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경계 -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동서고금의 통합적 접근
켄 윌버 지음, 김철수 옮김 / 정신세계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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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차: 의식의 지도-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경계선


어제 1일차에서 던진 질문을 이어가 보자.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켄 윌버는 의외로 단순한 대답을 내놓는다.

인간은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존재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정체성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어디에 경계를 긋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물이다.

피부 안은 ‘나’, 피부 밖은 ‘나 아님’ 이라고 보았다.

가장 기본적인 경계는 피부다. 피부 안쪽은 ‘나’, 바깥쪽은 ‘나 아닌 것’.

윌버의 견해 대로 사실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방식으로 세상을 배워왔다.

, 내 발, 내 몸은 ‘나’ , 남의 손, 나무, 돌, 하늘은 ‘나 아님’ 같은  이 구분은 너무 익숙해서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경계는 생각보다 훨씬 유연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안을 , 아픈 아이를 돌볼 때, 혹은 누군가의 고통에 깊이 공명할 때 ‘나’와 ‘너’의 경계는 분명히 옅어진다.

경계는 고정된 선이 아니라 상황과 의식에 따라 움직이는 가변선(可變) 가깝다.

윌버는 경계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층위로 존재한다고 본다.

그는 이를 가르켜 의식의 스펙트럼이라고 규정했고, 그 경계를 넘어가는 방식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먼저 가장 위에 있는 스펙트럼은 페르소나 수준이다.

사회적 역할과 가면에 따라  “나는 회사원이다”, “나는 아버지다” 라고 규정된다.

다음 아래로 내려가면 자아 수준 이다.

심리적 동일시 “이 감정은 나다”, “저 생각은 내가 아니다” 라고 보았다.

다시 내려가면 켄타우로스 (신심통합 身心統合) 수준이다.

몸과 마음의 경계가 느슨해짐에 따라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지는 상태다.

다시 다음은 초개인적 수준이다. 이때 나와 타인, 나와 세계의 경계 확장되며 깨달은 상태에 가깝다.

 

2년 전의 나는 이 과정을 일종의 ‘의식의 상승’이라 보고 계단을 오르듯 위로 올라가는 구조로 이해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이건 위로 오르는 사다리라기보다 빨대 안의 굴곡에 가깝다.

굴곡을 지날 때마다 “여기가 전부다”라고 착각하지만, 사실 모든 굴곡은 하나의 통로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신심명이 말하는 ‘일종(一種)’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이 모든 굴곡을 포함한 빨대 전체를 가리키는 말일지도 모른다.

신심명에서 반복해서 경계하는 것이 있다.

바로 취사심(取捨心)과 간택심(揀擇心) 이다.

이것은 취하고, 저것은 버린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

우리가 경계를 긋는 바로 마음이다.

그래서 신심명은 이렇게 말한다.

양유취사(良由取捨) 소이불여(所以不如) , 취하고 버리는 마음 때문에 여여하지 못하다

 

윌버가 “경계를 넘어가라”고 말한다면,

신심명은 이렇게 말하다.

“경계를 넘기 전에, 경계를 긋고 있는 그 마음부터 보라.”

 

그렇다면 질문은 다시 이어진다.

모든 경계들은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선과 , 삶과 죽음, 나와 남… 이렇게 분명해 보이는 이분법들이 사실은 하나의 연속체라면?

 

다음 여정은 윌버의 핵심 개념인 <‘무경계(No Boundary)’> 를 통해 이 질문을 본격적으로 들여다 볼 것이다.

경계가 사라질 의식은 어디로 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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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20일차

<前轉變空/전공전변/앞의 공함이 전변함은

皆由妄見/개유망견/모두 망견 때문이니>

 

공함 이라 '고정됨이 없음'이다.

절대로 비어 있다고 고정되게 생각하면 된다.

유위법에서 () 무위법의 안으로 들어가는 열쇠와도 같다.

아무것도 없다는 뜻으로 고정 시켜 놓으면, 무수히 많은 변화의 공의 변화를 전혀 알지 못하게 된다.

공은 변화하는 모든 것을  하나로 고정해 점찍을 없기 때문에 공이라 했다.

가정에서 나는 남편이자, 아버지이고, 아들이며, 직장에서 나는 부장이자 직원이 되고, 식당에선 손님이고, 차량을 타면 승객이 되고, 친구를 만나면 내 이름이 불린다. 어느 때의 내가 진짜 나인가?

나라는 실체는 하나 이지만 모습의 나는 없이 조건에 따라 변한다.

공은 바로 조건에 따라 바뀌기 때문에 고정됨이 없음 되었다.

그래서 일찍이 큰 스님들께서는 어느 하나로 나를 고정 시킬 수가 없기 때문에  () 이라 하셨다.

공은 본래 변화를 머금고 있다.

무위법으로 들어가는 열쇠가 만하다.

 

수유반조(須庾返照)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쳐보면

승각전공(勝却前空) 앞의 공함보다 뛰어남이라

전공전변(前空轉變) 앞의 공함이 전변함은

개유망견(皆由妄見) 모두 망견 때문이니

 

결국 공함이란 변화 하는 것이 때문에 고정되게 바라 보면 바로 헛된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아니 헛된 것이 보여지는 것이다.

실체를 가린 망견이 눈앞에 나타나 보인다.

그래서 승찬 스님은 반조(返照) 하지 않고 공함을 바라보는 것을 망견이라고 하신 것이 아닐까?

반조는 끊임없이 돌이켜 봄이다.

나에게 비줘지는 모든 것들을 잠시 돌려 놓고 지켜 뿐이다.

 

 

: 前空:  , 빌 공:  앞의 공은

轉變: 구를 , 변할 변 :  굴러 변한다

皆由: 모두 , 말미암을 유 : 모두~ 말미암아

妄見망령할 , 볼 견:  망령되게 본다, 즉 헛되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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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19일차

<須庾返照/수유반조/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쳐보면

勝却前空/승각전공/앞의 공함보다 뛰어남이라>

 

근본으로 돌려 놓음은 인위(人爲) 짓는 모든 것의 끊어짐이다.

인위적이라 함은 사람의 생각을 우선에 두고 희망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위는 *유위법(有爲法)에 해당된다.

유위법은 작위적이다. 일부러 지어내는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은 모두 인위적이고 유위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유위법이 작동하는 유위의 세계이다.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무위법(無爲)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무위 함이 없는 세계로 들어가려면 일단 작위적인 말과 생각 그리고 행동까지 모두 잠시 멈춰야 한다.

멈춤은 단순히 중단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멈춘다는 것은 인위적이지만 무위로 들어가기 위한 인위의 마지막 단계이리다.

돌려 놓는 다는 것은 유위에서 무위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멈추는 행위는 다시 돌려 놓기 위한 단계에 해당한다.

 

우리는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는 경지가 너무나 경지라 여기기 쉽다.

하지만 경지에 이르기 위한 출발은 되돌려 놓음이다.

근본으로 돌려 놓는 ,

수행은 돌려 놓음의 반복이다.

 

귀근득지(歸根得旨)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수조실종(隨照失宗) 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수유반조(須庾返照)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쳐보면

승각전공(勝却前空) 앞의 공함보다 뛰어남이라

 

근본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우리는 놓치지 말고 있어야 한다.

봄은 바로 반조이다.

비추어 본다는 것은 근본 마음 자리를 지켜보는 것이다.

승찬스님은 깨달음에 이르는 공을 알았다 하더라도 잠깐 근본을 비춰봄만 못하다고 하신다.

그럴까?

반조(返照) ,비춰봄이 바로 수행의 근본이기 때문이 아닐까?

 

                                                        

 

須庾:모름지기 , 잠깐 유:  모름지기 잠깐 사이에

返照:돌이킬 , 비출 조 :  돌이켜 비추어 보면

勝却: 이길 , 물리칠 각 : (물리쳐 이길 정도로)  뛰어나다

前空: , 빌 공:  앞의 공 혹은 앞의 깨달음


*회광반조(回光返照): 빛을 돌이켜(스스로를) 비춘다. 회광은 빛을 돌이킨다는 역동적, 능동적 움직임으로 단순한 지켜봄을 넘어선 의식적 전환을 상징함.

*유위법(有爲法): 모든 조작이 되고 생멸(生滅) 있는 것으로, 인과(因果) 있으며, 인연(因緣) 의한 생멸변화(生滅變化) 있는 법을 뜻하는 불교용어

*무위법(無爲法): 어떤 조건 혹은 인연에 의해 조작되지 않은 것으로,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 불생불멸(不生不滅), 항상 그대로 변함이 없는 상주불변(常住不變) 법을 뜻하는 불교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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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6-01-17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광반조의 경지에 올라야 할텐데. 여전히 부끄럽네요ㅠㅠ

마힐 2026-01-17 23:51   좋아요 0 | URL
회광반조의 ‘경계’가 따로 있는지, 저도 늘 의심하게 됩니다.
부끄러움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보고 계신 지금 이 자리가
어쩌면 이미 돌이켜 비추어 보고 있는 중이 아닐까요?
호시우행님, 바람이 차가워 졌네요. 추운 겨울 감기 조심하세요. ^^
감사 합니다.
 
무경계 -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동서고금의 통합적 접근
켄 윌버 지음, 김철수 옮김 / 정신세계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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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 나는 누구인가? 영원한 질문을 만나다.

 

2년 전, 켄 윌버의 <무경계(No Boundary)> 를 만났었다.

시간이 흘러 지금 다시 펼쳐 보니 문장 하나하나가 낯설지 않은, 동시에 분명히 달라 보였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신심명>과 <증도가>를 붙들고 보냈다.

그래서 이번에 그때 <무경계> 글을 다시 한번 <신심명>과 <증도가>로 확장하여 사유해 보기로 했다. 이번에도 몇 회에 걸쳐 사유가 이어질 것 같다.

글은 2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나누는 사유의 대화이기도 하다.


 

“너 자신을 알라(Γνῶθι σεαυτόν)”

델포이 신전에 새겨졌다는 문장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젊은이들에게 던졌던 질문이기도 하다. 그 말을 들은 이는 자연스레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놀랍게도 질문은 동양의 선방에서도 거의 같은 형태로 등장한다.

“이 뭐꼬?(是甚麼: 시심마)”

지금 보고 듣고 말하고 있는 작용은 대체 무엇인가.

무엇이 나를 이끌고, 무엇이 나를 살게 하는가.

 

서양의 철학적 물음과 동양의 선적 화두는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지만 같은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질문에 대해 철학은 존재와 실존으로 답했고, 종교는 나와 신성의 관계로 설명했으며, 과학은 생명의 기원과 유전자로 접근해 왔다.

각자의 언어는 정교했고, 각자의 지도는 나름 완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길을 설명하는   넘쳐 났지만 지금 길을 걷는   대한 대답은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지구에 80억 명의 사람이 있다면, 80억 개의 답이 공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년 전의 나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공부의 출발점으로 생각했다.

답을 향해 나아가야 질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다르다.

질문은 어딘가에 있는 정답을 찾기 위한 물음이라기보다 질문을 품고 있는 마음 자체를 비추는 질문에 가깝다.

<신심명>은 “군불견(君不見) , 그대 보이지 않는가” 라고 묻고,

<증도가>는 “수무념수무생(誰無念誰無生) , 누가 무념하고 무생하는가” 라고 되묻는다.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질문을 다시 돌려준다.

“지금 그 질문을 하고 있는 그 마음을 보라” 고 말할 뿐이다.

 

신심명이 말하는 ‘일종평회(一種平懷)’, 한 가지 평등한 마음이란 어쩌면 우리가 붙 고 있는 모든 ‘나는 ○○ 이다’라는 정의 이전의 자리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들이다, 나는 아버지이다, 나는 부장이다, 나는 승객이다.

나는 이러하다, 저러하다' 등등. 상황과 조건에 따라  라는 정의는 달라진다.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며, 나는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고, 나는 어느 회사의 부장이 되며, 나는 어느 식당의 손님이 되기도 한다. 아들, 아버지, 친구, 손님 이란 모습으로 나는 시시때때로 변한다.

어느 것이 진짜  인가?

그럼 손님이기도 하고, 아들이기도 하고 , 아버지이기도 한 나는 가짜  말인가?

아니다.

나는 고정되지 않았다.  라는 것은 고정 되지 않는다. 고정 될 수가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이것’이라고 규정하고, ‘저것’과 구분하려 하는가?

경계는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다음 사유는 윌버가 말한 “피부 경계선”이라는 개념을 통해 ‘나/나 아님’의 구조를 살펴보려 한다.

그가 말한 경계는 어떻게 정체성을 만들고, 또 어떻게 허물어지는가?

나는 누구인가  영원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여정, 이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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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18일차

<歸根得旨/귀근득지/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隨照失宗/수조실종/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로고스는 태초의 말씀이요, 창조의 기원이다.

로고스는 우주의 시작이다.

(ॐ) 우주의 진동이다.

로고스는 태초의 말씀으로 창조의 시작이고, 옴은 우주의 진동으로 말이 끊어진다.

로고스는 말씀의 시작이지만 옴은 말이 끊어진 자리다.

하나는 시작이고 하나는 끝이다.

그러나 우주의 시작과 끝은 과연 둘일까?

지난번 빨대 비유를 들었듯이 우주가 하나의 관이라면 시작과 끝의 의미가 있을까?

시작이자 끝이요, 끝이자 시작이 되는 순간.

시종불이(始終不二) 시작과 끝이 둘이 아니다.

로고스와 옴의 상관 관계는 종교를 떠나서 참구해 볼만한 화두(話頭) 본다.

 

절언절려(絶言節慮)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무처불통(無處不通)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느니라

귀근득지(歸根得旨)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수조실종(隨照失宗) 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말과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서 듣는 것은 바로 태초의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창조의 시작은 근본 자리가 되고 근본자리가 우리의 불성이다.

근본으로 돌아감은 청정한 우리의 본성품으로 얻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의식에서 올라오는 말과 생각을 돌려 놓을 일어나는 사건이다.

현재 의식은 보기 바쁘고, 듣기 바쁘고, 말하기 바빠서 쉴 사이가 없다.

비춘다는 것은 올라오는 업식들을 여과없이 비추는 것이다.

따라서 업식을 따르면, 결국 내 근본 자리를 잃게 된다. 따라서 돌려 놓아야 한다.

돌려 놓는다는 것은, 올라오는 바로 그 자리를 다시 지켜보는 것이다.

 

*의상대사(義湘大師625~702) 의 *법성게(法性偈) 에서는 이렇게 표현했다.

시고행자 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 그러므로 수행자는 근본으로 돌아가되

파식망상 필부득(叵息妄想必不得) 망상심을 쉬지 않고는 얻을 것이 하나 없네

 

올라오는 업식을 따르지 말고 오직 근본으로 돌아가는 행위가 바로 수행이다.

수행은 근본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끊임없는 행이 아닐까?


:歸根:돌아갈 , 뿌리 근:  근본으로 돌아가면

得旨:얻을 , 뜻 지 :  뜻을 얻게 된다.

隨照: 따를 , 비출 조: 비춤을 따르게 되면

失宗:잃을 , 근본 종: 근본을 잃게 된다.

*의상대사(義湘大師625~702): 젊은 시절 불법을 구하려 원효(元曉, 617~686) 함께 당에 가고자 했다. 원효는 해골물 사건으로 신라에 남게 되나, 의상은 중국으로 넘어가 화엄학을 깨우치고 신라에 화엄종을 개창함. 원효와 더불어 신라 불교의 양대 산맥임.

*법성게(法性偈): 신라의 승려 의상대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방대한 경전 <화엄경>을 연구하여 화엄경의 핵심사상을 7언 30구, 210자로 나타난 게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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