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은 까맣게 깊고 밤은 길고 긴데 어디를 못 간다. 이제는 구시대라 불리는 시대의 향수를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시대를 보여주고 싶어서 아롱이와 함께 <응답하라 1988>을 보자고 했다. 식구 네 명인데, 응팔 본 사람 한 명도 없는 집이어서, 바쁜 사람 그냥 두고 한가한 사람 셋이 모여 저녁마다 사이좋게 응팔을 본다. M1은 자전거를 타면서 보는데, 아는 노래 나와서 흥얼거리는 건 다반사고 정환이 아빠 이상한 유머에도 파안대소해서, 옆에 앉은 아롱이를 툭툭 치며 굳이 말한다. "저거 봐, 아롱아! 너희 아빠 보는 게 저거보다 훨씬 더 재미있다!"




그저께 에피에서는 보라가 시위하는 장면이 나왔다.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던 성보라가 서울대에 입학했는데, 당시 대부분의 대학생답게 시위에 참여하게 되고. 공부한다고 일찍 집을 나섰던 보라가 학교 옥상에서 투쟁하고 있는 장면이 텔레비전에 잡힌다. 계속 최루탄 냄새에 절여져 집으로 돌아오는 보라. 보라의 아버지 성동일이 폭발해서 보라를 다그치는데, 보라는 아빠가 원하는 그 답을 하지 않는다.




민족을 위하고, 나라를 위한 그 모든 갸륵한 대의를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고, 항상 그 대의가 옳은 것만도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의에 침묵하고, 모른 척했을 때, 대학생들은 군사 독재에 맞서 싸웠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과 협박, 살해 위협, 그리고 앞날에 대한 불안감은 그 어느 것 하나도 가볍지 않다. 변절한 것이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변절하지 않기가 너무나 어려웠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다.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그 무엇을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그 마음 말이다.

보라와 성동일의 피 튀기는 싸움 장면은 그러한 대의와 정의를 쫓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 중의 하나다. 그 장면이 뭉클했던 건, 뭐랄까. 내가 부모여서 그랬던 것 같다. 내내 자랑스러운 내 딸, 어디에 내놓아도 뿌듯한 예쁜 내 딸이, 나라에서 막고 있는 그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그걸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 같은 것.

하지만, 보라 역시 힘들지 않았을까. 부모를 거스르는 보라의 마음도 어렵지 않았을까. 나를 미워하고, 나를 음해하고, 나를 오해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무시하면 된다. 그 사람은 내게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다. 나는 그 사람 없이,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부모를. 나를 사랑하는, 나를 아껴주는, 나를 소중히 여기는 이 사람의 요청을 뿌리치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기대를 거스르는 이 마음을. 사랑하지만,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그렇게 해줄 수 없는 이 마음. 그냥 그런 마음들이 느껴졌다.










이런 생각이 들었던 건, 역시나 읽고 있는 책 때문인데, 그 책이란 바로 이 책.

다만 여러 면에서 내가 별 부담이 없었어요. 일단 아버지가 방향을 잡아 주신 거니까 부모님 반대를 걱정 안 해도 되고. 셋째 아들이니까 집안에 대한 경제적인 부담감이나 책임감도 거의 없었어요.

그때 이미 큰누나는 결혼을 했고, 작은 누나는 통계청에 다니고 있었거든. 나는 이모 댁에서 먹고 자면서 과외비는 또 따로 받았으니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안정되었지. 그래서 마음 놓고 서클 활동을 하기 시작한 거예요. 오로지 유신을 반대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할까. 유신을 빨리 종식시켜야 한다. 그런 생각이 꽉 차 있던 상태였지. (63쪽)

보라와는 전혀 다른 환경이었던 이해찬 대표의 회고록을 읽고 있다. 2022년이 초판 1쇄이고, 내 책은 2026년 초판 9쇄다. 중요한 이야기, 들어야 하는 이야기를 이제서야 듣는다.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과 태생적 조건(3남), 물질적 조건(경제적 여유)이 어우러져 청년 이해찬은 온 힘을 다해 독재 투쟁과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애쓴다. 그런 생각으로 꽉 차있고, 오직 그 목표를 위해 살아가며, 그 일을 자신의 업으로 삼는다.

그걸 읽고 있다. 낮에는 해찬들, 밤에는 성보라.

보라와 선우. 보라와 선우와 덕선이. 보라와 선우와 덕선이와 희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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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6-02-13 0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 님의 보라에 대한 이해가 절절하게 와닿습니다. 그렇죠. 이게 옳아서 이걸 행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반하는 일이라는 것. 그런 일은 슬프게도 가끔 일어나지요.

(응팔 아직도 안 본 사람 접니다.)

단발머리 2026-02-14 13:17   좋아요 0 | URL
그래도 저는 자신이 먼저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단 자신이 먼저여야....한다고요. 슬픈 일이라는 걸 알아도 말이지요.

(응팔 안 본 사람 일단 1명 접수했고요^^)

꼬마요정 2026-02-13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응팔 재밌게 봤더랬죠. 아무래도 마지막에 제가 응원한 남편이 딴 사람이어서 흥이 좀 식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오히려 그 결말이 더 좋았다 싶기도 했습니다. 아앗, 이것은 제가 스포를 한 것일까요? 제가 누구를 응원했는지 모르시니 괜찮겠지요?^^;;

보라와 해찬들... 같은 시대 민주화를 외치던 사람들인데 상황이 너무 다르네요. 자기가 옳다고 믿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던 이해찬은 부럽군요. 응팔에서 아버지의 마음도, 보라의 마음도 다 이해가 되니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해찬들은 진짜 입에 딱 붙지 않나요? 정치인 별명 중에 해찬들과 피닉제가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단발머리 2026-02-14 13:20   좋아요 1 | URL
저는 이미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꼬마요정님! 또한 꼬마요정님이 응원한 남편이 누구인지도 추측가능한 ㅋㅋㅋㅋㅋㅋㅋ저는 참고로 가감 없는 직진을 더 응원하기는 했습니다.

이해찬 대표는 운동을 계속하면서 가족들의 지원을 많이 받습니다. 영치금으로 사식 사먹는 건 기본이고요. 교도소 내 식단 문제도 해결하시는데, 자신의 돈으로 주위 재소자들 먹을 것을 많이 사주시다 보니 인기가 많으셨고, 자연스레 방장이 되셨다는...

저는 해찬들은 알고 있었는데 ㅋㅋㅋㅋㅋㅋ피닉제 오늘 들었어요. 저는 한국어 버전, 불사조만 알고 있었거든요. 피닉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레이스 2026-02-13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대사관 점거 였을까요?
저 화면이?

이 해찬을 왜곡 폄훼한 기사들도 많았죠? 아마!
네명의 대통령과 함께 한 그의 삶과 죽음이 묵직한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데모 안하고 왜 내려왔냐고 했던 부친의 일화! 놀랍습니다.

단발머리 2026-02-14 13:25   좋아요 0 | URL
저 장면을 보고 그런 이야기가 많았더라고 하네요. 근데 저 장면이 그 사건을 재현한 건 아니라고 하고요.

이해찬 대표의 삶 자체가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과 완전히 겹쳐져서 옛날 이야기 듣는 것처럼 몰입해서 읽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집에 다 가면 나라는 어쩌냐는 이해찬 대표의 아버님, 정말 대단하시죠. 생각하고 한 번 더 생각해봐도 그렇습니다.

독서괭 2026-02-13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응팔! 남편과 함께 열심히 본 몇 안되는 드라마 중 하나입니다 ㅎㅎ 응칠도 재밌었지만 응팔이 조금더 재밌었던 것 같아요.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도 그렇고, 거대한 권력에 맞서 싸운다는 건 너무 힘들죠.. 아이들 낳으니 성동일 마음이 더 이해가 되네요 ㅠㅠ

단발머리 2026-02-14 13:27   좋아요 1 | URL
열심히 보셨다니 반갑습니다. 저 이제 10화 봤고, 10화 남았습니다. 하루에 1화씩 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응칠은 클립으로 좀 봤는데, 저도 응팔이 더 재미있고요.

독립 운동가들, 민주화 투사이신 분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본인도 그렇겠지만, 그런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란 건...
말로 다 할 수가 없더라구요 ㅠㅠㅠ

책읽는나무 2026-02-23 0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해찬 대표님 장례식 기사가 떠올라 또 좀 먹먹하네요.ㅜ.ㅜ
나라를 생각하시던 분들이 이렇게 한 분 한 분 다 떠나가시나? 그런 생각이 많이 드네요.
회고록을 읽으면 더 마음이 아플 듯 한데 그래도 읽고 계신 단발 님이 존경스럽네요.^^

응팔은 제겐 좀 아픈 드라마였어요. 방영당시 엄마가 돌아가신지가 얼마 안 되었던 때였는데…그 드라마를 꼭꼭 챙겨보면서 좀 많이 울었던 드라마였죠. 응팔 시절이면 저는 중학시절이었는데 그땐 젊은 엄마도 있었고 젊은 아빠도 있었고..거기에 꽂혀서 봤던 것 같아요. 물론 향수에 젖어 엄청 웃기도 많이 했었지만요.^^
어남준?과 어남택? 맞나 모르겠네요. 저는 그때 어남준이었어서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좀 흥분했었던 기억이.ㅋㅋㅋ (박보검 군. 미안해) 보라를 생각하면 저는 그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던데 학생 운동에 참여해 도망 다니던 보라가 비 오던 늦은 밤…결국 경찰에게 붙잡혔던가요? 암튼 비 맞으며 이일화 엄마가 울면서 보라를 안아주며 마음 아파하던 모습이 좀 강렬하게 기억에 남네요.
그래서인지 그후에도 류혜영은 굳건하고 강인한 이미지의 보라로 계속 바라봐지게 되고, 이일화는 덕선이의 엄마보다도 보라의 엄마로 뇌리에 꽂혔어요. 똑똑하고 신념이 강한 딸을 뒷바라지해주는 엄마로 말이죠.
엄마 셋 중 이일화 엄마가 가장 우리네 엄마가 아녔을까? 싶은 마음이 드네요.
최근 선우 동생 역으로 나왔던 아역 배우의 성장한 버전 보셨나요?
와…알고보니 영재였더군요.ㅋㅋㅋ

단발머리 2026-02-27 18:38   좋아요 1 | URL
응팔과 어머님 이야기 너무 뭉클하네요. 젊은 엄마와 젊은 아빠를 보는 그 시간들도 그랬을것 같고요. 저는 사실, 아이들이 이렇게 자랐어도 엄마의 위치 보다는 자식의 위치가 더 가깝게 느껴지거든요. 응팔 보면 그런 마음이 드니깐 책나무님도 그러셨을 거 같아요.

저는 방영 당시에 이 드라마를 보지 않았었는데, 주위에서 모두 남편이 류준열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드라마를 보고 있던 친한 언니에게 ˝언니, 사람들이 남편 류준열이라고 그래요.˝ 그랬는데, 그 언니가 아니라고. 남편은 박보검이라고. 하시면서 조목조목 이야기를 해주시는 거예요. 저는 사람들이 하도 류준열이 남편이라 해서 그 말만 믿고 속으로 ‘어쩌나.... 우리 언니가 이렇게 굳게 믿고 계시네‘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나중에 결과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언니의 말이 맞았던 겁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주가 진짜 많이 컸더라구요. 매회 때마다 먹는 장면 나와서 너무 귀여운 아기였는데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