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017

관노트: 화양연화(花樣年華), 그 비극적 선율에 담긴 캄보디아.



치파오를 입은 여인의 허리 선이 움직일 때마다 울리는 구두소리, 말끔한 슈트를 입은 남자의 손 끝에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그 둘의 공간에서 흐르는 왈츠로 시작되는 선율. 그 뒤를 따라오는 현의 음에는 슬픔이 담긴 애절함이 있다. 왈츠의 음률과 닿을 듯 말 듯한 현의 음은 마치 두 남녀가 서로 닿을 듯 말 듯한 선을 지키듯, 한 음 한 음에는 서로 다른 감정이 돌고 있다

화양연화(花樣年華), 꽃처럼 아름다운 시절 즉, 일생에서 가장 눈부신 한때를 말한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에서 양조위와 장만옥의 침묵 속에 담긴 절제된 눈빛만큼 보이지 않는 감정은 오히려 애절해진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양조위는 앙코르 와트를 찾아간다. 무너지고 폐허가 된 앙코르 와트 벽의 구멍에다 양조위는 무언가를 남기고 속삭인 후 흙으로 막아버린다.

고대 사람들은 비밀이 생기면 산속 나무나 바위에 뚫린 구멍에 비밀을 속삭이고 봉인을 했다고 한다. 양조위가 앙코르 와트에서 봉인한 것은 화양연화라 여긴 사랑의 봉인(封印)이었을 것이다.



캄보디아, 지금은 범죄 집단 소굴이 되어 버린 나라. 한 때는 앙코르 와트를 만든 크메르 제국 문명을 지녔던 나라였다. 9세기에서 15세기까지 그 시절 크메르 제국은 동아시아의 강력한 제국이었다. 앙코르 와트는 단지 불교 사원이 아니었다. 힌두교와 불교가 융합된 석조 문화로 우주를 재현하고자 했던 곳이다.

영원할 것 같은 크메르 제국은 서쪽의 시암왕국(태국)에게 전쟁에서 짓밟히고 수도를 프놈펜으로 옮기고야 만다. 이때부터 크메르 제국은 멸망하고 서쪽엔 태국, 동쪽에는 베트남에 끼인 샌드위치 국가로 전락하고야 만다.

그 나라가 바로 오늘날 캄보디아이다.


캄보디아 국기에는 예전의 강성했던 흔적인 앙코르 와트 건물을 집어넣었다

전 세계 국가 중 유일하게 건물을 넣은 나라인 셈이다.19세기에 이르자 캄보디아는 태국의 내정간섭과 베트남의 군사적 압박에 못 이겨 왕실은 프랑스에게 보호해 달라는 요청을 하게 된다. 즉 캄보디아는 외세 침략에 의한 식민지가 된 것이 아닌 스스로가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자 했던 것이다. 캄보디아는 주위의 강대국 사이에서 자신의 주권을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어쩌면 우리의 구한 말과 비슷한 상황을 맞이하였는데 지금은 어떻게 우리와 많은 차이가 나게 되었을까?

프랑스 식민지에서 독립 후 캄보디아는 베트남 공산당의 지원으로 1951년에 크메르 인민 혁명당(KPRP)가 세워진다. 이때 급진 좌파인 폴 포트(Pol Pot 본명: 살로트 사로)에 의해서 크메르 루즈를 조직하게 된다. 크메르 루즈는 크메르 붉은 조직으로 캄보디아 무장 공산당 세력이란 뜻이다.

바로 그 유명한 킬링필드가 크메르 루즈 조직에 의해 잔인하게 진행된다.

폴 포트는 1960년대 프랑스 유학 시절 마르크스 레닌과 마오이즘에 심취한 후 자신의 사상을 정립한 후 중국의 문화 대혁명을 캄보디아에서 바로 실현한 것이었다.

농민만 순수하고 지식인과 종교인은 타락했다고 여기며 도시인들을 모조리 인종 청소를 한 것이다. 죽이는 데 총알이 아깝다며 몽둥이로 쳐 죽이고 안경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지식인이라 몰아 죽이기도 했다. 그렇게 1975~1978년까지 크메르 루즈는 프놈펜을 장악해서 약 200만 명의 캄보디아 국민을 무참히 학살했다.

 


현재 캄보디아는 아직도 이때의 사건을 역사에서 지워 버리고 어떠한 성찰과 반성도 언급하지 않는다. 캄보디아인 모든 국민의 가족 중에 이때 죽지 않는 가정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 있다

나라 전체가 PTSD에 걸려 있는 것이다.

크메르 루즈는 이 과정 중 베트남 공산당과는 거리를 두고 중국 공산당의 지원을 받게 된다. 폴 포트는 마오쩌둥을 숭배하였고 스스로가 그렇게 되길 바랬던 것이다.

캄보디아 무자비한 크메르 루즈 정부를 중국은 유엔에서 합법 정부로 인정할 만큼 지원을 했다.

왜 중국은 캄보디아를 지원할까?


중국이 캄보디아를 지원한 이유는 당시엔 소련과 베트남을 캄보디아를 이용하여 견제하려는 목적과 지리적 이점을 챙기려는 내막이 있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다.1979년 크메르 루즈는 베트남과 국경 문제로 충돌하고 만다. 이때 베트남 공산당은 프놈펜을 함락시키고 크메르 루즈를 쫓아내고야 만다.

그 강력했던 크메르 루즈는 무너지고 친 베트남계 세력인 현재 총리 집안의 훈센 전 총리가 집권하게 된다. 훈센 전 총리는 1985년부터 2023년까지 무려 38 7개월의 장기 독재 정치를 하게 된다. 지금은 자기 아들에게까지 총리를 세습한 사실상 북한과 같은 왕조를 만들고 있다. 사실 캄보디아에도 태국처럼 국왕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캄보디아 왕실은 아무런 힘도 없는 들러리에 불과 하다.


38년의 장기 집권 중에 친 베트남계와 친 중국계의 정치인들은 서로 카르텔을 만들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캄보디아를 만들어 낸 것이다.

특히 중국의 일대일로에 적극적 참여로 중국 정부의 항만 도로 공항 같은 건설부터 카지노 관광까지 막대한 중국 자본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때 중국에서 삼합회 같은 흑사회 조직이 캄보디아로 넘어와 합법적인 사업 투자로 꾸며서 사업을 벌이게 된다. 그게 바로 스캠 컴파운드(Scam Compound) 사기 범죄 복합단지”를 만든 것이다.




스캠은 이제 단순한 사기가 아니다.

이들은 메스컴에 알려진 대로 강력한 카르텔로 이루어져 캄보디아 정계까지 장악하여 지하 경제를 주무르고 있다. 중국의 범죄 단체는 캄보디아를 기점으로 미얀마, 베트남, 태국까지 확장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나라 국민에게도 이미 이들 브로커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최근 중국은 이 범죄 단체를 단속하고자 미얀마에 경찰을 파견하여 조직을 소탕하는데 그 규모는 일반 조직폭력배 소탕 수준이 아니다. 몇 만 명 단위로 조직에 얽힌 사람들을 잡아오는데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어 보인다.  우리나라 국민이 아직도 캄보디아 스캠에 연루되어 감금되어 있다고 추산하는 인원이 300명이 넘는다고 들었다. 얼마나 감금되어 조직에 이용되고 있는지 정확한 숫자도 없다.

무엇이 이들을 캄보디아로 오게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잘 이해가 안 된다.


캄보디아에서 화양연화를 이루려는 꿈을 꾼 것인가?

캄보디아의 화양연화는 이미 끝났다.

앙코르 와트의 벽 구멍에 봉인된 비밀을 혹시라도 누가 해제를 하는 날이 오게 될까?



🖋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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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0-17 2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캄보디아가 아닌 한국에서의 화양연화를 이루려는 욕망이 그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고 캄보디아로 향하게 만든게 아닐까요. 뉴스를 보면 사람이 얼마나 자기가 원하는 것만 보게 되는지 느끼게 되더군요. 참 안타깝고 씁쓸한 현실입니다.

마힐 2025-10-17 22:32   좋아요 0 | URL
맞아요. 너무 안타깝고 씁씁한 현실입니다. 캄보디아란 나라도 참 불쌍한 역사를 겪었더라구요.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모호해 짐을 느꼈어요. 잉크냄새님 말씀대로 뭐든 문제의 원인은 욕심과 욕망입니다. 그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제일 중요한데 우린 자주 놓치는 것 같아요. 캄보디아를 바라보면서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 알게 되었네요.
 
유리알 유희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4
헤르만 헤세 지음, 이영임 옮김 / 민음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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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0 16

제목: 유리알 유희/ 잡문의 시대를 향한 헤세의 외침

 

 

헤르만 헤세의 작품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에서> 그리고 <싯다르타> 읽으며 받은 감동은 정말 대단했다. 뒤늦게 읽었기에 오히려 그 깊이를 체감할 수 있었 같다. 만약 나의 20대에 이 책들을 접했다면 아마도 감동의 울림은 없었을 것이다. 독서는 결국 경험치와 함께 숙성되는 법이다. 그런 흐름 속에서 <유리알 유희> 내게 다른 충격이었다.

 

작품은 전작들과 달리 훨씬 난해하다. 서문부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라이프니츠, 스콜라 철학, 바흐, 베네딕스 수도회, 여씨 춘추, 우파니샤드 수많은 이름과 학문이 등장한다.

읽다 보면 내가 난독증이 아닌가 의심이 정도다. 그러나 이때 정신 차려야 한다. 사실 맥락을 잡고 보면 단순하다. 결국 《유리알 유희》는 고도의 정신적 놀이를 말한다. 음악과 수학, 철학과 언어학, 종교와 천문학까지 인류가 쌓아온 모든 지혜를 유리알이라는 상징에 담아 조합하는 유희 였다.

 

작품은 전설적 유희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전기로 서술된다. 그는 카스탈리엔이라 불리는 수도원적 교육 공동체에서 성장한다. 최고의 영재들이 모여 순수 학문을 익히고 명상으로 완성하는 곳. 크네히트는 여기서 정신적 정점에 이르러 명인이 된다. 그러나 결말은 뜻밖이다. 그는 명인의 자리를 내려놓고 속세로 돌아가려 한다. 아무리 숭고한 정신의 세계도 무상하며, 진정한 깨달음은 중생 속에서 완성된다는 자각 때문이다.

지점은 선불교의 십우도(十牛圖)와 겹친다. 목동이 잃어버린 소를 찾는 심우에서 시작해, 발자국을 발견하고(견적), 소를 얻고(득우), 소를 기르고(목우),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며(기우귀가), 마침내 소와 나를 모두 잊는(인우구망) 경지를 거쳐 마지막엔 세상으로 돌아와 중생을 제도하는 입전수수에 이른다.

크네히트가 카스탈리엔을 떠나는 결단은 바로 입전수수의 경지와도 같다.

깨달음은 홀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현실과 함께해야 한다는 통찰이다.

 

나는 헤세가 전하고자 이러한 메시지 변증법적 구조로 .

(): 잡문의 시대. 무책임하게 쏟아지는 단편적 지식과 강연, 언어의 가치 상실. 헤세는 이것을 정신적 침체라 불렀다.

 

그날그날의 모든 사건에 대해서 급하게 성의 없이 쓴 글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고, 이 모든 정보를 끌어모아서 가려내고 기사화하는 일은 급속도로 무책임하게 대량 생산되는 상품과 완전히 같은 길을 밟고 있었다.” (1p.26)

 

“2곱하기 2가 무엇인지 권력자가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는 자는 비겁자이며 배신자입니다. 진리에 대한 지조, 지적 성실성을 다른 이익을 위해 희생시키는 일은, 설혹 그것이 조국의 이익을 위한 일이라 해도 배신입니다.” (2p.61)

                           

놀라운 , 헤세가 그린 잡문의 시대가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이라는 점이다. 유튜브와 SNS, 인터넷 매체에서 매일같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글과 영상들, 자극과 가짜뉴스의 홍수 속에 언어는 이미 가치 잃고 있다. 지식인들은 정치화 되었고, 권력의 도구가 되었다. 헤세가 진리에 대한 배신자라고 경고했던 모습이 지금 우리 눈앞에 있 것이다.

 

(): 정신의 시대. 잡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류는 유리알 유희와 같은 정신 문명으로 향한다. 진리에 대한 배신을 거부하고, 지식을 초월한 정신적 승화를 갈망한다.

유리알 유희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다. 인류가 가진 모든 학문,  수학, 철학, 음악, 종교  하나의 언어로 종합하는 정신적 연금술이다. 그것은 단순한 지식 축적이 아니라, 명상과 깨달음의 경지를 통해 완전성에 다가가는 길이다.

 

유희는 유희자에게 완전한 것을 찾아가는 어떤 상징적인 형식을, 숭고한 연금술을, 모든 형상이나 다양성을 넘어서 내면의 고유한 정신세계로, 즉 신에게 다가가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1p.50)

 

 

(): 그러나 정신의 시대조차 무상하다. 유리알 유희도 결국 사라진다.

아무리 고결한 정신도 무상(無常)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 가장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역사가 되고 지상의 한 현상이 되는 즉시 무상한 것이 되기 마련입니다.” (2p.64)

 

결국 지고한 정신의 성과도 속세로 돌아가야 한다. 깨달음은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와 나누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네히트는 명인의 자리를 내려놓고 카스탈리엔을 떠난 것이.

정신의 성소가 무너지는 순간, 그가 택한 길은 세속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유리알은 둥근 결정체다. 동양에서 영단(靈丹)이라 불렸던 불사의 환처럼, 모든 학문과 지혜가 응축된 상징이다. 그러나 동시에 유리는 쉽게 깨질 수 있다. 정신 세계의 성취도 무상하다. 그렇기에 크네히트는 그것을 붙잡는 대신 놓아버리고, 속세로 향한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헤세는 정신의 시대라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그것조차도 덧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마지막 메시지는 분명하다. 깨달음은 머물러서는 안 된다.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깨달음은 동서양의 전통과 맞닿아 있다. 불교의 공(), 도가의 도(), 기독교의 복음(福音). 이름 붙일 수 없지만 반드시 전해야 하는 그것. 헤세는 바로 그 무명(無名)’의 메시지를 유리알 유희라는 장치를 통해 보여주려 했다.

 

오늘날 우리는 헤세가 예측한 잡문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정치의 극단화, 국제 질서의 패권주의, 정보의 과잉과 언어의 퇴락 대한 헤세의 경고는 아직도 유효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희망도 남겼다. 잡문을 넘어선 정신의 시대, 그리고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오는 순환. 그 길이 바로 인류가 가야 할 길이라고 이미 유리알 유희를 통해 예측했다,

 

독서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 알 껍질에 금을 내는 일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금이 넓어지고, 마침내 껍질이 깨져 세상 밖으로 비상한다.

<유리알 유희> 껍질을 깨부수는 망치 같은 책이다.

헤세는 잡문 시대에서 방황하는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너는 어디로 갈 것인가?”

 

by Dharma & Maheal 

 

 

 

 

어떻게 보면, 경박한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보다 존재하지 않는 사물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더 쉽고 책임이 덜 느껴질지 모른다. - P12

자네는 완전한 가르침이 아니라 자네 자신의 완성을 바라야 하네.신성은 개념이나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네 안에 있어. 진리는 체험되는 것이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야. - P107

이윽고 전신 운동을 하면서 감격에 찬 춤으로 하루의 시작을 찬미하고,주변의 물결치며 빛나는 자연과 자신이 한마음으로 이어져 있음을 표현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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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0-17 2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각이 여물기 전 너무 일찍 읽혀진 책은 오히려 소화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말씀처럼 삶의 경험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가치를 발하는 책이 있는 것 같아요. 그나저나 <유리알 유희>는 헤세의 책중 읽어보지 못한 책인데,,,제목은 순정 소설 같은 것이 꽤나 난해해 보이는군요. ㅎㅎ

마힐 2025-10-17 23:10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에 제목만 보고 유리 구슬로 하는 구슬 치기 하는 내용이 아닐까 싶었어요. 책은 첫 부분만 난이도가 높고 실제는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으니 꼭 읽어 보세요. ㅅㅅ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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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0 15

제목: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간다

 

 

 

쌰오이에 (少爷)’ 란 말은 중국어에서 ‘도련님’ 이라는 뜻으로 지체 높은 집안의  주인 집 아들을 부를 때 쓰인다.

중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등장하는 쌰오이에는 집안에서 철없는 골치 덩어리들이다.

조상 대대로 모아 놓은 재산을 쌰오이에가 사고치면서 전부 말아 먹는 내용들이 많다.  

위화의 대표적 소설 <인생(중국어 책 제목: 活着: 살아간다는 )>에서 주인공 푸꾸이(富贵) ‘쌰오이에’ 이다. 나는 위화의 이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먼저 접했었다. 영화에서 ‘쌰오이에’ 푸꾸이는 밤새 노름을 끝낸 후 뚱뚱한 기녀를 부른다. 푸꾸이가 축 처진 몸을 침대처럼 푹신한 기녀의 등에 업혀서 집으로 가는 장면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이 철없는 도련님은 도박으로 집안의 재산을 날려 먹는다.

 

 

위화의 대표 소설 <인생> 은 '쌰오이에 푸꾸이'의 파란만장한 삶에서 스쳐가는 죽음들을 통해서 중국의 근현대사를 말했다.

이번에 읽은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는 위화 자신의 인생을 말하고 있다. 위화는 현대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 명이라는 위상을 지녔다. 그의 친구들이 201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모엔(莫言),멘부커상 최종 후보자 엔렌커(阎连科), <나와 지단(我与地坛)>  작가 사철생(史铁生) 모두 쟁쟁한 작가들이다. 그들 모두 문화 대혁명이라는 폭풍을 직접 맞아본 세대로서 모두 위화와 개인적으로 무척 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들을 중국 현대 문학의 사천왕(四天王)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들이 함께 공유했던 문화 대혁명은 각기 다른 성향의 명의 작가를 유머스런 동지애로 뭉치게 배경이 되었다.

이들에게 유머는 그들이 힘든 시기에 성장해야 했던 필수 영양분에 해당되는 셈이다.

 

위화가 성장했던 중국은 지금의 G2 되리라 고는 전혀 상상조차 못했던 극심한 가난과 폭력적인 사상의 실험을 강행했던 대혁명의 나라였다.

책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는 대만에서 2011년에 출판된 책의 번역본이다.

한국어 부제가 <사람의 목소리는 빛 보다 멀리 간다> 인데 이는 책에서 작가의 생과 관련된 키워드 열 개의 단어 중 첫 번째, 인민 대한 회고에서 나오는 말이다.

 

<인민이 단결할 때 그들의 목소리는 빛 보다 더 멀리 전달되고 그들 몸의 에너지가 그들의 목소리보다 더 멀리 전달 되는 것이다. 마침내 나는 인민이라는 단어를 진정으로 이해할 있었다.> P.39 -인민 중에서.

 

위화에게 인민은 1989년 6월의 천안문 사건이 발생하기 전, 북경 천안문 광장에서 몸으로 체득한 단어였다.

5월 35일, 즉 천안문 사건이 발생한 6월 4일은 중국의 인터넷에서 쓸 수 없는 금기어로 사람들은 5월 35일이라 쓴다고 했다.

천안문 앞에 모인 전국의 대학생들의 말로는 표현 할 수 없는 함성과 목소리는 빛 보다 멀리 갔지만 결국 폭력적 탱크의 억압 앞에서 막히고야 말았다.

빛보다 멀리 갈 수 있었던 변화를 갈망 했던 에너지는 결국 어디로 갔을까?

 

위화는 천안문 사건 이후 응집되었던 에너지가 뿔뿔이 흩어져 결국 각자 벌기에 집착하는 행위로 변질 것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오늘날의 중국은 세계의 공장을 자처하며 'MADE IN CHINA' 제품으로 성장한 나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생산했던 싸구려, 저질, 짝퉁 제품은 이제는 자동차, 조선, 우주 항공, 군사 부분을 넘어서 인공 지능 분야까지 첨단 산업으로 진화 중에 있다.

이런 진화의 배경에는 바로 인민들의 내적 변화를 바라는 힘이 밑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영수가 서거했다는 소식에 우리는 미친 듯이 눈물을 쏟았다. 천 여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내는 울음소리 속에서 나도 울고 있었다..중략....몇몇 사람들이 소리내어 울고 있을 때, 내가 느꼈던 것은 틀림없는 슬픔이었다.하지만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대한 공간에서 한꺼번에 울부짖을 때,내가 느낀 것은 유머였다.> P. 69  -영수 중에서

  

영수(领袖) 뜻은 지도자, 즉 중국에서는 '마오쩌뚱' 을 일컫는 말이다.

위화는 모택동 서거일 , 광분에 찬 대중의 울음 속에서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그 기괴한 울음 속에서 혼자 만 웃음을 터뜨려 버린 것이다. 한번 터져 버린 웃음은 도무지 멈출 수가 없는 지경이 되고야 말았다. 웃음을 들키는 순간 바로 거기서 인생은 끝이다.

결국 이런 광경을 본 친구가 있었지만, 후에 친구의 평가는 위화가 가장 슬프게 울더군. 너무 격하게 울어서 어깨까지 심하게 떨리더라니까

울음의 아이러니다. 아니 웃음의 아이러니 인가?

 

1960년 생, 위화는 마오쩌뚱 시대의 문화 대혁명을 겪었다.오늘날 문화 대혁명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으로 뒷방 신세에 지나지 않았던 모택동을 다시 부활 시킨 사건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 시기 마오쩌뚱은 자신을 추종하는 홍위병들에 의해 인간의 위치에서 살아있는 신처럼 추앙 받게 된다. 지금도 중국의 시골 민가에 가보면 모택동 초상이 걸려 있는 집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다. 그가 성장했던 그 시절은 혁명이란 이름 속에 폭력이 난무했고, 가장 가깝게 죽음을 목격할 수 있는 세대이기도 했다. 이러한 현실은 개인에게는 고통에 가깝다. 작가는 그 고통을 어쩌면 유머로 승화한 것일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가 쓴 작품 속에 늘 유머가 피처럼 흐른다. 하지만 그의 유머는 슬픔과 고통의 종착지에 이르는 과정이었다.

 

위화의 아버지는 외과 의사였다. 그 시절 중국은 국가가 개인의 직업을 지정해 줬고 의사는 병원의 사택에서 살아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위화는 어릴 때 부터 병원 수술실과 영안실을 놀이터로 삼아 자랐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는 수술중에 흘린 피나 영안실에 남겨진 죽음 그리고 홍위병들과 조반파(造反派)들이 인민들에게 행한 폭력과 살인들을 목격하며 자란 것이다.

책에는 고통과 흔들을 위화식의 유머로 자신의 성장과 중국의 성장 이야기를 말하고 있.

 

<나는 여성의 음부 그림을 보는 순간 내가 엉겁결에 소리를 지르지나 않았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완전히 정신이 나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알지 못했다.내가 기억하는 것은은 그 뒤로 우리 중학교 친구들이 끊임없이 위층에 있는 우리 부모님 방을 드나들기 시작했고, 형 친구들과 똑 같은 괴성을 질렀다는 사실 뿐이었다.> p.97 -독서 중에서

 

<내가 베이징에서 집으로 돌아온 뒤로 하이옌 전체가 들썩거렸다. 나는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상 최초로 베이징에 가서 원고를 수정하고 온 하이옌 사람이 되었다. 우리 현 간부들은 나를 천재라고 생각했고 내가 이 뽑는 일 대신 문화관 일을 해야 된다고 보았다.> P.147  -글쓰기 중에서

 

<내 친구는 또다시 고개를 떨어드리고 풀이 죽어 자리를 떴다. 그는 어째서 루쉬 선생이 항상 자신에게 불리한 말만 하는지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 나는 깜짝 놀라서 온 몸에 식은땀을 흘리고 말았다. 갑자기 아주 거대한 논리의 허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P.173 -루쉰 중에서

 

<1949년, 중국 공산당은 중국에 정권을 수립한 뒤로 혁명을 철저히 진행해야 한다는 신념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혁명은 더 이상 무장투쟁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략.. 그 뒤로 중국은 개혁 개방을 알리며 세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혁명은 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 지난 30여 년 동안 이루어진 경제 기적에서도 혁명은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환골탈태하여 다른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중국의 경제 기적안에는 대약진식 혁명운동도 있고 문화 대혁명식 혁명 폭력도 있다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P.222 -혁명 중에서

 

중국의 지폐는 1위안부터 시작해서 5위안, 10위안, 20위안, 50위안, 그리고 100위안 단위로 되어있다. 그리고 이 지폐들의 초상화는 그냥 마오쩌뚱 얼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기타 다른 나라들이 자신 고국의 위대한 위인을 새겨 넣는 것과 달리 중국은 마오쩌뚱이 중국의 모든 위인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이 배출한 위대하고 여기는 위인들 공자나 진시황, 한무제, 당태종, 징키스칸 같은 인물은 아예 끼지도 못한다. 만약 마오쩌뚱 초상화가 화폐에서 사라지고 다른 초상화가 오는 날이 있다면 그건 어떤 새로운 시대를 맞이 한 것 일까?

 

 신중국 설립 이후 많은 혁명을 진행해 오던 중국이 오늘날은 미국과 힘겨루기를 하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한때 우리가 무시했던 가난한 중국이 어느덧 미국의 견제를 받고 전세계적인 우려를 받는 국가로 변한 것이다.

더구나 이제는 반중을 넘어 혐중이 되는 날이 오리라고 상상조차 없는 시기를 겪고 있다. 중국 스스로도 자신이 이렇게 되리라 생각이나 했을까?

중국에서 25년을 살아왔다. 어느 날 갑자기 중국이 혐오 국가가 된 것에 스스로도 당황스럽다. 중국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도광양회(韬光养晦:빛을(재능) 감추고 어둠속에서 (실력을) 기른다)의 본색을 너무 일찍 드러낸 것일까?

위화가 책을 출판 때는 아직 2011년이다. 이제 15년이 지난 작금의 중국에 대해 작가는 어떤 키워드를 고를지 궁금하다.

중국이여, 세계의 쌰오이에(少爷) 되지 않길 바란다.

 

 

 

by Dharma & Maheal

 

스물두 살 무렵, 나는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이를 뽑으면서 한편으로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이를 뽑는 것은 생계를 위해서였고, 글쓰기는 나중에 더이상 이를 뽑지 않기 위해서였다. - P137

어떤 꿈 하나가 어떤 기억하나를 되돌리면,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이 변하고 마는 것이다. - P157

혁명은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하는 것도 아니고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그림을 그리거나 자수를 놓는 것도 아니다. ...중략...
혁명은 폭동이다. 한 계급이 한 계급을 전복하는 폭력행동이다.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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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0-14 2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오쩌둥의 뒤를 이은 덩샤오핑의 흑묘백묘가 오히려 현재 중국을 더 잘 설명해주는 말이 아닐까 싶네요. 시비가 하나의 사물 안에 존재하고 그저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는 저 말이 지금의 중국을 이끌었다면 앞으로 그들의 미래를 담을 새로운 가치관이 나오지 않을까요. 전 중국도 그 과정에 있다고 생각해요.

마힐 2025-10-15 18:48   좋아요 1 | URL
과연 잉크냄새님께서는 중국에서 계셨던 분 답게 덩샤오핑의 실용주의를 잘 아시는군요. 맞아요. 중국은 늘 변화하고 있지요. 중국 뿐만 아니라 만물이 다 고정되지 않는 거구요. 중국의 지폐에 마오쩌둥이 아닌 다른 인물이 나타나길 기대해 봅니다. 사실 저는 요즘 들어 한국 메스컴에서 중국인민을 너무 악마화 하는 것에 불편했어요. 그러나 또 중국이 도광양회를 버리고 중국굴기, 즉 패권주의로 치닫는 것은 경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변 우리나라나 대만은 긴장을 할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저는 위화의 글을 빌려 중국이 철없는 쌰오이에가 아닌 진정한 도련님 노릇을 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주위에 민폐를 끼치는 것이 꼭 ‘푸꾸이‘ 같다고나 할 까요?
균형적인 시각을 갖고자 하는데 쉽지는 않네요... ㅅㅅ˝
 

관노트

2025109 /

제목:  위버맨쉬와 불성

 

 

몇일째 지속되는 무료한 연휴 끝에 어제 알라딘 이웃 블로그 이신 Cyrus님의 니체에 관한 글을 보면서 갑자기 흥미로운 활력소가 살아났다.

보통 니체하면 떠오르는 말은 바로 신은 죽었다 라는 충격적인 선언이다.

철학에 대해 전혀 관심 없는 사람에게도 신은 죽었다는 말은 꽤나 흥미로울 것이다.

신이 도대체 죽은 것일까? 무엇 때문에 신은 죽었다는 거지? 같은 연속적인 질문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 질문이 생기는 것. 그것이 바로 철학의 시작이 아닌가 싶다.

? 어째서? 무엇 때문에? 라는 의심과 의문이 떠오르는 순간 우리는 탐구에 몰두하게 된다. 답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질문의 동굴에 들어서는 순간 무조건 밝혀야 한다는 생각 밖에 안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이란 이름에 밝은 (哲)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명제는 현대 철학의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망치 철학자라는 별명처럼 니체의 강력한 질문은 니체 이전의 서양 전통 철학과 기독교적인 사상을 망치로 두들겨 팼다. 그 망치 한방에 어쩌면 신은 죽었는지도 모르겠다.

신을 때려 눕힌 망치에서 위버맨쉬라는 , 즉 초인 이라는 강력한 생명이 탄생했다.

니체는 과정을 낙타에서 사자로, 그리고 사자에서 어린 아이로 변화하는 모습으로 비유를 했었다.

사실 비유는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 스럽다.

갑자기 불교가 나오니 글을 읽는 사람 입장에서 무척 황당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불교를 조금 접한 사람이라면 니체가 무슨 말을 하는 어렴풋이나마 이해가 되리라 믿는다.

불교는 깨달음을 얻는 종교이다.  깨달음은 기독교의 구원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타의에 의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닌 오직 자신의 수행을 통해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불교이다.

불교에선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많은 수행법이 존재한다. 어느 수행만이 깨달음에 이른다고 고집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근기가 달라 각자의 인연에 따른 수행을 통해 시간이 걸릴지 언정 언젠가는 누구나 다 성불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불교이다.

그런 수행법 중에 (戒).(定). (慧) 삼학을 닦는 과정이 있다.

 

 

계는 계율이다. 정은 고요함(선정)이다. 그리고 혜는 지혜를 말한다.

여기서 니체가 말한 낙타, 사자, 어린아이는 바로 불교의 삼학과 놀랍도록 일치 한다.

낙타는 짐을 싣는 동물이다.  스스로 짐을 짊어지는 고통은  계율을 지키는 수행과 같다.  사자는 용맹하며 기존의 모순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상징이다. 이것은 불교의 선정과 같다. 고요함은 반드시 휘몰아치는 폭풍을 거친 후 드러난다. 그것은 내 안의 다스리지 못한 의식, 즉 번뇌가 가라 앉은 지혜의 전 단계이다.  

이런 모든 것을 겪은 후에 비로소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이 드러난다.

그것이 바로 지혜이며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여기 까지 설명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대략 감이 것이다.

그렇다.  니체는 이러한 과정을 설명하면서 위버맨쉬를 탄생시켰다. 초인은 바로 불교의 보살과 같은 의미로 보여진다. 보살은 일체 중생들을 교화하며 자신과 같은 경지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는 깨달은 사람들이다. 즉 위버맨쉬는 보살이다.

 

 

니체의 철학이 니힐리즘( 허무주의) 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니체의 말년이 정신병이란 업식에 걸려 그런 오해를 낳았다고 본다. 사실 니체의 철학만을 봤을 때는 니체는 오히려 신을 죽인 것이 아니었다.

역사적 신은 죽었을 지언정 니체의 다른 신인 위버맨쉬로 다시 창조 것이다.

니체 철학은 종말론이 아닌 창조론에 가깝다.

영원회귀 또한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바로 불교의 윤회와 같은 결을 가지고 있다.

다만 분명히 니체와 불교는 전혀 상관 관계가 없다. 또한 영원회귀 사상 또한 윤회 사상과 완전히 일치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 철학이 불교와 유사한 점은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불교를 접한 사람이라면 니체에서 불교를 보게 되는 것과 같다.

어쩌면 니체가 만든 철학이 바로 진리 일지도 모르겠다.

 

 

서양 철학이 현대에 수록 불교와 접점을 보이는 것은 우연히가 아니라고 본다.

니체가 청년 시절 매혹 시켰던 쇼펜하우어가 불교와 인도철학에 매료 되었던 시점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그보다 전부터 유럽에서 불교와 비슷한 사상적 토대를 닦았다고 본다.   사실 스피노자 때 부터 이미 서양 철학은 이단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이단이 탄생된 배경에는 데카르트가 있었다.  즉 데카르트 이원론에 대한 반론이 스피노자의 일원론인 것 처럼, 이미 16세기 부터 서양과 동양은 사상적으로 서로 다르지만 유사해지기 시작한 시점으로 바라본다.  데카르트가 씨앗을 심었고, 스피노자가 그 씨앗을 발화 시켰으며, 니체는 그 꽃을 피운 셈이다.

 

결국 철학의 시작은 질문에서 시작했다.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은 각자에게 있다. 내가 나의 길을 걸을 수 있을 때 타인에게 자신의 길로 가라고 할 수 있다. 내 길은 타인에게 맞지 않는 길이지만 나 한테 맞다면 그 길은 나의 길이 되는 것이다.

니코스카잔차 키스가 존경했다던 니체 그리고 베르그 송은 사실 같은 철학을 했다.

베르그 송의 엘랑비탈(생의 철학) 과 니체의 위버맨쉬(초인)는 아무런 접점도 없지만 놀라울 정도로 둘은 같은 경지를 말했다. 바로 불성(佛性)이다.

결국 위버맨쉬는 보살이자 불성이란 말이 된다.

물론 나의 이런 생각은 전혀 학술적인 근거나 가치도 없다.

하지만 나는 나의 이러한 생각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  

정답이 없는 철학에서 내가 찾은 나만의 정답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만 한다.

? 어째서? 무엇 때문에?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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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5-10-10 06: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철학은 정답이 없는 학문 맞아요. 애초에 정답이 있었으면,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철학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철학이라는 학문의 정체를 의심해야 합니다. 정답이 없어서 철학자들은 늘 질문하지요. 오랜 질문 끝에 발견한 정답이 또 새로운 질문을 만나면 생각을 계속해야 해요. 학술적인 근거를 아는 것도 좋지만, 그것에만 따라가듯이 철학 공부하면 재미없다고 생각해요. ^^

마힐 2025-10-10 13:20   좋아요 0 | URL
그래서 저는 철학이 선종에서 스님들이 화두를 참구하는 것과 같다고 여겨지더라구요. 길 없는 길을 걸어 문 없는 문으로 들어가는 그 여정이 바로 철학이 아닌가 싶어요. cyrus님의 소중한 답변 감사 합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중국의 초한전 - 새로운 전쟁의 도래
이지용 지음 / 에포크미디어코리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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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절 연휴 기간은 여러 책들을 읽었다.

경제 분야와 철학 그리고 소설을 읽었는데 생각보다 진도가 안나가졌다.

그러다 초한전이란 책을 집어 들었다.

초한전을 읽는 동안, 얼마전 썼던100만 요우커에 대한 씁슬한 우려가 현실적인 걱정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 2011년에 발생했던 사건이 떠올랐다.


2011 3, 당시 이명박 정부 시절, 중국 상하이에서는 상하이 스캔들이란 이름으로 치정(痴情)에 얽힌 공직자 기강 문제가 교민 사회에서 이슈가 되었다.

상하이 총영사관에 근무하던 영사들과 중국인 여성 덩신밍邓新明)이란 사람과 얽힌 스캔들이었다.

덩신밍은 비자 브로커 역할을 하며 총영사관의 영사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통해 사적으로 금전적 이익을 취했으며 또한 당시 정부 및 야당 고위 인사 200여명의 개인 정보를 빼어갔다. 이 스캔들은 영사 H 그리고 그외 영사들 과의 복잡한 치정 관계로 인해 덩신밍의 남편이었던 K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 지게 된 것이다.


덩신밍은 아마도 2011년 전 보다 훨씬 전에 당시 영사 H와 알게 되었는데 우연히 덩신밍이 H의 차량에 접촉 사고를 내면서 그들의 치정은 시작되었다고 한다.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덩신밍에게 H는 호감을 느꼈고 이후 덩신밍과의 자주 만남을 하면서 자연스레 덩신밍은 상해 총영사관과 친분을 맺게 되었다.

덩신밍은 이후 비자 브로커로 변신했고, 중국인들의 한국 비자는 덩신밍을 통해야먄 비자 발급이 가능하도록 영사관과 모종의 거래를 맺은 것이다. 이후 이런 행위를 못 마땅한 다른 영사들의 반발에도 덩신밍은 오히려 이의를 제기한 한국인 영사에게 "중국에서 죽고 싶냐? 아이들 제대로 키울 수 있을 것 같냐?" 는 협박성 말들을 서슴없이 뱉었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H외에도 다른 영사와도 관계를 맺었고 어떤 영사는 "자신의 사랑이 변한다면 손가락을 자르겠다" 는 각서를 썼다는 발언도 이어졌다.

이것은 모두 스캔들이 터지고 정부 인사가 영사들을 상대로 얻어낸 조사에 불과하다.

실제 스캔들을 조사하러 온 감찰조는 정작 사건의 핵심인 덩신밍을 만나지조차 못했다. 중국에서 중국인을 취조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민감한 사안은 외교문제로 비화가 되기 때문에 중국쪽 공안은 협조를 안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후 덩신밍에 대해 전해지는 소식은 없다. 공식석상에서 그녀의 존재는 완전히 사라졌다.

우리측 조사는 덩신밍은 단순한 브로커로 밝혔고 공직자 기강 문제로 결론을 냈다.

과연 단순한 치정에 얽힌 브로커일까? 아니면 고도로 훈련된 스파이 였을까?


2011년 이명박 정부 시절 김영기 총영사를 파견했다. 당시 자료를 보면 그의 총영사라는 직함은 외교적 실무가 없는 낙하산 인사였다고 평가했다.

당시 고위 공무원들의 해외 파견은 국내에서 고생했던 보상을 받으려는 심리가 강했다고 한다. 즉 놀러 온 것이다.

그는 파견 이후 전노무현 정부시절에 파견되었던 H영사와는 서로 사이가 맞지 않는 사이였다고 한다. 즉 현정부 인사와 전정부 인사간의 알력 다툼이 존재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권력의 다툼 끝에 상하이 스캔들이 터진 것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 스캔들이 터졌지만, H영사와 덩신밍의 관계는 이미 그 정권 교체기 전부터 이어져 온 셈이다.


이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과연 비자 없이 국내에 온 중국인들이 전부 관광객이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하겠지만 그중 만에 하나라도 범죄와 국가 보안에 관련된 일을 수행하러 온 자들이라면?

단순한 음모론으로 여기기에는 현실적으로 너무나 조짐이 안 좋다.


중국어로 공작工作 이라고 하면 업무, 일 로 번역한다.

여기다 비밀(秘密)을 붙히면 비밀공작, 즉 스파이 업무가 된다.

덩신밍의 브로커는 어쩌면 비밀 공작을 위장하기 위한 업무가 아니였을까?

그에 대한 판단은 이제 우리 각자가 해야 한다.

아무도 공식적으로 판단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초한전에 대해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현재 우리는 또다른 덩신밍을 만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초한전(超限战)은 조용히 작동중인 전쟁이다. 총도 미사일도 탱크가 필요가 없는 전쟁이기도 하다. 덩신밍의 출현은 스캔들이 아닌 패턴일 수도 있다.

우리들의 무관심과 안일함 속에 파고드는 비밀공작에 대해 깨닫게 될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하인리히 법칙에 지배당한 후가 될 것이다.

초한전, 이미 시작되었다.

전장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다.

누가 먼저 깨어날 것인가?

그 답은 각자의 마음에 있다.

잠든 마음을 깨우는 것, 그것이야 말로 가장 조용한 전쟁에서 첫 승리가 될 것이다.

🖋 Dharma & Maheal


결론은 아무런 규칙도 없고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초한전의 핵심이다. - P68

한 사회 상위 5% 집단을 제거하면 목표의 절반 이상을 달성한 것과 마찬가지다.5% 엘리트 계층이 정권과 안보의 핵심이므로 이들을 제거하면서 정부 권력과 무력(정권, 군대, 경찰, 사법, 언론 등)을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104

강고한 보루를 공략하는 가장 쉬운 길은 내부에서부터의 붕괴다.
레닌Lenin - P120

중국과 함께 가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중략....
우리가 잊은, 또는 애써 외면하는 불편한 진실 때문이다. 바로 중국은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의 전체주의 국가이고, 중화민족주의로 무장되었으며, 패권을 장악해 국제 정치 질서를 자기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팽창 정책을 공격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국가라는 사실이다. - P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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