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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23

오늘의정진: 是卽龍女頓成佛/시즉용녀돈성불/옳은 즉 용녀가 단박에 성불함이여


- 100일 정진, 88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백 세 번째와 백 네 번째 구절은

<不是山僧呈人我/불시산승정인아/산승이 인아상을 드러냄이 아니오

修行恐落斷常坑/수행공락단상갱/수행타가 단상의 구덩이에 떨어질까 염려함이로다

非不非是不是/비불비시불시/그름과 그르지 않음과 옳음과 옳지 않음이요

差之毫釐失千里/차지호리실천리/털끝만큼 어긋나도 천리 길로 잃으리도다> 였다.


수행은 철저하게 라는 상()을 죽이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만 한다. 죽인다고 해서 살인 같은 죽임이 아니라 라는 상(), 즉 고정된 관념을 없애는 것이다. 수행은 끊임없는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이며 자칫 잘못하면 엉뚱한 구덩이에 빠질 가능성도 높고, 처음 의도했던 것 하고는 십만팔천리나 멀어지게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끊어지지 않는 마음을 내야 한다.

이는 곧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主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르는 바가 없는 마음을 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은 백 다섯 번째와 백 여섯 번째 구절

是卽龍女頓成佛/시즉용녀돈성불/옳은 즉 용녀가 단박에 성불함이여

非卽善星生陷墜/비즉선성생함추/그른 즉 선성 비구가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짐이다

吾早年來積學問/오조연래적학문/나는 어려서 부터 학문을 쌓았고

亦曾討疏尋經論/역중토소심경론/일찍 소를 더듬고 경론을 살폈다.


용녀(龍女)가 성불하는 일화는 법화경(法華經)에 나오는 내용이다. 용녀는 큰 바다에 사는 용왕의 딸로 8살 때 법화경의 설법을 듣고 성불하게 되었다. 이에 사람들은 8살 이란 어린 나이에 부처가 되었다는 것에 의심했고, 또한 여자의 몸으로 성불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이는 우리가 얼마나 상()에 집착하는 지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어린이가 성불할 수 있다는 것과 여자가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당시 사람들은 믿질 않았다. 금강경에서 사상(四相)을 벗어 나야 한다고 했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라는 고정된 모습을 벗어나야 무아(無我)를 이를 수 있다. 용녀가 단박에 성불했다는 일화를 통해 고정된 모습이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선성비구라는 자는 비록 불교 경전을 암송하고 다녔다고 했으나 불법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오히려 승단의 화합을 해쳤고 불법을 비난하고 다녔다. 신성비구의 이러한 행위는 오역죄에 해당되어 결국 산채로 지옥에 떨어졌다는 일화가 있다.

이러한 일화들이 의미하는 바는 진리란 고정된 모습이란 없는 것으로 그 어떠한 상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일 소견>

믿음이란 무엇인가? 진리가 고정됨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어쩌면 우리는 믿음을 거론하면 믿음의 대상부터 고려하는 습성이 있다. 누구를 믿을 것인가? 그러나 믿음은 대상이 아니라 방식이 아닐까 싶다. 어떻게 믿을 것인가? 나의 소견으로는 기독교가 믿음에 대하여 대상을 가장 중요시 여겼다면 불교는 믿음에 대한 방식을 좀 더 중요시 하지 않았나 싶다.

누구를 믿을 것인가? 어떻게 믿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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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22

오늘의정진: 不是山僧呈人我/불시산승정인아/산승이 인아상을 드러냄이 아니오


- 100일 정진, 87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백 한 번째와 백 두 번째 구절은

<若是野干逐法王/약시야간축법왕/여우가 법왕을 쫓으려 한다면

百年妖怪虛開口/백년요괴허개구/백년 묵은 요괴가 헛 되이 입만 여는 것이라

圓頓敎勿人情/원돈교물인정/원돈교는 인정이 없나니

有疑不決直須爭/유의불결직수쟁/의심이 있어 결정치 못하거든 바로 다툴지어다> 였다.


()에서 소소한 인정(人情)은 필요치 않다. 자비(慈悲)의 종교인 불교에서 살불살조(殺佛殺祖) 같은 선의 과격함은 어쩌면 이단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교는 방편(方便)의 종교이기도 하다. 수많은 법문과 수행이 결국 전부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는 법화경의 말씀이 있다. 사람마다 근기(根機)가 다 달라서 어떤 이는 쉽게 불법의 요체를 체득하지만 어떤 이는 도무지 알아듣지 못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양한 사람들을 위해 각각의 근기에 맞추어 가르침을 펴야 했던 것이다. 일체 중생들이 본래 가진 부처의 성품을 깨닫게 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방편을 사용했다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선의 과격한 일면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선은 방편을 넘어선 최고의 수행이기도 하다. 모든 의심을 단박에 깨부수기 때문이다.


오늘은 백 세 번째와 백 네 번째 구절

不是山僧呈人我/불시산승정인아/산승이 인아상을 드러냄이 아니오

修行恐落斷常坑/수행공락단상갱/수행타가 단상의 구덩이에 떨어질까 염려함이로다

非不非是不是/비불비시불시/그름과 그르지 않음과 옳음과 옳지 않음이요

差之毫釐失千里/차지호리실천리/털끝만큼 어긋나도 천리 길로 잃으리도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금강경에서는 사상(四相)이라 부른다.

불교에서 ()이란 고정된 모습또는 고정된 관념을 뜻한다. 불법을 배우는 목적이 궁극적으로 내가 본래 없음을 아는 무아(無我)를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본래 내가 없다는 사실을 고정관념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있다. 사상은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벗어나지 못하는 네가지 고정된 생각을 지칭하는 것이다. 아상은 내가 있다는 생각, 자아가 있다는 고정 관념, 인상은 남이 있다는 생각, 개아(個我)가 있다는 고정 관념, 중생상은 우리 모두가 중생이라는 생각, 범부라는 고정 관념, 수자상은 우리 모두는 목숨이 있으며 영혼이 있다는 고정 관념을 의미한다. 결국 사상이란 가 있다는 고정관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수행자는 이러한 사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고정된 생각은 또 하나의 분별심이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옳다는 생각이 분별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정말 쉽지 않다. 그 또한 라는 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맞다, 틀렸다고 하는 시비(是非)를 따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증도가에서는 털끝만큼의 분별심이 있다면 결국 천리나 되는 거리 만큼이나 어긋나게 되버림을 경고했다.

승찬(僧璨) 대사의 심신명(心信銘)에서도 같은 구절이 나온다.

<호리유차(毫釐有差) 천지현격(天地懸隔)  털 끝 만큼의 차이가 있어도 하늘과 땅만큼 벌어진다.>

내가 옳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서는 결코 참 나를 알지 못한다.


<일일 소견>

어쩌면 마음 공부는 내 마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별심을 내려 놓는 것이 전부 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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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21

오늘의정진: 若是野干逐法王/ 약시야간축법왕/ 여우가 법왕을 쫓으려 한다면


- 100일 정진, 86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아흔 아홉 번째와 백 번째 구절은

<境靜林閒獨自遊/경정림한독자유/ 경계 고요하고 숲 한적하여 홀로 노나니

走獸飛禽皆遠去/주수비금개원거/길짐승과 나는 새가 모두 멀리 가버렸다

師子兒衆隨後/사자아중수후/새끼 사자를 사자 무리가 뒤 따름이여

三歲卽能大哮吼/삼세즉능대효후/세살에 곧 크게 포효하도다> 였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다. 세살 먹은 어린아이는 말도 할 줄 알고, 스스로 걷고 뛰는 데도 지장이 없다. 그렇게 쭉 팔십까지 살게 된다. 그래서 사람 노릇의 출발을 세살로 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부모는 세살 먹은 아이 때부터 필요한 말과 행동을 가르치고, 하지 말아야 할 말과 행동을 알려 준다. 그렇게 배우고 자라면서 아이의 말과 행동을 부모는 뒤에서 지켜 봐준다. 마치 아이가 부모를 이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이가 스스로 앞 길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것이다. 사자의 무리는 사실 새끼 사자를 뒤 따르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무리를 이끌 수 있도록 뒤에서 지켜봐주는 부모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혼자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뒤에서 지지하고 성원하는 것이다. 수행의 길도 그와 같다. 나 혼자 수행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체 불보살님과 스승님들의 돌보심이 없다면 수행은 시도조차 못 했을 것이다.


오늘은 백 한 번째와 백 두 번째 구절

若是野干逐法王/약시야간축법왕/여우가 법왕을 쫓으려 한다면

百年妖怪虛開口/백년요괴허개구/백 년 묵은 요괴가 헛 되이 입만 여는 것이라

圓頓敎勿人情/원돈교물인정/원돈교는 인정이 없나니

有疑不決直須爭/유의불결직수쟁/의심이 있어 결정치 못하거든 바로 다툴지어다.


꼬리 아홉개 달린 여우가 아무리 재주를 피워도 백수의 왕 사자를 이길 수는 없다.

내 마음속에 온갖 그럴듯한 생각이 있다고 해도 분별, 망상은 망상심이다.

망상심은 진리의 참성품을 이길 수가 없다. 원돈교(圓頓敎)는 바로 선()이다.

선은 살불살조(殺佛殺祖)의 정신이다. 단칼에 죽여 없애야 하는데 인정(人情)이란 있을 수가 없다.

진짜 자비를 위해 때로는 무명(無明)을 한 칼에 베어 버려야만 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만 하는 것이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의 심정이 아니라면 원돈의 문에 들 수가 없다.

그래서 원돈은 단박에 들어가는 문이다. 문을 찾으려고 조금이라도 기웃거리거나 지체해서는 안된다. 문없는 문으로 단번에 들어가야 한다. 무문관(無門關) 은 이렇게 시작한다.


<일일 소견>

몸이 아프니 마음이 괴롭다. 고통 있는 곳이 지옥이다. 그렇다면 몸과 마음이 지옥이다.

몸이 나으니 마음이 기쁘다. 기쁨 있는 곳이 극락이다. 그렇다면 몸과 마음이 극락이다.

마음으로 짓고 몸으로 받는다는 뜻이 바로 이것이다. 지옥과 극락이 바로 나한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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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20

오늘의정진: 境靜林閒獨自遊/ 경정림한독자유/ 경계 고요하고 숲 한적하여 홀로 노나니


- 100일 정진, 85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아흔 일곱 번째와 아흔 여덟 번째 구절은

<欲得不招無間業/욕득불초무간업/무간지옥의 업보를 부르지 않으려면

莫謗如來正法輪/막방여래정법륜/여래의 바른 법륜을 비방치 말아라

栴檀林無雜樹/전단림무잡수/전단향나무 숲에는 잡나무가 없으니

鬱密深沈師子住/울밀심침사자주/울창하고 깊숙하여 사자가 머무른다> 였다.


고통의 간격이 없는 지옥, 즉 끊임없이 고통이 지속되는 지옥을 무간지옥(無間地獄) 이라 부른다. 본래 지옥은 육도윤회(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계)의 맨 아래 단계인데 무간지옥은 지옥 8계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있는 지옥이다. 지옥계의 모든 고통 중에서 가장 심한 고통을 받는 곳이 무간지옥이다.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업보를 받으려면 오역죄를 지어야 한다. 부모를 살해하고, 깨달은 아라한을 살해하고, 절의 스님들의 화합을 깨뜨리며, 부처의 몸에 상해를 입히는 죄를 지는 것이 오역죄에 해당한다. 존속살인과 대중의 화합을 깨뜨리는 것과 부처님과 같은 성인을 살해하는 죄라 보면 된다. 살인은 이해가 되지만 대중의 화합을 깨우는 것이 그만큼 무서운 죄일까 싶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조직과 단체를 보면 얼마나 많이 파벌이 갈려서 싸우고 있는가? 당장 우리나라 정치판만해도 극과 극으로 갈려 대치하며 싸우고 있는데, 그들이 전부 죽으면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것인가? 화합을 깨는 것 조차도 지옥에 떨어지는 죄에 해당한다면 지금 지옥엔 아마 너무도 많은 중생들이 있을 것이다. 고통 있는 곳이 지옥이라면 어쩌면 우리 현실세계까지도 지옥 중의 일부가 넘어 온 것이 아닐까?

고통이 있는 모든 곳이 지옥이다. 내 마음 안에서도 지옥도 펼쳐지고 극락도 펼쳐진다. 마음으로 짓는 모든 행위에 대한 댓가는 모두 몸으로 받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지옥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여래의 바른 법을 따르는 길이 가장 빠르다. 그것이 지옥을 벗어나는 길이다.


오늘은 아흔 아홉 번째와 백 번째 구절

境靜林閒獨自遊/경정림한독자유/경계 고요하고 숲 한적하여 홀로 노나니

走獸飛禽皆遠去/주수비금개원거/길짐승과 나는 새가 모두 멀리 가버렸다

師子兒衆隨後/사자아중수후/새끼 사자를 사자 무리가 뒤 따름이여

三歲卽能大哮吼/삼세즉능대효후/세살에 곧 크게 포효하도다.


사자는 3살 정도가 되면 성체가 된다고 한다. 초원에서 사자 한 마리가 기지개를 키고 일어나면 모든 뭇 짐승과 날 짐승들이 달아나 버린다. 사자새끼라도 용맹한 성체 사자는 무리를 이끌어 갈 수 있다. 젊은 사자의 큰 포효 한번으로 백수의 왕임을 증명한다.

우리 마음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경계를 단 한번의 사자후(獅子吼)로 고요히 만들어야 한다.

사자의 우뢰와 같은 포효에 모든 잡생각과 망념들을 일시에 떨쳐 버린다.


<일일 소견>

지장보살(地藏菩薩)은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기 전까지는 자신은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我若向地獄 地獄自消滅 (아약향지옥 지옥자소멸) 내가 만일 지옥으로 가면 지옥이 스스로 저절로 소멸되리라> 천수경(千手經)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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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년3월19일
오늘의정진: 欲得不招無間業/욕득불초무간업/무간지옥의 업보를 부르지 않으려면
- 100일 정진, 83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아흔 다섯 번째와 아흔 여섯 번째 구절은
<聞說如來頓敎門/ 문설여래돈교문/ 여래의 돈교문 설함을 듣고서
恨佛滅除令瓦碎/ 한불멸제령와쇄/ 부숴 없애지 못함을 한탄하는 도다
作在心殃在身/작재심앙재신/ 지음은 마음에 있으나 재앙은 몸으로 받나니
不須怨訴更尤人/불수원소갱우인/모름지기 사람을 원망하고 허물치 말지어다> 였다.

   <내 탓이요,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이  구호는 천주교인 들이라면 익숙할 것이다.
성경에서 아담과 아훼가 에덴동산을 떠난 이유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선악과를 먹은 행위는 분별의식을 가지게 된 사건이다. 남의 탓을 하는 것은 '나' 라는 의식을 확고히 한 행위이고 이것이 바로 원죄(原罪)에 해당된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해서 원죄가 된 것이 아니고 본래 공(空)한 자리(에덴동산)에서 분별심(선악과)을 일으켰기 때문에 원죄가 된 것이다. 그러니 죄가 없는 자리, 다시 공(空)으로 돌려 놔야 한다. 그것이 바로 분별을 멈추고 내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마음 공부를 잘 하려면 무조건 내 탓으로 돌려야 된다고 역대 선지식분들도 말씀하셨다.
내게 벌어진 어떤 일의 결과는 전부 내 탓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다 내 탓으로 돌려야 한다.
아니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어찌 내 탓이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님 조차도 나를 낳을 때 내가 어떤 성별로, 어떤 모습으로 태어 날 줄 모르는데 어떻게 나의 출생 조차도 내 탓이 될까? 그런데 그렇지 않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로 부터 왔다. 과거의 나는 아주 오래 전의 과거 생을 수 없이 거치면서 진화되어 왔다. 즉 육도윤회를 무수히 돌면서 지금의 나를 형성시켰다는 것이다. 과거 생중에 어쩌다 불법에 인연이 되어 이제는 육도 윤회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수행을 하면 언젠가는 육도윤회를 벗어나는 법칙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결국 나는 나를 형성시켜서 나를 지금껏 이끌고 왔기 때문에 내게 닥치는 일 중 남의 탓으로 벌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나를 형성시킨 것은 '나'라고 규정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 마음 속 무언가가 바로 나를 이끌고 다니는 본체이다. 우리는 그 본체를 깨쳐야 하는 것인데 그 본체를 놔두고 여지껏 남 탓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바로 분별심이며 곧 선악과를 먹는 것이다. 마음으로 짓는 업보는 몸으로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류의 조상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지 않았는가?
 
오늘은 아흔 일곱 번째와 아흔 여덟 번째 구절
欲得不招無間業/욕득불초무간업/무간지옥의 업보를 부르지 않으려면
莫謗如來正法輪/ 막방여래정법륜/여래의 바른 법륜을 비방치 말아라
栴檀林無雜樹/전단림무잡수/전단향나무 숲에는 잡나무가 없으니
鬱密深沈師子住/울밀심침사자주/울창하고 깊숙하여 사자가 머무른다

  수행은 끊임없는 자기와의 대화이다. 이제 육도윤회의 끝이 보이는데 어찌 남을 비방할 새가 있는가? 하물며 보살의 바른 길을 인도하는 여래의 가르침을 비방할 수 있을 것인가?
전단향나무는 인도에서 자라는 향기가 나는 향나무로 알려져 있다. 이 나무로 불상을 조각하기도 하며 나무의 뿌리로는 단향(檀香)으로 만들어 피운다. 전단향 내음 그윽한 그 숲이 바로 내 마음이고, 그 마음 숲엔 백수의 왕 사자가 머무르고 있다.

<일일 소견>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머물고 있는 사자는 언제쯤 눈을 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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