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후 한국의 주거문화에 대한 책입니다. 360여 페이지의 적당한 두께의 책으로 대한주택공사 주택연구실에서 일했던 서울시립대학교 박철수 교수가 입수한 주택공사 내부 자료의 인용이 돋보이는 책입니다.
삶의 공간이 해방 이후 특히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 소위 ‘고도성장’또는 ‘압축성장’을 추구하면서 어떤 ‘무리’를 가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군인들이 얼마나 ‘무식하게’ 주거정책을 펴오고 그 결과 한국이 얼마나 천변일률적이고 무관심한 사회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이책에 나온 내용 중 강남개발과 강남의 도시성에 대한 내용은 전에 리뷰했던 책에 나온 내용이라 별도 언급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한종수 강희용님의 강남의 탄생(미지북스,2016)
박해천님의 콘크리트 유토피아(자음과 모음,2011)
을 참조하면 될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내용은 오히려 만주국 장교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했던 소위 ‘근대화 작전’의 뿌리가 일제강점기와 만주국에 있다는 사실에 있다는 점입니다.
경제개발계획과 한국의 압축근대화에 관련된 역사를 읽으면 1960-1970년대 당시 일제에 의해 교육받은 엘리트들이 얼마나 별고민 없이 일제가 시행했던 정책을 가져다 썼는지 보여줍니다.
일제가 당시 경성에 시행하려 했던 ‘조선시가지 계획령 ‘을 해방이후 그대로 가져와 서울의 도심 정비에 사용하고 일제가 경성의 하층민인 토막민들을 ‘미관’을 이유로 경성 밖으로 몰아낸 것처럼 군사정부도 청계천의 하층 빈민들을 광주대단지로 강제로 몰아냈습니다.
얼마전 일제 강점기에 교육받은 학자들이 일본 자료만을 인용하는 지극히 ‘나태한’학문태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데 1960년대 5.16 군사정변의 주역들은 군인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1960년대 초 근대화를 위해 ‘국토 개발’을 한다며 국토개발단을 모집하고 군인이 아닌 민간인들을 ‘군인’취급하고 예비역 군인들을 고용해 ‘어용군대’처럼 운영하는 황당한 일을 저지릅니다. 군사정권이 사실상 합법적으로 ‘강제노동’을 시킨 이 헤프닝은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아 1년이 지나 중단됩니다. 이는 사실상 일본제국주의가 1930년대 말 총력전 시기 국민을 강제동원한 ‘근로보국단’의 판박이로 일본군 출신 쿠데타 세력은 결국 자신이 아는 걸 다시 써먹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제의 영향이 한국전쟁을 거쳐 1960년대에 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깝습니다.
두번째로 언급하고 싶은 건 한국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서양에 대한 ‘열등감’과 ‘비민주적 ‘통치 스타일입니다.
미군정기를 거쳐 한국전쟁을 지나 서울을 재건할 때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을 비롯한 서양 세력들에게 서울의 치부가 보이는 걸 싫어했고 이를 가리기 위해 고층 상가주택을 서울의 관문에 짓기를 원했고, 또 (쓸데없이) 빨리 짓기를 원해 외국의 설계를 의뢰했고 육군 공병대에게 공사를 맡겼습니다. 본인을 왕으로 알고 영구집권를 꿈꾸던 구한말 이래의 노 정치인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이 대통령은 정작 그 상가주택에 살 국민들의 의사는 물어보지 않습니다. 이상하죠.
그리고 그 프로젝트가 본인의 입맛에 맞는지만 고려하니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 아니라 전제적 왕권국가의 독재자 노릇을 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독재자인데 서양 열강에 ‘콤플렉스’를 가진 독재자입니다.
그 후대의 박정희 대통령도 이승만 대통령과 거의 차이를 보이지 못합니다.
그는 경제개발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계획을 새운 것이 아니고 군사정변을 통해 무너뜨린 장면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장면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은 장준하로 대표되는 ‘사상계’ 계통의 지식인들이 입안한 것으로 이들은 거의 대부분 서울 다음으로 경제가 발달했고 조선시대 이래 중국과의 무역을 독점해왔던 평안도 출신들이 주축이었습니다.
1950년대 활약한 서북지역 (평안도 지역) 출신 지식인들에 관해서는
김건우 교수의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느티나무 책방,2017)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반공을 기치로 내건 한국 우익의 본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극우로 치달리고 있는 한국의 기독교 본류가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1945년 이후 마지막 학병세대의 관점에서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세운 계획의 실행은 박정희 군사정부에서 하게되고 전쟁에서 전투하듯 어주 급하게 진행됩니다. 도시와 농촌과의 균형발전보다 도시 중심의 불균등 발전 전략을 택해 개발 초기부터 농촌인구의 이촌향도 현상이 나타나고 서울로의 인구집중으로 주택난이 심화됩니다.
군사정권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단지 ‘빠르다’는 이유로 일률적인 아파트 공급에 올인을 하게 되고 체제 경쟁중인 북한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한강 이남의 경기도 광주 지역을 개발하게 됩니다.
한국의 부동산 불패의 시작이 군사정권과 건설업자의 결탁으로 이루어집니다.
놀라운 사실은 한국의 주택정책이 전제적 왕권주의자인 이승만 대통령 당시만 해도 국민들의 복지와 후생을 증진시키는 한방법으로 고려되어 ‘사회정책’으로 다루어지고 자금의 보건복지부가 담당이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1950년 당시만 해도 한국정부는 국민들에게 ‘공공주택’을 공급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일제 당시의 조선주택영단을 계승한 대한주택영단이 실제 주택 건설의 일선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국가의 기반이 불안정한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 현재 싱가포르나 유럽의 주택 정책과 유사한 정책방향을 가졌었다는 점을 보면서 건국 초기 지식인들이 그래도 나라의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정책이던 주택정책이 사적 경제의 영역으로 넘어와 주택이 건설회사의 돈벌이 수단이 된 때는 1960년대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대통령 때입니다.
현역 육군 장교 출신이던 장동운이 대한주택공사 총재로 취임하면서 서민주택 공급애서 중산층 주택 공급으로 방향을 바꾸고 단지 빠르고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주택을 아파트로만 공급하기 시작합니다.
이 군인 출신인사는 최초의 중산층 타겟 아파트인 동부이촌동 한강매션 아파트를 분양하면서 한국 최초로 ‘선분양제 ’를 도입해 상품을 보지도 못하고 상품을 구매하는 주택건설업계의 희안한 거래관행을 만들었고 주택에 민간자본이 들어가게 되는 길을 열어놓아 결국 부자와 빈자가 결정적으로 다른 삶을 살게되는 길을 열었습니다.
양극화의 씨앗이 군인에 의해 뿌려진 것입니다.
이후 건설회사는 한강을 매립한 부지에 선분양 대금으로 저금부담없이 아파트를 지어 팔고 국민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아파트에서만 살게 됩니다. 군인들처럼 똑같은 공간에서 살게 된 겁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남의 돈으로 장사를 해오던 주택건설업계는 자신들이 망한다는 이유로 당시까지 강제되었던 분양가 상한제 폐지를 요구하게 되고 이는 관철됩니다 . 이후 2000년대 초반 서울의 부동산 가격은 폭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한국의 주택정책은 건국이후 군사정권에 의해 퇴행적인 방향으로 나아갔고 초기 강남으로 이주했던 중산층은 이후 군사정권의 지지자가 되고 이들이 지금 상당수 한국 보수 극우 진영의 거대한 기반이 됩니다.
생소할지 모르겠지만 2021년 현재 부동산 폭등의 기원은 결국 1960년대부터 시작된 주택공사의 공적 책임 방기와 직접 관련이 있습니다.
최근 논란이 된 LH 직원의 농지투기도 LH의 전신인 주택공사가 공적인 역할을 오랫동안 해오지 못했고, 건설부 관료들이 대단히 건설회사에 우호적인 현 상황을 감안하면 오랫동안 물밑에서 이루어졌던 잘못된 관행이 수면 위에 떠오른 것으로 추정합니다.
주거나 공간에 대한 다른 논의를 찿기가 무척 어렵고 주택에 대한 논의가 모두 부동산 시장과 시세로만 연결되는 현 세태가 결국 성급한 군인들의 ‘서양 따라잡기’에 있다는 사실에 있다는 걸 확인하는 건 무척 안타깝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