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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원서발췌 백치 ㅣ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원서발췌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정아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8년 11월
평점 :
얼마 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딧세이>를 봤다.
오딧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자신의 고향 이타카로 향하는 여정속에서 나는 문득 중국 한나라의 이릉과 소무 그리고 조선의 강항이 떠올랐다.
이릉과 소무는 각기 다른 사정으로 흉노 땅에 남게 되었고 모두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둘 모두 흉노 땅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지만 결말은 달랐다.
바이칼 호 근처에서 양을 치던 소무는 돌아올 수 있었지만, 이릉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흉노에 남게 되었다.
젊고 유능한 장수였던 이릉을 한무제에게 변호했던 사마천은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고야 말았다.
곧 사마천은 궁형을 받게 되었고, 결국 <사기>라는 인간의 불굴의 의지로 태어난 역사서를 후세에 남겼다.
임진왜란 시기 일본에 포로로 끌려 갔다가 조선으로 돌아온 강항은 자신이 일본에서 보고 겪었던 일과 당시 일본의 정세를 <간양록>에 남겼다.
간양록(看羊录)이란 제목 그 자체가 자신을 흉노 땅에서 양을 보던 소무에 비유한 글이다.
오디세우스, 소무, 이릉, 사마천 그리고 강항.
서로 다른 시대와 다른 문명 속의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삶에는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이들은 모두 타향, 고난, 귀환, 그리고 기록이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왜 그토록 돌아가려 하는가.
동서양과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에게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어떤 상징 같은 것이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나 역시 오늘까지 중국에서 9,755일째 살고 있다.
이제 돌아갈까.
아니면 중국에서 조금 더 있어야 할까.
취직하는 것만이 한국으로 돌아갈 길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회사와의 노동분쟁이 마무리되어야 하고, 동시에 중국보다 한국에서, 혹은 중국의 파견직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갈 기회도 잡아야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귀환은 단순히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나는 이력서를 쓰고 또 수정하면서 또 다른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몇 장의 이력서가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회사명, 직책, 경력연수, 산업군, 성과, 나를 규정하는 키워드.
그것들이 과연 나인가.
나뿐만 아니라 현대의 취업이라는 행위 자체가 과연 사람을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회사들이 올린 공고도 애매하고, 사람마다 살아온 경험도 모두 다르다.
그런데 몇 장의 서류만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분석하고, 뽑거나 떨어뜨린다.
그래서 취업은 뽑는 쪽이나 구직자 모두 어쩌면 제비뽑기에 가까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신중하게 판단하지만 결국 어느 순간에는 복불복이 되어 버린다.
이왕 그렇다면 차라리 복이나 짓고 착하게 살아야 취직도 잘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착하게 살자.
과연 이게 답일까.
도스토옙스키의 <백치> 를 읽으면서 나는 미시킨 공작이 지닌 연민에 대해 연민을 느꼈다.
그는 너무 순수하고, 타인의 고통을 너무 깊이 느낀다.
작가 도선생의 표현대로 공작은 예수를 모델로 삼았을 정도로 연민의 상징으로 보였다.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기는 나스타샤 필리포브나를 이해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인물이 미시킨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그녀를 구하지 못했다.
나스타샤는 죽고, 로고진은 시베리아로 가며, 미시킨은 결국 다시 백치가 된다.
<백치> 모든 등장인물들이 비극으로 끝나고야 만다.
과연 연민 만으로는 누군가를 또는 자신 조차 구원하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이 부분에서 <백치> 를 다분히 불교적으로 읽게 되었다.
연민만으로는 사람을 구할 수 없다.
미시킨은 순수하고 착했지만 지혜롭지 못했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것과 그 고통의 원인을 보고 끊어내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래서 연민은 단순한 착함이 아니다.
지혜로워야 한다.
지혜는 연민이 현실에서 균형을 잡도록 하는 중심추가 되고, 연민은 지혜가 차가운 계산으로 흐르지 않게 한다.
그래서 지혜와 자비는 둘이 아니다.
오디세우스가 이타카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그가 지혜로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완전 무결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오만했고, 무모했고, 욕망도 가득했다.
그러나 그는 점점 성숙해지고 둥글어져 갔다.
그는 기다렸고, 싸워야 할 때와 숨겨야 할 때를 구분했고, 수없는 실패 속에서 다시 시도했다.
그러자 인간적인 결핍을 지혜가 채워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디세우스의 귀향은 단순히 착한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결함 많은 인간이 경험을 통해 지혜를 배우며 귀환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지혜의 끝에는 다시 자비가 있어야 한다.
살아남는 것만으로 귀환의 여정이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떠났지만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기억할 수 있을 때, 지혜는 비로소 자비를 만난다.
내가 영화 <오딧세이> 의 마지막을 죽어간 전우들의 명복을 비는 여행으로 읽은 이유도 거기에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의 다른 말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순수 체험이다.
체험은 느낌이고 감정이다.
영화를 보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모두 살아 있기 때문에 가능한 체험이다.
죽음은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방식의 체험이 끝나는 문이다.
그래서 살아 있음은 생생히, 여실히 체험하는 것을 즐겨야 한다.
그러나 생생하게 산다고 해서 반드시 잘 사는 것은 아니다.
욕심도 생생하고, 질투도 생생하고, 오만도 생생하고, 분노도 생생하다.
우리는 자주 나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업들에 휩쓸린다.
이기심, 욕심, 투쟁, 오만, 피해의식, 과망상.
그 속에서 지혜는 사라지고 연민도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늘 깨어나야 한다.
잊었다가 다시 알아차리고, 휩쓸렸다가 다시 돌아오고, 닫혔다가 다시 연민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이 지혜를 놓치지 않고 연민이 사라지지 않게 해야 하는 이유다.
그러고 보면 이타카란 단순히 돌아가야 할 귀환처가 아니다.
나의 이타카.
그곳에는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
그러나 이타카가 중요한 것은 단순히 고향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곳으로 가야만 본연의 내가 되기 때문이다.
즉 지혜와 자비를 지닌 내가 되기 때문이다.
본래 돌아갈 곳이 따로 없으면서도 우리는 돌아간다.
오디세우스에게 이타카가 있었고, 소무에게 돌아갈 한나라가 있었고, 강항에게 돌아갈 조선이 있었다.
나에게도 이타카가 있다.
나는 아직 그곳에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 길 위에 혹은 바다 위의 여정에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귀향이란 단순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자비와 지혜를 잃지 않는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완성이란 한 번도 길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을 때마다 다시 돌아올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나의 이타카로 향하는 중이다.
그곳에는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고, 그곳으로 가야 내가 다시 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 자신만의 이타카로 향하는 오딧세우스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딧세우스다.
이로서 미시킨 공작은 나스타샤 필리포브나를 이미 구원시켰다.
그렇군, 그렇다면, 공작, 자넨 *유로디비이나 마찬가지로군, 하느님은 자네 같은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니까! *유로디비이: 사전적인 의미는 ‘백치의,멍청한, 우매한‘, 또는 ‘종교적인 맹신자‘의 뜻을 가지나, 러시아 전통에서 유로디비이는 예수를 위한 바보로서, 행동이나 말은 바보 같으나 그 말과 행동 속에 예언적인 진리가 담겨 있다고 믿어지는 괴팍한 성자로 여겨진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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