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의 행태가 심심치 않은 양상을 보여준다. 과거의 잘못된 일들을 사과하고 풀어나가기 보다는 오히려 은폐하고 부정하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전번 정권에서 가장 치욕적인 외교전략 중에 하나가 일본군성노예로 학대받은 그분들에 대한 처우이다. 100억에 국가와 민족의 자존심을 팔아먹는 현실에서 많은 갈등을 빚었다. 그리고 그런 처우를 하던 인간들만 모이다보니 과거에 일어난 비참한 역사를 드러내기보단 오히려 감추려고 노력했다. 일본군이 과거 촬영한 사진 중에 위안부에 끌려간 여성의 사진이 있었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그녀들을 유린하고 밟는 것도 모자라 끔찍하게 살해한 기록이 사진으로 나온 기사를 보았다.

 

예전에 그런 사진을 찾았지만, 국가에서 예산을 반영해주지 않고 그런 사진을 드러내는 것을 원하지 않아 수면 아래 감추었지만, 후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람을 끔찍하게 살해하고 그 시신을 땅에 매장하는 사진이 세상에 나오자 UN에 간 일본 외교성 직원은 그것은 자신들의 과거가 저지른 죄가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최근 일본에서 이런 관점을 정치권과 언론, 심지어 교육계까지 침투했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일본 유치원 교육방식을 보는데, 순간 소름이 돋았다. 독도를 자기들 것이란 점, 중국과 한국이 일본을 왜 미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점, 게다가 일본 천황의 신위에 계속 참배하도록 하는 방안이다.

 

일본에서 최근 법안개정 중에서 정부의 정치적 색과 맞지 않거나 그런 기미가 보일 경우 그 일본국민을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악법을 준비한다는 기사를 봤다. 이미 아베 총리의 조상이 일본전범 A급이란 점, 그가 전형적 극우성향 정치인이란 점에서 일본의 형태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로 다시 회귀하는 무리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조류에서 역사는 아주 중요한 전략이다. 역사는 교육이기도 하나, 역사 그 자체가 그 나라의 국민을 대변하는 하나의 이야기들이다. 역사라는 이야기 거리는 교육만이 아니라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소설, 드라마 등 다양한 콘텐츠로 쏟아 나오는 것이다.

 

일본 청소년이나 청년들은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 그 중에 좋아하는 장르는 당연히 전쟁이나 전투 장르이고, 전쟁 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국시대를 좋아한다. 오다 노부나가를 비롯한 아케치 미츠히데, 다케다 신켄 등 같은 영주 군도 있지만, 제일 중요한 인물로 보자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쓰 같은 인물이다. 임진왜란 전후와 일본 내 세키가하라 전투는 일본역사에서 에도시대를 열게 된 관문이었다. 문제는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존재성이다. 히데요시 일족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로 모조리 섬멸시켰다.

 

그가 일본 전국을 통일한 점에서 대단한 인물이나, 그의 모습은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에서는 상당히 미화되어 있다. 특히나 전국무쌍에서 보여준 히데요시는 천하인(天下人)로 묘사고, 그의 정부인 네네는 상당히 포용성이 높은 여성으로 보여준다. 역사적 사료에서는 전혀 다르나 게임과 애니메이션이란 콘텐츠는 그러하다. 이게 문제가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한국사회를 두고 말하자면 칭호는 참으로 많다. 하지만 이것만은 그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바로 드라마천국이다. 한국사회에서 드라마는 모든 대중들의 공통관심사이고, 월화 내지 수목, 주말드라마의 흥행은 한국사회에 늘 새로운 신드롬을 안겨준다.

 

드라마 장르에서 한국역사를 소재로 한 사극 역시 많이 등장한다. 예전에 인상 깊게 본 드라마 중에 <불멸의 이순신>이란 작품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드라마로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사실적 역사자료를 토대로 이야기를 붙인 것이다. 그러나 막상 보면 조금 다른 내용들이 종종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순신과 원균을 어린 시절 만난 적이 없고, 또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원균이 보여준 모습은 상당히 무인 그자체로 묘사한다. 남자답고 거칠게 없는 자로 말이다. 원균을 바라본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가 실제로 선조 후기 임진왜란 공신목록에서 선무원종공신록권(武原從功臣錄券)에서 이순신과 권율과 함께 1위로 책정되어 있다.

 

원균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불멸의 이순신>을 보면 그를 나름 훌륭한 무관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사료를 다시 정리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드라마와 역사적 사료는 기본적인 배경은 유사할 수 있지만,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관점은 올바를 수 없다. 역사는 바로 이런 것이다. 어떤 실제 행위에 대한 기록에서 진실에 대한 관계성을 두고 사실에 대한 관점은 보는 이만 아니라 정치적 권력과 시대적 흐름에 따라 새롭게 조우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그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깊은 문제의식을 가진다면 당연히 전쟁관련인물에 대한 평가를 어떤 식으로 내릴 것이다.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두고, 영웅시하는 문화콘텐츠를 비롯하여 그가 조선을 침공할 때 침략자의 이름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업무에 지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변질시킨다. 도쿠가와 정권은 조선침략에 대한 문제점을 바로잡기 위해 조선 앞바다를 노략질하는 왜구를 관리하고, 히데요시 일족과 그의 수뇌부를 모조리 숙청한다. 게다가 조선과의 외교와 교역을 재개하는 방식을 택한다. 임진왜란 당시 히데요시의 권력을 일본 천황보다 더 우위에 있었다. 히데요시 발언에 수많은 일본인들의 생명이 오고가는 시대였다.

 

임진왜란의 사료를 찾아보면 왜군들은 처음에 승기를 몰아 점령해 나갔지만, 일본 열도는 기본적으로 조선보다 온도가 높았고, 이에 따른 의복이나 음식문화가 많이 틀렸다. 일본과 한국의 음식을 뭔가 유사한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엄연히 존재한다. 임진왜란이 4월에 일어난 일이나, 조선시대 4월은 음력으로 계산했기에 지금으로 따지자면 5월 중후반 정도이고, 왜군이 충주의 신립부대를 섬멸하고 한양과 평양에 간 시점이 여름이다. 그 말은 곧 일본기후가 습하고 더운 점에서 일본보다 덜 습하고 더운 조선의 여름이 그들에게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토 마사요시를 비롯한 고니시 유키나가 군은 늦가을이 옥 눈이 내리는 겨울이 되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조선의 겨울은 일본에서 느끼지 못한 추위였고, 그들이 침공 시기에 가지고 온 옷은 겨울용이 없었다. 남측 부산과 거제 일원은 그나마 따뜻한 지역이나, 한양 위로 올라갈수록 추위는 무서운 적이었다. 왜군이 조선과 접전하면서 사망하게 된 이유가 전투 중 교전보다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병에 의해서였다. 풍토가 맞지 않은 점, 겨울에 추위에 의한 동사(凍死)와 감기 등은 치명적인 고통이었다. 가토 마사요시가 함경도로 가면서 정문부의 전술에 걸렸을 때 가장 큰 고역이 함경도의 차가운 겨울바람과 눈이었다.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아도 많은 병사가 죽었고, 숫자가 수백에 지나지 않은 의병에게 쫓김을 당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쟁에 끌려나온 왜군 내에서 동요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임진왜란 사료를 보면 왜군 일반병사들은 어서 전쟁을 끝내고 집에 가고 싶어 한다. 전쟁에 나온 대부분의 장정은 영주의 명령에 의해 오거나, 조선에 가서 공을 세워 가계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들에게 온 것은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각종 질병, 바다의 이순신이 가로막고 있었다. 전쟁을 계속 하는 한 그들은 조선에 남아 생명을 잃을 각오로 총과 칼을 잡고 있어야 했다. 이런 상황이니 그들은 자신의 군주인 관백 히데요시에게 원망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선의 임금 선조 역시 조선의 민중에게 원망을 받았지만, 왜군의 군주 히데요시 역시 일본의 민중에게 원망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전쟁에 나가면 자신의 아버지, 아들, 남편, 형제를 보내야했다. 먼 길을 떠나 시체조차 돌아오지 않으면 남은 가족의 마음은 어떨까? 수 십 만에 이르는 병사를 위한 군수물자 조달로 생필품이 부족해지니 더더욱 원망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군 전체가 배를 스스로 가르고 할복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사무라이들이 아니다. 히데요시의 존재가 박멸될 때 일본은 에도를 지나 메이지를 맞이했다. 그리고 조선을 침략하게 되었다. 조선침략이 제대로 된 것은 임진왜란 밖에 없었다. 을묘왜변에서 전남지역의 왜구는 도순찰사 이준경에게 패배를 당했다. 임진왜란을 임금이 한양에서 몽진하여 의주까지 가고, 7년 동안 치룬 거대한 전쟁이다.

 

하지만 그 일이 일에게 하나의 역()에 불과했다. 그래서 풍태합조선역(豊太閤朝鮮役)이란 책이 나온 것이고, 일본 역사교과서에 임진왜란을 두고 문록경장의 역(文祿慶長)이란 하는 것이다. 다행히 왜군은 조선의 수군과 의병에게 무릎을 꿇게 되었지만, 그 때가 잠시였지 을사늑약 이후 합일병합 그리고 해방 후 역사와 외교문제를 보듯이 우리는 결코 임진왜란이 끝난 것이 아니다. 임진왜란의 승리를 거둔 전쟁이나 정말 승리한 전쟁인 것일까? 조선 인구 반 정도가 죽었고, 밭과 논을 황폐화되고, 성리학의 도리조차 사라졌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만든 주인공은 1위를 당연히 이순신이다. 그리고 이순신을 천거한 유성룡, 권율과 곽재우, 이항복과 이덕형 같은 문무 관료와 의병이 없었다면 우리의 국어는 훈민정음 한글이 아닌 가타가나의 일어였을 것이다. 이순신은 6갑자가 도래한 420년 전 사람이다. 그가 서가한지 400년이 넘어도 임진왜란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해주게 한다. 전쟁이란 참 끔찍한 일이고, 전쟁에서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힘이 없는 일반 민중, 지금으로 보면 국민이다. 일제에 밟힌 그 어둠의 36년도 점점 잊어져 가는데, 임진왜란은 오죽할까?

 

하지만 이순신의 전쟁사는 세계 4대 해전에서 한산도 해전이 있었고, 그보다 더한 것이 명량해전이다. 이순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 이순신이 대단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최근에 읽은 <이순신과 임진왜란>과 그리고 <난중일기>, 더 나아가 비봉출판사에서 제작한 <충무공 이순신 전서>에서 더 많은 것을 알았다. 비봉출판사 사장이면 창립자가 직접 책을 출판했는데, <난중일기><징비록>을 비롯하여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 각종 장계와 사료들을 정리하여 이순신의 7년 전쟁을 찾아 떠났다.

 

그 내용 하나하나를 일일이 나열할 수 없지만, 진정한 적은 외적이기도 하나,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았다.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 <현자 곽재우>가 있었다. 곽재우 장군은 홍의장군으로 유명한 인물이나, 그가 최초로 의병을 거사한 인물인 점을 잘 모를 것이다. 곽재우 장군이 없었으면 이순신 장군의 전술이 성공할 수 없었다. 조선에서 유일하게 무사한 곳이 전남지역이었다. 전남의 길목을 진주성과 의령 정암진에서 잡아두었기 때문이다. 곽재우 장군이 경상남도에서 전라남도로 진출하는 왜군을 막았기 때문에 전라좌수영이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다. 곽재우를 비롯한 많은 의병들이 우후죽순으로 창궐하고, 산속에서 수행하던 승려들도 의승군으로 참전하여 조선의 민중을 구원하려 했다.

 

불교의 가르침에서 살생은 금지하고, 더구나 인간의 목숨을 헤치는 것을 최악으로 여겼지만, 조선의 백성들이 왜군의 칼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 있는 게 더 큰 죄였다. 악귀의 칼날에서 조선의 민중을 구하는 게 진정한 불도였다. 문제는 이런 의병들이 너무 활약한 점이다. 곽재우는 조선선비 남명 조식의 마지막 제자이고, 조식 선생의 외손녀의 남편은 곽재우였다. 조식 선생이 차고 있던 방울과 칼은 수제자 김우옹과 정인홍에게 주었다. 정인홍을 비롯하여 김면 등 조식 선생의 문하생들은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웠다.

 

곽재우가 공을 세우자, 임금 선조는 시기했고, 게다가 관료들도 동서로 분당되어 서인의 관리들은 동인계열 관료 내지 의병을 모함하거나 서로 갈등을 빚었다. 곽재우와 경상감사 김수의 일화도 그렇고, 동인계열에서 남인과 북인 역시 갈등을 빚었다. 선조가 의주행재소로 호종할 때 많은 신하들이 외면하다 행재소가 안정되자 여기저기서 찾아와 전쟁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망치고 있었다. 이순신의 승전에 좋게 여겼지만, 백성들이 이순신과 곽재우를 더 공경하자 선조는 질투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잘못된 소식이나 소문 그리고 주변 간신배의 말을 듣고 충신들을 헤치려 했다.

 

김덕령 장군은 아무 죄도 없는데, 반란군과 억지로 엮여 장살당해 죽게 되고, 그 계기로 수많은 의병들이 산으로 숨어들어갔다. 이순신 장군이 모함에 의해 백의종군하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발탁되는 과정에서 김덕령의 동생 집에 간 일화가 있다. 김덕령의 동생 역시 의병활동을 했으나 임금 선조와 간신배의 계략으로 형과 친우들을 잃었다. 평생 세상에 드러나지 않으려한 그의 모습에 안타까움만 더해간다. 이순신이 모함에 걸린 이유는 그의 인기도 있었지만, 그가 남인의 영수 류성룡의 비호를 받는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류성룡의 정치적 정적인 윤두수는 어느 정도 보면 영리한 신하지만, <충무공 이순신 전서>를 보면 정말 역적 간신배가 따로 없다. 원균을 기용한 점에서 선조와 똑같은 발상을 했지만, 막상 원균이 칠천량에서 패배 후 조선수군이 몰살하자 그 문제를 오히려 윤두수 같은 서인계열 신하에게 몰았다. 그리고 이순신이 명량에서 극적으로 승리하여 명나라 장수들이 이순신의 공을 치하하자, 선조는 오히려 이순신의 업적을 일개 무관이 해야할 일로 표현했다. 명나라 장수 앞에 머리를 숙이고 절을 하고 아부를 떨던 선조, 백성들은 죽어가고 있는데 정치적 입지만 신경 쓰고, 그가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기 위해서 왕좌를 전위한다는 교서를 내리고, 정치적 이권에 눈이 밝은 신하는 전위 양도를 반대하기 위한 사죄 모드로 돌입한다.

 

전쟁에서 각종 병권과 인사 업무, 그 외에도 처리할 공사업무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조정은 마비된 채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런 이야기는 <충무공 이순신 전서>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책을 읽으면 이순신 직접 만든 <난중일기>와 장계만 아니라 7년 전쟁동안 <선조수정실록>을 토대로 시기적으로 차례를 구성했기에 당연히 조정의 일들이 이순신 장군이 행하던 업적을 어떻게 풀어 가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이들은 모함을 당하고, 정작 전쟁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자들은 시문놀이 빠져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급했다. 이런 자들을 몰아내지 않고 계속 조선을 지배했으니 히데요시의 원한은 뒤에 가서 풀린 셈이다.

 

일본은 그런 히데요시의 흔적을 지우려 하다 이제는 다시 국가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역사를 인지하는 방식이 곧 그 나라의 민족성이고, 그들이 원하는 이념이다. 일본이 그렇다면 한국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순신 장군이 보여준 군사 경영은 군비만 충당하는 게 아니라 백성들의 생계를 구원하고, 행재소의 임금에게 공물을 보내 조정에 큰 보탬이 되었다. 정치경제학이란 학문은 없어도 정치경제학적인 자세, 게다가 목민관의 자세도 보여준다. 하지만 현실은 권력에 의해 내몰리고, 그 이후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면사(免死)라는 교지를 받는데, 그 면사첩은 선조가 내린 것이 아니라 명나라 황제가 이순신에게 내린 것이다. 이순신은 당색을 갖추진 않으나, 당색은 당연히 친구 류성룡에 의해 남인에 가깝다. 원균을 중용한 선조와 간신배 일원을 보면 대부분 서인계통이었다. 윤두수는 원균의 아내와 가까운 친척이었고, 서인의 조력을 받았던 원균은 통제사 자리를 이순신에게 빼앗을 수 있었다. 이순신은 평생 변방의 무관으로 고생했으나, 원균은 중앙정계와 연줄이 있었다. 전쟁 와중에 윤두수의 집에 뇌물이 갔다는 기록에서 조선의 백성은 배고 고파 굶주려 죽고, 저잣거리에 시체가 널려 있으며, 아비와 자식이 서로 잡아먹는 비참한 지경이 되었다.

 

모함을 받고 죽음의 위기에서 백성을 위해 몸을 던진 이순신의 삶을 두고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군사정권 시기 이순신의 이름은 군인이란 신분을 우상화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다 어느새 묻어질 것으로 생각했지만, 다시 이순신은 영웅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영웅은 영웅주의적인 인물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보통 사람과 교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늙은 노모를 두고 소식을 늘 기다리던 아들 이순신, 아들들이 아픈 것을 두고 고민하던 아버지, 비가 많이 와서 농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목민관 이순신, 군졸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덕장 이순신, 그는 강철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마음이 아주 섬세하고, 생각이 치밀한 사람이었다. 늘 위장이 좋지 않아 약을 입에 달고 다녔고, 몸살로 며칠이나 방에 앓아눕기도 했다. 그래도 늘 송사를 처분했고, 전장에서 부하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겼다. 원균은 술이나 마시고, 기생을 불려 음탕한 일에 재미만 보았다. 최후에 조선수군을 모조리 수장시켰으니 그 죄가 얼마나 깊은가? 이 책에서 이순신에 대한 행장록만 아니라 원균의 행장록을 수록했다. 이 책을 저술한 작가의 눈에 보이는 원균과 선조의 처사는 참으로 한심했다.

 

곽재우에 대한 기록을 봐도 그가 과거에 2위를 했는데도, 임금이 보기에 거슬린 문구가 있어 과거합격을 취소시켰다. 의병장을 탄압했고, 임진왜란 이후 청나라가 침공한 정묘호란 때 의병의 창궐이 거의 없었다. 나라를 구하는 자는 백성이고 나라를 만드는 자 역시 백성이니, 그 간단한 진리를 잊으니 그저 하늘을 원망하고 또 원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조금 재미난 기록이 나오는데, 선조는 원균이 실패해도 이순신에 대한 정치적 대항마로 이용했고, 원균이 전사한 뒤 원균의 부인에게 나라의 녹을 내려주었다.

 

그런데 광해군이 집권하자 말자 바로 원균의 처에게 나라의 녹을 내리지 않게 되었다. 이후 인조반정 이후 다시 서인들이 집권하자 원균의 아내에게 국가의 녹이 다시 내렸다는 것이다. 광해군은 알고 있었다. 이순신이 얼마나 분투했고, 원균이 얼마나 한심한지 말이다. 서인들과 선조의 전교양위 사건을 두고 가장 큰 피해자는 광해군이고, 그때 중간에 중재해 준 자는 류성룡과 일부 충신이었다. 나머지는 선조와 더불어 권력을 유지하려 했고, 변방의 장수는 군수물자도 제대로 보급 받지 못한 채 고생만 했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말고도 무의공 이순신(李純信)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무의공 이순신이 생각보다 많이 시련을 겪는데, 그가 종친인 점도 있지만, 한편으로 학봉 김성일의 문인인 점, 학봉 김성일은 퇴계 이황의 제자이고, 류성룡과 같은 남인이기에 당색에 따른 견제가 있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자들은 외면 받고, 중앙에서 나라에 좀만 내는 자들이 승승장구하는 과거 그리고 현재에 이르는 사태를 보자니 역사란 반드시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할 하나의 가치이다. 지나간 역사의 기록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어떻게 가야할지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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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무사 이성계 - 운명을 바꾼 단 하루의 전쟁
서권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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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시작된 시기는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을 정해놓으면서 된 일이다. 조선이란 역사를 보면 참 난감한 점들이 많다. 조선이 세워진 시기를 놓고 다시 생각한다면, 광해군 시기와 뭔가 상당히 많이 중첩되는 느낌이 있다는 점이다. 광해군 시기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시기라면 조선이 막 개국한 시기에는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올라오던 시기이다. 이성계는 불교와 성리학의 중간에 놓인 고려를 대신하여 유교를 중심인 조선의 시조가 되었다. 생각하면 조선의 이성계와 고려의 왕건 모두 무인에서 시작된 인물이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조차 무인의 기질이 뛰어난 인물이다.

 

무관이 왕이 되어 문관을 등용하면 다시 문관이 무관을 우습게보고, 문관이 병무의 실제 업무를 모르면서 병권을 잡게 되면 난이 생기는 일이 다분하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초반에 문관도 많았지만 무관들도 많았다. 공자의 유학자에서 선비들은 원래 춘추전국시대에는 문예를 기르는 자보단 무예를 익히는 자들이 강했다. 무예를 익히는 이유는 현실에서 일어난 일들을 직접 마주하기 위해서라면 각 임지를 나돌아 다녀야 하며, 더구나 전쟁이 계속 일어난 시기에 선비들의 본분은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잡는 일이다. 그러나 고려를 지나 조선을 오면서 선비는 무관보다 문관에 이르게 되고, 나라의 위기에 처해질 시기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비들의 나라, 조선은 이성계와 무관 그리고 신진 사대부들이 함께 일으킨 국가이다. 조선이란 국가는 고려를 멸망했지만, 고려가 멸망한 이유는 다름 아닌 국가권력의 부패와 백성들의 빈곤이었다.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면서 가장 먼저 정리해야할 것들이 기존 권력을 청산하는 것이다. 왕족과 봉건귀족은 막대한 이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 읽은 <시골무사 이성계>에서 신돈이란 승려가 정치를 하면서 가장 먼저 한 것은 노비의 신분해방과 농민의 억울한 처사를 풀어주는 일이다. 권력자들에게 가장 돈이 되는 것은 땅을 많이 차지하고, 땅에서 나온 소출을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이다.

 

조선이 세워진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바로 토지에 대한 문제다. 농민이 농사를 짓고 먹고살아야하는데 이게 제대로 되지 않은 점이다. 땅을 빼앗고, 빚을 갚지 못해 평생 노비로 살아가는 일들이 발생한다. 노비도 인간인데, 이상하게 소와 말보다 더 못한 대우를 받는 게 노비들이다. 권력자들의 비리는 곧 국가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것은 세계 어디를 돌아봐도 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고 사실이다. 고려의 무능한 정치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고, 백성들이 힘드니 군역과 세금문제가 제대로 되지 못했다.

 

전쟁이 나면 어떻게 되는가? 우선 군량을 마련해야 하는데, 군사들에게 먹일 쌀이 모두 중간에서 착복되고, 군사들의 징병해야 하는데 모두 어디론가 도망친다. 게다가 군사들이 모여도 그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해 싸움을 제대로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지 못한다. 겁쟁이가 되는 것은 기본이고, 무기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고려 말기, 홍건적이 조선을 침범하고, 왜구가 계속 남해안을 노략질을 한다. 이성계가 성공한 이유 그것은 무엇인가? 그가 궁술이 뛰어난 강한 무장이라 그런가? 아니면 천하의 문장가 정도전이 있었기 때문인가?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성계는 처음에 고려의 무관이고, 40대 중반까지 반역할 생각조차 없었을 것이다.

 

소설 <시골무사 이성계>를 보면 우리가 아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아니라 그냥 변방에서 떠도는 무관 이성계를 마주한다. 이성계는 변방을 전전하면서 여진족 같은 오랑캐 부족을 의형제를 맺으며 같이 동고동락을 한다. 이성계는 명궁이지만, 한편으로 활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중앙관직이 아닌 변방을 누비며, 그가 찬란한 업적을 보여준 것은 바로 황산대첩이다. 일본 왜구 만여명이 침범하나, 고려의 군사력은 천 명 정도이다. 게다가 지휘내부의 갈등까지 겹치고, 이민족으로 구성된 이성계의 사군들은 모두 형제이고 삼촌조카이었다.

 

이성계에 대한 일화를 보면 그는 순수 조선인 즉 고려인이 아니라 여진족과 어느 정도 인연이 있는 자로 나온다. 변방에 살아간 우리 선조들은 다 부족과 싸우기도 했지만 때로는 같이 살기도 했다. 변방의 부족을 국내로 귀화하여 살게 한 경우도 있고, 임진왜란 당시 항왜들을 조선인으로 살게 해주었다. 민족의 단일성보단 민족이 가진 문화적 정체성으로 계속 유지된 셈이다. 고려는 원나라의 종속국이었고, 원나라 본국의 신료와 고려 중앙신료들이 권력자였다. 변방의 장수는 그저 벌거숭이에 불과했고, 이 책에서 이성계는 병법서조차 읽지 않은 그저 한미한 출신의 무관이었다.

 

황산대첩 당시 종2품 도순찰사 직급을 가졌지만, 오랜 기간 변방을 누비면 생사를 오고간 그에게 너무 한미한 벼슬이다. 권력자들이 병권을 잡으면 도순찰사 이상의 벼슬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우는 전쟁에서 1:10의 전쟁은 마치 지나가는 소설책처럼 지나가고, 우리 역시 소설책 읽듯이 스쳐간다. 하지만 진짜 소설에서 오히려 역사책보다 더 리얼한 상황을 느낄 수 있다. 활이 가르고, 칼을 베고, 창으로 찌르며, 도끼로 가른다. 말 한 마리의 숨소리와 비명, 대낮의 전투부터 야간의 전투까지 죽음의 그림자는 언제나 숨을 또 숨을 쉰다.

 

소설이지만, 소설이 현실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역사책에서 전쟁을 일어나면 그 전투장면 하나하나를 묘사하지 않는다. 누가 어떻게 죽고 다치고, 또한 죽이는지 말이다. 드라마에서 이성계를 다루는 모습은 그가 보여준 조선의 창업정신에 대한 영웅성을 보여줄 뿐이다. 그가 위기의 현실을 보여줘도 그의 비참한 모습까지 잘 보이려 하지 않는다. <시골무사 이성계>는 비참한 모습의 이성계를 보여준다. 책 표지에 있는 말을 타고 이성계의 모습은 40대 중반이라 하나, 백발이 무성한 외모는 마치 60대에 가까운 모습이다. 책 내용에서 전장을 누비면서 제대로 쉬지도 먹지도 못하고, 늘 죽음을 맞이하기에 괭한 모습만 드러낸다.

 

갑주와 투구조차 낡고 누추하고, 그의 목에는 늑대 가죽을 두르고 있어서 고려국의 종2품의 장수인지 야인인지 알 수 없다. 황산대첩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그저 활을 들고 있는 필부의 모습이다. 그는 필부로 살아갔기에 조선의 임금이 될 수 있었다. 전장에 나가면 가장 비참한 사람은 죽음 앞에서 칼을 잡는 장병이 아니다. 그저 힘없이 적의 칼에 도륙당하는 백성들이다. 왜장 아지발도가 침범할 때 왜구는 특이한 풍습을 보여준다. 전쟁을 참전하기 전 제사를 지내는데 반드시 사람을 죽인다는 점이다.

 

인신공양은 참으로 끔찍하다. 사실 동물을 그냥 죽이는 것도 끔찍하나 같은 인간, 그것도 어린 아이에게 죽음의 칼을 대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다. 아지발도는 고려 땅을 침공할 때 그 지역의 어린 소녀의 가슴에서 성기까지 칼을 베어 내장을 모조리 꺼냈다. 소설에서 만삭한 자신의 아내의 배를 갈라 뱃속의 아이를 죽였다고 하니 정말 끔찍한 일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은 백성의 죽인 것도 모자라 살아있는 자의 코와 귀를 베어가기도 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전쟁 나는 이유는 단순히 외적의 침입만이 아니다. 외적이 침범해도 그것을 방비할 수 없는 국가의 무능함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게 된 계기는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격퇴했고, 거기에 민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성계의 과업이 결국 전쟁에서 시작되었고, 그런 이성계의 가르침을 조선의 후대 왕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선조 당시 임진왜란이나 명종 당시 을묘왜변을 봐도 그렇다. 을묘왜변 때 이준경이 있었고, 임진왜란에는 이순신이 있었다. 그들은 조선을 배반하지 않았지만, 이성계는 배반할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는 원과 명의 교체이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사이는 명과 청의 교체시기이다.

 

나라의 지도자인 군주가 이성계가 밟아온 삶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렇게 처신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자꾸 들었다. <시골무사 이성계>를 보면서 문득 나는 예전에 읽은 책 1권이 생각났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이다. <일리아스>를 보면 트로이전쟁에서 전투를 펼치는 모습이 상기되었기 때문이다. 창이 상대방의 머리를 박히고, 도끼가 머리를 박살되며, 뜨거운 피가 용솟음 치고, 내장이 쏟아진다. 단지 <일리아스>는 영웅주의적인 요소지만, <시골무사 이성계>는 영웅을 필부처럼 묘사했다. <일리아스>는 전장을 영웅의 서사시로 그리지만, <시골무사 이성계>는 전장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야생의 짐승들처럼 표현했다.

 

작품에서 또한 인상적인 모습은 간인(間人)들의 모습이다. 간인들은 아주 다양하고 특이한 존재도 많았다. 살기 위해 활동하는 간인도 있다면, 죽을 줄 알면서도 활동하는 간인도 있다. 어제 죽은 왜구의 갑옷을 입고 적의 진영에 침투한 간인도 있고, 고려군 작전회의 자리 인근에서 구걸하거나 엿보는 간인도 있다. 간인들이 정보를 조작하여 적을 몰살시킬 수 있는 기회로 만들었다. 전투는 단순히 칼과 창으로 부딪혀 일기당천으로 해결되는 환상의 세계가 아니다. 철저히 현실적이고 냉소적인 공간이다.

 

삶이란 그 하나의 공간은 어째 보면 전쟁이다. 진정한 지옥은 전쟁터이도 있지만,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간세계에도 전쟁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곳에 내몰린 인간과 그 인간들 위에서 군림하거나 말로만 그들을 대하는 자는 분명히 느끼는 바가 다르다. 내모는 자들의 내몰린 자들의 치열함을 알 수 없다. 그곳이 죽음의 사선이 이어지는 공간이라면 더욱 그렇다. 냉소적인 세계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의 칼과 활 그리고 같이 죽음을 맞대고 있었던 전우들뿐이다. 동료애와 의리는 단순히 그 감정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고, 자신이 살아갈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시골무사 이성계>를 소개하는 글에서 이 책은 남자의 소설이라 한다. 하지만 보통남자라도 그런 공간에 있기 싫을 것이다. 필부(匹夫)로 등장하는 이성계처럼 나 역시 그저 필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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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사랑
정찬주 지음 / 봄아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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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다도(茶道)동아리를 활동할 때 배운 것들 중 하나가 일반적으로 차()를 지칭하는 말은 녹차(綠茶)이다. 녹차란 찻잎을 잘라 가마솥에 덖은 다음 볏짚에 차 잎을 비벼주고, 다시 가마솥과 볏짚에서 덖고 비벼, 차의 맛과 향을 내는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차를 마시는 것에서 차라 결국 찻잎을 덖고 비빈 후에 만들어진 수제품이다. 그러나 보통 차를 마시는 녹차만 있는 것으로 알지, 그 찻잎을 따는 시기에 따라 다른 칭호가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124절기 중에 곡우(穀雨) 전후로 따는 차 잎을 우전(雨前), 입하 이전에 딴 찻잎을 세작(細雀), 입하 이후로 중작(中雀), 한 여름에 이르러 따는 찻잎은 대작(大雀)이라 한다.

 

보통 찻잎은 세작과 중작을 많이 마시고, 대작은 잎이 너무 커서 맛이 없고, 우전은 찻잎이 너무 작고 일손이 많이 필요하며, 찻잎의 기운이 세기 때문에 가격이 비싸다. 그래서 보통 세작과 중작이 시중에 많이 나온다. 처음 찻잎을 따서 만드는 우전이 나오는 시기가 2018420일 곡우를 전후로 다가온다. 24절기는 보통 양력으로 하는 법이나, 본래 우리 민족은 양력이 아닌 음력으로 날짜 계산을 많이 했다. 우전인 날은 차와 관련된 인물하고 깊은 관계가 있는 날이다. 음력 222일은 올해 47일이다

 

음력 222일은 1836년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한 능내리 여유당(與猶堂)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이 서거한 날이다. 그분이 태어난 해는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원통하게 죽을 때이고, 그분이 돌아가신 것은 182년이 되어간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서거일은 특이하게도 회혼일이다. 병마절도사 홍화보의 외동딸은 가난한 선비의 집안에 시집가서 다산 선생의 마지막 가던 날까지 함께 있었다. 물론 귀양의 고통은 그 가족 모두에게 절망이었지만, 다산 선생의 마지막은 행복이었을까? 아니면 절망이었을까

 

다산 선생에 대한 책을 읽다보면 희망과 절망, 슬픔과 기쁨이 너무 교차한다. 2017년 추석, 나는 이때 정민 교수님의 <다산 증업첩><다산의 재발견>을 읽었다. 페이지 수가 700에 이르는 두꺼운 도서에 책 크기도 매우 커서 읽는 시간이 아주 길었던 책이었다. 다산 선생이 직접 쓴 편지와 다산 선생에게 보내는 편지들을 모우 번역하고, 당시 상황과 일반적으로 우리가 몰랐던 다산 선생의 모습을 잘 보여준 책이었다. 전에 강진 다산초당에 갔는데, 어느 누군가 아주 한심한 이야기를 한 것을 들었다.

 

강진은 바다가 접해진 남해권 지역이나, 한편으로 탐진강을 중심으로 논밭이 형성되어 있어 농촌과 어촌의 장점을 고루 갖춘 동네이다. 다산초당 정자에서 보이는 강진만을 넓은 바다로 이어지고, 강진의 백형인 정약전 선생을 그리는 마음을 그 자리에 서서 달랬다고 한다. 경치는 좋고, 동백나무 숲이 어울려져 있는 백련사도 옆에 있다. 초당에 오르는 산길은 약간 험하나 숲은 아름다리 나무가 우뚝 서 있고, 차나무가 산길 옆 경사에 비뚤하게 자라있다. 지금에서 보면 경치가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귀양을 온 입장에서는 답답하고도 편안한 곳이다. 그런데 어느 다산초당 방문객 한 사람이 초당 동암에 앉으면서 다산 선생이 여기서 귀양한 것을 두고 마치 휴양하러 왔다는 식으로 이야기 한 것이다.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런다고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다산의 일생을 알고, 그가 겪은 풍파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그런 발언이 나올 수 없다. 1800년 정조대왕이 붕어하고, 18012차례의 옥고를 치루면서 막내형인 정약종과 매형인 이승훈의 목을 저잣거리에서 베어졌다. 1791년 신해사옥으로 외사촌형인 윤지충과 윤지충의 이종사촌인 권상연 역시 참수되어 효수되었다.

 

신유사옥 이후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도 죽고, 훗날 천주교 탄압에서 정약종의 아들과 딸 역시 참수되었다. 가족들이 모조리 도륙되고, 큰형의 조카사위 황사영은 능지처참을 당하고, 자신의 사촌동생은 제주의 관노로 팔려가고, 황사영의 아이는 어느 작은 섬에 몸을 숨겼다. 도륙난 집안을 두고 멀리 귀양을 온 그에게 휴양이란 말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미 나는 할 말은 잃은 셈이다. 다산은 우리가 알기에 위대한 유학자, 정치가, 경세가, 법학자, 의학자, 교육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인자한 아버지이면서 스승이기도 하다. 다산이 한국위인 중에서 항상 존경되는 분으로 선정되는 이유는 괜한 이유는 아니다.

 

이번에 읽은 <다산의 사랑>을 읽었다. 다산의 큰 모습을 보지만, 사람들은 작은 모습을 알 수 없었다. 다산의 따님이 친구에게 시집가고, 강진에서 과부를 만나 사랑을 하고 또 다른 딸을 가졌고, 다신에게 찾아온 제자들은 누구고 그들은 스승하고 어떤 교감을 지녔는지 말이다. 책을 보면서 마음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 다행인 점은 다산 선생이 해배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때 다산초당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고, 다산 선생과 18제자가 맺은 다신계(茶信契)가 무신계(無信契)로 되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다산 선생의 다신계가 해배 이후 서거하시자 거의 절명했지만, 20세기 다시 부활했다는 점이다.

 

국내 다산 선생의 연구자로서 위당 정인보 선생이 계신다. 그분은 잃어버린 조선에서 다산이란 존재란 조선의 마지막 등불이고, 우리 민족이 언제나 기억해야 할 인물이라 평했다. 다산의 제자 중에 귤동마을 윤씨들이 많았다. 귤동마을의 윤씨는 정약용 선생의 어머니와 같은 성씨이다. 그러나 촌수가 제법 먼 외척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산을 받아주고, 다산을 위해 다산초당을 내어주었다. 다산초당에서 다산에게 찾아온 애제자들은 다산의 노년에 찾아와 스승에게 안부를 나누고, 다산 선생이 서거하고 그들조차 세상에서 사라질 때 누군가는 계속 다산의 영혼을 지켜줘야 했다

 

귤동마을의 윤씨 후손들은 다산초당을 보존했고, 다산 선생이 남긴 기록을 다시 찾아내어 세상의 빛을 보게 했다. 그러나 처음 다산 선생이 강진에 오실 적에 강진에 작은 주막의 노파만이 받아주었고, 아무도 그를 가까이 보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항촌마을의 윤광택은 친구의 아들이 곤란해 하자 사람을 보내 위로했고, 다산 선생을 위해 몸과 마음을 위로해준다. 윤광택은 다산 선생이 귀양 온지 몇 년 지나자 세상을 등지고, 그분의 아들인 윤서유가 다산 선생을 친구로서 대해준다

 

그런 인연일까? 다신계의 정신은 아직도 이어져 가는 것이 참 대단한 것 같다. 올해 2018년 다신계 절목이 결성된 지 200주년이 된 해이다. 다산 선생이 1818년 강진에서 해배된 시기에 결성된 것이 다신계이기 때문이다. 친구 윤서유는 다산 선생의 외동딸을 며느리로 받아들이고, 윤서유에게 방산 윤정기라는 다산학의 계승자인 아들을 얻는다. 그리고 21세기에 이르러 다산의 따님의 5대손이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한 정약용 선생의 묘에 찾아와 다례(茶禮)를 올린 것이다

 

다산 선생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그분이 남긴 정신이 현대 한국에 남아있고, 특히 다도 문화와 조선 성리학 중 실학에 대해 연구하는 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세계유교학회에서 한국 조선유학에서 정약용 선생은 빼놓을 수 없는 분이다. 이렇게 위대한 분이라도 그도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고 싶었던 것이다. <다산의 사랑>에서 주인공은 다산이나, 오히려 다산을 중심으로 돌아가기보단 다산의 옆에 붙어 있던 혜장 스님과 다산의 몸과 마음을 추스르게 해준 홍임 모녀가 인상이 깊다. 홍임 모녀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얼마 되지 않고, 그나마 문서와 편지가 나오면서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 사람이 배고프고, 차향이 좋고, 술맛을 느끼는 것은 남녀노소 차이가 없는데, 왜 우린 그것에 얽매여야 했는가?

 

사실 다산의 사랑은 이 책의 제목인 <다산의 사랑>보다 <다산 증언첩>이 훨씬 나은 것 같다. 다산의 편지에서 묻어나는 글귀에서 그가 가진 애정, 특히나 배고프고 헐벗은 농민들을 바라보는 애민정신은 정말 감동이 밀려온다. 그런 다산이기에 그가 제자로 받아들인 사람은 양반문중만 아니라 농민이나 중인 부류도 있었고, 천민이던 사의재의 거처인 주막주인인 늙은 노파 역시 사람으로 대했다. 단지 그가 처해진 현실이 너무 안타깝고 비참했을 뿐이다. 권력의 자리에서 부당한 세력에게 좌절했고, 그 부당한 세력에 가족까지 빼앗겼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강진에서 책을 읽고 더더욱 학문에 정진하는 것이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때 얼마나 적적하고, 이제 찾아오려니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다산은 본처의 눈치 대문에 홍임 모녀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본처이든 유배지에서 만든 첩(다산은 또 하나의 아내로 대해주나)이든 다산에게 모두 소중한 사람이다. 그러나 여유당에서 노년을 보내면서 강진 백련사에 머물고 있는 홍임 모녀에 대한 그리움을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는 그의 심정을 어떠하랴? 조선시대 양반들은 본처가 있지만 대부분 첩을 두고 살았다. 그게 좋은 제도는 아니지만 당시 상황에서 유배지에서 홀아비처럼 살아가는 것은 너무 괴롭다. 밤에 혼자 심신이 피폐해져 잠 못 이루는 날이며, 서럽기가 그지없다.

 

홍임 모녀 역시 그렇다 홍임의 어머니는 30대 초반에 다산 선생을 만났지만, 그녀는 이미 1번 결혼 후 사별로 인해 혼자 사는 과부댁이었다. 조선시대 과부들의 삶은 비참했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은 여자라는 사회적 덫도 있자만, 과부이기 때문에 아무나 대할 수 있다는 비인격적 시선이 은근히 잠재하기 때문이다. 과부라도 사람이고 여성이다. 과부도 사랑을 하고 싶고, 그 사랑하는 사람이 다산 선생처럼 고귀한 학자일 수 있다. 귀양 이후 제법 시간이 지난 후에 만났지만, 천주학쟁이로 귀양 온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이란 쉽지 않다. 정분을 나눈 후에 계속 옆에 지키며 서로를 의지하는 일도 쉽지 않다.

 

다산은 해배된 후 제자들이 올라오면 홍임 모녀를 잘 돌봐줄 것을 은밀히 전하나, 그것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사실조차 역사의 흐름에서 사라졌을지 모르는 운명이었다. 20세기로 오면서 한국에서 다산학이 중요한 연구대상이고, 21세기 다산 선생은 세계적 위인이 되었다. 영원히 묻혀버릴 것은 같은 그 어둠의 시간에서 이제야 그 아련한 시간들을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평을 적은 후 조만간 나는 집안 일로 강진군에 위치한 항촌마을에 들릴 일이 있을 것이다. 어릴 적 시골에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항촌마을에서 뛰어 놀던 기억이 있다.

 

항촌마을은 전형적인 농촌이다. 다산의 친구인 윤서유가 살던 집은 윤서유의 일가 후손이 살고 있다. 다산 선생이 친구이자 사돈인 윤서유의 집에 놀러가고, 같이 농막에서 술을 마시며 유배지의 설움을 달랜 곳이다. 항촌마을 건너에 다산의 따님과 사위, 그리고 외손자 윤정기 선생이 잠든 묘가 위치하고 있다. 다산 선생의 슬픔과 기쁨이 숨 쉬고 있는 그 마을들이 점점 갈수록 인적 드문 곳으로 변할 때마다 아쉽기도 하다. 그래도 다행인건 항촌마을과 귤동마을의 윤씨들은 아직도 다산 선생이 남긴 발자취를 계속 지켜나가고 있는 것이다.

 

다산 선생은 힘없고 가난한 백성을 사랑했다. 또한 주변의 친구와 제자, 홍임 모녀 역시 사랑했다. 우리는 늘 다산 선생이란 존재는 거대한 민족의 태양처럼 여기지만, 그 이면에도 초가집 처마 같이 아담하고 다정한 모습도 있었다. 위에서 적었지만, 2018년은 다산 선생이 해배된 지 200년이 된 해이다. 다산 선생과 그 주변에서 보여준 여러 이야기는 시간이 흘러도 귀담을 만한 사연이 넘친다. 다산 선생이 서거하기 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 황상의 모습을 보고 원한 한 가지를 풀었다. 얼마 후 황상이 강진가는 길에 스승의 부음을 듣고 다시 여유당으로 돌아가서 장례식장을 지키고, 다시 강진에 내려와 스승의 죽음을 마치 부모의 죽음처럼 여기는 모습에서 인간의 도리는 말로 하기 쉬우나 실천하기란 정말 어렵다. 세상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향해 걸어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후회로 가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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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은 영광의 날보다 어둠에 가려진 날이 더 많았다. 조선이란 국호를 지닌 국가는 마지막으로 그 이름을 잃었고, 조선의 인민(국가 이전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포함)들은 나라를 잃은 채 일제의 총칼에 억압을 당했다. 해방의 광복이 오는가 하더니 이제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이어지고, 전쟁이 끝난 후 가난과 독재로 다시 어둠 속에 방황했다. 역사란 단절된 시간이 아니다. 역사란 바로 지금 현세대를 구축한 하나의 과정들이다. 그래서 E.H Carr<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항상 과거와 현재가 계속 대화하며 이어져 가는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2017년 큰 방향을 보여준 한 해였다.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된 이후 헌법재판과정에서 탄핵되었다. 민중이 보여준 촛불혁명은 그 이전의 1987년의 혁명 이후 다시 찾아온 역사에 길이 남을 성과였다. 하지만 1987년과 2017년은 조금 유사하면서도 달랐다. 유사한 점은 헌법정치를 기본으로 하는 법치주의국가에서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고, 국민의 주권을 보여주었지만, 1987년의 주권은 거의 박탈된 상태에서 일어난 혁명이고, 2017년 국민의 주권이 가진 상태에서 일어난 혁명이다.

 

그 차이는 바로 국민의 선택점은 과거는 없었으나, 현재는 있었다는 반증이다. 권력의 주권행사에서 독재정부에서 비밀투표를 하거나 선거인단을 권력의 입맛에 맞춘 자들로 포섭했다. 북한에서 선거하면 거의 100%에 가까운 찬성이 나온다. 투표자는 선택할 후보자가 1명이니 무슨 의미인가? 그런 비슷한 인들이 한국에서도 있었다. 하다못해 과거 군부대에서 부재자투표를 하면, 병사들의 투표용지를 검색하여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재투표하게 만든다. 물론 덤으로 온갖 구타와 욕설은 매우 후하게 대해준다.

 

지금 21세기 한국에서 독재자의 후예들이 살고 있지만, 과거처럼 그렇게까지 하지 못한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군화발로 국민을 밟은 자들이 이래저래 설치고 다녔다. 꾸준한 노력과 온갖 희생들이 지금의 현실로 만들었다. 예전에 386세대란 단어가 있었다. 21세기에 들어오면서 나이가 30, 80년대 학번, 60년대 태어난 이들을 두고 지칭한 말이다. 이제는 586이 되어 다시 돌아왔다. 내가 어린 시절 286XT가 있었고, 도스를 디스켓에 넣고 부팅하던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 386 컴퓨터는 모니터도 컬러이고, 286과 비교할 수 없는 다양한 게임과 소프트웨어를 실행할 수 있었다.


지금 80년대들은 도스와 윈도우 초기버전을 알고 있을 것이다. 21세기에 386은 고물이지만, 이제 그들은 586 펜티엄으로 돌아왔고, 조금 더 지나면 초특급 PC버전과 맞먹는 숫자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80년대 대학가 청년들은 20대 시절을 독재와 싸웠고, 이제는 또 다른 현실하고 싸운다. 영화 <1987>를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30년 전의 암울한 한국사회는 다시 돌아와서는 안 되고, 돌아온 것까지는 

아니나, 그 당시 권력의 자리에서 국민들을 억압하던 이들과 그에 동조하던 세력이 아직도 버티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아주 급박한 느낌이 많이 든다. 국가는 온간 권력의 힘을 동원하여 민주투사들을 체포하고, 시위현장이나 학생운동을 하던 청년들은 무참히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영화는 암울한 시대를 보여주기 때문에 고문 장면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 영화 <변호인>이나 영화 <1987> 역시 고문이 그 시대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경찰이란 자들이 국민치안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나 국민을 상대로 불심검문하거나 불법으로 체포구금하거나 더구나 가족과의 연락을 차단한 채 어두운 방에서 고문을 자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고문과 관련하여 가장 끔찍한 영화는 <남영동 1985>이다. 영화 <1987>보다 2년 전의 배경을 토대로 제작한 영화는 민주주의운동의 대부인 김근태 선생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김근태 선생의 수기록 <남영동>을 읽으면 그분이 받으신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영화와 소설에서 고문은 인간의 육체도 파괴하지만, 정신 역시 파괴하여 영혼까지 고통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고문에 의한 정신적 고통은 비단 당하는 자만 아니라 가해자 역시 깊은 상처를 받는다.

 

<남영동 1985>에서 고문을 계속 당하는 민주주의운동가가 계속 포기하지 않자, 고문을 가하는 형사들조차 그에게 제발 포기해달라고 애원을 한다. 고문을 가하는 형사들도 집에 가면 가족이 있고, 아이들도 있다. 민주주의 운동을 하던 이들은 나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 더 나아가 앞으로 살아갈 미래들에게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기 위해 희생하는 분이다. 고문을 가하는 자 역시 자녀가 있다면 그런 암울한 세계에서 폭력과 감시 속에 살아가야 하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물론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자들은 제외이다. 그들은 그런 폭력과 감시를 토대로 특권을 누리기 때문이다.

 

김근태 선생은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을 듣는 것이 제일 고통스러웠다. 비참한 현실 속에 들려오는 라디오의 이야기는 일그러진 환상세계의 잔인한 농담이기 때문이다. <1987>에서 라디오는 등장한다. 라디오에서 DJ의 목소리도 나오고, 테이프 카세트에서 음악이 들려온다. 이때 등장하는 유명한 가수와 노래가 등장한다. 김현식 3집은 대한민국 대중음반 역사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명반이다. 그 노래들은 지금도 리메이크 되거나 음악방송 프로그램에서 도전곡목으로 등장한다. 3집 앨범에서 가리워진 길이란 노래가 있다. 본래 김현식과 친한 유재하의 곡이나, 그 역시 천재의 운명인지 일찍 요절한다. “가리워진 길이란 가사는 상당히 시적이나, 당시 상황과 정말 잘 어울리는 곡이다. 가사를 보면

 

보일 듯 말듯 가물거리는 안개 속에 쌓인 길, 잡힐 듯 말듯 멀어져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그 어디에서 날 기다리는지, 둘러보아도 찾을 길 없네. 그대여 힘이 되 주오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이리로 가나 저리로 갈까, 아득하기만 한데. 이끌려가듯 떠나는 이는 제 갈 길을 찾았나.

손을 흔들며 떠나보내고, 외로움만이 나를 감쌀 때, 그대여 힘이 되 주오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어떻게 보면 독재와 싸우던 지난날의 그들은 민주투사도 있으나, 억압과 횡포 속에서 힘들게 숨을 죽이면 살아간 이들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암울한 당시 상황을 보여준다. 최루가스가 바람을 따라 거리를 메우고, 군중의 신발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곤봉을 들고 있는 백골단이 무참히도 시민들의 머리를 내리친다. 영화에서 주인공 이한열은 연세대학교 만화동아리 회장으로 나온다. 그가 신입생을 모집할 때 보여준 영상은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촬영한 광주 518의 비극이었다. 사람들이 총에 맞고 쓰러지고, 피를 흘리는 광주시민들 사이로 아직 시대는 암흑기란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자국의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사격하던 그들, 독재의 칼날은 국민들을 사육장 안에 가두는 짐승과 같이 다루었다. 영화를 보면 썬데이서울 같은 잡지가 많이 나온다. 전두환 정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프로파간다 방법으로 3S(Sports, Sex, Screen)이었다. 덕분에 한국의 대중가요 역사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명곡이 가장 많았다. 연예인들의 활동이 활발하고, TV가 흑백에서 칼라로 보급되던 시기였다. 스포츠는 야구가 최고였고, 성적인 이미지를 활용하여 썬데이서울 같은 잡지도 많이 나왔다. 잡지의 특징은 미모의 여성이 수영복을 입은 화보가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기사에는 각종 연예계의 가십거리로 넘쳐나고 있었다. 국민들에게 정치적, 사회적인 관심보다 오락과 재미를 더욱 치중하게 했다. 그런 시기였으니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을 두고 아직도 북한의 소행이라 말하던 정신병자가 계속 나타나는 것이다. 독재에서 벗어나 그 무지개를 향하는 이들에게 과연 무지개는 발견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연희는 이한열에게 자신의 심정을 말한다. 연희는 자신의 아버지가 민주주의 운동을 하다가 변을 당했고, 외삼촌 역시 그런 사람하고 엮여 있는 것이 두려웠다.

 

이들은 왜 힘든 선택을 하였는가? 영화에서 고문하는 장면을 그대로 재현한다. 물론 연기와 설정상의 연출이라 하지만, 그 행위를 한다는 자체는 매우 끔찍한 일이다. 영화는 3가지 세력이 대조적으로 흘러간다. 한 세력은 경찰과 국가, 다른 한 세력은 몰래 숨어 민주주의 운동을 하던 이들, 마지막은 이들 중간에서 방황하던 사람이다. 연희는 3번째에 속하는 인물이다. 국가권력이 무섭지만, 더 무서운 것은 이들에게 가족과 친구들이 변을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결국 외삼촌이 고문경찰에 끌려가자 결심을 한다.

 

어째 보면 혁명의 시작은 원대한 이데올로기만으로 해결되지 않은 것 같다. 혁명의 시작에서 사상이나 이념, 그리고 이상적 가치가 있어야 구심점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루소는 루이왕정 세력과 파리시민에게 조롱거리 대상만 되었을 뿐이다. 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가 되었고, 19세기에는 마르크스와 혁명가들의 아버지가 되었고 20세기에는 민주주의의 아버지가 되었다. 하지만 혁명의 정신은 루소가 되었더라도 혁명의 주체는 시민들이 되었다. 보통 시민들이란 길거리에서 담배 피는 아저씨, 커피를 마시며 거리를 걷는 여성들,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는 젊은 대학생들, 군것질 하며 집에 돌아가는 학생까지도 포함되고, 노상에서 생선을 파는 아줌마나 트럭을 몰며 짐을 나르는 운전사들도 그렇다.

 

어디에나 있을법한 사람들이 모두 거리를 나와 독재의 부당함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이 불만을 가지고 반항한 이유는 자신들이 봐도 부조리한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희의 외삼촌은 교도소에 근무하는 교도관이다. 그가 근무하고 있는 교도소의 교도소장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때문에 혁명을 일으키려 한 것이 아니다. 폭력과 억압을 자행하던 그들의 행실에서 진정한 분노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부하도 내치는 것은 물론이고, 그 부하가 반항하면 부하의 가족까지 섬멸한다고 협박한다.

 

실제로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시체마저 유기하고 은폐하였으니 당연히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 전체적인 스토리를 이끄는 주체는 남영동 대공분실을 장악하고 있는 박처장으로 볼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지역에 살다 피난 온 그는 자신의 부모님이 주워온 아이가 어느날 자신의 가족 모두를 살해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지주계층에 대해 공사주의자들은 각종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들에게 마르크스의 <자본>이나 <공산당선언> 같은 이념적 토대 없이 오로지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만 부여했다. 그런 만행에서 가족을 잃은 박처장은 한국정부에 반항하는 세력을 모두 반국가행위자로 본 것이다.

 

그게 남영동의 고문실에서 박종철이 사망했고, 박종철의 시신은 부검된 후 바로 화장되어 강물에 뿌려진다. 박종철의 부모가 부검에 참관하지 못하고, 그의 삼촌만 눈물을 멈추지 못한 채 오열한다. 사람이 죽어도 쥐도 새도 모르게 그냥 병사 되거나 의문사 처리된다. 자신의 가족을 병으로 잃은 것도 한이 맺히는데, 젊은 청년이 고문으로 억울하게 죽은 것은 얼마나 한이 맺히는 일인가? 그것도 억울해도 억울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그 절망은 그들이 살아간 인생의 길에서 가리워진 길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외롭고 괴로우며, 아무 희망도 없이 그저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나그네처럼 갈 곳을 찾을 수가 없다. 영화 <1987>는 그런 그들에게 길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안개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을 위해 서울광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 억울한 현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처음에 집에서 숨거나 길거리에서 움츠리며 살아간 사람들이다. 그들 역시 길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었다. 길이 없다면 길을 만들어 가면 된다. 하지만 그 길을 만들어줄 사람들을 찾는 것은 너무 어렵다. 하지만 같이 그 길을 가면 세상을 바꿀 수 있었다.

 

영화 <1987>과 더불어 6월 항쟁을 보여준 책으로 최규석 작가의 <100>란 만화책이 있다. 물이 100가 되면 액체에서 기체로 되고, 수증기의 힘은 매우 강력하여 주변 환경을 바꿀 수 있는 전환점이 된다. 그 책에서 권력 아래 순종적인 사람들이 스스로 그 권력 앞에서 저항한다. 대신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많은 희생과 눈물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고문에 의해 죽거나 크게 다쳤으며,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일상이 모조리 파괴되었다.

 

지금 정치권에 다시 대두된 이들은 그 당시 그들과 같이 광장에 서고, 최루탄 가스를 마시며 투쟁하던 이들이다. 그동안 10년 동안 시간은 과거로 간 듯 했다. 그러나 그 10년은 멈추고 다시 시계는 미래를 향하여 가고 있다. 촛불혁명이 한참이던 작년 늦가을, 나이가 지긋하신 어른들이 나와 같이 시위했다. 그런데 그들의 입에서 당시 탄핵당한 대통령에 대해 욕을 했다. 가령 XX년 같은 것들을 말이다. 약간의 다른 사상적인 부분에서 옆에서 나무라던 분들이 있지만(이 사람들은 정말 그 어르신들이 왜 그렇게 욕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분들이 욕하던 이유는 독재군부 시절 말 한마디만 잘못하면 잡혀갈 수 있다는 공포 트라우마에 사로잡혔다가 이제 스스로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모임에서 그냥 나라에 대한 불만을 조금이라도 발성하면 주변사람 모르게 남영동 지하고문실에 끌려가 취조를 받고, 반국가세력으로 낙인찍히던 세상이다. 당시 대통령은 그런 일들을 벌이는 자의 딸이었으니, 얼마나 오랜 시간을 두고 국가라는 이름을 지닌 공권력에 두려움을 지니고 살았을까? 2017년 혁명은 독재의 청산이 정치권력이란 시스템을 넘어 사람들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망령으로부터 벗어난 셈이다. 그러면 1987년의 혁명은 어떤가?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망령을 모든 시민들이 도전한 시기다. 가리워진 길은 내 눈앞에 펼쳐진 안개 속만이 아니다.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영혼의 상흔조차도 가리워진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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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2-24 1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건 좋아요 한 200개는 눌러야 되는 글인데 말이지요.....

만화애니비평 2018-02-24 13:15   좋아요 0 | URL
아쿠쿠 감사합니다용~
 

아버지의 유품은 거의 없다. 옷가지 몇 벌과 노트, 그리고 거의 쓸모없던 노트북 하나와 외장하드 디스크 하나 정도이다. 옷이야 반 이상 처분했고, 몇 벌 양복이 큰 방의 장에 있다. 키가 나보다 크고, 다리도 나보다 길어서 내가 입을 수 없었다. 나도 다리가 내 키와 유사한 사람과 비교하여 긴 편(대신 목이 짧다)이나 아버지의 바지를 입을 수 없었다. 만일 조카가 장성하거나 뒤에 결혼하여 내 자녀가 아들이라면 1번이라도 그 옷을 입혀주고 싶은 심정이다. 이렇게 아버지의 물품을 정리하면서 최근 외장하드 내용을 찾아보았다. 아버지는 배를 타고 다닌 외항선원이기에 항상 남는 시간에 뭔가 했어야 했다. 지나간 드라마나 영화들이 안에 있었다.

 

그리고 조카들의 사진과 아버지가 일에 사용한 업무자료와 아버지가 작성한 문건이 있었다. 참으로 슬픈 유언이 있었다. 아주 예전부터 정리한 글이다. 배를 타고 멀리 나가면 언제 어디서 변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다. 배를 타며 먼 나라에 가면 몇 개월 심지어 1년 넘게 해외에서 고생하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나는 한국이란 사회에 회의감이란 절망에 벗어날 수 없었다. 보수라고 말하는 존재들은 노동자의 권리를 지나가는 개만도 못하게 보고, 진보라는 말하는 입들은 밑바닥의 세상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입만 두둥실 떠다니는 현실에서 과거의 비참한 일들은 아직도 계속 되는가?

 

언제 일을 하면서 해양과 관련된 종사사와 대화한 적이 있다. 한국이 발전한 이유는 국가가 제대로 도와준 것이 아니다. 이런 형태를 갖춘 것은 선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기름 1방울도 나지 않는다. 자동차는 수천만대이나 기름 하나 나오지 않고 있으니 그 모든 원유가 배를 타고 태평양과 인도양, 대서양을 지나 우리 영해로 들어온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지만 한국은 반도지형의 국가이고, 바다를 끼고 살아가는 세상이다. 바다에 얼마나 많은 원혼들이 슬피 울고 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성을 상실한 적이 있었다. 인간이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이 오면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나에게 집에 가고 싶다고 외쳤다. 내가 물었다. 집은 어디냐고? 영도에 있는 집이냐고 물으니 아버지는 시골 쪽을 이야기했다. 배고프고 가난하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보낸 그곳, 아버지가 자라고 태어난 곳은 전남 강진군이다. 겨레의 역사 조선의 마지막 등불인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살이를 한 곳이 강진군 도암면 귤동마을이다. 아버지는 귤동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도 어린 시절부터 강진에 오고갔기 때문에 매년 집안제사로 찾아간다.

 

언제 부모님을 모시고, 작은아버지와 고모부 내외, 그리고 고모댁 사촌누나와 같이 가우도 옆의 식당에서 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강진군의 슬픈 이야기를 해주었다. 가우도 인근에 접안시설이 있는데, 일제시대 일본들이 전남지역의 쌀을 약탈하기 위해 만든 부두라고 이야기했다. 강진은 생각보다 아픔이 많은 곳이다. 다산의 유배 오는 것도 있지만, 다산이 바라본 농민들이 겪은 고난도 지켜본 곳이다. 그 이전에 가면 조선의 최고위기인 임진왜란의 여파가 있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전후로 침공할 때, 왜적들은 조선인에게 공격당한 원한을 갚기 위해 해남군 주변 민가를 약탈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칼을 베고, 그들의 귀와 코를 베어 일본으로 들고 갔다. 해남에 수군우수영이 있고, 해남 옆의 강진군은 그런 곳이다. 강진군 병영면(兵營面)이란 지역명이 있을 정도로 수군과 깊은 관계성이 있고, 이순신을 지원하던 고을 중에 강진군과 해남군이 있었다. 게다가 의병과 근왕병 중에서 해남과 강진 출신들이 많았다. 정유재란 당시 전남지역의 많은 의병과 근왕병들은 이순신 장군을 위해 군을 일으키다 수없이 전사했다. 마침 오늘 인터넷으로 진도에서는 매년 임진왜란 전몰자를 위한 굿판이 열린다고 한다.

 

해남군 우수영관광지는 대한민국에서는 국민관광지이나, 그 마을 주민입장에서 본다면 400년이나 더 지난 과거의 슬픔을 아직도 후손들이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죽는다. 생각하면 아버지가 태어난 곳도 바다 앞의 마을이고, 바다를 돌아다니며,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곳도 대마도가 보이는 절영도 앞바다에 위치한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올해 2018년은 임진왜란이 끝이 난지 7갑자(420) 되는 해이다. 또한 이순신 장군이 서거한지 같은 해이다. 임진왜란이 시작하여 정유재란이 시작된 해를 기념해서 계속 한국 조선역사와 관련된 학계에서 많은 발표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나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서적을 읽기 시작했고, 이래저래 보다보니 서애 유성룡 선생이 저술한 <징비록>을 읽고, 거기에 더해 <소설 징비록>을 읽었다. 소설을 읽기 전에 이순신역사연구회에서 저술한 <이순신과 임진왜란> 4권을 읽었다. <징비록>을 읽어도 1가지만 읽은 것이 아니라 4가지 정도 읽었다. 작가의 상상력도 필요하나, <난중일기><선조실록>을 비롯한 각종 사료들을 모은 내용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을 이야기하자면 이순신 장군을 벗어날 수 없으나, 그것은 일본 수군과 해전에 대해서이지 그 이상의 전쟁을 보자면 서애 유성룡을 볼 수 밖에 없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순신 장군의 대사에서 늘 무서운 적은 나에게 덤벼드는 적이 아니라 내 마음 속의 두려움이라고 했다. 하지만 두려움을 느껴야 할 대상이 분명 내 안의 두려움이 아니라 내 앞의 인간일 경우가 많다. 다행히 내가 <이순신과 임진왜란>이란 책을 읽어서인지 <징비록>과 관련된 도서는 잘 읽혀갔다. <징비록>은 이미 전에 1번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읽은 이유는 현대사회 한국이 처한 현실과 역사적 맥락이다. <징비록>과 그리고 소설로 만들어진 징비록의 이야기들의 차이점을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통해 어느 도서출판사가 뛰어난지 어느 번역가가 탁월한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류성룡과 임진왜란>이란 도서를 읽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역사학자와 인문학자가 나와 논문을 소개하고, 담화로 통해 여러 가지의 이야기를 탐독할 수 있었다. 우선적으로 율곡 이이의 10만 대군 양병설이다. 율곡의 학문은 뛰어나나, 조선 최고의 영의정 중에 하나인 이준경은 이이에 대해 경계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명유대신(名儒大臣)들도 이이의 강직함에 비판을 했다. 이이가 보여준 학문의 깊이와 도량은 뛰어나지만, 그가 말하는 바는 현실의 상황을 다소 간파하지 못한채 이상적인 길만 제시했다.

 

동고 이준경은 임진왜란 이전에 을묘왜변을 토벌한 인재이고, 훈구대신을 몰아내고 사림세력을 조정으로 부른 신료였다. 그 역시 청렴하고 강직하나, 기본적으로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영의정으로 정치적 조율을 제시하던 입장이었다. 율곡의 제자들은 후에 율곡 사후 그의 호를 다시 만들어진 후 율곡이 10만 대군양병설을 기입했다. 쉽게 생각하면 다산 정약용 선생이 다산(茶山)이란 호를 사용한 것은 1808년 다산초당에 들어가면서이다. 그 전에 삼미(三眉), 내지 사암(俟菴)이란 호를 사용했다. 다산 정약용이 1800년 이전에 다산이란 명칭을 사용할 수 없으며, 정약용 선생 사후 그런 명칭이 나왔다면 후대가 붙인 내용이다.

 

<류성룡과 임진왜란>에서 그런 내용이 나온다. 10만 대군일까? 물론 이이의 국방정책은 좋았지만, 임진왜란 당시 대부분 분전했던 세력이 동인이었기 때문이다. 동인은 기축옥사를 계기로 송강 정철에 대한 복수심에 따라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었다. 북인으로 정인홍, 곽재우, 김면, 김우옹 같은 남면 조식 선생의 제자들이고, 남인은 류성룡, 김성일 같은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었다. 북인의 영수인 이산해는 동인으로 처음 류성룡과 친분이 있었지만 기축옥사 이후 정철의 처분, 임진왜란의 과정에 따라 결국 류성룡을 파직하게 만든다. 그때 등장한 인물로 이이첨과 남이공 같은 세력이다.

 

사실 동인의 적인 서인이나. 북인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북인은 광해군 집권 전후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고, 대북은 인조반정과 함께 몰락하고, 소북계열도 이괄의 난에서 억울하게 사라진다. 동인의 후예가 몰락하니 이제 남은 것은 서인들의 세계이다. 서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광해군을 역사의 대역죄인으로 모는 것이고, 그가 한 업적을 되돌리는 일이다. 정조시대로 가면 <호남절의록>이 간행되는데, 이책은 매우 재미있는 형국을 남긴다. 이름하며 혼군이삼(昏君李三)이란 단어가 나온다. 여기서 혼군은 광해군을 말하고, 이삼은 이원익, 이덕형, 이항목을 말한다.

 

이원익은 선조가 매우 아끼던 신하였다. 인척으로 말할 정도로 이원익을 아꼈고, 광해군 역시 이원익을 집권 초기 영의정으로 모셨다. 이덕형은 일본과 통상수교를 재개할 때 책임자고, 이항복은 이덕형의 친구로서 병조업무에 매우 밝았다. 전시업무를 수행하면서 재조산하를 이끈 재목이었다. 하지만 붕당의 갈등과 내정 및 외교적 파란이 결국 파국으로 이어졌다. 광해군이 가장 탁월한 업적은 임진왜란의 분조와 무군사, 그리고 명청교체시기의 외교전략과 군사보강이었다. 하지만 명나라에 대한 충성과 청나라에 대한 배척은 인조반정으로 이어지고, 광해군의 전략을 인조가 계속 유지했다고 하나, 막상 광해군이 펼친 외교를 부정해서 일으킨 반정이다.

 

광해군에게 문제가 없는 아니나, 그때나 지금의 역사학자의 논변에 참 모순이 많았다. 광해군이 성을 재건축에 많은 재물을 소비했다고 하나, 인조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게 들어간 재정이 30% 이상이라고 한다. 이것을 두고 보자면 어디가 문제가 있는지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이런 광해군을 두고 <호남절의록>에서 2가지 측면이 나온다.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 그리고 이인좌의 반란까지 이어진다. 광해군을 두고 병자호란 시기에 혼군이라 칭하지만, 임진왜란에서 동군 내지 분조라고 칭한다. 의병들이 광해군의 교지와 명령서를 받들고 전장을 나가 공을 세운 이야기를 한다.

 

임진왜란과 병조호란을 두고 이래 차이가 난 이유는 무엇인가? 게다가 임진왜란 최고 공신은 이순신과 류성룡이고, 의병장으로 김덕령과 곽재우가 있다. 이책에서 곽재우보다 김덕령을 더 많이 기록했다. 정인홍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을 정도이다. 당쟁의 효과가 임진왜란 역사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서거하고, 선조는 충무공이란 명칭도 내리지 않고, 오히려 뒤에 삭탈관직을 해버렸다. 나중에 좌의정으로 추증했으나, 그의 사당을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순신의 사당은 백성에 손에 이루어지고, 그의 시신은 광해군이 돼서야 고향인 아산으로 이장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순신의 사당이 만들어진 시기도 광해군 시기였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외에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이 있었다. 이순신이 노환으로 죽자 광해군은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고 한다.

 

전쟁의 상흔을 잃은 것은 과연 누구이고? 전쟁에서 고통 받은 자는 과연 누구인가? 나는 징비록 소설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보았다. 일본 왜구가 참으로 나쁘나, 소서행장을 비롯한 종의지, 평조신 같은 부류는 계속 전쟁을 막으려 했던 것, 대마도란 곳이 아픔이 진하게 스며든 곳을 말이다. 대마도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중간에 끼여 곤혹을 당한 것을 보고 그들도 많이 힘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풍신수길이 죽고, 가등청정이 덕천가강에게 협력하여 풍신수길 세력을 모조리 제거하자, 소서행장 역시 죽었다.

 

소서행장의 딸은 대마도 도주 종의지의 아내였다. 대마도주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 패권이 덕천가강에게 가자, 자신의 아내와 이혼하고, 조선에 대한 외교를 다시 추진했다. 전쟁은 침공당한 자에게도 침공한 자에게도 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살기위해 침략자가 될 수밖에 없던 운명을 보면서 참으로 기구했다. 대마도주는 순수 일본인이 아니라 선조 중에 조선인이 있었다. 전쟁은 막을 수 있었고, 전쟁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한 인물도 있었다. 그러나 기회는 여러 차례 있어도 활용하지 못했다.

 

전쟁이 나자 왕과 대신은 도망가고, 목숨을 건 의병들은 지원도 못 받고 사라져갔다. 그나마

왜적은 총에 쓰러진다면 덜 억울하다. 선조의 질투는 조선의 운명을 계속 어둠으로 몰고 갔다. 한양에 돌아오자 피난갈 때 없던 자들이 이제 변방의 의병과 군관들을 모함했다. 김덕령 장군은 고문으로 죽고, 진주성을 버려지고, 이순신은 백의종군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 과거의 아픔을 잊었다. 선조가 전쟁보고를 받아야할 때 그는 아침이 지나도록 정무를 보지 않고 공빈 김씨의 처소에 있었다. 의주에 가서도 공빈 김씨의 치마 바람에 쌓이니 참으로 안타깝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소설에서 내시들은 전쟁상황을 보고하러온 당상관에게 임금은 씨름하고 있다는 말을 한다. 남자와 남자가 씨름이라면 운동이나, 남자와 여자가 씨름을 하면 무엇이랴? 게다가 의주나 한양에 오니 대신들은 전략과 전투의 방식도 모르고, 입만 살아있다. 류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참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린 아이가 배가 고파 엄마의 젖을 빨고 있는데, 이상하게 젖이 나오지 않았다. 어미는 전쟁에서 죽었고, 아이는 그것도 모른 채 계속 젖을 빨고 있었던 것이다. <징비록>에서 가장 슬픈 대목 중에 하나였다. 먹을 것이 없어 고통 받은 백성들이 밤새 울부짖다 아침에 일어나 나가니 모두 죽고 말았다.

 

류성룡은 백성을 하늘로 보았고, 류성룡과 이순신을 모함하던 이들은 권력을 하늘로 보았다. 천출이 의병장이 되어 왜적을 막자 류성룡이 그를 관군으로 승격한 후 전쟁이 끝나자 그를 다시 천출로 만들어버렸다. 너나 할 것 조선의 백성인데 누구는 자기 살길과 재물만 챙기고, 백성들에게 목숨과 양식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백성이 없는 국가는 의미가 없지만, 그들의 존재는 들판에 널린 돌멩이처럼 이리 차이가 저리 차이는 신세였다. 토끼를 잡으면 개를 잡는다고 했던가? 전지재상 류성룡은 전쟁이 끝나자 파직되었다. 그가 나라를 일으키는데 제일 필요한 것은 개혁이다. 개혁에서 늘 난관은 기득권과의 대립이다. 기득권의 눈에는 류성룡은 제일 미운 대상이다.

 

대동법의 전신인 수미법은 양반지주가 반대하고, 이것을 먼저 주장한 정암 조광조 선생은 기묘사화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조선의 군왕과 권력가는 이렇게 무능하고 한심한데, 그래도 지조 있는 선비와 이 땅의 백성들은 적이 나와도 죽음이 두려워도 가장 먼저 맞서 싸우고 순국한다. 집안에도 조카와 5촌 당숙이 기묘사화를 당해 뜻을 버리고 낙향하고, 심지어 그렇게 만든 이들이 정국을 장악해도 을묘사변이 일어나자 왜적과 싸운 사람도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생각하면 이들의 미련함은 기축옥사에서 엿보인다. 동인들이 남인으로 관군으로 활동하고, 북인으로 의병으로 활동한다.

 

기축옥사에서 정여립과 관계되었다고 남명 조식 문하의 제자들이 크게 다쳤다. 명망 있는 선비 최영경과 정개청은 아무 죄도 없이 죽었고, 정여립을 동인으로 입당하게 한 이발과 이길 형제는 살점이 사라질 정도로 고문을 당했고, 이발의 노모는 압슬형에 어린 아들은 장을 맞아 머리가 터져 죽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을 괴롭히던 세력이 서인이다. 장군은 당쟁과 관계없으나 남인의 영수 류성룡의 지지가 있었고, 류성룡을 견제하던 서인의 세력에 늘 정치적 죽음을 당해야 했다. 원균이 서인 영수 윤두수, 윤근수 형제의 인척에서 절대 절명의 상황에서 당익을 노리던 자를 보면서 한숨이 나올 수가 없었다.

 

기축옥사로 선조와 권력가에 대한 분노가 있어도 기축옥사 희생자의 인척들은 전쟁에 나와 왜적과 싸워 전사했다. 소설 징비록이나 혹은 여러 드라마에서 나온 대사처럼 왜적과 싸우는 이유는 군왕이 아니라 이 나라 백성을 구원한다는 말이 너무 가슴에 와 닿는다. 국가가 토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병기와 군수를 제대로 관리하여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하고, 병사들은 날래고 용맹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되려면 먼저 부정부패가 없어지고 지휘관들은 청렴하고 자신에게 엄정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군대 생활을 하나, 막상 <징비록>을 읽어도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순신 장군이 승리하면 제일 먼저 했던 일이 소설에서 인상 깊다. 가장 먼저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은 바로 격군들이었다. 선창 아래 노를 저는 그들은 천민들이었다. 조선에서 천민은 양반이 시켜 때려죽여도 아무런 대응조차 할 수 없는 약자들이다. 그런 그들을 찾아와 고맙다고 말해주는 상관이 있으면, 세상 어디라도 따라갈 것 같다. 군에서 말단 병사들은 언제나 곤궁한 처지에서 2년 정도 시간을 빼앗긴 채 군복무를 한다. 집에도 가고 싶고, 친구들도 보고 싶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군율은 엄하지만 백성들과 격군에게 매우 친절한 목민관이기도 했다. 조선은 이순신을 영웅인 것을 알아도 권력들은 눈에 가시였다.

 

류성룡의 <징비록>을 읽으면 마지막은 이순신의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소설도 마찬가지이다. 건천동 친구인 2사람은 민족의 구원자로 태어나 오명의 이름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오늘날의 기록에서 다시 태어나 한국의 인물을 넘어 세계의 인물과 문화재로 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와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은 국가의 국보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국보라는 문화재로 남아서 안 될 것이다. 늘 우리가 기억하고 새기야 할 숙제이고 과제이다. 징비록에서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인구는 반으로 줄었다.

 

그리고 그런 슬픔은 병자호란에서 일어나 일제강점기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이어진다. 역사의 이야기는 엔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이야기를 이어나갈 시초에 불과하니 어찌 슬프지 않을까? 돌아가신 아버지와 주변 친척어른이 나에게 말했다. 나의 할아버지 형제들은 일제 징용에 끌려가고, 한 분은 돌아오신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한국전쟁 당시 할아버지는 인민군과 한국군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밤에 시골집 근처 저수지 갈대밭에서 숨어 지냈다고 말이다. 만일 잡혔다면 나는 할아버지의 얼굴조차 볼 수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징비록>의 계속 새겨야 하는 것이다. 430년 전 기축옥사의 슬픔이 집안에 새겨져 있는데, 하물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은 오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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