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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 듯 저물지 않는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7년 12월
평점 :
연말의 마지막 날은 에쿠니 가오리, <저물 듯 저물지 않는>을 읽으며 평화롭게 보냈다. 부모가 물려준 재산으로 유유자적하는 중년의 미노루는 책을 좋아하는데 늘 책을 읽으며 그쪽 세상을 편하다고 여긴다. 나기사와의 결혼 같으면서 아닌 결혼 생활은 파탄이 났고, 나기사는 평범한 직장 후배 남자와 재혼한다. 미노루와의 사이에서 낳은 하토(비둘기)라는 딸을 데리고. 미노루의 누나 스즈메(참새)는 독일에서 사진작가로 활동하다가 가끔 귀국해 동생과 만난다.
이외에도 미노루의 친구이자 세무사인 오타케, 세입자이자 이웃인 치카와 사야카 커플, 미노루 소유의 아이스크림 숍 아르바이트생 유마와 아카네 등 다양한 등장인물이 나온다. 요즘의 에쿠니 가오리가 선호하는, 모든 인물을 거의 등가로, 병렬적으로 늘어놓는 방식으로.
미노루가 읽는 소설이 '책 속의 책'으로 소설 중간에 계속 끼어드는데, 미스터리 장르의 그 소설 내용에는 집중이 잘 안 되었지만, 책 속으로 빠져들어 버리는 미노루의 상태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됐다. 미노루 같은 사람이 곁에 있으면 분명히 소외감을 느끼리라. 특히 혈연은 상관없겠지만 아내라든가 하는 위치에서는. 하지만 다른 결혼을 찾아 떠난 나기사는 그 '평범한 행복'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 여러 의미에서 결혼이란 참 어려운 것이긴 하다.
에쿠니 가오리는 음식이나 술자리의 묘사를 참 잘하는데, 작가 자신이 상당한 취향의 소유자임이 분명하다.
책을 읽고 있을 때면 미노루는 거기에 있으면서 없는 사람 같았다(더구나 늘 그는 책을 읽었다). 38p
이것은 그런 순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있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이라고 형용하는 가족의 단란한 순간, 먼 훗날이 되어서야,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때는 행복했다‘고 깨닫는 유의 순간이다. 그런데 왜, 때로 자신은 도망치고 싶어지는 것일까. 175p
맥주 다음으로 주문한 시원한 정종을 마치 물처럼 꿀꺽꿀꺽 마시면서 말했다. "멋대로 내놓지 말라고 해." 스즈메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다. 마침 은어 튀김이 나온 참이었다. 이 계절이면 치카가 즐겨 하는 요리 중 하나라서 미노루는 맛있다고 생각하는데, 누나에게는 맛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닌 모양이다. 메뉴판을 달라고 해서 스즈메는 토마토 샐러드와 은대구 된장구이를 주문했다. 180p
"증권회사에서 온 포트폴리오와 파일 정리해놓았으니까, 나중에 무슨 주식인지 이름과 금액이라도 봐둬." 미노루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말리백호, 금계홍차, 동정오룡차, 그리고 이름은 모르겠지만 벚꽃찰떡 향이 나는 차도 있는데, 뭐로 할래?" 276p
지금 좀 긴박한 장면이라서, 이 장이 끝날 때까지 읽지 않으면 궁금해서 안 될 것 같아." "그건 또 뭔 소리야. 지금 왜 책을 읽는 건데." 오타케는 볼멘소리를 했지만, "금방 읽을게" 하고 단단히 약속한 미노루는 다시 침대의자에 누워 책을 펼쳤다. 34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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