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스페인어였습니다
하현 지음 / 빌리버튼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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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는 내게 외국어라기보다 생존 수단이다취업과 재취업을 위해서는 영어 점수가 있어야 되는데 토익토플텝스, G텔프 등 각종 영어 능력 시험들은 유효 기간이 2년밖에 되지 않는다싫어도 2년에 한 번씩은 영어 시험을 봐야 하는 나로서는 영어 공부가 의무였기에낯선 언어를 새롭게 배우는 설렘은 느낄 수 없었다.

 

  그런 설렘을 느끼게 해 준 언어는 프랑스어였다대학원 때 불문과 교수님의 조교로 일하게 되면서 프랑스어를 알아두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학부에서 진행되는 교양 프랑스어 수업을 청강했다막상 조교로 일하고 보니 프랑스어가 그렇게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예전부터 호기심과 호감을 느끼고 있던 언어였기 때문에청강을 마치고 나서도 독학을 했다문법 위주로 독학해 말하기와 듣기는 잘 못하지만 프랑스어 텍스트를 어느 정도 독해할 수는 있게 되었다그 덕분에 예전이라면 그냥 까만 건 글씨요하얀 건 종이였을 각종 프랑스어 텍스트들을 직접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기쁨이 생겼다내가 접할 수 있는 세상이 더 넓어졌다는 기쁨이었다.

 

  ‘낯선 언어를 배우면서 만난 의외의 기쁨을 담았다기에,어쩌다 보니 스페인어였습니다도 내가 느낀 것 같은 기쁨을 이야기하는 책인 줄 알았다읽어 보니 이런 기쁨이 나오기는 한다저자는 길에서 지나쳤던 작은 카페의 이름이 스페인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TV에 나오는 스페인어권 사람들의 말에서 아는 단어가 들릴 때배움의 결실을 확인하는 작은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내가 궁금해 하고 기대했던 스페인어와 스페인어권 문화에 대한 이야기들도 있었다. ‘rr’은 그냥 ‘r’로 발음하는 것이 아니라 혀를 굴려서 ㄹㄹㄹㄹ로 발음해야 한다는 것스페인어에서 의무를 나타내는 표현에는 개인의 의무를 말하는 것과 공공의 의무를 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게 되어 흥미로웠다. ‘Mi amor(내 사랑)’ ‘Mi cielo(내 하늘)’, ‘Mi vida(내 생명)’, ‘Mi tesoro(내 보물)’ 같은 미사여구로 연인을 부른다는 점에서 스페인의 정열이 느껴지기도 했다스페인에서는 소울메이트를 ‘Media naranja(오렌지 반 쪽)’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직관적으로 와 닿는 사랑스러운 표현이라고 느꼈다.

 

  같은 라틴 계열 언어권이다 보니 내가 알고 있는 프랑스어와 비슷한 점들이 많아 비교하면서 읽는 재미도 있었다일반적인 것에 붙는 부정관사 ‘a/an’과 특정한 것에 붙는 정관사 ‘the’, 두 개의 관사만 알면 되는 영어와 달리스페인어와 프랑스어 모두 여성형과 남성형단수형과 복수형으로 관사가 나뉜다그리고 두 언어 모두 영어와 달리 반말과 존댓말이 있고반말과 존댓말에 해당하는 인칭과 동사 형태가 따로 있다또한 스페인어에도 프랑스어에도 그냥 나는 옷을 입는다/샤워한다/면도를 한다고 해도 될 텐데 직역하자면 나 자신이 입게 한다/샤워하게 한다/면도를 하게 한다는 재귀의 개념이 있다책을 읽으면서 스페인어를 제대로 공부한다면 프랑스어에서 공부한 문법 개념들이 꽤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이 흥미로운 이야기들 중 어떤 이야기를 해도 몇 발자국만 나아가고 만다는 것이다이 책에 실린 주제들은 더 깊이 파고들면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주제들이다스페인어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기본형은 남성 단수형인데왜 여성은 기본형이 될 수 없는가 하는 의문사용자가 수천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언어가 모국어인 사람으로서 영어나 스페인어 같이 전 세계 수십 개 국가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쓰는 강한 나라의 말이 모국어인 사람들에게 느끼는 부러움. ‘존재와 상태를 나타내는 be 동사가 따로 있다는 것정말 흥미롭고 더 깊게 풀어낼 여지가 많은 주제들인데그에 대해 사유를 하기보다는 상념들을 늘어놓는 데 그친다. 좋은 에세이집은 책 한 권을 관통하는 주제에 집중하고, 책에 실려 있는 각 글마다 주제가 다르다면 에세이집이 아니라 잡문집이나 일기라고 한다. 이 책은 작가의 머릿속을 흘러가는 상념들을 풀어놔서인지 스페인어나 스페인어를 배우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 외에 너무 많은 것들을 쏟아 놓아 '스페인어' 또는 '스페인어를 배우는 나'에 대한 에세이집이라기보다는 잡문집이나 일기장에 가깝다. 

 


  이 책이 '스페인어'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는 작가가 스페인어에 대해 호기심은 있지만 열의는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작가는 그저 배워 본 적이 없는 낯선 언어이고가까운 학원에서 공부할 수 있는 언어가 스페인어여서 스페인어를 공부하기로 선택했다함께 학원을 다니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스페인어권에 여행을 가기나 유학을 갈 생각도 없고스페인어를 아주 잘 하겠다는 생각도 없다그래서 복잡한 동사 변화나 시제 같은 스페인어의 어려운 부분을 공부하기 싫어한다학원에 가다 쓰러지기까지 해 자체 여름방학을 한 달간 가진다몸에 무리가 가서 쉰 것을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방학 동안 스페인어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아 남들에게 뒤쳐져 의욕도 잃어가는 심정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게다가 딱히 아프거나 중요한 일이 있던 것도 아닌데 마지막 수업도 가지 않는다마지막 수업을 가지 않았다는 말 뒤에 역시 놀러가지 말고 학원에 갔어야 하는데...’라는 문장이 붙은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어린 아들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마지막 외국어 수업에 참석하지 못한 한 영화 주인공을 생각하면 이런 태도가 무책임하게 느껴지기는 한다내가 스페인어라면 작가에게 너 나한테 관심이 있기는 해?”라고 물었을 것이다. 작가 본인도 이야기한다. 스페인어를 사랑하지 않고 약간의 흥미를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사랑은 노력 밖의 영역이라고. 

 

  물론 작가의 말대로 배움이 숭고할 필요는 없고외국어를 배우는 데 거창한 이유가 필요하지도 않다라틴어 전문가인 한동일 교수도 라틴어 수업에서 있어 보이려고 라틴어를 공부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했고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작가는 이 책에서 스페인어 자체보다는 스페인어를 공부하면서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고 궁금한 것은 마음껏 질문할 수 있게’ , ‘조금 더 뻔뻔해지고 자유로워진’ 자신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도 이해하고무엇인가를 열정적으로 해서 성과를 얻어내려는 일에 지친 사람들은 별다른 열의 없이 일상에 작은 균열을 내려는 마음에 공감하고,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하고 위로를 얻고꼭 스페인어가 아니더라도 사소한 것에 새롭게 도전할지도 모른다그렇게 사람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주는 것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ㅇㅇ해도 괜찮아’ 류의 에세이는 이미 충분히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열심히 공부하지 않아도 괜찮아그저 일상을 좀 더 새롭게 만들면 돼그래도 어느 정도는 내게 남는 게 있을 거야이런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열정을 강요하는 꼰대도 아니다누구나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하니 공감할 수 있는 것도 좋다하지만 글 쓰는 사람이라면 남들과 같은 것을 봐도 다르게 생각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내가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을 놀랍도록 날카롭게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포착하는 글을 읽고 싶다. ‘내가 이래서 글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글 읽는 사람이구나를 실감하게 하는 글을 만나고 싶다. 그런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이 책으로 쓰기로 한 소재나 주제에 대해 호기심 이상의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자신이 정말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쓸 수 있는 소재를 골라야 했다. 애정이나 열정이 아니라 증오나 혐오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더라도 한 권의 책으로 만들 만큼 강렬한 감정과 집중력을 끌어내는 소재여야 했다. 자신에게 한 책을 관통하는 열정과 애정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소재를 골랐으니, 그 소재를 깊게 파고 드는 대신 자신이 일상에서 느끼는 상념들과 뒤섞인 잡문집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독자인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아쉽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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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V 빌런 고태경 - 2020 한경신춘문예 당선작
정대건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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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스포일러 포함

편집자를 꿈꾼 지 10년이 됐지만 정작 내가 편집자로 일한 시간은 6개월도 되지 않는다. 편집자가 될 기회는 두 번 있었지만, 꿈을 펼칠 곳이라고 생각했던 곳들에서 잔인하게 내쳐졌다. 지금도 적지 않은 나이인데 두 달 뒤면 한 살 더 먹고, 세 번째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고 있다.

오랜만에 출판사 편집자 모집 공고가 떠서 그 출판사 책들을 살펴보려고 도서관에 갔다. 책마다 낯익은 이름이 편집자로 기재되어 있었다. 내가 처음 다녔던 출판사에서 내 사수였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내가 다섯 번이나 떨어진 출판학교를 졸업했다. 하는 일마다 대표에게 야단을 맞거나 대표와 의견이 충돌해 3주 만에 잘린 나와 달리, 그녀는 똑 부러지는 일 처리로 대표의 신뢰와 사랑을 받다 1년 만에 더 큰 출판사로 이직했다. 책들이 발행된 날짜를 보니 이 출판사에서도 반 년 이상 일해 오고 있는 듯하다. 나보다 어린데도 착실히 출판 경력을 쌓고 있는 그녀를 보니,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허탈해져 마냥 손놓고 있던 내게 위로가 되어 준 건 그날 도서관에서 빌린 책 중 한 권이었다. 『 GV 빌런 고태경』. 지원하려는 출판사의 책은 아니었고, '저마다 간직한 꿈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소설'이라기에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리려고 할 때마다 항상 대출 중이었는데 마침 이번에는 서가에 놓여 있었고, 현실을 또 한 번 자각한 지금,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래서 읽어야 하는 책들이 있는데도 이 책부터 먼저 읽기 시작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젊은 영화감독 조혜나다. 단편영화 두 편과 독립 장편영화 한 편, 단 세 편의 영화를 찍었는데 세 영화 모두 처참하게 실패하고 묻혔다. 학원 강사 일을 하며 영화와 멀어진 채로 살고 있던 그녀에게, 갑자기 그녀의 영화로 GV(Guest Visit, 관객과의 대화)를 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 영화의 주연이자 그녀의 전 연인이었던 배우가 떠오르는 스타가 된 덕분이었다. GV가 무난히 진행되나 싶었는데, 갑자기 한 50대 남자가 자신이 영화제 심사위원이라도 된 양, 조혜나에게 질문이라기보다는 날선 비평에 가까운 말들을 쏟아냈다. 그는 모든 영화의 GV에서 난감한 질문들을 던져 감독들을 난처하게 만들기로 악명이 높은 'GV 빌런('GV'와 '악당'을 뜻하는 영어 단어 '빌런(villain)'의 합성어로, 무례한 질문을 던지면서 GV의 분위기를 흐리는 관객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고태경이었다. 분을 못 이겨 씩씩대던 조혜나는 그에게 복수하기로 다짐했다. 다른 것도 아닌 영화로.

조혜나는 고태경에게 당신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고 싶다고 제안한다. 처음 의도는 그가 자신의 꼴사나운 모습을 스크린으로 보면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를 조롱하려던 원래 의도와는 달리 조혜나는 점점 그를 이해하게 된다. 그가 자신 못지않게, 어쩌면 자신보다 더 영화를 사랑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영화계의 거장 최강호 감독의 스태프였고, 한국 영화사 속 숨은 명작인 <초록 사과>의 조감독이었다. 그러나 질 낮은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는 신념 때문에 감독이 될 기회를 놓쳤다. 일단 들어가면 자기 작품 하나는 찍을 수 있는 국립 영화학교에도 응시했지만, 세 번이나 떨어졌다. 그렇게 그는 영화계 현장에서 멀어졌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할 일 없이 잘난 척이나 하는 영화광이었지만,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그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19년 동안 택시 기사 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일주일에 두 번 노인센터에서 노인들에게 영화 강의를 해 왔다. 그는 택시 기사 일도, 영화 강의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영화 촬영은 체력이 필요한 일이기에 꾸준히 운동을 하며 체력을 유지하고 있고,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영화들에 대한 감을 잃지 않기 위해 거의 모든 영화를 보고 GV에 참석한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의 후배 스태프였던 영화사 대표에게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들고 간다. 이렇게 그는 현실과 꿈, 어느 쪽도 소홀히 하지 않고 19년 동안 성실하게 자신을 가다듬으며 살아왔다. 자신이 영화인이라는 생각을 한 순간도 버리지 않으면서. 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고작 반 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편집자로 살아 온 나도 스스로를 편집자로 생각하고, 좋은 편집자가 되기 위해 성실하게 나를 다듬으며 살아간다면 편집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위로가 됐다.

그런 그가 자신의 시나리오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조롱하는 영화사 대표 앞에서 모욕감을 참는 장면에서는 읽는 나도 괴로웠다. 출판사 면접을 보면서 왜 그 나이 먹도록 경력을 그것밖에 못 쌓았느냐, 회사에 오래 다니지 못했느냐, 공무원 시험을 보지 않았냐는 이야기들을 들어야 했던 내 모습이 겹쳐 보여서. 그의 시나리오나 내 도서 기획안이나 나름대로 고심을 하며 만들어냈지만, 현장에서 직접 뛸 수 없는 상태에서 만들었다 보니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도 공통점이라고 느꼈다. 아무리 노력해도 거기까지가 한계인가 싶어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고태경은 자신을 실패자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열등감에 짓눌리지도 않았다. 그것이 내가 느낀 고태경의 가장 존경스러운 점이다. 자신의 자식뻘인 조혜나가 자신은 세 번이나 떨어진 국립 영화학교를 졸업하고, 국제 영화제에 초청되어 상을 받아 왔지만 그는 조혜나에게 열등감을 가지지 않았다. 다큐멘터리에 대해 의견이 엇갈려 조혜나와 싸울 때에도, 그는 영화사 대표에게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숨기고 싶어 했지만 열등감을 드러내거나 조혜나의 아픈 곳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도전할 용기는 없는데 남 품평이나 하고 영화는 만들어 본 적도 없다고, 조혜나가 자신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는데도. 오히려 조혜나를 무시하는 국립 영화학교 교수 앞에서 "조혜나 감독은 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촬영 중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조혜나는 그런 그를 지켜보며 인정하게 된다. 열심히 하는 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든 이어지지 않든, 그것 또한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마침내 조혜나의 다큐멘터리 영화 <GV 빌런 고태경>은 완성되었고,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GV 빌런 고태경>의 GV에서 고태경은 인생 처음으로 한 사람의 영화인으로서 관객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2000년에 머물러 있던 고태경의 필모그래피는 19년 만에 본인이 주연을 맡은 영화로 업데이트되었다. 하지만 그의 꿈은 끝나지 않았다. 자신이 감독한 영화가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것. 그 날을 맞기 위해 또 GV에서 질문을 던지는 고태경의 모습으로 소설은 끝난다.

조혜나와 고태경은 사랑하는 영화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는 포기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포기하는 것도 사랑하는 방법 중 하나임을 조혜나의 동기 승호를 통해 보여준다. 그는 영화를 만드는 게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았고, 그토록 사랑했던 영화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훌륭한 영화감독이 되기에 자신이 한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는 영화를 포기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사랑하는 걸 미워하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걸 더 사랑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어."

영화를 더 이상 미워하고 싶지 않기 위해 영화를 보내준 것이다. 나는 조혜나와 고태경처럼 포기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하지만 승호의 선택을 이해하고 응원한다. 그의 선택이 내가 미래에 내릴 선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고태경의 필모그래피가 출연작이 아닌 감독한 영화들로 채워지길, 그가 자신이 연출한 영화 GV에서 만만치 않은 빌런을 만나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기를 바란다. 조혜나의 필모그래피도 좋은 영화들로 가득차길 바란다. 영화감독이 되지 않더라도 승호가 영화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 영화와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길 바란다. 그리고 다섯 권에 멈춰 있는 내가 만든 책들의 목록이 더 길어지길 바란다. 그렇게 모두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계속 사랑하는 방법을 찾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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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고생합니다
임수희 지음 / 수이출판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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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서가 아니고 사서가 될 계획도 없는 나는 왜 이 책을 읽었을까. 어린 시절 일주일에 한 번 이동 도서관이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고, 대학교 시절에는 학교 도서관 3층 인문학 코너를 주요 서식지로 삼았으며, 지금도 우리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것이 인생의 낙인 열성 도서관 이용자여서? 책 만드는 사람으로서 책을 입수하고 보관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은 나와 입장이 어떻게 다를까 궁금해져서? 사실 좋아하는 사람을 좀 더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사서다. 그 사람이 평소에 어떻게 일하는지, 일하면서 어떤 것에 보람을 느끼는지, 어떤 것이 힘든지 알고 싶었다. 


  도서관마다 책을 입수하는 기준, 책을 버리는 기준, 이용자를 응대하는 매뉴얼은 각각 다를 것이다. 근무하는 곳이 공공도서관이냐 사설도서관이냐, 자신이 정사서냐 계약직 사서냐에 따라서도 할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사서로서 공통된 업무들이 있을 것이고, 거기에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보람과 애로사항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사람이 일할 때 이런 보람을 느끼겠구나, 이런 게 힘들겠구나 조금이라도 더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힘든 점을 이해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힘든 점을 가볍게 생각하고, 그런 생각을 당사자 앞에서 쉽게 내뱉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 사람 앞에서, 그 사람과 같은 직업을 가진 사서 분들 앞에서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을 더 이해하고 싶다는 처음의 목적을 넘어서, 읽으면서 사서 분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게 됐다. 편집자인 나도 사서 분들도 책을 독자들과 연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책 속에서 한 사서 분이 "내가 건넨 책이 그 사람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는데, 나는 "내가 만든 책이 그 책을 읽는 사람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 가능성이 너무 희미하게 느껴질 때 힘들다는 것조차 공감했다. 사서 분들이 도서관에 어떤 책을 입수할지 치열하게 수서 회의를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그 수서 회의에서 내 책이 선택되도록 더 좋은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 번이라도 수서 회의를 지켜보면서 사서 분들이 파악하는 도서관 이용자들의 독서 경향은 어떤지 듣고 싶었다. 그 회의에서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내 입장은 이렇다고 이야기하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 도서관에 십진분류법이 아닌 특정한 주제로 책들을 배치하는 '컬렉션'이 있다는 것이 특히 흥미로웠다. 이런 컬렉션은 한 사서의 고민이나 '이건 꼭 만들어야 해'라는 여러 사서들의 공감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사서들은 자신의 컬렉션 주제가 너무 좁거나 넓은 건 아닌지, 시의성이 떨어지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조사하면서 컬렉션의 주제를 다듬어간다고 한다. 편집자가 책을 기획할 때 어떤 책을 만들지 생각을 다듬어가는 과정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컬렉션들이 편집자가 책을 기획할 때 방향을 제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책을 만드는 사람이자 열성 독자, 도서관 이용자로서 도서관 컬렉션으로 이런 주제는 어떻냐고 의견을 내놓고도 싶었다. 


  이렇게 주제 자체로도 공감할 여지가 차고 넘치는데, 재기발랄한 문체여서 더 즐겁게 읽었다. 같은 것을 이야기해도 재미있게 말하는 사람이 있고 재미없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책의 작가는 전자다. 상황에 따라 뜻하지 않게 쏟아지는 업무와 공공 장소이다 보니 수없이 만나는 각종 민폐들마저 유쾌하게 이야기한다. 겪을 때마다 여전히 힘들긴 하지만 그런 힘든 일을 좀 더 쉽게 넘길 수 있게 된 내공이 느껴진다. 작가가 그런 힘든 일들을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소소한 행복들을 이야기할 때 미소가 지어졌다. 


  작가가 동료 사서들 네 명과 나눈 인터뷰가 부록으로 실려 있는데, 이 인터뷰가 사서라는 직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나보다도 어린 사람들이 자기 직업에 대해 이렇게 깊이 생각하고 뚜렷한 직업관을 가진 것에 부끄러워졌다. 지금은 사서 일을 그만두었다는 작가나 인터뷰에 응한 이들 동료 사서 분들이나 '그림책에 나오는 할머니 안경을 쓰고 숄을 걸친 머리 하얀' 노인이 될 때까지 사서로 일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편집자로서나 이용자로서나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에세이와 직업 탐구의 중간에 있는 책이다 보니, 더 깊이 들어갔으면 하는 이야기도 스케치 정도로 가볍게 다룬다. 인터뷰가 직업 탐구로서의 깊이를 더해주긴 하지만, 워낙 작은 책인데다 페이지도 많지 않아 아쉽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더 많은데. 책에서나 도서관에서나 사서 분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싶고, 더 많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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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의 옥중서신
로자 룩셈부르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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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H

 

잘 지내고 있어올해도 벌써 3분의 2는 지나갔네올해는 코로나뿐만 아니라 일과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참 힘들었어그래도 나쁜 일은 다 지나갔고 조용히 내 시간을 보내고 있어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예전보다 책을 더 많이 읽게 돼요즘은 폴란드 출신의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감옥에서 보낸 편지들을 묶은 책 로자 룩셈부르크의 옥중서신을 읽었어예전에 레드 로자라는 그래픽노블을 읽으면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삶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됐는데그 책에서 읽었던 내용들을 떠올리면서 책을 읽었어.

 

로자 룩셈부르크는 폴란드인이지만 28세에 독일 사회민주당에 가입한 이후로독일에서 정치 활동을 해 왔어전쟁(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자는 주장이 대세였던 당시 독일에서 로자와 동료 의원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을 일으켰고이 일 때문에 로자와 리프크네히트는 수감되었어그 때 로자가 리프크네히트의 아내 소피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게 이 책이야.


사적인 편지이다 보니 로자의 사상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많지 않아. “매일 조금씩 낡은 세계가 무너져 내리고 위대하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될 거라고” 이야기하지만로자의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 더 깊이 알려면 다른 책들을 더 읽어봐야겠지이 책은 로자의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들을 다루고 있어.

 

편지들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자연에 대한 사랑이야사방이 막힌 감옥에서 로자가 잠시나마 자유로움과 생기를 느낄 수 있게 한 건 주변의 자연 풍경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식물들동물들이었으니까로자는 붓으로 그림을 그려나가듯이 해가 지고 노을이 물드는 하늘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오는 모습을 묘사해식물학자처럼 주변의 식물들을 관찰하고밖에 있는 소피에게 식물원에 가서 어떤 식물들이 있었는지 보고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하지감옥 주변을 맴도는 새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어떤 새들이 우는 건지어떤 감정으로 우는 건지도 구별해나는 로자만큼 새와 식물들의 종류를 많이 알지 못하지만코로나 때문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자연이 더욱 싱그럽게 느껴진다는 걸 알게 됐어그러니 로자에게 더 공감할 수 있었지.

 

자연에 대한 로자의 사랑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약한 것들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져로자는 욕실 창가에서 우연히 공작나비 한 마리를 발견하고 보살펴 주었지만나비는 며칠 만에 죽고 말았어로자는 나비의 죽음을 슬퍼했지그리고 수용소에 끌려온 루마니아 들소가 독일 군인에게 피가 날 정도로 심하게 매 맞는 것을 보면서 그 소와 동질감을 느껴자유를 빼앗기고 잔인한 폭력을 당한다는 점에서그리고 책 속에서 미국 원주민들이 유럽인들에게 억압당하고 말살당하는 이야기를 읽고 분노하지로자는 그저 이념과 투쟁에만 몰두해 있는 게 아니라세상의 약하고 억압당하고 고통 받는 존재들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사랑했어.

 

로자는 평생 약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주기 위해 싸워 왔어그러면서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탄압당할 수밖에 없었고평생 동안 수차례 감옥에 갇혔지이런 삶이 고통스럽지 않았을 리 없지만그래도 로자는 삶을 사랑했어삶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고자신이 작은 고통에도 흔들린다는 걸 인정했지만그런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려고 했어그러면서 소피나 카를 같은 친구동지들과 함께했던 행복한 시간들을 추억하며 그런 시간을 다시 누릴 수 있을 거라고 말해. 1918년 봄에 로자는 소피에게 내년 봄은 함께 보낼 수 있을 거라고 편지를 보냈는데로자가 이듬해 봄이 되기도 전에 살해당했다는 걸 생각하면 슬퍼져삶은 로자의 기대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로자는 삶을 사랑했고그 덕분에 보람 있고 행복하게 살아갔다고 생각해.

 

번역이 딱딱해서 로자의 편지가 부드럽게 읽히지 않은 게 아쉬워합쇼체를 덜 쓰고 해요체를 더 많이 썼다면문장에서 주어를 적당히 삭제했다면 문장이 좀 더 자연스러워졌을 텐데(우리말 문장에서 주어를 일일이 넣으면 오히려 어색해지고 번역체처럼 느껴지지). 하지만 로자의 맑고 부드러운 감성은 딱딱한 번역문에서도 느껴져로자가 언급하는 작가학자정치인문학 작품을 미주와 각주로 꼼꼼히 설명해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고(그런데 어떤 걸 미주로 처리하고 어떤 걸 각주로 처리하는지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것 같아서 좀 아쉬워). 로자는 소피 말고도 남편연인동지 등 다양한 사람들과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는데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들도 번역되면 좋겠어그만큼 로자의 다양한 면모를 볼 수 있을 테니까.


우리도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삶과 우리 주변의 사람들더 약한 존재들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편지 속 로자의 표현을 빌려서 인사할게네가 더 많은 온기와 햇살을 가질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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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로셀라 포스토리노 지음, 김지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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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겁이 많아 독립운동은 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친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지금처럼 조용히 내 할 일을 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총독부에서 나에게 매 끼니마다 총독의 음식을 시식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 않겠다고 하면 나뿐만 아니라 내 가족들까지 다 죽는다. 나는 총독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었을까?


  강제로 히틀러가 먹는 음식을 시식하게 된 사람이 있었다. 마르고트 뵐크라는 독일인 여성으로, 남편이 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고 나서 독일 동부에 있는 시댁에서 지내고 있었다. 시댁 근처에는 히틀러의 동부 전선(독일이 동유럽 지역에서 연합군과 싸운 전역) 지휘 본부가 있었다. 1943년 나치 친위대는 마르고트를 비롯한 10여 명의 젊은 여성들을 히틀러의 시식가로 뽑아, 히틀러가 지휘 본부에 머무르는 동안 매 끼니마다 독이 있는지 없는지 먼저 맛보게 했다. 이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이다. 


  실제 이야기를 먼저 찾아보면 소설의 주요 내용을 다 알게 될 정도로 이 책은 실화에 충실하다. 이탈리아인 작가가 독일인 화자를 내세워 독일을 배경으로 쓴 소설이지만, 화자가 살았던 베를린과 독일 동부 지역의 자연, 풍습, 생활상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독일인 독자가 보기에는 고증이 맞지 않다 싶은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독일인 독자가 아닌 나로서는 거슬리는 부분이 없었다. 작가가 1978년생이니 전후 세대인데도 전쟁으로 인해 남루해지고 피폐해진 일상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덕분에 2차 세계대전 말이라는 불안한 시기의 독일에 와 있는 듯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작가는 실제 인물인 마르고트 뵐크를 직접 만나보지 못했지만, 그녀가 겪었을 복잡한 심리를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매 끼니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겪지만, 몇 년째 버터와 설탕을 구경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좋은 재료를 쓰고 솜씨 좋은 요리사가 만든 음식은 군침이 돌게 만든다. 친위대에서는 독살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끼니마다 여러 가지 메뉴를 짜고 시식가들에게 두 명씩 짝을 지어서 한 메뉴씩 먹게 하니, 자신과 같은 메뉴를 먹는 동료에게 운명을 함께한다는 동지 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다. 히틀러의 목숨을 부지하는 데 한 역할을 하면서 나치 장교와 사랑에 빠지기까지 했다는 점에서 죄의식을 느끼지만, 그러면서도 그 장교와의 관계는 끊지 못하고 그 관계 덕분에 얻는 이익은 다 누리고 있다. 마르고트 뵐크를 모델로 한 주인공 로자는 이렇게 피해자이면서 부역자라는 모순을 안고 있는 복합적인 캐릭터이다. 


  로자의 죄의식은 상상 속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뚜렷이 나타난다. 이미 돌아가셨지만 생전에 나치를 반대했던 아버지는, 상상 속에서도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는 로자를 호되게 꾸짖는다. 


“정치와는 상관없어요. 저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요. 게다가 1933년에는 저는 고작 열여섯 살이었어요. 히틀러를 뽑은 건 제가 아니라고요.” 그러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일단 용인하면 그 정권에 대한 책임은 네게도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각자가 속한 국가 체제 덕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은둔자조차 말이다. 알아들었니? 네게는 정치적 죄악에 대해 면죄부가 없다, 로자.”


  로자가 매일 죽음의 위험을 직면하면서 산다고 해도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어 학살당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그녀는 나치에 부역해서 매일 호의호식하고 있는 부역자다. 게다가 자신의 남편이 죽은 줄 알았다고 할지라도 나치 장교에게 처자식이 있는 걸 알면서도 그와 관계를 이어간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게다가 그 덕분에 유용한 정보를 얻었으면서도, 그와의 관계가 탄로 날까 봐 친정 부모처럼 자신을 돌봐줬던 시부모에게도 자매처럼 지내 왔던 동료들에게도 그 정보를 알리지 않고 혼자 살아남았다. 이러한 로자의 잘못들은 작품 속에서 정당화되지 않는다. 작가는 상상 속 아버지의 말, 즉 로자 자신의 죄의식을 통해 로자, 즉 평범한 사람들이 악을 뒷받침했던 것에 면죄부가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하지만 작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악에 동참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더 큰 악을 잊지 않는다. 히틀러와 나치가 아니었다면 로자를 비롯한 동료들은 히틀러의 목숨을 부지하는 데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로자는 남편과 헤어지지 않고 그렇게 바라던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갔을 것이고, 다른 동료들도 자신이 바라는 대로 살아갔을 것이다. 이들이 실험용 모르모트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들이 어느 날 식사를 하고 모두 쓰러지는 대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나치 친위대는 시식가들을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면서 이들에게서 어떤 증상이 나타났는지 지켜보기만 한다. 다행히 상한 음식 때문에 일어난 식중독이어서 아무도 죽지 않았지만, 실제로 독이 들어 있었던 거라면 주인공을 비롯한 시식가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악에 동참하면서 죽음의 위험을 직면할지, 악을 거부하고 그 대가로 죽임 당할지 선택하게 하고, 악에 동참해서 죽게 되더라도 내버려두는 거대한 악.

 

  작가는 이 거대한 악의 손아귀 안에서도 서로 연대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리지만, 그 연대와 사랑이 모두를 구원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로자는 동료들과의 연대와 우정 덕분에 하루하루를 버텼지만, 로자를 제외한 모든 동료들은 목숨을 잃는다. 독일이 패전하고 소련군이 오고 있다는 소설 속 서술이나 실화에서 동료들이 맞은 운명을 생각해 보면, 동료들은 나치 부역자라는 이유로 소련군에게 처형당했을 것이다. 로자를 나치 친위대에게서 숨겨주지는 못했지만 따뜻한 가족이 되어주었던 시부모님도 전쟁 중에 돌아가셨을 것이고, 귀족이면서도 허물없이 로자를 친구로 대했던 마리아 남작부인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로자 본인은 살아남았고 남편을 다시 만났지만, 시식가로 살아가면서 남은 상처와 죄의식 때문에 남편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헤어진다. 이들의 삶이 망가진 것은 전쟁과 그 전쟁을 일으킨 인간들 때문이었다. 이 모든 일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어야 했다. 


  이런 거대한 악이 생기지 못하도록 평범한 사람들이 깨어 있어 힘을 모으는 것이 우선일까, 평범한 사람들이 악을 행하도록 강요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 우선일까. 둘 중 하나라도 제대로 실행되지 않으면 악은 평범한 사람들이 뒷받침해 지속되고 더 강해지면서 계속 악을 강요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악을 행하도록 강요당하다가 악에 무감각해져 악을 지속시킨다.『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은 이런 악순환이 평범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얼마나 뒤흔들고 망가뜨리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사랑과 연대로도 이렇게 망가진 삶을 완전히 회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 악순환을 막는 것 자체가 최선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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