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5316

오늘의 정진: 心是根法是塵/  심시근법시진/ 마음은 뿌리요 법은 티끌이니


- 100일 정진, 81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여든 아홉 번째와 아흔 번째 구절은

<眞不立妄本空/  진불립망본공/ 참됨도 서지 못하고 망도 본래 공함이여

有無俱遣不空空/ 유무구견불공공/ 있음과 없을 다 버리니 공하지 않고 공하도다.

二十空門元不着/이십공문원불착/ 이십공문에 원래 집착하지 않으니

一性如來體自同/일성여래체자동/ 한 성품 여래의 본체와 저절로 같도다> 였다.


금강경(金剛經)은 공()에 관한 경()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금강경에는 ()’이란 글자는 한 글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강경이 을 설()한 경임을 부인하는 불자(佛子)는 아무도 없다. 공을 설하면서 공을 쓰지 않는 경, 그것이 금강경이다. 금강경은 대반야경이라는 대승경전에 속하는 경이다. 우리가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르는 대장경에서 반야경의 분량은3분의 1을 차지한다. 그 방대한 반야경의 내용을 핵심만 추려서 260자로 압축한 경이 바로 반야심경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반야심경의 구절처럼 사실 공은 단순하지 않다. 반야경에서는 공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 나오는데 공은 사실 하나가 아니다. 내공, 외공에서 부터 공공, 대공, 승의공, 유위공, 무위공을 거쳐 무성공, 자성공, 무성자성공에 이르기까지 공에 대하여 모두 20가지로 세세하게 관찰하고 분류했다. 빌 공()은 텅 비웠다고 표현하지만, 텅 비었다는 그 상태가 상황에 따라 각각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공은 텅 빈 충만함이라고 했었다. 그 비어 있는 곳에 충만함에 따라 공에 들어 가는 문도 달라지는 것이다. 증도가에서는 반야경에 나오는 이십공문(二十空門)이나 되는 공에 대한 견해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오늘은  아흔 한 번째와 아흔 두 번째 구절

心是根法是塵/  심시근법시진/마음은 뿌리요 법은 티끌이니

兩種猶如鏡上痕/ 양종유여경상흔/둘은 거울 위의 흔적과 같음이라

痕垢盡除光始現/흔구진제광시현/흔적인 때 다하면 빛이 비로소 나타나고

心法雙亡性卽眞/심법쌍망성즉진/마음과 법 둘 다 없어지면 성품이 곧 참되 도다.


우리는 마음을 볼 수 없다. 그렇다고 마음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마음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고 있지만 나는 항상 마음을 놓치고 산다. 그렇다. 우리가 숨을 쉬고 있지만 숨을 항상 의식하며 쉬는 것이 아니듯 마음도 항상 우리와 함께 하고 있지만 늘 인식하지 못하며 살고 있다. 나무의 뿌리가 흙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뿌리가 있음을 우리는 안다. 마음도 나무 뿌리와 같다. 우리의 참 성품은 흙에 가려진 나무 뿌리와 같다. 나무는 뿌리가 있기에 땅 위에서 자라서 가지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한다. 나의 참된 성품도 그와 같다. 내 마음의 뿌리가 곧 부처의 성품이다.

우리에게 부처의 성품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은 내 마음에 뿌리가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과 같다. 부처의 성품은 곧 내 마음의 뿌리이다. 그러니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다만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다. (우주의 시간으로...)


<일일 소견>

내 마음의 뿌리를 믿는다면 부처가 될 수 있을까요? 여시(如是)! 진실로 믿는다면, 그런데 진실한 믿음을 그대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느냐?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5315

오늘의정진: 眞不立妄本空/  진불립망본공/ 참됨도 서지 못하고 망도 본래 공함이여


- 100일 정진, 80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여든 일곱 번째와 여든 여덟 번째 구절은

<法東流入此土/  법동류입차토/ 법이 동쪽으로 흘러 이 땅에 들어와서는

菩提達磨委初祖/ 보리달마위초조/ 보리달마가 첫 조사가 되었도다.

六代傳衣天下聞/ 육대전의천하문/ 육대가 의발을 전한 일 천하에 소문 났고

後人得道何窮數/후인득도하궁수/ 뒷사람이 도 얻음을 어찌 다 헤아리라> 였다.


 불법이라는 씨앗을 달마조사가 인도에서 가지고 와서 중국의 땅에 옮겨 심었다. 그 후 2,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을 거치면서 싹이 트고 줄기가 자라나기 시작했다혜능 이전의 선은 땅 밑에서 자라기 시작한 묘목에 불과 했다. 혜능 이전 조사들이 잘 가꾸지 않았다면 진작에 자라다 죽어 버리고 말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혜능대사에 이르러 묘목은 나무로 자라서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증도가를 지은 영가현각 스님도 법의 나무 가지에서 열린 가장 큰 열매 중의 하나였었다. 이제 6조의 의발 전수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선불교라는 나무에서 이제는 무성하게 많은 열매들이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늘은여든 아홉 번째와 아흔 번째 구절

眞不立妄本空/  진불립망본공/ 참됨도 서지 못하고 망도 본래 공함이여

有無俱遣不空空/ 유무구견불공공/ 있음과 없을 다 버리니 공하지 않고 공하도다.

二十空門元不着/이십공문원불착/ 이십공문에 원래 집착하지 않으니

一性如來體自同/일성여래체자동/ 한 성품 여래의 본체와 저절로 같도다.


불교는 중도(中道)를 강조한다. 참된 것을 추구하지만 참됨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망상을 싫어 하지만 망상을 또 버리지도 않는다.  참됨과 망상이란 양극단에 치우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어쩡쩡한 가운데를 고수하는 것은 중도가 아니다. 중도는 양변이 모두 공()함을 알기에 양극단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중도란 무척 어렵다. 분명히 다시 말하지만 중도는 가운데로 가는 길이 아니다. 가운데 중()과 길 도()가 합쳐진 단어가 중도라 하여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다. 중도는 양극단이 공함을 알기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참되면서도 참되지 않으며, 망상을 꺼리지만 또한 버리지도 않는다.

()은 비어 있지만 꽉 찬, 텅 빈 충만이다. 무엇이라고 고집하지 않는다. 인연에 따라 형성될 뿐이다. 마치 원자와 전자가 만나서 하나의 분자를 이루고, 그 분자가 모여 물질로 형성되었다가 다시 인연에 따라 흩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한 것을 성품의 작용이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성품의 작용이 바로 여래의 본체, 즉 불성이라고 영가스님은 밝혔다.


<일일 소견>

집착은 왜 생기나요? 알지 못하니까 생기지. 그럼 왜 알지 못하나요? 스스로가 업식에 끄달리니까 알지 못하지. 그럼 왜 업식에 끄달리나요? 생사에 메이니까 그렇지. 그럼 생사는 어떻게 벗어나는 건가요? 그래, 생사를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를 참구해야 한다. 생사가 어디에 있는가? 이 자리에 있다. 숨을 쉬면 생이고 숨이 끊어지면 사다. 생명이 있는 한 생사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업을 짓는다.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럼 먹고 사는 것을 벗어나려면. 죽어야 하는가? 그래서 옛 선사들은 무문관(無門關)에 들어섰다. 문 없는 문으로 들어 가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5314

오늘의정진: 法東流入此土/  법동류입차토/ 법이 동쪽으로 흘러 이 땅에 들어와서는


- 100일 정진, 79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여든 다섯 번째와 여든 여섯 번째 구절은

<建法幢立宗旨/  건법당입종지/ 법의 깃발 세우고 종지를 일으킴이여

明明佛勅曹溪是/ 명명불칙조계시/ 밝고 밝은 부처님 법 조계에서 이었도다

第一迦葉首傳燈/ 제일가섭수전등/ 첫 번째로 가섭이 맨 먼저 불법의 등불을 전하니

二十八代西天記/이십팔대서천기/ 이십 팔대는 서천의 기록이로다> 였다.


마하가섭존자(摩訶迦葉尊者)가 인도에서 초조가 된 배경에는 삼처전심(三處傳心)이란 일화가 전해져 온다. 삼처전심이란 부처님의 마음을 세 가지 장소에서 이어받았다는 뜻이다.  

첫번째가 다자탑(多子塔)에서, 두번째가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세번째가 사라쌍수하(沙羅雙樹河)라는 장소들이다. 각각의 장소는 마하가섭존자가 왜 부처님의 법을 이어받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 중 가장 알려진 것은 영산회상에서 있었던 염화시중(拈華示衆), 염화미소(拈花微笑) 일화가 있다. 영산회상에서 부처님께서 대중들을 향해 가만히 연꽃을 들어 올려 보이자 오직 가섭존자만 그 뜻을 알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가장 대표적인 일화로 통한다. 그렇게 마하가섭은 부처님 열반 후 초조(初祖),즉 제1대가 되어 28대 보리달마(菩提達磨)에게 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오늘은 여든 일곱 번째와 여든 여덟 번째 구절

法東流入此土/  법동류입차토/ 법이 동쪽으로 흘러 이 땅에 들어와서는

菩提達磨委初祖/ 보리달마위초조/ 보리달마가 첫 조사가 되었도다.

六代傳衣天下聞/ 육대전의천하문/ 육대가 의발을 전한 일 천하에 소문 났고

後人得道何窮數/후인득도하궁수/ 뒷사람이 도 얻음을 어찌 다 헤아리라


서기 약 6세기경, 달마대사에 의해 불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즉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왔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1889~1975) 20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동양의 불교가 서양으로 넘어 간일' 이라고 언급을 한 적이 있다.  그럼 6세기경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온 불교와 20세기 동양에서 서양으로 넘어간 불교는 같은 종교일까? 부처님 열반 후 약 1000년의 시간이 지나 중국으로 간 불교와 그리고 다시 그 시점에서 약 1500년이 지나서 서양으로 간 불교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선 선()으로 변했고, 동양의 선은 서양에서는 명상(冥想)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그 겉 모습은 달라졌을지언정 그 본질은 달라 지지 않았다. 그 본질은 깨달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 깨달음을 사람들은 바로 도()라고 부른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즉 노자는 '도를 도라고 부르면 도가 아니다' 라고 했지만 도는 도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보리달마가 중국에서 초조로 추대되고 불법은 숭산 소림사(少林寺)에서 2조 혜가에게로 전해졌다그리고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 그리고 6대조에 이르러 혜능(慧能)에게까지 전해졌다.

의발(衣鉢)은 부처님 당시에 세존이 걸치셨던 가사와 탁발에 쓰였던 바루 그릇을 말한다. 의발은 불법이 전승되어지는 법의 상징물로 쓰였다. 마침내 그 의발이 혜능에게까지 넘어 왔다. 혜능 이후 불법을 통해 도를 얻는 사람들이 무수히 생기기 시작했다.  아직은 상법시대이기 때문이라.


<일일 소견>

의발을 전수 하노라. 무엇에 쓰는 건가요? 입고 먹는데 써라. 필요 없는데요. 그래도 받아라. 주시겠다면하지만 쓸 일은 없을 겁니다. ? 법은 의발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럼 알아서 해라. 전 불에 태울 랍니다. 활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5313

오늘의정진: 建法幢立宗旨/  건법당입종지/ 법의 깃발 세우고 종지를 일으킴이여


- 100일 정진, 78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여든 세 번째와 여든 네 번째 구절은

<或是或非人不識/  혹시혹비인불식/ 혹은 옳고 혹은 그릇됨을 사람은 알지 못하고

逆行順行天莫測/ 역행순행천막측/ 역행, 순행은 하늘도 헤아리지 못함이여

吾早曾經多劫修/ 오조증경다겁수/ 내 일찍이 많은 겁을 지나며 수행했나니

不是等閑相狂惑 /불시등한상광혹/ 부질없이 서로 속여 미혹케 함이 아니로다> 였다.


'혹시'가 한자어(漢子語)였음을 증도가를 보면서 알았다. '' 이란 명확하지 않고 확실한 상태가 아니다. 미혹(迷惑)이란 뜻도 어찌보면 확실하고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 하는 것이다. 즉 혹()과 마음()이 합쳐졌다

달리 생각하면 '혹시'는 가능성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 혹은 저것의 선택을 앞둔 방황이면서 동시에 선택에 대한 가능성이기도 하다. 즉, 방황과 가능성을 함께 포함했다. 우리 앞의 미래는 여전히 '' 한 상태이다. 이렇게 될 수도, 저렇게 될 수도, 나는 물론 하늘조차도 예측하지 못한다. 수 없는 생을 육도 윤회로 돌면서도 내가 다음 생에 어디로 갈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의 미혹이란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가능성을 지닌 존재들 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해진 운명이란 없는 것이다.


오늘은 여든 다섯 번째와 여든 여섯 번째 구절

建法幢立宗旨/  건법당입종지/ 법의 깃발 세우고 종지를 일으킴이여

明明佛勅曹溪是/ 명명불칙조계시/ 밝고 밝은 부처님 법 조계에서 이었도다

第一迦葉首傳燈/ 제일가섭수전등/ 첫 번째로 가섭이 맨 먼저 불법의 등불을 전하니

二十八代西天記/이십팔대서천기/ 이십 팔대는 서천의 기록이로다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 이후 40여년간 가르침을 펼치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에 열반에 드셨다. 붓다가 열반을 앞두고 자신의 가르침이 앞으로 3가지 시대를 맞이하게 되리라 예언하였다. 첫번째 시대는 정법시대(正法時代)로 붓다의 열반이후 약 500~1000년간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는 붓다가 열반에 드신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로 붓다의 가르침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많은 수행자들이 깨달음에 이르는 시기라고 하였다

두번째 시대는 상법시대(像法時代)로 정법시대 이후 500~1000년 간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정법시대 만큼 불법이 남아 있지만 깨닫는 이가 적다고 하셨다. 마지막은 말법시대(末法時代)를 맞이 하게 되는데 붓다의 가르침은 그저 껍데기만 남았고 수행을 해서 깨닫는 자는 거의 없는 시대가 된다고 하였다.

붓다의 열반 이후 수제자 마하가섭이 붓다의 법을 받아 초조(初祖)가 되어 불법을 계승하였다

그 후 상법시대로 접어들게 되면서 불법은 인도에서 쇠퇴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28대조 달마대사에 이르러서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법의 계승(繼承) 혹은 전승(傳承)을 전등(傳燈)이라고 부른다

불법은 어두운 밤길을 걷는데 꼭 필요한 등불과 같다는 의미로 등불이 꺼지지 않게 대대로 전승되어졌다이렇게 불법은 초조 마하가섭 존자를 시작으로 달마대사를 거쳐 조계산의 육조혜능에게 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것이 인도에서 28대조 달마대사가 중국에서 초조로 불리게 배경이다.


<일일 소견>

정말로 아무 생각이 없다가 문득 떠오르면서 이해가 되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 순간이 오기 까지는 보아도 본 것이 아니고, 들어도 들은 것이 아니었다. 눈 뜬 장님이었고, 귀 있는 귀머거리였을 뿐이다.

이제야 비로소 보여지고, 들려져야 제대로 보는 것이고 제대로 듣는 것임을 알았다

미혹에서 분명으로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잉크냄새 2025-03-14 1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혹시‘가 한자어였군요. 혹에서 느껴지는 그 미묘한 떨림은 나침반의 바늘에서 느껴지는 떨림과 통하는 것 같습니다. 방황과 가능성을 동시에 내포한 그 떨림이 멈추지 않는 한 방향을 잃을 일이 없을 것입니다.

마힐 2025-03-14 22:56   좋아요 0 | URL
정말 듣고 보니 그렇네요. 미묘한 떨림과 같은 나침반의 바늘이 ‘혹‘ 이라는 비유 정말 좋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은 나침반이었군요. 언제나 떨림은 있지만 그 떨리는 바늘이 우리의 갈 방향을 알려주는 거였네요. 아니 떨림이 있어야 되는 거였네요. 깨우침 감사 합니다. 잉크냄새님!
 

<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5312

오늘의정진: 或是或非人不識/  혹시혹비인불식/ 혹은 옳고 혹은 그릇됨을 사람은 알지 못하고


- 100일 정진, 77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여든 한 번째와 여든 두 번째 구절은

<默時說說時默/  묵시설설시묵/ 말 없을 때 말하고 말할 때 말 없음이여

大施門開無壅塞/ 대시문개무옹색 / 크게 베푸는 문을 열으니 옹색함(막고 또 막음)이 없다

有人問我解何宗/ 유인문아해하종/ 누가 나에게 무슨 종취를 이해하냐고 묻는 다면

報道摩訶般若力 /보도마하반야력/ 마하반야바라밀의 힘이라고 대답하리라> 였다.


마하반야밀이란 무엇인가? 바로  대지혜(大智慧) 와 대자비(大慈悲) 이다. 선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이며 그 깨달음이란 바로 대지혜와 대자비를 구하는 것이다. 선불교가 부처님께서 전해주신 가르침이 아님에도 불교로 인정 받을 수 있는 것은 궁극의 깨달음이 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교의 본질이 바로 지혜와 자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고의 지혜는 말이 없는 가운데 있고, 최고의 자비는 무차별(無差別)에 있다. 머무름이 없고 상이 없는 가운데 이루어지므로 무주무상(無住無相)이다.

이것이 바로 마하반야바라밀의 힘이다.


오늘은 여든 세 번째와 여든 네 번째 구절

或是或非人不識/  혹시혹비인불식/ 혹은 옳고 혹은 그릇됨을 사람은 알지 못하고

逆行順行天莫測/ 역행순행천막측/ 역행, 순행은 하늘도 헤아리지 못함이여

吾早曾經多劫修/ 오조증경다겁수/ 내 일찍이 많은 겁을 지나며 수행했나니

不是等閑相狂惑 /불시등한상광혹/ 부질없이 서로 속여 미혹케 함이 아니로다.


시비에 휘말리고, 분별에 미혹되는 것이 보통 중생들의 일상이다. 항상 자신이 무얼 하는지도 모르고 살고 있다. 과거 미래 현재, 삼세를 통털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살아왔던 것이다.

윤회의 수레바퀴 안에서 얼마나 많은 생을 그렇게 돌고 돌며 또 돌아왔던 것일까

지옥에서 부터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차원을 자신도 모르게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했던 것일까? 모든 업은 분별에서 생겨난다. 미혹하기 때문이다. 미혹은 밝고 투명하지 않게 만든다. 수행은 밝고 투명해야 한다. 그래서 청정함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수행자의 청정은 바다와 같아서 온갖 물을 받아들인다고 선지식들 께서는 일찍이 말씀하셨다. 바닷물은 맑고 깨끗한 청수든, 하수구의 오염된 물이든, 정화조의 똥물까지도 받아들인다. 세상의 모든 물은 결국 바다로 흘러 들어 간다. 바다는 세상의 모든 물을 받아들이고 온갖 생명이 잉태하는 곳이다. 생명의 기원이자 종착점이다

그렇게 보면 밝고 투명한 것 만이 청정이 아니라는 말씀이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육도 윤회 또한 어쩌면 수행의 방편이지 않을까

육도 윤회 끝에 결국엔 깨달음의 바다에 이르게 될 것이란 뜻이다. 지옥고에 허덕이는 것도 수행이고, 짐승 같은 삶을 살아도 수행이 되고, 맨날 싸움만 일쌈는 아수라 같은 삶도 수행이 되고, 인간과 천상에서 삶 또한 수행이 되는 것이다

미혹은 어쩌면 우리의 모든 삶이 수행인줄 모르고 사는 것이 아닐까?


<일일 소견>

수행이 힘든 것이 뜬 구름을 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깨달음이란 실체를 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잡으려 하지 말자. 그냥 지켜만 보자

지켜보기가 수행의 시작이다. 그래서 수행은 견()이고 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