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 하
이기담 지음 / 창작시대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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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을 소재로 하던 소설에서 <대왕 광해군>은 광해군 이혼보다 어느 서얼이던 동명이인 이혼을 중심으로 내려간다. 물론 한자로 이름은 다르더라도 이혼이라는 맥락일치는 그들이 무엇을 위해 목표로 하는지 비슷하면서도 다른 길을 보여준다. 이와 달리 이번에 읽은 그냥 <광해군>이란 소설은 주인공 자체는 광해군으로 둔다. 우리가 아는 광해군이란 조선임금 중에서 연산군과 더불어 종조를 붙이지 못한 사람이다. 우리가 대부분 아는 것은 광해군이 명나라가 지고 청나라가 오를 때, 중립외교를 했다는 점, 그리고 영창대군과 임해군을 죽인 것, 인목대비를 폐서인으로 하여 불효를 했다는 점이다.

 

하늘의 도를 내세워 광해군을 비판하면 어느 모순이 생긴다. 태종 이방은 형제와 사촌을 죽이고, 세조는 단종을 죽였으며, 인조는 소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다. 그뿐인가?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 안에서 죽도록 만든다. 그냥 편하게 독약을 내리는 사사(賜死)가 좋다. 반란이 있거나 예상되는 인물 그리고 정치적 숙적들은 항상 죽음을 당한다. 왕가의 친척들은 든든한 아군이기도 하나 절실한 적이기도 하다. 모든 일이란 전후맥락이 존재하고, 원인에 대한 결과에서 그 원인에 대한 근원이 있다.

 

광해군을 본다면 정말 난해한 인물이다. 혼군(昏君)이라 하나, 조선시대에서 내려온 유산 중 그가 만든 업적은 탁월하다. 궁을 복위하고, 전쟁으로 사라진 도서를 재편찬하고, 지금 한국의 의술 한의학을 정립한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찬하게 만든 인물이다. 동의보감의 가치는 현대의학에서 그대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 외의 서적도 역시 한국의 중요한 유산이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모두 소실된 서적을 복원하고, 실록도 1곳에 보관한 것을 4곳으로 늘려 보관하게 한 것도 광해군의 업적이다. 실록을 현대 한국에서 국가의 보물로 삼았고,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되었다. 400년 전 그가 하던 일들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주었는가?

 

E.H Carr<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과거에 있던 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현재 사회와 끊임없이 대화를 하고 있다고 한다. 광해군 시대는 북인과 서인이 공존하고, 서인이 열세하자 인조반정으로 북인이 몰락한다. 서인이 주도로 작성한 광해군일기나 서인에서 노론이 중심이 되던 조선의 정치사에서 광해군의 존재는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소설 <광해군>에서 어느 정도 실화이고 어느 정도 가정인지 모르나, 적어도 실록의 기록을 많이 차용하고 있다. 광해군의 말이나 강홍립의 의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적어도 강홍립이 없었다면 병자호란 이전 정묘호란에서 큰 화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임진왜란을 거치며 전쟁영웅이 모두 제거되는데, 그 대부분은 선조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이다. 임진왜란 의병장 김덕령이나 영원한 해군제독인 이순신 장군을 봐도 그 죽음이 부당하기 짝이 없다. 전쟁에서 주요활동인물은 동인세력이 주축이 되는데, 동인도 남인과 북인이 나누어져 남인 유성룡 세력이 퇴각이 북인이 급성장한다. 북인이 다시 소북과 대북으로 갈리고, 대북은 다시 또 분당한다.

 

광해군은 붕당정치가 시작될 때 그 당쟁의 희생자였고, 폐위와 그 이후의 삶 역시 당쟁의 희생자였다. 당쟁의 문제는 유학이 백성을 도학으로 치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론의 이익을 따라 모두 따른다는 점이다. 당쟁의 문제는 전쟁의 대응력까지 문제되고, 임진왜란 당시 순국지사 학봉 김성일은 분명 훌륭한 유학자이나, 일본 왜국 방문 시 서인과 반대되는 당론을 추구하다 전쟁의 화를 만들었다. 전쟁이 나면 가장 문제인 건 전투보단 국민, 백성의 안위다. 선조는 혼자 살기 위해 도망치고, 그 아들인 광해군을 남겨 분조를 이끌게 했다.

 

<광해군>에서 광해군은 분조를 기회로 보나, 최근 개봉한 영화 <대립군>에서 광해군의 모습은 그저 힘없이 내몰린 희생양이었다. 선조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의지가 없다가 전쟁이 나자 신성군을 마음에서 버리고 광해군을 선택한다. 전쟁을 지휘하라 하나, 막상 전쟁터에서 언제 참극을 피할지 모른다. 우리가 아는 광해군은 임금시절만 보나, 사실 광해군의 탁월함은 전쟁이었다. 분조를 이끌며 의병을 독려하고, 전쟁을 지휘했으며, 한양을 되찾은 후 남쪽으로 내려가 다시 백성들은 다독거렸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저잣거리에서 형편없는 밥상을 백성과 같이 먹어주던 임금은 오로지 광해군이었다. 인조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올라가 도망치기만 바빴다. 결국 체면과 생존에서 체면을 버리고 삶을 택했다. 대신 백성 수십만명이 청국으로 끌려가 죽음을 당하거나 평생 돌아오지 못했다. 설사 돌아와도 수많은 돈이 지출되고, 아녀자들은 환향녀가 화냥년으로 바뀌어 창녀 취급을 받았다. 어찌 슬프지 않을 수가 있을까?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추구한 것이 드러나는 것은 곧 지배계층이 어리석다는 것은 반증하고, 임진왜란 당시 명의 황제가 칙서를 선조가 아닌 광해군으로 내린 것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여 조선을 흔드려 했다.

 

소설에서 광해군은 선조에게 명군을 파견하지 말 것을 청하는데, 유성룡도 그런 말을 한 것을 보면 그 고증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단지 명이 오는 이상 조선은 그 이상의 대가를 줘야할 것이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오면 큰 빗으로 쓸고 간다면, 명나라는 참빗이 쓸고 가는 형국이라 했다. 가는 길마다 강간, 살인, 약탈이 끊이지 않으니 천군이란 명성은 그저 강도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선조가 재조지은을 내세우고, 대신들도 광해군에 이르러 그 뒤에도 재조지은을 말하는 이유는 지배계층의 어리석음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사실 임진왜란은 명군의 도움은 초반에 없었고, 전쟁의 승리가 눈에 보이자 공을 내세우기 위해 움직인다. 후에 명군을 분명히 왜군을 소탕하였지만, 임진왜란의 승리는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의 장수와 의병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선조와 인조반정 세력은 그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광해군이 분조를 지휘한 것은 만 백성이 알고, 거기에 의병이 나와 왜군을 격퇴한 것은 타국도 알았다. 영화 <광해>에서 광해군의 가슴에 흉터가 있는데, 그것은 전쟁 중 활에 맞은 상처이다. 가슴이 활에 공격당했다면 죽을 공비를 넘겼다. 일국의 왕자가 죽음을 당할 뻔 했는데도, 그는 도쿠가와 막부와 외교를 맺었다.

 

전쟁을 다시 일어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소설 <광해군>은 오로지 백성의 편을 생각하는 군주로 묘사된다. 실제 한명기 교수의 연구도서를 보면 광해군이 폐위될 때 백성들은 모두 놀라워하고 두려워했다. 이때 오리영감 이원익이 한성부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진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무리수는 내부 권력의 다툼이었고, 백성들은 궁궐의 권력암투는 일상화가 되었기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토목공사로 재정을 많이 낭비했지만, 명나라에 군을 파견하여 여진족에게 몰살당하는 것보다 났다. 만 명 중 7000여명이 살아왔다면 오히려 그게 더 큰 이익이다.

 

궁궐 토목공사 자체를 긍정적이지 않으나(물론 현대 한국인들은 이런 것이 있기에 즐겁게 한양나들이를 돌아보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많은 장정을 잃는 게 국력의 훼손이 크다. 광해군은 역대 임금 중 태조와 태종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전쟁을 수행한 군주이다. 그는 직접 백성들 상대하고, 그들의 원한을 들었다. 아니 들을 수밖에 없다. 자신이 백성을 지켜주지 않으면 전쟁에서 광해군은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탐관오리에 의해 배를 굶고, 포악한 사대부에게 딸을 빼앗기며, 그 원통한 사연은 어디 가서 호소조차 못한다.

 

파주현감 조명식이 실존했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대동법 초안이 임진왜란 당시 백성을 만나 그 의미를 찾았는지 알 수 없다. 단지 대동법이 김육이 제안했다고 하나, 사실 남인영상 이원익이 시작했고, 이원익은 광해군 북인시대에 초라한 남인세력이다. 그는 성격이 워낙 온순하고, 백성들에게 친절한 청백리였으며, 전주이씨 후손으로 종실이었기에 그만큼 추종을 받았다. 하지만 권력과 무관한 인물이었기에 단순히 이원익이 주장한다고 하여 그 세에 따라 대동법 시행이 되었다면 논리가 서지 않는다.

 

당시 양반들은 농지지주가 되어 많은 이익을 차지했고, 김육이 대동법을 주장할 때 산당의 서인들이 모두 반대했다. 광해군이 폭군으로 등록이 된 이유는 겉으로 폐모론과 골육상잔이겠지만, 그 뒤에는 자신의 이익을 원하는 자들의 물밑작업이다. 소설은 그런 광해군의 고뇌가 잘 드러난다. 광해군이 물러나자 정묘호란이 일어날 때 여진족 군사는 협약을 맺지 않을 경우, 남하할 때마다 백성들의 집을 모조리 없애고, 살아있는 모든 것을 도륙한다고 했다. 여진족이 명나라를 공격할 때 그들은 항복하지 않으면 모조리 밟아버렸다.

 

전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단 일말의 자비를 내리지 않는 것이다. 전쟁을 몸소 겪은 광해군의 입장에서 전쟁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병사로 차출되어 비명을 질렀는지, 하얀 옷을 입은 백성들의 시체가 너무 많아 흰 무덤을 보았다는 말이 나올 때 전쟁의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도 한국전쟁을 겪으면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지만, 더 슬픈 것은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다. 상대진영에 조금이라도 협력하면 모조리 길가에 끌고 와서 총살시키던 그 사진은 너무 끔찍했다.

 

전쟁은 그런 것이다. 현재 북핵문제로 한국은 전쟁의 딜레마에 빠져있다. 미국에서 연구한 결과, 한국이 전쟁이 날 가능성은 50%이고, 하루 민간인 사망자는 2만명이라 하는데, 사실 2만명은 최소이다. 장기전이 되면 전쟁의 폭격이나 화생방 상황만 아니라 식수와 식량문제, 전염병 각종 범죄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다. 21세기 전쟁은 16세기 임진왜란처럼 활과 조총, 그리고 칼과 창이 아니다. 20세기 한국전쟁처럼 총과 대포, 프로펠러 전투기도 아니다. 제트전투기가 폭격하고, 지대공 내지 지대지 미사일이 수백 내지 수천를 강타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또 다시 역사의 반복이란 시련에 빠져든다. 광해군이라면 현대의 한국을 어떻게 할까? 외교적으로 어떻게 하고, 전략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군대는 대부분 활로 사격을 했으나, 왜군의 조총에 밀렸다. 조선에도 화약제조에 관심을 가진 것과 조총 정예부대를 만들어 전쟁의 불화를 번지지 않게 한 것도 대단한 혜안이다. 국방력은 그 나라의 운명은 좌우하고, 외교에 대한 정보처리는 일각을 좌우한다. 소설 <광해군>은 그런 심정에서 광해군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흘러간다.

 

분명 정치적으로 실정이 있었고, 그가 실수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대북 이이첨은 처음에 광해군을 도왔지만, 후반부에는 광해군은 그를 멀리하려 했고, 중국과의 외교문제에서 이견을 보였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것은 노론의 입장에서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재조지은의 명나라를 올리지 않은 점은 임진왜란 당시 명군을 파병시킨 자신들의 입지가 무너지게 하는 것이다. 명군을 그렇게 올린 이유는 임진왜란의 문제가 정치적 무능함을 상기시키고, 왜란의 해결사가 조선의 백성이라면 사회적 모순에 대한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결사가 명군이고, 그것이 선조와 권력층이고, 의병의 활동이 들러리라면 기존의 정치체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명나라가 존재하기에 그 명분을 들먹일 수 있는 것이고, 명나라가 망하면 자신들의 입지 역시 좁아지는 것이다. 조선 개국 이후 을묘왜변 같은 큰 전쟁이 있지만, 한양이 함락된 사례가 없었기에 섞은 물은 그대로 고여만 갔다. 소설에서 광해군의 말년이 나온다. 늘 우울하고 비참하며 슬픔에 젖은 그는 어느 조정의 신하가 올린 장계처럼 비참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광해군의 비참함 이상으로 조선의 백성은 더욱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대신에게 내 나라 백성이 소중하고, 그깟 사대가 무엇이 중요하냐? 식으로 이야기한다.

 

남한산성에 몰려 척화파와 주화론자들이 분열할 때 조정은 아직도 권력 또는 명분에 집착했다. 명분이 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 명분은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지 백성의 입장은 전혀 없었다. 임진왜란 이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재미있는 사실 1가지를 생각했다. 임진왜란 당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고 근왕병이 일어났다. 그러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시기 의병과 근왕병이 거의 없었다. 백성들은 왜란에 따른 후유증이 너무 큰 것도 있지만, 그래도 의병이 전국적으로 창궐하지 않은 것은 의아한 일이다. 왜 그럴까? 광해군 분조시기에 의병이 전국적으로 넘쳤다. 광해군의 평가는 모두 긍정적일 수 없다.

 

그러나 민심에 의해 움직이는 의병활동은 생각해볼만하다. 그 이후의 의병은 기존 왕조에 동조하여 일어난 의병보단 항일운동 및 동학운동과 같은 민중봉기가 더 많이 발생된다. 조선이 망하자 조선독립을 위한 의병활동이 있었지만, 조선의 군주보단 조선의 백성을 위한 의병이 더 많이 나온 점을 생각하면 광해군이 보여준 분조활동, 그리고 거기에 얻은 경험을 정치로 활용하는 점에서 그가 혼군이라는 평은 너무 지나치다. 그는 혼군이 되어야 했던 군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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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퇴근길 버스를 타고 가는데, 마치 노 키드 존에 대한 의견이 나왔다. 진행자와 패널, 그리고 시청자의 전화까지 받아보면서 노 키드 존에 대한 열렬한 의견이 오고갔다. 기본적으로 노 키드 존에 대한 내 의견을 밝히자면 찬성이다. 진보성향이 있지만, 진보언론과는 다른 의견을 내놓은 것이 의아하겠지만 그렇다. 그런데 진보신문사의 글을 보면서 내심 의구심이 들었다. 나중에 정리하겠지만, 진보성향 언론은 뭔가 핀트가 일괄적이지 못하고 점차 파상적으로 흩어진 맥락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이 소고를 적어 내려가는 이유는 언론과 방송에서 모든 원인을 제대로 간파하지 않았다. 어느 유명한 식당의 주인의 인터뷰를 보면서 답은 이미 그곳에 나와 있는데 말이다. 노 키드 존에 대한 인식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발생한 사회현상이다. 그 전에 아이들이 오면 어떠한가? 그렇게 심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노 키드 존에 대한 문제가 대두된 것이 과거라고 한다면 어떻게 보는가? 어린이에 대한 훈육과 어머니에 대한 태도의 문제는 분명히 있다. 가정주부로 고생하여 아이하고 같이 집밖에 나와 산책도 하고 맛있는 차 한 잔을 하고 싶으며, 게다가 자신 역시 문화생활을 즐기고 싶을 것이다.

 

그런 것은 문제가 없다. 아이가 옆에 울고 보채면 달래주어야 하나, 가끔 매장을 보면 그것을 무시하고 서로 수다 떨기 바쁜 분도 있다. 하지만 모든 분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의 몰지각한 분들로 노 키드 존이 완성될 수가 없다. 단지 노 키드 존이 생성될 수밖에 없는 변증법적인 원인이 무엇인가? 라는 의문은 우리가 분명히 가져야 한다. 전에 어느 유명한 식당 인터뷰를 보았는데, 서울 중심상가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식당이다. 점심시간에 발 딛을 틈도 없이 바쁘며, 손님은 가게 안에 늘 왕래했다.

 

이 가게가 처음에 노 키드 존을 시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11식을 원하지 않았다. 어느덧 11식에 노 키드 존까지 이어졌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임대료가 올랐다고 한 것이다. 내 기억에 인터뷰를 진행할 때, 한 달 임대료가 약 2,000만원 가까이 된 것으로 기억한다. 2,000만원 임대료에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을 4명을 고용한다고 생각하자. 급료는 1인당 약 150만원이면, 1달 최소비용은 2,600만원이고, 거기에 음식재료, 전기, 수도, 세금, 각장 감각상각비를 고려하면 최소 월 매출은 5,000만원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임대료가 처음에 2,000만원이 아닌 1,000만원이라면 최소매출은 4,000만원으로 보면 되고, 지금 가게를 방문해주는 손님의 80% 정도면 충분하다. 가게를 이용하는 손님이 오고가는 전환비율만 제대로 되면 문제가 없다. 1인당 주문 및 식사시간이 40분이고 좌석이 20개 정도라면 점심시간 12:00~14:00 사이 20 × (120÷40) = 60명이 온다. 1인당 1만원이라면 60만원의 매상이 오르는 것이다. 만일 1인당 1식단이 아니라면, 그것도 2인이 1개만 시키고, 식사시간도 많지 않고 부수적인 것까지 제공한다면 가게 입장에서 손해가 오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 시간당 비율 손님이 오는 것과 매상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단지 과거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이제 왜 문제인가? 라는 설정에서 문제는 가게를 찾는 손님이 아니라 가게에 손님이 전환비율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전에 유명 치킨 메이커가 비싼 가격으로 상품을 팔았다. 2만원이 넘어가는 가격에 막상 원자재 육계의 가격은 2만원의 101조차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 비용은 무엇인가? 치킨집 인건비를 생각해도 아르바이트생이 200만원 이상 될 리 없고, 다른 재료비를 다 합쳐도 육계 1마리의 반도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대기업에서 영업점에 요구하는 상품메이커 가격이고 나머지 임대료이다. 가령 2만원 짜리 메이커 통닭이 있다면 메이커 없는 치킨은 15,000~18,000원 사이가 되는 것이다. 그런 명확한 답이 있어도 언론은 부모의 자질이나 사회적 소통문제로 여긴다. 물론 그것도 있다. 하지만 왜 그렇게 되었는지 과정에 대한 고찰은 없다. 진보언론의 문제는 가게 점주의 의견을 제대로 피력하지 않았고, 진영적 논리로 따지고, 보수는 자본주의적 문제가 가진 본질을 피한다.

 

요새 새로 지은 아파트 1채 가격이 서울에서 5~6억이 기본이라 말을 들었다. 강남이 아닌 지역에서 그렇게 요지부동으로 가격이 오르니 임대료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오르고 있다. 서민들의 시장물가는 엉망이고, 집은 구경조차 하기 힘들다. 형이 얼마 전 통화하면서 앞으로 젊은 사람들은 집 사기가 어렵다는 말을 하면서 부동산 투자하지 않으면 돈 벌기 어렵다며 한 번 재고하라는 말을 한다. 문제는 알면서도 문제해결보단 문제의 본질을 두고 이익을 챙기려 하는 점에서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문재인 정부가 전번 정권처럼 부동산경기를 엉망으로 하지 않겠지만, 부동산을 잡기가 어려울 것이라 말에서 주변 사람의 말을 들으니 과연 그렇다. 내 아이가 나하고 좋은 곳에서 먹기 어려운 이유는 No-Kid Zone이 생긴 이유도 있지만, No-Kid Zone이 생기기까지의 한국현실은 외면하고, 거기에 동조하여 부동산투기에 빠진 현 실태에서 가게점주를 탓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다. 집 옆에 메이커 브랜드 아파트가 오는 것은 좋아해도, 영세한 시민을 위한 임대주택이 오는 것은 반대이다. 그런데 이런 점을 논하지 않는 언론이다. 그들은 밑바닥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진영의 논리에 억지로 끼워 맞추기 놀이만 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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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광해군 1
박혁문 지음 / 늘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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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임금 중에서 가장 칭송을 많이 받은 인물은 세종대왕과 정조대왕이다. 세종대왕은 문의 극치로 훈민정음을 반포했다면, 정조대왕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만든 문무를 겸비한 군주이다. 그러나 2사람의 조건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세종의 아버지는 태종 이방원이고, 그는 강력한 군주세력을 만든 장본인이다. 결국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왕도정치를 실현할 수 있으며, 권력을 조금이라도 이용할 가능성이 농후한 척신과 고관대신을 숙청했다. 심지어 형제의 목을 내치니 그의 잔혹함에서 다들 너무한 임금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백성의 입장에서는 성군이라 볼 수 있다.

 

권력이 세분화된 가지로 집중되면 결국 이권이 몰리며, 그 이권의 토대는 백성의 노고로 이루어진 것이다. 임금은 피로 이어진 세습제이나, 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백성의 삶이다. 백성을 해롭게 하는 인물이라면 형제라도 아내라도 내쳐야 한다. 임금은 왕자에게 하나뿐인 아버지이나, 임금은 만 백성의 어버이여야 하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는 임금이 진정한 군주이듯이 그 시기가 잘 맞으면 성군으로 기록으로 남겨지나, 그렇지 못하면 평생 폭군이란 명칭이 남아 전해진다.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하고 할아버지로부터 임금을 승계 받은 군주이다.

 

영조는 처음에 사도세자를 죽일 때 그 자신의 입장과 노론의 정치적 입장이 어느 부합되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정조가 올라갈 때는 그 시점이 달랐다. 사도세자는 죽어도 사도세자의 아들은 살아있고, 사도라는 이름도 결국 영조가 자신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에 대한 슬픔과 후회로 이어진 것이다. 조선의 왕조는 최고 권력자라고 하기엔 너무 힘들었다. 조선은 역대 한국의 왕조국가와 다른 형태의 정치구조이다. 고구려와 발해, 고려 같은 경우는 북방의 중국에서 독립하여 자치적으로 세운 국가이다. 주몽이 부여에서 탈출하여 고구려를 건국해도 결국 고구려는 고조선의 영토를 중심으로 활동한 점, 발해는 고구려와 말갈부족의 후예들이 건국한 점, 고려 역시 내분에서 시작했으나, 북방 중국과 외교적 분쟁이 있었다.

 

중국대륙과의 종속관계는 몽골의 침입에서 시작했고, 몽골이 원나라로 이어진 후 명나라에 뒤에 명나라에 삼켜진다. 명나라가 새로이 오르자,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무신이면서 반정으로 조선을 만들었다. 결국 조선은 반정의 국가이고, 반정 무신에 의해 만들어진 정치세력이다. 반정의 역사는 세조와 중종, 그리고 인조에 이르게 된다. 조선의 왕은 순탄하지 못한 운명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중종은 이복형 연산군의 눈치를 보고, 명종은 후사가 없어 대비의 의지에 따라 조카 선조에게 인도된다.

 

선조가 오르자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선조는 원래 왕세자가 아니라 조카인 점에서 권력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대신들은 동서로 분당될 시기이다. 붕당정치를 만든 폐단 제공자 중 단연히 책임자는 선조이다. 선조는 두 당으로 갈라진 신하를 보고 서로 죽이기까지 하던 정치적 음습을 고려하여 정쟁에 참여했다. 왕권을 살리기 위해 신권을 죽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게 오히려 신권을 키우게 되었다. 왕은 강해도 왕자들은 여럿이 있기 때문이다. 불운의 화는 광해군에게 미친다.

 

소설 <대왕 광해군>은 바로 동서분열과 동인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어질 때,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를 다루는 소설이다. 소설에서 광해군의 역할이나 모습은 그래 대두되지 않는다. 오히려 실존했던 김류나 신경진, 혹은 가공의 인물 이혼 등과 같은 인물을 내세운다. 그리고 마부태라는 청국의 장수는 진짜 조선인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이들을 보는 조선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광해군이 등극하여 폐군이 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광해군만을 보는 것은 아니다.

 

소설에서 정말 광해군이 인조와 그의 계모대비를 향한 말이 사실인지 아니나,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광해군이 그린 외교적 판단은 정확했다. 역사학자 이덕일이나 오향녕 같은 사람 말고 한명기 교수의 서적을 보면 대충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임진왜란과 정묘·병자호란 전후의 세계정세와 조선의 정치적 상황, 그리고 전쟁의 의도에서 많은 것을 내포하니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광해군을 오점으로 볼지 아니면 다른 관점으로 볼지는 많은 여지가 남아있다. 알라딘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조선의 임금에서 세종과 정조가 있었으면, 나머지 1명은 광해군이었다. 광해군을 우리가 왜 알아야 하는가?

 

세종은 태평성대의 시대고, 정조는 르네상스시대였다. 세종은 서구사회에서 르네상스가 도래한 시기이고, 정조는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시기이다. 서구사회는 동양의 세계에 눈을 돌리기보단 내부갈등과 식민지정책이 아메리카로 향하고 있었다. 동양이 평온한 시기란 중국의 정치적 세력이 변하지 않은 점이다. 세종은 명국이 안정된 시기고, 정조는 청국이 안정된 시기이다. 태조 이성계가 원나라와 명나라의 교체시기 명나라를 따라 조선을 건국했지만, 광해군 시기는 명나라가 여진족에게 밀리던 시기이다.

 

명나라는 중국 한족이 한고조부터 시작한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해 유학사상이 성리학을 중시하고, 조선 역시 성리학이 통치이념이 되었다. 공자의 사상과 달리 성리학은 지배계급 통치이데올로기를 중시한 학문이다. 어머니가 첩이면 태어난 아이는 양반이 아니라 서자로 평생 썩혀야 한다. 이런 사회적 모순은 능력이 있어도 신분제의 한계로 좌절을 맛본다. 광해군이 겪은 임진왜란과 광해군 이후 병자호란은 바로 이런 문제에서 조선을 후퇴시킨 문제였다. 책은 소설이나 서애 류성룡에 대한 연구서적을 보면, 류성룡 역시 정치적 문신이라도 현실을 제대로 인식했다.

 

명나라를 의지해서 임진왜란을 종결할 수 없는 점, 명나라는 자신의 국경에 조선을 두고 왜국으로 침범 받지 않으려 한 점, 막상 명군이 파견와도 전투에 참가하기보단 눈치만 본 점, 명국이 상국인 점에서 무리한 요구를 계속 하는 점에서 자주국방이 중요했다. 왕권은 추락하고, 입만 놀리면서 권력을 탐하는 신료들은 도망가기 바빴다. 조선의 백성은 굶주려 죽거나 말굽에 밟혀죽는데 말이다. 류성룡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도움이 필요했고, 무관의 자질이 있는 자가 공을 세우면 벼슬을 내려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꿈은 좌절되었고, 왜란 이후 탄핵되어 안동 하회마을로 내려가 평생을 마감한다. 그의 탄핵은 남인의 몰락이었고, 광해군 이전은 북인들이 득세하고, 북인은 광해군을 중심으로 대북, 영창대군을 중심으로 소북으로 갈라진다. 임금이 의지를 가져도 양반 사대부 신료들이 지지하지 못하면 임금의 결정도 결국 무마될 뿐이다. 소설의 시작 전에 이미 소설의 주인공 이혼의 한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혼을 보자면 북인이나 서인이나 다를 바 없었다. 탄금대전투에서 최초로 승리해도 군령을 어긴 죄로 상관이 참수되고, 가상의 이야기지만 이이첨의 무리에 의해 가족은 몰살되었다.

 

명나라는 지고 여진은 올라오는데, 한양의 고관대신은 외교적 군사적 판단 내신 내부총질만 일삼고 있다. 권력을 가질수록 더 원하는 바고, 권력은 더 높은 권력을 위해 행사한다. 내외부의 위기를 넘어 더 나은 세계로 가기보단 그것을 찬스로 여겨 권력을 차지한다. 광해군 시절 북인들의 행동은 한심했으나,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은 멍청하기 짝이 없다. 세계정세를 읽지 못한 점, 명나라를 위해 출병할 때 자국의 백성에 대한 안위를 생각하지 않았다. 광해군 말대로 4만의 병력을 출전시키면 그들을 위한 국고와 식량은 둘째 치고, 나라의 백성이 없어져 큰 위기에 봉착한다.

 

만일 가족이 타국에서 잃게 되면 그 가족들의 원한은 어떻게 헤아려 볼 수 있는가? 광해군은 분조 당시 찬 바닥에서 잠을 자고, 전장에서 굶주리면서 백성과 같이 왜란을 이겨내었다. 광해군이 무리한 정책을 한 것도 있고, 그가 실책을 한 것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이룩한 일들도 많다. 업적으로 따지면 선조와 인조하고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의 대신은 재조지은이란 이름 아래 명국을 무조건 따랐다. 재조지은이란 이름으로 변방에서 고생하던 전쟁영웅은 조연에 불과했다.

 

전쟁영웅은 선조에게 미움 받아 죽음을 당해야 했다. 소설에서 인목대비 역시 선조 옆에서 한몫을 거둔다. 인목대비는 광해군 즉위를 반대한 세력이었고, 광해군이 선조와 인목대비에게 문안드릴 때 문전박대를 했다. 광해군이 선조에게 문전박대 당하자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는 기록도 있다. 그것도 임진왜란을 거친 후이다. 아들에게 분조를 내려 전쟁을 책임졌는데도 말이다. <대왕 광해군>은 그런 광해군 시대의 명암을 가상의 인물로 통해 보는 책이다. 허균은 유용한 인물이나 역성혁명으로 사라진 자이다.

 

현재상황을 파악하고 지난 과거를 분석하여 앞으로 방침을 정해야 하는 것이 국가의 대사이다. 자신의 정치적 이권을 위해서라면 만 백성의 목숨도 아깝지 않은 자들이 결국 득세하는 역사의 일례를 보자면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나, 다행히도 승자도 그 당시의 승자이지, 먼 후예들에게 승자들은 백성을 팔아먹을 무뢰배에 불과했다. 인조는 홍타이지 앞에서 머리를 박으며 패배를 시인했고, 많은 조선인들은 청국에 끌려가 죽음을 맞이했다. 앞날을 대비하지 않은 덕분에 백성들은 피눈물을 흘리고, 왕은 수모를 당했다. 그런 것을 보고도 반성하지 않은 조선은 계속 되었다.

 

소설에서 인목대비가 화가 나서 광해군을 꾸짖는다. 인륜을 말하면서 말이다. 소설이니 그렇지만, 적어도 광해군은 맞는 말을 한다. 인목대비 한 사람이 백성보다 위에 있지 않다는 발언이 말이다. 동생 영창대군과 형 임해군의 죽음이 비극이지만, 그들의 죽음이 없다면 만 백성은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하는 점을 말이다. 광해군의 몰락 그 스스로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 광해군의 몰락으로 조선의 굴욕을 광해군을 몰락시킨 자들의 몫이 되었다. 그들은 알아야 했다. 조금 더 조선의 백성을 위한 길이 무엇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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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통략 - 조선시대 당쟁의 기록 자유문고 동양학총서 39
이건창 지음, 이덕일.이준영 해역 / 자유문고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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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창의 <당의통략>을 읽으면서 그가 생각하는 원론에 대해 보면서 조금 놀란 게 있었다. 붕당정치의 폐단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면서 8가지를 논의를 제시한다. “첫째는 도학이 지나치게 중한 것이고, 둘째는 명분과 의리가 지나치게 엄한 것이며, 셋째는 문사가 지나치게 번잡한 까닭이고, 넷째는 옥사와 형벌이 지나친 것이고, 다섯째는 대각이 너무 높은 것이며, 여섯째는 관직이 너무 맑은 것이요, 일곱째는 문벌이 너무 성대한 것이고, 여덟째는 나라가 태평한 것이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놀란 이유는 문벌의 성대한 점이고, 명분과 의리에 대한 문제였다.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물품들을 정리하면서 나에게 거의 100% 상속된 게 있었다. 그것은 집안의 족보이다. 21세기 민주주의 시대에 조선의 성리학을 토대로 만든 족보가 무슨 문제냐고 하지만, 한국학에 대한 연구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문화적 가치에서 그 나라 혹은 그 민족의 역사와 삶이 크게 평가되었다. 민족성이 과거에 낡은 문물이라면 이제는 새로운 콘텐츠가 되는 원류이다(한국의 신화,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드라마, 영화, 연극, 오페라 등으로 만드는 얼마나 성대한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집안의 대동보가 나에게 왔다. 아버지가 돌아가기 전 내가 하던 일 하나가 집안 족보를 확인하던 절차였다. 처음에는 아버지 이름과 형, , 엄마, 형수, 조카의 이름을 확인하다가 점차 할아버지 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족보와 집안제사에 대해 생각하자면, 집안제사를 여자만 준비하는 것은 문제가 심하나, 제사 자체를 하지 않은 것은 더 문제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집안 몇 대조 할아버지가 누구인지가 중요하나, 그 몇 대조 할머니가 누군지도 정말 중요하다.

 

아버지 없는 자식 없지만, 어머니 없는 자식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결국 할머니의 이름을 몰라도 할머니가 누구의 집안인지까지 다 보게 된 셈이다. 조선이 1910년 일본에 의해 멸망해도 조선이란 국가는 없을망정 조선인은 여전히 살아있고, 그들의 역사는 민중 사이에 계속 이어져 20세기 광복과 21세기 현대로 이어져 왔다. 일제침략 때 협조한 친일파 중 대부분 노론 출신이 많았고, 남인은 없었다. 소론과 북인이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 노론에 의해 장악된 점이고, 독립군 중 남인의 후손이 많았다. 게다가 국회의원 중에 선조가 독립군 내지 독립투사를 하던 분도 있는 점도 눈 여겨 볼 수 있다.

 

조선이 비록 일본에 의해 망했더라도 당파싸움은 조선이 멸망해도 계속 이어졌다. 한국 역사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당 정인보 선생은 조선의 마지막 등불을 다산 정약용 선생으로 여기고, 그의 업적을 남겨 우리 역사를 크게 발전시켰다. 그런데 정약용 선생의 책이 1930년대까지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다. 노론의 후예가 정약용 선생의 책을 시중에 나오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긴 것이다. 지나간 일이라 하나, 역사란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이라고 E.H Carr<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주장한다.

 

조선의 당쟁은 과거의 일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만들어 놓은 일이기도 하고, 그것이 현재도 비슷해도 여전히 이어져 내려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족보를 확인하면서 할머니의 가계 쪽을 살펴보았다. 친할머니는 해주오씨, 큰할머니 한 분은 하동정씨, 또 따른 분은 동복오씨, 작은 할머니는 보은이씨였다. 더 높이 올라가면 증조모 남양홍씨, 고조모 통천최씨, 현조모 여산송씨이다. 그 외로 혼계가 많은 집안을 보면 광산이씨, 광주이씨, 전주이씨, 한양조씨, 청주한씨, 문화유씨, 원주이씨, 경주이씨 등이다.

 

본래 우리 집안은 남인의 후손이다. 남인이 숙종 이후 몰락하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되자, 소론이던 사람들과 혼맥을 유지하고, 북인이던 사람도 혼맥을 유지한다. 특히 북인의 시초라고 볼 수 있는 남명 조식 선생의 본관의 창녕조씨도 많이 있었다. 다른 가계를 보면 어머니가 창녕조씨, 문화유씨, 원주이씨, 청주한씨인데 그 본인의 아내도 역시 어머니와 같은 본이었다. 물론 촌수가 멀겠지만, 결국 이건창의 <당의통략>대로 그게 이루어진 셈이다. 그가 책을 저술한 시기는 고종인 점에서 상당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건창은 전주이씨 후손이고, 그의 조상은 동국진체를 만든 원교 이광사, 연려실기술을 저술한 이긍익이 있다. 이광사는 소론이었다. 소론은 서인에서 분리되었지만, 우암 송시열과 윤증의 갈등에서 시작되고, 노론이 남인을 도륙하는 것을 보면서 소장파 서인이 소론으로 이어갔다. 소론이 경종 시기 득세하다 영조 때 거의 멸문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시파와 벽파로 갈렸다. 경종의 죽음과 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깊이 슬퍼하던 자는 소론이고, 특히 사도세자를 중심으로 모인 게 시파이다.

 

시파는 정조대왕 서거 후 노론벽파에 의해 모두 권력에서 멀어지고, 남인은 천주교와 엮여져 멸문지화를 겪는다. 조선당쟁사가 결국 사대부 집안의 혼인관계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 점이다. <당의통략>의 시발점은 역시 선조와 광해군 시절이다. 선조는 원래 직계 왕손이 아니고, 명종의 조카였고, 조카 중에도 장자도 아니다. 군주로서 올라갈 위치는 아니나, 명종비와 국상 이준경의 재치로 임금으로 올라간 자다. 그러다보니 그의 위치가 약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선조가 초반에 정치적으로 뛰어났으나, 후로 갈수록 신하들 세력을 서로 몰아 피를 부르고, 그렇게 하여 자신의 왕권을 다졌다.

 

이때 사림에서 동인과 서인으로 갈렸고, 동인 중에서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 남인, 남명 조식을 중심으로 북인이 되었고, 서인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중심으로 뭉쳤다. 문제는 당쟁을 두고 간략을 사용하여 상대방을 해친다는 점이다. 송강 정철이 중심으로 되어 수많은 선비를 죽음을 몰고 간 정여립모반사건은 그 정체가 명확하지 않았다. 게다가 조선의 거유인 최영경 선비가 자신의 편이 되지 않아 귀양 보낸 후 결국 목숨까지 빼앗았다. 이때 정여립과 친분이 있는 이유로 죽거나 화를 당한 자가 1,000명이 넘으니 당쟁의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상처이다.

 

그 대부분이 동인이었고, 서인에 대한 불만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리게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들의 증오가 얼마나 심했는지 당파로 군사지휘 체계가 정해졌다. 근왕병과 전시행정은 주로 서애 유성룡과 오리 이원익을 중심인 남인이었다. 의병은 북인이 중심으로 활동했다. 광해군 정권이 이이첨을 비롯한 정인홍이 주요 실권 세력인 이유는 북인이 광해군을 추대한 점이다. 당쟁에서 놓칠 수 없는 게 광해군 시대의 대동법일 것이다. 대동법에서 서인의 한당과 산당이 있는데, 한당은 한양을 중심으로 산당은 향촌을 기반으로 활동한다.

 

대동법을 주도하던 이원익과 김육은 당파를 넘어 대동법이 백성을 위한 길임을 알고 있지만, 향촌에서 대농장지주인 산당 거부 사대부들은 그게 싫었다. 광해군의 몰락은 단순히 폐비나 영창대군의 죽음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성종도 폐비윤씨로 통해 연산군의 폭정을 일으켰고, 태종 이방원은 형제의 난으로 사촌과 친형제까지 죽였다. 그런데도 이점을 용인한 점에서 왕실 내 권력다툼으로 왕은 몰아내는 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왕조의 반정은 신하세력의 보존이다. 즉 재산권의 문제이다. 인조반정 이전의 중종반정 당시 반정공신 중에 연산군 아래 크게 성공한 자도 있다.

 

그들이 주군의 등을 돌린 이유는 간단하다.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면 주군도 필요 없고, 백성의 눈물은 더 필요 없다. 광해군 시절 무리한 궁궐 토목공사를 일으킨 것에 대해 문제를 삼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명군에 파견나간 조선백성의 목숨이 더 중요한 것 같다. 궁 하나를 만드는 것보단 병사 수 만 명을 죽게 만든 게 오히려 국력의 훼손이 아닌가? 당쟁이 명분과 의리가 생기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의 권력을 넘어 왕도정치까지 이어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자신의 길을 막으면 어떻게든 권력을 차지해야 하고, 상대방이 나에게 위해를 가하면 그 이상으로 폭력으로 갚아야 한다. 조선의 백성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지만, 권력의 다툼으로 사대부들의 목은 항상 떨어지고 있었고, 심하면 가족까지 몰살이다. 죽어도 깨끗하게 참수당하는 게 아니라 능지처참까지 당하고 시신조차 찾지 못한다. 아니 이미 죽은 시신을 다시 관에서 꺼내어 목을 자르는 부관참시는 잔혹하다 못해 비참하다.

 

이건창의 글에도 그러하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왕의 척신으로 있어야 하는 점이다. 숙종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외척을 배척하지 못한 점이다. 책에서 인평대군의 아들인 복평군 형제들이 궁녀와 내통해서 사약을 받은 것으로 되어있지만, 역사의 후대에서는 그게 억울한 누명으로 밝혀진다. 숙종의 당숙이던 그들이 남인하고 친하게 지내고, 특히 복평군 형제의 어머니는 동복오씨인 점에서 남인세력을 두려워하던 노론세력에 의해 무고로 죽는다. 하지만 숙종의 어머니 명성황후가 숙종에게 달려가 김우명의 목숨을 보존하기를 바랐고, 무고죄로 죽어야 할 김우명 대신 복평군 형제들이 화를 당했다.

 

숙종은 몸이 약했고, 숙종의 아들 경종 역시 몸이 약했다. 영조 연잉군은 문제없으나, 영조의 작은 형은 병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왕의 병세와 심기를 두고 다음 권력을 두고 당파간의 항쟁은 어쩔 수 없었다. 왕이 바뀌는 순간, 왕은 자신의 편과 합작하여 상대세력을 도륙을 낸다. 이건창은 이런 조선의 당쟁사를 객관적으로 비교적 부정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가 왕가의 후예이고, 소론의 후예지만, 최대한 소론에 대한 긍정적 평은 배제했다. 그래도 소론의 입장은 어느 정도 반영했다.

 

숙종에서 영조까지 조한명에 대한 처신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북인에서 남인으로 혹은 북인과 친분이 있는 남인에 대해서는 과격하거나 무모한 인물로 설정했다. 단지 아쉬운 점은 당쟁을 비중이 큰 인물에 비추어 큰 사건에 비교했다. 당쟁은 아래로 권력에 대한 집착이고, 그 권력을 재력을 넓히는 방법이다. 재력이 넓어지면 백성의 살림은 곤궁해진다. 사실 광해군이 몰락할 때 백성들은 궁궐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궁궐 내 권력암투는 일상화적인 문제이고, 그들이 원하는 바는 세금감면과 병역문제의 해결이다.

 

이 책의 관점은 소론의 후손이나, 남인의 후손으로 보자면 소론인물인 어사 박문수를 생각한다면 그들의 업적이 나쁘지 않다. 실제로 박문수가 활약한 장면이 나온다. 21세 윤증의 고택은 아직도 벽이 없고, 그 가풍을 유지한다. 이들이 정녕 원하는 바는 무엇인가? 단순히 정치적 권력을 두고 투쟁인가? 아니면 그 이상인가? 책에서 자세히 명기하지 않으나, 많은 인물들이 백성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문제는 백성의 이익을 원하지 않은 자가 있고, 그것 역시 붕당정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당쟁거리였다.

 

사소한 계기나 혹은 작은 말꼬리나 소문을 가지고 상대편을 몰락시킨 점을 보면 무섭지 않을 수가 없다. 명분 뒤에 가려진 진실이란 상당히 두려운 것이다. 옳은 일을 해도 옳은 말을 해도 권력의 관계성에서 저울질하여 그만큼의 세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반드시 처리해야 할 업무조차 제대로 통과되지 않는다. 명분과 의리가 군주를 통한 왕도정치인지 아니면 이권과 권력을 위한 패권정치인지는 후세의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역사라는 것도 결국 후예가 바라본 기록의 판단에서 다르게 이어져간다.

 

최근 국회에서 일어난 정치적 일들을 보면 이건창의 <당의통략>이 주는 교훈을 충분히 상기시킬 수 있다. 옛날에 고관대신이 화를 당하면 임금의 기분에 따라 처분되나, 지금은 국민의 여론에 의해 좌우된다. 당장 목이 날아가거나 먼 곳에 유배가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괴로운 앞날이 기다리고 있는 게 권력자들의 말로이다. 역사를 보면 현재를 안다고 했다. 정치권력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그것 나름대로 좋은 삶을 살지 모른다. 하지만 정치적 입지에 따라 국민의 생활이 달라진다. 백성의 삶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상대편을 죽음으로 내몰렸던 자들을 보면서 우리는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그나마 다행일까? 결혼과 관련하여 과거에는 사농공상이 나누어진 것도 모자라 당쟁의 입장에 따라 혼인이 성사된다. 나의 할아버지 세대까지 이루어진 셈이니 그 깊이는 매우 깊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지금은 민주주의 국가이나 사농공상보단 경제적, 사회적 부와 권력에 의해 좌우된다. 그래도 과거에 가난한 선비라도 학문적 명성과 인품이 자자하면 어느 정도 살림이 보장되는 집안의 사위로 될 수 있지만, 지금은 가난하면 평생 가난에 살 뿐이니 과거보다 나아진 것은 겉모습인가? 그러니 우리는 역사를 다시 보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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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7-09-16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이건창의 당의통략이 번역되었군요!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인데, 만애비 님의 리뷰로 읽으니 이 책을 꼭 소장해야 할 것만 같습니다. 종은 리뷰 감사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09-16 22:38   좋아요 0 | URL
건강은 쾌유했다니 다행입니다. 이 책이 지만지 출판사도 있지만, 이덕일 작가가 번역한 점에서 한번 읽어봤습니다. 제 리뷰가 도움이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기 전에 알라딘 사이트의 블로그 유저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도 화이트칼라에 속하지만, 그래도 그 세계에 매몰된 사람이 아니다. 할아버지가 1차 산업의 중심, 농사를 지으신 농부였고 시골 작은아버지 역시 소키우고 농사짓고 있는 농부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배를 타던 노동자이니, 1차와 2차 산업을 뛰던 그들을 옆에서 보니 현실의 벽과 부조리에 노출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엘리트주의적 발상의 문제는 자기 중심적 사고와 세계관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 중에 하나가 자기를 누릴 것을 누리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생활의 불편한 일들이 생기면 그들 역시 불만을 토로한다.


비혼이 선혼하고, 딩크족을 하던지 말던지는 자유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제발 자기 존재를 선언해도 남에게 들이대는 것을 보기 싫다. 노동력 문제에서 최근 노인실버산업이 육성해도 그런 것은 편의점이나 간단한 물건배달이지 장거리 운송이나 여객, 자동차 및 공업설비 수리정비, 도로와 철도 정비, 선박운행 등에서 한계가 있다. 물론 70이 넘은 사람들도 그 작업을 하지만, 그들은 본래 20~30대부터 해오던 분이다.


평생 손에 기름 만지지 못한 사람이 지금와서 배타고 노가다 한다는 생각이 우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많은 인프라를 누리기 바란다. 상수도가 나오지 않아 샤워하지 못하거나, 하수관로가 막혀 대변이 내려가지 않으면 대개 화를 낸다.


문제는 이들은 그것을 고쳐주는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없다. 그들은 지금이고 10년 뒤고, 20년 뒤에라도 자기가 누리고 있는 인프라를 계속 하여 누리기 원한다. 일업무가 SOC와 관련된 도로, 항공, 철도 등 다양한 시설현장을 돌아본 입장에서 이런 부류들은 자기가 누리던 곳이 처음부터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럼 사회적 구조에서 대부분 건설과 선박, 철도 현장에 있는 노동자, 여객이나 운송하는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죽어도 무관심하거나 잘 죽었다고 놀리는 인간을 비호하는 모습을 보자면 참으로 바보같아 보인다.


어떤 작가가 책을 내던지 말던지 그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좋든지 말던지 관여는 안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 당신들이 키보드 모니터 앞에서 인터넷할 때 기 전기와 통신선로를 만들고, 이동할 때 자동차와 지하철, 택시를 타도 그것을 만들거나 다니는 도로 및 철도 역시 누군가 만들고 관리를 한다.


그것을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이가 60이상 사람이 평생 하지 못한 그런 관리를 하는 게 새로운 노동시장개척이라 말하면 그들은 더러운 자본주의시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입장을 완전히 깔보는 인간일 것이다. 


여성혐오하는 인간도 문제있고, 여성혐오가 속으로 내재되어 이게 무의식적 표출되는 것 자체에 대해 크게 의식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나, 그 문제만이 아닌 다른 복합적 요소에서 결과론적인 해석만 한다면 위험할 것이다. 


최근 비혼선혼하는 책이 많던데, 나는 그 작가가 전기도 잘 들어오지 않은 산 속에서 혼자 농사지으며 밥을 짓고, 커피 대신 산열매로 차를 마신다면 불만은 없겠지만, 괜찮은 원룸에 살며 아메리카노 커피를 마시며 작업한다면 참으로 맹인일 것이다. 


우리는 전기를 수입하는 연료에 의지하고, 커피도 배로 수입한다. 결국 연료와 원자재가 배로 오는데 선원 노동자의 비참한 환경은 잘 모르며 그들의 입장을 모른다. 결국 물화되는 노동자의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만 느끼는 환경만 말한다. 대개 여성비하적 사고를 가진 사람을 보면 과격한 노동이 수반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의 노고 없이 하루를 견딜 수 없는 게 우리 현실이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인권이 해결되려면 모든 것을 복합적으로 봐야 한다. 


만일 그 작가가 지금도 앞으로 10년 20년 뒤에도 게속 좋은 주거환경과 좋은 취미생활, 맛이 좋은 커피를 마신다면 누군가 외국에서 힘들게 배를 타고 날린 선박화물에서 시작될 것이다. 남성 엘리트 작가들이 글을 적으면 이런 관점이 전혀 없다. 이들은 노동자의 인권과 자유를 말하지만 그들이 직접 노동의 세계에 뛰어들지 않았다.


영화 <그림자의 섬>에서 한진중공업 크레인 농성을 힘들게 시위하신 김진숙님의 말을 들어보면 조금 이해가 갈 것이다. 이른바 개저씨 내지 한남이라 불리는 사람 중에서 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말이다. 이들은 엘리트의 도움 없이 살아가나, 엘리트는 이들의 노고 없이 살 수 없다. 오늘 당장 당신의 밥상에 올라오는 식단부터 가스연료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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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5 16: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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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5 16: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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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5 16: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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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5 17: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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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5 17: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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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5 17: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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