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오늘의 포스트로부터. 

올해 6월의 큐 가든 By Photograph by Mike Peel - Own work, CC BY-SA 4.0, 위키미디어커먼즈 https://www.mikepeel.net/



Great Palm House, Kew Gardens 1851 By Thomas H. Shepherd -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커먼즈


큐 가든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87XX40600095








날씨가 정말 더웠다. 얼마나 더운지 개똥지빠귀조차 꽃나무 그늘 속에서 기계로 만든 새처럼 깡충깡충 뛰었다. 한 번 뛰고 나서 다시 뛸 때까지는 상당한 간격이 있었다. 하얀 나비들도 한가로이 사방을 날아다니지 않고 한데 모여 팔랑거렸다. 날개에서 키 큰 꽃나무 위로 떨어지는 하얀 가루가 부서진 대리석 기둥 같았다. 반짝이는 녹색 우산들로 가득 찬 시장이 해가 나자 문을 연 것처럼, 야자수 재배 온실의 유리 지붕이 눈부시게 빛났다. 윙윙거리는 비행기 소리 속에서 여름 하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격렬한 열정을 토해냈다. - 큐 국립식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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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아이브스(2019) - 사진: UnsplashSimon Godfrey


[네이버 지식백과] 세인트 아이브스 [St. Ives, St Ives]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357455&cid=40942&categoryId=34082






우리는 주위 경관이 어두워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반 시간쯤 지나자 발아래 길 모습이 안개 속에서 꿈틀대기 시작했고 발걸음마다 땅바닥 위를 걷는지 확인하기 위해 머뭇거릴 정도가 되었다. 몇 미터 앞을 지나가던 사람 모습이 잠시 머뭇대더니 마치 어두운 밤물결 속으로 빠져버린 듯 이내 그 속으로 사라져버렸고, 목소리조차 저 멀리 바닥에서 다가오는 듯 들렸다.

침묵의 순간들이 자주 다가왔고 옆에 같이 걷던 사람조차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일행들은 사방에 어둠이 엄습하는 것을 느끼면서 점차 어둠을 받아들이며 각자 걸어가기 시작했고, 땅 위를 움직이는 몸뚱어리는 넋 나간 듯 떠다니는 영혼과 분리된 듯했다. 심지어 길조차 우리 뒤편으로 사라지게 되자 우리는 길의 흔적도 사라져버린 어둠의 밤바다를 몸으로 부딪치며 나아갔다. - 버지니아 울프 <밤 산책> / 1장 걷기는 마음이 시키는 일

울프는 거의 매일 산책을 했고, 이를 바탕으로 많은 글을 썼다. 그중 <밤 산책>은 1905년 여름 사 남매가 함께 잉글랜드 남부 세인트아이브스 근처 해안에 머물며 쓴 일기를 발전시킨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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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중인 레너드와 줄리아, 버지니아의 부모. 사진을 찍은 바네사는 버지니아의 언니로서 결혼 후 바네사 벨이 된다. Julia and Leslie Stephen reading, Virginia in background, in the library at Talland House By Vanessa Bell - Smith College Librarie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커먼즈


'걷기의 즐거움 - 우리가 사랑한 작가들의 매혹적인 걷기의 말들'(원제 The Joy of Walking)의 '1장 걷기는 마음이 시키는 일'에 버지니아 울프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이 쓴 글이 실려 있다. (버지니아 스티븐은 레너드 울프와 결혼하여 성이 울프로 바뀐다.) 백과사전을 편찬하는 등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레슬리 스티븐은 등산가로도 유명했다고. 


[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레슬리 스티븐(1832~1904) | 한국일보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0610190029651761


'마운틴 오디세이'(심산) '02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산에 올라야 한다 - 레슬리 스티븐(1832~1904)'





내 인생을 ‘잘 보낸’ 순간을 떠올려보면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던 사건이 중요하게 기억돼 있곤 한다. 기억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머릿속 앨범을 열어보니 예전에 걸었던 경험들이 가장 뚜렷하게 떠오른다.

뭐라고 끄적대며 힘들게 책을 써내던 기억은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도 없고 어떤 경험이었는지도 잊어버렸다. 하지만 즐거웠던 산책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 부수적으로 글을 쓰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함께 떠오른다. 산책 덕분에 고생을 끝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글쓰기란 결국 이리저리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얻은 부산물이다. 나의 하루하루는 타고난 경건함으로(아니, 타고난 경건함만으로) 얽혀 있기보다 걷기에 대한 열망으로 얽혀 있다. (중략) 걷기에 대한 기억은 특정 시공간대와 연관해 장소 및 시간이 뚜렷하게 떠오른다.

무의식적으로 달력 모양으로 떠오르면서 연관된 다른 기억들도 줄줄이 떠오르게 된다. 돌이켜보면, 일련의 모습들이 하나씩 떠오르면서 걷기 속에 담겨 있는 나의 ‘지상 순례(earthly pilgrimage)’의 매 단계를 보여준다. 각각의 모습은 한때 익숙했던 장소를 떠오르게 하고 장소와 연관된 생각들은 다시금 당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떠올리게 해준다.

사람들은 기계적 교육을 받고 움직이는 자동인형으로 크는 것이 아니라, 정제되지 않은 그런 투박한 방식을 따라 자신을 돌아보는 개별적 존재로 점차 성장하게 된다.

이런 신비의 세계로 처음 진입한 그날은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배낭을 메고 하이델베르크에서 오덴발트로 가는 길이었다. 그때 나는 도보 여행에서 만끽할 수 있는 혼자 떨어져 있다는 상쾌한 기분을 처음으로 느꼈다. 기차 시간표나 거추장스러운 장비 등에서 해방된 채, 발에 의지해 멈추고 싶을 때 멈추고 생각이 이끄는 대로 샛길로 빠지기도 하면서, 하룻밤 묵는 숙소마다 마주친 이런저런 독특하고 다양한 삶에 빠져들었다. - 레슬리 스티븐 <걷기 예찬>

아주 열성적인 등산가였던 그는 세계 최초의 산악회인 알파인 클럽의 회장직을 몇 년 동안 맡기도 했다. 걷기에 대한 그의 열정은 여기 실린 <걷기 예찬>(1898)에 확연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걷기가 몸과 마음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주며 지위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걷기의 경험 하나하나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장을 구분 짓는 일종의 지표 역할을 해준다고 말했다. 이 지표를 통해 특정 시간 특수한 장소에서 걷기를 행한 사람의 정서적·지적 상태를 담아낸다는 것인데, 이는 걷기의 기억이 인생이라는 긴 여행, 즉 "지상 순례"에서 군데군데 쉬었다 가는 정거장 역할을 해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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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4-07-23 22: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머리가 복잡한 날에는 나가서 조금 걷고 오면 좋은 것 같은데,
요즘엔 날씨가 너무 덥고 습도가 높아서 나가고 싶지 않아요.
서곡님, 더운 날씨 시원하고 좋은 밤 되세요.^^

서곡 2024-07-23 22:48   좋아요 1 | URL
저는 이 포스팅 하면서 걷기 책도 좋지만 직접 걸어야 하는데, 라고 생각했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권여선 소설집 '각각의 계절'(2023) 수록작이자 2021년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인 '기억의 왈츠'에 김민기의 노래가 아래와 같이 나온다. 이 단편은 '여덟 편의 안부 인사'(2021) 발표작이다.


'각각의 계절' 해설은 문학평론가 권희철이 썼다. 








차돌 이내몸 - 김민기 / 가사집 https://gasazip.com/69184









그때 놀랍게도 경서가 낮은 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으로 차돌멩이로

슬픈 노래 부르지 마라

나도 어느새 경서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심지어 그가 가사를 모르는 부분에선 혼자 부르기도 했다. 노래가 3절까지 완벽하게 끝났을 때 구선배가 뭐 이런 빌어먹을 노래를 끝까지 다 부르고 난리냐며 술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승희가 좋아요, 하고 일어났다. 경서도 좋죠, 하고 일어나더니, 같이 가도 되는지 빠져줘야 하는지 몰라 멀뚱멀뚱 앉아 있는 내게 기묘한 손짓을 했다. 다리가 불편한 숙녀에게 춤이라도 권하는 듯한, 우아하고 장난스런 초대의 손짓을.

요즘도 나는 젊은 날 도대체 왜 이런 노래들만 부르고 살았을까 싶은, 그러나 하도 불러 아직도 가사를 완벽하게 외우고 있는 노래들을 이따금 불러보곤 한다. 내 머릿속으로 차돌멩이로 슬픈 노래 부르지 마라…… 한 사람이 죽으려고 태어난 것 같다 산산이 부서져라…… - 기억의 왈츠

「기억의 왈츠」에서 화자와 경서가 도서관 터널에서 만났을 때 함께 부른 노래, "요즘도 나는 젊은 날 도대체 왜 이런 노래들만 부르고 살았을까 싶은, 그러나 하도 불러 아직도 가사를 완벽하게 외우고 있는 노래들을 이따금 불러보곤 한다"고 했던 그 노래는 김민기의 〈차돌 이내몸〉* 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십대의 화자와 경서는 거의 사십 년이 지난 뒤에야 간신히 알게 될 것을 당시의 유행가에 기대어 미리 불러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먼 훗날 화자는 스스로의 삶에 덫을 치고 삶을 죽음으로 바꿔놓는 바람에 자기 삶을 그렇게 ‘작고 딱딱한 결정체’로 위축시키고 말았지만 이제는 그것을 깨뜨려야 하고 깨진 듯이 외쳐야 하고 그렇게 해서 산산이 부서뜨리고 살아 움직이는 삶으로 다시 써야만 한다고 절감하게 되었는데 약 사십 년 전부터 반복되던 이 노래의 후렴구가 이미 ‘산산이 부서져라 차돌(=작고 딱딱한 결정체) 이내몸/ 깨뜨리고 깨진 듯이 외쳐라’이기 때문이다.

* 이 노래 자체에 이미 ‘다시 부르기’의 작은 역사가 내재되어 있다. 1970년대 당국의 요주의 인물이었던 김민기가 작사·작곡한 〈차돌 이내몸〉은 1974년 양희은의 앨범으로 발매되었으나 금지곡 처분으로 전량 수거 폐기되었다. 이 노래는 1993년이 되어서야 김민기가 다시 부른 버전으로 ‘김민기 2’에 수록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는데 그러나 김민기가 다시 녹음하기 전에도 〈차돌 이내몸〉은 구전되어 불리고 있었고 80년대 학번인 (중략) 이 소설의 화자와 경서는 선배들에게 배운 노래를 읊조리고 있었던 것이다. - 해설│영원회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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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김민기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47XXXXXb4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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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7-23 0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방금 올 초에 sbs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다시 봤어요.
정말 존경 받아야 할 분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다시 확인해요^^

서곡 2024-07-23 12:07   좋아요 1 | URL
저는 그 다큐 예고편만 봤는데요 봐야겠네요 건강하게 더 오래 사셨으면 좋았을텐데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오늘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