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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55일차

<契心平等/계심평등/마음이 계합하여 평등케 되어 지고

 所作俱息/소작구식/짓는 바가 함께 쉬도다 >

 

내가 부모로 부터 잉태되어 태어나기 이전을 선가에서는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이라고 한다.

그리고 바로 본성을 뜻하는 본래면목(本來面目) 붙여서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이란 화두가 하나 생겨난다.

부모로 부터 태어나기 이전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화두가 선가에서 기록된 최초의 일화는 향엄스님으로 부터이다.

(香嚴, ?~898)스님이 스승인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에게 강하게 전해 받은 화두이다.

향엄의 화두는 먹고, 잠 자고, 똥을 싸는 생활의 모든 면에서 잠시도 떠나질 않았다.

그러다 청소하다가 무심코 던진 기왓장이 대나무에 맞아  하는 소리에 화두를 타파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부모로 부터 태어나기 이전 나는 누구인가.

본래면목이라 불리는 나의 본성은 어떤 것인가.

불성. 부처의 성품.

나의 모습이 부처의 성품이라면 나는 아직 부처인지 자각하지 못하는가.

자신의 성품이 본래 부처임을 아는 .

그것은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부터 있어왔던 성품이며, 나라는 껍데기가 사라져도 남을 존재이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어쩌면 모습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이 것이다.

 

본래면목이란 나라는 존재를 생생히 느끼는 오감과 의식이 사라져도 여전히 남아 있을 본래 모습이다.

나의 본래 모습이 부처의 성품임을 여실히 알게 되는 것이 화두에 대한 그럴듯한 답이 된다.

그러나 이건 알음알이 설명에 불과하다.

진짜로 몸소 체득하여야 된다.

맛을 봐야 맛을 아는 것과 같다.

마음이 부처요.

성품이 바로 부처요.

아무리 먼저 깨달은 스승들께서 말씀을 하셨어도, 내가 아직 체험하지 못하면 전부 소용없다.

나는 누구인가.

다시 한번 내려가 보자

 

구경궁극(究竟窮極) 구경하고 궁극하여

부존궤칙(不存軌則)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음이요

계심평등(契心平等) 마음이 계합하여 평등케 되어 지고

소작구식(所作俱息) 짓는 바가 함께 쉬도다

 

마음의 심연에 끝까지 도달 본래면목 자리에서는 이상 어떤 법칙도 필요없다.

또한 평등한 마음 자리에서는 무언가를 행해도 걸림없다.

이미 한다는 마음 ()  쉬어져 있기 때문이라.

다시 아래에 놓을 뿐이다.

 

 

: 契心:  맺을 , 마음 심: 마음이 맺어져, 즉 마음이 계합되어

平等:  평평할 , 같을 등: 평등하게 되다

所作: , 지을 작: 짓는 바가, 즉 하는 바가

俱息: 함께 , 쉴 식 : 함께 쉬어진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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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54일차

<究竟窮極/구경궁극/구경하고 궁극하여

不存軌則/부존궤칙/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음이요 >

 

나는 누구 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먼저 여러가지 단서를 살펴보기로 했다.

인간은 태어나면 죽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태어났으나 죽지 않고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

육체를 지녔기 때문에 반드시 생명이 다하는 순간 육체를 버리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그럼 육체를 잉태 시킨 어머니 속에서 10달간 자란 육체를 지닌 인간이 태어나면 먼저 행하는 일이 있다.

어머니 자궁을 찢고 나와 세상을 마주하는 인간의  번째 행위는 바로 울음이다.

모든 인간의 태어남은 울음에서 시작한다.

울음은 소리다.

가날픈 인간 아이의 울음 소리는 슬픔일까, 기쁨일까.

삶의 시작이 울음이라면 울음의 의미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처럼, 우리에게도 태초에 울음이 있었다.

천지창조가 이루어졌듯이 우리에게도 각자 세계의 창조를 이루게 된다.

인간이라면 이러한 과정을 거침에 예외는 없다.

첫번째, 단서다.

그렇다면 소리가 시작이라면 마지막은 침묵인가.

죽음은 침묵이다.

두번째, 단서다.

시작과 끝은 소리와 침묵임을 확인했다.

 

구경궁극(究竟窮極) 구경하고 궁극하여

부존궤칙(不存軌則)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음이요

 

구경이란 현대 중국어에서 크게 두가지 뜻이 있다.

끝까지 도대체  뜻으로 문장의 상황에 따라 사용한다.

그런데 의미가 서로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도대체 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또 다른 단어를 한자로‘到底(dàodǐ: 따오디)  라고 쓴다.

글자는 이를  () () 로 이루어 졌다.

바닥에 이를 정도 까지 내려가 도달하는 것이 도대체  뜻을 만들어 낸다.

그렇다면 끝까지 도대체  서로 같은 의미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경이란 어떠한 경지가 끝까지  상태를 말한다.

 

불교에서 구경각(究竟覺) 수행이 완성되어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할 사용한다.

깨달음 중에서도 끝까지  것이다.

궁극 또한 구경과 같은 경지다. 끝까지 가서 더 이상 갈 데도 없다.

구경과 궁극은 모든 경지의 마지막 끝맺음이다.

이를 테면 정상에 이르렀다면 다시 오를 정상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정상 꼭대기에 이루면 동안 올라왔던 모든 길이 모든 도가 하나로 모여지는 것을 경험한 셈이다.

내가 오르는 길이 남들이 오른 길과 다를지언정, 그 꼭대기에선 결국 하나로 만난 게 된다.

꼭대기에 이르면 동안 모든 길들의 의미가 서로 다를까.

그건 꼭대기에 이른 사람만이 있으리.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 究竟:  궁구할 , 끝낼 경: 끝내 궁구하여

窮極:  다할 , 지극할 극: 다하고 지극하면

不存: 아닐 , 있을 존: 있지 않음이여

軌則:  , 법 칙 : 일정한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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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53일차

<兩旣不成/양기불성/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하거니  

一何有爾/일하유이/하나인들 어찌 있을건가>

 

우리에게 어느 누가 당신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보통 이름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름은 단지 편의상 부르는 라벨일뿐 실제 나를 온전히 나타내지는 못한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 타인에게 설명할 때는 이름 외에 성별, 나이, 직업 같은 표면적인 특성 뿐만 아니라 나의 드러나지 않는 성향까지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샅샅이 남에게 설명한다 해도, 여전히 나라는 존재를 상대는 가늠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자신에 대해 타인에게 아무리 이해 시켜려고 해도, 타인은 결코 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아닌 이상 누구도 나를 정확히 없다.

나는 오직 나를 통해서만 나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타인이 이해하는 나는 오직 타인의 의식에서만 존재하지, 실제 나와는 전혀 다르다.

그렇다면 나는 나를 타인 보다 알 수 있을까.

어쩌면 나도 나를 알지 못하고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지동무동(止動無動) 그치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없고   

동지무지(動止無止) 움직이면서 그치니 그침이 없나니

양기불성(兩旣不成)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하거니  

일하유이(一何有爾) 하나인들 어찌 있을건가

 

나의 이름은 내가 아니라면, 나의 육체가 나 인가.

육체가 나라고 한다면, 내 육체는 어디서 왔는가.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나를 형성 시켰으니, 나는 부모의 것인가.

그럼 부모에게서 나온 나는 부모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육체가 아니라면, 내 의식이 나인가.

그럼 의식은 언제 부터 나에게 있었을까.

엄마 뱃속에서 부터 잉태된 순간 부터 있어야 하는데, 그때 의식을 나는 기억하지도 못한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의식이 과연 나인가.

나는 과연 누구인가.

오늘의 질문은 인류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까지 풀어야 하는 수수께끼와 같다.

살아 있다면 움직이고, 움직이면 멈추는 순간이 온다.

멈추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해답을 알게 된다면, 살아 있는 동안의 의미는 무엇인가.

생명은 그렇게 삶과 죽음을 동시에 가진 존재이다.

삶과 죽음이 다르지만 결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둘이면서 하나이니 하나는 따로 홀로 있을 없다.

결국 나는 누구라고 확실히 답은 못하지만 태어남과 죽음을 경험하는 존재임은 확실할 것이다.

태어남과 죽음은 모든 생명있는 존재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 兩旣:   , 이미 기: 둘은 이미

不成:  아닐 , 이룰 성: 이루지 아니 하고

一何: 하나 , 어찌 하: 하나는 어찌하여

有爾: 있을 , 이것 이 : 이렇게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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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52일차

<止動無動 /지동무동/그치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없고   

動止無止/동지무지/움직이면서 그치니 그침이 없나니>

 

도를 언어로 말할 없기 때문에 일찍이 노자(老子) 도가도비상도(道可道 非常道)라고 남겼다.

그럼에도 우리는 도를 말로 나타내려고 하는 () 범한다.

이렇게 글로 도에 대해 설명해도, 그건 도가 아니다.

도가 어떻다고 묘사를 한들 그건 도의 그림자를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그림자는 본체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림자가 본체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단지 그림자는 본체가 실제로 있음을 알려주는 표식에 불과한데...

그림자는 실체를 비추는 빛에 따라 늘어나기도 하고 줄기도 한다.

그럼으로 그림자로는 절대로 본체가 어떤 것인지는 하나도 설명이 되 질 않는다.

말이나 글은 항상 그렇다.

누군가 말과 글로 진리를 이해했다고 한다면, 그는 진리의 그림자를 밟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진리는 고정된 무엇이 아니다.

고정된 무엇이라 확정 짓는다면 이미 그것은 무엇이 아닌 것이 된다.

그래서 그친다고 하면 움직인 것이 되고

움직인다고 하면 그친 것이 된다.

돌아가는 팽이가 고정되어 있던가.

그침도 없고, 움직임도 없는 그 본체는 과연 무엇인가.


 

지동무동(止動無動) 그치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없고   

동지무지(動止無止) 움직이면서 그치니 그침이 없나니

우리는 달을 가르키는 남의 가락만 보고 있다.

달을 보는데 손가락은 필요 없다.

스스로 고개를 들어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 봐야 한다.

달은 자리에 있던가.

모양으로 고정되어 있던가.

달이 변하고 있다면서 나는 변하지 않는가.

정월 이틀, 달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고 달이 없다고 할 수 있나.

손가락은 치워라. 

 

: 止動:  그칠 , 움직일 동: 그치고 움직이니

無動:  없을 , 움직일 동: 움직임이 없다.

動止: 움직일 , 그칠 지: 움직이고 그치니

無止: 없을 , 그칠 지 : 그침이 없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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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51일차

<泯其所以/민기소이/ 까닭을 없이 하여  

不可方比/불가방비/견주어 비할바가 없음이라>

 

() 이란 글자를 풀어보면 새(: ) (:  ) 사이에서 주둥이 (口: 입구) 쪼으며 보는(:볼 견) 것이다.

새가 부리로 먹이를 쪼으려면 먹이가 보여야 한다.

() 보려는 의지가 아니라, 보여지는 것이다.

새가 먹이를 구하는 수단은 주둥이 부리이지만 부리가 아무렇게나 쪼을 수는 없다.

먹이가 보여야 한다.

그래서 관이란 능동과 수동이 함께 작용하는 행이다.

() 수동적으로 보여지는 , 간() 보고자 노력하는 능동이라면 () 보여지는 것을 더욱 깊이 세밀히 보려는 의지가 포함된 것이 아닐까.

마음 공부에서 견이나, 간이라 하지 않고 관한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좀 더 세심한 의지 작용이 들어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새에게 먹이를 구함은 생존이다.

새의 주둥이는 생존의 도구이다. 죽지 않기 위해 온 부리에 집중해 먹이를 쪼아 먹어야 한다.

수행자에게 관은 바로 집중을 다해 깊이 몰입해야 하는 새의 부리와 같다.

안의 마음 속에 담겨진 많은 먹이들을 쪼고 쪼아야 한다.

결국 관한다 함은 바로 수행자에게는 치열한 부림의 수행이다.

그러나 관은 내가 보려고만 해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먼저 마음의 형상이 스스로 보여져야한다.

그것은 의지만으로는 도달할 없다.

그래서 어렵다.

만법제관(萬法齊觀) 만법이 현전함에  

귀복자연(歸復自然) 돌아감이 자연스럽도다

민기소이(泯其所以) 까닭을 없이 하여  

불가방비(不可方比) 견주어 비할바가 없음이라

 

신심명의  구절은 관의 깊이에서 돌아가는 도리를 말하고 있다.

만법을 모두 관할 있는 경지라면 어떤 것도 비교할 수도 없다.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서만 뿐이다.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즉 깨친 경지에서만 있을 다른 경계로 없다.

깨달음은 구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구한다고 얻을 수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깨달음이 찾아와야 한다.

그렇다고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면 될까.

오직 ...

 

: 泯其:  면할 , 그 기: 그것을 면하여

所以:   , 까닭 이: 까닭을  즉, 이유를

不可: 아닐 , 가히 가: 가히 아니다.

方比:  , 견줄 비 : 견주어 비하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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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26-02-18 1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마히님, 한자는 참으로 심오한 글자입니다. 말씀해주신 뜻을 읽으니 도저히 한자를 멀리할 수가 없군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한 해도 건강하십시요 마힐님~!!

마힐 2026-02-18 22:09   좋아요 1 | URL
차트랑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인사가 조금 늦었습니다. ㅎㅎ
한자가 뜻 글자이다 보니 그 한자 한자에 담긴 뜻을 그 옛날 먹고 사느라 다 배우지 못한 단점이 오히려 계층화를 유발해버렸네요.
또 한자는 글자 속에 담긴 뜻을 깨우쳐야 하다 보니 뭔가 우월 의식도 생긴 것 같고요.
그럼에도 한자의 가장 큰 공로는 한글 탄생의 직접적 원인이 된 것은 인정해야죠.
한자가 없었다면 우리의 위대한 한글도 탄생하지 못했겠죠. ㅎㅎ
그래서 한자는 좀 피곤한 글자죠. 애증의 담긴... ㅎㅎ
차트랑님, 남은 연휴 편안하시길 바랍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