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 인생도처유상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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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에 대한 향수는 개인의 역사와 밀접하다. 나고 자란 산천의 얼이 담긴 강산의 생명은 이 땅 위에 숨 쉬고 살아가는 또 다른 의미가 된다. 그렇다. 역사란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시작된 작은 몸짓이 세월이라는 물질을 터전 삼아 피었다 지기를 반복한 흐름의 시간이다. 그러니 역사에 대한 인식은 알든 모르든 이미 우리의 얼에 새긴 정신적 지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유홍준 교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이처럼 살가운 이유도 그러하다. 처음 책이 출간된 1993년 그 해, 나는 미래를 포부 하던 청춘이었다. 선생의 간결한 글은 여태껏 알던 얕은 지식은 뭉개버리고 새롭게 쓰는 계기가 되었다. 깨닫기 위해 배운 것이 아닌 통과하기 위해 알아야 했던 그 모든 역사의 층위를 갈아엎어 버린 선생의 글은 명징했다. 제도권 교육이 형식의 구태에 포위당하고 명분에 허덕일 때, 선생의 답사기는 이 땅위에 태어난 사실에 자랑스럽게 만드는 중심이었다.

이제 다시 문화유산답사기 시즌2가 돌아왔다. 꼭 10년만의 귀환이다. 오래 묵힌 장일수록 맛은 더 진해진다는 진리처럼 이 땅의 문화를 관망하는 깊이가 더 깊어지고 우려진 기분이다. 봉숭아물처럼 어여쁘게 퍼진 글은 선생의 감성조각과 너무도 잘 배합되어 읽는 맛을 개운하게 해 준다. 누구나 한 번 쯤은 해 보았을 그 물음의 공통성을 어찌 그리도 잘 솎아 내고 다져 빚었는지, 실로 이것은 읽는 이의 축복이다. 진심이 없다면 해 낼 수 없는 선생의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리라.

책은 경복궁을 필두로 선생의 제2의 고향 부여를 정점으로 막을 내린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선생의 묵직한 가르침처럼 청맹과니에 불과했던 눈과 귀를 열리게 한다. 때로는 살랑대는 바람처럼, 때로는 정수리로 쏟아지는 햇살처럼 글은 완급을 조절하며 치환의 역사를 새롭게 쓴다. 버려졌거나 망각된 유산의 복원은 진실과 마주할 때 비로소 열린다. 그것은 근정전 앞마당에 박힌 박석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핍박에 의해 훼철되고 도륙에 의해 유린된 이 땅의 유구한 역사와 슬기로운 조상의 지혜와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선생의 이 책은 새롭게 쓴 역사교과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선생이 직접 경험하고 체득한 모든 역사의 기록이 연대기에만 사로잡힌 기형적인 현실의 허물을 벗는 시작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우리네 문화유산에 담긴 오묘한 진리를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로 풀이해 낸 선생의 시선이 애틋하게 다가온다. 유상수에는 구들장의 슬기나 구전되는 농사의 기술처럼 대대손손 이어져 온 선조의 지혜를 엿보게 하며 삶을 대하는 처세도 곁으로 배우게 된다. 길 위에서 만나고 연을 맺은 장인들의 숨결을 통해 그 옛날 그 자리에 새겨진 역사의 숨결을 더불어 깨닫는다.

아울러 선생의 글은 에세이를 쓰듯 편안하게 비뚤어지고 굳어 버린 생각의 우듬지를 교정해 준다. 이것은 문화재청장으로 재임하던 선생의 경력이 단단히 한 몫에 했으리라 본다. 문화재청장으로 재임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스미듯 용해시켜 유연하고 부드럽게 해 준다. 여기에 산천에 자생하는 나무, 풀, 꽃이야기는 재미있기도 하거니와 그 하나하나에 담긴 거룩한 뜻에 감복하게 된다. 그 과정이 명쾌하기도 하지만 놓치기 쉬운 생각을 익숙하게 펼쳐 놓는 단정함이 알알이 배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이 단순한 기행문과는 격이 다른 결이 곱고 바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우리의 역사를 회고할 때 아픈 기억의 시간을 떠올리지 않을 재간이 없다. 일제강점의 시간 동안 우리의 문화는 철저하게 파괴되고 손실되었다. 그것은 도시의 형태를 바꾸고 삶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역사의 본질은 변화시키지 못했다. 우리의 역사가 그네들의 조각배 같은 역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생래적으로 강인했던 이유는 반듯한 정신, 즉 얼에 있다. 선생의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건만 대강의 모양새만으로 조상의 슬기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신묘해서도 아니고 나름의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선생이 다녀오고 밟은 영암사 쌍사자 석등의 우뚝함에 서 관망할 수 있다. 은진미륵으로 불리는 관촉사의 기이한 4등신의 불상에서도 매 한가지다.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2010.9.1. 김정봉] 

또 다른 함의는 선조들의 수려한 건축, 토목, 조각술에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모든 건축물은 건물로서의 단순한 덩어리가 아닌 자연과 조화를 이룬 예술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이것은 비단 궁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살림집의 역사에도 그 하모니가 단아하게 피어난다. 선생이 귀향한 부여의 반교리 폐허를 허물고 지은 휴휴당의 세칸집이 그것과 같다. 휴휴당에 머물며 농촌의 고단한 일상 속에 깃든 풍광을 사색하는 것은 경계의 안으로 들어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 속에서 매몰된 돌담길을 복원하고 우리네 정서를 회복하는 치유의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매한 시간이다. 

이처럼 풍성한 우리의 역사에 담긴 시각을 넓힌 선생의 책은 부족함이 없다. 선생의 글로 인해 거창에 가면 아픔의 학살현장 외에도 동계고택을 떠올리게 될 것이고 순천 선암사에 들러 유쾌한 해우소에 들러 근심 한 자락 풀어 낼 것 같다. 또 낙화암의 풍광에서 더 이상 영욕의 백제의 의자왕과 삼천궁녀를 떠 올리지 않을 테고 그 너머의 역사를 떠올리지 싶다. 따라서 답사는 아는 것에 더해 숨어 있던 세상과 조우하는 신실한 기쁨이 될 테다. 

한 시대, 한 민족의 문화는 건축이라는 나무에 미술이라는 꽃으로 남게 된다.(p.366)

다시 문화유산을 생각해 본다. 선생의 지기 이강승이 쓴 편지 한 꼭지에 소개된 "바람도 돌도 나무도 산수문전 같단다."에 깃든 의미처럼 다양한 문양과 형상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그 돋을새김 하나에 깎이고 패인 세월의 흔적을 따라 유구하게 흘렀던 그 정신이 오롯이 피어나지 않을까.

반갑다, 나의 문화유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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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011-05-12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 큼큼 .
 

穀雨(곡우) 2011-05-12 18:15   좋아요 0 | URL
책내음이라면 아주 좋아요. 선생님의 책.
길가에 핀 코스모스향이 날 것 같다는....^^
 

 

브람스가 없었다면 난 이미 정신 줄을 놓았을지 모르겠다. 과거의 그가 그 위대한 명곡을 마치 나를 위해서 고맙게도 헌사(?)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팽팽한 피로에 넉다운당했을 테다. 아이는 참 신기한 게, 그렇게 울어 대다가도 음이 시작되고 모여 안단테와 라르고 사이를 오고 가는 아다지오의 선율에 마법처럼 홀려 든다. 평화의 풍요는 그렇게 열리고 주어지는 게 분명하리라.

브람스의 자장가, "Guten Abend, gut Nacht".  



그 순간만은 독일어의 격한 발음이 천상의 언어로 들리고 하모니는 깃털처럼 가벼운 부피로 온몸을 자극한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나를 해방시켜 준 그 농밀한 언어에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하지만 삶이 그렇게 녹록하거나 용이했던가. 잠시의 틈을 탄 달콤한 자유의 시간에 나는 책과의 줄타기는 뒷전이고 한 번 영접하면 헤어나기 힘들다는 지름신의 화신으로 돌변한다.

인간이 간사하고 물신物神을 숭배하는 본성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미풍으로 시작된 바람은 태풍처럼 커지는, 그것이 문제다. 변화된 환경, 조건, 필요에 의해 버릴 것과 취할 것을 나누고 그 경계에서 적당히 여유를 부리는 것이 합리적인 소비라고 믿었다. 필요라는 조건이 산출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름의 잣대를 가지고 처리했다는 말인데, 어떻게 보면 내가 생각해도 참 피곤한 습관의 소유자라는 뜻.

경제관념이 탁월해서, 이재에 밝아서, 갖은 소비신공을 습득한 내공이 풍부한, 온갖 미사어구를 붙여도 남는 것은 무엇을 위해 쓰고 취했냐는 사실이다. 물론 같은 값이면 더 싼 곳에서 소비를 한다면 억울한 비용을 지출하지도 않아도 되는 심리적인 보상을 받겠지만 소유의 욕망에 비해 그것이 전부는 아니더라는 말이다. 1+1의 마술이나 반값으로 세상을 깎아 버리겠다고 도배하는 그것도 나의 소비만족도를 충족시키지는 못한다.

이미 눈높이, 내가 만족할만한 결과치의 잣대는 상상을 초월한다. 마티즈를 사기 위해 매장을 방문했던 사람이 결국 수입외제차에 지갑을 열고 48개월 할부가 줄은 선 그 물신의 상징에 득의양양 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왜 이렇게 더 나은, 더 좋은, 더 가치 있는 주체할 수 없는 잣대를 지니게 되었는지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마음 속 닻내림이 어떻게 이동했는지도 또한 마찬가지다. 어쩌면 브람스가 들려 준 그 느리게 깔리는 빠르기가 생경한 것도 어찌 보면 이유 아닌 이유겠다.

찾아보니 일종의 과시효과라고 하는데, 당최 내가 무엇을 과시했나에 시선이 머문다. 욕망이 지나쳤던 것도 아니고 아이에게 보다 나은 편리를 제공하고 싶은 지극히 보편적인 생각에서 출발했건만 왜 그런 올가미에 씌어 잠시나마 우울해진 걸까. 뭐, 인간이 덜 된 건 해가 뜨고 지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므로 그 쾌감의 질주본능과도 같은 소비로부터 위안을 받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기백만 원을 호가하는 수입산 유모차를 끈다고 기죽을 일은 아닐 테고 다양성이 낳은 개성이 빚은 촌극이라는 것도 아니다.

단지, 편리와 위안을 너무 앞에 두었다. 값이 저렴할수록 기회비용은 더 커지더라는 것은 이미 학습효과를 통해서 알게 된 일이니 문제될 것은 없지만 기업이 교묘하게 물건의 등급이나 옵션을 조절한 그 마수에 걸려들지 않아야 한다. 감정의 틈입을 교묘하게 비집고 헤어 나 온 그 무시무시한 '친환경', '오가닉', '순수자연'을 경계하고 경계해야 한다. 얄팍한 문장으로 안전을 모두 담보할 수 없음에도 나는 무시했고 뭉개버렸다. 이름하여 열혈맹신추종세력으로 등극, 퍽이나 좋아라할 일이다.

시시각각 비트음 사이로 빛의 속도로 건네 오는 연락의 메시지, "오늘만 반값". 미치고 환장할 일.

그래도 좋다. 나에겐 설마가 있으니 역시는 얼씬도 못 할 테니. 뭉텅뭉텅 빠지는 잔고만큼 나를 위로해 준다면 눈 딱 감고 볼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무 비싸다. 세상을 반값으로 깎아 주지만 말고 처음부터 제 값을 받으면 얼마나 좋으냐. 그래도 소비의 등급은 갈리고 또 쪼개지겠지만.......


ps) 그러고 보니 알뜰살뜰한 미덕은 동네슈퍼가 기업형 슈퍼마켓(SSM)에 먹히기 전 케케묵은 달나라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아니면 안드로메다에서나 존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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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4-29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서가 브람스를 좋아하는군요?
갑자기 브람스가 듣고 싶어서, 저도 가입해놓은 음악 사이트에서 브람스를 찾아 듣고 있는 중입니다.
좋네요..... 은서야, 고마와~

아이에게 사주고픈게 많아지셨나봐요?

穀雨(곡우) 2011-04-30 09:10   좋아요 0 | URL
아..b형 동지...^^ 마고님...ㅋㅋ
사주고픈건 많은데, 욕심이 과한 게지요. 나름 반성중입니다.ㅎㅎㅎ
클래식, 좀체 들을 여유가 나지 않는데, 이렇게 막내 덕에 듣습니다.

비 오는 주말, 커피 한잔 우려내서 맘껏 게으름도 피우고 그러면
좋을 그런 날입니다.
 
아가미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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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 시절 주말의 명화는 건조한 일상에 나에겐 소금처럼 위안이 되곤 했다. 할리우드식 꿈을 꾸고 희망에 달 떠 어디론가 하염없이 부유하곤 했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해 내고 언제나 정의는 굴복하지 않고 승리한다는 방정식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한 동안은 그 속에 도취되어 빠져 들었지 싶다. 지금 생각해보면 늘어 나 헤어진 티셔츠처럼 유치하기 짝이 없는 희석된 감동이지만 나는 크리스토퍼 리브의 강인한 체력과 시공을 초월하는 초능력을 흠모했다. 그것만 있으면 모든 게 이루어질 것 같고 우주 끝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가 한 손에 잡힐 것 같은 무모한 공상, 아니 몽상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는 슈퍼맨을 사랑했다. 슈퍼맨은 악당을 때려잡는 영웅중의 영웅이다. 다른 모든 영웅들을 일거에 제압하고도 남을 우월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가 말도 안 되는 비교에, "슈퍼맨과 배트맨이 싸우면 누가 이겨요?"라는, 허덕일 때도 나는 슈퍼맨이 좋았다. 사람 좋은 서글서글한 눈빛으로 우리의 여주인공 마고 키더가 분한 로이스 레인에게 보내는 강렬한 신호, 애간장을 녹였다. 로키산맥이 달리고 바람을 잠재우던 슈퍼맨의 비행은 황홀했다. 엔딩의 허무함을 위무할 만큼. 

슈퍼맨이 아니었더라도 인간은 한계를 참지 못하는 유별난 종족이다. 구병모가 쓴 <아가미>와 굳이 아무런 역학관계가 없는 슈퍼맨을 끌어 온 것은 인간이 가진 한계, 그 속에 녹아 든 다양한 감각의 흐름이 맞물렸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인간이 진화를 거듭하고 변신을 또 다시 거듭한다면 아가미가 솟아나고 눈부신 무지갯빛 지느러미가 생기지 말란 법이 없으니 말이다. 어차피 인간의 기원은 물에서 나왔으니 부인할 수는 없다. 횡격막을 사이로 나란히 한 쌍의 폐포에 덮인 공기호흡을 위한 유일한 장치에 더 해 모세혈관을 통해 용해된 산소를 채집하는 아가미가 함께 공존한다면 포세이돈의 축복일까 아니면 저주일까.

상상은 의외로 가까운 거리에서 퍼져 나간다. 구병모의 <아가미>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모든 연결고리를 가동하면 일파만파로 퍼지는 감각은 동심원처럼 끝도 없지 싶다. 그미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가 무엇이 되었든 단련되고 고착된 시각의 거름망을 통해 자극은 시작된다. 하지만 결국 잃어버린 것, 상실의 순간을 회고하게 되리라는 공통점에 정박한다. 곤의 날렵하고 세련된 유영을 따라 물살의 저항에 감정을 끼어 맞추다 보면 매몰된 감정의 결락된 순간과 조우한다는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무언가를 버리고 또 버리기 위해서 산다. 갖기 위해 버리는 것인지 버리기 위해 갖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감정도 과소비되어 빈곤에 허덕이는지 모른다. 아픔도 슬픔도 기쁨도 모두 제 것 그대로의 그 날것의 상태를 상실했다. 날 선 세상에 치이고 넘어지다 보니 무엇이 진실인지 안다는 것이 오히려 두렵고 현실을 담보 잡힌 비현실이 판치는 세상이다. 그러니 아가미쯤 있다고 대수겠는가. 그 아가미를 통해 저 푸른 대양으로 부여잡지 못한 진실과 마주한다면 그 시절 내가 꿈꾸었던 슈퍼맨에 대한 환상과 무엇이 다를까.

애석하게도 현실은 냉혹하다. 짝이 맞지 않는 의자를 가운데 두고 춤을 추다 앉지 못하면 기회는 박탈당하고 추락으로 점철되는 세상의 이면에 도사린 날카롭게 뻗은 아픔의 촉수를 너무도 잘 안다. 실제 곤의 아픔은 처절한 빈곤의 상처가 발화한 그 시점에서라는 설정도 모두가 수긍할 감정의 고리를 낚아챘음 이다. 그러므로 곤의 수중생물로의 변신 내지는 회귀도 충격에 따른 현상을 극복할 소망이다. 그와 매개된 모든 이들이 또 다른 아픔과 상실을 반복하는 동안 응집된 감정의 편린은 애환이었다. 공유하는 자의 맹목적인 질투는 어색하지 않다. 그것이 사랑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가르쳐 주어서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강하도, 노인도, 강하의 어머니 이녕도 모두 물결이 쓸려간 뒤틀린 삶 속에서 아파했다. 그들의 아픔은 곧 곤을 향한 바람이었다. 던적스럽고 비루한 삶에 대한 실낱같은 바람.

곤이 품은 아픔의 지도를 관찰하는 역할을 자청하고 나선 숙달된 안내자 해류의 간결하고 건조한 태도가 없었다면 그저 그런 아가미를 단 한 남자의 망상에 지나지 않았을 테다. 해류가 가진 물속처럼 템포가 느려지고 굴절된 세상을 곤의 비현실적인 신비로움이 더해져 현실의 바람으로 변신할 추동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해류의 글자 그대로의 뜻처럼 시간도 공간도 모두 흐른다. 저항의 순간을 극복하는 것은 개별화된 몫이고 원죄에 가깝다. 그렇지만 나약한 현실을 거꾸로 돌려 세우는 힘은 스스로에게 내재된 능력이다.

아가미를 통해 숨을 쉬고 미끈거리도록 유영하는 공상의 시간을 선물한 구병모의 글은 기발하다. 식어 빠진 사랑이야기도 무미건조해 지루하기만한 불륜이야기도 <아가미>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는 이유는 행간과 행간에 숨은 희망이 오롯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강렬한 에너지다. 전작 <위저드 베이커리>로 활자의 마술을 부리던 그녀의 언어가 다시 <아가미>를 통해 폐부 깊숙이 찔러 오는 심해의 아득한 물결처럼 그 맛은, 알싸함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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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4-26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주드님의 서재에서 바다 밑을 걷겠다는 문구를 읽었어요.
아가미에 대한 페이퍼를, 푸른 대양으로 뻗어나가려는 이야기를, 그리고 너무나 순수했던 슈퍼맨을 다시 회상하니
바다 밑에서 자신을 날것 그대로 마주치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정녕 함께하며 그러면서도 '나'를 바라볼 수는 없는걸까요?
아..... 저두 이 책 읽구 싶어요!

穀雨(곡우) 2011-04-27 08:54   좋아요 0 | URL
금방 읽히는 책입니다. 문고판으로 200페이지가 조금 넘으니 금세 바닥이 드러날거예요.
너무 빨리 도착한 끝자락만큼 밀려 오는 것도 많을 듯......^^

sslmo 2011-04-27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위저드베이커리가 참 좋았어요.
아가미는 뭐 읽지 않았지만, 아들의 필독서여서 언젠간 곁다리로 읽게 되겠지만요.
님의 리뷰만으로도 영화 '그랑블루'가 생각나는 것이 알싸하고 짭쪼름한걸요~^^

穀雨(곡우) 2011-04-28 14:11   좋아요 0 | URL
맞네요. 그랑블루가 어찌 그렇게 안 떠오르던지...^^
그 영화...포스터만으로도 멋졌어요.
 

아이는 이제 세상에 난 지 오늘로써 꼭 한달하고 열흘이 흘렀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살이 차오르고 줄어드는 배냇짓만큼 허공을 맴돌던 눈짓이 서로를 향해 겹쳐지곤 합니다. 무엇이 그리도 신기하고 또 신기한 지 가뭇없이 초점을 맞추는 그 검은 눈망울에서 무한한 생명의 신비로움을 새삼 느껴 봅니다.

비록 밤낮으로 안아달라는 제법 매운 울음 신호를 보내 오지만 품에 안겨 까무룩 잠이 드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순하디 순한 천사와 같습니다. 느즈막에 온 이 아이를 은혜 '은'에 빛낼 '서'를 붙여 부르기로 했습니다. 여러 가지 고운 이름이 물망에 올랐으나 제 언니의 이름인 은솔에 맞춰 부르기 쉽고 예쁜 이름이라 여겨 흔쾌히 지어 불렀습니다. 아직 입에 붙질 않아 제 언니의 이름과 혼동해서 부르기도 하지만 이제사 부족했던 나머지를 채운 기분입니다.




 

이 아이를 보면서 위로 두 아이의 그 잊힌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 갑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잘 자던 아이가 갑작스럽게 자지러질 듯 울어 대는 통에 응급실로 뛰어 날랐지만 아무것도 아니더라는 황망함에 안도하던 기억들이 새록새록합니다. 아무래도 처음이여서 영아산통이겠거니 하는 지레짐작이 낳았던 결과지 싶습니다. 아이가 아프면 마음이 찢어진다는 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무럭무럭 건강하게 잘 커 주었으니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세 아이를 키운다는 것, 말처럼 쉽지만은 않겠지만 아이들이 있어 미처 몰랐던 행복과 마주한다는 것은 엄청난 기쁨입니다. 때론 지치고 힘들겠지만 아이가 도약해 가는 과정을 지켜 보고 응원하는 일은 정말이지 소중하고 설레는 시간들의 연속입니다. 맑디 맑은 웃음 한 소끔이면 육아로 지친 고단한 몸은 새로운 활력에너지로 넘쳐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행복의 터전은 아내의 인내와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할 일임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p.s) 갑자기 생각 난 마녀고양이님의 부탁, 이름 괜찮은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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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도 고모가 됩니다*^^*
    from 즐겁게~재밌게~ 2011-04-21 13:05 
    곡우님네 막둥이 은서~부르기도 좋고, 나이들어도 우아하고, 언니랑 돌림자도 맞으니 정말 이쁜 이름이네요~ 심사숙고하셨으니 아이도 잘 건강하게 클겁니다~ 저희 남동생네도 부부가 머리터지게 공부하더니 여러가지 이름중에 골라달라고조언을부탁하더군요~ 한문공부 좀 하셨다는 저희 큰아버지까지 동원해서 사주팔자에다가 획수까지 세어보고@@;또 아무리 뜻이 좋아도 괜히 정안가는 발음이 있지 않습니까? 저랑 엄마도 좀 참견했습니다ㅋ엄청 고민해서 결정된 쌍둥이들 이름입니다
 
 
sslmo 2011-04-21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아내 분을 업고 다니셔야겠군요.
저는 요즘 주변에서 아기들을 보면 그렇게 예뻐보일 수가 없어요.
하지만 누가 제게 안겨주면, 저희 아들 키웠던 건 다 까먹고 말이죠, 어쩔 줄 몰라해요.
은서, 이름 참 예쁘네요.
제 성과 이름이 한글자씩 겹쳐요~^^

穀雨(곡우) 2011-04-21 09:20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두 그랬어요. 처음으로 건네 주는 데 어떻게 안았지하는 난감함....^^
목욕할 때도 불안하다고 자지러지는데, 이젠 제법 적응을 했는지 거뜬하답니다.
아, 저도 아내를 업고 다니고 싶지만 크윽.....무너집니다...ㅋㅋ

blanca 2011-04-21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서, 너무 이쁜 이름이네요. 아가도 너무 이쁘고. 세아이.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실 것 같아요.

穀雨(곡우) 2011-04-21 10:40   좋아요 0 | URL
ㅎㅎㅎ 행복해지는만큼 웃음소리는 더 올라가지만 반면 주름살도 더 더 더 짙어집니다.ㅋㅋ

마녀고양이 2011-04-23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웃잖아요. 저렇게 작은데, 저 입가 좀 봐.
어쩜 좋아요, 너무 이뻐요. 저렇게 편안한 얼굴이라니.

은서, 너무 이쁜 이름이예요. 은혜를 빛내다, 참 좋아요.
곡우님.... 요즘 따님 보시는 낙에 쏠쏠하시겠어요, 순하기까지 하다니!

穀雨(곡우) 2011-04-25 10:52   좋아요 0 | URL
웃는 사진, 순간포착이었지만 깜놀했다는...^^
잠이 너무 너무 고프지만...그래도 좋아요...ㅋㅋ
감사합니다. 마고님...^^

감은빛 2011-04-28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아기가 너무 예뻐요!
세 아이들 모두 건강하게 잘 자라길 바랍니다.

저도 조금 전에 잠결에 뒤척이는 아이들 이불 덮어주었는데,
너무 예뻐서 어쩔줄을 모르겠더라구요. ^^

穀雨(곡우) 2011-04-28 14:14   좋아요 0 | URL
ㅎㅎㅎ 고슴도치 자식자랑입니다.^^
막내의 웃는 사진을 혼자보기 아까워 올리다 보니 다른 아이들도 밟히고 해서....ㅋㅋ
감은빛님은 아마 저 보다 훨씬 잘하실겁니다. 감사합니다.^^
 

 

장애障碍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편하거나 곤란한 경우를 말한다.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전적 정의에 불과하다. 실제 장애가 있다는 것, 그 존재만으로도 편견에 노출되는 것이 현실이다. 장애는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다르다는 잣대에서 비롯되는 관념이다. 정상이라는 생물학적 보편성이 장애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겠으나, 그 대가는 가혹하고 혹독하다. 

나는 장애의 불편이 누구에게나 존재한다고 본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경계에서 우리는, 정상인이라고 하는,  완벽할 수는 없다. 마음의 왜곡, 더 큰 장애다. 단지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무관심으로 재단한다면 이 또한 장애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오히려 정신에 병이 들면 그 위험성은 시한폭탄처럼 위험하다. 사람이 모두 똑같은 인성을 가지고 태어날 수는 없지만 몰 인격화되는 현상은 병적인 성공집착현상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성공의 도식을 분해해 보면 경쟁은 그림자처럼 엉겨 붙는다. 경쟁과 성공의 함의는 물질과 결합하고 빗나간 명예와 권력을 생산한다. 따지고 보면 정상인으로 태어났더라도 가난의 굴레를 벗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영원한 루저로 낙인찍는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보편적 가치문제다. 읽혀지고 쓰인 가치가 아닌 마음 속 깊이 공명하는 삶에 대한 윤리 항상성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성공에 뒤쳐져 절망하고 좌절하고 패자로 따돌림 되어 고귀한 목숨을 불태우는 기이한 현상이 자고 일어나면 발생하는 섬뜩한 나라,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시큼해진다.

긴장은 해소되지 못하고 관용은 자취를 감추는 공격적 성향이 지배하는 갈등사회를 유발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누군가의 약점을 이용하고 악착같이 물고 흔드는 폭력성은 긴장이 가르친 필연의 결과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사회는 균형을 맞추어가는 힘, 에너지는 반드시 존재한다. 오랜 기간 베스트셀러 수위에 올라 있는 마이클 샌든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보면 이해 가능하다. 책의 내용이 얼마나 좋은지는 차치하고라도 잃어버린 방향 감을 찾고자하는 절실함이 그랬을 테고 그것으로 인해 삶의 나침반이 되는 계기가 될 것임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스스로의 의지로 간극을 메워주는 자정작용이 장애를 극복하는 그들의 노력과 전혀 다르지 않다. 단지 불편하다는 상태는 그들에게 시간과 공간을 더 내어 주고 이에 앞서 동등한 시선을 담은 신호를 보내어 준다면 함께 사는 사회의 미덕을 절로 생겨난다. 때마침 4월 20일이 24절기 중 청명과 입하의 사이에 곡우가 있는 것도 엇비슷한 관념을 지니고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미친다. 곡우는 윤택하고 촉촉한 봄비가 대지를 적시는 고마운 하늘과 땅과 화합하는 시간임을 상기한다면 장애 또한 무엇이 다르겠는가.

자연이 주는 고마움이 절실한 이 때, 어쭙잖은 생각 한 꼭지나마 보태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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