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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226

오늘의정진: 捨妄心取眞理 사망심취진리 망령된 마음을 버리고 진리를 취함이여. 


100일 정진, 63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예순 두번 째 구절은 

<棄有着空病亦然 기유착공병역연 /있음을 버리고 공에 집착하면 병이기는 같으나

還如避溺而投火 환여피익이투화 /마치 물을 피하려다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

 

있음()을 버리고 없음()만을 가질 수는 없다.  

마음공부는 양변을 모두 가질 수도버릴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한 쪽만 취해서는 더욱 안된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이다.

공부의 길에서 내 앞에  갑자기 경계(境界)가 닥치면 어찌 할 바를 모를 때가 많다.

어찌 해야 하는가

이럴 때 일수록 중도(中道가 필요하다

'이것이 아니면저것 이다라고 하는 이분법적 사고로 중도를 이해하면 안된다.

중도는 가운데 길을 가라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땅 위를 걷지만 땅에 발을 딛지 않는다

허공을 걷지만 허공에 발을 딛지 않는다

중도는 허공 중에 메달아 놓고 걷는 줄타기가 아니지만 줄타기 보다도 어렵다.

 

오늘은 예순 세번 째 구절

捨妄心取眞理(버릴 사망령 망마음 심취할 취참 진다스릴 리 )

사망심취진리 망령된 마음을 버리고 진리를 취함이여

取捨之心成巧僞/ (취할 취버릴 사갈 지마음 심이룰 성공교로울 교거짓 위  )

취사지심성교위 /버리고 취하는 마음이 교묘한 거짓을 이룬다.

 

신심명(信心銘)의 첫 구절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有嫌揀擇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나니오직 가리고 택하는 마음만 꺼리면 된다이 떠오른다.

가리고 택하는 마음은 분별심(分別心)이다.

분별심만 갖지 않는다면 바로 도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증도가(證道歌)에서는 망령된 마음을 버리고진리를 취하는 것 조차도 분별심이라고 규정한다.

망상(妄想)은 버려야 할 것이고 진리는 취해야 한다면 그 또한 아주 교묘한 거짓이라는 것이다.

이미 마음에서 망상과 진리라는 분별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결국 망상이든 진리든 둘로 보지 않아야 한다.

본래 망상과 진리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중도는 둘이 아니 도리를 여실히 깨닫는 것이다.

망상이든 진리든 모두 본래 같은 자리에서 나왔다

분별하기 그 이전즉 본래 마음을 살펴야 한다.  

 

<일일 소견>

분별하는 마음은 수행을 한다고 하루 아침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분별하는 그 마음 자체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분별이든 아니든 다시 본래 마음만 지켜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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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225

오늘의정진: 棄有着空病亦然 기유착공병역연 /있음을 버리고 공에 집착하면 병이기는 같으나

- 100일 정진, 62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예순 한번 째 구절은

<豁達空撥因果활달공발인과 /활달히 공하다고 인과를 없다고 한다면

茫茫蕩蕩招殃禍망망탕탕초앙화 /아득하고 끊없이 재앙을 부르리다> 였다.


()’은 그저 단지 이름일 뿐이다.

아무 것도 없는 텅빈 상태라고 하지만 이름에 얽메여서는 진정 공을 알 수가 없다.

공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지만 우리는 공()의 작용에서 살고 있다.

수행을 통해 공의 실체를 깨달아 업식이 공했다는 도리를 알았다 해도 내가 그동안 쌓아왔던 인연의 과보는 피할 수가 없다.

대답 한 번 잘못하여 오백생 동안 여우의 몸을 벗어날 수 없었던  화두는 결코 허무맹랑하지 않다.

공한 도리를 알았다 하더라도 그동안 지었던 업의 과보는 여전히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예순 두 번 째 구절

棄有着空病亦然/(버릴 기, 있을 유, 붙을 착, 빌 공, 병 병, 또 역, 그러할 연 )

기유착공병역연 /있음을 버리고 공에 집착하면 병이기는 같으나

還如避溺而投火/ (돌아올 환, 같을 여, 피할 피, 빠질 익, 말미암을 이,던질 투, 불 화 )

환여피익이투화 /마치 물을 피할다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이 서로 함께 공존하고 있다.

만약 무위법이 좋다고 하여 무위법만 추구한다면 그 또한 무()에만 집착하는 것이다.

집착은 분별을 낳는다.

분별로 인해 모든 조화는 깨어지고 만다.

분별은 모든 병의 근원이 된다.

병이 생기면 아프다.

아프면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 생겨난다.

물속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것과 같고 뜨거운 불 속의 고통에 몸부림 치는 것과 같다.

우리는 결국 고통 속에서 삶을 마감해야만 한다.

아프지 않으려면? 괴롭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둘로 보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보는 것을 피상적으로만 보지 말고, 그 반대되는 면도 함께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 보는 견() 보다는 관()을 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현상(現象)을 깊이 관해서 둘로 보지 않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수행의 길이 아닌가 싶다.


<일일 소견>

일주일 간 한국에서 머물렀다. 이제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가고 옴은 항상 있는 것이지만 이번 가고 옴은 특별했다.

한국에서 경험했던 모든 것들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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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224

오늘의정진: 豁達空撥因果 활달공발인과 /활달히 공하다고 인과를 없다고 한다면


- 100일 정진, 61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예순번 째 구절은

<萬象森羅影現中 만상삼라영현중 /삼라만상의 그림자 그 가운데 나타나고

一顆圓明非內外일과원명비내외 /한 덩이 뚜렷이 밝음은 안과 밖이 아니로다.> 였다.


본래 안과 밖은 없지만 우리는 안과 밖을 분별한다.

본래 시간은 없지만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늘 시간에 지배 당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시간과 공간에 구속되어 육도(六道)를 떠돌고 있다.

촘촘히 이어진 인연의 그물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오직 배움이 끊어지고 함이 없이 한가로운 사람, 즉 절학무위휴도인(絶學無爲休道人) 만이 인과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


오늘은 예순 한번 째 구절

豁達空撥因果 /(뚫릴 골 활, 통할 달, 빌 공, 다스릴 발, 인할 인, 열매 과 )

활달공발인과 /활달히 공하다고 인과를 없다고 한다면

茫茫蕩蕩招殃禍 / (망망할 망, , 쓸어버릴 탕, , 부를 초, 재앙 앙, 재앙 화)

망망탕탕초앙화 /아득하고 끊없이 재앙을 부르리다.


()의 황금기였던 당()시기에 백장선사(百丈禪師 720~814 )라 불리는 뛰어난 선승(禪僧)이 있었다.

백장스님은 매일 법회를 열어 대중들에게 법문을 설하였다.

그들 중 유독 한 노인은 매일 백장선사의 법회에 참석했고 법문이 끝나면 돌아가곤 했다.

어느날, 스님의 법문이 끝나자 모두들 돌아갔다.  

그런데 그날 그 노인은 돌아가지 않고 홀로 남아 묵묵히 선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이상함에 백장이 그 노인에게 물었다.

그대는 뉘신지? 아직 이곳에 남아 있는가요?”

노인이 차분히 대답했다.

.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과거 500생 전부터 이곳에서 수행자로 살았습니다만 대답 한번 잘 못하여 지금까지 여우의 몸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대가 무슨 질문에 어떤 대답을 했길래 여우의 몸을 받게 되었는가요?”

전생에 어느 수행자가 제게 묻기기를 수행자가 수행을 잘 해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하고 묻자, 저는 수행자가 수행을 잘하면 인과에 떨어지 않는다(不落因果)고 대답 했습니다. “

불락인과(不落因果) ,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노인의 대답에 백장은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대가 그 질문을 내게 다시 한번 해보시오

, 수행자가 수행을 잘 해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하고 노인이  백장 스님에게 다시 물었다.

백장이 대답했다.

수행자가 수행을 잘 하면 인과에 메이지 않게 됩니다. 불매인과(不昧因果)!”

이에 노인은 깜짝 놀라 업드려 말했다.

, 이제서야 저는 여우의 몸을 벗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여우의 몸은 이곳 산 뒤에 두겠으니 내일 찾아서 저의 재() 를 올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 말을 마친 후 노인으로 둔갑한 여우는 사라져 버렸다.

다음날, 백장선사는 절안의 모든 대중들을 불러 모아 재() 올릴 준비를 하라고 제자들에게 일렀다.

그리고는 스님들을 데리고 뒤 산으로 올라가 바위 밑에 있던 여우의 시체를 찾았다.

이후 백장 선사는 정중하게 여우의 천도재를 지냈다고 백장어록에 전해진다.

수행을 열심히 잘 했다고 모두가 깨닫고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수행을 통해 공한 마음 도리를 밝혀 활달함을 얻었지만 인과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영가 선사는 이 점을 증도가에서 강조하신 듯하다.

공부를 해서 마음을 밝혀도 완전히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즉 여우의 몸을 받은 노인처럼 수행을 잘해도 인과에 떨어진다.

하지만 불락인과가 아니고 불매인과가 되어야 한다.  인과에 메이지 말아야 한다.

내 업식의 두터워 혹시 지옥고를 겪는다 하더라도 인과를 없앨 수는없는 것이다.

인과를 피할 수 없다  하더라도 거기에 마음이 메여서는 안된다.

수행을 잘 했다고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과에 메이지 말아야 한다.

오백생 동안 여우의 몸을 받았던 노인처럼 언제 다시 사람의 몸을 받게 될지 망망하고 아득하다.


<일일 소견>

마음 좀 닦았다고 어떤 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을 좀 얻었다고 해서 무슨 큰 변화가 생기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러니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인과의 그물은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수행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만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차츰 그물에 메이지 않는 마음이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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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2-26 1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의 의미를 이제서야 조금 알게 되네요.

마힐 2025-02-27 11:34   좋아요 0 | URL
많은 선지식들 께서는 걸림없이 살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 하셨어요.
잉크냄새님, 오늘도 당당하고 밝게 자유롭게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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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223

오늘의정진: 萬象森羅影現中 만상삼라영현중 /삼라만상의 그림자 그 가운데 나타나고


- 100일 정진, 60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쉰 아홉 번 째 구절은

<心鏡明鑑無碍 심경명감무애 /마음 거울 밝아서 비춤에 걸림이 없으니

廓然瑩徹周沙界 확연영철주사계/확연히 비치어 항사세계에 두루 사무치도다> 였다.


선지식(善知識)들께서 공통으로 하신 말씀이 있다.

내 마음 하나를 알면 온 우주를 안다고 하신 것이다.

온 우주가 내 마음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 마음 닦아 성불하면 온 우주를 밝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일미진중방함시방,일체진중역여시(一微塵中含十方,一切塵中亦如是)

한 티끌 그 가운데 온 우주를 머금었고, 낱낱이 티끌마다 온 우주가 다 들었네> (법성게(法性偈) 중에서)


아주 작은 먼지인 티끌이나, 겐지스강의 모래알 하나에 온 우주가 다 들어 있다는 말이다.

우주가 아무리 넓다 하여도 내 마음 하나 안에 다 들어 있는 셈이다.

그러니 내 마음 하나 밝히면 곧 온 우주가 밝아진다.

오늘은 예순 번 째 구절

萬象森羅影現中 / (일만 만, 코끼리 상, 빽빽한 나무 삼, 그물 라, 그림자 영, 나타날 현, 가운데 중 )

만상삼라영현중 /삼라만상의 그림자 그 가운데 나타나고

一顆圓明非內外 / (한 일, 낟알 과, 둥글 원, 밝을 명, 아닐 비, 안 내, 바깥 외)

일과원명비내외 /한 덩이 뚜렷이 밝음은 안과 밖이 아니로다.

()이란 한자는 나무 목()이 세 개나 이어져 있다.

나무 목이  두 개가 되면 수풀 림() 이 되고, 세 가 되면 빽빽할 나무 삼()이 되는 것이다.

()는 그물, 만상(萬象)은 아주 많은 형상들을 의미 한다.

즉 삼라만상은 넓은 숲 속에 나무들이 빽빽하게 심어져 있듯이 그물처럼 촘촘하게 연결되며 이어진 온갖 사물과 현상을 뜻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바로 삼라만상속의 일부분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보이는 사물과 보이지 않는 현상들이 서로 그물처럼 연결 되어진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런데 삼라만상 그 가운데 한 덩이 뚜렷히 밝게 빛나는 것이 하나 있다.

그 빛 덩어리는 안과 밖이 따로 없고 그 존재 상태로 빛나고 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

오직 그 밝은 하나를 알아야 한다.


<일일 소견>

아무리 작은 티끌이라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그 티끌 안에 온 우주가 들어있으니 말이다

티끌 하나에도 온 우주가 다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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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222

오늘의정진: 心鏡明鑑無碍 심경명감무애 /마음 거울 밝아서 비춤에 걸림이 없으니


- 100일 정진, 59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쉰 여덟번 째 구절은

<無相無空無不空무상무공무불공/모양도 없고 , 공도 없고, 공 아님도 없음이요

即是如來眞實相 즉시여래진실상 / 이것이 곧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로다.> 였다.


기독교에서는 우상(偶像)을 숭배하지 말라고 한다.

그에 대한 참 뜻은 금강경 26분 구절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법신은 상이 아님이라)에 나온다.


<만약 색신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그런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대행의 스님 뜻으로 푼 금강경 중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형상화 할 수 없다

그래서 우상으로 만들어 숭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형상을 눈으로, 귀로 구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신에 대한, 진리에 대한, 위대한 그것에 대한 형상화를 하고 싶어했다.

이슬람교에서는 우상 숭배를 하지 못하니 기하학적 무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아라베스크 무늬이다.

신을 형상화 하자 우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진리 그 자체, 신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없으니 형상을 만들기 시작한 것 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진리, 신은 우리와 멀어진다.

분명히 우리는 신, 진리를 형상화 할 수 없음을 앎에도 불구하고 우상화의 유혹을 뿌리 칠 수 없다.

높아지는 교회의 첨탑과 커져가는 사찰의 금동 불상, 갈수록 기이해지는 이슬람교의 아라베스크 무늬는 진리의 본질이 아니다.

진리는 교회의 건물에, 사찰의 불상에, 이슬람교의 회당에 분명 있지만 또한 있지 않는다.

신을 보고자, 진리를 얻고자, 도를 이루고자 한다면 끝내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은 쉰 아홉번 째 구절

心鏡明鑑無碍 / (마음 심, 거울 경, 밝을 명, 거울 감, 없을 무, 꺼리낄 애 )

심경명감무애 /마음 거울 밝아서 비춤에 걸림이 없으니

廓然瑩徹周沙界/ (클 확, 그러할 연, 옥돌 영, 뚫을 철, 두루 주, 모래 사, 경계 계 )

확연영철주사계/ 확연히 비치어 항사세계에 두루 사무치도다.


우리의 본래 마음자리는 온 우주보다도 크다는 것이다.

항하사는 겐지스강의 모래알을 뜻한다

겐지스강 변에 있는 모래 알 하나하나를 세계로 친다면 그 세계가 얼마나 많겠는가?

우주에는 겐지스강 모래알 처럼 많은 별성들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만큼의 숫자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세계가 있다고 해도 우리의 마음 거울은 다 비춰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을 닦아 부처가 된다는 것은 온 우주를 비춰 볼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우리가 지닌 마음은 그 만큼 대단한 보물이다.

그러니 마음을 닦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일일 소견>

닦고 닦아도 쌓이는 거울의 먼지처럼, 한번 닦았다고 끝이 아니다.

마음을 닦는다고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닦는다는 행위에 집착을 하게 된다. 그리고 또한 나도 모르게 잘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수행은 끊임없는 이런 행위의 반복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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