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과 임진왜란
이성무 외 엮음 / 태학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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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월을 보내 이제 20181월이 왔다. 2017년은 지금으로부터 420년 정유재란을 7번 갑자를 돌았던 해였다. 임진왜란 이후 다시 침공하는 왜구, 그들의 입장에서 문록경장의 역(文祿慶長)이라고 한다. 일본은 한일강제병합을 이루기 전에는 풍태합조선역(豊太閤朝鮮役)이란 표현을 쓰기도 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서 치룬 전쟁에서 이제는 일본 내부의 전쟁 수준으로 임진왜란을 다루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오늘날에도 중요하다. 일본에서 임진왜라은 여전히 문록경장의 역(文祿慶長)이란 시선이다.

 

전쟁에서 보여준 참혹하고 잔인한 행위를 숨기고, 마치 전국시대 열도내부의 통일전쟁을 하는 것처럼 단어를 바꾼 것이다. 중국에서는 아예 조선을 원조했기에 인심을 써준 것처럼 생각한다. 420년 전의 일이 아직도 한중일 삼국 관계에서는 쉽지 않은 양상을 보여준다. 피해자 입장인 조선과 조선의 후예인 한국인으로 보자면 참으로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조선의 역사를 두고 지나간 과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보면 참 바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아직도 이런 문제가 국가별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나라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할 때 중국 최고수석은 난징대학살 기념을 위해 행사장을 방문했다고 한다. 난징학살이 일어난 지 100여년이 되어 가는데, 현재까지 중국에서 깊은 상처와 분노를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 1945년 핵폭탄 투하에 따른 피해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한국에서 한국전쟁에 희생된 장병을 위령하고 있다. 국가의 존재에서 결국 그 국가는 역사의 의의를 찾지 않으면 현재 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다. 국가란 역사란 중요하다. 국가에게 역사가 없다면 그것은 국가의 정체 그 자체가 없다고 똑 같은 것이다.

 

대통령이 중국방문 시 일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던 곳을 찾아갔다. 한국정부가 제헌을 한 시점인지 아니면 그 이전인지를 말이다. 어찌 보면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민주주의국가 체계를 가진 것이 100년인지 아니면 70년이지 가늠할 수 있는 계기이다. 우리가 민주주의 이념을 토대로 만든 국가가 100년을 유지했다면 한국이란 민주주의 국가는 비록 국토를 일제에게 박탈당해도 인민의 의지와 유지는 남아 국가는 그 모든 것은 그 나라의 사람에서 시작되고, 민주주의 국가야말로 인간이 우선이라는 보편적 이념을 보여준 것이라 여긴다.

 

역사를 다시 찾고 역사를 다시 읽은 후 해석하는 것은 지나간 일로 마무리 짓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시작되는 내일을 맞이하는 길인 것이다. 헬조선이란 단어가 시작된다. 헬조선이란 단어가 비로소 시작된 것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일 것이다. 백성이란 존재는 그저 착취당할 존재이고, 위정자는 국가의 존위보다 자신의 안전과 이익만 생각한다. 이순신이란 영웅이 등장하지만, 그 영웅주의적 논리를 앞세워 독재의 논리를 위해 이용했다. 최근 덕수 이씨 문중이 시끄럽다.

 

덕수 이씨에서 배출한 인물로 한국 성리학의 대가인 율곡 이이 선생도 있지만, 최고의 인물은 성웅 이순신일 것이다. 이순신 종가의 종부님이 숙종 임금이 내린 액판 현충사(顯忠祠)를 다시 내걸기 원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 시기 현충사의 휘호를 대통령이 한글로 적어 보냈지만, 사실 종부님의 말씀대로 이순신장군은 일본 왜적을 상대로 목숨 걸고 싸운 분이다. 그런데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일본군장교 출신이 이순신의 사당을 두고 항일정신을 논할 수 있는 가이다.

 

금송나무와 관련하여 한국의 전통수목인 육송이나 박달나무도 아닌 일본에서 아끼는 나무가 자리 잡아 왜색으로 얼룩진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역사란 바론 이런 것이다. 이순신 종가의 종부님은 원래 현충사의 현판을 되찾길 바란다. 숙종 임금이면 300년 이전이고,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420년 전의 것이다. 난중일기는 국가의 국보이면서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현재 살아가는 대한민국이란 존재만 아니라 범인류적으로 가치가 높은 물건이다. 그렇기에 역사를 다시 보고 판단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에 대한 나침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서애 류성룡 선생, 만일 이분이 없으면 조선은 없었다. 아마 대한민국은 현재 같이 평화롭게 살아가지만, 일본어가 국어가 되고, 일본사가 국사가 되었을 것이다. 이분이 정읍현감인 이순신 장군을 수군 절제사(節制使)로 임명 후 당상관인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병조판서가 아니지만, 선조에게 건의하여 지방하급수령을 사령관으로 승진시킨 것이다. 같은 정3품이라 해도 당상관과 당하관은 큰 차이가 있다. 당상관이 되면 임금의 어진에 들어가서 회의에 참석하고, 정책적으로 큰 제안을 할 수 있다. 지휘권과 관련하여 수사(水使)의 지휘권은 병력을 통송하고, 군정을 세우고, 민간인가지 통제할 수 있다.

 

류성룡이 만일 왜란대비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류성룡과 임진왜란>을 보면 서애 선생에 대한 활약상을 후대 역사학자들이 연구하고 소개한 서적이다. 다시금 역사의 기록이 현재만 그렇지만 당대 혹은 그 중간의 관점 역시 중요하다. 선조시대는 당파싸움이 가장 치열하게 시작된 시기다. 기축옥사에서 동인을 학대하자, 후에 동인에서 북인과 남인이 나온다. 동인과 서인에서 당이 남인, 북인, 서인으로 활동한다. 이때 남인에 속한 류성룡은 서인보다 가까운 북인과 같이 일을 하기도 하나, 생각보다 북인의 반발이 심했다.

 

류성룡은 왜적에게 화의를 요청한 것을 두고 북인의 탄핵에 의해 실각한다. 이때 대부분 남인들이 실각하고, 정세는 북인으로 옮겨간다. 임진왜란을 보면 북인들은 의병이 많고, 서인들은 선조를 호종하는 부류가 많았다. 책에서 광해군에 대한 인조반정이 호종공신들이 선무공신에게 권력이 밀린 것에 대한 반발반응이란 것이 옳다. 광해군이 분조활동을 하고 의병을 독려하고, 무군사로 활약하여 전쟁을 지휘했다. 선조는 전쟁이 나자 북으로 몽진하고, 전쟁의 책임을 자신이 아닌 학봉 김성일, 광해군, 류성룡에게 돌린 것이다.

 

북인과 광해군의 뜻이 맞아 류성룡은 탄핵되고, 류성룡은 평생 안동에 은거하고, <징비록>을 저술한다. 류성룡이 전쟁을 지휘할 자리에서 남인출신 정승과 판서를 앉혀 실무를 보았다. 사실 전투를 수행할 때 무관을 싸우기만 하면 되나, 무관이 아닌 문관, 그것도 고위관료층은 정치적으로 내정을 이끌고 외교를 정리하고, 무관들이 싸울 수 있도록 행정적 조치를 해야 했다. 병조가 군사업무를 맡지만, 인구를 차출하고 식량을 대려면 호조의 업무가 필요하고, 물자를 가공하려면 공조의 업무가 필요하다.

 

이런 업무를 맡을 수 있는 인재를 박탈하기 위해 이조의 업무가 필요하다. 이런 많은 일을 하려면 뛰어난 행정조율가가 필요하고, 류성룡은 어김없이 그 능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류성룡은 북인에 의해 탄핵되고, 그 중심에 이이첨 같은 세력이 있다. 선조수정실록에서 류성룡에 대한 비판은 참으로 난감하다. 아주 못나고 간사한 인간으로 표현했다. 이에 반해 이이첨은 뛰어난 인물로 표현된다. 실록의 사관이 있는 그대로 적기는 하지만, 사견이 들어갈 경우도 많고, 뒤에 실록으로 편찬할 때 그 정치적 세력이 누군가에 따라 왕의 평가와 당시 인물의 평가조차 다르게 된다.

 

최근 논란이 많은 광해군의 경우 그의 일기가 완본 이전의 수정본에 많은 교정이 나타났고, 그 교정된 부분을 읽으면 광해군이 완전한 혼군이 아니란 점을 알 수 있다. 류성룡에 대한 평가도 선조실록보단 그가 남긴 <징비록>과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많은 점을 찾을 수 있다. 류성룡에게 지워진 주화오적(主和誤國)이란 오명은 단순히 생각할 일이 아니다. 조선의 병력은 일본보다 못하고, 조선의 군사는 조선 자치통솔권이 아니라 명나라의 통솔권에 움직였다. 게다가 명나라의 횡포는 정말 심각했다.

 

명군도 세력이 나누어져 서로 실적을 올리고, 다른 군세는 적의 수급이 부족하자, 조선인들을 살해하고 목을 잘라 성과품으로 바쳤다. 조선의 사내는 앞머리를 밀지 않으니 죽은 사람의 머리를 조롱하니 그 얼마나 참혹한 일인가? 하다못해 명나라 본국에서 조사관리관을 파견할 정도이니 그들의 민폐가 지독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많은 고통을 받는 것은 백성이다. 류성룡은 서울에 살면서도 지방에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현실을 보았다. 주자의 성리학인 조선에 다른 학문을 같이 수용하여 실질적인 안목을 높여 정책에 활용했다.

 

하지만 제일 심각한 문제는 기득권과의 투쟁이다. 서애 선생은 양반가문이고 재상의 반열에 올라갔으며, 그분의 부인은 왕실가문의 후손인 전주이씨이다. 광평대군의 후예로 재산과 권력 모두 가지고 있지만, 그 힘을 자신을 아니라 국가와 백성을 위해 사용한 것이다. <징비록>을 읽으니 서애 선생은 치질로 심한 고통을 받았다. 제대로 걷지 못해 기어서 어전에 나가 정사를 펼치고, 아픈 와중에도 정책안을 내놓았다. 류성룡의 적은 열도에서 침범한 왜적만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서인과 북인하고 갈등을 빚었고, 외교적으로 명나라와 여진족까지 닥쳤다.

 

특히나 광해군이 펼쳐준 활약으로 명나라에서 선조보단 광해군이 임금으로 있기에 적합하다는 말을 계속하였고, 이 때문에 선조는 양위소동을 일으켜 대신들의 충성심을 시험했다. 이런 소동 중에 가장 먼저 선조를 달래준 사람은 류성룡이었고, 전방의 이순신까지 정치적으로 지원해준 것 역시 류성룡이다. 당파적인 계략에서 학봉 김성일이 임진왜란의 조짐이 없다고 선조에게 보고했다고 하나, 선조는 황윤길과 김성일의 보고를 받고, 류성룡에게 전쟁대비를 하라는 분부를 내린다. 이순신이 수사로 발탁된 이유는 바로 일본에 사신으로 간 외교관의 이야기에서 시작했다.

 

당쟁의 역사에서 무관의 임용과 배치에서 입김이 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니, 배설이란 장수가 수사로 내려오는 것을 보고, 어찌 저런 인물이 수사로 올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내용이 있다. 배설은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패배할 때, 왜적에게 이길 가망성이 보이지 않아 자신의 배를 데리고 숨다가, 추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기용될 때 그 배를 이용하여 명량해전에서 대승한다. 하지만 배설은 이 와중에 군영을 이탈하여 전쟁이 끝난 후 체포된 뒤 참수된다. 추후 공적을 인정받아 벼슬이 증직되지만, 그가 탈영한 죄로 참수형을 당한 것 자체에서 장수로서의 자질이 부족했다.

 

이런 자들이 즐비하게 경상도 수군지휘관으로 오고 있다는 점에서 이순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참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임진왜란 배경과 전개는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 알지만, 이번에 읽은 책에서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15~18세기 사이 지구는 외계의 영향, 즉 간빙기로 인해 기상조건이 악화된 점이다. 현대과학에서 기상학은 지진, 해일, 홍수, 가뭄, 태풍 등 다양한 기상현상을 다룬다. 그러나 당시 과학지식으로서 저 원리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다른 이유로 원인을 찾으려 했다.

 

서구사회에서 가장 마녀사냥을 활발한 시점이 16~17세기이다. 15세기부터 시작한 마녀사냥이 19세기까지 진행된 원인은 농업의 문제였다. 상업이 발달하고 산업사회가 도래하기 전 대부분의 경제구조는 농업이다. 농사를 지어 수확을 해야 하는데, 이상기후 때문에 농작물의 수확이 저하되고, 게다가 기상이변은 신체적으로 질병을 일으키기 좋았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이 병에 시달려 자주 눕는 내용이 나온다. 류성룡 역시 병으로 앓는 모습이 나온다. 식량문제의 해결은 물류의 이동밖에 없고, 이런 세계화 흐름에서 대항해시대가 열린 것이 주요 세계흐름이다.

 

임진왜란이 조선과 왜적만이 아니라 중국 명나라와 청나라, 포르투갈과 서구의 국가까지 개입된 시점에서 이미 세계는 크게 변화하고 있던 셈이다. 이런 시점에 백성들을 구휼하는 선책보단 이익을 생각하는 지배계급층을 보고 있자니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나라를 잃게 될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군사력의 보강이다. 왜적을 막으려면 날랜 군사가 필요하고,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건강한 장정이 필요하다. 조선시대 노비를 군역에 동원하지 않았다. 노비를 사적인 재산으로 여긴 양반들이 노비까지 군사에 동원하면 자신의 이익에 손해 보니 반대를 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당쟁과 사화, 그리고 흥망성쇠를 보면 양반 기득권 세력과 개혁자간의 대립구도에서 개혁자의 실패로 결론난다. 기묘사화의 원인이 조광조의 개혁안이지만, 중요한 원인은 훈구대신 내지 공신들의 권력을 침해했기 때문이다. 류성룡의 탄핵이 된 이유도 역시 그렇다. 전쟁이 승리로 돌아가고 전후공상을 따지게 될 상황에서 류성룡은 파직당하고, 어린시절 친구 이순신은 전사한다. 류성룡이 내놓은 정책은 전시행정만 아니라 일반 행정상황에도 큰 도움이 되는 방안이었다.

 

양반계급의 권력을 감축하고, 백성의 삶을 향상시키며, 군병력을 강화하는 정책은 결국 물거품이 된 셈이다. 고향 안동에 내려간 서애 선생은 선조가 계속 종용해도 끝내 조정에 나가지 않았고, 결국 역사의 큰 빛줄기로 사라진다. 서애 선생을 모신 병산서원은 광해군이 직접 지시한 곳이었다. 광해군은 대북의 세력을 받고 올라갔지만,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문무관을 여전히 챙기고 있었다. 2017년 가을, 나는 안동에 위치한 퇴계 선생의 위패를 모신 도산서원과 서애 선생의 위패를 모신 병산서원을 다녀왔다.

 

낙동강의 물줄기가 시작되는 그곳에서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의 느낌이 참으로 달랐다. 도산서원은 약간 높은 구릉지에서 아래로 강줄기와 농경지를 바라본다면, 병산서원은 강줄기 뒤로 높은 절벽이 보였다. 절벽 아래 강줄기는 참으로 멋진 경관을 연출했지만 한편으로 답답하고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 서애 선생이 느낀 전쟁에서 고생한 것도 모자라 억울하게 재상의 자리에서 내려와 전쟁의 아픔을 다시 반성하는 그 심정을 과연 어떤 것일까? <징비록>을 읽고, 임진왜란과 관련된 연구도서를 보면서 류성룡이란 인물의 위대함을 느꼈지만, 다시금 느껴지는 것은 서애 선생이 가진 실질적인 정치 감각이었다.

 

류성룡 선생은 소재 노수신 선생에게 많은 것을 배웠고, 게다가 선조를 임금으로 만드는데 가장 많은 공헌을 한 영의정 이준경과 가까웠다. 이준경이 죽기 전에 붕당의 문제를 예감하여 유고를 남긴다. 율곡 이이 선생이 매우 뛰어난 인물은 알지만, 그가 너무 극단적이고 현실보다 이상적인 요소만 말하기에 이준경 선생은 생전 이이에 대해 비판적으로 봤다. 이에 정철과 율곡 이이의 주변사람들이 이준경을 비난하자, 류성룡 선생은 노신이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고, 그가 틀린말을 하면 그것이 틀렸다고 하면 되지 왜 벼슬까지 빼앗으려 하느냐고 했다.

 

신속, 정확, 명쾌한 정치적 안목이 있지만, 그것을 내놓기 전에는 처음부터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그 상황에 맞는 대답을 내놓은 것이 류성룡의 방식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류성룡의 방식에 비난을 하지만, 만일 처음부터 그 방안을 내놓았다면 그대로 올곧게 들었을 리가 없었다. 정말 그런지 모르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류성룡이 임진왜란 온갖 고생을 하는 모습이 나온다. 선조가 삼도수군통제사를 이순신에서 원균으로 바꾸고, 이순신을 고문하고 백의종군하게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원균이 칠천량해전으로 패하고, 왜적이 다시 침공하자, 수군을 맡을 자가 이순신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이순신을 다시 부를 수 있는 인물은 류성룡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고, 류성룡은 선조의 입에서 이순신을 다시 부르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라마라는 속성이 따르지만, 적어도 이순신과 류성룡의 관계에서 류성룡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게 조선의 조정이었다. 물론 류성룡도 실책이 있었다. 선조가 이순신을 무고하여 역적으로 만들어 죽이려 할 때 류성룡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오리 정승 이원익이 목숨을 걸고 이순신의 죽음을 막았다. 이원익은 태종의 왕자 익녕군(益寧君) 이치(李袳)4세손으로 왕실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선비로 늘 백성을 아끼는 진정한 군자였다. 류성룡이 파직당할 때 이원익이 옆에서 변호하다 같이 파직되었다. 류성룡의 몰락은 남인의 몰락이기도 하지만, 전시행정을 이끈 관료들의 몰락이었다. 왜냐하면 많은 백성들은 선조보다 이순신, 광해군, 류성룡의 활약에 더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무관이나 정쟁의 중심에 있던 남인의 영수인 류성룡은 평가 절하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조시대에 오면서 류성룡의 가치는 다시 원위치로 올라가고, 20세기 국사학을 배우면서 류성룡이란 인물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재상이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많은 손실을 입었으나, 전쟁보상금이 나간 것도 토지 하나 잃은 것이 없었다. 물론 국토는 유린되었지만, 그런다고 모두 사라진 게 아니었다. 역사는 너무 간단한 조건에서 보면 안 된다. 전후사정과 다른 국가의 역사기록까지 참고해야 한다. 명나라 장수들이 조선에 와서 선조와 조정대신에 대해 많은 비난을 날렸다. 시문놀이 하는 습관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로지 류성룡에 대해서만 칭송을 했다고 한다.

 

류성룡 선생이 <징비록>을 집필할 때 피눈물을 흘리는 마음으로 붓을 들었을 것이다. 그 기나긴 전쟁의 아픔, 추위와 배고픔에 죽어나가는 백성들, 전투에서 사라져간 친구와 장병들, 이 많은 고통들이 21세기 우리에게 큰 유산이 되었다. 당시보다 비교하여 현대사회가 평화롭지만, 그 평화는 단순히 좋은 세상이기에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 전쟁을 하는 것이 각 국가마다 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휴전, 중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한반도는 늘 전쟁위기 속에 평화가 숨을 쉬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애 선생의 <징비록>의 정신을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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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1-06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칸트가 평생을 보낸 쾨니히스베르크가 2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로 넘어가면서 칸트를 러시아인으로 만드는 역사왜곡이 행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러한 행태를 보면 역사에 대한 이해당사자들의 입장이 차이가 나는 것은 중국의 동북공정 뿐 아니라 동서고금 공통된 일인 것 같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01-06 22:18   좋아요 1 | URL
아독일 그 동네를 치보니 갑자기 스탈린그라드가 나오는 겁니다. 거기가 독일의 땅이 되고 칸트의 동네가 러시아의 관광지가 되었다니!

동북공정과 관련하여도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보더라도 역사는 과거의 것이 결코 아니죵

2018-01-06 1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06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재 윤두서, 조선 후기 선비 그림의 선구자 조선의 화가들 2
박은순 지음 / 돌베개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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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족보를 보면 나의 가계도가 나와 있다. 족보를 보면서 이상한 점은 딸과 아내의 이름이 거명되지 않으나, 딸이 시집간 집안에서 자녀의 이름을 올리는 것이다. 집에 족보를 보면 할머니가 시집을 오시면 할머니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더 나아가 외할아버지의 이름까지 기재했다. 우리집안의 족보는 1702년 임오보(壬午譜) 숙종 때 창간된 것이고, 지금 원판은 강진군 덕정동 추원당에 보관되어 있다. 2017년 유시민 작가와 다른 학자들이 알쓸신잡 시리즈 열풍과 그리고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등의 재발간 및 활동으로 전남 강진과 해남 일대를 소개하게 되었다.

 

강진에 가면 다산초당이고, 해남에 가면 고산 윤선도 종택이 있다. 강진 도암면 강정리에 위치한 추원당은 고산 윤선도 선생이 직접 만드신 한옥이고, 그곳에 보관된 해남윤씨 목판 족보는 고산 선생의 외손자 심단 선생이 마무리했다. 심단 선생의 아버지는 젊은 날에 요절했기에 심단 선생은 고산 선생의 집안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고산 선생이 진행하던 집안족보를 비로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추원당에 그 족보가 300년 넘게 자라잡고 있다. 그리고 심단선생은 심득경 선생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심득경 선생은 고산 윤선도 선생의 증손자 공재 윤두서의 친구 겸 친구이시다. 위에 집안 족보를 이야기한 이유는 한국 국보 240<자화상>을 처음 본 것은 집에 보관된 족보에서 봤기 때문이다. <자화상>이란 작품은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가는 조선시대에서 새로운 화법이었다. 영화 <관상>에서 송강호 씨의 얼굴 포스터가 바로 저 자화상을 본 떠 만든 것이고, 기존 동양의 그림과 다르게 서양의 사실주의적 화풍을 그림에 담았다. 선비의 글과 그림은 선비의 마음과 정신이 드러난 것이다. 화려한 그림과 과도한 허례의식보단 간결하고 소박하고 정확한 이미지를 그림에 불어 넣은 그림이 이제 한국역사 조선에서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집안이 남인이었고, 우리 직계할아버지와 형제분들도 인조 이후로 거의 출사하지 않았다. 그나마 출사한 것은 영조와 정조 시대 정도이다. 정약용 선생의 친구이면서 사돈인 윤서유 선생 역시 순조 이후 조정에 출사했지만, 다산 선생이 직접 묘비명을 새긴 글을 보면 여전히 남인이란 이유로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다. 참고로 윤서유 선생은 1801년 신유사옥이 일어날 때 정약용 선생과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로 관아에 갇혀 고초를 겪었다. 사림의 일원에서 시작한 집안이나, 기묘사화부터 화를 당하기 시작하여 붕당의 정쟁에서 늘 변두리에 진전하는 집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산과 공재, 그리고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학문의 세계는 당연히 송학(宋學)이라고 불리는 성리학에서 탈출하여 고학(古學)을 추구했고, 정약용 선생의 경우 고학을 추구하기 위해 다시 공맹의 학문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공자와 맹자가 2,500여년 전 사람이라고 해도, 그 시대는 지금과 달라도 정치와 사회에 대한 견해는 지금 민주주의 사회에 비추어 봐도 다소 납득이 된다. 백성이 근간이 되는 정치, 백성들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이다. 그렇다면 백성에 대해 어떤 관점을 봐야 하는가?

 

예전에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을 읽은 적이 있었다. 성호 선생은 자신의 둘째 형님이신 이잠 선생이 숙종 때 경종을 옹호하고, 상대 당파 노론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다, 숙종의 분노를 사게 되어 죽음을 당했다. 숙종이 직접 친문하여 장형을 당한지 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잠의 동생이 이익은 물론이고, 옥동 이서 역시 정치와 연이 닿지 않은 시골로 내려와 평생을 학문과 예술에 몰입했다. 과거의 역사를 보면 어느 한 개인의 고통은 다른 누군가에게 큰 동력이 되었고, 현세에 이르러 민족의 훌륭한 기록과 유물로 남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성호 이익의 학문은 그대로 정약용 선생에게 이어져 12서라고 불리는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여유당 전서> 수백권이 탄생했다. 이런 성호 선생도 사숙하던 이가 있으니 공재 윤두서 선생이다. 공재 선생이 태어날 때 고산 윤선도 선생은 말년을 보내고 있었다. 증손자를 본 것을 기뻐하며, 해남윤씨 어초은공파(귤정공댁)의 장손으로 삼았다. 예나 지금이나 양자제도는 이루어졌지만, 당시 조선시대 양자제도는 많이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고산 선생도 원래 장자가 아니지만, 양자로 들어갔고, 친부모와 양부모 모두 섬기며 살아갔기 때문이다.

 

소학(小學)을 필두로 실천적인 자세를 임하는 모습은 조선 중기 북인의 학맥과 유사하다. 북인이 인조반정에서 모두 몰락하자, 일부 북인들은 남인으로 유입된다. 실천적 학문이 돋보인 것은 경세에 대한 관점이고, 경세해야 될 대상에 대한 관찰이다. 그리고 그 대상을 관찰하는 것을 넘어 삶 그 자체로 넘어가는 것 역시 소중하다. 고산 윤선도 선생은 보길도에서 <어부사시사>를 짓는다. 세종대왕이 한글훈민정음을 창제해도 양반사대부들은 우리의 글을 무시했고, 한문만 사용했다.

 

한글과 한문 모두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한문을 모르면 과거를 볼 수 없고, 모든 문서를 이해할 수 없다. 지식의 독점이야 말로 권력의 독점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다른 책에서 보니 고산 선생은 어부사시사를 지을 무렵, 직접 어민의 배를 타고 노를 같이 움직이고, 그물도 같이 들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백성의 삶에 들어가 그들의 애환을 노래로 담아 한글로 된 가사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종손 윤두서는 글이 아닌 그림과 시로 백성의 삶을 담아내었다. 박은순 교수가 저술한 <공재 윤두서>란 책의 표지를 보면 윤두서의 자화상이 묵묵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들어가는 말 부분 옆에 어느 아낙네가 낫을 들고 잠시 서 있는 모습이 나온다. 위에 윤두서의 시가 적혀 있다.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려져 있으니, 오가는 사람이 모두 흙으로만 알고, 옥인 줄은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니, 흙인 듯이 가만히 있거라.” 백성의 삶을 관망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삶이란 형태적 요소까지 접근한다. 그림을 보면, 단순히 농사짓는 아낙네만 그린 것만 아니라 나무를 깎는 백성의 그림까지 그린다. 그의 학문은 성리학을 넘어 의학, 천문, 지리, 수학 등 다양한 분야를 넘고 넘었다. 고산 선생 역시 의약과 지리학 등 다양한 학문에 능했다.

 

박학다식하면서 옛것을 좋아하는 마음,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많이 보급하는 방식, 실학자들의 사상은 이렇게 맥을 이어간다. 게다가 공재 선생의 아내가 되는 분은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 선생의 종손녀이시다. 지봉유설에 관한 서적을 읽으니 단순히 시문놀이나 하던 양반사대부의 허위의식을 지나 다양한 이야기가 책에 나온다. 지리와 민족, 식물과 동물 등까지 말이다. 조선시대 가장 심각한 문제는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의식이다. 그러나 고학을 넘어보며, 현실을 생각하며,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보면서 역사관도 새롭게 등장했다. 조선의 역사는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 조선의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의식이다.

 

20세기를 지나 21세기로 도래하면서 헬조선이란 신종단어가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맥락이지만, 한편으로 사대주의 발상조차도 조선시대에서 이어진 맥락이다. 민주주의 역사는 20세기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시대에 도래해도, 민주주의 사상의 근간이 되는 민본주의는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리뷰를 적는 본인도 한국의 현실에 대해 상당히 회의감을 품고 있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희망을 조금이라도 가지는 이유는 조선시대부터 이미 헬조선화 시키는 부류에 대항하는 지식인이 분명히 존재했고, 그들이 비록 역사 앞에서 좌절한 채 사라졌지만, 그들의 의지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어도 제대로 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나라이다. 그들은 한국에서 민주주주국가 주인이라고 하나, 사실 재력이란 권력 앞에 너무 약한 자들이다. 이런 나쁜 마인드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단어에서 결국 상업(商業)이 제일 앞으로 가고, 사인(士人)들이란 정치가들이 재벌가와 손을 잡으며, 결국 농사짓는 사람과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착취를 당하게 되는 구조로 되었다. 공돌이 공순이란 단어가 있듯이, 비정규직 노동자나 가난한 직장인들은 현대판 노예인 것이다. 노예에 대한 처우를 보면 조선시대 역시 슬프기 그지없다.

 

공재의 기록에 보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노비를 재물로 본다. 채찍질하고, 포학하게 대하여 소나 말보다 못하게 대한다. 저 소와 말도 그 임무를 하지 못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팔지 못할까 봐 잔인하게 상처를 내거나 얼고 굶주리게 하지 않는다. 오직 노비에 대해서만은 이러한 우려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얼고 굶주리게 하여, 해치고 상처 내어 살아서는 그 집안을 파괴하고, 죽어서는 그 재산을 몰수하는데 이로니 슬프구나. 나는 이러한 까닭에 이 기록을 남겨 잘 대우하라고 하였다. 이로써 스스로를 경계하여 반성하고, 또한 자손에게 주려고 하는 것이다.”

 

어느 대기업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가 직업병으로 암으로 죽었는데도 여전히 현실의 벽은 막혀있다. 수많은 건설노동자 매주 죽어나가는데도 안전관리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들의 죽음이 기업들의 책임과 잘못에 있는데도 오히려 개인의 잘못으로 몰아가는 현실이다. 민주주의가 중요한 게 아니라 민본주의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이유가 이렇다. 공재 윤두서는 노비를 매입할 때 재미있는 방법을 사용했다. 어느 누군가 노비를 구매했는데, 알고 보니 한 가족이었다. 노비로 태어난 것도 억울하고 가족까지 떨어지게 만드는 것 역시 잔혹했다. 어느 노비에게 합법적인 절차를 수행하여 면천시켜주기도 했다.

 

한국사회에서 누군가 자신이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에 있으면 아랫사람에게 욕설을 마구 내뱉으며 하대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공재 공은 하인들에게 말을 걸 때 웃으면서 대했다고 한다. 그런 성품은 당연히 그림으로 드러나고, 억지스러운 화법보단 있는 그 자체에 대한 사실성으로 드러난 것이다. <유화백마도>를 보면 하얀 말의 근육 하나하나까지 묘사했고, 친구 심득경이 사망하자, 그의 초상화를 그려 심득경의 가족에게 전할 때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처럼 그려 넣었다.

 

권력의 횡포에서 관직을 포기하고, 은둔의 생활을 지향했으며, 백성의 삶에 관심을 가진 점이 곧 근기남인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아버지가 살아생전 나에게 우리집안의 내력을 이야기할 때, 고산 윤선도 선생의 고조부이신 어초은 윤효정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초은공은 내 직계 할아버지의 막내 동생 분이었다. 백성들이 흉년이 되어 나라에 세금을 내지 못해 관아에 갇혀 있을 때 자신의 사재를 털어 옥문에 갇힌 백성을 집으로 보내게 한 점을 말이다. 3번이나 했다고 했으니 얼마나 많은 재물이 백성을 위해 사용되었는가?

 

조선시대 실제 양반의 수는 10%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21세기 한국의 성을 보면 모두 양반의 가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중요하지 않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국가이고, 누구의 위에 있어서도 아래에 있어서도 안 되는 주권국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주의국가라고 해도 민본주의적 근간은 완성되지 않았다. 우리집안은 당쟁의 시기 몰락한 양반이라 높은 벼슬에 오른 분은 많지 않다. 어느 집안에 정승이 몇 명이고, 판서와 참판이 몇 수십 명인 것보다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을 아껴준 것이 더욱 훌륭한 것이다.

 

현재도 당시도 정치가의 책무란 무엇을 생각하면 국가를 위해 살아가야 했고, 조선시대라면 왕도정치를 실행해야 했다. 그러나 왕도정치보단 권력만 지향하니 어찌 안타깝지 않을 수가 있을까? 백호 윤휴를 찾아보면 그는 양반도 농민처럼 세금을 내야한다고 주장했고, 그것은 노론에 막혀 버렸고, 경신환국에서 죽음을 당한다. 강한 국가를 위해서는 가진 자가 너무 가지게 하면 안 되고, 백성들이 어느 정도 먹고살만해도 부국강병의 초석이 된다고 본 것이다. <공재 윤두서>는 미술사학자적인 관점으로 제작되었으나, 공재 윤두서의 인간을 모르면 작품 자체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실 백호 윤휴는 고산 윤선도와 친했고, 윤휴와 인척이 되는 미수 허목은 윤선도의 묘비명을 지어주었다. 성호 이익의 가족은 공재 윤두서 집안과 친척관계이니 그들의 관계성을 보지 않으면 작품을 알 수 없고, 그 작품성에 선비정신이 담겨있으니 당연히 역사적 맥락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선비화가로 그가 남긴 작품은 국가의 국가와 보물이 되어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새로운 화풍과 조선시대의 역사적 유물로서 현세에 이른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저자 박은순 교수가 확실하게 밝힌 것처럼 시대에 좌절한 그였지만,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자신의 뜻이 전달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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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12-31 1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집에도 족보가 있었습니다. 노란 족보를 아버님이 신주단지 모시듯 했는데
이사가 잦다 보니 분실했네요. 족보 보는 맛도 재미있을 텐데 말입니다.
만애비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려..

만화애니비평 2017-12-31 14:08   좋아요 0 | URL
족보를 보면서 생각이 드는건, 2000년 되기전 한국의 것들은 낡고 유치한 것이 되고, 이제는 다른 식으로 가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요소가 이상히 흘러가는구나 하고 생각됩니다.

족보는 소중하나, 족보로 모든 것을 결정지으면 안되고, 족보를 보면 한가족의 역사만이 아니라 그 역사로 통한 과거의 기록이기도 하니, 참으로 오묘한 이치가 다가옵니다.

가끔 생각합니다. 과거에 살던 자는 과거라면, 내 자신도 언젠가는 과거가 될 것이다. 어찌 보면 집에서 아버지가 족보를 소중히 대한 것은 가진게 아무것도 없어서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올 한해 다 지나갔습니다. 내년에 MB가 구속되는 좋은 새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곰곰발님도 감기 조심하고 좋은 새해를 보내세요~

2017-12-31 14: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31 14: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oren 2017-12-31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두서 자화상은 해남에 있는 ‘고산 윤선도 유물 전시관‘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해남윤씨 종택, 윤선도 무덤, 고산 사당을 두루 둘러봤던 기억이 새롭네요. 고산의 무덤이 워낙에 천하명당에 자리잡고 있어서 해남윤씨가 고산 사후 400년 가까이 굳건하다는 설명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고산사당 안내판에 ‘불천지위(不遷之位)‘를 모신 경위가 나와 자세히 있던데, 고산 사후 56년이나 지난 영조 3년(1727년) 때더군요. 제가 태어난 고향 마을에도 종갓집 뒷편에 선조가 내린 사액 현판이 걸려 있고, 임진왜란때 큰 공을 세운 조상의 위패를 모셔 두고 아직까지도 집안 어른들이 해마다 불천위 제사를 모시고 있답니다. 어릴 때 고향에서 자랄 때만 하더라도 그 할아버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를 가끔씩 공부했던 듯한데, 이제는 까마득한 옛추억일 뿐이네요.

만화애니비평 2018-01-01 20:00   좋아요 0 | URL
고산공의 무덤까지 못가고, 고산의 고조부인 어초은공은 녹우당 뒤편 가까운 산기슭에 모셔져있습니다. 어초은공과 고산공은 불천위의 제사를 받들게 된 분이나. 개인적으로 진도 굴포마을 주민들이 고산공을 기리는 제사가 뜻이 깊다고 봅니다. 자신의 조상도 아니나. 가난한 백성을 위해 간척지를 메워 농지를 나누어준 것이 진실로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대안이라고 봅니다. 요새 조선시대 운운하면 촌스러워 하는 분이 많으나. 그분들이 해외에 가서 유명 문화유산을 보고 좋다고 여길 때 참으로 한심스러워 보입니다. 이런 문화적 유산이나 다른 나라의 문화유산이나 별로 다를게 없는데 말이죠.

겨울호랑이 2017-12-31 1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화애니비평님 2017년 한 해동안 우리나라 역사에 관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내년에도 좋은 글 부탁드리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만화애니비평 2018-01-01 19:57   좋아요 1 | URL
아 요새 유성룡선생에 대한 책을 보는데 기축옥사 당시 이발과 이길 형제의 죽음, 그리고 그 노모분이 압슬형으로 참혹하게 죽어 원성이 높자, 호남의 안방준이 정철의 혐의를 유성룡에게 덮어씌우는 내용이 있어서 이 덧글을 보자말자 놀랐습니다.

이발의 어머님은 귤정공 윤구의 따님인데, 윤구 선생의 동생으로 행당공 윤복이란 분이 계십니다. 저 유명한 다산초당의 주인 윤단의 선조입니다. 윤복 선생은 자재분을 퇴계선생에게 보내 가르침을 받게 합니다.

남인에서 유성룡이 퇴계선생의 수제자인데, 어찌 동문수학하던 사촌누이의 아들 학우가 친구의 어머니를 팔아먹겠습니까? 아무튼 이책도 재미있어 보이니 조만간 서평이 올라갈겁니다.

겨울호랑이 2018-01-01 20:10   좋아요 1 | URL
^^: . 역사를 보면, 광산 이씨 가문과 해남 윤씨 가문이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깝게는 저희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렇지만요. ㅋ 조선 역사와 관련한 만화애니비평님의 글은 좋은 자극이 되어 항상 기대가 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01-01 20:13   좋아요 1 | URL
아하하하 그런 것이라니...
겨울님이 광주 주변에 사는 것으로 아는데
광주에 문중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고, 그래서 518 당시
많은 분들이 희생당하기도 했죠....
아마 호랑이님 어머니도 어초은공의 후손인듯 하네요? ㅎㅎ

겨울호랑이 2018-01-01 20:20   좋아요 0 | URL
^^: 저는 지금 용인에 살고 있지요. 다만 부모님께서는 강진에 사셨구요. 제게는 해남윤씨 가문이 외가쪽이라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외할머니 산소를 강진군 도암면에 쓰셨다는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만... 조만간 여쭤봐야겠네요^^: 만화애니비평님께서는 참 자세히 알고 계십니다!

2018-01-01 2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01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8-01-01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만화애니비평님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만화애니비평 2018-01-02 10:53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감사합니다.
올해 좋은 일이 항상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언제 카스피님과 가족분들이 건강하시기 바라겠습니다.
 

1.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영화 <강철비>를 보면서 나는 순간 놀라운 것을 보았다. 작품 내 새로운 대통령이 1권의 책을 들고 있었다. 분명 제목은 영어로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저자의 이름이 어렴풋이 보였다. 저자의 이름은 브루스 커밍스 교수, 미국에서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받은 사람이다. 최근에 현실문화연구 출판사에서 나온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을 읽어보았다. 책을 보면 아주 복잡다양한 한국전쟁에 대해 소개했다. 한국전쟁은 미소냉전의 이데올로기의 격돌로 이루어진 전쟁이기도 하나, 그 전쟁의 뿌리에는 깊은 원망과 증오가 숨어있었다.

 

전쟁의 역사는 단순히 타국과의 갈등이 아니라 오히려 내부에서 발현된 갈등이다. 한국전쟁은 두고 남침 내지 북침이라는 다양한 표현도 있지만, 이데올로기를 넘어 다시 생각해보면, 매우 비극적인 전쟁이다. 한국전쟁은 20세기 최고의 내전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두고 광복후에도 전쟁에서 보여준 참혹한 복수극 내지 학살은 이미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내재되어 있었다. 광복절 이후 미군정은 친일세력을 정부세력을 편입하고, 이들은 역사의 청산 대신 권력의 총을 받았다. 독립군들은 대부분 미군정보단 자치적으로 활동하거나 혹은 중국 내지 소비에트와 연계했다.

 

독립군 대부분이 대종교 신자인 점에서 민족주의자 내지 사회주의 또는 무정부주의자도 많았다. 일본 패망 전에는 미군의 입장에서 공동전선을 이끌 군세이나, 일본이 물러간 한반도에서 보자면 앞으로 신탁통치에 방해될 존재이다. 그런 갈등에서 친일의 잔재는 우리 사회에 그렇게 흘러갔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한국전쟁을 두고 냉전을 넘어 민족 내부에서 보여준 증오와 공포에서 학살극이 이어졌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것이다. 친일파에 대한 조선 민중의 증오, 그런 민중으로부터 공포를 느끼는 친일세력의 대립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2. 내전, 끝나지 않은 비극

친일과 군부의 정권장악, 영화 <강철비>에서 곽철우는 북에서 내려온 엄철우에게 자신의 정치철학관을 말해준다. 분단된 나라에서 살아가는 국민들은 분단으로 인한 고통보단 그 분단된 것을 이용하는 자에 의해 고통을 받는다고 말이다. 에릭 홉스봄이란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는 19세기를 두고 혁명의 시대라 말하며, 그에 따라 넘어가면서 자본과 폭력의 시대로 연계된다. 혁명의 시기에서 18세기 말 프랑스대혁명을 필두로 유럽은 노동문제와 인권문제로 혁명이 일어나고 수많은 민중들이 권력에 의해 압박당한다. 그리고 20세기 민주주의가 도래해도, 그것은 진정한 의미로 민주주의가 아니라. 국가권력이 주도적으로 움직인 민주주의이다. 20세기는 전쟁의 시기이고, 전쟁은 자본의 경쟁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한국전쟁은 민족 내부 갈등과 더불어 자본의 논리에 의해 일어난 전쟁이기도 하다. 대부분 식민지 시절 친일세력은 정치권력과 경제력을 장악하고, 억압받은 민중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착복을 당했다. 그런 와중 북한에서 소련의 스탈린주의적 공산주의가 전시공산주의로 변모되었고, 한국은 미국의 자본주의 경제구조가 도래되었다. 자본주의 구조적 문제는 자유주의 내지 민주주의와 상관성을 가지지만, 결코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는 자본에 대한 개인의 권리를 인정하지만, 자본으로 자유를 파괴하는 것은 분명 자유주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북한과 남한의 차이점은 자유라는 슬로건은 모두 내걸지만, 한 쪽은 자본을 국가권력에 의해 장악하고, 다른 한쪽은 국가권력과 유착하여 장악했다.

 

위쪽은 정치권력이 없으면 피지배계급이고, 아래쪽은 경제력이 없으면 피지배계급이 되었다. 21세기에 도래하면서 역사와 경제학적 구조에 의해 전시공산주의보단 자본주의가 더 효율적인 정치경제구조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영화리뷰 하면서 이렇게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바로 영화 <강철비>를 이해하려면 역사적 맥락과 정치, 사회, 경제적 흐름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강철비>는 상당히 어려운 영화이다. 기존 한국의 블록버스터 체계에서 상당한 도전을 보여준 작품이다. <쉬리><공동경비구역 JSA> 등 북한과의 갈등을 빚는 영화에서 북한의 어느 개인은 인간적이지 모르나, 북한이란 정치적 체계 그 자체에 대해 악의 축이란 이미지를 강하게 부여했다.

 

물론 폭력국가 내지 테러리즘이 강한 곳이 북한인 것은 사실이나, 이 문제는 상당한 딜레마로 작용한다. 어느 정권이든지 통일이란 주제에 항상 눈여겨보고, 북한과의 외교안보전략이 정권에서 제일 큰 과제이기도 하다. 보수정권조차 북한과의 외교정책을 중요하게 여기고, 한편으로 북한과의 외교적 갈등을 군사적 대응체계로 보여주기도 한다. 북한은 정치경제적으로 실패한 나라이다. 하지만 실패했다고 해도 북한이란 정치적 체계는 붕괴하지 않았고, 붕괴의 위험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적 붕괴보단 숙청이란 단어가 우리에게 익숙하다. 정치와 군사세력이 일치하면 그 국가는 군사력을 통솔할 수 있는 장성들이 최고 권력자가 되나, 한편으로 가장 먼저 죽어줘야 하는 대상이 된다.

 

3. 차가운 머리를 가진 영화 <강철비>

영화 <강철비>는 매우 담담한 영화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로 꺼내기 힘든 부분을 있는 그 자체의 사실을 영화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외교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나라는 항상 미국, 중국, 일본 등 주변국가로부터 간섭을 받는다. 사람들은 한국의 최고 우방국을 생각하면 미국을 생각한다. 하지만 미국은 최고의 우방국을 한국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이 여기는 우방국은 일본이다. 일본과 한국에 미군이 주둔하는데, 주한미군보다 주일미군의 세력이 더 강대하다. 오키나와에 미공군 내지 미해군이 대기중이고, 그 외로 괌에 위치한 기지에도 주둔한다.

 

일본 훗카이도에 미공군기지 역시 주요 군사력 중에 하나이다. 아마 올해 들어 한국의 밀리터리마니아에게 가장 인상적인 영화를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이 영화라고 볼 것이다. 물론 미국에 비하면 비교하기 힘들지만, 군사작전과 전략, 무기체계와 첩보전은 상당히 잘 짜여진 연출이었다. 감독 양우석이 <변호인>으로 흥행할 때, 그에게 무기는 오로지 송강호 씨의 흡입력이었다. 송강호 씨가 보여준 <변호인>에서 그가 차지한 비중이 너무 거대했다. 그러나 송강호 씨는 그 거대한 모습을 감춘 듯 작품 속을 유영했다. 그렇기에 송강호 씨의 연기는 더욱 중요했다. 하지만 <강철비>에서 주인공인 곽도원 씨와 정우성 씨의 연기배분을 잘 정리했다.

 

작품에서 샷과 샷의 전환에서 치밀한 상황을 아주 명쾌하게 전환해 나갔다. 첩보전이나 심리적인 요소에서 시간을 끌기보단 그런 요소들을 빠르게 진행하여 작품의 긴장감을 더욱 상승시켰다. 작품 중간의 격투나 전투장면은 억지로 길게 끌지 않았고, 특히나 <군함도>처럼 영웅 캐릭터가 잘 죽지도 않고, 다쳐도 금방 회복되는 무리한 연출을 넣기보단 오히려 첩보전에 어울리는 장면으로 위기를 넘긴 게 좋았다(북한군 특수부대원이 넘버1을 암살하려 할 때 시신과 넘버1를 바꿔치기한 장면).

 

4. 영화 시작점인 쿠데타 요소는 무엇을 말하는가?

북한에서 정권이 바뀌면 그전에 승승장구하던 자를 숙청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번 북한정권에서도 자신의 형제나 숙부조차 처형하고, 많은 군부세력이 바뀌는 일이 뉴스지면에 나온다. 어제까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술잔을 나누며 웃었던 자들이 어느 순간 어둠으로 사라진다. 영원할 것 같은 권력의 좌, 하지만 눈 밖에 나는 순간 차가운 감옥에 갇히거나 고통스러운 고문과 죽음이 기다린다. 그들이 죽음에서 무슨 죄를 지었는가? 라는 의문보다 무엇을 위해 사라져 가는가? 라는 권력의 관계성을 봐야 한다.

 

영화를 보면 이중교란이 나온다. 반역자를 제거하라고 말한 자가 반역을 저지른다. 그가 반역을 저지른 이유를 본다면, 계속되는 군부와 당 내 권력자의 숙청, 그동안 자신들이 살아온 인생과 국가 자체의 이데올로기가 그렇게 만들었다. 현실과 이상, 그리고 권력과 미래의 관계성에서 극단적 선택을 택한 것이다. 단지 영화에서 본다면 북한군이 쉽게 남한으로 넘어올 수 있는 비밀통로가 있다는 설정은 무리수이기도 하나, 영화는 하나의 설정이란 조건에서 본다면, 그들이 처음부터 노린 전차의 탈취, 군병원의 습격은 첩보전의 긴박함을 보여준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아니라면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만의 이상에 갇혀 몰락할 때, 권력이란 이름은 그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다. 문제는 권력은 내부의 문제이기도 하나, 그 권력의 중심부가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주변국가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북한에 문제가 생기면 가장 문제는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고, 핵전쟁이 일어나면 전후복구비만 아니라 많은 인명이 손실되고, 특히나 남북 간의 화해는 전혀 진정될 수 없다. 하지만 이대로 장기전이 되면 국가 내부적으로 큰 소란이 일어나고, 전쟁에 따른 인명과 재산손실 역시 만만치 않다.

 

5. 역사는 현실과 과거와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의지에 따라 전쟁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미국에 의한 작전통제권이 이루어지고, 더 크나큰 위협으로 중국과 일본이 크게 관여한다는 점이다. 20세기 한국전쟁에서 모택동은 17세기 병자호란 때 개망나니 같은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를 가진 자가 결국 조선에 침입한 적을 막아내었다는 논리다. 모씨의 역사는 350년 차이가 나는데, 아직 중국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두고 우리는 왜놈의 난을 부린 최악의 상황이라면, 중국은 항왜원조(抗倭援朝)라 부른다. 왜국에 저항하여 조선을 돕는다. 201712월 중반에 한국대통령은 중국에 방문했다.

 

이때 중국 주석은 난징대학살 기념행사에 갔다. 난징대학살 정도의 사건이라면, 일본에서는 자위적인 행위인 원폭투하 희생자를 기리는 날이고, 한국에서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날과 맞먹는다. 그 나라에서 가장 빼놓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날에 타국의 대통령이 방문을 하자, 중국 주석은 바로 만나지 않고, 행사 후 만났다. 만일 한국의 대통령이 중국의 행사장에 갔다면 일본은 항의했을 것이고, 자국에서는 중국에 너무 머리를 숙이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들을 것이다. 반대로 주석을 바로 만나지 못해 외교적으로 무시당하지 않았냐는 말을 나오기도 한다.

 

한국전쟁 기념일에 대통령이 UN묘지에 참석하지 않고, 외국정상이 왔다고 그들을 만나러 갔다면 그것이 더욱 문제가 아닌가? 정상은 자국민과 자국의 이익이 우선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역사란 계속 되풀이 되고 비극은 제2 내지 제3의 배우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것이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영화 <강철비>에서 잘 나오는 게 바로 일본과 한국의 관계에서 미국의 입장이다. 영화가 그렇다고 하나, 사실 말을 하지 않아도 미국은 한국보다 일본의 편을 들어준다.

 

아베를 비롯한 일본 권력가들이 지금 노리는 것을 일본헌법 개정이다. 일본의 군사력은 자위대라 하지만, 자위대는 군사조직이 아니다. 군사조직이 일본에 생기면 그들은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된다. 전쟁이 다시 할 수 있는 것은 한반도에 전시상황 무력개입이 가능하다. 한국전쟁으로 일본에 난민이 오면 인도적인 대우보단 사살 내지 감금이란 비인도적 행위를 할 것이란 기사를 보았다. 미국이 우리의 절대우방이라면 일본에 간 우리 한국인 전쟁난민이 인권유린당해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나, 사실 주한미군조차 우리나라 법규자체에 상당히 큰 면책권을 가지고 있다.

 

6.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미국이 우방이라 하나, 그들은 그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우리는 우리의 이익을 위해 미국과 동맹을 맺고 교역을 하는 것이다. 영화리뷰를 쓰면서 미국경제학자 책이 생각난다. 미국의 재정은 감축되고, 국민 대다수는 빈곤계층으로 몰려간다. 부익부 빈익빈이 미국을 병들게 한다. 문제는 부자들의 증세 아닌 감세는 국고를 비게 하고, 그 국고는 간접세로 빈곤한 자들의 주머니를 노린다. 직업이 1개 아니라 2~3개 가지고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미국인들의 현실에서 암울한 이유는 미군의 군비는 엄청나다는 점이다.

 

군비의 확장은 단순히 평화유지만이 아니라 방위산업체와 계약을 맺고 상당한 액수의 무기를 구매한다. 무기체계는 독점적 구조이기에 독점시장이 형성되고, 그 세금은 미국 국민 대다수가 부담하고, 나머지는 이윤은 상위계층에게 몰린다. 전쟁의 경제학이란 말이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하고 난 뒤 이라크를 경비를 보던 군사세력은 미군이 아니라 블랙워터라는 군수경비업체였다. 이들을 고용한 미국은 엄청난 예산을 투입했다. 군인이 아닌 민간이 이라크를 지킨다는 방식으로 움직이나, 군방산업체와의 계약은 결국 독점으로 이어진다.

 

이라크전쟁은 테러국가 내지 불량국가만의 문제만이 아니라 뒤에 에너지 자원, 경제 등의 효과가 동원되는 전쟁이다. 기업의 이윤인지 국가의 이윤인지 몰라도, 결국 누군가 이익을 보고, 단지 그 이익을 더 많이 보는 기업이 속한 국가는 이익을 볼 수 있는 게 정치적인 전략이 될 수 있었다. 전쟁나면 가장 이익 보는 것은 2종류이다. 그 나라에서 이데올로기로 정치적인 입지를 굳힐 수 있는 사람, 전쟁무역으로 매출을 올리는 무기상인이다. 하지만 그런 이익은 강자의 입장에서 충분히 노릴 수 있는 조건이다.

 

7. 약자에게 선택은 없다.

중국이 임진왜란을 두고 항왜원조(抗倭援朝)라고 부르면, 위에서 언급한 모택동이란 인물은 한국전쟁을 무엇이라 불렀는가? 항미원조(抗美援朝)라고 불렀다. 영화 <강철비>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군수뇌부가 중국 외교군사라인과 연락을 취할 때, 그가 이렇게 말한다. 중국과 조선은 형제의 나라라고 말이다. 중국과 조선이 형제의 나라로 불린 것은 조선이 홍타이지에 의해 침략당한 정묘호란 시기이다. 인조가 광해군을 몰아낸 후 이괄의 난을 겪은 후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서인정권은 17세기 명·청 교체시기에 전략을 잘못 세워 결국 정묘호란을 맞이하고 후에 병자호란으로 이어진다.

 

명나라와 조선은 군신의 관계 내지 아버지와 아들이라 한다면, 청나라는 조선에게 형제의 나라가 될 것을 종용했다. 물론 조선의 아버지가 사라진 후 청나라는 조선에게 아버지 노릇을 하기 위해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인조를 남한산성에서 내려오게 만든다. 그 이후에 조선은 청나라를 엄청 무시하고, 명나라 만력제 이후 자신에게 벼슬의 칭호는 필요 없다는 선비들이 많으나, 그들은 배고픔과 가난으로 죽어가는 백성의 고통을 생각하지 않았다. 명이 중원 누비든 청이 누비든 조선의 백성이 가장 소중한 게 당연한 일이나, 그렇지 않았다. 지나간 명분에 사로잡힌 채 망령의 굴레에 계속 집착했다.

 

영화 <강철비>는 선조-광해군-인조로 넘어가는 조선의 모습이 생각난다. 북한은 중국, 한국은 미국을 의지하나, 결국 마무리는 우리의 몫이다. 핵무기 여파가 일본 이지스함에게 미치자, 미국은 한국정부 편에서 벗어나 일본의 입장을 대변한다. 미국CIA 한국지사장도 한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게 아니라 일본에서 대기를 한다. 한국정세를 보고 일본과 같이 처리하겠다는 것이 미국의 전략방침이란 점을 보여준다. 정말 그럴까? 아닐까? 하지만 어느 정도 현대사회에 국내 정치를 넘어 외교, 안보, 군사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약간 의식하고 있는 부분이다. <강철비>에서 그 요소를 너무 대놓고 밝힌 것이 묘미이다.

 

한반도의 상황이 너무 위급해도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딜레마, 전쟁의 집중화이냐 아니면 조금 더 대화를 나눌 것인가? 정권의 대변자 내지 권력자 중에 현재를 유지하느냐 아니면 변화를 주는가에서 새로운 상황이 도출된다. <강철비>에서 곽철우는 자신의 소신을 이야기한다. 한반도에 강력한 핵을 가져야 한다고 말이다. 핵무기를 가질 수 있는 국가는 강대국으로 한정되어 있고, 한국은 가질 수 없는 나라로 되어 있다. 핵무기를 가진다는 점은 최악의 상황에서 국토를 유린하면 상대편을 모조리 말살할 수 있는 대안을 가진 것이다.

 

영화에서 재미있는 대사가 나온다. 북한은 20년 전에 밟아야 했다고 말이다. 핵무기가 나오기 전에 모조리 섬멸했다면, 지금 북한은 핵무기체계를 완비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핵무기의 위력은 같은 무게라도 1945년 일본 본토를 강타한 2개의 핵폭탄보다 더 강력하고 위험하다. 게다가 핵폭탄이 터지면 화염, 폭풍, 방사능만 문제가 아니다. 폭발이 일어나면 연쇄적으로 폭발물 내지 인화물 역시 타격을 입어 연쇄반응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서울 경기권에 대다수 국민뿐만 아니라 모든 자본과 인프라가 밀집하고, 후방인 전남과 경남지역에는 핵발전소가 포진한다.

 

핵무기가 한반도 아무 곳이나 타격해도 무사할 수 없다. 전쟁을 막기 위해 외교안보 군사력이 중요하나, 영화에서는 그 이상의 군사력을 원한다. 영화를 보면서 한국의 우방으로 미국이 가장 중요한 위치이나, 한편으로 중국과 일본의 영향력이 무시를 못한다. 미국의 입장에서 일본은 한국과 비교하여 더 중요한 국가이다. 일본 자체가 극동아시아에서 소비에트연방과 중공을 견제하기 위한 전진기지로써 성장했고, 그것을 토대로 일본은 산업경제를 발달시켰다. 일본 극우는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을 부정하면서도 받아들인다. 야스쿠니 신사에 전범들은 미국의 핵투하 이후 국제재판 이후 사형당하고, 거기에 봉인되었다. 그들의 후손은 야스쿠니에 가서 전범을 기리고, 미국의 편을 들어 일본헌법을 개정하려 한다.

 

영화 <강철비>에서 이런 국제 정서속에 2명의 철우가 나온다. 우리는 영화에서 2철우의 한자이름에서 북한의 鐵友는 강한 친구이고, 한국의 哲宇는 생각하는 공간으로 나온다. 정말 2명의 철우가 필요하다. 우리에겐 이 힘든 국제세계에서 강한 힘을 가져야 살아남을 수 있지만, 우리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 하지만 영화는 그게 정말 어렵다고 말한다. 북한의 철우는 가족과 같이 살지만, 한국의 철우는 가족과 떨어져 산다. 남북이 통일되기 전에 한국의 철우조차 자기 가족과 다시 결합하지 못한다.

 

곽철우의 막내아들이 말한다. 아빠 엄마하고 다시 살면 안 되냐고 말이다. 우리 한국 사회조차 곽철우의 모습처럼 살아가는데, 그 이상의 길을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그렇게 같이 가야 하는 것이다. 곽철우와 성형외과 의사는 부부였으나, 그들은 이혼했다. 부부는 헤어져도 그들의 자식, 즉 우리의 미래는 그들이 다시 결합하는 것을 원한다. 어느 누군가를 적으로 보거나 대화의 상대로 보지 않으면 그들과 다시 결합할 수 없고, 미래의 우리들은 다시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영원한 아픔을 가지고 가야 한다. 안타까운 사실은 무뚝뚝한 엄철우 역시 딸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아버지란 점이다. 2명의 철우가 만나 그들이 하고자 하는 사명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2명의 철우가 원하는 것은 그들의 자녀, 우리들의 미래를 위해 살아가려는 것이 아닐까?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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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12-19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언론에선가 <강철비>가 <JSA> 이후의 남북관계를
그린 최고의 영화라고 하던 차에, 궁금증을 한 방에
날려 버리는 멋진 리뷰로 만나 보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적대적 공생이 일상화된 시절을 뒤로 하고 함께 하게
될 날이 과연 올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12-19 09:38   좋아요 0 | URL
한명기 교수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보면서 현재 우리나라 상태가 그 당시와 유사사례로 이어진 점, 그리고 외교적 군사적 파워게임에서 여전히 밀리고 있는 점에서 이 리뷰의 기초단서가 되었습니다.
어느 글을 보니 이때까지 북한이란 적으로 나오거나 암묵적으로 적이라 규정하나, 여기서는 무조건적 적이기보단 그 안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 점에서 기존 북한과의 갈등을 그린 작품에 비해 더 나은 길을 보여준 게 아닌가 합니다.
 
호남 절의록 호남문화 연구총서 13
김동수 지음 / 경인문화사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국가를 위해 순절한 분에게 물론 감사의 마음을 담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감사의 의미를 담아야 할 대상은 그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에 치중하는 게 아니라, 후세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가령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과 같은 경우 조선시대 후기에 그렇게 인정받지 못한 인물이다. 그러나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의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읽으면 남명 조식 선생에 대해 나온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과 같은 시대에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만나지 못한 사이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조선 명재상 중 하나인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 선생은 2사람 모두 친분이 있었다.

 

퇴계 선생이 먼저 1570년에 타계하시고, 그 뒤에 남명 선생이 2년 후 타계하신다. 남명 선생이 돌아가기 전 퇴계 선생과 일전에 1번도 만나지 못해도 같은 경상권에 사는 학자로서 그의 뒤에 따라가겠다고 하신 일화가 유명하다. 성호 선생은 그 내용을 사설에 담았다. 문제는 남명 조식이란 인물이 조선 성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지만, 그렇게 큰 대접을 받지 못했고, 서원에 퇴계 이황 선생과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이 배향되어도 남명 선생은 배향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남명은 조선시대 분당정치사에서 북인의 학문적 스승이었다. 그의 학문은 단지 하나만 말한다.

 

학문의 기본적 원리와 배울 덕목은 이미 선현들이 모두 남겨주었으니, 이제 우리는 그것을 보는 것을 넘어 실천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실제 역사 속에서 북인의 활약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볼 수 있다. 의병군에서 최초로 발의한 인물은 홍의장군(紅衣將軍)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이다. 그분은 남명 선생 수재자인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제자이고, 남명 조식 선생의 손녀와 결혼했다. 곽재우의 거병은 남해바다의 이순신 장군과 동시에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본인들이었다.

 

그러나 북인들의 활약은 대부분 경상권이다. 경상우도와 좌도 퇴계와 남명의 제자들이 분포했고, 초기 경상도 학자들은 2사람에게 학문을 배웠으나 점차 2사람에게서 제자들이 분리되기 시작한다. 남명 조식 선생에게 정인홍, 곽재우, 김우옹, 최영경 같은 학자들이 있었고, 퇴계 이황 선생에게 학봉 김성일, 서애 유성룡, 이들의 제자인 이억기 장군 같은 인물도 있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의병과 관군 모두 왜적에 항거했지만, 한편으로 당쟁의 소용돌이에도 같이 있었다. 외부의 적인 왜군과 내부의 적인 당쟁이 있었다.

 

이런 관점을 내가 제시하는 이유는 이번에 읽은 <호남절의록>이란 도서가 얼마나 편중되어 있는 서적이란 사실을 철저히 알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번역하신 사학과 학자들도 인정했지만, <호남절의록>이 작성된 시기는 정조시대이고, 정조는 영조의 세손이다. 영조는 경종의 동생이나, 사실 경종이 죽은 후 등극된 임금이다. 당시 경종은 대다수의 소론과 일부 남인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고, 영조는 노론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다. 경종 사후 영조가 오르자 소론의 영수인 김일경 등이 과거 영조에게 한 행동과 노론4대신을 죽인 죄로 죽임을 당한다.

 

반대로 생각하면 노론대신이 경종을 살해하려는 의도가 명백한 일로 참살되었는데, 영조는 자신의 형보다 자신을 지지한 대신에게 편중했다. 권력을 부자와 형제조차 냉정하다. 영조 집권 당시 일어난 난이 이인좌의 반란이다. 이인좌는 경종의 죽음에 불만을 품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 올라가면 1618년 사르후 전투와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이 올라가있다. 정묘년과 병자호란의 치욕적인 일은 한국 역사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은 상처이다. 인조 임금은 청나라 황제에게 세 번 절하고 9번 머리를 받는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절차를 수행했다.

 

당시 사료를 보면 인조의 행동에 사대부들이 실망을 하여 효종까지 출사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인조는 광해군 실각 이후 등극된 임금이다. 그는 서인의 반정을 중심으로 움직인 존재이다. 그가 올라간 순간 청나라의 습격을 받고, 인조반정 다음해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이괄의 난과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조선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들이 패배한 이유는 과거의 문제점을 보지 못하고, 백성을 진정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성리학의 틀에서 명나라를 절대적 존재로 보는 사대주의가 나라를 버렸다.

 

물론 <호남절의록>18세기말 성리학의 관점에서 적은 도서이다. 정조는 상당히 우수한 군주이나, 그 역시 성리학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에 있다고 하나, 19세기 후반 메이지유신을 거친 후 강대국이 되었고, 청나라는 19세 중반 영국과의 아편전쟁의 패배로 큰 타격을 입는다. 조선은 그러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성리학적 관점 조선왕조의 시대라면 당연히 <호남절의록>은 절대적 가치를 내세운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책을 천천히 읽은 국사를 생각하면 나라가 망한 이유가 다시금 보인다.

 

국가를 위해 희생된 순국자는 칭송받아야 할 것이나, 이 책에 적힌 이름은 대부분 양반 사대부 집안이다. 그들은 명나라와 조선임금만 생각하지 조선에 살고 있는 백성에 눈을 두지 않았다. 광해군이란 인물을 두고 참으로 재미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바라보면 광해군의 분조활동에 의해 의병들이 전국적으로 창궐하고, <호남절의록>에서 세자의 분조역할을 은근히 내비치고 있으나, 광해군의 분조활동을 드러내는 것보다 광해군 집권시기 혼주(昏主) 내지 폐주(廢主)의 이미지를 더욱 부각했다. 사르후 전투에서 강홍립은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에 항복하고, 정묘호란 시기 조선을 밟아대는 존재로 여겼다.

 

하지만 정묘호란 당시 조선과 청나라의 화의에서 강홍립의 역할이 컸고, 그가 없었다면 조선의 많은 백성들은 고초를 당해야 했다. 그가 중재하지 않았다면 조선왕실 역시 큰 피해를 봐야 했다. 다급한 상황에 이르러 강홍립이 중재한 사실은 빼놓고, 오히려 그를 나라를 배신한 역도로 몰아넣었다. <호남절의록>은 광해군 시대의 부정, 북인세력의 부정이 강력히 깔려있다.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死) 당시 수많은 선비들이 화를 당했다. 정여립과 단지 친하거나 글을 나누었거나, 그와 인척이거나 또는 의심가는 인물들이 모조리 화를 당했다.

 

남명 조식 선생과 퇴계 이황 선생의 제자이며, 상당히 학문이 높은 최영경이란 선비는 송강 정철의 무리한 수사로 인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 외에도 아무 죄 없는 학자들이 정여립 옥사에 연루되어 죽었으니 그 원한이 골수에 새겨져버렸다. 남인과 북인은 원래 동인이었으나, 북인에게 기축옥사는 친구와 친척, 동문수학하는 이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건이었다. 우습게도 송강 정철도 왕세자 문제를 선조에게 언급하는 바람에 선조에게 미움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다. <호남절의록>에서 이런 내용을 다루지 않는다. 정치적 입장이 상당히 많이 반영되었다.

 

<이순신과 임진왜란>이란 서적에서 <선조실록>을 보면 왜적이 침탈해 전국이 지옥처럼 변하는데, 임금을 명을 받은 송강 정철은 어서 달려오지 않고, 기생을 끌어안고 술을 마시며 시조나 읊어대었다. 송강 정철의 국문학적 가치는 높지만, 그가 해온 행동들을 보면 결코 의로운 인물은 아니다. 서인들이 만든 기축옥사로부터 인조반정은 어떻게든 숨기고 싶은 지난날의 과오이다. 문제는 그 과오를 정당히 밝히는 게 아니라 억지로 가면을 씌우게 만든 책이 <호남절의록>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시작으로 앞에 잠시 1555년 을묘왜변을 언급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뒤에 바로 오는 게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그리고 이괄의 난 평정이다. 이들의 난을 사전에 막을 수 있는데도 막지 못했고, 막을 수 없어 도망친 후 그 죄를 모조리 광해군에게 이전했다. 명나라를 구하지 못하고, 그대로 청나라와 외교정책을 펼친 점, 1609년 광해군이 왕으로 오르자 제일 먼저 한 것이 일본과 국교를 다시 시작한 것이다. 만일 일본과 앙금을 남긴 채 계속 지닌다면 왜적과 호란 사이에 더욱 난감한 상황이다. 전쟁이 나면 제일 고생하는 부류는 여인네와 백성들이다. 여인네들은 체력적 한계로 도망치지 못하고, 싸우지도 못한다.

 

백성들은 억지로 군사로 징병되고, 어리석은 지휘관의 명령에 목숨을 잃게 된다. 목숨을 잃기 위해 군에 입영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약자로 입영한 것이다. 60세까지 군역을 해야 하는데, 갓 태어난 아이가 군적에 오르고, 이미 백골이 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군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백골징포와 황구첨정의 폐단이 이미 17세기 조선을 지배하고 있었고, 그 시대의 기득권은 서인이었다. 그들은 자기만의 이상 속에서 백성들이 추위와 굶주림, 적들의 칼과 창 앞에서 베어지는데도 망상만 꾸고 있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조금 다른 양상이다. 이 당시 의병들은 각기 출현했으나, 병자호란은 조금 다르다. 의병이 창궐해도 전국적으로 큰 성황을 이루지 못했다. 백성들은 알았다. 혼주 광해군을 내쫓아도 사실 인조 역시 별반 차이가 없었고, 광해군이 억지로 올린 토목공사도 인조에서 멈추게 아니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 전주에 있는 태조 이성계 초상을 모신 경기전은 광해군 시대에 재건된 건축물이다. 전쟁 속에서 궁궐이 없어져 대군의 집에서 조회를 해야했던 선조였다. 폐모살제(廢母殺弟)와 관련하여 인조는 자신의 아들 소현세자와 손자를 죽게 만들고, 자신의 조카 역시 반역자들이 옹립하자 사약을 내린다.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 광해군과 아들손자를 죽이고 조카까지 죽인 인조에서 왜 이리 다른 양상이 보이는가? 광해군의 어머니는 생모도 아닌 아버지의 계비로서 자신보다 어렵다. 그러나 인조는 자신의 친자식을 죽게 만든다. 이런 정치적 사건을 전후맥락을 따져 보면 <호남절의록>의 목적은 진실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희생된 순국자를 위한 기록인가? 책을 읽어가면서 인조부터 시작하여 계속 이루어진 서인(노론)들의 정권통치를 정당화하는 문맥으로 이어진다.

 

책 초반에 동래부사 송상현을 너무 뛰워준 것부터 문제였다. 왜적이 3시간만에 동래읍성을 함락했는데, 그는 자신의 첩을 피신하게 했다고 하나, 사실 성안에 수많은 백성들은 도망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 채 모조리 학살당했다. 경상권 최전선 성문이 단시간에 무너진 것은 일본군이 강한 것도 있지만, 전쟁의 기록에서 본 것처럼 화포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한 것이다. 화포를 이용하면 장거리 적에게 큰 타격을 주고, 성 아래보다 성위에서 발사하는 대포는 더 멀리 나가고, 성 아래서 발사하는 대포는 성 위로 오르기가 어렵다. 조총은 화약의 양과 탄환의 무게가 대포보다 못하기에 사정거리로 따지자면 대포에 비할 바가 못 된다. 평양성 전투에서 명나라 연합군이 승리한 이유는 일본군보다 더 강력한 장거리용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군사들에게 대포를 이용하여 적진을 공격하고, 평소 훈련을 했다면 그렇게 단시간에 무너질 수 없다. 단지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한 이유로 충신으로 올린 그 자체가 한심한 자태이다.

 

무기가 정비되지 않았거나 군사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지휘관의 무능과 실책이다. 문관이 무관의 병법이나 지휘방법조차 모르고 그 자리에 앉는다면 적들에게 이로움만 주는 꼴이다. 만일 죽기를 각오하고 혼자 장렬히 전사하면 모르지만, 성안의 병졸과 백성들은 말이 다르다. 그들이 죽어도 어떤 기록도 남지 않고, 보상과 영광조차 없다. 그들은 목적은 전쟁에서 어서 벗어나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것이다. 이미 곡식을 탐내는 탐관오리가 판을 치고, 조정에서 이들에 대한 구휼정책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백성들에게 적이란 그저 왜만이 아니라 조선이란 그 자체였을 것이다.

 

왕이 몽진하여 북으로 갈 때 백성들은 궁궐을 태우고, 양반 사대부집안을 불태우며, 일부 상인들은 왜적에게 호의적으로 대했다. 민심은 왜 천심인가? <호남절의록>에서 민심의 향방을 묻는 글은 없다. 번역하신 분도 공신록에 대한 설명문을 언급할 때 역사적 사실을 전후맥락에 맞게 적어내었다. 하지만 책 자체가 당시 조선시대 한문서적을 한글로 번역했기에 역사적 평론을 거론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정말 나라를 사랑해서 죽은 사람이 만일 수 백 년 뒤 일본에 의해 조선이 망했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절의를 지키는 것은 중요하나, 절의를 지키기 전에 그런 상황을 막는 것 역시 중요하다.

 

광해군를 어리석은 임금이라 했지만, 막상 정묘·병자호란 당시 공신을 보면 광해군 시절 무과에 급제하여 변방에 나간 인물이 많았다. 이미 광해군은 청나라의 불온함 움직임을 보고 거기에 대비하기 위해 병력을 확충하고 훈련을 시켰고, 불천지 원수인 왜국에 주문하여 무기까지 수입한다. 항일전쟁사에서 임진왜란 이후 조선독립전쟁사라면 임진왜란의 역사정신을 따라볼 수 있다. 일제에 의해 유린당한 조선이 이미 없어졌기에 다시 고국을 되찾고, 자유를 향한 분투는 순국자의 진정한 애국정신이다. 그런 애국자들은 병자호란의 인조와 서인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조선독립을 위해서라면 중공과 소련, 미국과 유럽연합국이라도 손잡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발적 의지는 무참히 깨져 광복 아닌 광복을 맞이했으나, 21세기 우리 대한민국에서 다행히도 그들의 죽음과 공로를 기억해주고 있다. <호남절의록>에서 예로부터 전라도 지역은 의병도 많았지만, 그 지역이 임진왜란 당시 유일하게 점령당하지 않은 영토이다. 게다가 전라도는 곡창지대라 많은 식량이 나오며, 전라도를 잃은 것은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과 같다. 한편으로 곡창지대만큼 많은 수탈과 억압을 당한 지역이다. 농민이 쌀을 추수해도 대부분 나라와 권력자가 빼앗아 가버린다.

 

의병의 역사가 있는 만큼 동학운동사도 있고, 민족의 독립운동과 저항정신, 심지어 518의 민주화 투쟁도 있다. 21세기 <호남절의록>을 읽으면서 호남은 저항의 지역이기도 하나, 그만큼 아픔과 시련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국가의 주인이 국민인 현세대에서 백성을 하늘로 봐야 할 그들이 오히려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지배이데올로기만 만들기 바쁜 것을 <호남절의록>이란 도서로 확인했다. 물론 기억하고 칭송해야 할 분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그 진의를 다시 파악할 필요가 있다. 21세기 전쟁에서 의병은 필요 없다. 의병이 되기 전에 이미 국가전산자료에 의해 강제로 동원된다.

 

무기도 조총같이 수십m만 가는 게 아니라 수 천까지 날아가는 미사일이 날아온다. 물론 전쟁나면 탁월한 지휘관 내지 용사가 탄생하겠지만, 지금 무기는 과거처럼 검술과 궁술로 좌우되는 게 아니라 무기의 성능에 따라 달라지니 전쟁은 될 수 있으며 피하는 것이 상책이고, 억지로 죽음의 길을 선택해야 할 이유도 없다. 명예가 전부이던 과거 조선이나, 그 명예를 위해 억지로 전쟁에 끌려가던 사람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르후 전투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 그 희생을 만든 자들은 반정을 만들고, 그 이상의 조선인들을 죽게 만들었다. 역사란 반성을 해야 한다.

 

병자호란의 패배로 인조는 혼자서 삼궤구고두례 절차를 수행해야 했지만, 일제에 의해 망한 조선은 국민 모두가 삼궤구고두례보다 더한 치욕을 당해야 했다. 이것을 두고 공신목록을 기록했다면, 이런 행위를 지금에 와서 계속하거나 용인한다면 똑같은 일들이 반복될 것이다. 그런 <호남절의록>이라 책 내용을 다 읽으면 비장미를 억지로 밀어붙인 것이 왠지 안타깝고 한심스럽다. 하지만 이런 책이 있어야 후대에 알려지고 우리가 과거의 일을 다시 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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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7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12-07 08:56   좋아요 0 | URL
어느순간 제 글이 헬조선의 기원을 찾아가는 블로그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없는 사람, 백성을 위한 양반들은 바른말을 하다 의금부에 끌려가서 맞아죽고
또는 사문난적으로 몰려 끔찍한 보복에 집안이 몰락합니다.

앵반이란 존재가 행정가 및 사상가로서 백성의 삶을 돌봐야 하는데
그리고 문자를 모르는 백성을 위헤 학문을 해야 하는데 시문놀이만 추구했죠.

돌이켜보면 남인계열 학자들이 조선후기에 성리학 외에 의학, 복서, 지리학
수리학, 천문학 등을 연구하는데, 다 농사에 도움이 되고 주변 지여에 살아가는
백성의 삶을 유지하게 되는 방편인데 말입니다.

예전에 성호사설을 읽으면서 성호 이익선생이 길을 가다 앞을 보지 못하는
어느 늙은거지가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면서 제발 죽여달라고 외치는
글귀가 생각납니다. 다 떨어진 옷에 추운 겨울에 비참한 몰골을 하는
그 모습을 생각할 때면 성호선생은 눈물이 난다고 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기까지 조선은 그야말로 완벽한 헬조선이었죠.
하다못해 이익 선생의 아버지 이하진도 바른 말 하다 귀양가서 죽고
형인 이잠은 바른 말을 하다 장살당해 죽으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역사이고 그런 역사를 만든자들이 책임의식 없이 성리학에 의한 영웅주의만 외치니....

yamoo 2017-12-07 2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양난 이후 조선 조정이 한 행태를 보면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요.

남인이 상대적으로 부국강병을 위주로, 백성을 위하는 정책을 많이 시행하려고 한 듯합니다. 노론 세상이 되니 헬조선이 된 듯....그러고보니 헬조선의 계보의 중조는 아마도 노론 일당 체제가 득세한 조선 후기가 아닌가 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12-08 20:16   좋아요 0 | URL
항교에 가면 제일 먼저 할일은 송시열과 송준길을 배향대상에서 제외하는 겁니다. 백성들이 배고픔에 절규할 때 대동법을 시행햐라 하는데, 이때 김육이 제안하자 같은 서인 그리고 노론의 창시자인 우암 송시열이 반대합니다. 산당 즉 재야에서 활동하는 사대부들이 농민을 보살펴주지 못할 망정 계속 착취하는 형국에서 헬조선의 역사는 다시금 불국토로 만듭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이란 국가에서 과거의 영웅을 말한다면 대부분 이순신 장군을 말할 것이다. 성군(聖君)인 세종과 성웅(聖雄) 이순신, 세종대왕은 조선의 문()을 열었다면, 이순신 그 자체로 무()의 완성이다. 일전에 이순신 장군의 일대를 방영한 <불멸의 이순신>이란 작품이 있었다. 거기서 보인 이순신의 모습은 보통 인간으로 감당하기 힘든 고난을 헤치고 나간 불굴의 무관(武官)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이순신이 상대로 하던 적은 과연 왜적이었을까? 임진왜란사를 연구하면 참으로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임진왜란이 7갑자 즉 420년 전에 계속 우리 조선 한국 땅을 고난의 세계로 만들었다.

 

게다가 정확히 420년 전은 1597년 정유재난이 일어나던 시기이다. 임진왜란이 1592년에 발발한 원인을 보고, 정유재란이 일어난 배경도 봐도 참으로 문제가 많았다. 단순히 이것은 이순신 한명으로 모든 적을 섬멸한 것이 아니라, 전 방위적으로 관찰할 것이 참으로 많았다. 그러나 막상 우리가 접한 임진왜란은 단행본 연구서적 내지 드라마에 더 심한 편중을 둘 것이다. <불멸의 이순신>이나 <징비록>을 보자면, 전자는 이순신을 중심으로 후자는 유성룡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2사람 모두 임진왜란 당시 없었다면 조선의 앞날이 없었다는 점이다.

 

문제점은 드라마가 작가의 상상력이나 허구적인 요소를 다소 집어넣어 이야기를 극적으로 이끌어내나, 대하드라마 사극의 경우 기본적으로 기초 사료와 어느 정도 부합되어야 한다. <불멸의 이순신>은 소설도 있었으나 더 중요한 것은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였다. 칼의 노래를 예전에 약간 읽은 기억이 있다. 문체가 매우 비장하고 엄중했다. 이순신의 마음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말 그대로 칼을 마음에 품고, 자신은 언제나 칼 위에 걷고 있는 칼집 같은 모습이었다. 칼을 가지고 있기에 그 자신조차 벨 수 있다는 각오에서 더 이상 무슨 수식어를 붙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임진왜란을 말하기 전에 이순신이란 한 인간을 말할 수 없겠지만, 임진왜란이란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 성인(聖人)이란 단어처럼 일반사람에게 식견으로 묻자면, 성인이란 의미는 석가나 그리스도 같은 신과 같은 존재, 혹은 신의 권위를 가진 자로 본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성인이란 단어는 동양에도 있었다. 한국은 이미 서구화되어 기존 동양적 정신이 많이 파괴되었다. 역사학(歷史學)이란 학문이 동양의 영역이 아닌 서구의 관점이 되어 있기에 우리의 문화와 사적(史的) 영역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서양을 알기 위해 고대 그리스로 넘어가자면 유명한 철학자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 과거의 철학자는 형이상학자이나, 한편으로 수학자 내지 의학도이기도 했다. 때로는 정치가와 철학자를 병행하기도 하나, 서구의 역사에서 정치, 철학, 군사, 의학 등의 분야가 서로 관계성을 유지하기보단 각자의 학문영역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반해 동양의 학문은 다르다. 동양의 학문은 철인(哲人) 군주 밑에 다른 철인들이 정사를 돌보는 구조였다. 그것은 바로 유학자(儒學者)들이고, 조선에서 성리학자(性理學者)들이다.

 

이들이 관점을 다시 생각하는 것은 예를 들어 우리가 좋아하는 소설, 게임, 콘텐츠로 삼국지(三國志)가 있다. 삼국지에서 유명한 장수로 유비와 조조, 관우와 제갈량 같은 불세출의 인물이 모여 있다. 이들은 황건적 당시 의병을 일으키고, 동탁의 난을 잠재우며, 천하삼분지계로 전쟁의 소용돌이에 있었다. 그러나 막상 소설을 보고, 게임을 하는 도중 뭔가 느끼는 바가 있다. 단순 롤플레잉게임(RPG)이라면 몰라도 정식적인 삼국지 시리즈에서 군주의 역할은 전쟁을 하는 것도 중요하나, 전쟁과 더불어 내정을 관리해야 하고, 외교와 인사문제를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경영(經營)이란 관리체계가 어느 정도 지켜지지 않으면 전쟁에서 무조건 패배란 점이다. 이순신의 영웅적인 모습에서 그의 무술능력과 더불어 지장으로 보여주는 책략가란 점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 그가 뛰어난 지략무장만 생각하지, 그가 그 이전에 준비해둔 작업과 계획, 군영을 다스리는 태도와 피난민의 대책, 군량미 보급과 지원에 대한 관리는 잘 몰랐다. 유명한 대첩에서 많은 왜적을 쳐부순 것만이 많은 사람들의 기억이다. 그리고 그가 처해진 모함에서 이 문제가 어떤 전후맥락이 있는 것인지 생각할 점이 많다.

 

임진왜란은 이미 경고된 전쟁이었다. 임진왜란 이전 전남 남해안에 왜적이 노략질을 하고, 담당관아 무관과 병사를 참살했다. 사실 이것만은 전부가 아니다. 1555년 을묘왜변이 전남지역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왜적은 남원과 전주까지 올라올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다. 만일 그때 왜적을 맞지 못하였다면 최초로 몽진을 한 군주 선조가 아니라 명종이었을 것이다.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과거만 보는 것이 아니다. 오늘 지금 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일들을 다시 보고, 지금 현재 처해진 우리 모습을 반성하고 거기에 대한 채비를 하는 것이다.

 

서애 유성룡이 피눈물을 머금고 작성한 <징비록>은 그야말로 우리가 놓치고 놓친 지난날의 과오를 드러내던 책이다. 이 책을 제대로 보고 반성했다면 정묘·병자호란, 일제의 침탈에 대비했을 것이다. <이순신과 임진왜란>을 읽는 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그런 일들은 다시 되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순신이란 인물은 성웅으로 우리에게 그저 하나의 콘텐츠로 소비되어온 인물이나, 막상 학문적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은 점이 많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은 왕으로부터 면사(免死)라고 적인 첩을 받는다. 하지만 정사 선조실록에서는 선조가 아닌 명나라 왕에게 하사받았던 것이다.

 

면사권한을 내린 자가 선조가 아닌 명나라 왕이라면 말이 상당히 달라진다. 조선의 성리학에 너무 치중하여 자국의 안위를 파괴했다. 성리학의 시작은 남송에서 시작되어 한족(漢族) 중국인들에 의해 조선까지 넘어왔다. 조선은 명나라와 인접한 국가고, 태조 이성계는 원나라를 섬기는 고려보다 새롭게 떠오르는 명나라에게 자신의 대의를 내보냈고, 그것은 성공했다. 즉 정치적 이념과 통치방법론에서 불교와 유교 사이의 고려보다 유교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이 되게 한 과정인 셈이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중원을 호령해도 조선은 여전히 성리학에 빠져있었고, 그것은 결국 자신에게 큰 독이 되었다. 이순신은 성리학을 잘 아는 무관이었다. 그러나 성리학 안에 빠져있지 않았다. 성리학의 문제와 더 나아가 심각한 폐단은 현장중심의 경영체계가 아니라 시문놀이 하는 맹한 성향이다. 임진왜란 발발 이전 조선에 심각한 사건으로 기축옥사를 생각할 수 있다. 옥사에서 형사업무 최고책임자로 송강 정철이 있었고,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동인 세력을 숙청한다.

 

그 뒤 왕의 후사문제를 잘못 언급하여 귀양 가게 되고, 귀양지에서 전쟁의 소식을 들은 다시 선조 곁으로 오라는 명령을 듣는다. 문제는 전시상황은 모든 업무가 비상이기에 신속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송강 정철이 보여주던 일은 참으로 한심했다. 최고 권력자리에 있다가 귀양을 간 것이 마음에 큰 상처였는지 그는 수 일 안에 올 수 있는 거리를 2주에 거쳐 왔고, 중간에 들린 관아숙소에서 기생을 불러 술자리를 만든 후 시조나 읊어주고 있었다. 한국 최고의 문학을 만든 자이나, 전쟁에서 보인 행동은 최악이었다.

 

이런 모습은 비단 정철만이 아니다. 이순신이 수군삼도통제사에서 억울하게 물러난 후 원균이 통제사로 부임하자, 수사(水使)들의 능력도 의심스러웠다. 배설이란 장수는 원균 아래에서 도망쳐 배를 보존케 한 것은 큰 공이나, 그는 이순신 막하로 오고 나서 큰 전쟁이 두려워 병영을 탈영한다. 전시 병영을 탈영하면 참형에 다스린다. 목을 벤 후 군문 높이 목을 효시하여 진중의 소란을 잡는다. 배설이 아니더라도 주변에 보인 장수들이 능력을 인정받아 온 것이 아니라 정치적 권력이 작동해서 온 것이다.

 

이순신의 할아버지는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하고, 아버지 역시 세상의 큰 뜻을 품지도 못한 채 살아간다. 이순신은 사림정치세력이었고, 그는 율곡 이이 선생과 같은 덕수이씨 문중이나. 어릴 적 서애 유성룡과 친한 이유로 남인과 같은 영역으로 몰렸다. 유성룡은 이순신에게 늘 지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은 친구였고, 유성룡은 <징비록>에서도 이순신의 활약을 전하고, 이순신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노량해전에서 끝이 나자 북인 이산해에 의해 탄핵되어 정승의 자리에서 파직된다.

 

전시행정의 도체찰사로 활약한 그로써 이순신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으며, 그가 백의종군할 때도 항상 위로해주었다. 백의종군은 이순신의 무장으로서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정치권력의 균형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선조의 아들 광해군에 대해 자세하게 다루지 않으나, 책 전반적인 관점을 보면 광해군의 정치적 업적을 인정한다(책에서 광해군이 아닌 광해임금이라 한다, 이 부분은 명지대 사학과 한명기 교수의 관점과 유사하다). 그 이유는 광해군은 정치적 행위를 실제 현장중심과 연계된 점이고, 실사구시를 통해 시문놀이 하는 정치적 행태와 반대로 갔기 때문이다.

 

선조와 호종신하들은 전장의 다급함과 전략적 관점을 잘 알지 못했다. 전술의 기초도 모르고, 적을 이기기 위한 작전문서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시문놀이에 젖어 말만 앞세우고, 선조는 작전을 내리려면 적과 가까운 곳으로 정부를 옮겨야 하나, 계속 북쪽에 머물면서 몸을 사리기만 바빴다. 선조의 문제는 그가 몽진을 한 것이 아니다. 몽진을 한 후 보여준 대응방법이었다. 변방의 장수가 전쟁을 할 때 군주는 절대 그의 지휘권을 간섭하면 안되나, 선조는 늘 그렇게 해왔고, 그런 실수가 패배를 불러왔다.

 

선조와 서인세력은평양성전투나 벽제관전투에서 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무기는 화포를 중심으로 반격했으면 싸울 만 했으나, 오로지 기병을 통한 돌격이나 내세웠다. 왜군의 조총사격술에 신립이 탄금대전투에서 패배했다. 자신들이 왜 패배했는지 이유도 모르고, 명나라가 와서 현실을 말해줘도 그것을 받아들이기보단 명분만 길게 늘여놓았다. 명나라 장수는 명분을 앞세우고 실리를 추구했다. 조선이 망하는 것은 명나라에게 중요하지 않으나, 조선이 망한 후 왜적이 넘어오는 것은 문제다. 그들은 항왜원조(抗倭援朝)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조선을 다시 세우게 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이란 단어를 남발했다.

 

재조지은의 문제점은 선조와 호종대신들의 고도의 정치적 전략이 숨어있다. 사실 전쟁이 나면 제일 공을 세우는 자는 왜적을 무찌르고 몰아내는 자이다. 변방의 장수들은 목숨을 내걸고 하루 24시간이 죽음과 같이 숨을 쉰다. 그러나 선조는 호종한 대신에게 많은 공을 전해주었고, 그 이유는 자신이 의주로 가면서 명나라 왕에게 요청하여 명나라 군대를 파병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전쟁을 자신들의 손이 아닌 타국의 힘을 빌린 점에서 이미 병자호란의 그늘이 조선을 삼키고 있었다. 선조는 자신의 아들인 광해군에게 변변치 않게 대하다, 전쟁 중 분조지휘를 마치고 돌아오자 매우 따듯하게 대해준다. 하지만 이내 다시 차갑게 대하고, 광해군이 분조활동과 무군사 책임자로 큰 활약을 해도 공신의 축에 넣지 않았다.

 

왕의 가족에게 공신은 어림이 없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자신의 피난길에 동행한 다른 왕자에게 호종공신으로 책봉하는 점은 아이러니이다. 조선의 모든 백성은 알고 있다. 조선의 위기를 탈출하게 한 인물은 이순신과 수군, 그리고 의병이나, 그들을 치켜세우는 것은 선조에게 정치적으로 큰 타격이고, 그런 선조와 함께한 간신배 세력에게 치명적인 약점이다. 만일 이순신이 살아남아 전쟁이 정리된다면 선조와 서인세력에게 큰 타격이 될 것이다. 면사 첩은 선조가 아닌 명나라 왕이 하사하고, 하다못해 명나라 왕은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명나라의 수군 제독자리를 수여한다.

 

조선장수가 명나라 최고 지휘관의 자리에 올라간 것이다. 이순신을 두고 당시 참전한 명나라 장수는 그를 제갈량과 동급으로 보았다. 제갈량은 창과 활을 못 다루나, 창과 활을 다루는 자들을 다루어 적을 섬멸했다. 이순신은 조선수군 몇 십 배나 되는 왜적을 격파했다. 명량해전의 기적적 승리는 하늘이 준 행운이 아니었다. 단지 조선과 명나라에게 이순신이란 인물이 있었던 그자체가 행운이었다. 이순신은 조류와 암초 그리고 지형 등을 고려하여 작전을 개시했고, 그의 전략은 상대 총지휘관의 목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런 이순신이 다시 온다면 선조나 서인세력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으며, 전시 국방부장관을 맡은 유성룡과 이원익의 경우 그 공이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 이순신이 선조에 의해 잡혀갈 때 유성룡은 제대로 돕고 싶었으나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이원익은 목숨을 걸고 이순신을 변호했고, 병조판서를 맡은 정탁 역시 이순신의 업적을 고려하여 그의 안위를 보존해 달라고 했다. 이순신의 인품과 능력은 이미 선조실록이나 많은 기록에 남아있다. 이순신이 다른 무관과 다른 점은 학문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고 그리고 후에 망한 이유는 무관을 천시한 문치의 맹점이었다.

 

현장을 잘 아는 자가 대비하기보단 문관이 더 높은 자리에서 명령을 하고, 문관이 만호, 첨사, 부사 등과 같은 자리에 있는 것도 문제였다. 동래부사 송상현을 두고 부산시민들은 영웅으로 생각하고, 동래충렬사에 그를 모신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 송상현이란 인물은 시문놀이만 빠진 문관에 불과했다. 정발장군은 부산진성을 수호하다 순국했다. 현재 지역적으로 부산광역시는 조선시대 이름이 부산이 아니다. 부산이란 말은 부산진성(釜山鎭城)이 있었고, 원래 부산의 지역명은 동래부였다. 동래부라고 하면 동래읍성이 총지휘부고 동래부사 송상현은 부산지역 전체 수비를 담당하는 최고지휘관이다. 그러나 그 성은 4시간 안에 무너지고, 그는 죽음을 당했다.

 

이때 송상현이 화포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무관이었다면 쉽게 성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 덕분에 많은 조선인들은 죽임을 당했다. 단지 일본 왜군에게 살해당한 이유로 충신의 반열에 올랐지만(아니라면 후에 예송논쟁의 주인이 그와 동본이라 더 올라갈 수 있다), 송상현의 죽음이나 평양성전투를 본다면 당시 무관을 대하는 조선의 수준을 알 수 있었고, 전시행정을 보면 전투능력을 알 수 있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력과 병력이나, 그와 더불어 보급이다. 군량미가 없으면 싸울 수가 없고, 물이 없다면 그 진중은 이미 패배선언이다.

 

병사의 손에 제대로 된 활이 없고, 옷을 제대로 구비되지 않으면 전투 그 자체가 무리고, 수군에서 대포사격을 위한 화약이 없다면 역시 싸울 수 없다. 이순신의 경영관리는 보급의 체계화이다. 더 나아가 피난민을 수용하여 관리하여 그들에게 농지를 제공하고, 상업적 교류를 도모하여 전시 중에도 경제활동이 되도록 유도했다. 생선을 잡고 소금을 구워 팔며, 식량이 남으면 조정에 바치기도 했다. 전시 군량미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으면 군령에 의해 참형에 처해진다.

 

이순신의 승리는 모든 게 요행이 아니라 체계화된 시스템이었다. 병사 하나의 공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병사의 죽음을 두고 기록에 남긴다. 장계에 자신보다 부하의 덕을 칭송하니 감히 누가 따르지 않을까? 그런 면이 있었기에 언제나 철저한 준비를 했다. 이순신의 죽음을 두고 설전이 많다. 자살이었는지 아니면 속임수였는지 말이다. 진린의 기록이나 이순신의 아들과 조카의 기록을 보면 그의 죽음은 순수하게 교전 중에 벌여진 사태이다. 그런데도 승리로 이끈 것은 자신의 죽음으로 지휘통제력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현대전은 양상이 다르지만, 과거 전쟁은 총지휘관이 죽으면 그 사단은 모든 행동을 정지된다.

 

적장을 잡는 순간 적의 병졸은 항복을 한다. 다른 지휘관이 비상사태를 인식하고 인계받으면 되지만, 그것이 되지 않으면 무력화된다. 자신의 죽음 곧 조선수군 지휘부의 붕괴이고, 그동안 자신이 보여 온 전술과 전략을 자신의 아들과 조카에게 요청한 것이다. 주도면밀한 이순신이 만일 다시 조정에 나온다면 영웅의 귀환을 두고 정치적 혼란은 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선조는 자신보다 이순신이 조선 그 자체라는 점을 알았다. 이순신과 더불어 죽음의 세계에서 나라를 구한 의병장을 소홀하게 대한 이유는 바로 정치적 입장이었다.

 

김덕령 의병장은 모함으로 장살을 당하고, 홍의장군 곽재우는 김덕령의 죽음과 이순신의 모함을 보고 산으로 숨어버렸다. 광해군은 선조에게 정치적으로 최악의 라이벌이고(이 책에서 <난중일기>의 내용이 나오는데, 광해군이 건강이 편찮아 하자, 이순신이 매우 걱정하는 글귀가 나온다), 전시 중에도 전쟁 후에도 왕위 전위 소동으로 정치적으로 큰 파란을 일으킨다. 우리는 임진왜란을 왜 다시금 봐야 하는 것인가? 최근 일본이 헌법 개정을 하고 있다. 일본은 자위대가 군대가 아닌 자치대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일본 자체적으로 군대라는 기관을 만들기 위해서다.

 

일본의 정치세력 대부분 대동아전쟁의 후손이고, 전범들의 악행을 반성하기보단 오히려 영웅으로 모신다. 이런 시기에 우리가 과거의 일들을 지나쳐버리면 제2의 임진왜란이 오지 마란 법은 없다. 임진왜란 시기 명·청 교체시기이고, 지금 북한이란 폭력국가는 여전히 군사돌발을 일으키고 있다. 임진왜란에서 처음 풍신수길이 조선에게 요구한 것은 명나라 가는 길을 열어달라고 한 것이다.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조선이 교행해줄 것을 요구했다. 대동아전쟁을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는 자들이 북한과의 군사적 무력충돌이 생기면 어떤 일이 있을까?

 

한국에서 전쟁이 나서 난민들이 일본에 가면 인도적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죽여야 한다는 망언에서 임진왜란이란 형태는 끝이 나도, 임진왜란이 가진 의미는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내용적으로 큰 결함이 없지만, 사실 이미 1권 서두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다. 백선엽이란 육군 예비역장군은 한국전쟁의 영웅이라 하나, 그는 일제 만주군관으로 활약한 친일파이다. 항일애국투사를 죽이는데 혈안이 된 자가 이순신 장군을 운운하는 게 참으로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순신은 일제에 억압당한 민중의 빛이었다. 항일정신이 이순신에게 이어진 것이라면 백선엽 장군이 <이순신과 임진왜란>에서 자신의 발언이 얼마나 모순인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더 심한 모순은 이순신 장군이 다시 조명된 것은 정조대왕 시절이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뒤 100년 정도 그의 기록은 삭제되거나 사라졌다. 이순신은 전투에서 싸운 장수이지만, 그를 지우고 싶은 이들은 전장이 아니라 선조 옆에서 호종하던 세력이다. 동인에서 남인영수(유성룡, 이원익, 이덕형)의 지지를 받은 장수이며, 더구나 남인과 서인이 제일 심각하게 대립하던 예송논쟁 시절, 남인의 논객 윤휴는 이순신과 인척관계였다.

 

윤휴의 서모(庶母)는 덕수이씨, 충무공 이순신의 첩의 딸이었다. 윤휴는 남원윤씨로 이순신 장군 밑에 활약한 무관이 많았던 집안이다. 한편으로 사돈관계이기도 했다. 윤휴는 오리 이원익과 인척관계고, 오리 이원의 손녀사위인 미수 허목과 사돈관계(친한 친구)였다. 임진왜란이 당연히 왜군과의 전쟁이었을까? 인조와 효종을 지나 숙종까지 이순신의 이름에 그늘은 있었다. 칠량해전에서 원균이 왜 통제사로 갈 수 있었는지를 생각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역사를 다시 봐야하고, 그 역사를 서양의 눈이 아닌 조선의 눈으로 다시 봐야 하는 것이 <이순신과 임진왜란>에서 전하고 싶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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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9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30 0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7-11-30 0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 속에서 대의를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모습이 일반적이기에, 대인 또는 성인의 모습이 더 위대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11-30 09:24   좋아요 1 | URL
대의를 위해 싸운 자를 외면하고
옆에서 아첨떠는 인간들이 승승장구하는
과거와 최근 이명박근혜 정부의 현실태를
보자면 작금의 역사는 과거의 일로 치부해서는
안되는 일이고,그곳에서 연꽃처럼 피운
분들의 노고를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게
후세의 도리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