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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10일차

<莫逐有緣/막출유연 /세간의 인연도 따라가지 말고

勿住空忍 /물주공인/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말라>

 

어제 인간의 진화는 본능이 주도했는지, 아니면 본성이 주도 했는지 질문을 삼았다.

이제 그럼 과연 세상은 창조가 먼저 일까 아니면 진화가 먼저 일까?

이것은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와 같은 구조의 문제가 아닐까?

또한 *돈오(頓悟) 점수(漸修) 논쟁도 이와 같다.

심신명은 이러한 구조에 대해 취하고 버리는 취사심과 간택심, 분별심으로 답하고 있다.

창조론과 진화론 어느 것이 맞냐, 틀리냐의 문제가 아니란 것이다.

 

양유취사(良由取捨) 취하고 버림을 말미암아

소이불여(所以不如) 그래서 여여치 못하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 것인가?

여여(如如) 마음을 얻기 위해서 취하고 버리는 간택심, 취사심, 분별심이 옳은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이 망설여진다면 결국 여여하지 못한 것이다.

옳다, 그르다  메여서는 마디도 놓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막출유연(莫逐有緣)세간의 인연도 따라가지 말고

물주공인(勿住空忍)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말라

 

모든 생명의 시작은 창조이면서 진화가 아닐까?

0과 1이 인공지능의 시작이며 진화인 것과 같은 도리다.

단박에 얻는 깨달음과 점진적 깨달음이 서로 다른 것인가?

무상하고 덧없는 , 깨달음을 통해 구원을 얻어야 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깨닫기 위해 속세를 벗어 나는 것이 바른 것인가?

깨달음이나 도를 얻기 위해서 세속의 모든 것을 버려야만 하는 것인가?

반대로 먹고 살기도 팍팍한데 무슨 도며 깨달음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럼 물질적인 부의 축척과 명예를 얻는 것만이 세속의 성공인가?

*세간(世間) 출세간(出世間) 서로 다른 것인가?

신심명은 여전히 분별심, 간택심, 취사심의 변주(變奏) 들려주고 있다.

어느 것이 맞다고 하는 순간, 이미 우리는 또 다른 그릇된 견해를 가지게 된다.

옴짝 달싹 못하게 하는 그물을 다신 , 승찬대사는 우리를 옭아매고 있다.

과연 어떻게 해야 빠져 나올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답은 과연 있기나 건가?

 

:莫逐: 없을 , 쫓을 축 : ~말미 암아

有緣: 있을 , 인연 연: 취하고 버림을 .

勿住:  , 머무를 주: ~ 에 머무르지 말라

空忍: , 참을 인:  공한 상태에 머물고자 안간 힘을 쓰며 참는 것. 즉 공함에 집착하는 것을 뜻함.

*頓悟: 단번에 , 깨달을 오, 漸修: 서서히 , 닦을 수: 깨달음에 대한 논쟁에 쓰이는 방식, 단박에 깨닫는가? 점차적으로 수행을 통해 깨닫는냐에 대한 논쟁에 빠지지 않는다.

*世間:세상 , 사이 간, 出世間: 나갈 , 세상 세, 사이 : 세간은 유위법 혹은 물직적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 세상을 뜻하고, 출세간은 물질계가 아닌 무위법 즉 정신세계를 살아가는 세상을 뜻한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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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9일차

<良由取捨 /양유취사/취하고 버림을 말미암아

所以不如/소이불여/그래서 여여치 못하다>

 

虛心者福矣, 허심자는 복의라.

마음이 허함은 가난함이 아니요. 오히려 충만한 믿음의 밭이라.

믿음의 밭이 충만한 , 하늘 복이 영글어 지리니

복이란, 물질적인 행운이 아닌, 영생(永生) 얻음이라.

 

본래 (道) 나고 죽음도 없는 불생불사(不生不死)라고 한다.

영생이란 것도 남이 없으니(不生) 죽을 것도 없음(不死) 영생(永生)이라 것이다.

원동태허(圓同太虛) 둥글기가  허공과 같아

무흠무여(無欠無餘)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

이를 믿고 따르는 신심자(信心 바로 허심자(虛心者) 아닐까?

신심명과 마태 복음과 만나는 순간이었다.

 

양유취사(良由取捨) 취하고 버림을 말미암아

소이불여(所以不如)그래서 여여치 못하다

취하고 버리는 취사심(取捨), 골라서 선택하는 간택심揀擇心), 구분하고 의심하는 분별심(分别心)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구분 짓고, 단정하고, 의심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분별하는 마음의 지배를 받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별, 취사, 간택하는 마음이 없다면 인류가 지금까지 진화를 거듭하며 생존 해왔을 수 있었을까?

원시시대부터 우리는 아주 작은 소리에도, 조그만 흔적에도 긴장하고 놀라며 투쟁해왔다.

그것으로 생존해 왔고 당연히 우리의 뇌구조를 비롯한 몸의 기능까지 진화해 셈이다.

그러나 마음 또한 그렇게 진화해 왔을까?

마음은 뇌하고는 다른 진화의 여정이 아니었을까?

 

어느 순간 우리의 마음은 본능이 아닌 또한 분명 이성도 아닌 영역임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여여한 자리가 마음의 본성이란 것을 마침내 알아낸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와 몸의 구속에서 벗어난 마음이란 다른 영역을 밝힌 .

사람이 바로 붓다였다.

그리고 그가 밝힌 마음의 불은 꺼지지 않고 시대를 거듭하며 아주 소수의 믿는 자들에 의해 전등(傳燈)되어져 왔다.

승찬대사가 전하는 신심명 또한 꺼지지 않는 불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의 본능과 본성이 엄연히 다르지만 또한 분별할 것인가?

본능(本能) 본성(本性), 어느 것이 진화의 주역일까?

 

*여여(如如) 마음 자리만 뿐이다.

:良由: 어질 , 말미 암을 유 : ~말미 암아

取捨: 취할 , 버릴 사: 취하고 버림을 .

所以:  , 써 이: ~ 까닭에 , 현대 중국어에서는 그래서 라는 뜻으로 쓰인다.

不如:아닐 , 같을 여:  같지 않다. 즉 여여(如如)하지 못하다. 현대 중국어에서는 ~만 못하다 라는 뜻으로 쓰인다.

*如如: 같을 , 같을 여: 같고 같다는 한결 같다는 뜻이 된다. 모든 것은 고정됨이 없이 변하는데 늘 한결 같다면 그것이 진리가 아닐까?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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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8일차

<圓同太虛 /원동태허/둥글기가  허공과 같아

無欠無餘/무흠무여/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

 

고요함에 집착하면 현지(玄旨) 영원히 길이 없어진다.

즉심즉불(卽心卽佛) 이든,  비심비불(非心非佛) 이든

마음이 바로 부처이든,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든, 마조가 했던 말이든 , 법상이 했던 말이든

이제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불식현지(不識玄旨),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도로염정(徒勞念靜), 공연히 고요한 생각만 하는구나.

 

이제 도를 닦는 곳이 고요한 속이 아니어도 상관 없다.

안의 마음이 시끄럽다면 어떤 고요한 환경도 소용이 없다.

소음으로 넘치는 대중교통 속에서, 분주한 마트 안에서, 아이들의 울음 소리 속에서, 아내의 끊임없는 잔소리 속에서, 그리고 내 안의 멈출줄 모르는 소리 속에서도 걸리지 않는다.

어디에서든 걸리지 않고 있음을 알았다.

수레를 끌려면 수레를 치는 것이 아니라 소를 쳐야 되기 때문이다.

안의 소에 코뚜레를 꿰어 끌고 가리라.

 

虛心者福矣(허심자복의).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의 한문 성경에서는 허심자복의 라로 쓴다.

허심(虛心) 이란 마음 아니고, 마음이 가난한   더욱 아니다.

()는 단순히 비어 있음이 아니다.

반야심경의 (空) 마찬가지로 단순히 비어 있음 말하는 것이 아니다.

허와 공은 눈으로 없는 작용의 상징이다.

공이 고정됨이 없는 작용을 상징하는 기호라면, 허 역시 고정되지 않는 틀을 상징하는 기호였던 것이다.

(道) 도리를 표현할 길이 없어서 기호를 썼을 뿐이다.

만약 도를 눈으로 있다고 가정한다면

둥근 원의 모양이 가장 적합할 것이고 크기가 너무나 크다고 가정한 것이다.

그게 실제 도는 전혀 아니지만, 도를 알지 못하는 범부(凡夫)에게 표현할 길이 그와 같이 밖에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원은 360도로 그 어디에도 모자라거나 남음이 없는 완벽한 체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원동태허(圓同太虛) 둥글기가  허공과 같아

무흠무여(無欠無餘)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

 

마음이 가난한 , 허심자(虛心者) 바로 道心(도의 마음 가진자다.

허심자는 마음이 물질적으로 가난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떠한 틀에도 고정되지 않는 마음을 지닌자.

그자가 바로 허심자 이다.

허심자에게 모자란 것이 있을 있겠는가?

허심자에게 남는 것이 있을 있겠는가?

너무나 완벽한 마음 자리에 넘치고 모자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신심명의 구절과 마태복음의 구절, 서로 다른 종교, 다른 배경이지만 같은 도리를 나타냈다고 보는 것은 나만의 비약일까?



:圓同: 둥글 , 같을 동 : 둥글기가 ~와 같다.  둥글다는 마음 자리, 깨달음, 도를 상징한다.

太虛:  , 빌 허: 태허는 단순히 크게 비어있다 뜻보다 깊다. 비어있으면서 크다. 비어 있기에 걸림이 없다.

無欠: 없을 , 하품 흠: 흠이 없음이란 영어의 perfet와 같다. 원래 ()은 하품하다와 빚을 지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빚을 진 상태가 흠이란 것이다. 현대 중국어에서 欠(qian 치엔)은 빚지다 쓰인다.

無餘:없을 , 남을 여:  남을 것이 없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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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7일차

<不識玄旨 /불식현지/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徒勞念靜/도로염정/공연히 고요한 생각만 하는구나>

 

시끄럽고 번잡한 속세를 벗어나, 남들의 방해를 받지 않는 한적한 숲속의 바위 위에 앉는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산들 바람 소리, 지저귀는 새 소리, 눈 앞의 졸졸졸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

고요한 소리속에 묻혀 있는 , 이제 곧 깨달음을 이룰 것만 같다.

마조(馬祖) 되기 , 도일(道一)은 아마 이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과연 속세를 벗어난 곳에만 도가 있는 것인가?

과연 고요한 마음 속에만 도가 있을까?

마음은 언제나 고요함 속에서만 머물러야 하는가?

만일 고요함이 시끄러움으로 변한다면 나의 도는 여전히 있는가?

만일 마음이 번거로와 지게 되면 도는 어찌 되는가?

고요함이 사라지면 마음(心), (), 깨달음 모두 사라지는가?

 

이러한 의문에 승찬(僧璨 ?~606) 대사는 일갈(一喝) 한다.

불식현지(不識玄旨),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도로염정(徒勞念靜), 공연히 고요한 생각만 하는구나.

 

도일의 좌선은 고요함이란 모습에만 집착했다.

스승 회양이 옆에서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드는 것과 다름 없는 행위였다.

소를 치지 못하고 달구지만 치는 것에 불과 했다.

우리는 여전히 현지(玄旨) 알지 못하고 모습에만 빠져 버린다.

껍데기만 구한다면 이미 도나 깨달음은 건너 갔다.

즉심즉불(卽心卽佛) 무너지는 순간이다.

부처는 형상이 아니요, 소리도 아니다. 마음도 아니었다.

비심비불(非心非佛).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도리로 넘어선다.

도일(道一) 마조(馬祖) 되는 순간이다.

이제는 따를 것도 거스릴 것도 없다.

고요함이든 시끄럽든 번거로움이든 걸릴 것이 없다.

마조의 발굽은 천하를 향해 박차고 달린다.

승찬 대사의 글은 살아 있는 말로 변했다.

이제 누구나 마조의 말에 올라 있게 되었다.

 

 

:不識: 아닐 ,  : ~을 알지 못하다

玄旨: 검을 , 알 지: 일반적으로 안다는 뜻의     쓰이지만 여기서는 안다는 뜻은 비교적 깊이 있는 앎이다.  깊이가 너무나 깊어서 검을 정도라면 얼마나 깊이 있는 앎인가. 현지는 깊은 앎이다.

徒勞: 무리 , 일할 로: 아무리 일해도, 즉 아무리 해도, 도로아미타불과 같은 형국이 되어 버린다..念靜:생각할 , 고요할 정:  고요하게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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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6-01-05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속세를 떠나거나 고요함 속에서만 정진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지금 있는 자리에서 걸릴 것이 없는 게 최선의 도인데 역시나 이루기 힘드니 정진은 언제나 어려운 숙제입니다.
마힐님, 100일 수행 잘 마무리 하시고
올해도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 되시길 기원드립니다^^

마힐 2026-01-05 15:02   좋아요 1 | URL
페넬로페님의 격려 감사합니다.
저 역시 페넬로페님의 독서 정진도 꼭 원만히 이루어지시길 기원드릴께요. ^^
 

- 다시, 100일 정진,  6일차

<違順相爭 /위순상쟁/어긋나고 따름이 서로 다투면,

是爲心病/시위심병/ 이는 마음의 병이 되나니>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든다고 했던 남악 회양(南岳懷讓, 677-744) 스님은 심즉불(心卽佛), 즉 마음이 부처라고 했다.

좌선에만 집착하는 도일(道一) 깨우치기 위해 스승 회양은 달구지를 것인가, 소를 칠 것이냐고 물었다.

말에 도일은 좌선이란 몸을 바르게 앉는다고 되는 것이 아님  깨달았다.

결국 도일은 마조(馬祖)라는 법명을 받고 선사(禪師) 되었다.

이후 *마조(馬祖)라는 이름대로 자신의 말의 발굽 아래 많은 제자들을 밟기 시작한다.

그에 발에 밟힌 제자들은 일어나 모두 자신만의 말을 타고 길을 달린다.

마조는 일갈(一喝)했다

즉심즉불(卽心卽佛), 즉 마음이 바로 곧 부처다. 

즉심즉불  마디에 그의 제자 법상(法常, 752839) 깨달음을 얻고 자신은 대매(大梅)산으로 들어가 숨어 버린다.

시간이 흘러 마조는 이제는 이상 즉심즉불’ 이라고 하질 않는다.

비심비불(非心非佛), 즉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라고 한다.

이에 대중들은 혼란을 겪는다.

전에는 마음이 부처라 했는데 이제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 하는가?

바로 여기서 하나의 화두가 생긴다.

비심비불(非心非佛),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부처인가?

마음이 부처라고 했던 마조는 비심비불,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 했는가?

 

앞의 구절 욕득현전(欲得現前), 바로 앞에 도가 나타나 보이길 바란다면

막존순역(莫存順逆) 따르고 거스리는 것에 걸리지 말라고 했다.

오늘은 여기에 다시 부연 설명이 추가된다.

위순상쟁(違順相爭) 어긋나고 따름이 서로 다툰다면,

시위심병(是爲心病) 이는 곧 마음의 병이 된다.

 

우리의 마음은 다툼의 연속이다. 마음은 대상을 좋아하고 싫어함에 늘 반응하여 따르거나 거스른다.

편안함을 추구하거나 , 꺼리는 마음을 추구한다면 그것이 바로 다툼이며, 곧 마음은 병을 얻게 된다.

승찬 스님은 우리의 마음이 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경계했다.

마음은 편향적이다. 하지만 그 편향된 마음에 고정되는 되는 것은 병을 유발한다고 보았다.

마조가 비심비불이라고 뜻은 바로 여기에서 단서를 잡을 있다.

 

대매산으로 들어간 제자 법상을 시험하기 위해 마조는 자신의 다른 제자를 보내 법상을 찾아 물어보라고 전했다.

스승께서는 이제 즉심즉불이라 하지 않으시고 비심비불 이라 하십니다.

즉심즉불(卽心卽佛)인가? 아니면 비심비불(非心非佛)인가?

무엇을 따르고 무엇을 거슬릴 것인가?  


 

:違順: 어길 , 따를 : 어기고 따름이

相爭: 서로 , 다툴 쟁:서로 다툰다면

是爲: 바를 , 할 위: 是는 중국어에서 ~이다 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하다, ~되다’의 뜻이 쓰였다.

心病:마음 , 병 병: 마음의 병

*마조도일(馬祖, 709~788),  6조 혜능에게서 이어지는 남악회양의 제자로 이미 혜능은 회양의 제자 중에 말 한마리가 나타나 천하를 짓 밟는 다고 예언한 바가 있다고 한다. 과연 그 예언 대로 마조의 문하에서 임제를 비롯한 깨달은 이가 수 없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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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2026-01-04 2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는 ‘붉은 말‘의 해라고 하네요.
씩씩한 말처럼 마힐님께서도 활발한 독서 활동 되시길 바랄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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