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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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1984

지은이: 조지 오웰

   : 자오샹 하오! 오웰 시엔셩(早上好! 奥威尔先生) , 응답하라 1984!

 

내가 전해 듣기로 조지 오웰(1903~1950) 의 소설 <1984>는 전체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드러낸 소설이라고 했다.

'빅 브라더' 가 텔레 스크린을 통해 사람들의 행동을 감시,감청하고 사상을 세뇌, 통제 하는 미래 사회를 그려냈다고 많은 평론가나 독자들은 조지 오웰의 미래 예측에 호평을 했다.

더구나 시대가 정보화 사회로 접어들고 인공지능의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자  조지 오웰이 예측한 디스토피아적 미래 사회가 정말로 현실화 되는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함께 존재 한다.

이렇게 <1984>의 명성에 대해서 드문드문 어릴 때 부터 들어 왔었지만 읽어 볼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저 막연히 언제가는 읽어 봐야지 하고 미루어 왔다가 이제야 비로소 책을 구매하여 읽게 되었다.

 

 

1984년 이라면 지금 기준으로 40년 전이다. 즉 현재 2024년 기준으로는 과거다.

하지만 소설 속에 1984년은 미래다. 오웰이 1948년에 책을 썼기 때문에 그 시간 기준으로는 겨우 36년 미래를 예측한 소설인 셈이다.

1948년에 내다본 미래1984년은 생각 보다 암울하다.

그런데 더 암울한 것은 그 내용에 대한 공감이 하나도 안됐다.

중간에 읽다 말다를 여러번 반복했다.

나의 문해력 문제도 한 몫 했겠지만 이렇게 까지 가독성이 안 좋을 줄 몰랐다.

그동안 들어 왔던 이 책에 대한 정보와 호평이 무색하게도 나에게는 전혀 와 닿지가 않았다.

 

 

먼저 이 책을 읽기전에 오웰의 <동물농장> 을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1984> 에 대한 기대감이 상당히 컸었다.

'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고 했는데 도대체 빅 브라더가 뭘 어쨌길래 다 들 그렇게 경각심을 가져야 된다고 했을까?

<동물농장> 처럼 미래 사회의 전체 주의에 대한 풍자나 비판를  우화식으로 풀어 낸 것은 아닐까? 하는  기대를 가졌었다.

그런데 이 책, 내가 생각 했던 재미와는 거리가 멀다. 아예 읽기 자체가 싫어졌다.

대체 이건 왜 그런거지?

 

어쩌면 내가 실제로 경험한 1984년도의 현실과 소설 속의 1984년 미래세상 사이의 간극에서 느끼는 괴리감이 너무나 커서 그런게 아니 였을까?

내가 경험했던 현실속의 1984년 세상은 소설속 세상처럼  디스토피아 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의 세상이였다.

그 시절 나는 어린이 였다. 지금도 그때를 회상 하면 몇가지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1984년도엔 미국에서  L.A 올림픽이 열렸다. 그때 우리나라는 전체 10위를 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1986년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있었고 다음 올림픽이 열리는 1988년에는 서울에서 개최하는 걸로 확정이 되어 온 나라가 시끌벅적 했었다.

이 시기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국민은 국뽕에 취했던 시기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의 새나라의 어린이인 나는 우리나라가 제일 좋은 나라라고 생각 했다.

TV만 틀면 맨날 뉴스 첫머리에는 '전두환 대통령은  어쩌구 저쩌구' 로 시작하고 올림픽에서 우리 나라 선수들의 감동적인 금메달 따는 장면에 감격했다.

그 시기엔 학교 가기전에  항상 꼭 '뽀뽀뽀'를 저녁 시간에는 미래소년 코난과 가족 오락관이 우리를 텔레비 앞으로 모이게 했다.

또 우리들 사이에서는 배추머리 아저씨의 '지구를 떠나거라~' 같은 유행어를 따라 하는게 당시 코 흘리게 아이들의 일상이었다.

현재의 나에게 1984년은 동심의 추억이 되어 버렸다.

지난 시절의 추억을 소환 했던 <응답하라 1988> 처럼 나에게는 '응답하라 1984' 가 되어 버렸다.

 

 

 

이 처럼 조지 오웰이 예측한 미래의 <1984> 와 현실의 1984년은 전혀 달랐다.

현실의 1984에는 빅 브라더는 존재 하지 않았고, 소설에 등장하는 전체주의 국가는 전 세계를 통 털어 중국, 소련, 동독, 북한 정도의 공산권 국가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그들은 미국을 위시한 자유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무시 당하는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오웰이 예언한 1984 같은 미래세상은 오지 않았다.

이러한 오웰의 틀린 예언에  대해 당시 우리나라 출신으로 세계적인 예술가 반열에 오른 백남준은 1984 1 1일에 그의 대표적인 비디오 아트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그는 당시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통해 5개 국가를 동시에 연결하여 생방송으로 <굿 모닝! 미스터 오웰>을 진행 한다.

당시 미국에 거주 했던 백남준은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 한국 등 5개 국가를 동시간 으로 연결하여 라이브 퍼포먼스를 내 보낸 것이다.

T.V 를 이용한 퍼포먼스는 오웰이 두려워 했던 텔레 스크린의 도청, 감시라는 악()기능이 아닌 '시 낭송, 무용, 락 음악, 행위 예술' 등을 통해 문화의 선()기능을 보여준 것이다.

, 문명과 기술의 발달은 인류를 감시하고 통제 수단이 되는게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와 인종간의 연결, 그리고 소통, 마지막엔 화합을 이룬다는 메세지를 과거의 오웰에게 전달한 셈이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 드디어1984년이 됐네요. 우린 지금 이렇게 살고 있네요.

당신의 걱정은 이제 끝났으니 이제 그만 미래는 우리에게 맡겨 두세요' 라고 전하고 싶지  않았을까?

 

 

 

지금 이 시대는 전세계로 라이브 방송을 송출하는게 너무나 흔한 일상이 되어 버렸다.

너도 나도 다 유튜브를 본다. 또 영상 하나 쯤은 혼자 찍고 만들고 세상 누구와도 공유하는 세상이 왔다.

수십억의 리틀 백남준이 연결된 시대가 온 것이다.

실제 1984년 백남준이 보여준 TV퍼포먼스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어린이 였던 나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백남준의 이러한 시도는 미래세상에서 벌어질 다양성과 연결성을 보여준 또 다른 백남준식의 예언이 아닌가 싶다.

결국 오웰 예측한 소설속의 1984 미래는 확실히 틀렸다는 것은 이미 알았다.

그런데도 마음 한 구석에 찝찝한 마음이 드는것은 무엇 때문 일까?

 

 

<1984>에 나오는 주인공 윈스턴은 빅 브라더가 통제하는 오세아니아 가 싫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지켜보는 텔레 스크린 속의 수염 달린 빅 브라더가 싫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를 한다니...

끊임없이 자신의 기억을 말살하는 당의 통제 방식이 싫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거짓말, 모든게  다 거짓이다. 모든게 다 날조다.

이중사고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통제하는 빅 브라더 체제는 타도해야 한다.

빅 브라더를 배반하고 지하 세계에서 활동 중인 골든 스타인의 형제단에 가담하고 싶다.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이런 자유를 찾아야 한다.

여기까지 보면 윈스턴은 철저한 혁명가가 될 것 같았다.

<브이 포 벤데타> 라는 영화속 의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V' 처럼 민중과 함께 싸워 빅 브라더를 타도하고 당을 전복시켜 승리하는 형제단의 영웅이 되길 바랬다.

실제 역사에서 '가이 포크스(1570~1606)' 1605 11 5, 영국 국회의사당을 화약으로 폭발 시키려 했던 16세기 테러리스트였다.

가이 포크스는 당시 지배체제를 전복 시키려 했다.  웨스트민스터 궁을 통째로 날려 버릴 심산 이였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그는 내부자의 밀고로 준비했던 거사는 결국 실패 하고 말았다.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V'의 상징이었던 승리(Victory)는 소설<1984>에서는 당의 선전용 브랜드로 전락했다.

'승리 맨션, 승리 담배, 승리 술, 승리 면도날' 등으로 초라한 물품에 붙혀진 '승리'란 이름은  당의 모든 선전은 거짓이라는 역설을 보여준다.

소설 속 주인공 윈스턴도 형제단이라고 믿고 싶었던 '오브라이언' 에게 결국 변절 당하고야 만다. 또한 자신은 육체적, 사상적 유일한 동지나 다름없는 '줄리아'를 변절 하고야 만다.

고문과 세뇌를 통해 자신이 가졌던 신념은 모두 남김없이, 깨끗하게 지워져 버린다.

윈스턴은 눈을 감으며 자신의 투쟁은 승리했다고 믿었다.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아니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라니?

 

도대체 왜 이런 결말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그의 소설은 '가이 포크스' 사건 처럼 윈스턴의 바람은 실패가 되고 말았다.

오웰은 환타지 소설같은 혁명을 하고 멋지게 성공을 하고야 마는 결말보다 승리의 역설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더 강한 메세지를 남겼다.

그렇게 보면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가이 포크스 일화의 성공 버젼인 셈이다.

어쩌면 오웰은 '가이 포크스' 의 실제 역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1984>의 결말은 과거 영국에서 발생했던 역사적 현실을 반영했고 또한 작가 자신이 윈스턴의 입장에서 내릴 수 밖에 없는 결론이라 생각된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면 '조지 오웰' 은 영국인이란 사실에서 실마리가 있다.

그가 작품을 쓴 1948년의 영국은 2차 대전 승리국중 하나였다.

영국은 한 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였던 대국이였다.

오웰은 그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 뱅골에서 태어 났다.

그는 영국식 교육을 받았고 당시 영국의 식민지 나라였던 버마(미얀마) 에서 경찰로도 활동 했다. 또 후에는 스페인 내전까지 경험한 이력도 지녔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자신의 나라 제국주의인 영국과 그의 식민지 사정을 누구 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제국주의가 어떤 수단으로 식민지를 다스리는 지를 몸소 겪은것이다.

남을 다스리려면 수단은 통제밖에 없다.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나라를 핍박했듯이 영국이란 나라도 그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는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당시 소련의 스탈린식 체제에 대한 오웰의 경계심은 또 다른 제국주의 모습을 본 것이 아니였을까?

그래서 오웰이 묘사한 빅 브라더의 모델은 사실 스탈린 모습이라고 한다.

 

오웰은 제국주의 , 전체주의가 싫었던 것이다.

자신도 제국주의에 속한 사람이지만 오웰은 작가적 양심을 지녔다고 보아진다.

나치즘의 광기를 보여준 히틀러의 충직한 부하 '아돌프 아이히만' 처럼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인정안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웰은 윈스턴의 마지막 모습에서 작가적 양심을 역설로 대답한다.

그냥 믿고 사는게 행복이고 승리라고. 그리고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고.

 

책을 덮고 나야 마지막 결말이 의미 하는 바가 무엇인지 드러나고 점차 두려워 지기 시작한다.

단순히 1984년 이란 시간에 집착하면  그 시절 추억이나 굿모닝 오웰 같은 감정에 빠지게 된다. 오웰의 예언은 틀렸다고.

이 책이 시간이 지날 수 록 무서운 통찰이라 여겨지는 점은 '빅 브라더' 가 진짜로 우리를 지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 주위의 수많은 CCTV , 우리의 선택을 강요하는 수많은 알고리즘, 내 편 아니면 전부 적이라는 이분법적인 정치, 빈부의 격차, 가짜 사이비 뉴스의 범람, 그리고 사상을 통제 하는 언론들등 소설속의 빅 브라더와 골드 스타인이 바로 우리 곁에 이미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다시 질문해 보자.

2더하기 2 4라고 말 할수 있는 자유를 우리는 과연 가지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내가 속한 집단이 4가 아닌 답을 한다면 나는 집단의 의견에 거역 할 수있는가?

내 적이라고 규정한 집단이 옳은 소리를 했어도 난 그 의견에 동조 할 수 있는가?

더 쉽게 말해 내가 지지한 당이 사실 틀렸어도 난 따라야만 하는가?

나는 과연 떳떳하게 세뇌 당하지 않았다고 자신 할 수 있는가?

보이고 들리는 정보에 휘둘리지 않을 자유가 나에게 진정 있는가?

소설속 마지막의 윈스턴 처럼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 했다고 믿으며 사는 것은 아닌가?

 

니체(1944~1900)는 여동생 엘리자베스에게 이렇게 전했다고 한다.

'너의 영혼이 평화와 행복을 원한다면 믿어라. 그러나 네가 진리의 사도가 되길 자처한다면 질문하라'

<1984>를 통해 오웰이 던지 메세지는 희망을 전해 주는게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려했었고 실제 역사 1984년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응답하라 1984' 같은 추억을 떠올렸고, '굿모닝 미스터 오웰' 로 그가 그린 세상이 오질 않았다고 자신 했다.

그러나 다시 40년이 지난 오늘날,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우리는 또 다른 불안을 느낀다.

결국 오웰이 진정 두려워 했던 것은 자유가 없는 미래였다.

그래서 그의 두려움은 이제는 현재 우리의 두려움으로 공존하게 되었다.

2더하기 2 4 라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자유.

이미 대답하기에 망설여 지는 시대에 접어 들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 그가 말 한 1984는 지났지만 우울 하게도 빅 브라더는 그 날 태어났다.

어쩌면  우리는 윈스터와 같은 결말이 되지 않기 위해 다가 올 미래에는 가이 포크스 가면을 써야 될 지도 모르겠다.

오브라이언은 분명히 ‘우리는 어둠이 없는 곳에서 만날 거요.‘ 라고 말했었다. - P40

모든 역사는 필요에 따라 깨끗이 지우고 다시 고쳐쓰는 양피지 위의 글씨와도 같은 것이었다. - P59

위기의 순간에 싸워야 할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육체라는 사실에 그는 적잖이 당황했다. - P142

그들은 당이나 국가나 이념에 충성을 바치지 않고 그들 자신에게 충실했다. - P230

우리 사회에서 현재 어떤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현실 그대로의 세계를 가장 모른다. - P295

자신의 존재를 버리고 스스로 당이 될 만큼 당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그때는 불멸의 전능한 존재가 된다네. - P365

마지막 까지 그들을 증오하면서 죽는것. 이것이 바로 자유다. - P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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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 최신 원전 완역본 코너스톤 착한 고전 시리즈 2
헤르만 헤세 지음, 박지희 옮김, 김선형 해설 / 코너스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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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수레바퀴 아래서

지은이: 헤르만 헤세

   : 방황, 그 순수한 몸부림, 새로운 세계의 시작

 

 

헤르만 헤세(1877~1962)의 소설에는 헤세 본인의 방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헤세의 소설은 자전적 성장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헤세가 중점을 둔 성장은 어린이 시절에서 청소년으로 다시 청년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려 내고 있다.

시간을 달리하며 내놓은 그의 소설에는 자신의 성장 과정을 조금씩 변주해 나간다.

유년 시절의 천진난만하고 순수했던 마음과 청소년기의 질풍노도의 감정, 그리고 그시기 폭풍우를 견뎌낸 뒤 어느덧 불쑥 성장한 어른이 되는 과정이 담겨 있다.

 

 

헤세 본인의 어린 시절에서 어른이 되는 경험이 단순히 보면 극히 개인적인 것 같지만 방황과 성장 이란 것은 인류의 보편적인 경험 이기도 한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이유로 헤세는 1946년에 <유리알 유희>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을 받은게 아닌가 싶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내가 읽은 헤세의 작품중 읽었던 순서로 치면 <데미안>을 먼저 읽었고 다음으로 <싯다르타>, <유리알 유희> 에 이어 마지막으로 읽은 작품이다.

헤세가 이 소설들을 출간한 시점으로 보면 <수레바퀴 아래서> 1906년 헤세가 29살 때, <데미안> 1919 42살에 , <싯다르타> 1922 45살에, <유리알 유희> 1943 66살에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의 이 작품들을 각각 읽을때는 미처 알아 채지 못했지만 이들을 전부 읽고 난 후 이 작품들 사이에는 연결점과 공통된 구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 소설 작품들을 묶어 '헤세의 세계관' 이라 부르기로 했다.

헤세의 세계관에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배움과 성장' 이라는 주제의식을 올곧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헤세 세계관의 출발은 <수레바퀴 아래서> 에서 시작하고 <데미안> <싯다르타>를 거쳐  <유리알 유희> 에서 완성을 이룬것으로 보인다.

헤세의 세계관을 분석한 공통된 구조는 이렇다.

첫째, 세계관 속의 주인공들의 어린 시절은 순수하고 행복 했다.

둘째, 세계관 속의 주인공은 배움의 공동체(학교)에 들어가고 그 안에서 사춘기를 맞이 한다.

셋째, 주인공은 공동체 안에서 정신적 힘든 방황을 격하게 겪는다.

넷째, 그 모든 방황의 중심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주인공의 성향과는 완전히 다르다.

다섯째,  결국 친구를 통해 힘겨운 방황을 끝내고 성장하게 된다. 즉 어른이 된다. 또는 깨달음을 얻는다.

 

 

세계관의 틀에 대해서는 지극히 개인적 생각이니 당연히 다른 의견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구조가 내가 본  4개의 소설에만 해당 되는 것이니 다른 헤세의 소설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수레바퀴 아래서>에 이에 어울리는 표현이 나온다.

Differendum est inter et inter(같아 보여도 속은 다른 법이다.) 의 문구 처럼 헤세 세계관의 작품은 뭔가 다 비슷하게 닮아 있지만 다른점도 분명 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세계관 속엔 헤세의 자전적 경험이 강하게 투영 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세계관 속에 주인공과 관계된 친구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처음엔 친구와의 갈등으로 주인공은 방황하지만 결국 그 친구를 통해 배움과 성장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 기밴라트 와 헤르만 하일너, <데미안>의 에밀 싱클레어와 데미안,  <싯다르타>의 싯다르타와 고빈다 , <유리알 유희> 의 요제프 크네히트와 플리니오 데시노리 등의  관계가 그렇다.

 

 

내가 보기엔 실제 헤세가 경험한 자신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소설화 하는 과정에서 본인과 친구의 관계를 좀더 극적으로 그려 내지 않았나 싶다.

즉 소설속의 주인공과 친구는 현실속의 헤세와 그 시절 헤세가 사귀었던 실제 친구 를 반영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소설은 소설 이기 때문에 어쩌면 친구는 허상의 존재이고 본인의 또 다른 자아 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주인공과 갈등하는 친구는 주인공 본인의 또 다른 자아 혹은 헤세가 이상화 시킨 또 다른 자기 분신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현실의 우리는 한가지 고정된 성격을 지니지 않았다.

우리의 자아는 고정된 하나가 아니라는것이다. 항상 변한다.

현실의 나와 내가 추구하는 이상형의 나는 내 안에 공존하는 셈이다.

어쩌면 비록 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나의 모습에 나는 도달하지 못 할 수도 있지만 그 둘의 존재는 본래 하나 라는 것이다.

이게 심리학인지 소설적 장치인지는 모르겠다.

분명 헤세가 추구하는 완벽한 인물상은 주인공 혹은 본인의 반쪽 자리 성향과 소설속에 나오는 반쪽 짜리 친구의 성향이 합쳐져야 완성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현실과 이상의 대립은 결국 둘은 하나 라는것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소설속에 담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한 과정중에 배움과 성장은 딱 맞는 주제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 그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출발하여 <데미안> <싯다르타>를 거쳐 <유리알 유희>로 완성 됐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곧 헤세 본인이 나이를 먹어가며 실제로도 성장하고 깨달아 가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수레바퀴 아래서> 는 헤세가 29살에 쓴 작품으로 본인의 실제 경험했던 청춘의 시절과 시간적으로 무척 가까운 시기이다.

 

그래서 헤세 본인의 자전적 경험이 소설속에 가장 많이 녹아져 있다.

실제로 신학교에 진학했고, 시인이 되고 싶었고, 자살 시도를 했으며 , 정신 치료를 받아야 했고, 또 기계공이 되야만 했던 자신의 모든 경험이 온전히 들어가 있다.

특히 헤세가 가장 예민했던 시기에 고민했던 죽음에 대한 성찰이 가장 진지했다.

그래서 <수레바퀴 아래서>는 수레바퀴의 상징으로 표현 되는 '바퀴 아래에 깔리면 죽는다' 는 표현이 복선으로 나온 것이다.

 

사실 수레바퀴에는 위 아래가 없다.

바퀴는 지면에 닿아야만 위 아래가 존재하게 된다.

소설에는 모두 3개의 바퀴가 언급되어진다.

물레바퀴, 수레바퀴, 톱니바퀴.

이들 바퀴 모두가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물레바퀴는 순수한 어린시절의 동심, 수레바퀴는 죽음을 사색하는 고뇌, 톱니바퀴는 현실적인 삶과 타협을 해야 하는 심정을 상징 한다고 볼 수 있다.

한스 기벤라트는 3개의 바퀴를 순서대로 접하며 성장했고 이는 곧 헤세 본인의 상처 받은 그 시절의 아픔을 상징한 것이라 생각 된다.

 

결국 세계관 초기 작품인 <수레바퀴 아래서>는 헤세 본인이 회상하는 아픔을 가장 많이  담아 냈고 42살에 나온 <데미안>에서는 그 시절 아픔을 치유 하는 시도로 풀이가 된다.

사실 <데미안>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작품이다.

이 시기의 헤세는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시도를 한다.

소설 속의 '아프락삭스' 에 대한 언급을 통해 이미 헤세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승화 시키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 이후 3년뒤에 나온<싯다르타> 에서 헤세는 정신적 방황을 끝내고 '붓다' 라는 인간 완성자를 향한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을 설정 한다.

싯다르타의 여정을 통해 헤세는 어느 누구에게도 의지 하지 않고 오직 홀로 서기를 통해 결국 붓다가 깨달은 경지를 본인도 이루겠다는 의지를 표현 했다.

 

 

 

그리고 말년의 <유리알 유희> 에서는 앞서 경험한 모든 과정을 유리알 하나에 응축 시킨 경지를 보여준다.

<유리알 유희> 는 미래의 시점으로 동서양 모든 정신 문명의 최고 경지에 오른 인물 유리알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 의 전기를 쓴 것이다.

여기서 요제프 크네히트의 결말과 <수레바퀴 아래서> 의 한스 기벤라트의 결말을 비교 하면 참으로 Differendum est inter et inter하다. 즉 같으면서도 다르다.

겉으로 볼 때 주인공이 모두 물속에서 최후를 맞는 것은 같다.

그런데 한스 기벤트를 떠올리면 많이 아쉽고 동정심에 측은하기 까지 하다.  

하지만 크네히트는 아쉬운 마음 보다는 이뤄야 할 것을 이미 다 이룬 성자의 모습으로 승화가 되었다.

 

결국 헤세 본인이 방황 뒤에 오는 성장의 완성을 말년의 작품속에 이렇게 이루어 낸 셈이다.

방황을 통해 배움과 성장을 하고 결국 깨달음이란 가장 이상적인 경지로 승화 시킨 것이다.

 

 

 

우리가 경험 했던 모든 방황은 순수 했다.

방황속에서 순수는 때묻고 오염 되어지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오염이 아닌 순수의 또 다른 형태 였던 것이다.

그 모든 방황은 결국 우리가 성장하고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 이었던 것이다.

새가 알을 깨고 나와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날아 가듯이, 방황은 알을 깨는 과정 이었고, 수레 바퀴가 굴러가는 과정이었다.

멈춰진 수레바퀴 아래에 있지 말고 바퀴는 계속 굴려야 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윤회의 바퀴를 결국엔 벗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방황은 또 다른 세계로 향하는 순수한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이제 방황은 기대가 된다.

또 어떤 세계를 맞이 하게 될 지...

헤세는 우리에게 또 다른 세계로 들어 가는 문을 알려줬다.

방황, 순수한 몸부림, 그 끝에 새로운 세계가 기다린다.

 

 

 

 

Per aspera ad astra(시련을 거쳐야 성공 하리라)! - P109

Differendum est inter et inter(같아 보여도 속은 다른 법이다) - P123

마치 수레바퀴에 치인 길가의 달팽이 처럼 한스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약간 상처를 입은 채 촉수를 집어넣고 몸을 웅크렸다. - P175

어휴, 그만합시다. 당신이나 나나, 어쩌면 우리 모두 저 아이를 너무 소홀히 대했던 것 같지 않습니까?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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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주기 - 세상을 내 편으로 삼는 법
오후 지음 / 생각의힘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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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보여주기

지은이: 오후

   : 뭔가를 보여 준다는 것에 대해서

 

 

80년대 코미디의 황제였던 고(故) 이주일의 유명한 대사가 있다.

'뭔가 보여 드리겠습니다.'

TV에서 수지큐 음악에 맞춰 엉덩이를 뒤로 빼고 뛰뚱거리며 걸어나오는 우스꽝스런 등장 순간부터 웃겼다.

그는 등장에서 부터 무언가를 보여줬다. 대중의 웃음을 자아내는 뭔가를.

그때의 대중들은 그가 보여주는 행동, 말투 하나하나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등장 2주일 만에 대박을 터트려 '정주일'에서 '이주일' 로 불리게 된다.

 

 

이 책 <보여주기> 는 그 시절 코미디 황제의 유행어 처럼 현실에서 성공을 이루어낸 뭔가의 사례들을 보여준다.

저자 '오후' 는 이번 책을 통해 처음 접했는데 그가 성공의 사례를 보는 시선은 신선했다.

동서고금을 통해 이슈가 되었던 사례들을 통해 사이다 같은 어투와 자신만의 시각으로 비꼬아 현상을 파헤져 보는 작가의 통찰이 돋보였다.

 

 

루브르에서 발생한 모나리자 그림의 도난 사건으로 인해 '개중의 하나' 였던 작품이 '온리 원' 이 되어버린 일화, 배우 위도나 라이너의 절도 사건으로 인해 추락한 이미지를 다시 반전시킨 일화, '두려워 하지 마라, 단지 물이다' 는 문구로 광고를 내건 '리퀴드 데스' 의 성공 일화, 삼국지 최후의 승자 사마의와 현재, 중국의 일인자 시진핑의 도광양회(韜 감출 도 光 빛 광 養 기를 양 晦 어두울 회: 빛을 숨기고 어둠속에서 실력을 키운다) 의 처세 통해 시대를 초월한 성공한 사람의 이면, 88올림픽 비하인드 스토리, 삼양라면의 우지파동 사건등등... 굵직하게 이슈가 되었던 사안들 중심으로 뭔가를 보여 준다.

사실 그가 소개하는 성공의 사례들은 우리가 메스컴이나 책에서 한번쯤은 들어봤거나 접해본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작가는 이미 알려진 사례들을 통해 성공이란 것이 일부 자기계발서에서 주장하는 고정적인 공식이나 법칙에 의한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점은 나역시도 무척 공감하는 내용이다. )

작가는 '성공은 하나의 기술' 이라고 말한다.

성공을 하는 모든 근원적인 바탕에는 실력과 운이 중요하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성공의 성취를 이뤄내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취약한 점을 겉으로 포장해 내는 이미지도 중요하고 또 화려한 성공 뒤에 감춰놓은 치사한 꼼수도 성공의 기술중 하나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러한 요소들이 결합하여 대중 앞에 혹은 사회에, 보여주게 되는 것이란다.

일단 성공을 보여 주게 되면 그 전의 소소한 실수나 꼼수에 대해 어느 누구도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꼼수라 하면 뭔가 정당하지 못한 비겁한 술수를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 현실 세계에서는 옳다고 승리하는 것은 아니고, 더 뛰어나거나 노력한다고 꼭 성공하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오히려 정당한 수보다 꼼수가 잘 먹히는게 현실이 아닌가?

정치인들은 항상 서로를 적으로 규정해서 우리편은 선동하고 상대편을 공격해야 자기 당의 지지율이 올라 가게 된다.

크리에이터들은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잘 나가는 상대를 깍아 내리는 어그로를 끌어야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

 

 

그들에게 무조건 관심을 놓치지 않는것, 자신을 기억 속에 남겨 놓는 것이 최우선이 되는 것만이 우선 이다.

지금은 성공한 사람들도 한때는 꼼수를 썼었고 그게 먹혔기 때문에 성공의 발판을 삼았다는 면에서 치사하지만 꼼수 또한 성공의 기술인점에 공감이 되어진다.

어쩌면 치사한 꼼수를 쓸 정도로 당사자는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책에 소개되는 많은 일화는 어찌보면 가볍게 볼 수 없는 주제들을 작가는 가볍게 다루는 재주를 지녔다.

책은 아무나 내는게 아니지만 이 책을 보고 나면 이제 앞으로 책은 아무나 내도 될 것같은 생각이 든다.

그런면에서 저자가 소개하는 책을 내는 가장 쉬운 방법에 대해 책의 부록 부분은 참고할 만 하다.

(이런면에서 저자는 영리하다. 독자의 니즈를 아주 잘 파악하는것 같다.)

저자는 무명시절에 방송 작가와 팟케스트 작업을 통해 다양한 분야의 많은 자료를 모아 두었다고 한다.

그때 다져진 내공을 통해 현재 책을 내는데 충분히 활용한 것이라고 한다.

 

 

그가 책에서 언급한 섞고 섞으면 새로운 뭔가가 나온다고 한 것처럼 이미 알려진 많은 일화들을 섞어놓은 작가의 편집 능력이 빛을 발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한 성경의 말씀 처럼 새로운 것은 없지만 새롭게 보이게 만드는 편집의 중요성을 새삼 이 책을 통해 한수 배우게 된다.

 

 

진짜 이책의 보여주기는 짜집기 능력의 진수를 보여준게 아닐까 생각된다.

비빔밥이 제 맛을 내려면 각각의 재료를 충분히 잘 섞는데 있는것 아닌가?

그래서 이 책은 비빔밥 같은 맛을 내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책을 보고 난 후 아쉬움을 넘어선 불만을 언급해야 겠다.

책을 제작한 출판사의 성의 없이 보이는 겉 표지에 대한 불만이다.

책값에 비해 너무 빈티나게 제작한 것 아닌가 싶다.

작가는 책 판매 인세의 전부를 가난한 예술가를 위해 사용 하겠다는 의향을 밝혔는데 작가의 바램되로 잘 됐으면 좋겠다.

어쩌면 책 자체를 없어 보이게 만든것도 의도된 꼼수 인지 모르겠다.

이 또한 보여주기 일부라는 것을 노린것 일까?

 (어디서 동네 문방구 복사 같은 수준의 표지를 제작했는지.... )

비빔밥 맛있게 잘 비벼 섞어놓고 일회용 도시락 용기에 담아 파는 수준 같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보여주려면 제대로 보여 줘야 하는것 아닌가?

 

 

뭔가 보여 주겠다는 이주일은 결국 92년도 14대 국회의원에 당선이 되어 국회에 입성하게 된다.

당시 14대 국회의원중에 최불암, 강부자, 이순재등의 연기자 출신도 있었는데 코미디언 출신으로는 현재 까지 유일무이 하다.

그가 정치판을 떠나며 남긴 말이 있다.

'내가  4년동안 나보다 코미디를 잘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오히려 코미디를 한 수 배우고 간다.'

뭔가를 보여 주겠다는 호언장담을 이뤄낸 그는 2002 61세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보여주기라... 한숨 부터 나온다.

세상에 보여지는 많은 것들에 대해 한참을 생각해 본다.

난 아직 뭔가를 보여 주려면 멀고도 멀었다.

 

손자: 사자의 입에 머리를 집어넣는게 예술인가요?
할아버지: 아니, 사자의 입에 머리를 집어넣는 건 용기지.
사자가 머리를 잡아먹지 않게 하는게 예술이고.
-<영화 파멜만스 중에서> - P13

아마 지금도, 스스로는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겠지만,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에 선동당하고 있다. 그런분들을 위해 타인 혹은 집단의 전략에 속지 앟는 간단한 팁을 드리겠다. 단언하는 사람을 조심하라.(바로 지금처럼) - P73

진정 똑똑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똑똑하다는 것을 내보이지 않는 법이라네. -<신삼국> 45화중에서

데이터를 오래 고문하면 그 녀석은 어떤 말이든 한다.
-도널드 코스 - P161

좋다고 다 갖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갖고 싶지 않다고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좋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 이혁진 소설<사랑의 이해> 중 - P177

좋은 예술가는 베끼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파블로 피카소 - P205

우리 삶에 완벽한 거짓이랄 건 별로 없다.완벽한 진실도 없다....중략....나는 이 책에서 몇 번이나 거짓말을 했을까?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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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공부가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 수포자 8등급을 8개월 만에 수능 1등급으로 만드는 `각성자 공부법`의 모든 것!
임진강(데미안) 지음 / 빌리버튼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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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처음으로 공부가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지은이: 임진강(데미안)

   : MINI & MANY

 

 

 

우리집은 고3, 2 아들 둘이 있다.

이 책은 두 아들이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샀는데 정작 애들은 관심도 없다.

'공부가 재미있어 진다니...    그럼 나라도 읽어서 애들 한테 알려 주자. 어떤 비법을 말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하루 만에 몰입하여 책을 읽어냈다.

 

 

 

이 책은 지금은 잘 나가는 수학 과외 강사 이지만 본래 수포자 였던 저자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쓰여 졌다.

저자는 수포자 8등급을 일년 안에 1등급으로 만들수 있다고 자신 만만하게 말한다.  대한민국에서 수포자나 열등한 학생을 자신 만큼 단기간에 성적을 올릴 수 있는 과외 선생은 없다고 단언한다.

저자 본인이 고2 까지 수포자 였다가 공부에 각성한 후 11개월 만에 전교 1등을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학생들에 대해서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고 또 각성시켜 자신과 같은 결과를 낼 수 있다고 자부 하는 것이다.

 

 

 

유유부단인지 우유부단인지 구별 조차 못했던 학생 시절, 앞으로도 우유부단(優柔不斷)한 인생을 살 수도 있었던 고2때, 그 해 수능날에 순간적으로 공부를 해야 겠다는 자각을 하게된다.

겨울방학이 되어 제주도에서 서울로 올라가 고시원에서 2개월간의 독학을 통해 본인만의 공부법을 터득한다.

저자는 이러한 자신의 경험을 통해 각성자 공부법을 주창한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각성자 공부법을 언급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각성자 공부법은 저자의 학생 시절 예처럼 단기간에 성적을 올리는 방법을 말한다.

즉 기간은 짧게, 대신 시간은 극단적인 양을 몰아 넣어 단기간에 실력 향상을 키운다는 것이다.

저자는 압도적인 공부 시간과 효율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공부에 하루 16시간 이라는 압도적인 시간과 자투리 시간마저도 최대한 이용 해야 한다.

각성자 공부법, 말은 거창 했지만 사실은 정말로 단순한 방법이다.

 

 

하지만 효과는 저자를 비롯한 많은 사례자들 말대로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 같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책상에 앉아 먼저 공부해야 겠다는 의지가 우선 돼야 한다.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이 없다면 저자가 주장하는 각성자 공부법은 하기 어렵다.

아니 할 수도 없는 공부 방법이다.

 

말이 좋아서 간절하게, 절실하게, 절박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건데 그거 결국 독한 마음 먹으라는 소리다.

 

책 전체에 걸쳐 극단적인 공부의 양이 실력을 만든다는 독한 마음을 먹어야 할 수 있는 방법을 주구장창 말한다.

 

 

그러니 공부 하는데 무슨 비법이 있겠나?

결국 공부는 엉덩이 싸움이란 말이다.

 

책을 읽고 난 후 우리 큰 애 한테 책에 나온 각성자 공부법에 진지하게 말을 건넸다.

'이제 너도 고 3이니 16시간 정도는 책상에서 공부 해야 되지 않겠냐?'

아들 왈,

 

'아빠 , 공부는 재능으로  하는 거야, 그 책에서 수포자가 1등급 됐다는 거는 자신에게 본래 공부 재능이 잠재 되어 있었던 거야. 그런 사람은 여지껏 안하다 몰랐던 거고. 해도 안되는 사람은 안되는거야. 다 되는게 아니라고, 참 아빠도 순진하네.'

'........'

 

내가 만약 우리 애들 같은 시기라면 어떻게 했을까?

저자의 각성자 공부 한다고 나도 매일 16시간 씩 공부에 몰입 할 수 있을까?

우리 애 말대로 그건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나 하는 방법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뭐든 발화가 안되면 불에 타질 않는다.

내 안의 열정도, 절박함도, 간절함도 타야 불이 붙는다. 아직 안 타는걸 혼자 애 태운다고 태워 지겠는가? 결국 타오를 때 까지 한곳으로 모아야 하겠지. 좀 더 기다려 봐야지.

 

 

 

각성(覺 깨달을 각 醒 술깰 성) 은 깨우침을 말한다.

각성에 대해 저자 본인의 필명이 '데미안' 임을 알고 유추해 본다면 소설 데미안의 구절이 연상 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깨우침은 깨는것이다.

새가 알을 깨는 것은 자신의 세계을 깨는 것이다.

자신이 속했던 기존 세상을 깨고 또 다른 새로운 세상 밖으로 나오는것, 그것이 깨우침이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우침과 다르지 않은 뜻이다.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 : 좋은 비는 시절을 알아 

  당춘내발생(當春乃發生 : 봄이 되면 내린다...  두보, 춘야희우(春夜喜雨: 봄 밤 비내리는 기쁨.   중에서>

 

 

 

 

 

 

결국, 자기는 그냥 자기식대로 살겠단다.

 

그래 이놈아, 너는 너 대로 살아라. 그게 맞다.

 

 

좋은 비는 시절을 안다고 했다.

모든 것은 시절 인연이 와야 되는가 보다.

그게 공부든 깨달음이든 ....

 

 

 

 

이렇게 성적은 마음먹고 제대로 공부하면 올라요. 현재 실력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아요. 문제는 학생 본인의 의지와 마음가짐입니다. - P32

이처럼 모든 사례들의 공통점은 단기간에 벼락치기의 연속이라고 할 정도로 극단적인 노력을 합니다.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막대한 양을 투입해서 압도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습니다. - P100

남들이 10년 걸릴 공부를 왜 1년 안에 해낼 수는 없을까요? 노력 없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은 도둑놈 심보입니다. 극단적 노력과 최적의 효율과 탁월한 전략이 결합되면 압도적인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 P147

시시한 목표가 아니라 나를 움직이게 하는 꿈을 목표로 삼으세요. - P153

암기는 머리 싸움이 아니라 근성 싸움이에요.그리고 습관의 문제 입니다.오늘도 외우고, 내일도 반복해야 합니다. - P204

제 자신을 깊이 있게 단련하고 스스로 조금 더 단단해지고, 여물어져 가는 과정이 바로 공부라고 생각 합니다. -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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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읽은 책은 절대 잊지 않는다 -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어른의 독서
허필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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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한번 읽은 책은 절대 잊지 않는다.

지은이: 허필우

   : 독서가 미래의 나를 구원 한다면?

 

 

 

이 책<한번 읽은 책은 절대 잊지 않는다> 의 제목에 끌렸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어른의 독서" 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그래, 어떻게 읽으면 한번 읽고 나서 책의 내용을 까먹지 않을 수 있을까?

 

 

 

나도 뒤늦은 나이에 독서를 시작하면서 느꼈던 문제가 독서후에 무엇을 읽은건지 잘 떠오르지 않은 점이었다.

 

 

다 보고 나서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면 내 머리속엔 남아있는게 별로 없는것 같았다.

그리고 책 한권을 매번 다 읽을때 마다 내면에 뭔가 변화가 일어나서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날 줄 기대 했는데 막상 그것도 아니었다.

마치 내가 배드민턴 레슨 한 두달 계속 받았다고 실력이 늘지 않는 것처럼 독서도 그런것 같았다.

그냥 무작정 읽는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자 이러한 문제의 해결법으로 독후감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한권 읽으면 바로 꼭 독후감을 써서 정리를 하자.

 

그런데 막상 독후감 쓰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읽는것은 비록 난이도에 영향을 받지만 어쨓든 읽어낼 수만 있다면 끝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독서한 내용을 글로 표현 하는것은 읽기와는 또 다른 문제 인것 같다.

둘 다 독서에 관련 된 행위지만 나에게는 분명 서로 다른 영역이었다.

이 책은 이런 두가지 다른 능력인 독서 능력과 글쓰기 능력을 모두 향상 시키는데 참고가 될 만한 책이다.

책에서 저자는 독서와 독후 활동을 합쳐서 독서력이란 표현을 썼다.

책을 읽고 이해하는 문해력과 독서후 활동으로 자신의 생각을 글로 요약해서 써내는 능력을 합치면 독서력이 되는 것이다.

 

저자는 읽은 책을 절대 잊지 않는 비법으로 자신이 특허를 낸 'G.C 카드 쓰기' 를 하라고 한다.

G.C ( GAIN + CHANGE) , '획득' '변화' 의 알파벳 약자를 내세운 독서 카드 작성법을 말한다.

저자 허필우는 현재 4급 공무원이자 대학원에서 강의 까지 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저자는 30대 중반에 독서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천권이 넘는 책을 읽으며 성취한 자신의 독서 경험과 성과, 그리고 G.C카드 작성과 활용에 대해 노하우를 소개 한다.

 

 

 

독서를 한 후 내용을 정리하고 글로 남겨 두는 독후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면은 작년에 읽었던  손승욱의< 10억짜리 독서법> 하고 일치한다.

10억짜리 독서법에서는 '자료화 독서법' 을 소개 했었다.

'자료화 독서법' 이란 책을 읽는 과정중에 본인이 생각하는 중요한 알맹이들을 따로 모으고 수집하여 자료화 시켜 놓는다.  그리고 나서 그 자료들을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정리 하는 독서후 활동을 말한다.

책의 핵심을 정리한다는 면에서는 둘 다 일치하고 둘의 차이점은 하작가는 '카드' 로 정리 한다는 것이고 손작가는 '노트' 에 정리 시킨다는 것 이다.

 

저자가 경험 했던 독서법의 조언들, 초보 독서는 자기 계발서 부터 시작하라, 독서는 읽기를 편집하는 과정이다. 최적의 독서량은 일주일에 한권 이다.  자녀에게 남겨주는 최고의 유산은 독서력이다등등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았다

 

 

 

이처럼 독서의 효용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가 없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점은 꾸준히 지속할 수 있느냐는 문제이다.

독서든 독후 활동이든 중간에 포기 하거나 흐지부지 되지 않고 언제 까지고 지속 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책을 낸 작가 본인들이야 독서의 매력을 충분히 체험했겠지만 나같은 초보 독서가들의 문제는 어떻게 해야 꾸준히 독서 활동을 지속 시킬 수 있을까에 있다.

 

 

좋은책 한 두권 읽었다고 인생은 당장 바뀌지 않는다.

독서가 나의 잠재력을 일깨워 주고 내 인생의 변화를 일으켜 주리라는 환상을 심어주는것은 아닐까?

어쩌면 독서도 하나의 믿음이 되는것이 아닌가 싶다.

책이 나를 구원해 주리라는 믿음.

 

 

조선시대 '간서치(看書痴: 책만 보는 바보)' 라 불렸던 사내가 있었다.

이름은 이덕무. 책 보는것을 너무나 좋아해서 마치 책에 빠진 바보와 같다고 스스로가 정한 별명이란다.

그렇다고 책만 보고 세상 물정 모르는 앞뒤가 꽉 막힌 선비는 아니였다.

무척 가난 했던 어느날은 너무 배가 고파 친구 유득공과 함께 자신이 가진 가장 비싼책 <맹자>를 팔아 밥을 짓고 술을 마셨다고 한다.

책만 소중히 여겼다면 어찌 비싼 책을 팔 수 있으랴?

순수한 책 바보 였지만 또한 낭만도 함께 가졌던 선비 였던것 같다.

이덕무는 정조 시대 박제가, 정약용등 과 함께 정조의 신임을 받을 정도로 규장각의 실학자 가운데 에서도 가장 박식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그도 말년에 문체반정 이후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 했다고 전해진다.

 

 

한때 좋아하는 책을 팔아 자신의 배고픔을 구제했던 이덕무.

 

 

책 바보 간서치는 책을 통해 자신을 구원 했었을까?

과거, 비록 가난하지만 순수하게 책을 좋아 하는 것과 오늘날, 성공을 위해 책을 보는것 중 어느것이 나에게 맞는 독서일까?

 

물론 과거에도 입신출세를 위해 책을 봐야 했던 조선의 수많은 선비들이 있었을 테지만, 결국 오늘날 자기 계발, 성장, 성공을 위해 독서를 하는것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지금의 나는 어떠한 독서를 해야 하는가?

또 어떻게 하면 지속 가능한 독서 활동을 할 수 있을까?

정말 독서 활동이 미래의 나를 구원해 줄 수 있을까?

 

지금의 독서 활동이 미래의 나를 구원 하리라는 새로운 믿음의 신화를 만들어 내는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 하고 '독서가 나를 구원하리라' '글쓰기가 나를 구원하리라' 믿음은 어쩌면 독서의 효용보다 중요할 지도 모르겠다.

독서를 하는 현재의 나를 믿는것, 결국 구원은 나를 믿는데서 시작하는것 일지도 ....

 

 

 

 

 

 

 

독후감은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일이어서 매번 책을 읽고 나서 글을 쓴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다 2015년 김정운 교수의 <에디톨로지>를 읽고 난 후, 독후감 대신 독서카드를 쓰기 시작하면서 나의 독서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 P7

책이란 한 분야의 전문가가 자신의 지식을 기반으로 사고의 중심을 잡고, 전혀 다른 분야의 지식과 지혜를 연결해 독자들을 설득하는 과정이다. - P51

내 방식대로 책을 해체하고 단 한줄이라도 책을 정리할 수 있다는 믿음은 내게 큰 힘을 줬다. - P73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없다. - P104

책은 활자로 인쇄되어 구체적으로 우리손에 잡히지만 고정된 것이 아니다.
책은 저자의 정신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책에 자유를 줘야 한다. - P113

글을 쓰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없고, 자신과 대화하지 못한다. - P148

위대한 유산은 지갑에서 나오는게 아니다.
부모의 독서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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