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대청국(大淸國)은 한국인들의 뇌리에 조선 인조 재위시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637)을 일으킨 ‘오랑캐’의 나라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청국과 관련된 역사서는 대부분 전쟁사이거나 대외관계사 등 정치 군사적인 면에 집중하는 면이 강합니다. 또는 만주 압록강과 두만강 주변에 살던 여진족( 女眞族)이 어떻게 중원을 정복하고 중국의 영토를 확장했나 하는 점을 강조해서 서술합니다.

장한식,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 (산수야,2015)
유근표, 인조 1636 (북루덴스,2023)

과문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중국 청대의 경제와 사회를 다루는 한글로 된 단행본은 거의 본적이 없습니다. 그것도 번역본이 아니라 국내학자가 저술한 경우는 극히 드문경우라고 봅니다.

책은 서구의 경제성장이론 혹은 산업화 이론과 청국의 실제 사료를 검토해 청국의 경제가 유럽 특히 영국과 아시아의 일본의 경우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청국의 경제가 전 왕조인 명과 어떻게 다른지 화폐경제적 측면 (monetary economic perspective) 과 상품경제적 측면 (commercial economic perspective)로 구분해서 살핍니다. 중국 청대가 중요한 또하나의 이유는 이 시기가 영국의 산업혁명 시기와 겹친다는 데 있습니다. 같은 시기 중국과 영국을 포함한 서구가 어떤 경제발전의 경로를 따라왔는지 살피는 건 의미있는 비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비교는 왜 서구에서 산업혁명( Industrial Revolution)이 먼저 일어나게 된 경위에 대한 설명이 될수 있습니다.

또한 서구의 경제발전모델 이외 중국이 어떤 발전경로를 따라왔는지 살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쿠즈네츠 ( Simon Kuznets)의 경제성장론과 케네스 포메란츠(Kenneth Pomerantz)의 대분기론도 언급됩니다.

청대의 경제발전 수준을 시기별로 보자면 18세기까지 서구와 별반 차이없는 수준을 보이다가 19세기에 서구에 뒤쳐지게 되는데, 포메란츠가 말한 대분기란 서구와 중국의 경제적 생활수준의 ’격차‘가 급격히 벌어지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이 경제사가는 18세기 중국과 서구의 격차가 별로 없다는 걸 대분기라는 그의 대표 저서에서 논증합니다. 이책은 별도에 글에서 다시 다룰 예정입니다.

Kuznets,S., Toward aTheory of Economic Growth (W W Norton,1968)

Pomeranz,K.,The Great Divergence (Princeton University Press,2000)

이론적인 배경에 대한 논의는 여기에서 마치고 청나라의 경제가 도대체 어떠했는지 간략하게 살핍니다.

청나라는 예상과는 달리 화폐경제를 기반으로 한 경제체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명나라때부터 유입하기 시작한 멕시코와 일본의 은이 중국대륙에 들어와 있었고, 거기에 청조정과 지방정부에서 동전을 만들어 유동성(liquidity)을 공급했습니다. 명대에 조정이 동전공급에 소극적이었던 사실과 달리 청 조정은 동전을 시장에 공급해 부의 이전이 하층 계급에게도 용이하게 했습니다.

다만 명청시대는 현재와 같이 그리고 서구에서 생각하는 화폐의 본위제(standard system)을 채용해 일정 양의 은과 법화의 가치를 연계시키지 않았습니다. 표준적인 화폐론 교과서에 나오는 금본위제 혹은 은본위제는 그 역사적 연원도 개념도 모두 서구에서 나온 것입니다.

청대 중국은 서구와는 다르게 본위제를 선택하지 않고 다양한 동전을 중앙과 지방정부 그리고 민간업자들이 만들어썼고, 따라서 가치나 규격도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은도 은화를 만든게 아니라 은괴를 무게를 달아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모든 상업거래에 있어 고액결제는 은으로 소규모 결제는 동전으로 하는 복합적 화폐경제체제였습니다.

저자는 청 조정이 18세기 건륭제 제위기에 특히 동전을 대규모로 유통시킨 사실을 현대적 의미에서 중앙은행의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과 비슷한 정책으로 보고 이런 유동성 공급을 통해 인플레이션이 유발되고 부의 집중이 일어났지만 한편으로 경제적 활력을 불어넣어 경제가 발전하고 생활수준이 향성되었다고 해석했습니다.

중앙집권적 근대 국민국가체제에 익숙한 현재 우리가 보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체제이지만 청대 중국은 예상과 달리 황제의 권력이 지방에 이르지 못했고, 각 지방의 실력자들이 그 지역을 나름의 방식으로 통치하는 분권적 체제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각 지방마다 말도 다르듯 도령형도 다르고 화폐도 다양하게 운영된 겁니다.

북경의 황제가 엄연히 통치하는 황제국이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중국 청대의 경제체제는 자유방임( laissez-faire)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경제체제의 제도의 중요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보수진영에서 주장하는 ‘자유경제체제’는 말만 들으면 정부는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경제가 잘돌아갈 것처럼 들립니다. 경제에 대해 잘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를 합니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두면 화폐의 경우를 보더라도 위의 청나라처럼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결제방식을 가지게 됩니다.

반면 현재처럼 국가가 법정통화를 발행하고 그 법정화폐의 가치를 정한다는 건 국가가 경제행위에 제도적으로 개입한다는 말이고 실제 한국을 비롯해 자유주의 경제를 지향하는 모든 서구국가들이 이런 제도를 채택합니다. 이 화폐경제 시스템이 전제되어야 자유로운 물품의 거래가 순조롭게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현대경제에서 국가는 개입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이 기본적인 ‘국가의 책무’입니다.

끝으로 이책의 마지막에 나온 ‘선대제 수공업’에 대해 언급합니다.

서구의 산업화이론에 따르면 자금과 장비를 선대업자에게 제공받아 임노동을 제공해 완제품을 만들어 납품하는 초기 생산방식이 공장제 메뉴팩쳐링(manufacturing)으로 가는 전단계라고 해서 선대제 수공업의 존재여부가 산업혁명으로 가느냐 못가느냐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고 합니다.

청대 중국의 경우 선대제 수공업이 일반적이지 않아 중국이 산업혁명에서 뒤쳐진 걸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 해석은 중국의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한 해석오류였습니다.

서구와 일본의 경우 중앙집권적 권력이 자리하고 자본이 집적되어 자본가층과 노동자 층이 형성되어 시장에서 고립되고 가진돈이 없는 농민들이 선대제 수공업에 참여하여 부수입을 올릴 수 밖에 없었지만, 중국의 농민들은 시장접근이 자유롭고 국가의 통제가 거의 없는데다 독립적으로 수공업을 영위해도 판로가 있기 때문에 굳이 선대제 수공업으로 갈 이유가 없었던 겁니다.

중국의 상황을 구태여 서구의 산업화이론에 꿔어 맞춰 설명할 필요가 있는지도 솔직히 의문입니다. 이 케이스는 선대학자들이 역사적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섣부른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근세와 현대 중국에 대한 책을 보면 우리가 현재 표준으로 알고 있는 자유주의 경제체제, 민주주의 경제체제가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18세기 이후에 확산된 새로운 생각이고 그 이전 수천년 동안 서구건 아시아건 모두 전제주의 정치체제에 속해있었습니다.

더구다 청대 중국은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으로 황제가 절대권력을 경제행위에 행사할 것 같았지만 오히려 화폐제도도 정비하지 않고 신민들이 먹고살기 위해 농사짓고 상품거래하는 걸 방임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중국경제가 어떻게 움직일지는 새로운 관심이 필요한 부분이지만 최소 1842년 아편전쟁 이전까지 중국은 경제자원이 분권적으로 균형을 이루어 특별하 산업혁명이 필요한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밖에서 서구의 눈으로 볼 때 이 상황을 자신의 상황과 비교해 중국이 ‘후진적’이라고 해석할 소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책의 부제에 있는 ‘협치’가 과연 책에서 설명이 되어 있는지 좀 의구심이 있습니다.

청대 중국이 중앙집권적으로 통치된 것이 아닌 것도 맞고 지방의 토호세력들과 사대부들이 독자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건 사실인 듯하지만 이 사실이 바로 북경의 조정과 ‘협치’를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결론에서 갑자기 이 용어가 튀어나와 좀 놀랐습니다. 개인적으로 협치는 좀 과도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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