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부터 결론까지 총 687페이지의 대작을 드디어 완독했습니다.
하지만 끝이아니라 시작이네요. 이 책은 동국대 황태연 교수의 구한말 역사 3부작 중 제 1부일 뿐입니다.

엄밀하게 1894-1896년의 구한말 격동기의 고종시대를 다룬 역사책으로 제가 읽은 고종시대에 관련된 책은 2005년 발간된 ‘고종황제 역사청문회(푸른역사)’ 이후로 두번째입니다.

사료를 얼마나 엄밀하게 해석하느냐 역사가가 어떤입장(Perspective)을 견지하느냐에 따라 역사는 다르게 서술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이책은 새로운 역사서술의 측면에서 과거 고등학교 국사 사간에 짧게 배웠던 구한말의 슬픈 역사에 대해 현재 찿을 수 있는 사료를 바탕으로 기존과는 다른 이야기를 나름 설득력있는 설명을 해주는 장점이 있습니다.

서양정치사상을 공부한 정치철학자인 저자는 일반 국사학자들이 간과할 수도 있었던 부분을 정치학과 제도적인 측면에서 구한말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친일개화파 세력들과 일본이 조선에 도입하려했던 독일의 공무원 임용제도가 사실 중국으로부터 유럽으로 수입되었던 제도였으며 조선에서 이미 조선시대 내내 시행해 오던 ‘과거제도’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해 최근 길 출판사에서 출간된 ‘중국인의 실천철학에 대한 연설’이 17세기 독일의 중국관방학자 크리스티안 볼프의 가장 대표적인 저서로 알고 있습니다. 이 책은 추후 일독 후 다시 언급하고자 합니다.

이 책은 친일적 식민사관입장에서 기술된 1894년’갑오경장’에서부터 1895년 ‘을미사변’ 그리고 1896년의 ‘아관파천’이라는 조선의 정치적 격변을 2차 동학농민봉기와 을미년간의 의병전쟁까지 아우르며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료해석의 입장에서 기존의 ‘식민사관적 명칭’을 거부하고 위의 역사적 사건의 명칭을 달리 부릅니다.

명칭을 달리 부르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명칭이 결국 내용을 규정하기에 특히 엄밀함을 요하는 인문사회과학의 입장에서 정확한 명칭의 지정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작업입니다.

이 말은 식민사관의 영향을 받았던 선대 국사학자들이 명칭을 통해 구한말을 포함한 일본의 국권침탈의 진실을 최소 은폐하거나 방관해왔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1894년 7월의 경복궁 범궐로부터 시작된 일본의 왕권유린과 국토침탈을 ‘갑오왜란(甲午倭亂)’으로 명명하며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壬辰倭亂)과의 연장선 상에서 일본의 조선 침탈의도를 분명히 하였고 흔히 알고 있는 청일전쟁(淸日戰爭)은 조선의 입장에선 갑오왜란과의 ‘이중의 전란’이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개화 개혁세력으로 알려진 김홍집 세력은 사실상 친일괴뢰세력으로 일본을 등에 업고 일본의 꼭두각시 로서 일본의 조선왕권 침탈을 뒷받침한 것입니다.

군대의 해산으로 사실상 무방비 상태가 된 고종은 호남을 중심으로 봉기한 동학농민군에게 청군과의 전쟁을 빌미로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을 무력으로 대항하라는 ‘밀지’를 내리면서 사실상 붕괴작전까지 간 조선을 일으켜 세우려 모든 방법을 강구합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에도 전란에 별도움 없이 정쟁을 일삼던 사대부들 중에는 갑오왜란 당시 국가를 버리고 친일로 넘어가버린 사례가 많았습니다.

기본적으로 도덕적 당위론에 사로잡힌 사대부들은 명청교체기에는 명의 속방을 자처하며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를 오판해 만주에서 세력을 확장해 명을 위협하던 당시 후금에 굴욕적인 항복을 해야만 했고 더구나 병자호란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겨우 30여년만에 발발했음에도 사대부들은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고 변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쳤습니다.

300여년이 지난 후 일본의 국권 침탈에도 이들은 그대로였습니다.

저자는 일본이 사실상 경복궁을 범궐해 고종을 인질로 잡은 상황에 고종은 지배층의 도움을 받지 못한체 동학농민군 및 의병들과 국난을 극복해 나갔다고 봅니다.

일본의 국권침탈 시도와 공작을 막아내는데 고종은 명성왕후와 같이 결정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알려져 있고 이런 사실때문에 일본은 명성왕후를 눈엣가시로 보았고 그래서 외교적인 부담을 무릅쓰고 제거합니다.

저자는 이 전무후무한 왕후 시해사건을 통념과 달리 ‘을미왜변 (乙未倭變)’으로 부르면서 을미사변이라는 중립적 의미에 ‘일본정부의 계획에 따른 왕후시해’임을 명확히 했습니다.
그간 일본 낭인 (浪人)들이 왕후를 시해했다는 주장으로 알려진 이 희대의 사건은 사실 일본의 계획에 따른 지시였다는 점을 일본 및 각국 외교 문서를 통해 보여줍니다.


또한 저자는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알려진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으로의 이어(移御)가 임금이 지방으로 피난간다는 의미의 파천(播遷)이라는 다소 패배적인 용어보다 사실상 고종이 국제법적으로 치외법권 지역인 러시아공사관으로 정치적 망명을 했다는 의미로 ‘아관망명(俄館亡命)’으로 부릅니다.
개인적으로 적절한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고종은 명성왕후 가 시해된 이후 친일파에 의해 경복궁에 유폐되어 사실상 포로상태로 있었고 러시아공사관으로 망명 후 자신의 신변안전을 러시아에 기대 확보한 후 일본에 의해 침탈된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활동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자국의 이권을 위해 한치의 양보가 없던 러시아 일본의 관계변화로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망명은 1년에 그치고 말았으며 이후 두 나라는 만주와 조선의 이권을 둘러싸고 러일전쟁를 통해 부딛치게 됩니다.

책을 보는 내내 극우화되어 가는 지금의 일본의 모습을 우려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백년 전 조선의 국왕을 궁궐에 유폐시키고 왕후를 시해했던 전력이 있던 나라가 일본이고 태평양 전쟁당시 피해를 입으셨던 위안부 할머니분들에게 사과도 하지 않은 체 1965년 한일청구권 협상으로 일본정부의 배상책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변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책을 보는 내내 한국이라는 나라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치욕의 역사라고 회피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읽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왜 한국이 그런 치욕을 당했는지 그리고 이런 상황이 되도록 기득권층과 식자층은 뭐했는지 그리고 지금 기득권층의 행태와 얼마나 유사한지 비교해 보는 것이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봅니다.

한국의 경우 지배 기득권층의 폐해가 너무 큰 것이 아닌가 역사를 읽으면서 점점 확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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