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8장 본문 450쪽, 참고문헌 약 50쪽으로 구성된 역사사회학( historical sociology) 연구서입니다.
서구의 실증적 연구방법론에 따라 한국 중국 일본 미국의 관련 연구가 상당한 정도로 인용되어 있습니다.
다른 한국 연구자의 연구서와 확연히 다른 점이기도 합니다. 논픽션인 각종 연구서는 형식적으로 각주와 참조연구도서 목록은 기본으로 구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형식에 대한 논의는 이정도에서 그치고 내용적인 면을 보겠습니다.
저자는 1960년대 태동한 한국의 개발주의적 군사주의적 동원체제 ( a system of mobilization)의 기원이 구체적으로 일제의 괴뢰국으로 알려진 만주국(滿洲國, 1932-1945)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기원을 추적하기 위해 1960년대 5.16군사정변 이후 만주군 출신 쿠데타 세력들이 행한 정책과 만주국에서 행했던 정책간의 비교를 시도하고 그 유사성을 찿아냅니다.
이책이 주장하는 흥미로운 지점 몇가지를 지적하는 것으로 글을 정리해보려 합니다.
첫째, 이 책의 전체적 논조를 보면, 일단 식민주의 (colonialism)이 현대 한국에 미친 영향에 대해 어느정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일제의 식민주의가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에 미친 영향에 대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다고 인정하면서 단순히 ‘항일투쟁의 무대’로만 단편적으로 알려졌던 만주라는 공간이 당시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에게는 기회의 공간이기도 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다면적 해석을 시도합니다.
다면적 해석이란 긍정과 부정을 포함하고 항일의 공간을 뿐만 아니라 생활의 공간으로서 그리고 중국이라는 나라가 형성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있지만 일단 저자의 논조가 식민주의에 대한 긍정적 부분을 포함해 극우 뉴라이트 세력에 의해 이런 해석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빌미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 우려스럽습니다.
전체적으로 저자의 논조는 상당히 보수적입니다.
만주국은 일본이조선을 병합한 이후 중국대륙 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해 세운 괴뢰국이고, 일본은 실제로 만주국을 발판삼아 실제로 중국 본토 침략했고, 이곳에서 일본 본토에서 행하지 못했던 극단적인 군국주의 체제 실험을 행했습니다.
일본인을 대상으로 행하지 못하던 극단적 체제실험은 물론 731부대로 대표되는 생체실험도 만주국 영토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청나라 당시인 19세기 말 이미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청나라와 전쟁을 벌였던 일제는 1930년대 청조 멸망이후 새로 성립되었으나 군벌들이 난립하고 공산당과 국민당 두 정부로 갈려 내전 상황이었던 중국을 먹기 위해 중일전쟁(中日戰爭,1937-1945)을 일으켰습니다.
따라서 1930년대 당시 만주국에서 행해졌던 각종 군국주의 동원정책을 1960년대 한국 군부가 그대로 시행했다면 일제가 행한 가장 극단적 형태를 한국에서 ‘근대화’의 명목으로 시행했다는 의미 입니다.
둘째, 박정희 정권의 개발 동원 체제의 역사적 기원에 대한 실마리는 결국 독일의 프로이센과 나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30년대 일본의 군국주의를 추동한 군부세력도 그리고 일본의 제국 헌법을 기초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19세기 말 프러시아에서 정치체제와 법률을 연구한 사실이 있기 때문에 어찌보면 당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한국의 경제발전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추앙받는 박정희 대통령이 마치 ‘자유민주주의’의 화신 인 것처럼 잘못 알려져 있습니다.
이 주장은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주장하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일 뿐입니다.
박정희 정부에서 추진한 경제개발계획의 원형은 이미 5.16 쿠데타 전 민간정부인 장면정부에서 입안한 것입니다. 다수의 입안자들은 박정희 정부의 최대 비판자였던 장준하 선생이 이끌던 ‘사상계’ 그룹이었고 대부분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 지식인들이 그 계획을 입안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단순히 실행만 했습니다.
김건우 교수의 ‘대한민국의 설계자들(느티나무 책방,2017)에 그 내용이 상새하게 나와 있습니다.
경제개발계획은 그 제목이 명시하듯 계획경제를 의미합니다. 소비에트적 의미까지는 아니지만 분명 정부가 생산및 수요를 통제하는 것을 의미하고 자원의 분배과정에 정부가 관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시장에 의해 수요와 공급이 결정된다는 시장자유주의 경제와는 대척점( opposite)에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책의 만주국 경제개발을 위해 일제가 밀어부쳤던 계획경제체제가 바로 박정희 정권이 추진했다는 경제개발5개년 계획, 국토개발계획 등의 원형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은 타당하고 공감합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1960-1970년대에 시행했던 경제개발계획은 그 자체로 이미 사회주의적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의 계획경제였고, 국가가 자원의 강제배분과 집중을 통해 거대 재벌 기업을 키웠습니다.
1950년대 일제가 남기고 간 귀속재산(歸屬財産)이 일부 자산가들에게 불하된 것으로 알고 있고 그 자산과 정부의 지원이 현재의 대기업집단의 모태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시 거론하겠습니다.
아무튼 정기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이 추구한 개발주의적 동원체제는 그 기원이 프러시아의 군국주의적 채제이고 이 체제를 일제가 모방해 본토와 만주국에 이식했으며 만주국 장교 출신이던 5.16 쿠데타 세력들은 자신들이 청년시절이던 1930년대 만주국에서 극단적 형태로 행해지던 군사적 동원체제를 ‘조국 근대화’의 명목으로 그대로 들여온 것으로 이해됩니다.
사람은 딱 자신이 경험한 만큼만 이해하고 인식한다는 말이 적용되는 케이스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주장을 다시 곱씹어 보면 결국 한국은 1945년 8월 일제가 연합국에 항복하여 ‘광복’을 이루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한 소련의 공산주의 대륙세력과 미국을 비롯한 민주주의 해양새력의 충돌과 그로인한 인명과 재산손실은 논외로 치더라도 만주국 하급장교 출신이던 군인출신 위정자의 통치로 인해 일제가 세운 만주국을 따라한 유사 군국주의 ( quasi- militarism) 체제가 1980년대까지 지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1979년 10월 26일 이후 다시 정부를 접수한 사람은 전두환씨입니다.
지금도 보수세력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운운하지만 역사를 둘러보면 실질적 민주화는 1987년 이후입니다.
일본제국주의의 영향은 그 여파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길고 그 영향력도 상당합니다.
솔직히 사회원로 계층에 아직도 일제시대 교육을 받아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이들이 있는 한 그 영향력이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15년의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는 일본의 영향력을 가장 최근에 목격한 일이었습니다. 한국의 대법원이 ‘사법농단 ‘을 일으키며 한일간 외교에 간섭한 사실도 충격적이었지만 협상의 막후 교섭을 위해 일봉 정계의 실력자가 청와대로 바로 찿아가 일어를 할 줄 아는 정계원로와 대통령, 총리와 더불어 직접 협상조건을 협상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일어로 편하게 협상했다는 대목도 그렇고 일본이 당시 박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의 따님이라는 사실을 몰랐을리가 없기에 사실 여부를 떠나 내용 자체가 무척 충격이었습니다.
일본과 일본제국주의에 대해서는 따라서 과거의 일이라고 지나갈 일이 아니고 현재까지 한국인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예의 주시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서울의 도시공간에 대한 책을 읽다가 1960-70년대 상황을 궁금해하고 결국 다시 구한말부터 일제시대 관련 책을 읽게 된 건 결국 현재의 우리를 만든 뿌리가 어디서부터인가를 알기 위해서 입니다.
서울만 봐도 현재의 서울은 조선의 한양에서 출발한 도시지만 남아 있는 흔적과 도시체계는 일제 강점기의 경성입니다.
경성에 대한 정보를 모르면 서울에 대해 현재의 모습에 대해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일본이 한국에게 증오를 유발하고 짜증나게 하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다시 치욕을 당하지 않고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과거와 현재의 일본과 한국에 미친 영향력을 면밀히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프로이센과 일본 그리고 한국의 상호영향에 대한 책 한권을 소개합니다.
문화사회학자 전진성 교수의 책입니다
상상의 아테네(천년의 상상,2015)
건축적 입장에서 독일의 ‘고전주의 건축’이 일본과 조선의 도시건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고찰한 책입니다.
눈에 보이는 건축양식을 기준으로 독일건축의 양식적 영향을 살핀 책으로 독일이 19세기 말 식민지로 점유했던 중국 칭다오의 건축도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