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볼라 밀리언셀러 클럽 107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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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오로지 달려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나>는 지금. 깊은 숲속에서 도망치기는커녕 달릴 수도 없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의 앞부분은 마치 스릴러 소설 같다. 이 앞부분은 기시 유스케의 <크림슨의 미궁>을 연상시키지만 이 <나>는 숲에서 도망쳐 현실세계로 돌아온다는 점이 다르다. 아뭏든 나는 이 부분이 꽤 오싹하게 무서웠다. '나'를 '<나>'라고 표시하여 '내가 나를 모르는 것 같은' 느낌을 주어서 그랬던 걸까. 주인공의 기억상실을 꽤 효과적으로 묘사하는 장치라고 생각된다.

기리노 나쓰오의 2007년작 <메타볼라>는 전작 <다마모에>와 마찬가지로 순수소설에 가깝다. 기억상실에 걸린 주인공 긴지가 기억을 찾을 것인가, 그것은 어떤 기억일까 하는 미스테리가 녹아 있기는 하지만. 주인공이 청년층이고 현실 묘사가 처절한 점이 <다마모에>와 달라서 내게는 꽤 만족스러웠던 작품이다.  

주인공 긴지는 기억을 잃은 채(정신) 돈 한푼 없이(물질) 제로에서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아키미쓰라는 '쿨한 그늘진 미야코 청년'도 만나고 홀로 늙어가는 노인의 애정어린 동정도 받고 가마다라는 도미트리의 주인의 정치 운동도 돕는다. 그러면서 점차 새로운 자신을 형성해 간다. 하지만 자신의 기억을 찾는 순간, 새로운 자아는 붕괴되며 혼란에 빠진다. 기껏 찾은 기억이 지금의 비참함보다 더 처절하게 비참하다면 어떤 기분일까?  

또다른 주인공 아키미쓰의 엉뚱한 캐릭터도 이 소설을 재미있게 만드는 요소다. 전반적으로 우울한 느낌의 소설이지만 아키미쓰의 얼럴뚱땅 에피소드가 약간은 밝게 채색하고 있다.

기리노 나쓰오의 세계는 '여름의 태양에 녹아버린 끈적거리는 아스팔트'를 연상시킨다. 생선으로 치면 썩기 직전의 비린 고등어 같달까. 두 눈 부릅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비정하고 올곧아서 타협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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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내가 행복을 줄게 - 엄마와 아이가 서로 마주하며 나눈 가장 아름다운 대화의 기록
오소희 지음 / 큰솔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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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 처음 읽은 책이다. 일반적인 육아서적을 피하고 싶었다는 친구의 선물.  

여행작가 오소희의 이 에세이집은 아들 중빈이(4세~7세까지)와의 교감의 기록이다. 소소한 일상과 아이와의 대화, 아이를 키우는 기쁨과 발견들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 아기도 자라면서 이런 기쁨들을 나에게 안겨주겠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와닿았던 책이다. 그러니 예비엄마나 유아를 둔 엄마들이라면 읽어볼 만할 것이다. 더불어 아기를 키우며 이 정도의 기록은 남겨두면 좋겠다 싶기도 하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에서처럼 글쓴이의 사회나 인생에 대한 관점은 좀 편향적인 데가 있어 그게 여전히 걸리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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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전미궁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4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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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가이도 다케루 작품이라 기대를 많이 했다. 하지만 거의 500페이지 분량, 일주일간의 독서가 내겐 '코스를 잘못 접어든 마라톤'처럼만 느껴졌다. 다음 코스가 궁금하지 않은데도 앞으로 꾸역꾸역 나아갔던 건 작가에 대한 애정 덕분이다.

이 소설은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의 외전격으로, 덴마 다이키치라는 도조대학 의과대생이 사쿠라노미야 병원에 잠입하여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형식이다. 그런데, 그 파헤치는 사건이 "별로 궁금하지 않았고", "전문용어와 지식들의 남발이 좀 부담스러운" 느낌이었다. 워낙 이 작가는 전문적인 의학 지식과 코믹 캐릭터의 조화로 승부하는데 이 소설은 뭔가 핀트가 어긋난 느낌이었다. 악역인 사유리-스미레의 매력이 좀더 드러났어야 하는데 그것도 좀 아쉽고.  

가장 웃긴 캐릭터는 비중이 적은 조연인 세 할머니 환자들이었다. 도쿠 할머니의 감자조림 스토리는 좀 뭉클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후훗.

기존 시리즈와는 시라토리-히메미야 콤비가 활약하며 그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 하지만 시라토리의 매력은 '의학책을 펼쳐놓고 환자와 상의하며 하는 진료' 방식 말고는 크게 돋보이지 않았고, 히메미야는 음- 실수 연발 간호사로 나오는데 맹해 보이기만 했다. 

이 작품의 압권은 35개 장의 소제목들이다. '연기와 뼈', '메멘토 모리,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 '가짜 대집합' 등 꽤나 지성을 과시하면서도 시적인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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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0-03-08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전 책들은 재밌게 봤지만, 이번 건 사놓고도 미적거리고 있습니다..제너럴루즈때부터 히메미야 캐릭터가 맘에 안들고~~~ 나름 시리즈는 기복이 있는 법이지요~ 큰 기대없이 시작해야겠습니다..

베쯔 2010-03-09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히 선입견 생기셨겠네요~ 마음 비우고 시작하면 더 재미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욤? ^^
 
인질 카논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스피어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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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다룬 미미 여사의 단편집이다. 표제작 '인질 카논'이 그나마 사건다운 사건(편의점 강도)을 다루고 있으며 다른 단편들은 청소년 왕따 문제(팔월의 눈, 지나간 일), 실연으로 인한 상처(십 년 계획, 산 자의 특권), 주택 대출과 이웃(새어나오는 마음), 이혼(과거가 없는 수첩) 등의 일상사를 다루고 있다.  

이번 단편집에서는 특히 '착하게 사는 사람이 오히려 상처받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왕따 친구를 옹호하려다 트럭에 치이는 소년(팔월의 눈), 치매 할아버지의 장난감을 돌려주려다 범인의 표적이 되는 남자(인질 카논) 들의 모습을 작가는 쓸쓸하게, 하지만 따뜻하게 응시하고 있다. 결국 희망은 있다는 메시지로 귀결하며.

추리소설이나 스릴러 분위기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나 역시 미미 여사의 팬으로서 그럭저럭 재미있게 읽었지만, 작품의 완성도나 박력은 좀 떨어진다는 게 솔직한 느낌이다.

북스피어의 책답게 깔끔한 외양을 하고 있으며, 특히 어두운 남색의 표지가 시선을 끌어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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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위의 식사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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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의 작품을 무작정은 아니지만 대체로 좋아한다. 예전에는 감정 과잉이라 여겼던 적도 있지만 그 과잉의 문장들을 아무나 쓸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이번 작품은 현재의 남자 기현을 통해 과거의 남자 서강주를 추억하고,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액자형 구조를 취하고 있다. 주인공 누경은 과거의 연애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여성으로 그려지는데, '누경'이라는 이름은 '샐 누(漏)'나, '눈물 누(淚)'를 연상시킨다. 그녀는 상처받고 연애로 치유하는 여자다. 열 여섯 살 풀밭 위에서의 기억은 서강주(父性이 다른 외피를 입고 나타난 듯한)를 통해 치유하고, 서강주에게 받은 상처는 기현과의 거리(비어 있는 공간)을 통해 치유받는다.  

이 소설에 나오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그럴 듯하고 멋져서 마치 어른을 위한 하이틴 로맨스 같기도 하다. 말로는 도저히 뱉을 수 없을 것 같은 닭살스럽고 문학적인 대사를 잘도 내뱉는다. 연애에 죽고 사는, 혹은 멋진 연애를 꿈꾸는 여자들에게 꽤 어필할 만한 소설이다.  

묘사나 서술이 때로 너무 감상적이고 추상적이지 않은가 싶지만 이 또한 전경린 소설의 매력인 듯.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 그림을 모티프로 만든 문학동네의 표지는 아름답고 정갈하다. 다음은 이번 작품에 대한 전경린의 인터뷰 내용을 발췌하였다. 

   
  “옷을 갖춰 입은 두 남자 사이에서 온몸을 드러낸 여자가 세상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마네의 그림 ‘풀밭 위의 점심’을 오래전부터 좋아했다. 어떤 상황이든 세상을 똑바로 응시하는 용기가 아름답고, 같은 여자로서 해방감을 느꼈다. 이번 소설은 그림 속 여자와 같은 이야기이다. 현실을 똑바로 응시하는, 그래서 상처 들판을 치유의 들판으로 만드는 이야기이다. 나는 주인공이 그렇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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