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障碍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편하거나 곤란한 경우를 말한다.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전적 정의에 불과하다. 실제 장애가 있다는 것, 그 존재만으로도 편견에 노출되는 것이 현실이다. 장애는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다르다는 잣대에서 비롯되는 관념이다. 정상이라는 생물학적 보편성이 장애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겠으나, 그 대가는 가혹하고 혹독하다.
나는 장애의 불편이 누구에게나 존재한다고 본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경계에서 우리는, 정상인이라고 하는, 완벽할 수는 없다. 마음의 왜곡, 더 큰 장애다. 단지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무관심으로 재단한다면 이 또한 장애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오히려 정신에 병이 들면 그 위험성은 시한폭탄처럼 위험하다. 사람이 모두 똑같은 인성을 가지고 태어날 수는 없지만 몰 인격화되는 현상은 병적인 성공집착현상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성공의 도식을 분해해 보면 경쟁은 그림자처럼 엉겨 붙는다. 경쟁과 성공의 함의는 물질과 결합하고 빗나간 명예와 권력을 생산한다. 따지고 보면 정상인으로 태어났더라도 가난의 굴레를 벗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영원한 루저로 낙인찍는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보편적 가치문제다. 읽혀지고 쓰인 가치가 아닌 마음 속 깊이 공명하는 삶에 대한 윤리 항상성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성공에 뒤쳐져 절망하고 좌절하고 패자로 따돌림 되어 고귀한 목숨을 불태우는 기이한 현상이 자고 일어나면 발생하는 섬뜩한 나라,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시큼해진다.
긴장은 해소되지 못하고 관용은 자취를 감추는 공격적 성향이 지배하는 갈등사회를 유발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누군가의 약점을 이용하고 악착같이 물고 흔드는 폭력성은 긴장이 가르친 필연의 결과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사회는 균형을 맞추어가는 힘, 에너지는 반드시 존재한다. 오랜 기간 베스트셀러 수위에 올라 있는 마이클 샌든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보면 이해 가능하다. 책의 내용이 얼마나 좋은지는 차치하고라도 잃어버린 방향 감을 찾고자하는 절실함이 그랬을 테고 그것으로 인해 삶의 나침반이 되는 계기가 될 것임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스스로의 의지로 간극을 메워주는 자정작용이 장애를 극복하는 그들의 노력과 전혀 다르지 않다. 단지 불편하다는 상태는 그들에게 시간과 공간을 더 내어 주고 이에 앞서 동등한 시선을 담은 신호를 보내어 준다면 함께 사는 사회의 미덕을 절로 생겨난다. 때마침 4월 20일이 24절기 중 청명과 입하의 사이에 곡우가 있는 것도 엇비슷한 관념을 지니고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미친다. 곡우는 윤택하고 촉촉한 봄비가 대지를 적시는 고마운 하늘과 땅과 화합하는 시간임을 상기한다면 장애 또한 무엇이 다르겠는가.
자연이 주는 고마움이 절실한 이 때, 어쭙잖은 생각 한 꼭지나마 보태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