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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애니멀 - 인간은 왜 그토록 이야기에 빠져드는가
조너선 갓셜 지음, 노승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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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스토리텔링 애니(인간은 왜 그토록 이야기에 빠져드는가)

지은이: 조너선 갓셜/ 노승영 옮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요한복음 1 1>.

"여시아문(如是我聞)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모든 불교 경전의 첫구절>

 

 

 

우리 인간의 말하는 능력과 듣는 능력의  결합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른 어떤 종류의 생물체 보다 우수해진것은 틀림없는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유발 하라리는 200만년전 영장류중에 가장 힘이 없던 종에 불과 했던 호모사피엔스가 오늘날 지구에 주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인지혁명(認知革命) 을 꼽았다.

우리 인류는 이야기로 소통을 하고 믿음을 공유하며 개인과 부족간의 유대를 하며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결국 이야기의 활용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가장 별볼일 없는 종에서 가장 뛰어난 사회적 동물로 발전한 셈이다.

 

 

이제 인류에게 이야기는 떠날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오늘날 인류가 만들어 놓은 문학, 영화, 게임, 오락, 음악, 무용, 철학, 정치, 과학 등등  모든 문명의 바탕에는 스토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게 다 태초의 말씀 때문일까?

그렇다면 이야기가 곧 신이 되는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조너선 갓셜의 책<스토리텔링 애니멀>은 일독 할 만하다.

이 책을 보기전 나는 작년에 같은 작가의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를 먼저 읽었었다.

그때 당시 책을 읽는 내내 놀라웠던 작가의 통찰은 이야기라는 것이 살아있는 유기체와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인류가 멸망치 않고 존속하는 한 이야기 또한 같이 살아 나간다것 이다.

 

책에서 작가는 이야기의 효용에 대하여 모든 이야기의 목적은 '상대를 구슬린다는데 있다' 는 관점으로 해석했다.

즉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꼬신다' 는 것이다.

상대를 나의 의도에 맞게 구슬리려면 짜임새 있게 서사를 넣어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모든 행위가 결국은 '구슬림' 이란 것이다.

상대를 구슬림으로 이야기에 공감하게 하고 화합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효용 반면에 작가는 '이야기 꾼을 믿지 말라' 고 했다.

<플라톤의 국가>를 언급하며 플라톤의 위대한 스승이 당시의 시인들(이야기 꾼) 에 의한 선동으로 인해 대중은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즉 이야기는 상대에 대한 분열 , 불신, 증오를 조장을 할수도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탈진실의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은 범람하는 정보 미디어 홍수들, 가짜 뉴스, 보이스 피싱, 매일 실시간으로 업로드하는 유투버들의 선정성 콘텐츠들. 정치가들과 선동자들의 분열적인 구호들과 음모론 속에서 헤매고 있다.

더구나 인공지능의 발달로 우리는 심지어 챗GPT가 진실을 말하는지도 검증해야 한다. (살아가기가 점점 힘들어 진다.)

 

 

 

이시대의 이야기 꾼은 다양하게 진화를 했고 또 현재도 진행중이다.

 

 

 

모든게 진짜 같아 보인다.

진짜 처럼 보이는것은 진짜가 아니다.

결국 우리는 눈에 보이고 들리는 말들을 다 믿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이야기 꾼을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혼란을 조장하는 시대의 이야기가 바로 2500년전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았던 그리스 시대와 다르지 않다고 본 작가의 통찰과 시공간을 연결하는 작가의 독창적인 해석력에 감탄했었다.

 

그때 받은 감동으로 작가의 전작 <스토리텔링 애니멀>을 이번에 읽게 되었다.

 

(<스토리텔링 애니멀:민음사 출판> 2014년 에 출판이 되었고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 위즈덤 하우스 출판>  2023년에 나왔다.)

 

두 책의 작가(조너선 갓셜)은 영문학 교수이자 과학적 인문학의 선두주자를 자처한다.

작가는 스토리와 인간의 상관관계를 생물학, 심리학, 신경과학을 넘나들며 시종 유쾌한 어투로 이야기속의 세상 즉 네버랜드에 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두 책 모두 인류를 '호모 픽투스(Homo fictus:이야기 하는 인간)'라는 관점 에서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다만 아쉽다면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의 통찰은 훌륭하지만 워낙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정신없이 풀어 놓아서 읽고난 후 정리가 잘 안되고 있다.

(독후감을 쓰면서 뭘 쓰고 있는건지 나도 헤매고 있다가 다 지워버렸다.

결국 당연히 나의 문해력의 문제라고 봐야지. )

 

 

그렇지만 작가의 두 책을 비교한다면 나에게는 작년에 읽었던 후속작<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 위즈덤 하우스 출판>이 더 쉽고 재미있게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소장가치를 따진다면 전작<스토리텔링 애니멀:민음사 출판>은 서가에 두고두고 읽어볼 책이 될것 같다.

 

 

 

앞의 태초의 말씀과 여시아문을 다시 살펴본다면,

기독교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불교는 듣는것에서 시작한다.

말하는것과 듣는것 중 어느것이 먼저 인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청각장애인은 말을 못한다.

그렇게 보면 듣는게 좀 더 중요 하지 않을까?

 

 

 

나의 어린시절, 초딩 3학년때 였다.

그 당시 우리반에서 장기자랑 시간을 가졌던 적이 있다.

다른 애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고 나는 '옛날 이야기' 를 말했다.

어른이 된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시에 우리가 표현했던 춤이나 노래, 옛날 이야기 하기 같은 장기자랑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넓게 본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존재의 행위가 나를 표현하는 것이고 이는 곧  말하는 것이 되며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즉 나의 이야기속에서 나는 주연이 되는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세상에서는 내 뜻대로 만들수 있지않을까?

 

태초의 말씀은 곧 내가 되는 것이다.

 

단어를 늘어놓는 것은 작가이지만 단어 자체는 생명이 없어 생기를 불어넣을 촉매가 필요하다. 그 촉매는 독자의 상상력이다. - P26

우리 몸은 ‘지금 여기‘라는 구체적 시공간에 늘 갇혀있지만 상상력은 우리를 해방해 시간과 공간을 마음껏 넘나들게 해준다. - P32

...뽕 가기 위해서... 이것이야말로 이 소설의 요점이다. 픽션은 코카인과 같은 마약이다. - P51

모든 사람의 뇌에는 작은 셜록 홈스가 들어있다...이야기하는 마음은 의미 중독자이다. - P133

이야기는 공동체의 가치를 강화하고...사회를 결속하는...
이야기는 젊은이를 문화에 적응시킨다.
이야기는 집단을 정의한다.
이야기는 무엇이 고귀한 행동인지, 무엇이 비난받을 행동인지 알려 준다.
이야기는 사회의 윤활유이자 접착제이다.
이야기는 우리를 균질화한다. 즉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 - P170

우리중 90퍼센트는 자신의 운전이 평균 이상이라 생각하며 대학교수 중 94퍼센트는 자신의 업무 능력이 평균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위비곤 호수 효과:라디오 방송에 등장하는 가상의 마을로, 이곳에 사는 여자들은 모두 힘세고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고 아이들은 모두 평균이상이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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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3 월14

제목: 한마음이 아니라면

어제 저녁, 주방에서 음식 준비를 하고 있는 완산에게 나는 호들갑스런 마음으로 다가갔다.

낮에 지인을 통해 받은 설이의 입시관련 정보를 알려줘야 했다.

학원정보에 따르면 지금 설이의 스펙으로는 우리가 희망하는 대학이 어려울수도 있다는 것이다.

주방에서 음식을 조리하는 완산 옆에서 나는 프린트 해온 자료를 열변을 토하며 설명하려고 했다.

이때 손가락에 침을 발라 프린트물을 한장 넘길때 였다.

완산이 손가락에 침 뭍이지 말라고 한소리를 했다.

나 왈: '그게 왜? 어때서? 잘 안넘겨 지니까 침 바르는 거지.'

그때 완산에게서 더럽다는 표정이 읽혔다.

한 순간에 내 마음은 싸늘하게 냉각되어 버렸다.

'됐다. 그만 두자.' 하고 말하려던 내용과 굳어진 마음을 전부 회수해 버렸다.

그리곤 나는 냉랭한 표정으로 돌아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완산은 잠시후 나에게 한소리를 했다.

'무슨 남자가 쉽게 화를 내?'

나는 아무 대꾸도 안했다.

이때 식탁에 차려진 저녁을 나는 말 없이 먹었다.

하지만 나의 머리속엔 부부 사이에 온갖 정이 다 떨어지는 상상을 했다.

몇년전 부터 종종 마음이 들떠 있다가 어느 순간 완산의 표정이나 말 한마디에 내마음이 순식간에 냉랭해지곤 했었다.

아마도 이런 냉전이 부부사이에 자주 나거나 지속되면 관계가 파탄나는게 아닌가 싶다.

머리속의 망상을 한창 이어가고 있을때 완산이 다가와 내 앞에 앉았다.

'당신은 요즘 갱년기야? 왜 그리 쉽게 화를 내?'

나 왈: '화 안냈어. 다만 당신이 뭐라고 한소리 하니까 순간적으로 말하기 싫어졌어.'

완산 왈: '당신은 마음공부 한다고 한달에 한번 줌법회도 하면서 이정도 밖에 안돼?'

아, 또... 윽. 완산의 한마디에 또 무너졌다.

완산은 내가 평소에도 침을 뭍히는 것 같은 지저분해 보이는 행동이 좀 많다고 사람들 앞에서 주의하라고 몇번을 얘기 했지만 내가 잘 안듣는다고 했다.

그러게 말일세...

요즘 내가 나이를 먹는가 보다. 왜 그럴까? 진짜 갱년기가 왔을까?

낮에 유튜브, 수요법회에서 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설법이든 강의를 들으면 들을때 뿐이고 실제로 실천을 전혀 하지 않는다.

'나' 를 내려 놓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관 한다고 하는게 그게 될 법인가? "

그렇다.

내가 지금 그런 형국이구나.

아직도 다스려지지 않은 내 안의 중생들.

참성품은 여여하지만 내 육신속의 중생들은 아직도 아우성이다.

 

결국 완산과 나는 낮에 얻은 입시 관련 정보를 설이한테 알려 주지 말자고 했다.

어쩌면 정보를 제공한 학원의 목적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돼었다.

대학합격 수준을 어렵게 잡아야 학부모들에게 입시학원 등록을 유도할 수 있을테니까.

또 이런 정보는 아직 확신이 없는 설이한테는 도움보다 오히려 불안감만 키워줄것 같았다.

그래서 차라리 모르는 편이 더 나을것 같았다.

그리고 완산은 이것 때문에 서로 다투게 되었으니 사실 이 정보 자체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즉, 한마음이 안된다면 그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이럴때 완산은 도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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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3 월12

 

 

 

제목:  움직이는것은 그대의 마음이다. (仁者心動_ 육조단경 중에서)

두번째 사색

육조혜능이 오조홍인에게서 의발과 법을 전수받고 남방에서 숨어 살다가 어느덧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느낀후 세상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광주의 법성사란 사찰에서 열반경 법회가 열렸는데 혜능은 그 법회에 청중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그때 사찰에 세워진 깃발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휘날리는 것을 보고 스님들 의견이 분분했다.

'저건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다.' '아니야! 저것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다.'

바람이 움직이니 깃발이 움직이니 대중들은 설왕설해를 하며 논쟁을 하던중,

그때 혜능이 홀연히 답한다.

'움직이는것은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다.'

그럼 뭔데?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라고 하자 청중은 놀랐다고 한다.(一衆駭然: 일중해연)

그렇게 5조의 법을 이은 6조가 세상 밖으로 드러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

당시의 대중은 어떻게 혜능이 단지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는 것이다.'

라는 대답에 심상치 않음을 알고 놀랐을까?

무시 할 수도 있는 답이 아닌가?

어떻게 대중들은 혜능의 대답에 탄복할 수 있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혜능의 대답보다 그당시 대중들이 답을 알아보는 안목이 대단하지 않은가?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 이란 답을 아는 인식을 대중은 이미 가지고 있었다고 볼수 있다.

 

즉, 혜능이 당시에 깨달음을 지녔다고 하지만  그 깨달음을 아는 대중의 안목 또한 대단한게 아닌가 싶다.

 

쇼펜하우어가 천재는 자신의 경지를 보통일반 사람들도 직관적으로 알수 있게 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평한바가 있다.

즉 천재성을 깨달음으로 바꿔 표현한다면 진정한 각자(覺者)의 위대함은 누구에게나 가지고 있지만 발현 되지 않은 불성을 자각(自覺)하게 해주는데 있다.

그래서 선지식(善知識)은 각자(覺者) 이여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것이 아닐까?

어쩌면 천재성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발현시키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그 보통 사람들 가운데 한두명 특출난 천재성을 발현한 사람, 혹은 깨달은 사람이 나타나면 이들은 보통 사람들에게 숨겨진 천재성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가 타인의 천재적인 재능을 알아보거나 깨달음의 경지를 단박에 알수 있다면 그건 이미 본인 내면에 본래 갖추고 있던 천재성이나 불성을 비추어 본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성본래불(自性本來佛)

이렇게 본다면 우리 모두는 이미 거의 완성형이 아닌가?

다만 아직 알이 깨지기 전 상태, 어미 새가 밖에서 한번 쪼아 주는게 부족한 상태.

선지식의 할과 방의 한방이 필요한 상태가 아닐까?

 

석가모니 부처님과 큰스님을 비롯한 모든 선지식은 지금도 우리에게 줄 한방을 준비하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단지 우리 스스로가 알 껍질 안에서 좀 더 쪼아 놓길 기다리고 있는지도...

 

결국 성장과 완성은 어쩌면 한껍질 벗겨내는가에 달려 있는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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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3 월11

 

 

제목:  원죄는 없다.

첫번째 사색.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성경속의 하나님은 완성형 신은 아닌것 같다.

아마도 성장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창세기때의 하나님은 분명 신이 되신지 얼마 안된것 같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고 인간인 아담과 이브를 자신과 같은 외모로 만들어 냈다고 했다.

그런데 인간을 만들어 놓고 그들을 에덴동산에 가두고 길렀다.

마치 우리 인간을 포함한 대부분의 동물들이 자식을 낳고 기를때는 부모 품안에 두고 키우듯이 하나님도 그랬던것 같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품안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찾아온다.

이 시기에는 부모가 아이 때문에 속을 태운다. 아마도 에덴동산에서도 그런일이 발생한것 같다.

마치 우리가 부모말 안듣고 친구 잘못 사귀어서 꿰임에 빠지것과 다르지 않다.  

결국 하나님도 아담과 이브를 끝까지 에덴 동산에 가둬두고 기를 수 없었다.

그건 마치 우리 인간이 자식을 낳아 길러도 어느정도 장성하면 독립시켜야 되는것 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싶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은 '원죄'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추방' 되었다고 해석한다.

또한 종교 연구자들은 성경 내용을 곧이 곧대로 이해하거나 해석하지 말고 맥락속에서 상징적으로 살펴보라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이 부모의 입장에서 아담과 이브를 바라 본다면...

그렇다면 이것은 이건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독립한것이라 봐야 되지 않을까?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사랑했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자신이 가둬두고 함께 살수 없다는것을 깨닫게 된것은 아닐까?

에덴동산에서 추방이 아니라 독립 시키는것이 그당시 신이 인간에 대한 최선의 사랑이 아니였을까?

그렇게 하나님도 신과 동시에 부모로서 성장을 하게 되는것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도 난생 처음 부모 역할을 맡은셈인데 어찌 우여곡절이 없으셨을까?

자식이 부모에게서 자립하는것이 죄가 되는것인가?

그러니 원죄는 없다.

결국 성경속의 하나님도 결국 우리 인간처럼 신으로,부모로서 성장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건 신 만이 알겠지.

나도 우리 부모님 속 몰랐고, 우리 애들도 내속을 모르듯이. 지금은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다 이해 할 날이 올것이란것은 안다.

그때 되면 나도 아이들도 철이 들겠지.

하나님도 그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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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신이라는 착각 - 확신에 찬 헛소리들과 그 이유에 대하여
필리프 슈테르처 지음, 유영미 옮김 / 김영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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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제정신이라는 착각

(확신에 찬 헛소리들과 그 이유에 대하여)

필리프 슈테르처 지음/ 유영미 옮김

 

 

애니메이션  '카우보이 비밥(COW BEBOP)' 에서 오프닝 음악 (TANK!) 은 사람을 신나게 한다.

이 신나는 째즈음악은 현실의 혼잡한 상황을 좌충우돌 하는 가운데 경쾌한 리듬으로 헤쳐나가는 중독성 강한 매력을 지녔다.

이 음악을 들으면서 운전을 하면 내가 차를 모는게 아니라 우주 전투 비행기를 몰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마치 내가 카우보이 비밥의 주인공 '스파이크' 가 된 듯하다.

나는 카우보이 비밥이 20세기 최고의 걸작중 하나라고 확신 하지만 어느 누군가는 그저그런 유치한 만화라고 할 것이다.

이제 나이 50이 다된 내가 이런 '중2병' 같은 착각에 빠지는데 과연 나는 제정신일까?

 

 

 

이책<제정신이라는 착각>은 우리의 인식과 확신에 관한 책이다.

세계적인 신경과학자이자 정신의학자인 저자 필리프 슈테르처는 '우리가 인식하는 이 현실은 사실 우리 머리속에서 만들어 내는 즉, 뇌가 만들어 내는 세상' 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은 뇌가 만들어 내는 세상이다' 는 저자의 생각은 이미 널리 알려진 내용이라 새로운 정보는 아니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뼈로 이루어진 딱딱한 공간속의 뇌가 외부세계를 직접 맞딱드리지 않고 어떻게 지각을 만들어 내는지에 주목한다.

즉 뇌는 어떻게 지각을 만들어 낼까?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한 거듭된 연구를 진행 하면서 지각의 변화 증상은 심리질환과 연관이 되어있음을 알게 된다.

 

 

 

뇌가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상을 만들어 내면 타인이 볼때는 미쳤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조현병 같은 정신 질환에 주목하게 된다.

 

연구가 깊어짐에 따라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아 보이는 환각증상, 망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겪는 확신을 통해 저자는 한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저자는 확언한다. (저자는 이또한 또다른 확신이라고 양해를 구한다.)

'망상'과 '정상' 의 경계가 확실하지 않고 구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한다.

책에서는 여러 예시를 들며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는 거의 한끗 차이라고 말한다.

데이터와 사실을 토대로 하는 과학자들 마저 자신의 열의에 빠져서 말도 안되는 이론을 제시하게 된다던가 음모론 신봉자나 열성적인 종교주의자를 다 미쳤다거나 조현병으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미 '탈진실의 시대'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세상은 보이는 현상뒤에 감춰진 근본적인 원인을 파헤치고자 하는 음모론 신봉주의자들, 서로 자신이 걷는 길이 정도(正道)라고 믿는 신념주의자들로만 이루어 진것 같다.

감춰진 진실을 파헤치고 자신의 신념만이 옳다는 확신으로 꽉 찬 세상속에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정도(正道)인지를 두고 충돌하고 있다.

 

사실과 근거를 무시하고 자기가 보고 싶은것만 보고, 듣고 싶은것만 듣고, 믿고 싶은것만 믿는 것이 우리 인간이란 동물의 기본 설정값 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는 전부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해결이 어려워 보이는 문제와 갈등들에 대한 저자가 제안하는 바는 주목할 만하다.

우리가 확신하는 '모든것은 단지 가설' 일뿐임을 인정하라고 한다.

우리의 확신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었다.

원시시대 부터 우리의 감각기관이 뇌에 제공하는 이해할 수 없고, 불확실하고 종종 모순이 되는 신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실이든 망상이든 확신을 우선적으로 내려야만 했다.

그와 동시에 우리의 뇌는 예측 기제도 함께 발달 되어졌다.

즉 확신은 살아남기 위해서 형성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확신의 형성에는 정신질환이나 정상이나 별차이가 없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달리 이해한다면 결국 우리 사피엔스 종은 태초에서 부터 함께한 불안으로 인해 오히려 확신을 강화 시켰다는 뜻이 되는것 아닌가?

불확실한 현실과 미래는 현재 확신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게 되는 셈이다.

이제 확신이 현실에 부합이 되든지 되지 않던 모두 중요한게 아닌것이다.

오히려 불확실할 수록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더욱 더 확신을 하게 된다.

 

이렇게 이해를 하면 모든 갈등을 야기하는 서로 다른 확신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과학적 시각 조차도 우리가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저자는 과학적 시각을 버리지 말라고 충고한다.

우리의 확신은 단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고 언제나 수정 될 수 있으니 불확실한 세상을 대함에 언제나 열린 태도로 세상을 대하길 권한다.

 

자기 확신으로 점점 분열되어 가는 듯한 세상을 향한 저자의 통찰에 깊이 공감하고 내 자신이 확신하는 모든것들에 대해 다시금 점검이 필요함을 절실히 일깨워준다.

 

 

 

카우보이 비밥에서 '비밥( BEBOP)' 의 뜻은 재쯔 음악에서 즉흥연주를 말한다.

정해진 악보 없이 뮤지션들이 각자 개성에 맞게, 상황에 맞게, 각자의 연주가 하나의 화음으로 연주 되는 것이다.

우리의 문학이나 영화 장르를 보면 단순하게 하나의 장르로 비교적 쉽게 규정한다.

로맨스, 액션, 스릴러, 공상, 코믹, 비극, 공포, 전쟁 등등 하지만 실제 우리가 사는 현실은 어느 장르 하나로 규정 할 수 없다.

삶은 모든 장르를 포함하고 있으며 세상은 각자의 다른 장르가 공존한다.

 

나에게 세상은 코믹이지만  내 동생에게 세상은 액션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건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보면 세상 전체는 영원한 한가지 장르만으로 존재 하질 않는다.

세상은 언제나 고정되지 않고 변화하며 모든 장르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즉 우리는 삶의 무대에서 각자의 악기로 고정되지 않은 리듬과 박자로 째즈를 연주하는 비밥 뮤지션과 무척 닮지 않았나?

우리가 어떠한 신념을 가졌거나, 도저히 변할수 없는 확신을 가졌다 하더라도 세상은 언제나 고정되지 않은 째즈연주 '비밥' 과 다르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겠다.

 

 

 

카우보이 비밥 마지막 에피소드.

스파이크가 숙명의 라이벌 비샤스와 대결을 마치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온다.

스파이크는 이미 달관한 모습으로 멍때리고 쳐다보는 조직의 잔당들을 향해 손가락 권총을  겨눈다. 입으로 빵 소리 내고 스파이크는 쓰러져 버린다.

화면은 스파이크의 쓰러진 모습에서 하늘로 점점 클로즈업을 시키며 올라간다.

푸른 하늘, 구름, 그리고 계속 올라가며 별들이 보이는 어두운 하늘로 향한다.

결국 한참을 올라 우주까지 올라가 버린다.

우주 공간속에는 방금전 까지 격렬했던 삶과 죽음의 경계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지구안에서 우리가 가진 신념과 확신으로 죽기 살기로 싸우고 투쟁하던 그 모든것은 우주의 입장에서 아무것도 아닌것이 된다.

애니메이션 이였지만 삶을 관조하는 이런 연출은 나에게 깊은 여운을 남겨 주었다.

 

이래도 카우보이 비밥이 그렇고 그런 만화영화 였을까?

 

 

 

불교의 선지식들 께서는 '나' 를 제대로 깨닫는것이 우주를 아는것 이라고 하셨다.

법성계 구절에 '일중일체 다중일, 일즉일체 다즉일(一中一切 多中一, 一卽一切 多卽一) 하나안에 일체가 있고 일체 안에 하나가 있어,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 고 했다.

내가 우주 그자체요, 우주가 곧 내가 되는 것이라.

제정신이든 제정신이 아니든 '나' 부터 제대로 깨어나야 한다.

바뤼흐 스피노자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돌아가거나 행운이 그들에게 언제나 호의를 베풀어준다면, 그들은 미신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 P285

진화의 명령은 ‘현실과 일치하는 세계를 구성하라!‘는 것이 아니라, ‘생존과 번식 가능성이 극대화되도록 세계를 구성하라!‘는 것이다. - P296

우리는 세계에 대한 완전한 진실을 알 수 없다. 우리의 확신은 이런 불확실함에 대처하기 위한 우리 뇌의 중요한 전략이다. 확산은 우리에게 불확실함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옳은 것을 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준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주관적 확실함에 오도된 채 자신의 확신만이 옳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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