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차: 내전, 금기일까? 동력일까?

 

내전은 한국 사회에서 금기어와 다름 없다.

입에 올리는 순간, 미친 사람 취급을 받거나 위험 인물로 분류된다.

내전은 악이며, 절대 다시는 언급되어서는 안 될 재앙이라는 합의가 이미 굳어져 있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정말 그럴까?

 

역사를 거칠게 훑어보면, 한 사회가 완전히 다른 단계로 넘어갈 때마다 반드시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내부의 균열, 폭력적인 충돌, 그리고 질서의 붕괴다. 그것은 미화할 수 없는 고통이지만, 동시에 현실을 재편하는 동력이었다.

 

일본을 보자.

세키가하라 전투는 내전이었다. 그 결과 도쿠가와 막부가 탄생했고, 일본은 260년의 안정된 통치 구조를 얻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세이난 전쟁이라는 내전이 있었다. 마지막 사무라이들이 몰락한 그 전쟁은 일본을 근대 국가로 밀어 올리는 결정적 계기였다.

 

미국도 다르지 않다.

미국 남북전쟁은 단순한 지역 갈등이 아니었다. 국가의 정체성을 둘러싼 내전이었다. 그 전쟁을 통해 연방은 강화되었고, 노예제는 역사에서 퇴출되었다. 오늘날의 미국은 그 피비린내 나는 내전의 산물이다.

 

한국은 어떠한가.

우리는 내전을 이미 겪었다. 6.25는 외세가 개입한 국제전이었지만, 동시에 명백한 내전이었다. 그 전쟁 이후 한국 사회는 완전히 다른 궤도로 진입했다. 국가 중심의 질서, 산업화, 강력한 통제와 동원 체제가 그 후유증 속에서 만들어졌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한국 사회는 내전을 “끝난 사건”으로만 기억하려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내전은 끝났어도, 내전을 만들어낸 무의식은 끝나지 않았다. 억눌린 채 다른 형태로 변주되며 살아남았다.

 

그래서 한국 정치는 전쟁의 언어를 사용한다.

상대는 경쟁자가 아니라 적이다.

타협은 배신이고, 중간은 기회주의다.

정치는 협상이 아니라 섬멸전이 된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국 사회의 집단 무의식에는 여전히 “한 번 더 뒤집어야 끝난다”는 감각이 남아 있다.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내전의 기억이 정치라는 무대 위에서 반복 재생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전을 무조건 악으로만 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내전 자체가 아니라 내전을 직시하지 못하는 태도가 더 위험하다고 본다.

 

폭발은 억눌린 것의 언어다.

내전은 사회가 스스로를 속여온 대가다.

균열을 관리하지 못하면, 균열은 언젠가 폭력으로 폭발한다.

한국 정치가 지금처럼 극단으로 치닫는 이유는 단순히 정치인의 자질 때문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미뤄온 질문들이 한꺼번에 밀려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누가 나라의 주인인가?

질서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성장은 누구를 살렸고, 누구를 버렸는가?

 

질문들이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 , 정치는 계속 전쟁을 흉내 낼 것이다.

실제 총칼이 오가지 않을 , 심리적 내전은 이미 진행 중이다.

 

나는 글이 불편하길 바란다.

왜냐하면 불편하지 않다면, 무의식에 닿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내전은 다시 오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내전이 남긴 질문에 답하지 않는 국가는 위험해진다.

우리는 지금, 총 없는 내전의 한복판에 서 있다.

그것은 어떤 계엄이나 탄핵의 문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오래도록 누적되어 온 무의식의 분열이다.


피 흘리는 내전 과연 동력이었을까?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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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 한국 정치, 무의식의 원형

 

한국 정치는 서구 민주주의와 닮았지만 같지 않고,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분명히 다른 형태를 가졌다.

나는 한동안 “왜 한국 정치는 국민에게 불안감을 주는가”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문득 떠올랐다. 지금 여당과 야당의 언쟁만 따라가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 정치를 이해하려면 훨씬 오래된 흐름, 말로 설명되지 않는 집단 무의식의 지층으로 내려가야 한다.

 

글은 그렇게 시작된 개인적 사유의 여정이다.

나는 한국 정치의 ‘무의식의 원형’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그 지층을 뚫고 지나가다 만난 것은 다름 아닌 동학이었다.

 

구한말 조선에서 일어난 동학은 단순한 농민들의 봉기가 아니었다.

양반과 상민, 지배층과 피지배층이라는 오랜 위계 질서를 흔든 쓰나미였다.

동학의 사람들은 이상 “누가 지배하느냐”만 묻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이 하늘이다”라고 외쳤다. 그 말은 분노이자 각성이었다.

억압의 체제에서 벗어나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려는 선언이었다.

사람이 하늘이다

 

그러나 동학의 불길은 강제적으로 진압되었다.

실패는 조선의 자주권을 흔들었고 외세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꺼진 잿더미 속에서 독립운동의 불씨가 피어올랐다. 동학이 한국 정치의 무의식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해진다. 

실패의 기억은 억압과 보상의 감정을 남겼고, 그 감정은 이후 저항과 재탄생의 동력으로 바뀌어 자라났다.

 

동학은 현대 한국 정치의 원형이며 출발점이다.

한국 정치의 무의식은 ‘억압—폭발—좌절—재탄생’의 흐름으로 움직였다.

이후 해방과 전쟁을 거치고, 국가 재건과 산업화, 민주화가 이어졌지만 표면이 달라졌을 뿐 지층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결국 한국 정치 진영의 정체성은 원형의 변주에 불과하다.

 

한쪽은 “나라를 세우고 살려야 한다”며 질서를 중시했고, 다른 쪽은 “사람이 먼저”라며 기존 질서의 재편을 요구했다. 겉으로는 경제성장과 민주화, 안보와 인권의 대결처럼 보이지만, 깊은 곳에서는 동학 이후 계속 이어진 ‘안정’과 ‘해방’의 균열이 충돌하고 있었다.

 

중요한 둘이 단순한 적대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쪽이 강해지면 다른 쪽도 강해진다. 한국 정치의 양극화는 단순한 싸움이 아니라 두 힘이 서로를 존재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커져 왔다.

그래서 오늘의 갈등을 오직 “이념과 진영싸움”으로만 보면 현실을 너무 평면적으로 읽게 된다.

깊은 곳에서는 한국이라는 공동체가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해 100여 년 동안 반복해온 내적 진동이 움직이고 있다.

 

지층을 보지 못하면 정치는 끝없이 싸움으로만 보일 것이고, 국민은 서로를 끝내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의식을 알고 보면 지금의 혼란은 ‘갑작스런 일’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또 한 번 구조를 재편하려는 징후로 읽힌다.

동학이 그랬고, 해방과 전쟁이 그랬고, 산업화와 민주화가 그랬다. 폭발과 혼란은 늘 새 질서의 전조였다.

 

결국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미디어 속의 진영 싸움이 아니라, 그 말 뒤에서 움직이는 역사와 집단 무의식의 흐름일지 모른다.

정치는 표면에서 싸우겠지만, 진짜 흔들림은 더 깊은 곳에서 시작된다.

 

By Dharma & Mah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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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차: 이누야샤, 사유의 여정을 마치며

 

20대 후반, 대학 졸업 후 나의 첫 직장은 한국이 아닌 중국에서 시작했다. 

매일 힘들게 일을 마치고 저녁에 숙소로 돌아와, 할 일 없이 멍하게 지내던 어느 날, 한국의 지인이 CD에 저장된 만화를 보내주었다. 

그 시절 나의 무료함을 달래 줬던 만화가 바로 다카하시 루미코 작가의 <이누야샤>였다.


<이누야샤> 이전에 루미코 여사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만화는 <란마 1/2> 이었다.

일본의 해적판 만화가 유행했던 80년대 후반, 나는 <란마 1/2> 을 처음 접했었다. 물을 부으면 남자에서 여자로 변하는 란마를 비롯한 서브 주인공들과의 우당탕탕한 격투극은 내게는 적지 않은 문화적 충격을 줬다. 

란마가 소화전 호수로 물을 쏘아대면 상대가  물 위를 수영하며 나아가는 장면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더구나 대사는 코미디가 따로 없을 정도로 너무나 웃긴 만화였다. 

당시엔 <란마 1/2> 이 한국 작품이라고 생각했지만 90년대 중반이 되서야 일본 만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중에 제대로 알게 작가 루미코 여사의 작품 <이누야샤>는 나의 20대 후반 타국의 힘겨운 직장에서 하루을 견뎌 냈다는 일종의 보상 같은 역할을 했다. 

직장에서 하루를 버티고 숙소에 돌아와 이누야샤 일행의 나락과 사혼의 구슬을 쫓는 모습에 빠지게 되면 나의 고단했던 하루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최근 들어 유튜브에서 <이누야샤>의 주제 음악 시대를 초월한 마음 올라왔다.  

그리고는 예전에 봤던 <이누야사> 의 장면들이 하나둘 소환되었다. 세월이 흘러 잊혀졌다고 생각한 만화를 다시 돌아보니, 이 작품은 얼마나 촘촘한 관계의 서사로 엮여 있었는지, 그리고 그 당시 내가 그 안에서 얼마나 큰 위로를 받고 있었는지를 25년이 지난 후에서야 알게 된 것이다. 

사회 초년생의 멍한 눈으로 봤던 <이누야샤>가 사회를 통과한 사유의 눈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누야샤> 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 중 한 명이 이누야샤의 아버지 투아왕이다. 

그가 죽으면서 장남 셋쇼마루에게는 살생환을, 반요인 아들 이누야샤에게는 철쇄아를 남긴다.

살생환은 죽은 자를 베어 살리는 , 철쇄아는 천 마리 요괴를 한 칼에 베어버리는 살육의 칼이다. 겉으로 보기에 강한 힘이 필요한 건 장남 셋쇼마루 쪽이다. 하지만 투아왕은 일부러 그 반대로 유산을 나눠 준다. 

철쇄아를 쥔 이는 반요 이누야샤, 살생환을 쥔 이는 냉혈한 장남 셋쇼마루이다.

셋쇼마루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산은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상처이자 화두였다.


“왜 아버지는 동생에게 철쇄아를 물려 주고 내게는 쓸데없는 살생환을 남겨 줬는가? 아버지는 왜 나를 인정하지 않았지?”

그러나 아버지의 깊은 뜻에는 아들, 모두를 위한 최선의 결정이었음을 나중에야 드러난다. 

철쇄아가 완성되는 길에는 셋쇼마루가 반드시 필요했고, 살생환을 품은 셋쇼마루는 결국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폭쇄아라는 자기만의 칼을 뽑아 올린다.

셋쇼마루는 아버지가 남겨 유산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통과하며 얻게 되는 자기 안에서 길어 올린 칼, 폭쇄아를 얻게 된다. 

이때 셋쇼마루는 비로소 아버지를 뛰어넘는 대요괴로 완성된다.

 

투아왕은 아무런 설명도, 뜻도 남겨 주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공백 속에서 형제는 미워하고, 오해하고, 싸우고, 그리고 조금씩 자라난다. 

그걸 보고 있으면, 우리 삶 속 “말이 없는 아버지들”이 겹쳐 보인다. 

차라리 길게 설명해 주지, 왜 늘 이렇게 묵묵부답으로 남겨 두고 떠나버리는가.

어쩌면 <이누야샤>가 보여 준 건 “아버지의 부재”가 아니라, 말없이 밀어 넣는 성장의 조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누야샤의 연인은 둘이다.

과거에는 무녀 금강(키쿄오), 현재에는 현대에서 온 소녀 가영(가고메)이다. 

금강은 이누야샤를 믿지 못했고, 나락의 계략에 속아 그를 봉인한 뒤, 사혼의 구슬과 함께 장렬하게 죽는다. 그리고 다시 흙에서 되살아나지만, 부활한 금강의 몸은 불완전하다.

혼은 흔들리고, 살아 있음 자체가 고통에 가깝다.


반면 가영은 밝다. 현대의 여학생이고, 가족에게 사랑받고, 길을 잃으면 울면서도 금세 자기 길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알고 보면, 가영은 사혼의 구슬을 품고 태어났고, 금강의 환생이다. 한 사람은 “상처 난 과거의 나”, 다른 한 사람은 “지금 여기의 나” 처럼 보인다.

이누야샤는 사이에서 오랫동안 갈팡질팡한다.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자신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영은 결국 이누야샤와 함께 과거에 남아 살아가기로 선택하지만, 금강을 끝까지 존중해 준다. 

어쩌면 금강의 상징은 내 과거의 자신을 통째로 부정하려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안의 금강과 싸우는 꼴이다. 

하지만 <이누야샤>에서 보면 과거의 나락을, 상처를, 잘못된 선택을 인정한다고 해서, 지금의 사랑과 지금의 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나를 완전히 버리지 않아도, 지금의 나를 사랑할 수 있다.”

 

산고와 코하쿠의 이야기는 잔인하다

나락의 조종으로 코하쿠는 가족을 죽이며, 산고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 끝없는 죄책감과 분노를 짊어지고 산다.

산고에게 동생 코하쿠는, “살려야 하지만, 동시에 내 마음을 찢어놓는 존재”다. 그래서 그를 향한 감정은 늘 이중적이다. 

사랑하지만, 미워하고, 지키고 싶지만, 목을 조를 수도 있을 것 같은 절망. 그 옆에서 미륵은 늘 흔들리면서도 서 있다.

수행자임에도 끊임없이 여자에게 치근덕거리는 반쪽짜리 수행자이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누구보다 자기 몸을 내던지는 남자이다.

산고–코하쿠–미륵의 서사를 보면, 우리가 가족과 타인을 향해 쥐고 있는 감정의 복잡함이 그대로 비친다. 

완전히 용서하지도 못하고, 완전히 끊어내지도 못하는 채, 그냥 같이 가는 것. 

그게 어쩌면, 우리가 현실에서 선택하는 최선의 사랑 방식인지도 모른다.

 

<이누야샤>에는 사연 없는 인물이 거의 없다. 

늑대요괴 족장 코우가는 가영을 향한 직진형 사랑을 보여준다. 이누야샤와는 끝없는 견제와 경쟁을 반복하지만, 그 저돌적인 사랑의 구애는 웃음을 자아낸다. 여우 요괴 싯포는 늘 투덜대고 도망치지만, 실제로 가장 먼저 동료들 곁으로 뛰어드는 존재다. 

그는 이 여정의 “아이”이자, 우리 안에 있는 겁 많은 어린 자아를 상징하는 것 같다.

바람의 요괴 카구라는 나락의 부하이면서, 동시에 자유를 꿈꾸는 존재다. 

나락에게서 벗어나고 싶지만, 그에게 묶여 있는 자신의 운명을 끝까지 끊어내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의 마지막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죽음 직전에 맞는 한 줄기 바람은 어쩌면 그녀가 평생 원했던 진짜 자유였을 것이다.

이외에도 없이 많은 인물들이, “나도 내 얘기가 있다”고 말하듯 자기 서사를 품고 스쳐 간다.

 

작품에는 최소한 열두 겹의 서사 층이 겹쳐져 있다

가족과 혈통, 사랑과 질투, 복수와 용서, 시간(과거–현재), 인간과 요괴의 경계, 몸과 상처, 욕망과 구원, 그리고 결국 “나는 누구인가?”로 돌아가는 정체성의 질문까지. 그래서 <이누야샤>를 다시 읽으면, 어디를 보아도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인물을 집어도 삶의 단면이 잡힌다. 

아마 그게, 세월이 흘러도 이 작품이 낡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중국이라는 타지에서 반요 같은 존재로 살아온 셈이다. 

한국인도, 중국인도 아니면서, 어딘가 두 세계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삶이었다.

그때 매일 , 반요 이누야샤의 불안, 셋쇼마루의 고독함 뒤에 숨겨진 따뜻함, 가영이의 내면의 갈등, 산고와 코하쿠의 저릿한 죄책감, 남자라면 이해가 가는 미륵의 행동, 그리고 내 안의 귀엽지만 겁 많은 싯포를 보았다.

아마 나는 그들을 통해 안의 감정들을 것이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고, 완전히 용서하지 못해도 함께할 수 있고, 과거의 나를 지우지 않고도 지금의 나를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끝까지 자기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이다.

만화는 전부를 보여 줬다.

그래서 내게 <이누야샤>는 철학 텍스트이기 전에, 버티게 해 준 한 편의 이야기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 만화가 언젠가 “나락, 테세우스의 배, AI, 에덴 동산, 신과 인간”으로 사유의 여정으로까지 확장되리라는 것을, 지금에서야 알겠다. 

그 시절 나를 버티게 해 준 건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서툴고 무모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한 무리의 등장인물들이었다.

이제 나도 삶에서 이누야샤처럼, 셋쇼마루처럼, 산고와 미륵처럼, 그리고 나락과 수많은 조연들처럼 각자의 사연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우리도 결국, 각자 한 편의 <이누야샤>를 쓰고 있는 주인공이다.


글은 결국, 25년 전 사회 초년생이 지금의 다카하시 루미코 여사께 바치는 늦은 한 장의 헌정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루미코 여사가 만들어 준 세계에 대한 작고 늦은 인사이기도 하다.

ありがとう、高橋留美子先生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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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2-09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누야사 1기, 2기, 3기...3기가 끝인가요? 어쨌든 보긴 봤는데...중간 중간 보고 끊긴 부분이 많아 결말만 알고 셋쇼마루가 어떻게 폭쇄아를 얻는지...왜 아버지는 이누야사에게 철쇄아를 주었고, 철쇄아가 완성되는 길에 왜 셋쇼마루가 필요한지 모릅니다. 이누야사는 항상 봤고 여러번 봤는데 중간만 여러번 봐서 전체 줄거리를 모른다는 함정...--;;

마힐 2025-12-09 22:48   좋아요 0 | URL
셋쇼와 이누의 일행이 나락과의 결전을 하기 전에 명도잔월파를 완성해야 하는데 그때 샛쇼의 천생아가 이누의 철쇄아와 합쳐져서 명도잔월파를 완성하게 되요. 그리고 이후 샛쇼와 곡령의 대결에서 샛쇼의 몸이 나락의 몸에 흡수되려는 찰나에 샛쇼의 몸안에 감춰진 폭쇄아가 발현하죠. 이게 모두 두 형제를 깨우치게 하려는 아버지의 큰 그림이었다고 하네요.ㅎㅎ

저는 이누야샤를 만화로 먼저 보고 나중에 애니메이션을 봤는데요. 만화로는 끝까지는 못 봤구요. 애니는 마지막 나라쿠를 무찌르는 것 까지 봤어요. 그 당시는 그걸로 완결을 났었는데 최근 몇 년전에 샛쇼마루와 이누야샤의 자식들이 나오는 버젼이 나왔더라구요. 샛쇼와 링이, 이누야샤와 카고매가 맺어졌지요. 이제는 아버지가 된 두 형제의 이야기라네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볼 수도 있는데 지금은 예전의 이누야샤 와 셋쇼마루 형제 이야기를 가슴에 담아 두고 싶네요. ㅎㅎ

잉크냄새 2025-12-09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기억이라 란마와 이누야사가 막 섞여 떠오르네요. ㅎㅎ 누가 란마고 누가 이누야사인지. 그래도 사유의 길을 따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중국에서의 CD 하니 떠오르는 것이 광장에서 리어카에 싣고 팔던 해적판들이 떠오르네요. 그걸로 왕좌의 게임과 스파르타쿠스를 입문했죠. ㅎㅎ

마힐 2025-12-09 22:56   좋아요 0 | URL
만화로는 란마가 먼저 나오고, 이누야샤는 후에 나왔어요. 란마의 개그적 요소는 당시 우리나라 만화에서 보던 것들과 차원이 달라서 사춘기 시절 충격이었죠. ㅎㅎ
그리고 보니 퇴근 후 함께 보았던 왕좌의 게임과 스파르타쿠스 역시... 차원이 다른 미드, 제 30대 시절의 충격이었네요. 아, 그리고 덱스터도... ㅎㅎ
 
이누야샤 와이드판 30 - 완결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22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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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차: 에덴 동산을 떠난 후

 

이누야샤의 연인 무녀 금강(키쿄오)은 나락의 계략에 걸려 이누야샤를 봉인하고 스스로 사혼의 구슬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죽었던 금강은 사혼의 구슬의 힘으로 흙에서 다시 몸을 빚어나왔다.

불교적 시각으로 우리의 몸은 사대, 즉 지수화풍(地水火風) 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사람이 죽게 되면 딱딱한 부분은 흙으로, 피와 고름 같은 진액은 물로, 몸의 더운 기운은 불로, 몸의 차가운 기운은 물 등으로 각각 흩어진다고 했다.

성경의 <창세기>에는 우리 인류의 조상인 아담 또한 하나님이 흙으로 빚어냈다고 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동서양의 종교적 세계관은 공통되게도 우리 인간은 흙에서 나왔고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신이 아담을 에덴 동산에 두고, 당신이 창조한 우주의 사물들에게 이름을 붙일 권한을 주었다. 강, 별, 나무, 새, 사자, 뱀.

이제 이름이 불러지게 되면 단순한 어떤 모양이나 형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존재의 의미를 갖게 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존재를 의식의 바깥에서 의식의 안쪽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된다.

신이 인간에게 가장 선물은, 아마 기적도, 기도 응답도, 천국행 티켓도 아닐 것이다.

“너는 세상에 이름을 붙여라.”

명령, 혹은 이 권한 자체가 이미 엄청난 특권이다.

 

일반인의 이해로 보면 선악과를 먹음으로 분별 의식을 갖게 되었고, 이 일로 말미암아 신의 노여움을 사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에 이름을 지을 있는 권한을 받은 것만 놓고 보면, 뱀에게 속아 선악과를 따 먹기 전에 이미 인간은 분별할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단지 선과 악의 구분을 했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 너와 나, 나와 세계를 나누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이름을 짓는 것은 그 존재의 의미를 정하는 것과도 같다.

그렇게 인간은 처음부터 신의 천지 창조에 동참했던 조물주의 조수 역할을 했던 셈이다.

선악과 이후에 얻은 것은 신과의 계약을 어긴 “도덕적 죄책감”이었을지 몰라도, 의미를 짓는 능력은 이미 그 이전에 주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쫓겨난 것이 정말 “벌”이었을까?

 

아이가 자라 어느 부모의 품을 떠나 독립하듯, 에덴에서 나간다는 것은 “신의 울타리”에서 나와 세계와 아픔과 죽음을 직접 경험해야 하는 자리로 나간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동안 인간은 그저 좋은 환경에서 보호받는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일 있다

하지만 에덴을 벗어난 인간은 더 이상 신의 도구가 아니라, 자기 선택과 업(業)을 통해 자신만의 서사를 써 내려가야 하는 존재가 된다.

에덴에서 떠남으로 인간은 좋든 나쁘든, 자신의 의미를 짓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누야샤>의 세계관에서  나락은 끝까지 자신의 정체를 직면하지 못한다.

오니구모라는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몸을 갈아 끼우고, 수많은 분신을 만들어 도망다닌다. 

자신의 이름에 붙은 상처, 자신의 이름에 붙은 욕망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의미를 짓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회피하는 존재, 자기 이름을 지우려는 존재로 남는다. 그게 바로 그의 원죄이자 형벌이다.

 

반대로, 이누야샤 일행은 끝까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반요인 자신을 부끄러워하던 이누야샤, 복수와 책임 사이에서 갈등하는 산고, 욕망과 수행 사이에서 흔들리는 미륵, 그리고 과거와 현대를 오가며 정체성을 찾는 가영이(가고메)까지, 그들 모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피하지 않는다.

사혼의 구슬 조각을 모으는 여정은, 결국 각자가 자기 삶의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가는 과정이었다.

, 자기 존재에 이름을 붙이는 과정인 셈이다.

 

이누야샤의 세계에서든, 창세기의 에덴에서든, 인공지능의 시대이든, 인간은 결국 자기 삶에 의미를 짓고 이름을 붙이는 존재다.

태어나는 조건은 내가 정하지 못한다.

언제, 어디서, 누구의 자식으로, 어느 시대에 태어날지는 이미 주어진 문제지다.

하지만 문제지 위에 어떤 이름을 적고, 어떤 문장을 써 내려갈지는 나의 몫이다.

나락은 끝까지 자기 이름을 회피한 존재였고, 셋쇼마루는 자기 집착의 이름을 내려놓은 존재였고, 오이디푸스는 자기 운명의 이름을 너무 늦게 깨달은 존재였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또 쓰면서 이 질문을 어쩔 수 없이 반복하는 존재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해서 처음으로 인식한 것은 바로 천지가 나온 이후와 같다.

창세기에서 아담은 동물들의 이름을 지었고, <이누야샤>에서 이누야샤 일행은 사혼의 구슬을 둘러싼 욕망과 상처에 이름을 붙이며 싸웠다.

이제 인공지능까지 등장한 시대에, 우리가 마지막으로 붙여야 하는 이름은 무엇일까?

우리는 과연 모든 존재에 대한 이름 짓기를 끝냈는가?

 

인간이란,

신과 완전히 하나도 아니고, 완전히 분리된 존재도 아니며, 괴물과 성인, 나락과 셋쇼마루, 오이디푸스와 아담 사이를 오가면서 끝없이 자신을 향해 이렇게 묻는 존재가 아닐까?

 

“왜 이렇게 살지?”

우리는 여전히 질문을 붙잡고, 틀리고, 후회하고, 고치고, 다시 쓰는 동안 우리는 조금씩 자기만의 의미를 지어 간다.

그리고 순간, 비로소 인간이란  “이름을 짓는 존재이자, 자기 삶의 의미를 끝까지 써 내려가는 존재”라는 사실이 또렷해진다.

 

언제쯤 인간은 에덴 동산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까?

그럼 신은 여전히 에덴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까?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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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야샤 와이드판 29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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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차: 혹시 나는 나락이 아닐까?

 

<이누야샤>에서 자신을 돌봐준 금강(기쿄오)를 향한 오니구모의 뒤틀린 욕망은 나락이라는 새로운 괴물을 탄생시켰다. 

오늘날 인류는 자신의 욕망, 야망 그리고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데이터와 알고리즘화 시켜 AI 를 탄생시켰다.

나락은 결핍에서 태어난 괴물이었고, AI는 인간의 결핍이 만든 도구다. 

나락은 몸뚱이를 가지고 있었고, AI는 몸이 없다. 

나락은 금강을 소유하고 싶어 했고, AI는 아무것도 갖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락은 살고 싶어 발버둥 쳤지만, AI는 살고 싶다는 마음조차 없다.

겉모습은 정반대다.  그럼에도 이 둘은 묘하게 닮아 있다. 

둘 다 “흡수와 증식”이라는 구조 위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나락은 요괴의 몸과 사혼의 구슬 조각을 계속 흡수하며 자신을 키워 갔다. 

AI는 인간이 쏟아낸 말과 이미지, 숫자와 기록들, 즉 데이터 정보를 계속 흡수하며 거대해져 간다.

그렇다면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나락은 하나의 인간(오니구모)의 욕망이 괴물이 된 것이고, AI는 인류 전체의 욕망이 흘러 들어갈 수 있는 그릇이라는 점이다.

AI는 스스로 나락이 되지 못한다. 

대신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업로드할 수 있는 현대판 나락의 몸체가 되어 준다. 그래서 AI를 둘러싼 진짜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AI가 위험한가?”가 아니라 “우리 인간은 AI 에다가 무엇을 투영시키고 있는가?”

 

나락이 <이누야샤>에서 최종보스가 되었던 이유는 단지 무섭고 강해서가 아니였다.

그는 직접 싸우지 않고, 그림자와 분신을 보내고, 남의 상처를 건드리고, 관계를 찢어놓고, 잘 생긴 얼굴 미소 뒤에 숨겨진 음흉함 때문이다. 

본체는 드러내지 않고, 늘 상대 앞에 내세울 희생양과 대리인을 찾는다. 

이러한 나락이 쓰는 싸움의 방식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사용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자신을 감추는 익명의 개정으로 누군가에게 악의적인 댓글과 공격, 왜곡된 정보를 퍼뜨리며 ~카더라 하는 뒤로 숨어 누군가를 궁지에 몰아 넣는 행위가 그렇다.  

잘못된 정보를 알고도 “나는 그냥 퍼왔을 뿐인데” 라며 뒤로 빠지며 실수와 실패에 대한 책임을 내가 아닌 외부적 시스템과 상대를 탓하는 습관들이 그렇다.

우리 일상 곳곳에서 이미 작은 나락들과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회사에서, 가족 안에서, 친한 친구 사이에서, 커뮤니티와 SNS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나락이 되기도 하고, 서로에게서 나락을 보기도 한다.


문제는, 나락이 항상 “저쪽”에 있다고 믿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살지?” 라고 말하는 그 입술 안쪽에는 “내가 옳다”, “내가 정의다”, “내가 피해를 받았다” 라는 나락의 씨앗이 심겨지게 된다.

그래서 바로 지점에서, 질문은 조금 더 불편하게 바뀌게 된다.

“AI가 나락이 될까?”라는 질문을 넘어서  “나는 누군가에게 나락이 된 적이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상대를 향한 질투가 솟구칠 , 상대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내 마음속 몰래 상대를 나락 취급  , 내 불안을 덜기 위해 타인을 깎아내릴 때, 그 순간 나는 타인의 세계에서 나락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락이란, “내 상처 기준으로 타인을 재단하고, 내 욕망을 위해 남을 도구로 쓰고, 내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누군가를 괴물로 만드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정의로 보게 되면 나락은 이상 만화 요괴가 아니다.  

그는 때로 안에서 말이 되어 튀어나오고, 혹은 내 침묵 속에서 방관이라는 이름으로 숨기도 한다.

그렇다면 시대의 인간은, 이 나락의 구조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상대가 나락이기도 하고 자신이 나락이 되는 구조. 이 모순적인 구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옆에서 나락처럼 행동하는 사람을 만났을 ,  번째 반응은 대부분 분노이거나 회피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나락의 밑바닥에는 늘 상처와 결핍이 있다.

나를 지속적으로 파괴하는 관계와, 나를 조종하려는 시도와, 나를 죄책감으로 묶어 두려는 사람으로부터는 우선 거리를 둬야 한다.

연민은 필요하지만, 그 연민 때문에 자신을 소진시켜 버리면 결국 또 다른 나락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나락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사랑받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다.

방식이 틀어졌을 , 밑바닥에는 “살고 싶었다”는 마음이 한 줌 남아 있다.

마음까지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저 사람도 한때는 나와 같은 인간이었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만이라도 가져보자는 말이다.

 

그리고 다음에는 안의 나락을 끝까지 지켜보는 일이 남는다.

질투가 올라올 , 갑자기 누군가를 통째로 부정하고 싶어질 , AI나 시스템 뒤로 숨어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질 때, 그때 “아, 지금 내 안의 나락이 꿈틀거리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알아차림으로는 세상을 바꾸진 못한다. 이누야샤나 셋쇼마루처럼 나락을 한 번에 쫓아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나의 선택은 결과를 바꿀수 있다. 

그건 운명을 바꾸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선택이 누적될 때 비로소 하나의 “나”라는 서사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여기서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온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락처럼 결핍으로부터 도망치려 하는 존재이기도 하고, 셋쇼마루처럼 집착을 내려놓고 자기 길을 찾아가는 존재이기도 하고, 오이디푸스처럼 자신의 운명 앞에서 비극적으로 무너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모습을 자기 안에 동시에 품고도, 끝까지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기를 멈추지 않는 존재다.

 

AI는 정답처럼 보이는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왜?”라는 질문을 품은 채 끝까지 흔들리고, 정답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자리,  자리는 아직 인간에게 남아 있다.

나는 지금, 나락과 테세우스의 배와 AI를 통과해 돌아와 다시 “인간”이라는 낱말을 바라보고 있다.


인간이란,

자기 삶을 향해 “이게 무엇이었지?”라고 되묻고,  질문에 답하려 애쓰며, 틀리고, 다시 쓰고, 또 고치면서 조금씩 자신의 의미를 지어가는 존재가 아닐까?

그때 비로소, 인간이란 “의미를 짓는 존재”라는 사실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드디어 <이누야샤>를 통한 사유의 여정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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