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자면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기 전에 알라딘 사이트의 블로그 유저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도 화이트칼라에 속하지만, 그래도 그 세계에 매몰된 사람이 아니다. 할아버지가 1차 산업의 중심, 농사를 지으신 농부였고 시골 작은아버지 역시 소키우고 농사짓고 있는 농부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배를 타던 노동자이니, 1차와 2차 산업을 뛰던 그들을 옆에서 보니 현실의 벽과 부조리에 노출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엘리트주의적 발상의 문제는 자기 중심적 사고와 세계관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 중에 하나가 자기를 누릴 것을 누리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생활의 불편한 일들이 생기면 그들 역시 불만을 토로한다.


비혼이 선혼하고, 딩크족을 하던지 말던지는 자유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제발 자기 존재를 선언해도 남에게 들이대는 것을 보기 싫다. 노동력 문제에서 최근 노인실버산업이 육성해도 그런 것은 편의점이나 간단한 물건배달이지 장거리 운송이나 여객, 자동차 및 공업설비 수리정비, 도로와 철도 정비, 선박운행 등에서 한계가 있다. 물론 70이 넘은 사람들도 그 작업을 하지만, 그들은 본래 20~30대부터 해오던 분이다.


평생 손에 기름 만지지 못한 사람이 지금와서 배타고 노가다 한다는 생각이 우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많은 인프라를 누리기 바란다. 상수도가 나오지 않아 샤워하지 못하거나, 하수관로가 막혀 대변이 내려가지 않으면 대개 화를 낸다.


문제는 이들은 그것을 고쳐주는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없다. 그들은 지금이고 10년 뒤고, 20년 뒤에라도 자기가 누리고 있는 인프라를 계속 하여 누리기 원한다. 일업무가 SOC와 관련된 도로, 항공, 철도 등 다양한 시설현장을 돌아본 입장에서 이런 부류들은 자기가 누리던 곳이 처음부터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럼 사회적 구조에서 대부분 건설과 선박, 철도 현장에 있는 노동자, 여객이나 운송하는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죽어도 무관심하거나 잘 죽었다고 놀리는 인간을 비호하는 모습을 보자면 참으로 바보같아 보인다.


어떤 작가가 책을 내던지 말던지 그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좋든지 말던지 관여는 안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 당신들이 키보드 모니터 앞에서 인터넷할 때 기 전기와 통신선로를 만들고, 이동할 때 자동차와 지하철, 택시를 타도 그것을 만들거나 다니는 도로 및 철도 역시 누군가 만들고 관리를 한다.


그것을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이가 60이상 사람이 평생 하지 못한 그런 관리를 하는 게 새로운 노동시장개척이라 말하면 그들은 더러운 자본주의시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입장을 완전히 깔보는 인간일 것이다. 


여성혐오하는 인간도 문제있고, 여성혐오가 속으로 내재되어 이게 무의식적 표출되는 것 자체에 대해 크게 의식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나, 그 문제만이 아닌 다른 복합적 요소에서 결과론적인 해석만 한다면 위험할 것이다. 


최근 비혼선혼하는 책이 많던데, 나는 그 작가가 전기도 잘 들어오지 않은 산 속에서 혼자 농사지으며 밥을 짓고, 커피 대신 산열매로 차를 마신다면 불만은 없겠지만, 괜찮은 원룸에 살며 아메리카노 커피를 마시며 작업한다면 참으로 맹인일 것이다. 


우리는 전기를 수입하는 연료에 의지하고, 커피도 배로 수입한다. 결국 연료와 원자재가 배로 오는데 선원 노동자의 비참한 환경은 잘 모르며 그들의 입장을 모른다. 결국 물화되는 노동자의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만 느끼는 환경만 말한다. 대개 여성비하적 사고를 가진 사람을 보면 과격한 노동이 수반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의 노고 없이 하루를 견딜 수 없는 게 우리 현실이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인권이 해결되려면 모든 것을 복합적으로 봐야 한다. 


만일 그 작가가 지금도 앞으로 10년 20년 뒤에도 게속 좋은 주거환경과 좋은 취미생활, 맛이 좋은 커피를 마신다면 누군가 외국에서 힘들게 배를 타고 날린 선박화물에서 시작될 것이다. 남성 엘리트 작가들이 글을 적으면 이런 관점이 전혀 없다. 이들은 노동자의 인권과 자유를 말하지만 그들이 직접 노동의 세계에 뛰어들지 않았다.


영화 <그림자의 섬>에서 한진중공업 크레인 농성을 힘들게 시위하신 김진숙님의 말을 들어보면 조금 이해가 갈 것이다. 이른바 개저씨 내지 한남이라 불리는 사람 중에서 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말이다. 이들은 엘리트의 도움 없이 살아가나, 엘리트는 이들의 노고 없이 살 수 없다. 오늘 당장 당신의 밥상에 올라오는 식단부터 가스연료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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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5 16: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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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5 16: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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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5 16: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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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5 17: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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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5 17: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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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5 17: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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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광주 5월 민주항쟁의 기록, 전면개정판
황석영.이재의.전용호 기록, (사)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 / 창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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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슬픔과 고통은 기나긴 시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60갑자가 몇 번이나 되풀이 되는 그 긴 시간을 지나지 않은 이상 원한은 사라질 수 없다. 최소한 2갑자 이상 지나지 않으면 과거의 원한이 사라지기 어려울 것이다. 생각해보면 조선이란 국호를 박탈당한지 110년이 다 되어 간다. 을사늑약을 생각하면 2갑자의 시간이 도래하고 있다. 조선이란 국가는 사라져도 조선이란 국가에 살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겪은 고통의 한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후예들은 아직도 이 땅에서 숨을 쉬고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아직 40년도 되지 않은 광주의 아픔은 오죽하랴?

 

당시 그 잔혹한 기억을 평생 상처로 안은 자들이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절규에 탄식한다. 그들은 지난 기억을 떠오르는 것이 고통스러워하나,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그 사실이 잊혀 진다는 점이다. 고통의 순간을 간직하여 마음속 깊이 침묵으로 살아갈 수 있지만, 그 침묵의 깊이만큼 삶에 짊어지는 아픔은 더욱 깊어만 간다. 인간은 한에 맺히면 죽을 때 두 눈조차 감지 못한다. 얼굴 표정은 모든 짊을 내리고 간 것처럼 잠을 자는 게 아니라, 원한과 분노로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 삶을 마무리한다.

 

그 표정을 보는 사람들의 슬픔이란, 그 표정을 잊을 수 없는 가족의 상처는 어떻게 그 원한을 토로할 수 있을까? 신이란 과연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이들의 깊은 원한을 왜 겪어야만 하는 것일까? 운명의 장난인지 아니면 피할 수 없는 숙명인지 알 수 없다. 사람이 하는 행동은 사람의 의지겠지만, 그것이 정하는 것은 하늘의 뜻인 것인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은 518의 슬픔을 담은 책이다. 1980517일 계엄이 발동되고, 전국은 군부독재의 통제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맞이한다.

 

다른 곳은 몰라도 왜 광주인가? 지금도 전국을 돌아보면 가장 낙후된 지역을 찾아보라고 하면 강원도와 전남지역이다. 강원도는 산이 많고 군사보호구역이 많지만, 전남은 개발 자체가 안 되고, 목포와 부산을 비교하여 부산이 거리가 더 멀지만, 부산은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가 한국의 중심 교통이 되어 있다. 전남지역 21세기 초반까지 개발이 거의 덜 되어 있고, 인구도 많지 않다. 1980년대를 생각한다면 고속도로나 철도 등과 같은 교통, 전기, 통신 등 기본적 인프라가 부족한 지역이 바로 전남지역이다.

 

서울과 주변지역에서 군부독재를 저항하는 시위가 어느 순간 위축되었지만, 전남지역은 그렇지 못했다. 소식이 제대로 전해되지 않았고, 그 덕분에 광주에서 저항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군인들의 비중도 전남지방보단 타 지방이 더 많은 것은 당연하다. 만일 광주출신 군인이라면 당연히 광주시민이 폭도가 아니라 이래저래 아는 사람일 것이다. 광주의 비극은 군부독재가 바라던 권력에 의해 희생된 지역이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518 이전부터 한국근현대사를 정리하면서 부마항쟁과 1212사태 과정을 다룬다.

 

하나회라는 군대 내 사조직은 군사행정을 국방의 의무가 아니라 사익을 추구하기 만들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육사출신 장교가 주축이 되었다. 게다가 이들은 박정희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육사 내에도 이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세력을 계속 키웠다. 전방에 위치한 20사단 병력을 국토방위가 아니라 권력을 위한 총을 사용했고, 그들은 광주시민을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반국가세력으로 지정하고 무참하게 학살했다.

 

아직도 518에 대한 왜곡이 끊이지 않고 있다. 최근 미국 국방부 및 외교부에서 생산된 비밀문서의 보안조치가 완료되면서 그 암울한 역사의 비극이 다시 재조명되고 있다. 미국은 북한이 광주에 침투하지 않은 것을 알았고, 광주시민이 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져 가고 있을 때 수수방관했다. 오히려 북한에게 한국 상황에 개입하지 말라는 의미로 한국 영해에 병력을 배치하여 전두환 군부세력을 옹호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우방 국가이지 민주주의 정신을 공유하는 국가는 아니다.

 

이런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518에 일어난 잔혹한 학살이 결국 독재세력이 저지른 죄악임을 다시금 확인된다. 그런 점에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개정판은 의미가 깊다. 광주의 비극이 1980년으로 끝나지 않았다. 계엄군에 저항하거나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다시 잡혀가서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평생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했다. 그래도 그 기억은 사라지면 안 되는 것이다. 책은 당시 존재했던 사람들의 진술을 비롯하여 외신기자가 촬영한 사진, 군사자료를 찾아내어 1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518일부터 도청이 함락되던 27일까지 말이다. 읽으면서 정말 끔찍한 사건임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M16 소총을 군부에 저항하던 광주시민만 아니라 길가에 서 있는 어린아이와 임산부에게 사격했고, 여학생들의 가슴부분을 도려내기도 했다. 자신들끼리 오인사격으로 타격을 입자, 화풀이로 주변마을에 가서 마을청년들을 학살했다. 길거리에 7세 어린아이가 주검으로 변한 채 쓰러져 있었다.

 

거리에 무참히 쓰러진 시신을 가져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사격했고, 죽은 사람에게 칼을 다시 찔려 확인사살을 했다. 게다가 시체를 제대로 묻어주거나 가족에게 인계해주지 않고 암매장을 했다. 5월 말이며 초여름이 시작되니,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하고, 날이 어느 정도 지나면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시신이 훼손된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영원히 헤매는 영혼을 생각하자니 참으로 애석했다. 설사 시신을 인수해도 문제다. 대부분 20~30대 청년들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그들의 장례식을 치루기 위해 상주가 되어야 했던 이들은 아직 얼굴의 젖살이 빠지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멍하니 앉아있던 어린아이의 표정, 자신의 아들이 담긴 관을 잡고 통곡을 하는 노모, 그 장면을 보면서 분노와 슬픔을 참지 못해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들, 절망의 시간은 이들의 운명의 뿌리를 모조리 뽑아 버렸다. 이런 죄를 짓고도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뻔뻔한 얼굴을 들고 다니고 있으며, 과거 자신이 저지른 죄가 두려워 그의 아이들에게 재앙이 갈까봐 종교에 빠진 사람도 있다고 한다.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들을 용서할까?

 

그런 죄를 용서해주는 신이라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처럼 신은 죽었다라고 외쳐도 좋다. 신이 절대적 선의 기준이 된다면, 그건 신이 아니라 악마가 신이란 탈을 쓰고 군림하고 있을 뿐이다. 518의 기록은 세계 문화유산 UNESCO에 등재되었다.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여 자유라는 이름을 건진 값진 가치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인간의 피를 빨아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인간을 억압하여 피를 흘리게 만드는 전체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조차 피가 필요하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다시 이런 피가 흘리지 않도록 518의 기록은 계속 기억되고 전수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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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지고 삶에 이긴 사람들
송광룡 지음, 이종국 사진 / 풀빛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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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내 블로그에 어느 누가 나의 포스팅에 덧글을 적었다. 나는 답글을 주지 않았으나, 주요요지는 조선 학자군주 정조의 죽음에 대해 독살설이 정식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이덕일 작가의 서적인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지 않았으나, 보지 않아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 덧글을 보는 순간 나는 굳이 답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필요가 없다면 왜 없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말해야 하고, 정조의 죽음이 최근 심환지와 정조의 편지가 공개되었다고 해서 정조독살설 자체가 부정되는 것도 그렇지 못할 것이다.

 

당시 노론 벽파와 남인 시파의 대립에서 채제공의 죽음 이후 정조의 죽음은 1801년 신유사옥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노론 벽파 영수 심환지가 정조하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래저래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것은 오랫동안 같이 왕과 신하이라도, 정조는 심환지보다 채제공을 더욱 신뢰했다. 어찰을 주고받으며 예의가 없는 농담을 건네도 그것 자체가 독살설과 멀다고 하는 것이 수상하다. 독살설이란 것은 반드시 독약을 넣어 죽이는 것만은 아니다. 한의학자들이 정조의 죽음을 두고 어의 처방을 보니, 술을 많이 마시고 스트레스가 심했다고 한다.

 

한국 남자 대부분인 스트레스와 과음으로 간암과 위암으로 고생하여 죽는 것은 맞으나, 정조의 죽음 등창으로 인한 패혈증 증세로 사망한다. 패혈증이란 인간의 혈액으로 세균이 침투하여 혈액이 부패하여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하는 증세이다. 등창은 피부에 난 화농성 세균인데, 당시 집도한 어의가 침을 잘못 놓아 등창부위가 터지고, 침이 들어간 자리가 신체 내부로 들어가면 등창을 일으킨 세균이 패혈증 감염증세로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 바른 것이다. 독살이라 하여 뭐든지 약 안에 비산이나 독약을 넣는 것이 아니다(이것은 역사학도 아닌 기본적으로 미생물학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의심하고도 남는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처방받은 약은 다른 각도로 보면 독이다. 하다못해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조절을 위해 약을 처방하는데, 고혈압증세 환자에게 처방전으로 교감신경을 자극하는 약을 주며 심장쇼크를 일으킬 수 있고, 저혈압 환자에게 안정제를 처방하면 심장이 약하게 뛰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약이란 그런 것이다. 등창에 걸리면 몸에 열이 오르는데, 사람 몸에 열을 올리는 인삼을 처방한 점에서 독살설의 의문을 풀 수가 없다. 게다가 어의가 손을 떨거나 보통 의사 같이 아니하다면 의심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임금을 진찰한 어의가 진료도중 임금이 죽으면 국문을 받지만, 그런 과정도 생략된 점에서 정조독살설을 부정하는 가설은 부당하며, 이런 과정을 역사학계 시각이란 말도 웃긴다. 한국사학계에서 대부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이병도로 시작하고, 이병도는 이완용의 후손이다. 을사오적의 후손이 한국역사학의 시초이고, 역사학 강의시간에 외부초빙강사로 일제강점기 조선사를 연구하고, 이병도 세력에 강의를 가르친 자를 데리고 오는 것을 본다면 어느 것이 더 상식적으로 다가가야할지 망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째든 본래 책과는 다른 방식으로 서두를 장식했으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저술한 이덕일의 글을 오늘 우연히 보았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 조선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에 다산 정약용 선생을 손꼽는다. 그가 다산초당에서 머물러 큰 학업을 남길 때, 정약용의 형님인 정약전이 흑산도에 남아 <자산어보>를 남길 때, 또 다른 형님인 정약종이 순교하여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성인으로 남았을 때 그들은 과연 그것을 원해서 그 위치에 올라갔냐는 말이다. 결국 그들은 권력자에 의해 강제로 현실세계에서 버려진 유학자이었다. 그들이 버려진 이유는 단 1가지이다.

 

기존 사회체계를 부정했고, 그 사회체계란 권력자들의 이권이 보장되고, 힘없는 백성들은 고통 받으며 괴로워하던 세계이다. 조선시대 사대부와 일반 백성은 계급에 따라 큰 차이점은 있으나, 최소한 백성들이 편안한 생활을 영위해야 하는 것이 공자의 유학사상이다. 그러나 조선의 유학은 성리학만 쫓고, 글자 하나 토씨에 의문을 가지면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음을 면치 못한다. 물론 사문난적이란 핑계에 불과하다. 그 모든 것은 권력의 다툼이다. 세상을 바꾸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권력의 이름으로 행세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움직일 수 없다. 잘못된 정책을 바꾸려면 그 정책을 바꿀 수 있는 위치가 되어야 했다.

 

조선에서 그런 도전을 하는 자에게 끊임없는 죽음과 멸문만이 도살아 있었다. <역사에 지고 삶에 이긴 사람들>을 보면 양산보로 통한 기묘사화부터 시작한다. 기묘사회로 정암 조광조 사림세력이 큰 화를 당한다. 화를 당한 사대부들은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를 떠나간다. 그리고 대부분 가세가 기울여 향반으로 농사를 짓기도 한다. 따라서 사족 중에도 개혁사상 내지 실학자, 왕도정치를 추구하던 세력은 늘 어둠에 가려져 있거나, 혹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숨어 있어야 했다. 바른 말을 하는 순간 화가 뿌리까지 미치는 일이 허다했다.

 

<역사에 지고 삶에 이긴 사람들>에 소개된 인물 대부분이 권력에 저항하거나 혹은 권력의 화를 피해 살다 간 사람들이다. 이덕일 작가가 논한 것처럼 조선의 선비 중에 그렇게 훌륭한 자들이 많았고, 그들은 후세 사람들에게 기억된다. 하지만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누구이고, 그들은 어떤 짓을 했는 가이다. 이 책은 주된 배경은 전라도 지역이다. 전라도 지역은 20세기에 많은 아픔이 있다. ·순 반란사건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되고, 광주518 같은 경우 지금 다시 보니 학살극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20세기 한국, 그 이전인 조선에서 전라도 역시 아픔이 많았다. 전라도는 경상도와 달리 알려진 인물이 많이 없다. 성호사설에서 낙동강 위로는 퇴계 이황, 아래로는 남명 조식이란 선비가 있었다. 전라도에 이름난 학자가 드러나기 어려운 이유는 1589년 일어난 기축옥사 때문이다. 이른바 정여립 반역사건은 그 출처와 배경 그리고 전후과정이 명백하지 못하나, 천 명에 가까운 호남의 사대부들이 화를 당했다. 당시 인구가 지금보다 101이고, 사대부는 전체 인구의 10%도 안 되는 점을 고려하면 엄청난 사건이다.

 

호남은 유배의 지역이며, 왜구가 항상 침탈하는 곳이다. 변방의 세계이고, 가난한 선비가 많이 살았다. 조선의 마지막 선비인 매산 황현의 죽음이 서글프게 흐르는 곳 역시 호남이다. 유배지에서 서글프게 노래를 부른 인물로 고산 윤선도가 있고, 유배지에서 모든 것을 초월한 다산 정약용이 있다. 죽은 뒤에도 자신의 서원이 계속 만들어지고 없어지는 것을 겪은 정개청의 원한이 있다. 이들은 모두 권력 앞에서 변방의 공간에 떠돌거나 죽음을 맞이했다.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면 이들은 우리가 늘 우리 스스로 부정한 헬조선의 세계를 조금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하지만 이들을 내몰았던 당시 권력자들을 보면 헬조선의 어원은 쉽게 사라질 수 없는 모양이다. 헬조선에 의해 희생된 그들의 인생을 두고 우리는 학회연구도서나 혹은 위인도서에서 볼 수 있다. 역사에서 패배자인 그들이 결국 삶을 초월한 세계에서 당당히 승리했다. 이들을 억압한 권력자들은 수백 내지 수천 명일 텐데, 그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피해자의 이름은 나와 명예가 회복해도 가해자의 이름이 나와 죄악을 다시 묻지 않으니, 지금도 계속 그 비극이 되풀이 되는 게 아닌가? 20세기의 대한민국은 일제의 침략, 한국전쟁, 군부독재 등과 같은 혼돈의 시기를 보냈다. 그 어둠의 시기에 작은 빛줄기를 찾아 떠난 자들은 깊은 어둠속에 침몰해 영원히 떠오르지 못할 치욕의 날을 보냈다.

 

권력에 의해 당시 역사에서는 패배한 것이다. 물론 당시의 역사는 패배해도, 미래의 역사에서는 승자가 된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이 승자로 오르는 과정을 보면 슬프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패배자는 명예가 실추되고, 부끄러움을 참아야 하는 자들은 패배자들의 후예들이다. 최근 독립군 후예들이 가난에서 벗어나 제대로 보장된 생활을 찾을 수 있다고 해서 다행인 것 같다. 피해자로 살아온 그들은 가해자들의 보복이 두려워 늘 어둠의 그늘 속에서 숨었다. 이들의 소원함이 풀어지는 순간 책 제목처럼 <역사에 지고 삶에 이긴 사람들>로 승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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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31 23: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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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1 08: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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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10일간의 야전병원 - 전남대학교병원 5.18민주화운동 의료활동집
노성만 외 29명 지음 / 전남대학교병원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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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슬프고 화가 나고 무서웠던 책은 그다지 많지 않았던 같았다. 책은 글이란 문자로 되어 있기에 그리고 눈으로 읽기에 이성적 판단 아래 내용을 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 읽은 <5.18 10일간의 야전병원 - 전남대학교병원 5.18민주화운동 의료활동집>은 정말 심각했다. 19805월 광주의 봄은 여전한 늦은 봄바람을 맞이했지만, 그 봄바람은 어느 순간 피바람으로 불어왔다. 518일 계엄군의 군화발이 광주시내로 들어오면서 광주시는 광주시민이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지옥의 아수라가 펼쳐졌다.

 

광주민주화항쟁 내지 광주사태 등 여러 말이 있지만, 거의 학살에 가까운 참극이었다. 예전에 다른 책을 보니 전두환 군부세력이 계엄령 발령과 동시에 저항세력을 진압하기 위한 충정훈련을 했다고 한다. 훈련에 투입된 사병은 모르나, 위관 이상의 영관급 장교, 부사관은 상사급 이상은 대부분 월남전에 투입된 살인기계였다. 베트남전쟁에서 이데올로기적 갈등이라고 해도 베트남 민간인에 대한 학살, 한국군이 도중에 받은 고엽제 후유증은 아직도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있다.

 

베트남전쟁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총에 맞고 칼에 맞고, 폭탄에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나가고, 고엽제로 시달려 이름 모를 병에 죽어갔다. 인간이 만든 전쟁은 역사의 큰 획이 되나, 그 획에 동원된 인간은 그저 비참한 죽음과 조우해야 했다. 베트남전쟁은 1970년대로 끝난 게 아니다. 전쟁에서 배운 기술이나 전쟁에서 느낀 피의 전율은 여전히 폭력의 미학으로 이끌어 내었다. 안 그러면 그렇게 잔혹하게 광주시민을 학살할 수 있겠는가?

 

버스에 사격하고, 농촌 저수지에서 물놀이하는 어린아이에게도 조준사격을 한다. 심지어 길에 서있는 임산부의 머리까지 노리니,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지옥은 인간이 살아있는 한 갈 수 없겠지만, 518이 일어난 그날부터 열흘 동안 광주는 지옥이었다. 사람이 죽게 되면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다. 심장과 폐, 그리고 간과 뇌에 총알이 뚫고 지나가면 금방 출혈사로 죽고 만다. 하지만 운이 좋다면 응급처치 후 치료를 제때 받을 수 있다면 살아남을 수 있다.

 

<5.18 10일간의 야전병원 - 전남대학교병원 5.18민주화운동 의료활동집>은 바로 518 그 참혹함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전남대학교 의료진들의 이야기이다. 당시 의료진들은 일부 진료과장 교수를 제외하면 레지던트, 인턴 등이 집도하였고, 간호사들도 의사와 같이 쪽잠을 자며,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다른 518 관련도서를 봐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사실이나, 이 책에서 더 심한 분노가 오는 이유는 병원에 오는 사람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이나, 안타까운 죽음을 계속 목도해야 한다는 점이다.

 

응급실을 지키던 의료진은 처음에 곤봉과 개머리판에 가격당한 광주시민만 만난다. 그들은 두부가 손상되거나 얼굴 안면을 다쳐, 외과처치를 하고 안정만 취하면 충분히 치료될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잔혹한 일도 마주한다. 어느 여학생은 계엄군의 총에 장착된 칼에 찔려 가슴부위를 다치고, 누구는 쓰러진 상태에서 군화에 차여 안구가 손상되었다. 제일 심각한 것은 21일이다. 도청 앞에 몰린 시민들을 향하여 집단사격이 시작되었다. 3일째 병원은 전시상황과 맞먹을 정도로 비상사태였다. 총에 맞은 사람은 도착할 쯤 이미 사망했고, 치료를 하기 위해 상태를 확인하니 총알이 복부를 통과하여 장기가 엄청 상했다.

 

계엄군의 총은 어린아이도 피하지 못했다. 5살 아이가 총상으로 다치고, 어머니와 같이 차를 타고 가던 아이는 총을 맞고 평생 휠체어에 의존해야 했다. 복무의 장기들이 다 보일 정도로 다친 학생, 총알이 눈을 스치고 가서 한쪽을 잃어도 다른 눈을 치료받으면 볼 수 있다며 털털하게 웃는 사람들, 이들을 위해 헌혈을 해주고, 밥과 음식을 날려주던 광주시민들, 이 급박한 상황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 수술을 해도 출혈쇼크사, 패혈증, 후유증으로 눈을 감은 사람들, 살아남아도 평생 몸과 마음의 흉터를 지니고 살아야 했던 그들, 37년이 지나도 그 당시 의료진과 연락을 하던 광주시민은 많았다.

 

군대에서 전쟁에 관한 규칙을 배울 때 최소한 병원에 폭격을 가하면 안 되는 것으로 배웠다. 병원을 공격하는 것은 인도주의적 원칙에 어긋나고, 그것 인간이 해야 할 짓이 아니다. 그런데도 계엄군들은 병원을 향하여 사격을 가했고, 심지어 최루탄까지 발사했다. 최루탄이 군사훈련용과 진압용은 다르다. 심폐가 손상된 환자나, 호흡기 부위가 다친 환자에게 치명적인 위험이기 때문이다.

 

518의 폭풍이 지나간 뒤 추후 경찰과 검찰, 군대에서 나온 사람들이 병원을 다시 찾아올 때 그들의 야만성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시신을 검사하는 장면에서 과연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일까? 계엄군 사이에도 서로 충돌이 있었다. 계엄군이 소속이 다른 부대를 보고 시민군으로 오인하여 사격을 가했고, 이 일로 계엄군 사망자 60% 발생했다. 자신들의 실수인데 화가 난 그들은 인근 마을에 찾아가 화풀이로 마을주민에게 사격했다. 탱크가 움직일 때 실수로 옆에 있던 사병을 깔아뭉개 죽였다.

 

518사이트에 가서 사망자 중에 민간인 이외에도 경찰, 군인이 있던 이유는 아마 그럴 것이다. 광기와 폭력으로 죄 없는 광주시민을 죽인 것도 모자라 광기가 폭발하여 계엄군끼리도 죽인 것이다. 어떻게 같은 민족이 그렇게 해를 가할 수 있단 말인가? 예전에 광주 망월동묘지에 가서 기념관을 관람했다. 그렇게 희생된 사람을 아직까지 비웃고 조롱하여 광주의 영혼을 왜곡하는 자를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었다.

 

책을 읽은 내가 그런 생각을 할 정도면, 그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얼마나 심한 고통을 받았을까? 억울한 죽음을 목격하고도 그 사실을 제대로 말할 수 없었던 오욕의 기억, 인간이 가장 괴로운 일들은 감추는 게 아니라 드러내야지 치료할 수 있다. 하지만 드러내는 것조차 힘든 세상이었다. 2017518, 광주518 37주년 행사는 참으로 특별했다. 1980518일에 태어난 한 여성은 그날 자신의 아버지를 잃었다. 자신이 태어났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라 여기던 그 고통은 참으로 마음이 아팠다.

 

인간이 태어나면 언젠가는 그 천수가 다해 이 세상을 떠나 새로운 여정을 떠난다. 그 여정은 어떤 곳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살아있는 그 시간만큼은 행복을 위해 살아갈 의무와 권리가 있다. 만일 옆에 소중한 사람이 허무하게 억울하게 사라진다면 정말 불쌍한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난 자가 아니라 그 떠난 자를 보내야 하던 사람이다. 그들에게 남은 생이란 오직 슬픔과 분노, 고통과 절망일 것이다. 슬프고 아픈 일을 겪고도 슬프다 아프다.”라는 말조차 외치지 못한 그들을 위로해주는 것은 그날의 상처를 다시 처음부터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마지막으로 느낀 점은 우리나라의 의술(醫術)은 서울권역의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이 가장 최고일 것이다. 그러나 의술(義術)은 전남대학교병원이 가장 최고일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의료기술을 가진 의료인들이 모여도 그들이 펼치는 의료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부와 권력일 것이다. 양심과 인륜이 없는 의술은 존경심을 받지 못한다. 총알이 날아오고, 죽음의 경계에서 희망을 다시 찾아준 전남대학교 의료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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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9 22: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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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30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의 백과사전을 읽는다 - 오래된 지식의 숲, 이수광의 지봉유설
이철 지음 / 알마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조선의 성리학자, 즉 유학자들은 정치를 하고 철학을 하며, 문화와 문물을 연구하고 널리 알리는 자들이다. 양반 사대부들의 문화와 역사가 대한민국의 역사가 된 점에서 그들을 연구하는 것은 한국학을 연구하는 원류라고 볼 수 있다. 조선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 참으로 기구하다. 한국학을 들여다보면 조상들의 슬기로운 모습도 보나, 주로 마지막 순간을 놓칠 수 없다. 그것이 좋았는지 아니면 나쁜지를 평가하기란 참으로 난해하다. 무조건 좋다면 어리석은 역사를 되풀이하고, 무조건 나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과연 어디서 시작된 부류란 말인가?

 

양반이 중심이 된 사족사회, 그러나 양반 그 자체를 연구하지 않으면 조선은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조선의 주요한 기록은 대부분 양반 중심 지식계층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대부분 한자어로 되어 있고, 한글로 된 기록은 드물다. 한자를 사용하기란 어렵다. 일반 백성은 한자어를 몰라 지식에 대한 권리를 누릴 수가 없다. 언어의 기능에서 문자를 아는 것, 즉 지식을 독점하는 것은 권력을 독점하는 것과 같다. 사대부의 독과점한 지식이 결국 우리가 아는 조선의 모습을 복원한다.

 

양반 중심이던 기록문화라고 해도, 그 중에서도 일반적인 사회상을 담은 자들도 더러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이며,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같은 경우 해양문학으로 가치가 높다. 게다가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기록한 내용들은 조선후기 민중의 현실을 잘 알려주는 사료가 되어주었다. 양반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 혹은 어떤 이야기들을 모은 것을 사설(僿說) 내지 유설(類說)이라 한다.

 

조선의 백과사전이라고 불릴 수 있는 대표서적으로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도 있으나, 그 이전에 이수광의 <지봉유설>이 있다. 이수광이란 이름을 사람은 들은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모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지봉유설>이란 책은 교과서 어느 한 단락에 있을 법한 책이므로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이수광은 전주이씨로 태종대왕 아들 경녕군 비의 후손이다. 본래 왕 내지 왕자의 후손은 일정한 직위를 주고, 과거를 보지 못하나, 그 세대가 지나면 다시금 볼 수 있다. 이수광은 명재이나, 다른 인물에 의해 그 명성이 상당히 가려진 인물이다.

 

이수광은 명종 후반에 태어나 인조가 집권 후 정묘호란을 맞이한 해에 사망했다. 명종은 중종부터 대윤과 소윤으로 갈라져 당파싸움이 심했고, 특히나 명종의 어머니 문정황후는 정사에 깊이 관여하여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선조에 이르자 기축옥사가 일어나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까지 겹친다. 조선의 명유들이 가장 많이 집결한 시기는 아마 중종 기묘사화 전후와 선조 임진왜란 전후일 것이다. 조광조와 신진사림들이 화를 당한 기묘사화 이후로 훈구세력이 집권하다 중종 말부터 사림이 기용되나 여전히 외척이 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선조가 보위에 오르자, 사림조차 동서 양당으로 나누어지고, 기축옥사 이후로 동인이 북인과 남인이 갈려졌다. 이수광의 이름이 가려진 이유는 우선 동고 이준경이 동인의 거두였고, 이준경의 뜻을 이은 오리 이원익은 남인의 명재상이었으며, 남인 신료에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같은 인물이 있었다. 이수광 역시 시와 문학에 능했고, 글을 잘 적어 중국에서도 인정받는다. 이런 이수광이 한국역사 즉 조선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오른 것은 바로 <지봉유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실학자를 떠오른다면 먼저 다산 정약용,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등이 있으며, 그 이전에 성호 이익이 있을 것이다. 성호 이익은 남인에 속하며, 그의 형 옥동 이서는 동국진체를 만들어내던 서예가이고, 이익과 이서의 친구로 공재 윤두서가 있었다. 공재 윤두서의 아내는 이수광의 증손녀이다. 당파에서 신권을 중시하는 서인과 달리 왕권을 중시하는 남인이기에 전주이씨 사대부들은 남인계열 사족과 혼인관계를 맺은 것은 당연하다. 대표적인 사건은 숙종 시기 김우명의 무고이다. 김우명은 서인계열이고, 김우명이 제거하고자 한 사람은 복창군, 복평군, 복성군으로 인평대군의 아들, 인조의 손자이다.

 

이들은 숙종에게 종숙(5촌 당숙)이며, 학문이 높은 왕족이고, 청렴하고 업무도 잘 보고 하여 큰일을 잘 맡았다. 문제는 이들은 남인과 친했고,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는 아버지 김우명의 무고를 덮고 싶어, 신하와 회의하고 있던 숙종에게 찾아가서 아버지를 살려달라 하여 결국 숙종은 아버지의 사촌들을 귀양 보내고 사약까지 내렸다. 이 일로 남인과 소론계열 유학자들은 그 당시는 물론이고, 숙종 사후까지 손가락질을 하였다. 조선의 정치역사에서 이수광의 <지봉유설>이 남인으로 연결되는 이유는 바로 이로하다.

 

물론 <지봉유설>에서도 과거의 문제를 지적했다. <성호사설>에서도 가장 필요한 인간 중에 하나가 과거로 소일거리를 하는 양반이고, 이들은 옳은 정신으로 벼슬을 하는 게 아니라 대필 내지 뇌물로 자리를 얻고, 자신이 투자한 것만큼 이상으로 백성의 피와 눈물을 흘리게 한다는 점이다. 이수광은 매우 청빈한 선비였고, 국가를 걱정하는 관료였다. 임진왜란 당시 대부분 이순신과 유성룡만 기억하나, 이수광도 외교문제로 명나라에 가고, 왜적과 싸우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갔다.

 

게다가 과거 억울한 일이 있던 자들의 한을 기록도 했다. 예전에 어떤 귀여운 여자아이가 주인 배게 속에 시체의 손을 넣게 하여 주인을 병에 걸리게 하게 했다. 조선시대 무고로 상대 진영의 관료를 반역죄로 죽이면, 그 집안의 남자들은 귀양지로 가거나 혹은 참수되었고, 여자들은 모두 노비가 되어 공신의 재산이 되었다. 명종 을사사화로 화를 당한 유관은 평소 밑에 사람에게 자애롭고, 부정부패 고관에게 비판적으로 대했다. 그것이 화가 되어 죽음을 면치 못했다. 이때 유관의 식솔이 억울하게 종살이 하게 되자, 유관의 여종이 주인을 위해 복수하여 원수 집안의 식솔 8명을 죽게 만들었다.

 

물론 발각되어 죽음을 당했지만, 그 기상을 고귀하게 여겼다. 책에서는 1970년대 아파트 재건축 여종의 무덤을 이장하여 유관의 묘와 같이 합장했다고 한다. 21세기는 민주주의 국가이나, 조상에 대한 예의는 조선의 얼이 남아있다. 피를 나누지 않으나, 의를 보여준 그 어린 여종은 문화유씨 문중에서 500년 동안 제사상을 받은 것이다. 인간의 귀천을 다루는 것은 태어난 신분보다는 그()가 보여준 인생의 관록이라 볼 것이다. <지봉유설>에 이런 야사만 아니라 임진왜란 시기에 고난을 겪은 백성의 고통을 기록했다.

 

외국인의 모습과 복장, 그리고 그들의 언어도 기록하고, 식물과 동물, 지리까지 다양하게 기록했다. 다소 유학자란 신분이 있기에 한계성은 있지만, 남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까지 기록하여 전수한 것이다. 그런 업적이 있기에 녹우당 공재 윤두서에게 그 영향이 미쳤고, 실학자 대부분이 권력에서 박탈된 남인계열인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향촌 사족들은 그 지역의 주인이 되어 호령을 하고, 지방에 내려온 현감이나 현령조차 감히 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방의 향반들은 권력에 물러나 향촌에서 성리학만 잡는 게 아니라 의학, 복서, 천문, 수학 등 다양한 학문을 연구했다.

 

실학을 연구하면 벼슬자리를 노리는 게 아니라 실생활을 풍족하게 만든다. 윤두서의 조상인 윤선도 역시 의학을 잘 알아 집안에 약방을 따로 만들어 약을 처방해준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잡학(雜學)이란 언제나 천대받고 무시당하기 마련이다. 지금도 직업에 따라 사람들이 업신여기는 일들이 종종 보이는 세상이다. 사농공상(士農工商), 위에서 펜이나 잡고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실태는 여전하다. 공자가 말한 선비 사족들은 농사를 짓는 자를 위해 그 소임을 당하는 자들이다.

 

물론 지금은 상사농공(商士農工)이다. 정경유착이 있기에 많은 국민들이 매일 땀 흘리며 살아가도 삶이 힘들 수밖에 없다. <지봉유설>의 중요한 점은 한국천주교회사와 연계성이다. 한국은 외국의 신부가 들어오지 않고 자생적으로 천주교의 문화유산이 뿌리내린 곳이다. 자연스레 들어올 수 있던 이유는 천주교가 서학으로 불리며, 과학기술적 요소 즉 실학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면서부터이다.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중국에 들어온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천주실의>가 그 발원점이다. 최초로 천주실의를 연구한 학자는 성호 이익이고, 그가 남인의 정신적 지주인 점에서 남인 성호학파 급진파는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최초로 조선에서 <천주실의>란 책이 소개된 것은 어디인가? 바로 <지봉유설>이다. 천주실의에 대한 자세한 검토내용은 없으나. 천주실의란 도서가 있고, 그것이 서구에서 왔다는 점을 알리는 것으로 <지봉유설>은 신문물에 대한 안내도서가 되었다. 세상은 변화하고, 인간 역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변화한다. 자신의 삶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게 아니나, 권력을 가진 자에게 현상유지가 목표인 점에서 새로운 문물을 도입하는 것은 기존 체계의 근원을 흔들 수 있는 위협이 된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은 국가정치 기반을 흔들지는 않으나, 조선 지식인에게 새로운 파장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우물이 자신의 세계이나, 우물을 벗어나면 이 우물의 수원이 저 산에서 내려온 지하수인 점을 깨닫고, 더 나아가 저 산에서 내려온 물은 자기 우물만 아니라 여러 우물에 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성리학은 자기 안의 세계를 넓게 확장하여 찾아갔지만, 막상 현실의 세계는 한계였다. 그래도 적어도 우리가 그 시절의 이야기를 알 수 있는 것은 이런 자료들이다.

 

21세기 한국은 조선은 아니나, 여전히 조선의 역사는 지리적으로 남아있다. 서울이 수도인 것은 한양이 수도였고, 지리에서도 지하철명 역시 조선의 지리에서 그대로 이어간다. 경부고속도로가 추풍령을 넘어가나, 사실 추풍령 고개는 영남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걸어가던 자리이다. 지리도 그러하고 음식은 더욱 그렇다. 한국인이 즐겨먹는 술로 소주와 막걸리가 있다. 이 역시 오래된 우리의 문화에서 비록 되었고 조선의 음식이다. 그 기원과 흐름을 안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이어져 가고 있는 것을 말한다.

 

세계화와 탈근대시대의 세계문화에서 더 이상 우리는 서양의 것에 의존할 수 없다. 이야기 거리와 전통적인 가치는 결국 새로운 상품과 문화자산이 된다. 유네스코에서 정한 문화유산을 보면 우리가 그동안 눈을 돌린 것들이 참 많다. 그런 것들을 지키는 것은 당연하나, 거기에 모든 가치를 부여하기 보다는 그저 이런 것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여전히 한국은 유교가 오면 조선의 유교가 아니라, 공자의 유학이 되고, 불교가 오면 조선의 불교가 아니라 석가의 조선이 된다. <지봉유설>은 단순히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거기에 대한 저자의 관점과 생각이 들어있다. 똑같은 이야기를 들고 와서 다시 보여주면 의미가 없다. 거기서 새롭게 각색해야 새로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걸 위해서는 우리가 스스로 돌아보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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