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차: 정치의 시작과 끝, 왜 무의식인가?
사람들은 정치를 이성의 영역이며 공학적인 설계로 작동한다고 믿는다.
법과 제도, 정책과 숫자, 명분과 논리로 움직이는 세계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정치의 현실은 늘 이 믿음을 배반해 왔다.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분노, 합리로는 납득 되지 않는 선택, 결과를 알면서도 늘 반복되는 충돌로 끝나고 만다.
왜 우리는 같은 장면을 되풀이하는가.
나는 그 이유를 정치가 이성의 게임이기 전에, 집단 무의식의 반사 작용이라고 본다.
정치는 언제나 표면에서 싸운다. 그러나 진짜 충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난다.
말로 표현되지 않은 감정, 해결되지 않은 기억, 역사 속에서 봉합 되지 못한 상처들이 세대를 건너 축적된다.
동학 이후 이 땅에는 하나의 질문은 여전히 봉인 되지 못하고 남았다.
“이 나라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
이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고 늘 다른 시대, 다른 이름을 달고 되돌아왔을 뿐이다.
해방 이후, 전쟁 이후, 산업화 이후, 민주화 이후에도 이 질문에 답을 명쾌하게 내 놓을 수 있는가?
그래서 한국 정치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새로운 갈등’ 을 겪는 것이 아니라, 해결되지 않은 질문을 다시 재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인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에도, 국가에도 무의식은 존재한다.
그것을 우리는 집단 무의식이라고 부른다.
한 번 억압 된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한 번 실패한 해방은 다른 방식으로 재등장한다.
이때 이성은 뒤늦게 명분을 만들어 따라가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많은 정치적 선택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보다 ‘왜 그런 감정에 반응 했는지’ 를 물어야 이해된다.
정치를 무의식의 차원에서 보지 않으면, 우리는 끝내 서로를 이해 불가한 집단으로만 규정하게 된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았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서 “정치는 피곤하다.” “정치는 더럽다.”
그래서 “정치는 관심 두지 않겠다.” 고도 말한다.
현대 한국 정치는 늘 불안한 무언가에 잠식되어 있다.
의식이 빠진 자리에 불안한 무의식이 채웠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는 원초적인 감정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그 감정에는 공포, 분노, 복수, 보상 심리가 자리 잡고 있다.
이 감정들은 언제나 가장 단순한 언어와 가장 극단적인 선택을 낳는다.
그래서 무의식을 다루지 않는 정치는 결국 균열과 파열의 형태로 돌아온다.
관계의 파괴는 물리적, 사회적 모습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가 특정 진영을 옹호하려는 것도, 어떤 결론을 강요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단지 정치를 무의식으로 보지 않으면, 우리는 선택하는 시민이 아니라, 반응하는 군중으로 남게 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오래된 감정에 끌려 다닐 뿐일지도 모른다.
무의식을 본다는 것은 누군가를 비난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왜 상대의 말에 반응하는지, 무엇이 날 흔들어 이끄는지에 대한 책임을 되찾는 일이다.
질문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게 될 때 정치는 비로소 소음이 아닌 성찰의 언어가 된다.
우리는 흔히 역사는 반복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반복되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무의식이었다.
우리가 무의식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미래는 새로운 선택이 아니라 이미 겪은 과거의 업을 되 풀이 하게 될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진행 중이다.
그래서 지금, 정치는 내 진영이 옳다는 신념을 내세우기 전에, 나와 상대 진영의 신념 뒤에 감추어진 집단 무의식의 흐름을 읽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내가 이 작은 사유의 여정이 마지막으로 도달한 지점이다.
반복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이다.
우리의 무의식, 이제는 한번 쯤, 조용히 되돌아볼 때가 아닐까?

By Dharma & Mahe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