랑하는 ‘그 책들’과 똑같이 ‘책’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는지 모르겠다. 그런 책의 효용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뽀로로가 친구들과 사이 좋게 지내는 모습은, 먼저 사과하는 모습은,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은 예쁘다. 귀엽다. 하지만, 그런 책으로 가득 찬 세계라면, 아이들에게 세상은 얼마나 반듯할 것인가. 얼마나 딱딱할 것인가. 얼마나 재미없을 것인가. 그래서 나는 동의한다. 문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영역이라는 것을.
그렇다고 삶이 한없이 불행한가? 그렇지는 않다. 걱정이 있고 아쉬움이 있지만, 괜찮다. 내일이 오는 게 싫지 않다. 여태 그렇게 당하고도, 내일은 조금 나을지 모른다는 기대도 없지 않다. 정말 괜찮다. … 언제나 그런 건 아니다. 눈앞이 깜깜하고 사방이 절벽인 때도 있다.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날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그것에 관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나는, 우리는. (123쪽)
이 책의 유머코드는 나에게 완전맞춤인데, 나는 작가의 이 (속마음 토크)가 너무 좋다.
어린이 독자에 대한 존중감이 없다면, 부디 딴 일을 알아보면 좋겠다. 이 분야는 딱히 돈도 안 되고(진심입니다), 이름나기도 어렵고(진심이라니까요), 다만 어린이 독자가 이야기를 들어 준다는 커다란 기쁨이 있을 뿐이니. (32쪽)
아무도 모르는 무명의 습작생이 피를 토하며 글을 쓰다가(반대합니다) 천 일 동안 밤마다 북한산 계곡에서 목욕재계하고(불법입니다) 정상에 올라 천지신명께 기도하여(응원합니다) 마침내 걸작을 써내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면서, 세상이 나머지 우리를 보고 혀를 찬다면? (53쪽)
이현 작가의 다른 책들을 비롯해 그가 추천하는 책들은 모두 읽고 싶지만, 일단 몇 권만 정리해본다. 시간은 없고, 읽을 책은 많다.
유유출판사 책 세권을 나란히 세워두고 기념촬영을 하는데, 문득 이 출판사의 책들은 나에게 큰 깨달음과 기쁨과 가르침을 주었다는데 생각이 머문다. 하여, 이 즐거운 독서 여행은 또 다른 구매를 호출하고, 나는 즐겁게 이에 응답한다. 계산 들어간다. 유유출판사 고전강의 시리즈(총10권) 10년 대여가 39,900원. 50% 쿠폰 적용가 19,950원.
가자, 가자, 어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