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543

오늘의정진: 我今解此如意珠/아금해차여의주/내 이제 이 여의주를 해설 하오니








- 100일 정진, 99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백 스물 다섯 번째와 백 스물 여섯 번째 구절은

<粉骨碎身未足酬/분골쇄신미족수/뼈가 가루 되고 몸이 부셔져도 다 갚을 수 없나니

一句了然超百億/일구료언초백억/한마디에 요연히 백억 법문 뛰어넘도다

法中王最高勝/법중왕최고승/법 가운데 왕 가장 높고 수승함이여

河沙如來同共證/하사여래동공증/강 모래 같은 많은 여래가 함께 증득 했도다> 였다.


법화경에는 삼계화택(三界火宅)’이라고 하여 불타는 집을 비유하는 일화가 있다. 어느 부자가 사는 집에 크게 불이 났다. 때마침 아버지는 집 밖에 있어 위기를 벗어 났으나 그 집의 아이들이 아직 집 안에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집 안에서 신나게 놀고 있느라 집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급한 아버지는 아이들을 집 밖으로 나오게 하고자 꾀를 내어 아이들이 놀고 있는 집안을 향해 외쳤다. "얘들아 여기 양이 끄는 마차, 사슴이 끄는 마차, 소가 끄는 마차가 있는데 이걸 너희들에게 주겠다." 그러자 아이들은 수레를 얻고자 얼른 집에서 뛰어나왔다. 아버지는 기쁜 나머지 실제로 하얀 소가 이끄는 마차를 아이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 비유에는 아버지가 자식들을 불타는 집에서 빠져나오게 하기 위해 방편(方便)을 썼듯이 부처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방편을 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법화경에서 부처의 방편은 본질적인 진리를 얻기 위한 수단이지만 또한 진실이기도 하다. 사람마다 근기가 다르기 때문에 사용되는 방편이 각각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래는 지금껏 수많은 방편으로 수행자들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왔던 것이다. 그러니 여래의 은혜가 어찌 크지 않을 수 있는가?


오늘은 백 스물 일곱 번째와 백 스물 여덟 번째 구절

我今解此如意珠/아금해차여의주/내 이제 이 여의주를 해설 하오니

信受之者皆相應/신수지차개상응/믿고 받는 이 모두 상응하리로다

了了見無一物/료료견무일물/밝고 밝게 보면 한 물건도 없음이여

亦無人兮亦無佛/역무인혜역무불/사람도 없고 부처도 없도다.


내 여의주란 나의 근본 마음을 뜻한다. 믿는 다는 것은 나의 근본 마음, 즉 '참 나'를 믿는 것이다.

근본 마음은 본래 밝아 있지만 들여다보면 본래 한 물건도 없다고 한다. 무일물(無一物)이란 내가 없음을 말한다. 내가 없으니 상대도 없다는 뜻이다. 중생이 있으니 부처도 있는 것이고 내가 없으면 부처도 없게 된다. 그런데 무아(無我)라고 하면 '내가 없음' 이라고 하지만 여기서의 ', ()' '고정된 나'를 말한다. 따라서 무아는 고정된 나 라는 상()이 없다는 뜻이다. 어떤 분들은 무아와 참 나의 모순됨을 설명하려는 분들이 계시던데 그럴 필요가 없다. 무아와 참나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글자 해석에 치우치면 둘의 관계는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뜻으로 보면 무아가 곧 참 나임을 알게 된다. 내 주인공 참 나는 여의주와 같고, 나는 본래 고정되지 않으니 무아인 것이다.


<일일 소견>

어제 저녁 설겆이를 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묵묵히' 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묵묵히 라는 말에 하나하나 쌓아가는 축적의 힘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이 들뜨지 않고, 초조 하지도 않고, 그냥 묵묵히 내가 하는 것은 그대로 보이지 않는 힘으로 축적이 되는 거였다. 마음 하나, 행동 하나 묵묵히행 할 때 바로 내공이 쌓이는 중이라는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542

오늘의정진: 粉骨碎身未足酬/분골쇄신미족수/뼈가 가루 되고 몸이 부셔져도 다 갚을 수 없나니


- 100일 정진, 98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백 스물 세 번째와 백 스물 네 번째 구절은

<不思議解脫力/불사의해탈력/불가사의한 해탈의 힘은

妙用恒沙也無極/묘용항사야무극/묘한 작용 항하사 같아 다함이 없고

四事供養敢辭勞/사사공양감사로/네 가지 공양을 감히 수고롭다 사양하랴

萬兩黃金亦銷得/만량황금역소득/만냥의 황금이라도 녹일 수 있다> 였다.


  유마경은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경전 중에 하나이다. 내용인즉 유마거사가 어느 날 병에 걸렸다. 유마거사가 병에 들어 누워있다는 소식을 들은 부처님은 제자들을 시켜 병 문안을 가보라고 권하신다. 그런데 사리불, 목건련, 마하 가섭 같은 쟁쟁한 10대 제자는 물론 미륵보살, 지세보살 같은 대 보살들도 유마거사에게 병 문안 가기를 꺼려한다. 이유 인즉 과거에 그들 모두는 유마거사에게 각자의 견해를 설파당하여 말 문이 막힌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난감함 때문에 아무도 병 문안 가기를 나서지 않게 되자 후에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직접 나서서 병 문안을 가기로 한다. 문수보살이 간다고 하자 그제서야 10대 제자뿐만 아니라 보살들 그리고 천상계의 천인들까지 따라나서게 된다. 사실 유마거사의 병은 중생을 깨닫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고 이에 대한 심오한 대화가 오고 가는 것이 유마경의 핵심이다. 증도가에서 유마거사가 언급된 점을 볼 때 영가스님에게 유마경이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아 보인다.


오늘은 백 스물 다섯 번째와 백 스물 여섯 번째 구절

粉骨碎身未足酬/분골쇄신미족수/뼈가 가루 되고 몸이 부셔져도 다 갚을 수 없나니

一句了然超百億/일구료언초백억/한마디에 요연히 백억 법문 뛰어넘도다

法中王最高勝/법중왕최고승/법 가운데 왕 가장 높고 수승함이여

河沙如來同共證/하사여래동공증/강 모래 같은 많은 여래가 함께 증득 했도다.


깨달음을 얻게 되면 분골쇄신을 한다 해도 부처의 은혜를 다 갚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 불가사의 하고 오묘한 무상의 지혜를 이미 수많은 부처가 증득 했다. 이는 오직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깨친 지혜로만 알 수 있지 다른 경계로는 알 수가 없다.

   영가스님은 천태종 문하의 수행승이었지만 조계산에 머물던 육조 혜능 선사에게서 깨달음의 인가(認可)를 받았다.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천태종 계열의 스님임에도 불구하고 선종사(禪宗史)에서 영가스님의 위상은 너무나 높다. 영가스님이 혜능 선사를 찾아가게 된 결정적 계기는 남종선 계열의 스님 한 분이 영가스님이 있던 절에 왔다가 영가스님의 식견이 남 다른 것을 알았다. 그 객스님은 영가스님한테 바로 조계의 육조스님을 찾아가 보라고 권유했다. 만약 그때 영가스님이 혜능 선사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면 영가스님의 명성과 그가 쓴 증도가는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일일 소견>

누군가 만일 첨단 CG기술로 불교의 경전을 영상화 시킬 수 있다면 <법화경> <유마경> 두 경전의 소재를 사용했으면 좋겠다. 부처님을 비롯한 수많은 제자들과 대()보살들 그리고 다른 우주의 부처님까지 등장하는데 그 인원과 스케일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인간계를 비롯하여 천상계 그리고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의 우주적 부처님까지 지구에 와서 설법을 펼치는데 시공간의 한계가 없다. 두 경전은 꼭 불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541

오늘의정진: 不思議解脫力/불사의해탈력/불가사의한 해탈의 힘은


- 100일 정진, 97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백 스물 한 번째와 백 스물 두 번째 구절은

<有二比丘犯淫殺/유이비구범음살/어떤 두 비구 음행과 살생을 범하니

波離螢光增罪結/바리형광증죄결/우바리의 반딧불은 죄의 매듭 더하였고

維摩大士頓除疑/유마대사돈제의/유마대사 단박에 의심을 없애 줌이여

還同赫日消霜雪/환동혁일소상설/빛나는 해가 서리, 눈 녹음과 같았다.> 였다.


우바리 존자는 음계와 살생을 범한 두 비구의 죄가 너무 중해 결국 아비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에 유마거사는 우리의 참 마음은 본래 청정하며 모든 법이 무상하고 공함을 바로 아는 것이 진정한 계율을 지키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이는 곧 두 비구가 죄를 지었다는 고뇌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대로 자신의 참된 성품을 깨닫게 해 주었던 것이다.


오늘은 백 스물 세 번째와 백 스물 네 번째 구절

不思議解脫力/불사의해탈력/부사의한 해탈의 힘은

妙用恒沙也無極/묘용항사야무극/묘한 작용 항하사 같아 다함이 없고

四事供養敢辭勞/사사공양감사로/네 가지 공양을 감히 수고롭다 사양하랴

萬兩黃金亦銷得/만량황금역소득/만냥의 황금이라도 녹일 수 있다.


  유마거사의 이러한 견해는 점진적으로 마음을 닦아서 깨달음을 얻는 점수(漸修)가 아닌 마음을 단박에 깨닫는 돈오(頓悟)의 경지이다. 돈오는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 불교의 경지이기도 하다. 소승(小乘) 같은 작은 수레보다 대승(大乘)이란 큰 수레에 모든 중생이 타고 깨달음에 도달하는 힘이 강력하다. 돈오에는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중생들 까지도 구제하여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가게 하려는 보살의 원력(願力)이 담겨 있다. 바로 이러한 원력이 불가사의한 해탈(解脫)의 힘이다.

  네 가지 공양(供養)이란 수행하는 스님들의 편의를 위해서 재가 신도들이 제공하는 음식, 의복, 거처, 약 등을 일컫는다. 사실 공양물을 제공하는 시주자들의 마음에는 수행자가 큰 탈없이 수행을 잘해 달라는 마음도 있지만 자신의 복을 비는 마음도 함께 있다. 공양을 주는 자가 있어야 공양을 받는 자도 있다.  반대로 공양을 받는 자가 있어야 공양을 주는 자도 있다. 그러니 공양을 하는 사람과 공양을 받는 사람은 서로 둘이 아니다. 대승의 마음도 이와 같다.

공양을 줘도 준 사이가 없고 공양을 받아도 받은 사이가 없다는 뜻이 된다.

아무리 억만금 같은 재물을 갖다 주어도 준 사이가 없고 받은 사이도 없다.

이것이 바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가 되는 것이다.

결국 유마대사의 한 마디는 죄도 없애 버리고, 황금도 녹여 버리는 해탈의 힘을 지녔다.


 <일일 소견>

본래 해탈이란 고뇌(苦惱)에서 벗어나는 걸 뜻한다. 괴로움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나 괴로움에 메이지 않으면 그것 또한 해탈이다. ()에서는 번뇌를 지닌 채 그대로 부처를 이룬다고 했다. 요즘세상에 번뇌가 없는 사람은 한명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부처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따지면 부처 되기 참 쉽지 않나? 맞다. 부처 되기는 쉬운데 부처로 인정받기는 어렵다. 그래서 불교가 재미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5331

오늘의정진: 有二比丘犯淫殺/유이비구범음살/어떤 두 비구 음행과 살생을 범하니


- 100일 정진, 96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백 열 아홉번째와 백 스무번째 구절은

<獅子吼無畏說/사자후무외설/사자후의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深嗟懞憧頑皮靼/심차몽동완피달/어리석은 완피달은 몹시 슬퍼하는 도다

只知犯重障菩提/지지범중장보리/중한 죄를 범하면 보리를 막는 줄만 알 뿐

不見如來開秘訣/불견여래개비결/여래께서 비결을 열어 두심은 보지 못하도다> 였다.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듯이 깨달음은 번뇌 속에서 피어난다.  수행을 통해 번뇌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번뇌를 지닌 채 깨달음에 이른다. 무거운 죄 때문에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었다는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이 깨달음이다. 영가스님은 여래가 알려주신 이러한 오묘한 비결을 증도가를 통해 일깨워 주고 있다.

오늘은 백 스물 한 번째와 백 스물 두 번째 구절

有二比丘犯淫殺/유이비구범음살/어떤 두 비구 음행과 살생을 범하니

波離螢光增罪結/바리형광증죄결/우바리의 반딧불은 죄의 매듭 더하였고

維摩大士頓除疑/유마대사돈제의/유마대사 단박에 의심을 없애 줌이여

還同赫日消霜雪/환동혁일소상설/빛나는 해가 서리, 눈 녹음과 같았다

  

영가스님이 태어나고 수행했던 절강성 지역은 천태산(天台山)을 중심으로 천태종(天台宗)이 크게 번창한 곳이었다. 천태종은 수나라 시대 4대 조사(祖師) 지의(智顗 538~597)대사에 이르러 개창되었다. 이는 조계산(曹溪山)에 머물며 선종(禪宗)을 일으킨 육조혜능(六祖慧能638~713)에 비견될 수 있다. 지의대사는 <법화경(法華經)> 을 보다가 크게 깨우쳤다고 한다. 법화경은 수많은 불교 경전들 중에서 '경전의 왕' 이라고 불리는데 이렇게 된 배경에는 지의대사의 역할도 컸다고 생각된다. 지의대사는 천태산에 머물며 법화경 강설과 더불어 <유마경(維摩經)> 경전도 연구했다. 유마경의 주인공 유마거사는 부처님 당시 재가수행자로서 큰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의 10대 제자들도 몹시 어려워했다. 오늘 증도가의 구절은 유마경에 나오는 일화를 알면 이해하기 쉽다.

  부처님의 10대 제자중 지계제일(持戒第一) 이라 하여 계율을 가장 잘 지키는 우바리 존자가 있었다. 우바리 존자는 원래 인도의 카스트 계급중 가장 낮은 수드라 출신으로 부처님의 사촌들, 즉 당시 카필라 성의 왕자들의 머리를 깎는 이발사였다. 우바리는 자신이 모신던 왕자들이 부처님에게 귀의하여 비구가 된다고 하니 자신도 왕자들을 따라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 제자가 된 이후 부처님은 우바리를 오히려 왕자들의 사형(師兄)으로 삼아 자존심 강한 왕자들을 하심(下心) 시켰다. 이후 우바리는 부처님 교단에서 가장 계율을 잘 지키는 수행자로 이름을 높였다. 그랬던 그에게 어느날 음행과 살인을 저지를 두 비구가 찾아왔다. 이 비구들은 본의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어느 한 여인을 음행하고 살인까지 저지른 죄를 범했던 것이다. 이에 우바리 존자는 두 비구의 죄가 무거워 지옥을 벗어날 수 없다고 비난했다. 때마침 그들 곁에서 상황을 지켜본 유마거사는 죄에다 죄를 더하는 우바리 존자의 말이 마치 죄의 매듭을 더하는 것이라 여겼다. 반딧불의 약한 불빛과 같은 계율로는 죄를 없애 주지 못한다. 결국 유마거사는 여래의 빛나는 해 같은 지혜로 두 비구가 가졌던 얼음 같은 죄의식을 전부 녹여 주었다.  


<일일 소견>

<나는 내가 빛 나는 별인줄 알았어요. 한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나는 반딧불,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5330

오늘의정진: 獅子吼無畏說/사자후무외설/사자후의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 100일 정진, 95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백 열 일곱번째와 백 열 여덟번째 구절은

<在欲行禪知見力/재욕행선지견력/욕망 속에서 선정에 든 지견의 힘이여

火中生蓮終不壞/화중생련종불괴/불꽃에서 연꽃이 피니 끝내 시들지 않도다

勇施犯重悟無生/용시범중오무생/용시 비구는 중죄 짓고도 남이 없는 법을 깨치니

早是成佛于今在/조시성불우금재/벌써 성불하여 지금에 있음이로다> 였다.


수행자가 수행을 하는 목적이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라고 흔히들 생각한다. 또한 죄를 지어서는 절대 안되고 계율은 꼭 지켜야 한다고 여긴다. 불자라면 가장 기본적인 5계는 물론 출가하신 비구스님은 250, 비구니 스님은 348계나 되는 계율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선() 은 이러한 보편적인 상식을 뒤집어 놓는다. 선에서는 오히려 묻는다. 본래 내가 없는데 지은 죄가 어디 있는가? 어떠한 중죄(重罪)를 지었어도 무생(無生)의 도리를 깨우치면 가고 옴이 본래 공()하니 죄 또한 공함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은 백 열 아홉번째와 백 스무번째 구절

獅子吼無畏說/사자후무외설/사자후의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深嗟懞憧頑皮靼/심차몽동완피달/어리석은 완피달은 몹시 슬퍼하는 도다

只知犯重障菩提/지지범중장보리/중한 죄를 범하면 보리를 막는 줄만 알뿐

不見如來開秘訣/불견여래개비결/여래께서 비결을 열어 두심은 보지 못하도다.


현대 중국어에서 頑皮(wán pí 완피)말썽 꾸러기, 두꺼운같은 뜻이 있다. 즉 아직 다스려지지 않은, 가공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 가죽이란 뜻으로 완피달이란 가공되지 않은 무척 두꺼운 가죽으로 여기에서는 마음이 완피달 같이 무척 두껍다는 것이다. 사자의 두려움 없는 설법은 바로 돈오(頓悟)의 가르침이다. 사자후(獅子吼)같이 내지르는 돈오의 깨우침을 어리석은 완피달 같은 마음이라면 얻지 못한다. 깨달음은 죄가 없어야 구원받는 결과물이 아니다. 부처를 이루는 깨달음과 죄가 있고 없음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이 바로 여래가 알려 주신 비결임에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부처의 마음은 모든 생명을 잉태하는 바다와 같다. 바다물은 깨끗하고 청정한 물로만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바다물은 더럽고 깨끗한 물을 구별하지 않고 세상 온갖 물들을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에는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이 넘치고 살아 숨쉬는 곳이다.

부처의 마음도 그와 같아 죄가 있든 없든 결국엔 부처를 이루게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자비(慈悲)에 차별이 있다면 그건 자비가 아니다. 그래서 불교를 자비의 종교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부처의 자비는 이미 지은 죄에 대한 고통을 받지 말고 어서 벗어나라는 뜻이지 그렇다고 일부러 죄를 짓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된다.


<일일 소견>

긴 겨울의 끝에 봄인 줄 알았는데 겨울은 아직도 떠나기를 온 몸으로 거부하는 것 같다.

얼마나 더 떨고 나서야 꽃 잎 피어나는 따사로운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