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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213

오늘의정진: 爭似無爲實相門 쟁사무위실상문 /다툼이 없는 실상문에


- 100일 정진, 50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마흔 아홉번 째 구절은

<勢力盡箭還墜 세력진전환추  /세력이 다하면 화살은 (바닥으로) 다시 떨어질 것이니

招得來生不如意초득래생불여의/  내생에 뜻과 같지 않은 과보를 불러 얻게 된다.> 였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물리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다.

그러니 아무리 강한 힘으로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아도 결국 지구의 인력으로 인해 땅에 떨어지고야 만다.

로켓의 강한 추진력이 있어야 지구의 인력을 벗어 날 수 있다.

윤회의 법칙도 같은 도리다.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살았다 하더라도 죽어서는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게 된다.

오직 무심(無心)으로 하는 일이어야 인과에 메이지 않는다.


오늘은 쉰번 째 구절

爭似無爲實相門 (다툴 쟁, 같을 사, 없을 무, 할 위, 열매 실, 서로 상, 문 문)

쟁사무위실상문 /다툼이 없는 실상문에

一超直入如來地 (한 일, 뛰어넘을 초, 곧 직, 들 입, 같을 여, 올 래, 땅 지  )

일초직입여래지/  한 번에 뛰어넘어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감과 같도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엔 수 많은 언쟁과 다툼이 끊이질 않는다.

그래도 이 가운데 묵묵히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다툼의 원인이 분별심에서 생기는 것임을 분명히 안다.

분별이 사라지면 당연히 다툼도 사라진다.

그러할 때 실상문, 즉 깨달음의 문에 들어서게 된다.

결국 마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세간의 분별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다.

그리고는 단번에 여래가 깨달았던 그 경지의 문에 들어선다는 의미가 된다.

우리의 생활은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의 조화를 이루고 살아야 한다.

유위법만으로는 세상의 50% 밖에 이해할 수 없다.

유무가 함께 공존함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은 단박에 유위의 세상에서 무위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본래 유무가 둘이 아니지만 우리의 인식은 둘로 나눠 보고 있다.

선은 그러한 인식을 단박에 놓도록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한다.


<일일 소견>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이 곧 공이고, 공이 즉 색이다.

불교는 우리의 현실은 실제가 아니라고 반야심경을 비롯하여 누누히 언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이 진짜가 아니라는 말에 단번에 수긍하기 어렵다.

분명히 만져지고, 느껴지는 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는 본래 내가 없음인 '무아(無我)' 를 여실히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무아를 알기전 까지는 세상은 실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환영(幻影) 임을 알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더 필요한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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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212

오늘의정진: 勢力盡箭還墜 세력진전환추  /세력이 다하면 화살은 (바닥으로) 다시 떨어질 것이니


- 100일 정진, 49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마흔 여덟번 째 구절은

<住相布施生天福 주상보시생천복 /형상에 머무르는 보시는 하늘에 태어나는 복을 얻는 것이라

猶如仰箭射虛空 유여앙전사허공/  오히려 허공으로 쏘는 화살을 바라보는 것과 같도다.> 였다.


남을 돕는다는 상을 내고 보시를 하면 단지 복덕(福德)을 얻을 수는 있다.

착하다는 주위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것이고, 스스로도 뿌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

또한 선업(善業)을 쌓았다는 인과(因果)로 인해 어쩌면 다음 생에는 좀 더 좋은 환경에 태어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윤회를 벗어날 수는 없다.

마치 화살을 허공에 쏜다하더라도 하늘 끝 까지 도달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오늘은 마흔 아홉번 째 구절

勢力盡箭還墜 (형세 세,힘 력, 다할 진, 화살 전, 돌아올 환, 떨어질 추)

세력진전환추  /세력이 다하면 화살은 (바닥으로) 다시 떨어질 것이니

招得來生不如意 (부를 초, 얻을 득, 올 래, 날 생, 아닐 불, 같을 여, 뜻 의  )

초득래생불여의/  내생에 뜻과 같지 않은 과보를 불러 얻게 된다.


아무리 강력한 힘으로 화살을 하늘을 향해 쏜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땅 바닥으로 떨어지게 마련이다.

아무리 선업을 많이 쌓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쉽게 윤회는 벗어나지 못 한다.

착한 일에 대한 과보는 받겠지만 그 역시 업을 짓는 것이다.

나쁜 행위를 하는 악업(惡業) 만 업에 대한 과보를 받는 것이 아니다.

착한 행위에 대한 선업(善業) 또한 과보를 받는다.

인과의 법칙에는 선과 악을 나누지 않는다.

그래서 선() 에서는 선도 짓지 말고 악도 짓지 말라고 했다.


<불사선, 불사악(思善, 不思惡) ,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이때 그대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은 어떠한가? > (육조단경(六祖檀經) 중에서)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 선사는 선악을 따지지 않고 바로 본래면목에 대해 물었다.

그대의 본래면목이 어떠한가?

그렇다면 내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나의 본래면목은 어떠한가?

선악은 본래 구분이 없으니

본래 모습을 찾아야 한다.

<일일 소견>

본래 모습을 찾는 것은 밤하늘 구름에 가린 달을 찾는 것과 같다.

구름 걷히면 드러나는 둥그런 달, 본래 밝고 환한 내 한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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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211

오늘의정진: 住相布施生天福 주상보시생천복  /형상에 머무르는 보시는 하늘에 태어나는 복을 얻는 것이라


- 100일 정진, 48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마흔 일곱번 째 구절은

<覺即了施功 각즉료불시공  /깨치면 바로 마침이요, 공을 베풀지 않으니

一切有爲法일체유위법불동/  일체유위법과 같지 않다.> 였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논쟁은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논쟁이다.

깨침을 마친 돈수가 공덕을 베풀지 않는다는 구절은 반어법이다.

깨달으면 분명 자신을 포함한 주위의 인연 닿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덕을 주게 될 것이다.

그것은 분명 혼자만의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주위를 감화(感化) 시킨다. 그런데 어찌 공덕을 베풀지 않는다고 할 것인가?

그것이 바로 유위법과 다른 무위법의 도리인 것이다.


오늘은 마흔 여덟번 째 구절

住相布施生天福 (머물 주, 서로 상, 베 포, 베풀 시, 날 생, 하늘 천, 복 복)

주상보시생천복  /형상에 머무르는 보시는 하늘에 태어나는 복을 얻는 것이라

猶如仰箭射虛空 (오히려 유, 같을 여, 우러러볼 앙, 화살 전, 쏠 사, 빌 허, 빈 공  )

유여앙전사허공/  오히려 허공으로 쏘는 화살을 바라보는 것과 같도다.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첫번째가 보시(布施) 바라밀이다.

바라밀이란 '파라미타' 라는 산스크리트어의 한자음역이다. 건너가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즉 육바라밀은 깨달음의 세계로 건너가는 여섯가지 수행법을 말한다.

보시(布施: 남에게 베푸는 ), 지계(持戒: 계를 지니는 ), 인욕(忍辱 욕됨을 견디는 ), 정진(精進: 올바르게 수행정진 하는 ), 선정(禪定: 마음을 닦는 것), 지혜(智慧: 모든 의혹이 끊어지는 것) 를 실천하는 것이 바로 육바라밀을 닦는다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육바라밀의 가장 첫번째가 보시라는데 주목해야 한다.


보시란 내 것을 고집하지 않고 남에게 베푸는 것이다.

흔히들 남에게 뭔가를 베푼다고 하면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만 생각하기 쉽다.

불교의 보시는 물질적으로 베푸는 재보시(財布施)외에도 바른 길로 인도해 주는 법보시(法布施), 타인의 보호하고 두려움을 없애주는 무외보시(無畏布施) 가 있다.

이러한 보시를 행할 때의 바탕이 되는 마음이 바로 이타심이다.

남에게 이익과 도움을 주려는 마음이 바로 보시의 시작이다.

그런데 이러한 보시가 남에게 그저 보기 좋은 그림으로만 보여진다면?

좋은 일 했다고 남 앞에서 생색을 내게 된다면?

그것을 두고 불교에서는 유주상(有住相) 보시라고 한다.

물론 보시는 좋은 행위이다.

착한일을 하면 나도 모르게 기쁘거나 들떠서 생색을 내게 되는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人之常情) 일지도 모르겠다.

그처럼 보시에 대한 상()을 내는 것이 바로 유주상 보시가 된다.

반면에 수행이 점차 높아진다면 유주상이 아닌 무주상(無住相) 보시로 바뀌게 된다.

상을 내지 않는 보시, 즉 내가 보시를 했어도 생색을 내지 않는 것이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 모르게 하라는 마태복음 구절처럼 은밀히 남에게 베푸는 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이다.

아무런 댓가나 보답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하는 보시야 말로 진정한 보시라는 것이다.

즉 형상에 머무르면 유주상보시, 형상에 머무르지 않으면 무주상보시인 것이다.  

유주상 보시는 무주상 보다는 좀 차원이 낮지만 이 역시 복덕을 쌓는 행위이다.

그러니 착한일을 통해 선업(善業)을 쌓았으니 당연히 언젠가는 복을 받게 될 것이다.

하늘나라, 즉 천상계에 태어나는 인과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이라는 육도의 가장 높은 단계인 천상에 태어났다고 해도 이 역시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된다.

증도가에서는 이에 대한 비유를 허공에 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고 했다.

허공에 화살을 쏘면 영원히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지 않을 것이다.

화살은 날아가는 힘이 다하면 결국 땅바닥으로 떨어지게 된다.

유주상 보시만으로는 육도를 벗어나지는 못하는 것이다.

주는 사람도 없고, 받는 사람이 없는 보시,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어야 한다.

결국 육바라밀에서의 보시는 무주상보시를 말한다.

보시바라밀이 왜 육바라밀의 첫번째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행을 하는 마음 가짐의 가장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일일 소견>

결국 아상(我相)이 없이 사는 것이 수행의 처음이자 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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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210

오늘의정진: 覺即了施功 각즉료불시공  /깨치면 바로 마침이요공을 베풀지 않으니


- 100일 정진, 47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마흔 여섯 번째 구절은 

<優遊靜坐野僧家 우유정좌야승가 /한가히 노닐며 절 집에서 고요히 앉으니

闃寂安居實瀟灑 격적안거실소쇄 고요한 살림살이 참으로 기운이 맑고 깨끗하다.> 였다

 

()에서는 깨달음을 얻고 난 후 보임(保任혹은 보림이라 하는 과정이 있다.

자신의 본래 성품을 깨친 후그것이 끝이 아니라 다시 갈고 닦아야 된다는 뜻이다.

즉 돈오점수(頓悟漸修), 깨달은 후에도 점차 닦아야 되는 것과 일맥 상통한다.

육조 혜능선사도 오조 홍인의 인가를 받았지만 곧 바로 오조의 법을 잊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쫓는 사람들을 피해 사냥꾼들 속에 섞여 자신을 감추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육조 같은 선지식도 자신의 깨침에 대해서 다시 점검하고 또 점검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영가선사 또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본래 고요한 참 성품을 깨쳤다고 하지만 그 고요함의 향기를 한동안 음미하고 지냈을 것이다

그 깨달음의 향기 내음은 그가 묵었던 암자 주위로 신성하게 퍼져 나가지 않았을까?

 

오늘은 마흔 일곱번 째 구절

覺即了施功 (깨칠 각곧 즉마칠 료아닐 불베풀 시공 공 )

각즉료불시공  /깨치면 바로 마침이요공을 베풀지 않으니

一切有爲法 (한 일온통 체있을 유할 위법 법아닐 불같을 동  )

일체유위법불동/  일체유위법과 같지 않다.


이번 구절은 선에서 깨달음에 관한 중요한 견해에 해당한다.

깨치면 바로 마침이란다각즉료(覺卽了)!

바로 돈오돈수(頓悟頓修)를 뜻하는 것이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돈오돈수와 돈오점수간의 논쟁이 있었다.

퇴옹성철(退翁性徹 1912~1993) 스님께서 이 논쟁의 주역으로 등장하여 돈오돈수가 옳다고 주장하신 것이다.

깨우치면 그걸로 끝이지 무얼 더 닦아야 하느냐

더 닦을 것이 있다면 그건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자 당시 불교계에서는 논쟁이 붙었다

성철스님보다 700년 전에 고려시대에 이미 보조국사 지눌스님(普照國師 知訥 1158~1210) 은 돈오점수를 주창하셨기 때문이었다.

지눌 스님의 돈오점수가 이전까지 보편적인 깨달음 이후의 보임과도 같은 입장이었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돈오돈수를 주창하니 사람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돈오돈수가 옳은지돈오점수가 옳은지과연 무엇이 맞는지?

그런데 이 문제는 옳고 그름이란 판단의 문제일까?

판단의 문제로 생각하면 결정을 내야 하지만  깨달음의 문제가 과연 판단의 문제일까?

깨달음은 순전히 개인의 체험이다.

나의 체험을 누가 판단 할 수 있을까?

돈오점수와 돈오돈수가 서로 다르다고 확신 할 수 있을까?

영가스님의 이 구절은 깨달음을 마친 돈오돈수로 이해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은 공덕(功德)을 말한다.

공덕이란 무엇인가

흔히들 착한일, 즉 선업을 짓는 것을 복덕(福德)을 쌓는 다고 한다

공덕은 복덕보다 개념이 더 넓다

자신의 복을 짓는 것 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을 공덕이라 부를 만 하다.

공덕은 나와 남을 포함하여 우주에 까지 이로움이 생기는 덕을 뜻한다.

깨달음은 나 혼자만의 사건이 아니다

분명 나를 포함한 내 주위심지어 우주에 까지 그 이로움이 미친다

그러면 공덕은 자연히 베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깨달음을 마쳤는데 공덕을 베풀지 않는다고 했을까?

바로 뒷 구절과 이어서 봐야 한다

우리의 세간은 유위법이 지배한다. 그러나 무위법은 유위법과 같지 않다.

유위법의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무위법이 바탕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무위의 공덕을 베푸는 게 오히려 맞다고 본다.

이 구절은 반어법으로 이해함이 옳지 않을까?  

돈오돈수라 하여 공덕 베품이 없을까

오히려 깨달음의 공덕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일일 소견>

돈오돈수나 돈오점수의 논쟁은 부질없다내가 우선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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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29

오늘의정진: 優遊靜坐野僧家 우유정좌야승가 /한가히 노닐며 절 집에서 고요히 앉으니


- 100일 정진, 46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마흔 다섯 번째 구절은 

<入深山住蘭惹 입심산주란야 깊은 산에 들어가 고요한 곳에 머무르니

岑崟幽邃長松下 잠음유수장송하 봉우리 험준한 깊고 그윽한 낙락장송 아래로다.> 였다


이제 영가선사는 조계를 다녀온 후 자신의 깨달음에 대한 믿음은 확고 해졌다.

본래 자신이 거처하던 산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전에 함께 했던 산골짜기의 낙락장송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을 순 없다.

하지만 산은 예전 그대로였고 낙락장송 또한 여전히 그대로 서있으며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오늘은 마흔 여섯번 째 구절

優遊靜坐野僧家  (넉넉할 우놀 유고요할 정앉을 좌들 야스님 승집 가 )

우유정좌야승가 /한가히 노닐며 절 집에서 고요히 앉으니

闃寂安居實瀟灑 (고요할 격고요할 적편안 안살 거열매 실맑을대쑥 소뿌릴 쇄  )

격적안거실소쇄 /  고요한 살림살이 참으로 기운이 맑고 깨끗하다.

 

이 구절은 증도가의 첫 구절절학무위휴도인(绝学无为休道人)이 바로 떠오르는 구절이다

배움이 끊어진 한가한 도인의 함이 없는 일상이 그대로 그려진다.

깊은 산 골짜기에 있는 조그만 암자를 뒤에 두고 낙락장송 아래 바위 위에 참선을 하는 수행자의 모습이 보인다.

마음은 하늘처럼 맑고 굽어진 계곡에서 잔잔히 흐르는 물처럼 청명하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시원한 산들 바람에 잠시 멎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살며시 눈을 뜨고 일어나 유유자적(悠悠自适하게 암자로 돌아가는 수행자의 일상이 눈에 그려지지 않는가?

한가함이 넉넉한 대장부의 살림살이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일일 소견>

함이 없이 하는 일상이 되는 날 까지... 오늘도 정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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