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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18

오늘의정진: 聞說如來頓敎門/문설여래돈교문/여래의 돈교문 설함을 듣고는


- 100일 정진, 83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아흔 세 번째와 아흔 네 번째 구절은

<嗟末法惡時世/차말법오시세/ 말법을 슬퍼하고 시세를 미워하나니

衆生薄福難調制/중생박복난조제/중생의 복은 얇아 조복 받기 어렵다

去聖遠兮邪見深/거성원혜사견심/성인 가신지 오래고 사견이 깊어짐이니

魔强法蒻多怨害/마강법약다원해/마구니가 강하고 법은 약하여 원한과 해가 많도다> 였다.


붓다 생전에 제자들의 질문에 답을 주지 않으신 적이 있다. 붓다는 정각을 이룬 후 신통력을 통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인데 어째서 말씀이 없으셨을까? 경전에서는 부처님께서 대답해주지 않은 열 네가지 질문을 십사무기(十四無記) 라고 부른다.

<세상은 영원한가?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영원하기도 하고 영원하지 않기도 하는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세상은 끝이 없는가? 세상은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는가? 세상은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닌가? 몸과 마음은 같은 것인가? 몸과 마음은 다른 것인가?  여래는 끝이 있는가? 여래는 끝이 없는가? 여래는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는가? 여래는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닌가? >

그 당시에 뭐 이런 말 장난 같은 질문을 던진 제자가 있었다. 그 제자는 '스승께서 만일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속 시원히 하지 않는다면 나는 스승 곁을 떠나리라' 고 속으로 다짐을 하며 이 질문을 던졌다이에 붓다는 이렇게 답하신다.

<그대는 내가 이 질문에 답을 주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는가? 그대는 내가 이 질문에 답을 준다는 약속 때문에 수행을 하는가? > 이에 그 제자는 그런 것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붓다는 <그럼 그대는 약속도 하지 않았건 만 수행에 대해 어찌 조건을 달고 흥정하려는 가?> 하며 제자의 마음가짐에 대하여 꾸짖으셨다. 그러면서 십사무기에 관한 답을 하지 않은 이유를 설파 하셨다.

공자(孔子 B.C 551~479) 또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

<語怪力. (자불어괴력난신: 공자는 괴이하고, 힘으로 하는, (사회를) 어지럽히는, 귀신에 관한 일은 말하지 않았다.)> 술이편

오래전부터 성인들은 묻지 말라고 하셨지만 나는 아직도 십사무기와 괴력난신의 답이 궁금하다.

 

오늘은 아흔 다섯 번째와 아흔 여섯 번째 구절

聞說如來頓敎門/ 문설여래돈교문/ 여래의 돈교문 설함을 듣고는

恨佛滅除令瓦碎/한불멸제령와쇄/부숴 없애지 못함을 한탄하는 도다

作在心殃在身/ 작재심앙재신/ 지음은 마음에 있으나 재앙은 몸으로 받나니

不須怨訴更尤人/불수원소갱우인/모름지기 사람을 원망하고 허물지 말지어다


잘 하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에 자꾸 뭔가를 지어내서 하려고 하면 오히려 업만 늘어난다. 업이 늘어날수록 그에 대한 응보를 받게 되니 그것은 바로 재앙과도 같다. 남을 원망하고 허물을 보는 것은 아직도 내 안에 분별 망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의 마음을 단박에 깨닫는 돈교를 듣자마자 곧바로 내 마음 속의 망상과 분별을 부셔 버려야만 한다.


<일일 소견>

내 앞에 닥친 일에 대해 흥정하지 말고 아무 조건 없이 그냥 행할 수 있는 마음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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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17

오늘의정진: 嗟末法惡時世/  차말법오시세/ 말법을 슬퍼하고 시세를 미워하나니


- 100일 정진, 82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아흔 한 번째와 아흔 두 번째 구절은

<心是根法是塵/  심시근법시진/ 마음은 뿌리요 법은 티끌이니

兩種猶如鏡上痕/ 양종유여경상흔/ 둘은 거울 위의 흔적과 같음이라

痕垢盡除光始現/흔구진제광시현/ 흔적인 때 다하면 빛이 비로소 나타나고

心法雙亡性卽眞/심법쌍망성즉진/마음과 법 둘 다 없어지면 성품이 곧 참되도다> 였다.


마음이 나의 뿌리임을 이제 알았다. 법은 나의 근본 마음이 비춰져 나타낸 형상에 지나지 않았다. 법 그 자체는 볼 수가 없어서 거울에 비춰 볼 수밖에 없다. 거울이 바로 공()이다. 텅 비어 있는 공이라 할 수 있다. 거울이 없다면 법을 알 수가 없다.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르키지만 우리는 달 보다 먼저 손가락 본다. 손가락은 달이 아니다. 달이 어디에 있는지, 강속에 있는지, 숲 속에 있는지, 찾아 헤멘다. 달이 하늘 위에 떠 있음을 붓다가 알려 줬음에도 우리는 달을 바로 보지 못하고 손가락만을 보고 달이라 여기는 우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참 성품도 그와 같아서 본래 내 안에 있음을 알지 못하고 밖으로 헤메면서 찾고 있는 것이다. 찾고자 하는 마음도, 얻고자 하는 법도 그냥 그대로 놔두고 쉬어야 한다. 그래야 저절로 드러나는 성품을 보게 된다. 성품은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 져야 한다. 달은 낮에도 떠 있지만 오히려 밝은 빛 때문에 보질 못한다. 밤이 되면 저절로 보여 진다. 우리의 성품도 보려고 해서 보이는 것이 아니다. 때가 되면 저절로 눈에 들어와야 한다. 눈에 보여 져야 한다. 성품은 그렇게 드러나는 것이다.


오늘은 아흔 세 번째와 아흔 네 번째 구절

嗟末法惡時世/  차말법오시세/ 말법을 슬퍼하고 시세를 미워하나니

衆生薄福難調制/ 중생박복난조제/ 중생의 복은 얇아 조복 받기 어렵다

去聖遠兮邪見深/거성원혜사견심/ 성인 가신지 오래고 사견이 깊어짐이니

魔强法蒻多怨害/마강법약다원해/마구니가 강하고 법은 약하여 원한과 해가 많도다.


붓다의 열반 이후 2500년이나 지났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이미 말법시대이다.

첨단 사회가 되어 편리해진 세상이라고 하지만 오늘날의 현실은 온갖 제도와 규칙으로 통제가 됨에도 오히려 더욱 혼란스럽다. 분명히 문명의 발달과 과학 기술의 혜택을 받아 물질적으로 과거 세상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발전을 했다. 그런데 왜 우리의 마음은 오히려 자유롭지 못하고 구속되는 것일까?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지금 현대 사회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심하게 균형이 깨진 상태이다. 결국 말법시대라는 것은 균형과 조화가 깨진 시대가 아닐까?


<일일 소견>

법은 다루는 것이 아닌 지키는 것이야 하는데 법을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 세상의 혼란을 오히려 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차라리 무위의 법으로 다스리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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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16

오늘의 정진: 心是根法是塵/  심시근법시진/ 마음은 뿌리요 법은 티끌이니


- 100일 정진, 81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여든 아홉 번째와 아흔 번째 구절은

<眞不立妄本空/  진불립망본공/ 참됨도 서지 못하고 망도 본래 공함이여

有無俱遣不空空/ 유무구견불공공/ 있음과 없을 다 버리니 공하지 않고 공하도다.

二十空門元不着/이십공문원불착/ 이십공문에 원래 집착하지 않으니

一性如來體自同/일성여래체자동/ 한 성품 여래의 본체와 저절로 같도다> 였다.


금강경(金剛經)은 공()에 관한 경()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금강경에는 ()’이란 글자는 한 글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강경이 을 설()한 경임을 부인하는 불자(佛子)는 아무도 없다. 공을 설하면서 공을 쓰지 않는 경, 그것이 금강경이다. 금강경은 대반야경이라는 대승경전에 속하는 경이다. 우리가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르는 대장경에서 반야경의 분량은3분의 1을 차지한다. 그 방대한 반야경의 내용을 핵심만 추려서 260자로 압축한 경이 바로 반야심경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반야심경의 구절처럼 사실 공은 단순하지 않다. 반야경에서는 공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 나오는데 공은 사실 하나가 아니다. 내공, 외공에서 부터 공공, 대공, 승의공, 유위공, 무위공을 거쳐 무성공, 자성공, 무성자성공에 이르기까지 공에 대하여 모두 20가지로 세세하게 관찰하고 분류했다. 빌 공()은 텅 비웠다고 표현하지만, 텅 비었다는 그 상태가 상황에 따라 각각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공은 텅 빈 충만함이라고 했었다. 그 비어 있는 곳에 충만함에 따라 공에 들어 가는 문도 달라지는 것이다. 증도가에서는 반야경에 나오는 이십공문(二十空門)이나 되는 공에 대한 견해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오늘은  아흔 한 번째와 아흔 두 번째 구절

心是根法是塵/  심시근법시진/마음은 뿌리요 법은 티끌이니

兩種猶如鏡上痕/ 양종유여경상흔/둘은 거울 위의 흔적과 같음이라

痕垢盡除光始現/흔구진제광시현/흔적인 때 다하면 빛이 비로소 나타나고

心法雙亡性卽眞/심법쌍망성즉진/마음과 법 둘 다 없어지면 성품이 곧 참되 도다.


우리는 마음을 볼 수 없다. 그렇다고 마음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마음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고 있지만 나는 항상 마음을 놓치고 산다. 그렇다. 우리가 숨을 쉬고 있지만 숨을 항상 의식하며 쉬는 것이 아니듯 마음도 항상 우리와 함께 하고 있지만 늘 인식하지 못하며 살고 있다. 나무의 뿌리가 흙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뿌리가 있음을 우리는 안다. 마음도 나무 뿌리와 같다. 우리의 참 성품은 흙에 가려진 나무 뿌리와 같다. 나무는 뿌리가 있기에 땅 위에서 자라서 가지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한다. 나의 참된 성품도 그와 같다. 내 마음의 뿌리가 곧 부처의 성품이다.

우리에게 부처의 성품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은 내 마음에 뿌리가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과 같다. 부처의 성품은 곧 내 마음의 뿌리이다. 그러니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다만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다. (우주의 시간으로...)


<일일 소견>

내 마음의 뿌리를 믿는다면 부처가 될 수 있을까요? 여시(如是)! 진실로 믿는다면, 그런데 진실한 믿음을 그대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느냐?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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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15

오늘의정진: 眞不立妄本空/  진불립망본공/ 참됨도 서지 못하고 망도 본래 공함이여


- 100일 정진, 80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여든 일곱 번째와 여든 여덟 번째 구절은

<法東流入此土/  법동류입차토/ 법이 동쪽으로 흘러 이 땅에 들어와서는

菩提達磨委初祖/ 보리달마위초조/ 보리달마가 첫 조사가 되었도다.

六代傳衣天下聞/ 육대전의천하문/ 육대가 의발을 전한 일 천하에 소문 났고

後人得道何窮數/후인득도하궁수/ 뒷사람이 도 얻음을 어찌 다 헤아리라> 였다.


 불법이라는 씨앗을 달마조사가 인도에서 가지고 와서 중국의 땅에 옮겨 심었다. 그 후 2,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을 거치면서 싹이 트고 줄기가 자라나기 시작했다혜능 이전의 선은 땅 밑에서 자라기 시작한 묘목에 불과 했다. 혜능 이전 조사들이 잘 가꾸지 않았다면 진작에 자라다 죽어 버리고 말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혜능대사에 이르러 묘목은 나무로 자라서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증도가를 지은 영가현각 스님도 법의 나무 가지에서 열린 가장 큰 열매 중의 하나였었다. 이제 6조의 의발 전수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선불교라는 나무에서 이제는 무성하게 많은 열매들이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늘은여든 아홉 번째와 아흔 번째 구절

眞不立妄本空/  진불립망본공/ 참됨도 서지 못하고 망도 본래 공함이여

有無俱遣不空空/ 유무구견불공공/ 있음과 없을 다 버리니 공하지 않고 공하도다.

二十空門元不着/이십공문원불착/ 이십공문에 원래 집착하지 않으니

一性如來體自同/일성여래체자동/ 한 성품 여래의 본체와 저절로 같도다.


불교는 중도(中道)를 강조한다. 참된 것을 추구하지만 참됨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망상을 싫어 하지만 망상을 또 버리지도 않는다.  참됨과 망상이란 양극단에 치우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어쩡쩡한 가운데를 고수하는 것은 중도가 아니다. 중도는 양변이 모두 공()함을 알기에 양극단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중도란 무척 어렵다. 분명히 다시 말하지만 중도는 가운데로 가는 길이 아니다. 가운데 중()과 길 도()가 합쳐진 단어가 중도라 하여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다. 중도는 양극단이 공함을 알기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참되면서도 참되지 않으며, 망상을 꺼리지만 또한 버리지도 않는다.

()은 비어 있지만 꽉 찬, 텅 빈 충만이다. 무엇이라고 고집하지 않는다. 인연에 따라 형성될 뿐이다. 마치 원자와 전자가 만나서 하나의 분자를 이루고, 그 분자가 모여 물질로 형성되었다가 다시 인연에 따라 흩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한 것을 성품의 작용이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성품의 작용이 바로 여래의 본체, 즉 불성이라고 영가스님은 밝혔다.


<일일 소견>

집착은 왜 생기나요? 알지 못하니까 생기지. 그럼 왜 알지 못하나요? 스스로가 업식에 끄달리니까 알지 못하지. 그럼 왜 업식에 끄달리나요? 생사에 메이니까 그렇지. 그럼 생사는 어떻게 벗어나는 건가요? 그래, 생사를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를 참구해야 한다. 생사가 어디에 있는가? 이 자리에 있다. 숨을 쉬면 생이고 숨이 끊어지면 사다. 생명이 있는 한 생사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업을 짓는다.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럼 먹고 사는 것을 벗어나려면. 죽어야 하는가? 그래서 옛 선사들은 무문관(無門關)에 들어섰다. 문 없는 문으로 들어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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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14

오늘의정진: 法東流入此土/  법동류입차토/ 법이 동쪽으로 흘러 이 땅에 들어와서는


- 100일 정진, 79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여든 다섯 번째와 여든 여섯 번째 구절은

<建法幢立宗旨/  건법당입종지/ 법의 깃발 세우고 종지를 일으킴이여

明明佛勅曹溪是/ 명명불칙조계시/ 밝고 밝은 부처님 법 조계에서 이었도다

第一迦葉首傳燈/ 제일가섭수전등/ 첫 번째로 가섭이 맨 먼저 불법의 등불을 전하니

二十八代西天記/이십팔대서천기/ 이십 팔대는 서천의 기록이로다> 였다.


마하가섭존자(摩訶迦葉尊者)가 인도에서 초조가 된 배경에는 삼처전심(三處傳心)이란 일화가 전해져 온다. 삼처전심이란 부처님의 마음을 세 가지 장소에서 이어받았다는 뜻이다.  

첫번째가 다자탑(多子塔)에서, 두번째가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세번째가 사라쌍수하(沙羅雙樹河)라는 장소들이다. 각각의 장소는 마하가섭존자가 왜 부처님의 법을 이어받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 중 가장 알려진 것은 영산회상에서 있었던 염화시중(拈華示衆), 염화미소(拈花微笑) 일화가 있다. 영산회상에서 부처님께서 대중들을 향해 가만히 연꽃을 들어 올려 보이자 오직 가섭존자만 그 뜻을 알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가장 대표적인 일화로 통한다. 그렇게 마하가섭은 부처님 열반 후 초조(初祖),즉 제1대가 되어 28대 보리달마(菩提達磨)에게 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오늘은 여든 일곱 번째와 여든 여덟 번째 구절

法東流入此土/  법동류입차토/ 법이 동쪽으로 흘러 이 땅에 들어와서는

菩提達磨委初祖/ 보리달마위초조/ 보리달마가 첫 조사가 되었도다.

六代傳衣天下聞/ 육대전의천하문/ 육대가 의발을 전한 일 천하에 소문 났고

後人得道何窮數/후인득도하궁수/ 뒷사람이 도 얻음을 어찌 다 헤아리라


서기 약 6세기경, 달마대사에 의해 불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즉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왔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1889~1975) 20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동양의 불교가 서양으로 넘어 간일' 이라고 언급을 한 적이 있다.  그럼 6세기경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온 불교와 20세기 동양에서 서양으로 넘어간 불교는 같은 종교일까? 부처님 열반 후 약 1000년의 시간이 지나 중국으로 간 불교와 그리고 다시 그 시점에서 약 1500년이 지나서 서양으로 간 불교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선 선()으로 변했고, 동양의 선은 서양에서는 명상(冥想)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그 겉 모습은 달라졌을지언정 그 본질은 달라 지지 않았다. 그 본질은 깨달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 깨달음을 사람들은 바로 도()라고 부른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즉 노자는 '도를 도라고 부르면 도가 아니다' 라고 했지만 도는 도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보리달마가 중국에서 초조로 추대되고 불법은 숭산 소림사(少林寺)에서 2조 혜가에게로 전해졌다그리고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 그리고 6대조에 이르러 혜능(慧能)에게까지 전해졌다.

의발(衣鉢)은 부처님 당시에 세존이 걸치셨던 가사와 탁발에 쓰였던 바루 그릇을 말한다. 의발은 불법이 전승되어지는 법의 상징물로 쓰였다. 마침내 그 의발이 혜능에게까지 넘어 왔다. 혜능 이후 불법을 통해 도를 얻는 사람들이 무수히 생기기 시작했다.  아직은 상법시대이기 때문이라.


<일일 소견>

의발을 전수 하노라. 무엇에 쓰는 건가요? 입고 먹는데 써라. 필요 없는데요. 그래도 받아라. 주시겠다면하지만 쓸 일은 없을 겁니다. ? 법은 의발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럼 알아서 해라. 전 불에 태울 랍니다. 활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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