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식 자취 요리 : 모쪼록 최선이었으면 하는 마음 띵 시리즈 4
이재호 지음 / 세미콜론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에 나를 위해 정성껏 요리한 게 언제였더라두 달 전 유튜브에서 쉽게 만드는 맛있는 두부조림’ 영상을 따라 두부조림을 만들었다간도 제대로 못 맞추고 태워버려 싱겁고 들척지근하고 탄 맛이 나는 실패작을 남겼다다음 날에는 유튜브에서 본 영상대로 우유 푸딩을 만들다뜨겁게 달궈진 유리 냄비 뚜껑을 찬 물이 담긴 설거지통에 넣는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결국 냄비 뚜껑은 산산조각이 났고바닥에 떨어진 미세한 유리 조각에 엄마가 발을 찔리는 불상사가 일어났다엄마의 집밥에 의존해 살면서 가끔씩 새로운 요리에 마구잡이로 도전하니 열에 일고여덟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이렇게 자취와도 요리와도 동떨어진 채로 사는 내게 프랑스식 자취 요리의 저자는 대단하고 신기한 사람이다프렌치 레스토랑에 갔다 낯설고 어려운 프랑스 요리에 주눅이 든 뒤프랑스 요리를 정복하고 싶어 프랑스 요리학교까지 졸업했다니그것도 의대를 다니다가 갑자기다시 의대 공부를 시작하고 나서도 여유가 있을 때는 레스토랑 셰프로 일한다고 하니한번 마음을 먹으면 끝장을 보는 사람이구나 싶다의대 공부에 집안일까지 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이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장을 봐서 재료를 다듬고근사한 프랑스 요리를 만들어 잘 차려 먹는다보통 성실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 성실함이 글에서도 드러난다유려하거나 작가만의 개성이나 참신한 표현이 돋보이는 글은 아니지만하루하루 자신이 하는 일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쓴 성실한 글자신이 왜 손수 정성스럽게 밥을 지어 먹는지어떻게 식재료를 구하고 다듬어 요리 준비를 하는지어떻게 요리를 하고 그 맛은 어떤지 차근차근 이야기해 나간다이 책을 읽으면서 식재료를 효율적으로 보관하는 방법과 좋은 사육 환경에서 생산된 계란을 고르는 방법스테이크를 맛있게 굽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정도로 작가의 설명은 자세하고 친절하다음식 이야기뿐 아니라 그에 얽힌 삶의 이야기도 펜으로 또박또박 적어 내려가듯 솔직하고 차분하게 풀어나간다의대생에서 요리학교 학생으로다시 의대생으로 삶의 방향을 바꿔 오면서 배우고 경험하고 느낀 것들지금도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요리하면서 느끼는 것들을 듣다 보면 그가 늘 모쪼록 최선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하다가 어느 샌가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 이제 좀 대충 해도 되겠지하고 풀어져 버리는 내게이 책은 자극이 된다처음에 열정을 모두 쏟아놓기보다는 꾸준히 최선을 다하겠다고프랑스 요리는커녕 간단한 반찬도 망쳐버리는 나지만나를 잘 먹이기 위해 계속 도전하겠다고 다짐하게 된다내가 어쩔 수 없는 것들이 내 삶을 종종 뒤흔들지만내가 어쩔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존속 살해범의 편지 - 그리고 그 밖의 짧은 글들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유예진 옮김 / 현암사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홍차에 적신 마들렌. 그 마들렌을 입 안에 넣는 순간 살아나는 기억들.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과거로의 여정을 시작하는 이 장면에 대해 수없이 들어왔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커녕 프루스트의 글 한 줄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보고 싶긴 한데 그 전에 프루스트의 짧은 산문들을 모은 이 책으로 가볍게 몸을 풀어보는 게 좋겠다 싶었다. 프루스트는 이 책에서 "한 작가의 책을 한 권만 읽는 것은 그를 단 한 번 만나는 것과 같다."(p. 66.)고 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이 책으로 그를 처음 만나는 셈이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사람을 계속 만날지 말지 결정하게 되는 것처럼, 나와 프루스트의 만남이 계속 이어질지는 이 책이 결정할 터였다.


  내가 이 책에서 만난 프루스트는 엉뚱하지만 섬세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당대 최고의 평론가였던 생트뵈브의 문학 이론을 반박하는 비평서 『생트뵈브에 반박하여』서문에서는 뜬금없이 어린 시절 여름을 보냈던 할아버지 댁에서의 기억들을 풀어놓고, 친구 자크에밀 블랑슈의 저서 『화가의 이야기』서문에서는 외종조부 댁에서의 추억과 친구들 앞에서 자신이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것을 숨겼던 옛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생트뵈브의 문학 이론이 왜 비판을 받아야 하는지, 블랑슈의 문학과 미술 세계는 어떤지 알고 싶었던 독자들로서는 당황스럽겠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기억의 단편들이 얼마나 생동감 있게 반짝이는지 그의 기억 속에 함께 잠기게 된다. 할아버지 댁 요리사가 가져다 준 빵을 차에 적셔 한 입 베어 문 순간, "입 안에 퍼지던 차의 향과 한결 더 부드러워진 빵의 감촉, 제라늄과 오렌지나무 향"(p. 128.)이 읽고 있는 내 입 안에서도 퍼져 나가는 것 같고, 외종조부 댁 부엌에 놓인 크리스털 식칼 받침대에서 반사된 무지갯빛과 그뤼에르 치즈, 살구가 내뿜은 향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신비로운 분위기가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늘 자신의 모든 감각을 열어놓고 그 감각에 새겨진 것들을 언제라도 바로 지금 겪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되살려 낼 수 있으며, 글을 통해 그것을 다른 사람들까지 느낄 수 있게 하는 사람이다. 귀족 부인의 무도회에 초대받아 잘 차려입고 가다가 자신이 부잣집 자제인 것을 모르는 친구와 마주쳐 진땀을 뺐던 일은 유쾌한 필치로 그려지고 있다. 그의 유머 감각은 이 부분뿐만 아니라 책 곳곳에서 튀어나와 읽는 사람을 슬며시 미소 짓게 만든다.


  그는 차창 밖으로 지나쳐 가는 시골집들과 그 집들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를 보고서도 이런 따뜻한 글을 쓴다. "배나무에 기대어 있는 어떤 집들은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 나무에 의지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예전처럼 자신들이 배나무를 보호해 주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 집들은 배나무의 가지들이 한없이 여리고 열정으로 가득했던 때를 떠올리며 먹먹해진 가슴에 그것을 꼭 안고 있었다."(p. 113.)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는 무생물인 낡은 시골집과 어떤 감정 표현도 할 수 없는 배나무에서 가슴 뭉클한 감정을 이끌어낸다. 그 뒤에 이어진 세 종탑 이야기도 정겹다. 길을 가면서 보였다 안 보였다, 커졌다 작아졌다, 서로 뒤서거니 앞서거니 하는 세 개의 종탑들은 그저 오래전에 세워진 낡은 건물이 아니라 먼 길을 여행해 온 프루스트에게 손짓을 하는 정겨운 존재들이다. 그는 보고 듣고 경험하는 어떤 것도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무언가를 느끼며, 그것을 맑은 서정으로 그려낸다.


  남들이 포착하지 못하는 것을 포착하는 예민한 성정 때문인지, 미술과 문학 평론에서는 그만의 독특한 안목과 뚜렷한 주관을 드러낸다. 영국의 저명한 예술평론가 존 러스킨 전문가로 이름났던 그는, 러스킨의 예술 평론을 사랑하지만 그가 겉으로는 교훈적인 메시지를 강조하면서도 사실은 미술 작품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있다는 것을 꿰뚫어 본다. 러스킨은 프랑스 아미앵의 중세 성당들에 관해 쓴 책 『아미앵의 성서』에서 자신이 글로 묘사하는 성당의 부분들을 그대로 담은 사진이 아니라 보다 암시적이고 글로 묘사된 것과는 관계가 먼 사진을 선택했다는데, 나라면 그의 이런 불친절한 글과 그림의 배치를 비판했을 것이다. 하지만 프루스트는 러스킨의 엉뚱한 도판 배치에서 그의 정신 세계 속 독창성과 유머 감각을 발견한다. 접속사 '그리고'를 남들이 쓸 법한 곳에 쓰지 않고 남들이 쓰지 않는 곳에 쓰는 플로베르의 문체의 특징에서는 그만의 문법적 독창성을 발견한다. 친구 블랑슈가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에는 살롱 여주인들이 고상한 말투로 그의 작품을 무시하다, 그의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은 이후로는 그 고상한 말투로 '예전부터 이 그림을 좋아했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신랄한 유머 감각이 드러난다. 그가 어찌나 가차 없고 신랄하게 비판하거나 풍자하는지, 내가 당대의 작가나 화가였다면 그와 친구나 지인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그 두 가지 경우가 아니라면 프루스트는 참 사랑스러운 친구나 지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앞으로도 프루스트를 계속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짧은 글과 장편소설은 호흡이 다르겠지만 그는 여전히 프루스트고 사랑스러움과 섬세함도 여전할 것이다. 좋은 만남이 되는 데는 분위기도 한몫하는데, 이 책의 편집과 디자인은 프루스트의 글 특유의 섬세한 분위기에 잘 어울린다. 하늘색 바탕에 푸른색 줄무늬가 그려진 표지와 그 표지에 그려진, 회중시계 위에 앉아 차를 마시는 신사를 그린 일러스트(현대 한국인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린 것인데도 프루스트가 살던 당시 어느 소설이나 신문에 실렸을 법한 그림체다), 살구색 속표지와 그 위에 얹은 프루스트의 흑백 사진들까지. 마침표와 말줄임표에 쓰인 점들까지 다이아몬드 모양이다. 이 책의 내용 중 러스킨 관련 평론들이 조금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평론들도 곱씹어서 찬찬히 읽어 보면 프루스트만의 서정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프루스트와의 기분 좋은 첫 만남이다.


P.S. 이 책에 실린 글 「프루스트에 의한 프루스트」는 스무 살 무렵의 프루스트가 다양한 개인적인 질문들에 짤막하게 답변한 글이다. 프랑스의 TV 문학 대담 프로그램 <아포스트로피>에서는 진행자가 방송 끝에 초대 작가에게 이 글의 문항들로 질문하면서 이 '프루스트 설문지'가 더 유명해졌다. 이 질문은 각 작가의 취향과 개성, 고민, 가치관들을 즉흥적이면서 자유롭게 드러내는 방식이다. 나도 해보았는데 개인적인 글이라 숨은 글 기능으로 숨겨 놓았다. 질문들이 궁금하면 열어보시고, 그에 대한 프루스트의 답이 궁금하면 책을 읽어보시길.


*모바일, 앱에서는 숨은 글 기능이 적용되지 않으니 서평만 읽고 싶다면 여기까지만 읽으면 됩니다.


접힌 부분 펼치기 ▼ 블로거 B가 말하는 블로거 B

 내 성격의 주요 특징: 호불호가 심히 뚜렷함. 한 번 마음을 연 사람에게는 충실하지만 한 번 마음을 닫은 사람에게는 쉽게 다시 마음을 열지 않음.


남성에게 바라는 자질: 여성을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 있는 지성과 이성, 감성


여성에게 바라는 자질: 남들이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길을 가는 뚝심


친구들에게서 가장 좋아하는 점: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질 만큼 힘이 되어주는 것


주요 단점: 디테일에 너무 집착함, 좋아하는 일을 하다 꼭 해야 할 일을 못할 때가 있음


가장 좋아하는 활동: 책이나 영화에서 본 이야기를 갖고 또 다른 이야기 상상하기


행복이란: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


가장 큰 불행은 무엇일까: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사는 것


되고자 하는 것: 좋은 책을 만드는 편집자


살고 싶은 국가: 모두가 자기 성별이나 인종, 성적 지향 때문에 불안해하거나 차별당하지 않고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


좋아하는 색: 하얀색, 하늘색, 남색, 파란색, 하얀색과 파란색 계통 색의 조합


좋아하는 꽃: 벚꽃, 주황색 나리, 장미


좋아하는 새: 제비(프루스트와 같음)


좋아하는 산문 작가: 피천득, 레프 톨스토이, 스콧 피츠제럴드, 박상영


좋아하는 시인: 백석, 윤동주, 정호승


좋아하는 픽션 남주인공: 피에르 베주호프(레프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좋아하는 픽션 여주인공: 최서희(박경리,『토지』)


좋아하는 작곡가: 장범준, 브람스


좋아하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앙리 마티스, 마르크 샤갈, 요하네스 판 페르메이르


실제 삶에서 존경하는 영웅: 위근우 기자


역사 속에서 존경하는 여자 영웅: 로자 파크스, 가네코 후미코


무엇보다 가장 싫어하는 것: 층간소음, 더러운 화장실(둘 중 어느 게 더 싫은지 고를 수 없음)


가장 혐오하는 역사적 사건: 난징 대학살


가장 좋아하는 군사적 사건: 말 안 듣는 교회 후배 놈들 입대함(아쉽게도 지금은 다 제대함)


내게 있었으면 하는 능력: 외국어 능력,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를 다 잘하고 싶고 가능하면 아랍어랑 힌디어도 하고 싶음,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


어떻게 죽었으면 하는가: 침대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현재 나의 정신 상태: 할 일이 너무 없어 무기력한 상태


가장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잘못: 몰라서 저지른 잘못


나의 모토: 내 페이스를 잃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자

펼친 부분 접기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딩 2021-11-07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바스티안 2021-11-07 13:35   좋아요 1 | URL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음식의 언어 - 국어학자가 차려낸 밥상 인문학 음식의 언어
한성우 지음 / 어크로스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음식을 가리키는 말들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음식 자체와 음식을 둘러싼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중간중간에 저자 자신의 경험들을 이야기하며 우리 음식의 언어를 쉽고 재미있게 설명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만의 집
사샤 나스피니 지음, 최정윤 옮김 / 민음사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숨은 글에 이 작품과 『백 년 동안의 고독』스포일러 포함, 모바일 버전과 앱에서는 숨은 글 기능이 포함되지 않으니 스포일러를 피하시려면 스포일러 표시 부분 아래를 읽지 않으시면 됩니다.


  입구는 있어도 출구는 없는, 고요하면서도 뭔지 모를 불안이 느껴지는 외딴 마을 레 카세. 이곳을 배경으로 배신, 도피, 실종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소개 글을 보고 알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이 일어나는 섬뜩한 이야기를 기대했다. "이 마을이 괴물이라는 생각이 마음에 드네. 그런데 마을이 주민들을 잡아먹는다고?" 뒤 표지에 적힌 이 대사를 보고 그런 기대가 더 커졌고. 불길한 분위기가 감도는 폐쇄적인 마을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를 다룬 고딕 소설(중세의 고딕 양식으로 된 저택을 배경으로 유령, 살인 등 기괴한 사건이 벌어지는 소설을 뜻했지만, 오늘날에는 그 뜻의 범위가 넓어져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거나 인간의 이상 심리 상태를 다룬 소설까지 포함하게 되었다.)이거나, 『백 년 동안의 고독』처럼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상처럼 일어나는 마을을 그린 마술적 리얼리즘 소설일 줄 알았다. 


 예상과 달리 비현실적인 일은 이 소설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청각장애인이 번개를 맞고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을 제외하면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뿐이다. 그런데도 이 소설이 괴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마을 밑바닥에 사람들의 온갖 욕망과 악한 마음이 고여 있는 듯한 분위기 때문이다. 두세 사람을 제외하면 소설에 등장하는 마을 레 카세의 사람들은 모두 추잡하다. 불륜은 예삿일이고 마을 어딘가에서 살인, 감금, 중상모략, 배신, 도피 행각, 차별과 혐오 등 온갖 추악한 일이 일어나는데 주민들은 자신들이 멀쩡하고 상식적인 양 행세한다.


  이러한 마을의 진상은 마을 주민들이 한 사람씩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서서히 풀린다. 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앞서 이야기한 사람이 보지 못한 그 사람의 뒷이야기가 밝혀지는 식으로. 파이를 한 겹 한 겹 쌓아 올리듯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쌓아 올리며 마을 전체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솜씨가 뛰어나다. 이야기 하나하나도 역겹지만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다. 마을 사람 20여 명의 이야기를 듣고 스무 편쯤의 막장 드라마에 지쳤을 때 나오는 두 이야기는 독자가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곳이다. 따뜻한 인류애가 느껴지는 니코데모와 어머니의 이야기와 상류층과 자신의 계급 격차에 씁쓸해 하면서 풋풋한 우정을 경험하는 마르코 팔라체시 박사의 어린 시절 이야기. 이 마을에서 그나마 고결하고 인간미 있다고 할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마지막 한 챕터, 사무엘레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모든 것들을 뒤집는다. 그렇게 이야기가 뒤집히지만 작가가 보여주는 것은 한결같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표면 아래 인간의 추악함이 숨겨져 있고, 인간들은 자신이 저지른 짓을 숨기면서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어떤 일이라도 저지른다는 것. 그것이 남기는 암울한 그림자는 읽고 나서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스포일러 











접힌 부분 펼치기 ▼

  사실 이 소설 속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무엘레가 머릿속으로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한 마디로 "아 젠장, 꿈이네." 소설 속 이야기가 현실이 아니라는 복선은 여기저기 있었다. 사무엘레의 연인 클라라가 지적했듯이, 니코데모 템페스티, 아니, 그인 척했던 독일군 패잔병 아미코 프리츠는 세계적인 체스 선수가 되어 얼굴이 널리 알려졌는데도, 그의 옛 연인은 프리츠에게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프리츠나 그의 양어머니와 아무런 접점이 없는 알도 팔라체시는 아미코 프리츠가 군에서 낙오되고 마을 뒷산을 헤맸다는 이야기를 아들에게 들려준다. 아버지의 집착에 질려 가출한 엘레오노라는 오갈 데 없는 자신을 거두어준 보리안이 자신을 구속하려 들자 보리안의 집에서도 나와버린다. 그렇게 구속되는 것을 싫어하는 엘레오노라가 스스로 사무엘레의 집에 갇혀서 그만을 기다린다. 이런 모순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심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모든 이야기가 현실이 아니라는 암시를 독자에게 군데군데 남겨둔 것이다.


  실제 레 카세 마을은 사무엘레가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서만큼 지독한 악의 구렁텅이는 아닐지 모른다. 소설 밖의 우리가 우리만의 어두운 비밀을 감추고 있듯, 완전히 선하지도 완전히 악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평범한 마을이 아닐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는 않으니 아예 허구는 아니겠지만 사무엘레가 생각해낸 만큼 극단적인 이야기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옮겨갈수록 부풀어나고 더 자극적으로 변하지만, 정작 실상은 별 것 아닌 경우가 많으니. 떠나간 부모의 사랑을 그리워하고 마을 아이들에게는 따돌림당했던 사무엘레의 내면의 어두움이 레 카세를 실제보다 더 어둡고 위험한 곳으로 만들지는 않았을까 싶다.


  사무엘레가 만들어낸 이야기 속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악행을 직시하지 못하고 회피하듯이, 사무엘레도 자신이 만든 이야기로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회피한다. 사무엘레는 연인 클라라가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갖는 것을 목격하고, 그녀를 해안 절벽에서 밀어서 죽였다. 그 기억을 지우기 위해 엘레오노라라는 존재를 만들어낸다. 현실에도 엘레오노라가 있기는 하지만 사무엘레의 가상현실 속 엘레오노라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다. 현실의 엘레오노라는 사무엘레 때문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혼수상태에 빠진 피해자로, 사무엘레와 어떤 감정적인 교류도 하지 않았다. 가상현실 속 엘레오노라는 실제 연인 클라라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럽지만, 밖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하고 결국 바람까지 핀 클라라와 달리 사무엘레 한 사람만을 바라본다. 아버지와 보리안의 간섭은 견디지 못했으면서 사무엘레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사무엘레의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다. 그런데다 죽음까지 함께한다. 사무엘레와 엘레오노라의 최후는 언뜻 보면 애틋하지만, 실제 엘레오노라의 의지와 감정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사무엘레만의 환상이다.


  작가는 결국 자신이 현실이라고 믿는 가상현실을 선택한 사무엘레를 동정하고 그의 최후를 애틋하게 그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두운 과거가 있고 연인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해서 그 연인의 목숨을 빼앗는 게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사무엘레가 무엇보다 진짜라고 느끼는 엘레오노라도 그의 입맛대로 만들어진 허상일 뿐이다. 매일 수많은 여성들이 연인이나 남편의 손에 죽는 현실을 생각하면 사무엘레의 환상이 마냥 애틋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사무엘레가 자신이 클라라를 죽인 것을 깨닫고도 전혀 후회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엘레오노라와의 행복한 사랑이라는 가상으로 뛰어들었으니 더더욱. 나는 사무엘레를 동정하지 않고, 그와 마지막으로 함께한 것은 허상일 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무엘레에게 따뜻한 결말(현실적으로는 비극적인 결말이지만 사무엘레 자신에게는 행복한 결말)을 준 작가의 선택을 지지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쌓아가는 작가의 솜씨는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야기를 마무리한 방식은 높이 평가할 수 없다. 


P. S. 마을 전체가 비현실적인 천재지변으로 사라지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몰살당하는 결말(『불만의 집』에서는 사무엘레의 머릿속 가상현실에서 일어난 일이지만)은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떠올리게 했다. 사무엘레의 머릿속 마을에서 비현실적인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데도 이 소설 특유의 어둡고 기묘한 분위기는 묘하게 마술적 리얼리즘을 떠올리게 한다. 마을 사람 한 명 한 명이 최후를 맞는 모습이 각각의 캐릭터에 맞게 잘 쓰여졌고, 그렇게 되기까지의 서사도 잘 구축되어 와서, 어쩌면 레 카세 마을의 이야기가 사무엘레의 머릿속이 아니라 (소설 속에서) 실제인 쪽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펼친 부분 접기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만의 집
사샤 나스피니 지음, 최정윤 옮김 / 민음사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캐릭터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겹겹이 쌓아가며 전체 마을의 이야기를 구축하는 솜씨가 뛰어나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품고 있는 어두움과 추악함이 숨을 막히게 한다.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없는데도 유령이나 괴물이 나오는 고딕 소설보다 더 소름 끼치게 느껴지는 소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