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5년2월11일
오늘의정진: 住相布施生天福 주상보시생천복 /형상에 머무르는 보시는 하늘에 태어나는 복을 얻는 것이라
- 100일 정진, 48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마흔 일곱번 째 구절은
<覺即了不施功 각즉료불시공 /깨치면 바로 마침이요, 공을 베풀지 않으니
一切有爲法不同 일체유위법불동/ 일체유위법과 같지 않다.> 였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논쟁은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논쟁이다.
깨침을 마친 돈수가 공덕을 베풀지 않는다는 구절은 반어법이다.
깨달으면 분명 자신을 포함한 주위의 인연 닿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덕을 주게 될 것이다.
그것은 분명 혼자만의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주위를 감화(感化) 시킨다. 그런데 어찌 공덕을 베풀지 않는다고 할 것인가?
그것이 바로 유위법과 다른 무위법의 도리인 것이다.
오늘은 마흔 여덟번 째 구절
住相布施生天福 (머물 주, 서로 상, 베 포, 베풀 시, 날 생, 하늘 천, 복 복)
주상보시생천복 /형상에 머무르는 보시는 하늘에 태어나는 복을 얻는 것이라
猶如仰箭射虛空 (오히려 유, 같을 여, 우러러볼 앙, 화살 전, 쏠 사, 빌 허, 빈 공
)
유여앙전사허공/ 오히려 허공으로 쏘는 화살을 바라보는 것과 같도다.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첫번째가 보시(布施) 바라밀이다.
바라밀이란 '파라미타' 라는 산스크리트어의 한자음역이다. 건너가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즉 육바라밀은 깨달음의 세계로
건너가는 여섯가지 수행법을 말한다.
보시(布施: 남에게 베푸는 것), 지계(持戒: 계를 지니는 것), 인욕(忍辱 욕됨을 견디는 것), 정진(精進: 올바르게 수행정진 하는 것), 선정(禪定: 마음을 닦는 것), 지혜(智慧: 모든 의혹이 끊어지는 것) 를 실천하는 것이 바로 육바라밀을 닦는다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육바라밀의 가장 첫번째가
보시라는데 주목해야 한다.
보시란 내 것을 고집하지 않고
남에게 베푸는 것이다.
흔히들 남에게 뭔가를 베푼다고
하면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만 생각하기 쉽다.
불교의 보시는 물질적으로 베푸는
재보시(財布施)외에도 바른 길로 인도해 주는 법보시(法布施), 타인의 보호하고 두려움을 없애주는 무외보시(無畏布施) 가 있다.
이러한 보시를 행할 때의 바탕이
되는 마음이 바로 이타심이다.
남에게 이익과 도움을 주려는 마음이
바로 보시의 시작이다.
그런데 이러한 보시가 남에게 그저
보기 좋은 그림으로만 보여진다면?
좋은 일 했다고 남 앞에서 생색을
내게 된다면?
그것을 두고 불교에서는 유주상(有住相) 보시라고 한다.
물론 보시는 좋은 행위이다.
착한일을 하면 나도 모르게 기쁘거나
들떠서 생색을 내게 되는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人之常情) 일지도 모르겠다.
그처럼 보시에 대한 상(相)을 내는 것이 바로 유주상 보시가 된다.
반면에 수행이 점차 높아진다면
유주상이 아닌 무주상(無住相) 보시로 바뀌게 된다.
상을 내지 않는 보시, 즉 내가 보시를 했어도 생색을 내지 않는 것이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 모르게
하라는 마태복음 구절처럼 은밀히 남에게 베푸는 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이다.
아무런 댓가나 보답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하는 보시야 말로 진정한 보시라는 것이다.
즉 형상에 머무르면 유주상보시, 형상에 머무르지 않으면 무주상보시인 것이다.
유주상 보시는 무주상 보다는 좀
차원이 낮지만 이 역시 복덕을 쌓는 행위이다.
그러니 착한일을 통해 선업(善業)을 쌓았으니 당연히 언젠가는 복을 받게 될 것이다.
하늘나라, 즉 천상계에 태어나는 인과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이라는 육도의 가장 높은 단계인 천상에 태어났다고 해도 이 역시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된다.
증도가에서는 이에 대한 비유를
허공에 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고 했다.
허공에 화살을 쏘면 영원히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지 않을 것이다.
화살은 날아가는 힘이 다하면 결국
땅바닥으로 떨어지게 된다.
유주상 보시만으로는 육도를 벗어나지는
못하는 것이다.
주는 사람도 없고, 받는 사람이 없는 보시,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어야 한다.
결국 육바라밀에서의 보시는 무주상보시를
말한다.
보시바라밀이 왜 육바라밀의 첫번째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행을 하는 마음 가짐의 가장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일일 소견>
결국 아상(我相)이 없이 사는 것이 수행의 처음이자 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