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100일 정진,  16일차

<多言多慮/다언다려/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轉不相應/전불상응/더욱더 상응치 못함이라>

 

금강경의 사상(四相)과 반야심경의 오온개공(五蘊皆)은 모두  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설했다.

불교에서는 이를 두고 *무아(無我) 라고 규정했다.

여기서 ()는 없음 이란 뜻도 있지만 () 처럼 고정되지 않은 상태  뜻하기도 한다.

마음 자리에서 없음이나 비어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없음이란 뜻만 사용되면 단순히 무아는 내가 없다, 나라는 실체가 없다라고만 풀이 된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진아(眞我)  깨닫게 되는 참나, 불성(佛性) 부정하게 되는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불교의 많은 논쟁중 가장 첨예한 부분이 무아 참나 간의 대립일 것이다.

전통 불교에서는 무아 실체인데 참나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고 참나를 부정했다.

하지만 선불교(禪佛敎)에서는 부처 자리가 본래 진아 이므로 참나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과연 참나와 무아 어느 것이 옳은가?

 

견유몰유(遣有沒有)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종공배공(從空背空)공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진다

참나가 있다고 믿으면 무아는 부정된다.

무아라고 믿는다면 참나는 부정된다.

같은 모순속에 빠지는 참나와 무아의 대립은 불교를 공부하는 이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전통불교의 입장과 선불교의 입장이 서로 다른 것인가?

 

다언다려(多言多慮)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전불상응(轉不相應)더욱더 상응치 못함이라

확실하지 않으면 우리는 말이 많아지고, 생각이 많아진다.

진리는 말이 많고 생각이 많아지는 곳에서 나오지 않는다.

언어도단(言語道斷),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져야 한다.

진리는 말없는 곳에서, 생각이 끊어진 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무아와 참나의 논쟁은 바로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진 곳에서 결론 지어져야 한다.

깨친 지혜가 아니라면 무아든 참나든 그냥 소리에 불과하다.

소리가 언어가 되려면 지혜를 수반해야 한다.

지혜는 단순한 말이 아닌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서만 나올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올라오는 모든 말들과 생각들을 내려 놓을 차례이다.

 

 

:多言:많을 , 말씀 언:  말이 많고

多慮:많을 , 생각할 려 :  생각이 많다

轉不: 더욱 , 아닐 불: 더욱 ~ 아니하다

相應:서로 ,  응할 응: 서로 응하다

*무아(無我): 고정된 불변의 실체로서 나는 없다는 뜻으로 초기 불교의 핵심 개념

*진아(眞我): 모든 인간이 본래 가진 참성품이며 불성을 뜻함. 대승 불교의 핵심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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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15일차

<遣有沒有/견유몰유/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從空背空/종공배공/공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진다>

 

성현들은 우리의 마음이 극단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왔다.

그래서 중도니 중용이니 하는 도리를 설파했다.

그러나 중도는 결코 극단의 가운데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중도는 위치나 좌표를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중도를 추구한다면서 위치를 찾으려 하니 찾기 어려운 것이었다.

극단은 구조적으로 없앨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단을 버려서는 안된다.

버릴 수도 없다.

가지 불리는 일종(一種) 알려면 극단을 버려서는 안된다.

중도를 알려면 변을 배척해서도 안된다.

 

견유몰유(遣有沒有)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종공배공(從空背空)공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진다

 

있음과 공함.

있음이란 (相) 말한다.

금강경에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사상(四相)이라고 했다.

내가 있다는 , 남이 있다는 상, 중생이라는 상, 목숨이 있다는 상을 일반적인 사상에 대한 설명이다.

금강경에서도 가지 상이 모두 ()하다 말한다.

반야심경의 *오온(五蘊) ()하다 처럼 금강경은 *사상(四相) ()하다고 한다.

신심명의 이번 구절은 참으로 (毒)하다.

있음도 아니고 공함도 아니라고 못을 박아 버린다.

어떤 용납도 허용하지 않았다.

이미 우리는 분별하지 말고, 걸리지 말라는 뜻을 앎에도 이 구절에서 또 흠찟 놀라게 된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상에도 머물지 말라고 하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이든 금강경이든 그리고 신심명이든 불교에서는 어떤 상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내가 안다는 생각, 내가 모른다는 생각, 나 라는 생각, 남이라는 생각, 그 어떤 대상도 고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판단 내리는 모든 것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결국  라는 상이 없어지지 않는 , 우리는 라는 껍데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독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척 부드럽다.

이것도 저것도 어떤 것도 아니다.

현재 신심명은 모든 깨부수고 있다.

이제    없는 무아 단계로 접어들 차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매서운 소리 바람, 사실은 부드러왔다.

이제 부터는 더욱 깊어지는 공부로 들어간다.

 

:遣有:버릴 , 있을 유:  있음을 버린다.

:잠길 몰, 있을 유 :  있음에 잠긴다. 즉 있음에 빠져 버린다.

從空: 쫓을 , 빌 공: 공함을 쫓게 되면

背空: ,  빌 공: 공을 등지게 된다.

*五蘊(오온): 존재를 이루는 다섯 가지 요소, (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 으로 물질적 형태, 느끼는 감각, 지각,행동,의식 같은 요소가 있어  라는 인식을 하게

*四相(사상):아상 (我相)·인상 (人相)·중생상 (衆生相)·수자상 (壽者相)으로 우리가 집착하는 가지 상을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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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6-01-12 2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도룰 어중간한 중간 정도로 이해히는 분들이 의외로 많아요.

마힐 2026-01-13 17:54   좋아요 0 | URL
네 호시우행님 말씀처럼 중도를 중간 지점, 위치로 파악하면 그렇게 이해 될 겁니다.
가운데를 택하는 순간, 이미 다시 하나의 편으로 되어버리니 그래서 중도는 좀 많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저도 글을 쓰면서 치우치는 마음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 같네요.^^
호시우행님의 댓글 감사합니다.

yamoo 2026-01-13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도...학부 때 중용과 중도에 대해서 발표수업을 한 이후 이 주제에 대해서 가끔 생각이 나는데...이 글을 보니 엔날 생각이 나네요. 그땐 참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에 대해서 공부도 많이 했는데....지금은 생각나는게 거의 없어요..ㅎㅎ 물론 재작년에 유식삼성설의 논리를 추상화로 나타내본다고 염병떨던 때도 생각나서 좀 뻘줌하긴합니다..ㅎㅎ

마힐 2026-01-13 18:01   좋아요 0 | URL
와, yamoo님께서 학부 때 이미 공부를 하셨었군요. 대단하십니다!!!
게다가 공부한 자리를 추상화로 표현하실 정도라면...진짜 와우~
그 작품 저도 보고 싶네요...
야무~님의 작품 세계를 마주 할 기회 한번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
 

- 다시, 100일 정진,  14일차

<一種不通 /일종부통 /한 가지를 통하지 못하면

兩處失功 /양처실공/양쪽 다 공덕을 얻지 못하니


일종(一種)이란 ‘한 가지’ 를 지칭하는 데, 과연 그 ‘한 가지, 일종’은 중도(中道)에 해당할 까?

양 극단의 중간 지점이 아니라면 과연 중도는 무엇일까?

승찬스님은 이미 분별심, 간택심, 취사심을 버리라고 했다.

마음은 늘 양 극단 중 하나에 집착하거나 편향되기 때문에 그 마음을 놓아 버려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양 극단이 본래 떨어 질래야 뗄 수 없는 구조를 가졌다고 살펴보았다.

자석의 양극을 분리해도 자석은 여전히 양극의 성질을 버릴 수 없다.

빨대의 관을 아무리 양끝에서 잘라내도 여전히 처음과 끝이라 이름 짓는 구조를 바뀌게 할 순 없다.

우리가 아무리 양 변을 떼어버리고자 해도 결국 양 변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니 취사심이니 분별심이니 간택심이니 하는 것도 우리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벗어나고자 하는 그 마음까지도 놓아버려야 한다.

즉, 얻고자 하는 것은 사실 집착이요, 간택이고, 분별이다.

따라서 그 얻고자 하는 마음마저도 놓아야만 우리는 걸림없이 다시 간택하고 분별할 수 있다.

그 한 가지 ‘일종’ 이 중도라면 그 중도는 그 어느 것에도 걸림없는 자리여야 한다.


일종평회(一種平懷)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민연자진(泯然自津) 사라져 저절로 다 하리다

유체양변(唯滯兩邊)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으니

영지일종(寧知一種)어찌 한 가지를 알 수 있으랴


따라서 중도는 어렵다 했지만, 중도가 어려운 것은 자리를 찾으려 하니 어려운 것이다.

그 양끝에 서지 않으려고, 치우치지 않으려고 하는 그 마음을 억누르고자 하니 어려운 것이다.

본래 양 극단이 구조적으로 이루어 진 것인데 애써 중도를 찾는다면서 위치만을 찾으려 하니 찾을 수가 없는 것이 아니였을까?

일종부통(一種不通) 한 가지를 통하지 못하면

양처실공(兩處失功) 양쪽 다 공덕을 얻지 못하니


중도는 위치, 좌표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중도의 치우침이 없는 자리란 바로 '양 극단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음료수에 빨대를 꽂아 마시듯 우리는 앞 뒤없는 빨대를 꽂아야 한다.

양 극단이란 바로 빨대와 같다.

양 극단을 의지해야 한다. 

양 극단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양극단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양 극단을 저버리면서 중도를 찾는 것은 계란에서 뼈를 찾는 것과 같은 셈이다.

음과 양이 나뉘어 태극이 되어 처음이자 끝이요, 끝이자 처음으로 돌아가는 도리는 모두 조화로움을 뜻한다.

중도란 바로 이 조화롭게 돌아가는 도리를 뜻하는 것이다. 

일종은 결국 그 하나로 돌아가는 조화로움을 말한다.

결국 중도는 일종의 다른 이름이 아니였을까?


푸른 하늘의 흰 구름은 여여히 떠 있다.

 

주:一種:한 일, 씨 종:  한 가지 근본, 즉 본래 성품 혹은 근본자리를 뜻함.

不通:아닐 불, 통할 통 :  통하지 않는다.

兩處: 둘 양, 곳 처: 두 곳, 여기서는 양 극단을 뜻하기도 하지만 그 어떤 곳이든 양 극으로 나뉘는 것은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어느 곳’이라 해도 무방해 보인다.

失功:잃을 실, 공덕 공:  공덕을 잃게 된다.


 



 By Dharma & Mah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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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13일차

<唯滯兩邊/유체양변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으니

寧知一種 /영지일종/어찌  가지를 있으랴>

 

중도(中道) 함은 가운데   뜻하지 않는다.

이쪽 혹은 저쪽이라는 선택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 중도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특히 정치에서 중도를 표방하면 바로 양비론자(两非论者) 몰리기 쉽다.

중도를 삶의 지표로 삼는 것도 쉽지 않다.

동양의 많은 현자들이 중도中道  중용中庸 말했어도 우리는 중간 어느 지점으로만 인식할 뿐이다.

과연 중도란 무엇인가?

이쪽 저쪽 끝의 중간 값이 중도인가?

 

일종평회(一種平懷)  가지를 바로 지니면

민연자진(泯然自津) 사라져 저절로 하리다

 

동양에서 음양(陰陽사상은 서양의 이분법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중도라 하면 중간 어딘가 쯤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동양 사상에서 음양은 본래 무극(無極)에서 극도로 혼란함이 점차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나왔다.

음과 양은 고정된 것인가? 아니다.

낮과 밤이 구분이 되어 있어도 낮만 존재하고 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변한다. 음양의 이치는 고정됨을 말하지 않는다.

서양의 이분법과는 결이 다르다.  

음양은 조화로움을 우선 시 한다.

낮과 , 남자와 여자, 선과 악 등등 나누어진 음양은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을 경계한다.

조화로움이야 말로 음양 사상에서 추구하는 구조를 지녔다.

중용이나 중도 또한 이러한 조화로움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

단순히 양변에 치우친 것을 경계해서 가운데 지점을 택하라는 뜻이 아니다.

극단을 모두 포함한 조화로움이 바로 중용이자 중도라 봐야 한다.

, 양비론이 아닌 양불비론(两不非论)이라고 해야 할까?

선에서는 이를 두고 불이(不二), 둘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

 

음료수를 먹을 빨대를 꼽아 먹는다고 치자.

빨대에 앞과 뒤가 있는가? 뾰족한 부분을 앞이라고 부르 건 뒤라고 부르건, 사실 빨대의 양 끝은 앞뒤가 따로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변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빨대의 중간 부분을 잘라내도 끝이 생기고야 만다.

극단을 거부하려 해도 끝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정치적으로 당을 서로 대립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중도는 사이에 가운데 끼는 존재가 아니다.

현재 한국 정치에서 중도는 양쪽 당으로 부터 소외되고 있다.

그래서 중도를 지킨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

도의 길에서도 마찬 가지다.

극단에 치우치지 않으면 중도라고 하는데 그게 어디 쉬운 길인가.

 

유체양변(唯滯兩邊)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으니

영지일종(寧知一種)어찌  가지를 있으랴

 

신심명에서는 가지 (一種) 지니라고 했다.

일종이 무엇이길래 모든 분별과 알음알이 저절로 사라진다고 했을까?

설마 가지가 바로 중도일까?

우리에게 중도(中道)를 추구하고 일종(一種) 얻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제부터는 중도  무엇 인지를 살펴봐야 단계로 접어 들었다.

 

 

:唯滯: 오직 , 막힐 체 :  막힐 체는 속이 체했다, 교통 체증이 심하다  막혀 있는 형국을 표현할 쓰는데, 막혀서 옴짝달싹 하여 답답한 심정을 뜻한다.

兩邊:  , 가 변: 양쪽 두 가장자리에, 즉 이쪽 과 저쪽 양극단에 있는 상황을 뜻함.

寧知: 편안할 , 알 지: 여기서 영은 형용사로 어찌 ~ 을 으로 쓰임. 즉 어찌~ 을 알겠는가?

一種: , 씨 종:  한 가지 근본, 즉 본래 성품 혹은 근본 자리를 뜻함.

 


By Dharma & Mah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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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1-11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빨대의 비유가 참 적절합니다. 어디나 양 끝단은 존재하는데 결국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옳다는 의식이 가장 큰 걸림돌인 것 같습니다.

마힐 2026-01-11 12:30   좋아요 1 | URL
맞아요. 잉크냄새님.
우리는 사실 빨대를 엄마 뱃속 부터 빨아 왔어요.
탯줄이 바로 빨대 역할을 한 셈이죠.
그런데 우리는 항상 양 극단을 꺼리죠.
탯 줄을 끊고 나온 이의 숙명인가 보죠. ^^
 

- 다시, 100일 정진,  12일차


<止動歸止/지동귀지 /움직임을 그치고 그침에 돌아가면

止更彌動 /지갱미진/그침이 다시 움직임이 되나니>

 

<이솝우화>에 여우는 포도나무에 매달린 포도를 보고 따먹으려고 했다

하지만 여우는 어떤 방법으로도 포도를 없었다.

그러자 여우는 포도 나무를 향해 마디 뱉는다.

포도는 분명히 아주 실꺼야.

 

<삼국지>의 조조는 행군 중에 물이 떨어져 병사들의 갈증은 극에 달했다.

그때 조조는 꾀를 내었다.

바로 앞에 매실 나무 숲이 보인다.

매실은 아주 시고도 달아 우리 목을 축이기에 충분하니 모두 참고 힘내라.

말에 병사들은 매실의 신맛을 생각하니 안에 침이 돌아 갈증을 잊었다.

 

포도와 매실

생각만 해도 입안에 신맛이 돌아 침이 생긴다.

여우는 포도를 먹지도 못했고, 조조의 병사들은 매실을 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신맛을 느꼈다.

포도와 매실은 단지 이름일 뿐인데 그들은 신맛 이라는 관념에 빠지게 되었다.

관념이  우리의 의식에 굳어지게 되는 것이 습관이 되면 이제부터는 쉽게 떼어 버릴 수가 없게 된다.

이처럼 우리는 고정관념과 습에 자유롭지 못한 상태로 살아간다.

 

일종평회(一種平懷)  가지를 바로 지니면

민연자진(泯然自津) 사라져 저절로 하리다

분별심, 간택심, 취사심이란 것도 사실은 이름에 지나지 않는가.

우리는 본체는 얻지 못하고 단지 이름에 걸려서 관념과 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다.

깨달음이나  역시 하나의 이름에 지나지 않는데 우리는 이름 걸렸다.

진정한 깨달음과 도는 이름에 있지 않다.

이름에 걸리지 않고 그저 본질을 바로 인식하는 것이 여여함이라.

여여한 마음 앞에 어떤 관습과 관념도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지동귀지(止動歸止) 움직임을 그치고 그침에 돌아가면

지갱미진(止更彌動) 그침이 다시 움직임이 되나니

 

관념과 습이 사라진 자리에 모든 움직임은 그친다.

그러나 정지(停止) 끝이 아니다.

다시 움직인다. 그러나 움직이는 것도 사실 시작은 아니다.

움직이거나 정지하거나 하는 현상일 뿐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니다.

움직이는 자리이든, 그치는 자리이든 중요한 것은 거기에 관여하지 않는 것은 오직 근본 마음 뿐이다.

성품은 보이는 형상에, 들리는 소리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신맛이진 짠맛인지, 단맛인지는 맛을 봐야 함에도 남의 말이나 글에도 걸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아직 이름과 습관 같은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어떤 관습과 관념 그리고 이름에 걸리지도 말고, 바라보는 대상에 대해 올라오는 생각들을 잠시 내려 놓자.

이제부터는 어떤 것에도 걸리지 말고, 관여하지 말고, 올라오는 그 자리에 다시 되돌릴 뿐이다.  

 

 

:止動: 그칠 , 움직일 동 : 움직임을 그쳐

歸止: 돌아갈 , 그칠 지: 그침으로 돌아가다

止更: 그칠 , 다시 갱: 다시 그치는 것이

彌動:두루 , 움직일 동:  두루 움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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