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야, 이제 너도 주식 계좌 하나 만들어 봐라.

지금 나도 만들었는데 재미가 솔솔하다.

, 지금 같이 회사 문제로 벌이도 없을 땐 주식이라도 사서 놔 둬봐.

아빠, 나 이번에 수익률이 또 올랐어. 왜 투자를 안 하는 거야?

진짜 아빠가 걱정 , 언제까지 회사 분쟁을 끌고 갈 거야?

뭐라도 해야 되는 아니야?


지방에 계신 엄마와 대학 다니는 아들이 번갈아 전화를 하며 안부를 묻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주식해보라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주식 열기는 20대 초반의 아들부터 70대 어머니까지 주식을 하고 있다.

50평생 주식이라곤 한 주도 사 본 적이 없는 나한테 엄마와 아들의 얘기가 압박으로 느껴진다.

언론에서 연일 흥분해서 떠드는 삼성이나 SK하이닉스의 이윤과 주식이 나랑 무슨 상관일까.


지금의 주식 시장은 바다에 모인 사람들과 같다.

드넓은 바다에 누군가는 호화 유람선을 타고 항해를 하지만, 누군가는 이제 서핑 보드를 타고 있다.

누군가는 헤엄을 쳐서 즐기고 있지만, 누군가는 이제 막 몸에 수영 튜브를 끼운 채 어슬픈 수영을 배우고 있다. 바다의 출렁이는 물결에 누군가는 난파를 당하지만, 누군가는 구명 보트를 타고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바다에 던져진 사람들, 지금 주식 시장은 바로 바다에 던져진 사람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300년 전, 아이작 뉴턴은 7천 파운드라는 거금을 South Sea Company 라는 회사에 투자했다.

사우스 컴퍼니는 남미에서 막대한 규모의 무역을 하게 회사라고 알려졌고, 당시 영국의 조지 국왕까지 회사를 방문하여 10만 파운드를 예치하였다.

대중의 초기 관심은 열풍으로 바뀌었고, 시골 농부에서 부터 귀족, 공작 부인까지 주식을 사 모으기에 이르렀다.

100파운드에 불과했던 주식이 점차 300, 400파운드를 넘어섰다.

이때 뉴턴은 이렇게 오르는 주식 열기에 의심을 갖고, 두 배의 수익을 내고 처분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주식은 어느새 단순한 이익의 대상이 아니라, 흡사 종교적 신앙처럼 믿음의 영역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사우스 컴퍼니 주식은 어느덧 500파운드를 넘어섰고 주식 인수가는 급기야 천 파운드를 넘고야 말았다. 하지만 회사는 주식 청약자들에게 50%의 배당금이 약속된다.  이때 파격적인 조건에 아이작 뉴턴은 2만 파운드를 투자한다.


하지만 무한 동력 개발처럼 무한히 돈을 벌게 주는 구조는 세상에 없다.

어느 순간 마구잡이 투기는 현금이 바닥이 나자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뱅크런 같은 사태가 발생하고 사우스 컴퍼니는 공황에 빠지며 현금화 사태는 영국의 은행을 도산 지경에 이르기에 충분했다.

이때 우리의 천재 물리학자 뉴턴이 정신 차렸을 그의 투자금 2만 파운드는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수보리야, 갠지스강의 헤아릴 수 없는 모래알처럼 갠지스강이 또 많다면 어떻게 생각하냐. 그리고 모든 갠지스강의 모래는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오원에는 있다 없다 할 수 없는 뜻이 있거늘 그 모래 수이겠습니까. > 대행 스님의 뜻으로 푼 금강경 중에서


금강경을 읽다가 드는 생각, 주식 시장은 고도의 계산된 논리가 아닌 거의 신앙에 가까운 믿음일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에게 주식 시장은 바다가 아니라 어쩌면 갠지스강의 성수와 같은 믿음의 영역으로 변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쯤 되면 주식을 하는 사람들의 의식 구조는 갠지스강을 두고 성수(聖水)라고 여기는 인도인들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주식은 미래에 대한 가치를 투자하는 것이다.

현재 실적과 실체가 분명 있지만 그것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사고 파는 장이다.

하지만 믿음의 결과는 아무도 수가 없다.

아직 우리는 미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주식이 미래의 청사진을 보여주지만 과연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는 미래인 같지는 않아 보인다.

반도체, 인공지능, 우주 산업, 배터리 등등  기술의 발전에 따라 분명 미래는 현재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 인류의 발전은 믿음을 현실화 하는 능력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졌지만 망설이게 된다.

갠지스강 모래알 같은 존재인 우리가 아무리 많아도 결국 모래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주식하느냐 마느냐, 과연 그것이 문제일까.

문제는 믿음을 어디에 두느냐에 있지 않을까.

주식이 신앙이 되는 시대에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할까.

갠지스강의 모래알은 오늘도 여전히 햇살에 빛나고 있겠지?

갠지스강과 모래 그리고 마음 하나.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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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5-13 2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들 각자 자족하는 바가 다르긴 하지만 생존에 필요한 것 이상을 추구한다면 소유적 욕망일 뿐이죠. 연일 오르는 주식 시장에 눈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잠시 피었다 사라지는 욕망이리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FOMO증후군도 없고요. ㅎㅎ

firefox 2026-05-14 0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주식시장이 지금 비정상적이긴 하지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상승이 있다면 하락도 있을 거라고 보고 있어요. 주식을 신앙으로 보는 분들은 많이 사라지지 않을까요? 라고 저는 생각되네요. 비트코인도 4년마다 사람들이 모였다가 사라지듯이요. 물론 저같이 종교로는 안보고 계속 투자는 하는 사람으로 남는 사람들도 있겠지만요. 저역시 상승장 후반부(2021년 10월 15일)에 주식 시작했기도 하고요^^.
 
오십에 읽는 주역 - 팔자, 운세, 인생을 바꾸는 3,000년의 지혜 오십에 읽는 동양 고전
강기진 지음 / 유노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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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시절, 당시 한국의 경제 상황은 갑자기 들이닥친 폭풍과도 같았다.

환율은 급속도로 오르고 회사는 줄줄이 문을 닫거나, 직원들은 해고가 되었다.

그때의 시대상을 반영한 노래가 있다.


<오락실>

어머 이게 누구야, 저 대머리 아저씨

내가 제일 사랑하는 우리 아빠

장난이 아닌 최고 기록을 깼어

처음이란 아빠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용돈을 주셨어 조건이 붙었어

엄마에게 말하지 말랬어


시험을 망친 딸아이가 오락실에 갔는데 아빠를 것이다.

처음에 아이는 아빠가 회사에 가기 싫어서 하루 일탈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 뉴스에 IMF시대에 실직한 아빠들이 갈 데가 없어 오락실에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엄마는 상황을 전혀 모르고 아빠는 아이 눈치만 보는 가사 속에서 당시의 힘겨워 했던 아빠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당시 대학생이었고 그런 시대상보다 노래 가사 중의 코믹한 부분.

어머 이게 누구야, 저 대머리 아저씨  재미있어, 항상 누군가를 보면서 놀릴 때 부르곤 했었다.

그런데 이제 나이 오십이 넘어 대머리 아저씨 처지가 바로 내가 어찌 알았으랴.


<돌아보면 이 십대는 미숙했고 삼사십 대의 삶은 너무 치열했다. ..중략..

그렇게 젊은 날의 열병이 여러 겹의 나이테를 남기고 지나갔을 비로소 오십이라는 원숙기에 이른다..중략..

그런데 정작 황금기에 이른 오십 대가 잘못된 관점 때문에 무기력증에 빠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중략...

이유는 나이 오십에 이르면 이상 인력으로 되는 일이 많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글머리에 중에서.


그렇다.  20대의 나는 철이 없었다. 곧 대학을 졸업하고 곧장 중국으로 건너왔다. 그리고는 단 한번의 업무 경력 단절도 없이 26년 동안 회사를 다니며 일했다. 그 과정 중에 결혼도 하고 아이도 키우며 나름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고 자부심을 가졌었다.

실력인지 운인지는 없으나 해야 것과 이루어야 것을 이룬 셈이다.

하지만 점차 세월이 수록 내가 있는 것보다 없는 것들로 인해 난관에 부딪힌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점점 세상은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 50을 겨우 넘겼는데, 지금껏 살아왔던 날 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지금 나는 회사에서 해고되었다.


때마침 펼쳐든 <오십에 읽는 주역>은 지금 나에게 필요한 지침서로 읽혀졌다.

순간, 바로 역경 속에 담긴 지혜를 한번 살펴 봐야할 시기인 것이다.

주역(周易) 원래 점술을 치고 운명을 예측하는 책으로 알려졌다.

오늘날 주역은 사주팔자,토정비결이나 점성술, 타로 카드처럼 우리의 운명을 점치는 미신 행위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주역은 단순히 운명을 점치는 행위를 넘어선 인생에 대한 처세와 통찰이 담겨 있다.

주역은 주나라의 역경(易經)이란 뜻으로 원래 주나라 이전 은나라 (기원전 1600년~ 기원전 1046년 경) 의 점인들이 정립한 점술 책이다.

은나라 사람들은 갑골문을 통해 하늘의 뜻을 계시라 여기고 그것이 맞는지를 확인하며 자료를 쌓아갔다.

자료는 1500년이 넘는 시간동안 대를 이어가며 쌓였고 그것을 주나라 사람들이 이름을 붙여 주역이라 불렀다고 한다. 결국 주역 즉 <<역경>>은 유교의 삼경 이라 불리는 <<시경>>, <<서경>>, <<역경>>의 하나가 될 만큼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과거 고대인들이 천년이 넘는 경험치를 축적한 막대한 데이터베이스 창고와도 같다고 있다.


저자 강기진님은 주역을 두고 사람이 책이 아닌 하늘이 내린 계시라고 보았다.

주역에서 뜻하는 내용은 인간의 삶은 하늘이 내린 뜻을 이루며 사는 것이라 설파한다.

책의 특징을 꼽자면 저자는 책을 통해 주역의 64괘를 모두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역경의 핵심인 괘에 대한 설명과 오십대에 이른 사람들을 위한 맞춤형 괘를 선택해 설명한다.

저자는 그러한 의미에서 오십에 이른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게 되는 시기이며, 이때에 역경의 지혜를 배워야 함을 강조한다.

이십 대에서 부터 사십 대까지 쌓아온 인생의 축적을 오십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의 인생을 관망할 시기가 되었기 때문이라 보았다.

이십 대가 배우는 시기라면, 삼사십 대는 고군분투하며 자기 인생의 항로를 개척하는 시기다.

저자는 시기를 용이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삶에 비유했다.

오십 대에 이르러서야 용이 드디어 땅을 떠나 하늘로 승천하여 날아다니는 시기로 보았다.

그래서 오십은 자신의 과거를 바로 세우고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사는 인생의 황금 시기의 시작으로 여겼다.


책은 크게 4장으로 나뉜다.

1장은 천명(天命) 대해 설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루고자 하는 바를 결국 이루고야 마는 힘이 바로 ()이라고 한다.

그러한 운은 사실 내가 가진 천명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바로 천명에 의한 것이며 그것은 죽을 때까지 탐구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주역의 64괘에 담겨 있으며, 역경을 공부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인생을 공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결국 주역의 64괘란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경험하는 64가지의 의미를 알아가는 것이라 조언한다.


2장은 불변은 만변에 응한다는 의미를 다룬다.(不變應萬變불변응만변)

역경의 (易)이란 글자의 원형적 의미는 달빛의 비춤 이라고 하는데 달빛에 따라 모습이 바뀌는 처럼 역은 비춰지고 바꿔지는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불변 변하지 않는 가치는 만변 변하는 가치를 조화롭게 응할 있음을 뜻한다.


3장은 처신을 다루는데 여기서 비인(匪人)이란 개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수양에 따라 성인, 군자, 대인, 소인으로 나뉘지만 여기에 비인이 하나 추가된다.

비인은 그대로 사람이 아닌 사람이다. 즉, 사람의 모습을 했지만 짐승과도 다를 바 없는 수준의 사람인 것이다.

역경에선 아예 사람 아닌 사람과는 자체를 섞지 말라고 한다. 비인에게는 말을 섞어 봐야 오히려 기가 막혀 할 말을 잃게 만들 뿐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 더불어 말을 나눌 사람인데 더불어 말을 나누지 않으면 사람을 잃게 되고, 더불어 말을 나눌 만하지 않은 사람인데 더불어 말을 섞으면 할 말을 잃게 된다  可与言而不与之言 失人 不可与言而与之言 失言>  논어 위공령 7장 1절


4장은 믿음에 대한 글이다. 오십에 이르러 자신의 마음을 다시 한번 되돌아 보고 그 믿음의 근원을 파헤친다. 우리가 현대사회에서 당연시 여기는 이성은 하나의 도구에 불과할 뿐 인류가 지금까지 문명을 발전 시켜온 원동력은 이성이 아닌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인지상정임을 밝힌다.

정(情)이야 말로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지닌 천명이라는 것이다.

정은 보여줄 있어야 하고, 느끼게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세상은 정이 살아 있어야 정겨운 세상이 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나에게 가장 공감이 갔던 장은 3장의 비인에 대한 개념이다.

현재 내가 겪고 있는 회사와의 분쟁 때문일 수도 있는데 회사의 책임자가 져야 의무는 무시하고 인간 본성의 바닥을 드러내는 언행을 겪으며 확실히 비인은 존재함을 이제서야 알게 것이다.

그리고 64라는 숫자의 상징적 의미가 흥미로웠다.

주역의 64괘를 이루는 단위를 효라 부르는데 그것은 음과 양이다.

이는 0과 1로 대치가 되는 디지털 시대의 6비트 2진수,  DNA를 이루는 유전자 정보 구조인 코돈 64와 어떤 연관성이 있어 보이는 것은 우연일까?

주역이 의미를 상징한다면, 디지털은 계산을, 유전자는 생명을 상징한다.

어쩌면 64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하나의 우주일지도 모르겠다.

공자는 오십은 지천명(知天命)이라 하여 천명을 아는 시기라고 했다.

천명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하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임은 아닐 것이다.

나라는 존재의 의미를 이제서야 시기가 것이다.

나를 안다는 것과 하늘이 내린 명을 안다는 것은 둘이 아니다. 서로 다르지 않다.

어쩌면 그동안 겪어왔던 모든 경험들이 이제서야 빛을 발하게 시기가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나도 조금 견디고 힘을 내보자.

과거에서 내게 보내는 메세지인 오락실의 마지막 가사처럼.


“승부의 세계는 오~ 너무너무 냉정해

부녀간도 소용없는 오락 한판

아빠 힘내요 아빠를 믿어요

아빠 곁엔 제가 있어요

아빨 이해할 있어요

아빠를 너무 사랑해요”


By Dharma & Maheal



이처럼 운이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예정대로 달성하는 힘을 말한다.
그러므로 ‘운이 좋다, 나쁘다‘ 보다는 ‘운이 강하다, 약하다‘는 표현이 보다 부합한다. - P21

운명의 작용에는 오만한 자의 무릎을 꺾고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는 세상의 신비를 보여주는 것이지 ‘좋지 않은 일‘이 아니다. 이 같은 신비를 마주했을 때라야 오만해지기 쉬운 인간의 마음이 하늘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이다. - P43

팔자가 꼬이는 것은 스스로 팔자로부터 도망치기 때문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 P68

내가 맺은 연들은 각기 하늘의 대리자이므로 내 뜻대로 좌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낙천해야 하고, 또 낙천할 수 있다. 지금 당장 나에게 벌어지는 일을 이해할 수 없더라도 무언가 나의 이해를 넘어선 하늘의 뜻이 있을 것이다. - P96

결국 오늘 먹은 나의 마음이 오늘은 물론 과거와 미래를 모두 바꾼다. - P155

변화는 필요하지만, 변화가 필요한 이유는 변치 않는 하나를 위한 것이다. - P171

결국 어떤 일을 잘하고자 하는 사람은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는 것보다 자기가 속할 공동체를 잘 선택하는 일이 먼저임을 명심해야 한다. - P189

비인이 섞여 있는 상경의 세계에서도 의리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다가 큰 상처를 입는 것이다. ... 중략..
결국 진실된 마음은 그리 쉽게 쏟는 것이 아니며, 의리 역시 그리 쉽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중략...
오십이 놓인 세계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하경의 세계여야 한다. 그래야 나잇값을 하는 것이다.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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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09 0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5-09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발자취 - 대반열반경, 초기불전 시리즈 003
각묵 엮음 / 초기불전연구원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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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회사와의 노동 분쟁 속에서 하루하루 인간관계 속에 드러나는 밑바닥에서 허우적 대고 있다.

말은 장황해지고, 뜻은 허깨비와 같고, 사람이 한 낱 도구에 지나지 않음에 마음은 지쳐가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100일 정진을 마쳤지만 겨우 마음 줄을 놓치지 않고 있음에 그나마 다행이라 느꼈다.

어제 알라딘 이웃님의 격려를 들었는데 아침에 문득 2년 전 오늘 남겼던 글이 다시 눈에 띄었다.

어쩌면 과거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보낸 글이라 여겨질 정도로 이제 관계의 정리가 아니라 안의 스승을 다시 찾아야 하는 시기가 것이 아닐까 싶다.

스승을 찾는다는 것은 오늘의 나를 다시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 다시 과거의 글을 일부 수정하여 다시 올려보기로 했다.


< 부처님 오신날이다.
올해(2024년)는 스승의 날과 친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에서는 스승 본뜻이  '스님' 에서 다고 했다.
스님이 부처가 되는것. 그것이야 말로 스승의 최고의 단계라고했다.
부처님은  그대로 최고의 스승이시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삼계도사사생자부(三界導師四生慈父)' 라 부른다.
삼계(三界) 욕계, 색계, 무색계이며  존재하는 모든 차원 , 온 우주를 뜻한다.
도사(導師) 이끌어 주는 스승이시다.
사생(四生) 난생: 알로 낳고, 태생: 어미 태에서 낳고, 습생: 습한곳에서 낳고, 화생: 화하여 낳는 4가지 형태로 생명이 태어나는걸 말한다.
자부(慈父) 자비로운 어버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예불문에 삼계도사사생자부 석가모니불 이라 독송한다.
부처님은  우주  스승이시며, 모든 생명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신 것이다.


불교는 서원(誓願) 종교이기도 하다.

서원은 원을 세운다는 뜻이, 불자들은 법회 때마다 사홍서원, 네가지 큰 서원을 외운다.
중생을 건지오리다. 번뇌를 녹이오리다. 법문을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비록 지금은 번뇌 많은 중생일지라도, 끝내는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가 부처의 길로 나아가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구원이 인간의 목표라면, 불교에서의 목표는 부처를 이루는 데 있다.

부처님 오신 날의 의미도 거기에 있다.

부처님은 단지 위대한 성인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부처가 될 수 있음을 몸소 보여 주시기 위해 오셨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안에 이미 그 가능성이 있음을 일깨워 주러 오셨다.

다만 스스로 닦지 않으면 절대 없다.

그래서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수행하라고 간곡히 권하셨다.


<<부처님의 마지막 발자취>>  <<대반열반경>> 을 바탕으로, 부처님께서 열반(涅槃)  사바세계를 떠나기 전후의 행적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주는 책이다.

방대한 불경 가운데에서도 부처님의 마지막 여정을 가장 인간적으로, 또 가장 장엄하게 드러내는 경전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책을 읽으며 오래전  한마음선원 본원 법회에서 있었던  장면을 다시 회상했다.


아마도 20년쯤 전이었을 것이다.

진주에서 올라오신  보살님이 법회중에 경전의 대목을 인용하며 큰스님께 질문을 드리신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 장면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그것이 바로 대반열반경의  대목임을 알게 되었다.

장면은 이렇다.


부처님께서는 본래 무량겁,  한량없는 세월 동안 세상에 육신을 가지고 머무르실 수도 있었다. 

그런데 마라 , 마왕 파순이 나타나서 

이미 이룰 것을 루셨 제자들도 많이 길러 놓으셨으니 이제 그만 열반에 드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부처님께 여러번을 한다.
그때마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결정하겠다며 파순의 제안을 고려해 보신다.

당시 부처님 곁에는 언제나 제자 아난이 있었다

아난은 부처님 제자들중 가장 총명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가장 많이 기억한 제자였다

하지만 그는 그때까지 아직 완전한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  

만약 당시에 아난이  순간의 의미를 바로 알아차렸더라면,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지 말고  세상에  머물러 법을 설해 달라고 청할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당시의 우리의 마음에 남았던 것은 ()함의 중요성이었다.


깨달은 이는 먼저 나서서 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논어 술이편 '불분불계(不憤不啓) 처럼 스스로 알려고 하지 않으면 열어 주지 않는 것이.

물어야 답을 얻고, 찾아야 길을 만나며, 두드려야 문은 열린다.

그러나 순간 아난은 미처 청하지 못했다.

부처님께서는 여러 차례 아난에게 당신이 남아있기를 요청하라고 힌트를 주셨다.

그러나 아난은 끝내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결국 부처님께서 남은 수명을 놓아버리시고 열반에 드시기로 결심하신다. (당시 아난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부처님 열반  모이는 집회에 초청을 거부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


부처님께서 남은 수명을 스스로 놓아버리자 하늘과 땅이 진동한다.
놀란 아난이  까닭을 , 부처님께서는 이에 대한 설명 주시고서 그는 사태의 중대함을 깨닫게 된다.


그날 법회에서 보살님은 떨리는 음성 속에 결의에 마음으로 말씀하셨다.

2600년  부처님 당시의 이와 같은 열반 상황을 설명하면서 현세의 우리들, 즉 큰스님 직계 제자, 재가제자 모든 분들이 열심히 수행하여 아난의 그러한 과오를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한다  하셨다.

말씀은 당시 모여 있던  모든 사부대중에게  울림을 주었다.

 역시 그날의 장면은 오래 잊지 못했다. 아니 잊지 못할 것이다.

책은 그때의 감동을 다시 살려 주었다.

그리고 대반열방경 속에는 내가 미처 몰랐던 많은 장면들이 담겨 있었다.


불경 대개  '이와같이 나는 들었다(如是我聞: 여시아문)' 라는 아난의 말로 시작한다.

부처님께서는 마지막 여정 속에서도 여러 나라와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법을 설하신다.
마가다 국왕이 왓지국을 어떻게 정벌 해야 하는지 부처님께 자문을 구하는 장면도 나오고, 수행에  가르침과 공동체 질서에 관한 말씀도 이어진다.
가는곳 마다  사람들은 부처님을 친견하고 공양을 올리며 법문을 청하고 듣는다.

그러는 가운데 파왕 마순의 열반에 대한 종용과 열반 암시 이어지지만, 부처님은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마지막 길을 향해 걸어 가신다.


열반에 들기 직전, 대장장이 아들 쭌다의 공양을 드신  부처님께서는 병환을 얻으신다.

그로 인해 쭌다가 스스로를 탓할까를 염려하여, 부처님께서는 오히려 그 공양을 탄하며 마음의 을 덜어 주신다.

 장면에서는 스승의 자비가 무엇인지 강하게 닿는다.

당신 자신의 고통보다,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할 제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장면에서 진정한 스승의 마음 보여주셨다.

아난을 대하는 모습 또한 깊은 울림을 준다.


열반에 이르게 직접적 계기와 관련해 아난의 책임을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부처님은 대중 앞에서 질책보다 격려를 택하신다. 또한 마지막 제자 수밧다를 받아들이시는 장면에서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사람을 위해 문을 닫지 않으시는 자비를 보여 주신다.


마지막 유훈 역시 분명하셨다.

방일 (放逸: 나태, 게으름) 하지말고 정진하라.

부처님께서는 열반 직전까지 수행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당신의 육신은 어떻게 화장(火葬)하고 사리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지까지 세세히 일러 주신다.

참으로 마지막 순간까지도 남은 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챙기셨다.


그렇게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  유훈대로 장작에 불을 붙이려하지만 불이 붙지 않는다.
아무리 해도 붙지 않는 불이  대제자 마하가섭이 도착하자마자 비로소 붙는 장면은 삼처전심(三處傳心:세곳에서 부처님의 마음을 전해 받았다) 의 상징이 되었다.

스승의 법맥과 마음이 누구에게 이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덮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뛰어난 작가나 영화감독이 다면, 부처님 열반  상황 며칠 과정을 담담히 소설이나 영화로 그려낼  있지 않을까.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모습이 니라, 인간의 몸으로  땅에 걸어와 인간으로 고통을 겪고, 인간으로서 떠나간 마지막 여정을 말이다.


부처님께서 입멸하셨다.

남은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것인가?

번역자 각묵 스님의 서두 결국 질문으로 귀착된다.  

남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생의 찬란함은 죽음으로 이어지고 다시 죽음의 찬란함은 탄생으로 이어질 것이다.
부처님의 탄생은 우리 또한 부처  있음 리기 위함이었, 부처님의 열반은 우리에게 윤회 사슬을 넘어서는 길을 보여  사건이다.

처음과 마지막, 탄생과 열반.
바탕은 몸이라고 큰스님은 설하셨다.
2600년전과 지금, 아득한 과거와 아주  미래도 한마음에 있다.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

지극한 마음으로 돌아가 귀의합니다.>

이제 남아 있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라는 각묵 스님의 질문이 다시금 안의 스승을 다시 놓치지 말라는 청함()으로 들린다.


By Dharma & Maheal

 

                                               


부처님께서 입멸하셨다.
남은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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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09 14: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5-09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방론 2편. 사람의 마음은 무엇으로 움직이는가

 

사람들은 유방이 천하를 차지할 있었던 가장 이유 중의 하나가 용인술이 뛰어났다고 한다.

자신에게 필요한 인재를 썼다는 뜻이다.

맞는 말이지만 인재를 썼다는 것은 결과 대한 하나의 분석일 뿐이다.

우리는 그보다 먼저 물어야  질문이 있다.

유방은 어떻게 사람을 움직일 있었는가.

 

유방의 진짜 능력은 사람의 재능을 알아보는 것에만 있지 않았다. 

그는 사람의 결핍을 보는 천재적이었다.

보통 사람은 상대를 마주할  자기 입장 빠져 상대를 가늠한다.

상대방은 어느 정도 수준일까, 내가 상대보다 무엇이 월등한가, 상대를 어떻게 하면 이용할  있을까. 상대와 나를 두고 저울질을 한다.

그런데 유방은 달랐다.

 

그는 상대를 마주하면서 사람이 지금 무엇에 굶주려 있는 지를 먼저 보았던 같다.

돈이 필요한가. 자리가 필요한가. 명예가 필요한가. 인정이 필요한가. 자기 재능을 마음껏 펼쳐 보고 싶은 무대가 필요한.

유방은 상대의 욕구를 먼저 보았.

그리고 거기서 그는 멈추지 않았다. 상대의 욕구는 결핍에서 오는 것임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상대의 결핍을 채워 주었다.

돈을 원하면 돈을 , 직위를 원하면 직위를 었다.

명예를 원하면 이름을 올려주었고, 무대를 원하면 아예 판을 열어주었다.

이건 단순한 포상이 아니다. 이건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결핍의 공간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결핍의 공간을 자신이 채워준 것이다.

그래서 유방 곁의 모인 사람들은 모두 유방을 통해 결핍을 채웠다.

 

그들은 결국 유방만을 위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유방이 깔아준 위에서 자기 욕망을 실현하려고 열심히 뛴다.

바로  지점에서 유방 다른 어떤 제왕적 위치의 인물들과 차별점을 가진다.

그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지 않는다.

대신 사람이 스스로 움직일 이유를 만들어 준다.

 

, 그대는 자리를 원했지? 여기 자리가 있다.

그래, 그대는 이름을 남기고 싶었지? 여기 전장이 있다.

좋아, 네 재능을 증명하고 싶었지? 내가 무대를 열어 줄게.

유방은 결국 판을 깔아 것이다.

이렇게 판을 깔아주면 그다음부터 사람은 유방의 명령 때문에만 움직이지 않는다.

자기 안의 결핍과 허기 때문에 움직이기 시작한다.

유방은 그것을 일찍이 간파했다.

사람은 자기의 욕망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그러나 유방의 진짜 천재성은 여기서 걸음 나간다.

그는 상대방의 결핍을 보고,  결핍을 채워주고,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그렇게 채워진 욕망으로부터  사람의 능력을 기대 이상으로 뽑아냈던 것이다.

, 상대가 가진 모든 잠재적 재능을 전부 발휘 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줬다.

 

보통 사람은 누군가를 만족 시키면 거기서 추고 상대에 대한 댓가를 바란다.

자리를 줬으니 됐지, 돈을 줬으니 됐지, 명예를 줬으니 됐지, 이쯤에서 생각한다.

그런데 유방은 이미 알고 있었다.

채워진 결핍은 사람을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크게 움직이게 만든다는 이다.

자리를 받은 사람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 뛰고, 명예를 얻은 사람은 명예를 키우기 위해 나아가고, 무대를 얻은 사람은 무대 위에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고 깊이 달려든다.

유방은 바로 지점을 누구보다 알았다.

그러니 그의 용인술은 단순 사람  쓰기가 아니다.

그건 사람의 욕망을 읽고,  욕망을 충족시키고, 충족된 욕망을 다시 자기 판의 동력으로 바꾸는 심리적 설계 능력이다.

 능력이야 말로 유방의 진영에 인재가 모이게 근원이 아니었을까.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은 자기 생각 빠져 남을 보질 못한. 그런데 유방은 자기를 앞세우지 않고 남의 허기를 먼저 보았. 

아마 장량 조차도 능력 만큼은 유방을 따라가지 못했을 것이다.

장량은 판을 읽는 사람이었지만, 유방은 사람을 어떻게 작동 시키는 알고 있었다. 

 

항우와 비교하면 차이는 선명하다.

항우는 자기가 바로 무대다.

그는 너무 강하고, 너무 높, 너무 눈부. 그래서 부하들은 항우를 따라가기도 .

항우 밑에서는 자기 욕망을 펼칠 공간이 상대적으로 었던 것이.

항우 이미 보통 사람의 능력을 초월한 소위 만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방은 항우와 다르다. 그는 자기가 능력이 뛰어나지 못하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남들이 자기 욕망을 걸고 뛰어오를 있는 판을 열어 것이.

한신에게는 군사를 맡기고, 장량에게는 계책의 무대를 주고, 소하에게는 뒷일의 권한을 었으며, 항우 진영에서 귀순한 진평에게 까지 각자의 욕망을 자리를 주었.

이러니 부하 입장에서는 하고 배길 수가 없다.

그건 충성 이전이며 명령 이전 이다.

어쩌면 중독에 가깝 않았을까.

그러나 중독은 단순한 흥분이 아니다.

그건 자기 욕망이 살아 있는 무대 위에 올라선 사람의 흥분이다.

 

유방은 사람에게 “나를 위해 뛰어라” 라고 말하기 전에, “네가 원하던 것을 여기서 해보라”  했다.

그래서 유방 진영은 단순한 적을 이기기 위한 군대가 아니었다.

각자의 결핍과 욕망이 유방 펼쳐준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집단이었 것이.

그것이 반복 수록, 어느 순간 사람들은 유방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유방의 운명 안에서 자기 운명을 실현하려는 사람으로 변해버린다.

이것이야말로 유방이 만든 집단 무의식이자 운명 공동체 아니었을까.

결핍이 만들어 운명 공동체가 끝내 항우라는 완벽한 산을 허물어 버린 것이다.

 

유방, 그는 인간 내면에 감춰진 결핍과 욕구를 보았다.

어떠한 두려움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마음이 제왕의 마음이라면 상대의 결핍을 보는 눈은 제왕의 눈이라 있지 않을까.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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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4-18 1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핍의 장 또한 유방이라는 거대한 인물의 테두리는 벗어날 수 없었나 봅니다. 방목 수준으로 풀어나도 결국 사방을 둘러싼 거대한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죠. 그게 유방의 그릇이고, 그것이 또한 토사구팽된 이들의 그릇이었겠죠. 그들의 결핍은 또한 유방의 결핍, 투사된 유방 자신의 결핍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마힐 2026-04-25 22:31   좋아요 1 | URL
역시 잉크냄새님 예리하시네요!
유방이 상대의 결핍을 보았다면, 자기 안의 결핍이 투영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자신 또한 상대의 성취를 통해 내면의 결핍을 채운 것이죠.
그래서 유방진영은 모두가 결핍을 가진 인물들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결핍이 그들을 하나로 뭉치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되었죠.
이 부분 좀 더 정리가 되면 올려볼께요. ^^
 

유방론 1편. 유방의 굴기(崛起), 제왕(帝王) 마음

 

중국 속담중에 “三个臭皮匠,顶个诸葛亮 (sān ge chòu pí jiàng, dǐng ge Zhū Gě Liàng) 이란 말이 있다.

직역은 명의 냄새나는 가죽 기술자가 제갈량과 맞먹는다 라고 풀이하는데, 본래 뜻은 명의

평범한 기술자가 합치면 지혜로운 제갈공명 만큼 성과를 있다  뜻이다.

제갈공명이 어떠한 인물인가.

삼국지에 나오는 많은 주인공들 중에 가장 지혜롭고 신비로운 인물이 아니던가.

그러한 제갈량 조차 명의 평범한 사람이 모이면 맞먹을 있다는 민간에서 전해져 오는 속담이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들이라도 힘을 합쳐 지혜를 짜내면 반드시 똑똑한 사람을 능가할 수도 있다.

속담에 들어 맞는 인물이 삼국지 전에 이미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이다.

 

2300년전, 약육강식이 지배하던 춘추 전국시대를 마침내 종식시킨 진시황은 자신의 통일 제국이 영원히 지속될 줄 알았다.

하지만 통일 한지 겨우 15년 만에 진시황이 죽자 진이란 거대한 제국은 곧바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王侯将相,宁有种乎?(Wáng hóu jiàng xiàng, níng yǒu zhǒng hū?)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는가  라고 외치며 진승과 오광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불꽃은 마른 들판에 급속도로 들어가는 불길처럼 번져 중국 전역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진의 폭정으로 억압된 분노를 폭발한 농민들은 수도 함양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썪어도 준치라는 속담처럼 통일 제국이였던 진의 정규군을 성난 민중의 힘만으로는 당해낼 없었다. 결국 진승 오광의 반란의 불 길은 진압될 것 같았지만, 옛 초나라 장군 가문 출신의 항우가 진의 군대를 박살 내며 반란의 불 길은 더욱 크게 번져갔다.

 

이때, 유방의 고향 패현(沛縣)까지 반란의 불꽃이 이어졌고, 일개 사수의 정장(泗水亭长)이었던 유방이 패현을 장악한 패공(沛公) 되었다.

사수의 정장은 지금으로 치면 파출소장 정도인데 이때 바로 지역 시장의 위치까지 올라 것이다.

사실 유방과 항우는 지금 현대 중국의 강소성(江苏省) 지역 출신들이다.

유방은 서주(徐州), 항우는 숙천(宿遷) 소주(苏州)지역 에서 자랐다.

강소성 지역은 대륙을 관통하는 개의 , 황허와 양쯔강 중 양쯔강 아래 지역을 지배했던 옛 초나라였다.

그래서 후에 항우가 진을 멸한 초나라를 이어서 초패왕(楚覇王) 이라 정한 것이다.

결국 유방과 항우는 초나라라는 국가 정체성과 지역 문화를 공유하고 있었다.

훗날 항우진영에서 유방에게 넘어온 인재들도 이러한 지역문화의 공유 때문에 왕래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방은 초패왕 항우에 의해 당시의 (지금의 사천성)으로 밀려나가게 되고 한중왕(漢中王) 책봉되었다.

지금이야 중국인들의 정체성을 한나라(漢朝) (漢) 기원삼아 한족(漢族)이라고 내세우지만 정작 한의 시조인 유방 자신은  이란 국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방의 참모 소하(蕭何) 거듭된 설득으로 유방은  이라 국호를 겨우 받아 들였다고 한다.

원래 한중(漢中)이란 지역은 한수(漢水: 장강의 주요 지류) 흐르는 곳으로 하늘의 은하수와 닮아 땅의 은하로 비유 되었다.

그래서 땅이 비옥하여 훗날 패권을 다지기 아주 좋은 곳이며 하늘과 짝을 이루는 아름다운 이름이라 하여 천한(天漢)이라 부르며 이것은 하늘의 (天命)에 따르는 것이라 설득했다는 것이다.

 

당시 유방은 초패왕 항우를 감히 넘볼 없는 위치였다.

진의 수도인 함양을 먼저 입성하여 관중왕이라 책봉될 알았지만 항우의 서슬퍼런 눈빛에 울며 겨자 먹기로 쫓겨나가야 했다.

험난하기로 유명한 촉의 땅으로 들어가며 유방과 그의 군사들은 이제 다시 중원으로 나올 알았다. 유방은 분명 분노했겠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홍문연에서 자신을 죽이려 했던 항우에게 공포를 떨었겠지만 그는 그 공포에 사로 잡히지 않았다.

유방은 촉에 도착한 자포자기 하지 않고 바로 준비해서 고작 4개월 만에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바로 항우에 대한 선전포고를 했다.

드디어 유방의 반격으로 천하쟁패가 시작된 것이다.

 

유방은 항우 앞에서 언제나 꼼짝도 못하고 주눅이 들었는데 어떻게 항우와 대적할 생각을 했을까?

항우에 대한 공포와 분노를 유방은 어떻게 극복할 있었을까?

이후 이어지는 천하쟁패는 불과 4년만 걸렸다.

진시황 사후 3년만에 진의 제국을 멸망 시켰고, 다시 4년만에 당시 아무도 넘볼 수 없었던 초패왕 항우를 이긴 것이다.

하지만 천하쟁패 기간중에 유방이 파죽지세로 항우를 몰아 부쳐서 이긴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매번 싸움에서 유방은 거의 항상 탈탈 털렸다.

팽성 전투에선 56만의 유방의 연합군이 항우의 3만 정예병에 터지고 도망쳐야 했다.

형양성 전투에서도 항복까지 하고 죽을 뻔했지만 겨우 목숨만 건져 나와야 했다.

영혼이 나갈 정도로 유방은 항우에게 쫓겨나가야 했고, 목숨을 건 탈출은 한 두번이 아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방은 항우에게 도전했다.

도전하고 패하고, 다시 도전하고 또 패하는 모습에서 챔피언에게 죽지 않을 만큼만 얻어 터지고, 그리고 다시 재충전해서 또 도전하는 유방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유방은 항우와의 천하쟁패에서 승리하였다.

아무 배경도 없고, 무력도 약한 유방이 귀족 출신에다 역발산기개세 (力拔山氣蓋世) 항우를 어떻게 이겨서 천하를 재통일 시킬 있었을까.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트라우마를 정도의 상대를 만나면 고양이 앞에 쥐처럼 아무 것도 못하게

되는데 유방은 어떻게 항우에게 대항할 의지가 꺽이지 않았던 것일까.

과연 유방은 정말로 하늘이 내린 천자였을까.

벌꿀오소리 같은 유방이 호랑이 같은 항우에게 달려든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유방은 항우에게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았던 것일까.

항우가 패기를 지녔다면 유방은 똘기로 뭉쳤던 것일까.

 

2300년 동안 이 문제에 대해 수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분석했었다.

그들은 유방과 항우의 출신과 인물 성향등을 비교 분석하며 여러 이유들을 밝혀냈다.

이유들 가장 대표적인 것을 뽑는다면 크게 세가지다.

 

첫째, 유방의 용인술(用人術)이다.

, 항우가 범증이라는 책사 하나를 잘 활용하지 못했지만, 유방은 인재를 알아보고 적극 기용하여 장량, 한신, 소하 같은 인물로 하여금 자신의 부족한 점을 메꿨다는 것이다.

장량은 귀족 출신이며 과거 진시황 암살을 시도할 만큼의 의기가 높은 인물로 유방을 보자마자 유방의 두뇌가 되었다.  

한신 역시 뛰어난 전략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못해 그냥 묻힐 뻔한 인물이지만 유방은 그에게 파초대원수라는 직함을 주고 유방의 전군을 통솔시켰다.

소하는 유방과 같은 패현 출신으로 원래 유방보다 지위가 높은 상사였지만 유방을 패공으로 모시면서 모든 전투의 후방에서 필요한 군수 물자를 끊임없이 지원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유방의 용인술이야 말로 항우가 결코 이길 없는 점이다.

 

둘째, 유방의 포용력이다.

비록 유방은 천민 출신이지만 귀족 출신인 항우에 비해 포용력이 넓었다.

항우가 전투에서 적들을 모두 죽이며 공포를 불러 일으켰지만 유방은 항우와 달리 감싸 안으며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러한 포용력이 천하의 민심을 사로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셋째, 유방의 정치적 명분이다.  

유방은 진시황에게서 내려온 악법(恶法) 약법삼장(约法三章)으로 만들어 우선 민심을 사로잡았고, 항우가 초의제를 시해한 것을 꼬집어 역적으로 몰아 명분을 세웠다. 그것은 그가 민심에 의한 정치적 명분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분석은 대체적으로 유방이라는 개인의 힘이 많이 약하니 조직적인 구조로 힘을 재편성해서 항우의 개인적인 출중한 능력을 이길 있었다는 설명이다.

 “三个臭皮匠,顶个诸葛亮 (sān ge chòu pí jiàng, dǐng ge Zhū Gě Liàng) 이란 속담이 어울리는 결과를 만들어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의문이 든다.

유방이 조직을 구성하고 적합한 인물들을 통솔하는 장악력은 개인적 능력이 아닌가?

과연 유방의 개인적 능력은 정말 형편없었을까.

 

항우는 유방의 군대를 없이 깨트렸지만 결국 유방의 마음은 깨트리지는 못했다.

이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반복해서 지면, 몸보다 먼저 마음이 진다. 패배가 쌓이면 현실보다 먼저  마음의 판사가 항복한다. 

나는 된다고, 여기까지라고, 저 사람은 넘을 수 없다고. 

보통 사람은 실패를 만나면 선택하게 된다. 포기하거나, 타협하거나, 방향을 바꾸거나, 자기 수준을 낮춘다.

그런데 유방은 그렇지 .

그는 다시 준비하고, 곧바로 실행한다.  모으고, 또 나가고, 또 부딪힌다. 그리고 깨진다.

빠진 독에 붓는 것처럼 보여도 한다.

그건 언제나 비합리적이다.

제왕 마음은 어쩌면 그런 비합리성 속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초한전쟁의 승부는 마지막 해하의 전투에서만 갈린 것이 아니라,  이전 수많은 패배를 유방이 어떻게 통과했는가에서 이미 갈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항우는 유방의 몸을 몰아붙였지만, 유방의 마음은 끝내 항복 시키지 못했다.

나는 유방을 천민 출신 황제로만 보고 싶지 않다. 그건 지금의 우리에게 던지는 너무 쉬운 위로.

많은 사람들이 유방의 사례를 분석하면서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도 유방처럼 있다는 식의 희망 내세우기도 하지만 그건 아니다. 듣기에 달콤하지만, 그만큼 얕다.

 

유방 신분 낮을지언정,  내면의 디폴트는 결코 범인의 것이 아니었다.

무수한 실패를 당하고도 끝내 자기 존재의 중심을 내주지 않는 사람 바로 유방이었다.

항우는 유방과의 싸움에서 거의 매번 이겼지만 마지막 해하전투 패배 한번에 최후를 맞이했다.

 

유방이 천하를 얻은 것은 인재를 써서 만이 아니라, 무너져야 자리에서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항우는 유방의 군대를 꺾었으나, 유방의 마음은 꺾지 못했다.

어쩌면 초한지의 진짜 시작은 바로 거기에서부터였는지도 르겠다.

유방의 꺾이지 않는 마음, 그 마음이 바로 제왕(帝王) 마음이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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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4-14 2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입지전적인 인물들은 다 비슷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나 봅니다. 초한지에서는 유방만이 그러했다면 삼국지에서는 위,촉,오의 조조,유비,손권이 모든 그런 자질을 가지고 있었으니 결국 천하삼분지계로 나눠져 버리고 말았겠죠.
그나저나 유씨 일족은 주로 얻어터지며 살아가나 봅니다. 막판 뒤집기 기술이 막강하지만요....

마힐 2026-04-18 01:51   좋아요 0 | URL
자기보다도 큰 상대에도 겁먹지 않고 달려드는 모습만 보면, 유방은 벌꿀 오소리 정신으로 무장한 인물이었나 봅니다.
벌꿀 오소리 정신이 아니었다면 한왕조는 분명 세워지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막상 나라를 세워도 그걸 유지하는 것은 더 힘들었더라구요.
그때부터는 오소리가 아닌 너구리로 변해야 하는 가 봐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