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족보를 보면 나의 가계도가 나와 있다. 족보를 보면서 이상한 점은 딸과 아내의 이름이 거명되지 않으나, 딸이 시집간 집안에서 자녀의 이름을 올리는 것이다. 집에 족보를 보면 할머니가 시집을 오시면 할머니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더 나아가 외할아버지의 이름까지 기재했다. 우리집안의 족보는 1702년 임오보(壬午譜) 숙종 때 창간된 것이고, 지금 원판은 강진군 덕정동 추원당에 보관되어 있다. 2017년 유시민 작가와 다른 학자들이 알쓸신잡 시리즈 열풍과 그리고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등의 재발간 및 활동으로 전남 강진과 해남 일대를 소개하게 되었다.
강진에 가면 다산초당이고, 해남에 가면 고산 윤선도 종택이 있다. 강진 도암면 강정리에 위치한 추원당은 고산 윤선도 선생이 직접 만드신 한옥이고, 그곳에 보관된 해남윤씨 목판 족보는 고산 선생의 외손자 심단 선생이 마무리했다. 심단 선생의 아버지는 젊은 날에 요절했기에 심단 선생은 고산 선생의 집안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고산 선생이 진행하던 집안족보를 비로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추원당에 그 족보가 300년 넘게 자라잡고 있다. 그리고 심단선생은 심득경 선생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심득경 선생은 고산 윤선도 선생의 증손자 공재 윤두서의 친구 겸 친구이시다. 위에 집안 족보를 이야기한 이유는 한국 국보 240호 <자화상>을 처음 본 것은 집에 보관된 족보에서 봤기 때문이다. <자화상>이란 작품은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가는 조선시대에서 새로운 화법이었다. 영화 <관상>에서 송강호 씨의 얼굴 포스터가 바로 저 자화상을 본 떠 만든 것이고, 기존 동양의 그림과 다르게 서양의 사실주의적 화풍을 그림에 담았다. 선비의 글과 그림은 선비의 마음과 정신이 드러난 것이다. 화려한 그림과 과도한 허례의식보단 간결하고 소박하고 정확한 이미지를 그림에 불어 넣은 그림이 이제 한국역사 조선에서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집안이 남인이었고, 우리 직계할아버지와 형제분들도 인조 이후로 거의 출사하지 않았다. 그나마 출사한 것은 영조와 정조 시대 정도이다. 정약용 선생의 친구이면서 사돈인 윤서유 선생 역시 순조 이후 조정에 출사했지만, 다산 선생이 직접 묘비명을 새긴 글을 보면 여전히 남인이란 이유로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다. 참고로 윤서유 선생은 1801년 신유사옥이 일어날 때 정약용 선생과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로 관아에 갇혀 고초를 겪었다. 사림의 일원에서 시작한 집안이나, 기묘사화부터 화를 당하기 시작하여 붕당의 정쟁에서 늘 변두리에 진전하는 집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산과 공재, 그리고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학문의 세계는 당연히 송학(宋學)이라고 불리는 성리학에서 탈출하여 고학(古學)을 추구했고, 정약용 선생의 경우 고학을 추구하기 위해 다시 공맹의 학문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공자와 맹자가 2,500여년 전 사람이라고 해도, 그 시대는 지금과 달라도 정치와 사회에 대한 견해는 지금 민주주의 사회에 비추어 봐도 다소 납득이 된다. 백성이 근간이 되는 정치, 백성들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이다. 그렇다면 백성에 대해 어떤 관점을 봐야 하는가?
예전에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을 읽은 적이 있었다. 성호 선생은 자신의 둘째 형님이신 이잠 선생이 숙종 때 경종을 옹호하고, 상대 당파 노론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다, 숙종의 분노를 사게 되어 죽음을 당했다. 숙종이 직접 친문하여 장형을 당한지 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잠의 동생이 이익은 물론이고, 옥동 이서 역시 정치와 연이 닿지 않은 시골로 내려와 평생을 학문과 예술에 몰입했다. 과거의 역사를 보면 어느 한 개인의 고통은 다른 누군가에게 큰 동력이 되었고, 현세에 이르러 민족의 훌륭한 기록과 유물로 남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성호 이익의 학문은 그대로 정약용 선생에게 이어져 1표2서라고 불리는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여유당 전서> 수백권이 탄생했다. 이런 성호 선생도 사숙하던 이가 있으니 공재 윤두서 선생이다. 공재 선생이 태어날 때 고산 윤선도 선생은 말년을 보내고 있었다. 증손자를 본 것을 기뻐하며, 해남윤씨 어초은공파(귤정공댁)의 장손으로 삼았다. 예나 지금이나 양자제도는 이루어졌지만, 당시 조선시대 양자제도는 많이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고산 선생도 원래 장자가 아니지만, 양자로 들어갔고, 친부모와 양부모 모두 섬기며 살아갔기 때문이다.
소학(小學)을 필두로 실천적인 자세를 임하는 모습은 조선 중기 북인의 학맥과 유사하다. 북인이 인조반정에서 모두 몰락하자, 일부 북인들은 남인으로 유입된다. 실천적 학문이 돋보인 것은 경세에 대한 관점이고, 경세해야 될 대상에 대한 관찰이다. 그리고 그 대상을 관찰하는 것을 넘어 삶 그 자체로 넘어가는 것 역시 소중하다. 고산 윤선도 선생은 보길도에서 <어부사시사>를 짓는다. 세종대왕이 한글훈민정음을 창제해도 양반사대부들은 우리의 글을 무시했고, 한문만 사용했다.
한글과 한문 모두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한문을 모르면 과거를 볼 수 없고, 모든 문서를 이해할 수 없다. 지식의 독점이야 말로 권력의 독점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다른 책에서 보니 고산 선생은 어부사시사를 지을 무렵, 직접 어민의 배를 타고 노를 같이 움직이고, 그물도 같이 들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백성의 삶에 들어가 그들의 애환을 노래로 담아 한글로 된 가사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종손 윤두서는 글이 아닌 그림과 시로 백성의 삶을 담아내었다. 박은순 교수가 저술한 <공재 윤두서>란 책의 표지를 보면 윤두서의 자화상이 묵묵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들어가는 말 부분 옆에 어느 아낙네가 낫을 들고 잠시 서 있는 모습이 나온다. 위에 윤두서의 시가 적혀 있다.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려져 있으니, 오가는 사람이 모두 흙으로만 알고, 옥인 줄은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니, 흙인 듯이 가만히 있거라.” 백성의 삶을 관망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삶이란 형태적 요소까지 접근한다. 그림을 보면, 단순히 농사짓는 아낙네만 그린 것만 아니라 나무를 깎는 백성의 그림까지 그린다. 그의 학문은 성리학을 넘어 의학, 천문, 지리, 수학 등 다양한 분야를 넘고 넘었다. 고산 선생 역시 의약과 지리학 등 다양한 학문에 능했다.
박학다식하면서 옛것을 좋아하는 마음,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많이 보급하는 방식, 실학자들의 사상은 이렇게 맥을 이어간다. 게다가 공재 선생의 아내가 되는 분은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 선생의 종손녀이시다. 지봉유설에 관한 서적을 읽으니 단순히 시문놀이나 하던 양반사대부의 허위의식을 지나 다양한 이야기가 책에 나온다. 지리와 민족, 식물과 동물 등까지 말이다. 조선시대 가장 심각한 문제는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의식이다. 그러나 고학을 넘어보며, 현실을 생각하며,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보면서 역사관도 새롭게 등장했다. 조선의 역사는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 조선의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의식이다.
20세기를 지나 21세기로 도래하면서 헬조선이란 신종단어가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맥락이지만, 한편으로 사대주의 발상조차도 조선시대에서 이어진 맥락이다. 민주주의 역사는 20세기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시대에 도래해도, 민주주의 사상의 근간이 되는 민본주의는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리뷰를 적는 본인도 한국의 현실에 대해 상당히 회의감을 품고 있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희망을 조금이라도 가지는 이유는 조선시대부터 이미 헬조선화 시키는 부류에 대항하는 지식인이 분명히 존재했고, 그들이 비록 역사 앞에서 좌절한 채 사라졌지만, 그들의 의지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어도 제대로 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나라이다. 그들은 한국에서 민주주주국가 주인이라고 하나, 사실 재력이란 권력 앞에 너무 약한 자들이다. 이런 나쁜 마인드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단어에서 결국 상업(商業)이 제일 앞으로 가고, 사인(士人)들이란 정치가들이 재벌가와 손을 잡으며, 결국 농사짓는 사람과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착취를 당하게 되는 구조로 되었다. 공돌이 공순이란 단어가 있듯이, 비정규직 노동자나 가난한 직장인들은 현대판 노예인 것이다. 노예에 대한 처우를 보면 조선시대 역시 슬프기 그지없다.
공재의 기록에 보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노비를 재물로 본다. 채찍질하고, 포학하게 대하여 소나 말보다 못하게 대한다. 저 소와 말도 그 임무를 하지 못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팔지 못할까 봐 잔인하게 상처를 내거나 얼고 굶주리게 하지 않는다. 오직 노비에 대해서만은 이러한 우려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얼고 굶주리게 하여, 해치고 상처 내어 살아서는 그 집안을 파괴하고, 죽어서는 그 재산을 몰수하는데 이로니 슬프구나. 나는 이러한 까닭에 이 기록을 남겨 잘 대우하라고 하였다. 이로써 스스로를 경계하여 반성하고, 또한 자손에게 주려고 하는 것이다.”
어느 대기업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가 직업병으로 암으로 죽었는데도 여전히 현실의 벽은 막혀있다. 수많은 건설노동자 매주 죽어나가는데도 안전관리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들의 죽음이 기업들의 책임과 잘못에 있는데도 오히려 개인의 잘못으로 몰아가는 현실이다. 민주주의가 중요한 게 아니라 민본주의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이유가 이렇다. 공재 윤두서는 노비를 매입할 때 재미있는 방법을 사용했다. 어느 누군가 노비를 구매했는데, 알고 보니 한 가족이었다. 노비로 태어난 것도 억울하고 가족까지 떨어지게 만드는 것 역시 잔혹했다. 어느 노비에게 합법적인 절차를 수행하여 면천시켜주기도 했다.
한국사회에서 누군가 자신이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에 있으면 아랫사람에게 욕설을 마구 내뱉으며 하대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공재 공은 하인들에게 말을 걸 때 웃으면서 대했다고 한다. 그런 성품은 당연히 그림으로 드러나고, 억지스러운 화법보단 있는 그 자체에 대한 사실성으로 드러난 것이다. <유화백마도>를 보면 하얀 말의 근육 하나하나까지 묘사했고, 친구 심득경이 사망하자, 그의 초상화를 그려 심득경의 가족에게 전할 때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처럼 그려 넣었다.
권력의 횡포에서 관직을 포기하고, 은둔의 생활을 지향했으며, 백성의 삶에 관심을 가진 점이 곧 근기남인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아버지가 살아생전 나에게 우리집안의 내력을 이야기할 때, 고산 윤선도 선생의 고조부이신 어초은 윤효정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초은공은 내 직계 할아버지의 막내 동생 분이었다. 백성들이 흉년이 되어 나라에 세금을 내지 못해 관아에 갇혀 있을 때 자신의 사재를 털어 옥문에 갇힌 백성을 집으로 보내게 한 점을 말이다. 3번이나 했다고 했으니 얼마나 많은 재물이 백성을 위해 사용되었는가?
조선시대 실제 양반의 수는 10%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21세기 한국의 성을 보면 모두 양반의 가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중요하지 않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국가이고, 누구의 위에 있어서도 아래에 있어서도 안 되는 주권국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주의국가라고 해도 민본주의적 근간은 완성되지 않았다. 우리집안은 당쟁의 시기 몰락한 양반이라 높은 벼슬에 오른 분은 많지 않다. 어느 집안에 정승이 몇 명이고, 판서와 참판이 몇 수십 명인 것보다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을 아껴준 것이 더욱 훌륭한 것이다.
현재도 당시도 정치가의 책무란 무엇을 생각하면 국가를 위해 살아가야 했고, 조선시대라면 왕도정치를 실행해야 했다. 그러나 왕도정치보단 권력만 지향하니 어찌 안타깝지 않을 수가 있을까? 백호 윤휴를 찾아보면 그는 양반도 농민처럼 세금을 내야한다고 주장했고, 그것은 노론에 막혀 버렸고, 경신환국에서 죽음을 당한다. 강한 국가를 위해서는 가진 자가 너무 가지게 하면 안 되고, 백성들이 어느 정도 먹고살만해도 부국강병의 초석이 된다고 본 것이다. <공재 윤두서>는 미술사학자적인 관점으로 제작되었으나, 공재 윤두서의 인간을 모르면 작품 자체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실 백호 윤휴는 고산 윤선도와 친했고, 윤휴와 인척이 되는 미수 허목은 윤선도의 묘비명을 지어주었다. 성호 이익의 가족은 공재 윤두서 집안과 친척관계이니 그들의 관계성을 보지 않으면 작품을 알 수 없고, 그 작품성에 선비정신이 담겨있으니 당연히 역사적 맥락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선비화가로 그가 남긴 작품은 국가의 국가와 보물이 되어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새로운 화풍과 조선시대의 역사적 유물로서 현세에 이른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저자 박은순 교수가 확실하게 밝힌 것처럼 시대에 좌절한 그였지만,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자신의 뜻이 전달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