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로베르트 발저)에 실린 '산책 2'를 읽었다.

by smellypumpy (출처: 픽사베이)


cf. 예세닌 서정시선 '자작나무'(박형규 역)를 담아둔다.






때때로 나는 우두커니 서서, 어떤 콜럼버스도 아직 발견하지 못한 아메리카 대륙 같은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멀리서 왔고, 그만큼 다시 멀리 가기로 실제로 단단히 마음먹은 듯했다. 마치 내가 막 발을 들여놓은 호주 땅을 파란 눈이나 갈색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처음에는 상상 속에서 키르기스스탄의 대초원을 지나고, 뾰족하게 솟은 봉우리가 하늘 가장자리에 닿아 있는 아르헨티나 산을 오르는 것으로 만족했다.

내 마음은 낙원의 새들과 서먹하면서도 신뢰감을 불러일으키는 우정을 맺었다.

러시아의 경이로운 광활함이 군데군데 자작나무로 장식된 평원의 형태로 내 머릿속에 그레이하운드처럼 매끈하게 떠올랐는데, 그럴 때마다 내 속에서는 강인한 굳건함과 명랑한 인내심이 되살아났다. - 산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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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어제보다는 덜 추운 듯하다. 추운 겨울이다. '산책자'(배수아 역)에 실린 로베트르 발저의 '겨울'을 읽었다. 그렇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

The Four Seasons, Winter, 1861 - Paul Cezanne - WikiArt.org


겨울은 추위로써 능력을 과시한다. 바라건대 모든 방에 난롯불이 타오르고 모든 이의 몸에 외투가 걸쳐지기를. 모피와 실내화가 중요해지고, 불이 매력을 되찾으며, 누구나 온기를 원하게 된다. 겨울은 긴 밤을 가지며, 짧은 낮과 앙상한 나무를 갖는다.

얼마 전에는 이런 꿈을 꾸었다. 나는 둥글고 섬세한 얼음판 위를 날고 있었다. 얼음은 유리창처럼 얇고 투명했으며 표면은 마치 유리로 된 파도 모양으로 솟아올랐다가 하강하고 있었다. 얼음판 아래서 봄의 꽃들이 자라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수호천사의 손에 들려진 듯이 나는 이리저리 둥실 떠다녔고, 아무런 중력의 구속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움직임에 즐거워했다.

호수 한가운데 사원이 하나 있는데, 다가가 보니 그것은 사원이 아니라 식당 겸 술집이었다. 안으로 들어선 나는 커피와 케이크를 주문해서 먹고 마신 후 담배 한 개비를 피웠다. 그런 다음 밖으로 나와 조금 전의 연습을 계속하려고 하자 수면의 얼음이 깨져버렸고, 나는 반갑게 맞아주는 꽃들 사이로 깊이깊이 가라앉았다.

겨울 다음에는 언제나 봄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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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둘째날인 오늘 '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로베르트 발저)를 읽기 시작했다.


로베르트 발저의 쓸모없는 인간, 방랑자, 한가한 산책자는 "낭만적인 독일 숲과 계곡"(베냐민)의 직접적인 소산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많은 글을 보면 숲은 낭만주의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적인 것의 영역으로 볼 수 있다.

그의 글은 유혹과 위험이라는 양가감정을 깔고 있고, 대부분 ‘간접적으로’, 그러니까 신문이나 예술 작품, 문학작품에서 소재와 자극을 얻는다. 연대순으로 정리된 이 책은 신문 문예란에 기고한 글을 비롯해 발저 생전에 출간되지 않은 글까지 모아놓았다. 하나같이 숲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글이다.

발저의 텍스트는 "초록빛 수수께끼"나 "전능한 지배력의 초록", 비밀에 찬 숲, "작은 새", 떡갈나무 숲, 전나무 숲, 불가사의한 마법의 숲, 산불, 또는 "활기 없고 죽고 짓눌린" 바위의 숲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글들은 숲의 미학을 강조한다. 또한 1903년의 초기 단편에서는 숲이 오직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화가에 의해서만 묘사될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에 숲에 들어가 어둠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는 예술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할 거라고 말한다. - 엮은이 후기

엮은이 자비네 아이켄로트Sabine Eickenrodt 에르하르트 쉬츠Erhart Schü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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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2026-01-03 2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명화로 페이퍼를 장식하셨네요!
눈이 호강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서곡님.^^

서곡 2026-01-03 22:4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모나리자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요~~~
 

'산책자'(로베르트 발저)가 아래 글의 출처이다.

폴 세잔, 《풀밭 위의 점심 식사》, 1876~1877년, 오랑주리 미술관 cf. 올해 1월25일까지 우리 나라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하는 세잔의 작품 중 하나이다. 마네의 유명한 동명의 그림을 오마주한 것일까. Le Déjeuner sur l'herbe https://en.wikipedia.org/wiki/Le_D%C3%A9jeuner_sur_l%27herbe






그는 자신이 그리는 모든 대상으로부터 대상의 본질을 누설해도 된다는 승인을 얻기를, 승인을 받아내기를 추구했으며, 그리하여 비로소 위대함과 사소함을 동시에 동일한 ‘사원’에 배치할 수 있었다.

그가 주시한 것은 의미심장한 존재가 되었다. 그가 형체를 만들어 입힌 것이 그를 주시했다. 마치 그로 인해서 행운을 얻었다는 듯이. 그리고 마찬가지 방식으로 그것은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 세잔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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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6-01-01 17: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곡님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서곡 2026-01-01 21:24   좋아요 0 | URL
해피뉴이어 그레이스님 감사합니다!!!

꼬마요정 2026-01-01 1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곡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서곡 2026-01-01 21:2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꼬마요정님 어서 쾌차하세요~~~
 

작년이 된 2025년의 첫날에 화가 폴 세잔에 관해 페이퍼를 작성했다. 2025년의 첫 페이퍼였다. 한 해가 흘렀고 올해 2026년도 세잔으로 시작한다. 마침 지금 읽고 있는 중인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산책자'(배수아 역)에 세잔이 주제인 글이 있다.

Tulips in a Vase, 1892 - Paul Cezanne - WikiArt.org


Still Life, Tulips and apples, 1894 - Paul Cezanne - WikiArt.org


* '세상의 끝 - 로베르트 발저 산문.단편선집'(임홍배 역)에도 '세잔 생각'이 실려 있다.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은, 예를 들자면 흔하다면 흔하고 신기하다면 신기하다고 할 수 있는 이 과일들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는 과일의 형태에 깊이 몰두한 상태였다. 겉을 팽팽하게 감싼 껍질에, 과일이란 존재 자체의 고유하면서 독특한 고요에, 과시적이면서 동시에 선량하게 웃고 있는 외양에. "이건 정말로 거의 비극이로군." 그는 생각했다. "자신들의 유용성과 아름다움을 전혀 의식할 수 없을 테니 말이야." 과일들이 스스로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자기가 가진 사고력을 과일들에게 전달하고 흘려보내고 옮겨주고 싶었다. 내 말은, 그가 과일들의 처지를 가엾게 여겼을 것이 분명하고, 그런 다음에는 문득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에 빠져들었을 것이며,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런 감정이 드는지 그 이유는 오랫동안 전혀 알지 못했을 거라는 뜻이다.

그가 마법을 써서 종이 위로 옮겨놓은 꽃들은 식물 특유의 흐느적거림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여전히 이파리를 떨었고, 방종한 몸짓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식물의 살덩어리, 특별한 천성에 깃든 불가해한 비밀의 정신을 표현하는 일이었다. - 세잔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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