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헌법이 개정을 준비하려 한다하지만 헌법이 정말 개정될지 얼마나 그 취지에 맞게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른다헌법전문에 한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민중항쟁을 상기시키려 한다대한민국 정부는 상해 임시정부로 시작하여 419혁명만 아니라 518의 아픔까지 담으려 한 점이다최근 43사건에 대한 재판단이 이루어지려 한다. 43사건 당시 수많은 제주주민들이 학살당하기 때문이다한국의 역사는 민중에게 거의 학살과 착취 그리고 모욕의 역사에 가깝다가진 자와 권력만 추구하는 자에게 한국 그리고 조선은 철저하게 유린 당해온 것이다.

 

최근에 읽은 <호남의 한>과 <지워진 이름 정여립>에서 이런 내용이 나온다기축옥사는 조선시대의 광주사태다광주사태란 결국 518민주화 항쟁을 의미한다광주민주화운동을 군부에 의해 철저히 유린되고광주시민은 군인들의 총칼에 무참히 목숨을 잃었다지금도 그 가해자들은 어둠속에서 당시 피해자를 모욕하고최초 발포명령자는 나오지 않아 유족들은 그 원한에 사무쳐 매년 5월만 되면 그 고통의 눈물에 이기지 못한다나이가 60이 되어도 80이 넘어도 눈가에 투명한 피가 눈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20세기 광주의 비극은 그때만이 아니라 이미 16세기 조선에도 있었다이 일은 모르는 이들에게 상관없지만그 땅에 살아온 자이나혹은 그 땅에서 살아온 후손에게 여전히 내려오는 하나의 역사이며 신화이다무의식적 속에 내려온 울분과 억울함에 현세에 나타나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2018년 제주 43사건에 대한 추모영결식 기사를 보았다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는 서북청년단과 군경의 총칼에 잃은 분의 사연이 나왔다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아버지와 함께 죽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형제들의 비극은 나이 60 중반의 할머니의 가슴을 찌르기에 충분하다.

 

인간의 한이란 그 억울한 죽음을 당한 본인만 아니라 후손까지 이어진다한이란 그런 것이다가족들과 후손은 평생 불순분자 내지 역적그리고 빨갱이란 이름을 받고 살아가야 한다기축옥사 역시 그렇다돌아가신 아버지는 송강 정철에 대해 무척 나쁘게 생각했다그리고 윤한봉이란 인물이 무척 독한 놈이라 했다송강 정철은 선조시대 활약한 정승이고윤한봉은 518 운동의 수괴로 지목된 인물이다송강 정철은 조선시대 서인의 영수이고윤한봉은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시절 괴수로 지목된 인물이다.

 

미묘한 차이는 있지만 기축옥사나 518 모두 전남지역에 큰 상처를 주었고조선시대에는 역적이 나오는 곳이 호남이고, 20세기에는 반국가세력이 출몰하는 곳이 호남이다호남의 한은 쉽지 않은 모양이다우연히 어머니 친가인 장흥을 방문할 때 어느 산이 큰 공사를 단행하고 있었다그 공사가 끝나서 알고 보니 동학운동을 하던 농민을 기념하던 곳이었다호남은 농민의 착취와 눈물이 어린 곳이고정약용 선생이 강진 만덕산에서 유배할 적에 불쌍한 백성을 보고 그 안타까움을 잊을 수 없어 애절양(哀絶陽)이란 시를 남긴 곳이다.

 

애절양이란 시는 이미 죽은 시아버지갓 태어난 사내아이가 군적에 올라 세금을 바치라는 관아에 횡포를 고발하는 시조이다군납을 납부하지 못해 농민의 소를 끌고 가는 바람에 사내는 그 울분을 참지 못해 자신의 성기를 칼로 도려내고아낙네는 자신의 남편의 성기를 잡고 관아에 가서 제발 군납을 제대로 해달라고 했지만돌아오는 것은 사나운 관졸의 목소리였다갈밭의 아낙네는 피가 철철 흐르는 남편의 성기를 잡고 그저 눈물을 흐르며 집에 돌아왔다는 이야기이다불과 200년 전의 사연이나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그 정도로 착취가 심한 곳이 호남이다호남의 곡창지대는 탐관오리에게 재물을 늘릴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다산이 처음 강진에 올 때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고 천주학쟁이라 하여 두려워했다하지만 점차 마을사람들이 그에게 모여들고다산의 자신의 친구와 외가의 먼 친척의 도움으로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다다산초당산장의 주인은 윤구로의 아버지 윤단이었다윤단은 관찰사와 안동도호부사를 지낸 행당공 윤복의 후손이었다윤단의 손자는 다산 정약용의 제자였고윤단의 선조인 윤복은 귤정공 윤구의 동생이었다윤구의 후손 중에 고산 윤선도고산 윤선도의 후손 공재 윤두서공재 윤두서의 손녀는 다산 선생의 어머니다다산 선생이 강진에서 유배를 해도 그나마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그런 연유이다.

 

그리고 다산의 오랜 친구이며 사돈인 윤서유는 다산의 외가 조상 윤구의 아버지 어초은 윤효정의 형님인 윤효례의 후손이었다지금도 재미있는 일화지만다산 정약용 선생의 업적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은 나주정씨의 영광이기도 하지만한편으로 해남윤씨의 영광이기도 하다다산 선생이 친구이며 사돈인 윤서유의 묘비명을 작성했다그 묘비명에서 윤서유는 남인이기 때문에 박해를 당했다는 말이 나온다즉 정약용 선생과 윤서유그리고 다산초당의 주인은 모두 남인의 세력인 것이 나온다남인이 왜 중요한가?

 

다산 선생은 호남에 유배할 때 사류의 기운이 모조리 죽었다고 한다남도를 대표하는 사대부 가문은 3~4 정도이고그 나머지는 아무 의미가 없다 했다남도의 사류들이 몰락한 배경은 어디에 있는가그것은 기축옥사로부터 시작된 점이다다산초당의 주인인 윤단의 10대조 윤복은 안동도호부사를 역임할 때 퇴계 이황 선생과 교유를 나누었다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퇴계 선생 문하로 보냈다퇴계 선생 문하에 이름난 인물로 서애 유성룡과 학봉 김성일 선생이 있다이들은 모두 퇴계의 수제자이기도 하나한편으로 임진왜란 당시 도체찰사와 초유사로 활약했다.

 

그리고 윤복의 아들인 윤단중과 그 후예들은 임지왜란 당시 의병으로 활동했다윤단중은 이순신 장군과 교분을 가지고 있었고그의 8~10촌 숙부 내지 형제들도 이순신 장군 휘하에 있거나 의병으로 활동했다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적은 왜군만 아니라 조정의 당쟁이었다최근 읽은 <이순신과 임진왜란>을 읽으면 원균과 서인세력의 견제가 결국 이순신으로 하여금 경질되게 했던 원인으로 나온다그리고 충무공 이순신(李舜臣)과 더불어 활약한 무의공 이순신(李純信)은 학봉 김성일 문하생이란 점도 나온다.

 

이순신 장군의 주변 무관도 서인 내지 동인의 여력이 미치겠지만대부분 동인 특히 남인에 가까운 인물이 많은 점을 알 수 있다임진왜란 당시 의병도 역시 서인과 남인 그리고 북인으로 갈려 활약했다서인으로 조헌과 고경명최경회 같은 창의사들이 있었고북인으로 곽재우와 정인홍 같은 사류도 있었다당쟁은 의병활동에도 영향을 주었다서인과 동인으로 갈려져 지휘체계가 구성되었다이 모든 원인은 기축옥사의 영향이었다기축옥사 당시 가장 활약한 의병으로 곽재우가 있다곽재우는 남명 조식 선생의 마지막 제자였고그의 아내는 남명 선생의 외손녀였다게다가 남명 선생의 제자인 최영경과 정인홍 그리고 김면과 김우옹과 친분을 나누었다기축옥사 이후 최영경이 죽고정인홍이 파면되고남명학파 모두가 화를 입자 의령에 은거하다 정암진에서 왜군을 소탕했다.

 

최영경은 학문의 수준이 높았고언제나 고고한 인품을 가지고 있었다그가 화를 입은 송강 정철이 자신과 만나기 원했지만송강이 주색이 강하고 성품이 너무 급하므로 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가난하지만학문에 깊은 뜻을 둔 최영경은 기축옥사 당시 옥사를 치르다 죽고 만다그것도 농사만 짓던 동생이 먼저 억울하게 죽어 병을 얻게 되면서다기축옥사의 억울함은 동인세력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특히 남명학파에게 심한 상처를 주었다동인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이유도 역시 정인홍을 비롯한 조식 문하생들이 서인에 대한 원한이 깊었기 때문이다.

 

남인 역시 원한이 없는 것은 아니다최영경은 조식 선생만 아니라 퇴계 선생에게 학문을 연결되고퇴계의 문하생 조대중 역시 기축옥사 당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 중에 하나이다더 심각한 이유는 동암 이발과 그의 동생 이길어머니와 어린 아들이 고문에 의해 죽었기 때문이다기축옥사는 1589년에 일어났고이미 7갑자(420)이 지났지만그 한은 호남에서 사라지지 않았다아버지가 왜 정철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았을까?

 

오항녕 교수는 나름 설득력이 있는 말을 했지만그 말 자체가 설득이 없다기축옥사에 대한 기록에서 미수 허목과 고산 윤선도의 사료를 언급했다고산 윤선도의 고모할머니는 동암 이발의 어머니다자신의 집안에 화를 당해 그 원한으로 기축옥사를 추측했다는 말 자체가 논리모순이다자신의 책에 기축옥사 때 화를 당한 동암 이발의 가문 광산이씨의 족보 관련도서에 고산의 후손 윤영선 전 광주시장이 서문을 적었다는 내용을 언급한다중요한 사실 중에 하나가 동알 이발이 태어난 곳은 윤선도의 고향인 해남 연동마을이기 때문이다윤선도 본인은 서울 명례방(명동성당인근에 태어났지만동암 이발은 해남윤씨 득관조 어초은 윤효정이 살아있을 때 태어난 분이다.

 

21세기가 도래해도 광산이씨 문중이 해남윤씨 문중과 서로 교유가 가능한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다강진 도암면 강정리에 있는 해남윤씨 추원당은 고산 윤선도가 만든 제각이다그곳은 고산의 현조부(5대조)와 그 선대(6대조)를 위해 만든 곳이다여기에는 해남윤시 목각족보가 보존되어 있다강진에는 수암서원이라 하여 동암 이발을 모시는 서원이 있다강진은 동암 이발을 모시는 서원이 있지만이발의 외가 식구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이발의 어머니의 남동생인 윤의중은 귀양가던 중 사망했고그는 윤선도의 할아버지다그리고 윤의중의 사촌형제는 윤단중이다윤단중은 퇴계의 문하생이다조선시대 친인척들은 가까운 고을에 모여 살았고설사 조금 떨어져도 교류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 집안에서 정철에 대한 원한이 깊이 남은 이유도 그렇다기축옥사 일어나던 시절 고산윤선도는 이제 어린아이지만내 직계 할아버지는 나이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고고산 선생과 10촌 형제다지금의 10촌은 멀겠지만조선시대 10촌은 무시할 수 없다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연루된 인물 중에 병조업무에 밝은 정언신이 있었다그는 정여립의 9촌 숙부란 이유로 고문당한 후 귀양 가고 결국 목숨을 잃었다정언신이 없었다면 이순신의 앞길에도 큰 문제가 있었다족보를 읽으면 기축옥사 이후로 벼슬에 나가는 사람이 많이 없어진 것은 사실이다.

 

기축옥사 당시 이발의 외가인 점에서 이미 큰 화를 당했고그 원한은 현세까지 이어진 온 셈이다오항녕 교수의 책에서 간과하는 점은 지금도 후손이 정철이 원망하나그것을 너무 작은 것으로 다루는 점이다추국과정에서 팔순 넘은 노모와 이제 10살 채 되지 않은 아이가 고문 중에 죽은 것은 조선시대 미증유의 사건이다원래 조선의 형별에서 여성과 어린이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특히 나이가 많은 여성은 고문을 함부로 가하지 않았다기록에서 이발의 어머니와 아들이 고문을 당하자 옥졸이 너무 슬퍼서 울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나이가 팔순이 할머니가 압슬형을 당하자 너무 고문이 심하다는 말을 하고이제 10살 밖에 안 되는 아이는 자신은 역적이 아니며아버지는 오로지 충효에 충실히 하라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이발의 아들을 말을 들은 선조는 그 아이가 괘씸하다며 머리를 터지게 해 죽였다그래서 기축옥사는 서인에게 승리의 역사이기도 하나모멸의 역사이다아무리 역모라고 해도 정여립과 관계는 된 인물은 이발로 충분하지굳이 그의 노모와 어린 아들에게 죽음을 강요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은 북인(이이첨)과 서인(노론)의 대립관계에 있는 기록이다.

 

기축옥사를 두도 한쪽은 서인 특히 정철을한쪽은 선조의 무자비함으로 이루어진 피비린내라고 말한다하지만 둘 다 틀렸다모두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서로 음모를 짠 잔인한 사건일 뿐이다정여립은 천하는 공물이라 한다주자 성리학에서 공맹의 수사학과 다르게 절대왕조를 위해 성리학은 왕조의 권력과 거기에 기생하는 권신들의 권력을 중시한다하지만 정작 공맹의 사상은 군주가 틀리면 백성은 자신의 군주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왕도주의는 어디까지나 민본주의에 의거한 것이지권력자만을 위한 사상이 아닌 것이다.

 

정여립이 역적인지 아닌지는 어느 책에 따라 다르지만, 20세기를 지나 21세기 올라오면 어는 누구는 영국 크롬웰보다 더 이른 시기에 조선에서는 공화주의자가 있었다고 말한다정여립이 말한 대동사상은 당시 왕조시대 역모일 수 있지만백성에게 달랐다남녀노소를 떠나신분이 양반이건 노비이건 모두 공평히 글을 배우고 같이 술을 마실 수 있었다. 21세기 남녀노소 그 누구 어느 자이건 신분의 제재를 받지 않지만조선시대는 달랐다거기에서 벗어난 인간이 살고자 하는 마음은 분명 있었고정여립은 거기에 모든 것을 받친 사람이다역적이든 아니든 문제가 아니라 분명 그 마음을 가진 점이다.

 

E.H.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대화하는 장이라 한다면 정여립은 분명 조선 최초의 공화주의자이며 민주주의를 꿈꾼 사람이다그의 꿈이 침몰하고그와 조금이라도 관계있는 자라면 모조리 도륙이 나는 비극에서 우린 어떻게 보는 게 옳은 것인가임진왜란으로 기축옥사에 대한 정확한 기록문서가 유실되고실록과 그 외 당시 상황을 기록또한 기축옥사와 관련된 인물의 행장으로 알 수 있을 뿐이다오항녕 교수는 기축옥사의 기억을 두고 정철이냐 유성룡이냐는 말과 함께 당시 추국하던 시스템이라 하나그것은 억지논리이다.

 

집안 족보를 뒤져보며 찾은 것은 기축옥사 당시 억울하게 죽은 이발의 어머니는 퇴계의 제자 윤단중의 사촌누나라는 점이고서애 유성룡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고유성룡에 의해 천거된 수군 통제사 이순신에게 윤단중이 친분을 계속 유지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다시 족보를 찾아보면 이발의 어머니는 윤구의 따님이고윤구는 기묘사화 당시 훈구세력에 의해 화를 당한다나의 직계 할아버지는 성균관 진사로 정암 조광조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었으나기묘사화를 당한 후 향촌으로 내려온다윤구는 내 할아버지에게 자신의 할아버지의 사촌이다그 당시 할아버지의 작은 할아버지는 윤구 선생이 기묘사화를 당하자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오항녕 선생은 해남윤씨 집안이 광산이씨 집안과 지금도 친하게 지내고이발의 가족이 참극을 당한 것을 추측이라 하는 표현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다른 서적에서 호남에서 모르는 물고기가 잡히며아낙네는 그 생선의 머리를 몽둥이로 때리면서 증철아증철아!”라고 외친다송강 정철에 대한 원한이 민간에서 계속 내려온 점을 두고 온 점을 본다면 기축옥사의 폐해는 우연의 산물이 아닌 것이다송강 정철은 나름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믿고 살았지만문제는 주색이 너무 심했다그의 부정적 평가가 심한 책은 <이순신과 임진왜란>이다선조가 평양으로 파천할 때 평양유지들이 송강 정철을 불러 위기를 타파하라 한다.

 

그가 왕명을 받고 전쟁의 위기를 해결해야 할 때 빨리 이동하지 않고중간에 기생을 품에 안고 자신이 처한 신세를 한탄하며 시를 읊조렸다백성들은 왜군의 칼에 도륙 나고배고픔에 허덕일 때기생을 품에 안고 술을 마시며 풍류나 외던 그 모습을 보자니 참으로 답답하기 짝이 없다팔은 안으로 굽는 것은 어찌할 수 없지만오항녕 교수가 갑인예송을 두고 갑인사화라고 말하며그 원인을 윤선도라 말하는 것조차 오류이다기축옥사 피해자(할아버지가 귀양 가는 길에 죽으니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게 당연하다)가 어느새 갑인예송의 가해자로 둔갑되었으니 말이다.

 

윤선도는 할아버지 윤의중의 죽음이 신원되고거기에 정개청의 죽음을 다시 신원하여 자산서원을 유지하는 게 목표였다하지만 자산서원은 남인과 서인이 교차하면서 언제나 분쟁거리로 되었다하지만 기축옥사 그 자체를 동서 양당의 갈등도 중요하지만그 당사자들과 주변인들이 당시 정치적사회적경제적으로 어떤 업적을 했는지 역시 중요하다백성을 위해 자신의 재력을 나눠주고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권력자에게 목숨을 걸고 대항했는지 말이다광해군을 두고 혼군이라 하고과거제도 엉망이라 했지만이미 선조시대부터 과거장은 엉망이고백성들은 배고픔에 허덕이고군역관리는 엉망이었다.

 

기축옥사로 천명에 가까운 선비가 화를 당했지만정작 중요한 것은 그 선비와 같이 살아가던 조선의 민중에게 어떤 영향을 미쳐는 가이다. <기축옥사 재조명>에서 흥미로운 내용 중에 하나가 나주를 중심으로 동인과 서인의 서원장의 자를 두고 갈등한 내용이 있다조선은 향교가 향촌의 중심이 되어 농민을 관리하고 지도하는 역할을 했다부패한 시절 향교는 백성을 고혈을 짜는 곳이고청렴한 선비가 있으며백성의 생활을 어루 만져주고 다독여주던 곳이었을 것이다. 21세기 한국을 두고 헬조선이라 한다헬조선의 시작점은 역시 임진왜란이지만그 임진왜란 당시 유망한 사류는 기축옥사에서 대거 희생되고임진왜란 당시 상당수가 순국했다.

 

병자호란 당시 의병은 전국에서 일어나지 않았고관군조차 눈치만 보고 출진하지 않았다선비의 정신이 완전히 소멸한 시기는 결국 16세기이고, 17세기에 선비가 살 곳은 산속이었다만일 세상에 잘못 나오면 장형을 받고 죽거나 멀리 귀양 가서 고역만 치룰 뿐이다기축옥사는 당쟁론적인 상황에 놓여있지만그것을 당쟁론적인 것으로 치부한 결과 조선은 전쟁의 병화에서 큰 상처를 입었다그 역사의 상처를 반성하고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무고를 풀어주고다시 시대에 부합된 정신을 찾는 것이 먼 후예들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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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4-08 22: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선 시대에 많은 사화가 있었기에 역사를 배우는 이들은 ‘그 사건이 그 사건‘이라는 인식을 하기 쉽지만, 만화애니비평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당사자들과 후손들에게는 사건의 의미가 다르게 다가올 것입니다. 구원을 풀자는 목적이 아니라, 역사의 교훈을 얻기 위해서라도 과거 사건에 대한 연구는 지속되어야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해석의 기반 위에서 헌법 개정과 같은 현재의 변화도 이루어질 때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04-09 13:24   좋아요 1 | URL
4월 2주 토요일 제가 집안 제사로 시골(강진)에 내려가는데, 거기가 합수 윤한봉 선생의 집이 있는 곳입니다. 제 위로 11대조 할아버지를 모시는데, 그분 역시 기축옥사가 일어날 때, 살아있던 분입니다.

강진이란 곳이 지금이야 경치 좋은 곳이나, 과거 조선시대 머나먼 벽지이고, 유배오는 사람에게 한양에서 멀면 멀수록 그 죄가 깊다고 하니, 아픔이 서린 곳이기도 하지요. 게다가 왜구들의 침입도 계속 와서 많은 피해를 보던 곳입니다. 그래도 이런 곳에서 터를 내린 것은 세상을 등지고 은거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세상이었나 봅니다.
 
유성룡인가 정철인가 - 기축옥사의 기억과 당쟁론 너머의 역사담론 8
오항녕 지음 / 너머북스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이상한 책이다. 겉으로 당쟁적적 시각을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려 하나,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이발의 어머니는 윤선도의 고모할머니이고, 윤선도의 할아버지 윤의중은 기축옥사로 연루되어 귀양가는 중 사망했으니 피해자의 기록 자체를 오버라고 말하는 그 자체가 엄청난 오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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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 - 청나라에 잡혀간 조선 백성의 수난사
주돈식 지음 / 학고재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조선시대 가장 비참한 시기가 언제라고 생각해야 할까? 문득 우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의 전쟁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객관적으로 사료를 뒤져보면 그것은 약과에 불과했다. 임진왜란의 상처는 할퀴고 지나가도 어째든 왜군은 격퇴되었다. 격퇴 후 전후복구 사업이 뒤따르므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후 전쟁은 없었다. 왜냐하면 일본 내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이 멸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력이 친목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다. 명나라와 신흥세력인 누르하치의 관계가 심각한 사태로 돌아섰다.

 

동북아시아 세력에 큰 변화를 맞이하면서 조선은 풍전등화의 운명을 겪게 되었다. 올해 2018년은 임진왜란이 끝이 난지 420년이 7갑자가 지나고, 정묘호란은 약 390년이 되었다. 정묘호란에서 청나라는 잠시 스치듯이 지나갔다. 이어 다시 돌아온 병자호란은 그렇지 못하다. 임진왜란 당시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적어도 병자호란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요새 자꾸 든다. 병자호란 당시 심양에 끌려간 조선인 50만이란 말도 있고, 그 이상이란 말도 있다. 전쟁 당시 죽은 백성의 수가 수십만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매년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공납을 요구했고, 그 중에는 인간도 포함되어 있다.

 

살아있는 인간이라 하지만, 그들은 엄연히 누군가의 가족이다. 특히 여성에 대한 문제가 심각했다. 청나라 여진족은 문호가 전혀 없었다. 야만족의 습성이 몸에 베였고, 특히나 수렵생활은 남자만 아니라 여자도 했으며, 강한 자만 살아남는 힘든 공간에서 힘을 키워왔다. 18세기 이르러 청나라도 제법 문학이 높게 되었다. 청나라가 멸망시킨 명나라 한족(漢族)들이 청나라의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그들은 황야의 들개가 아니라 잘 길들여진 집안의 사냥개가 되었다. 들개로 있을 때는 무조건 달라 들어 그 날카로운 이빨로 상대의 목을 물고, 내장을 씹을 정도로 잔혹했다.

 

임진왜란에서 왜군은 포로를 납치하고 자국으로 데려갈 경우 배를 이용하나, 청나라는 달랐다. 그들은 육로를 이용하고, 먼 길 3,000리를 걸어가야 했다. 추운 겨울 걸어서 조선 땅을 벗어나 이국땅에 간다는 사실만으로 절망이다. 거기다 추위와 배고픔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눈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목이 날라 가거나 죽도록 얻어터진다. 여자들은 성노리개가 되고, 남자들의 생명은 부지하기 어렵다. 정묘호란은 1627, 정유재란 종전 1598년이란 아직 전쟁의 상흔이 덜 아문 30년이 지나자 발발했다. 그리고 병자호란은 1636년으로 정묘호란의 상흔조차 가릴 수 없을 때 발발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임금과 조정은 남한산성에서 추운 날씨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항복했고, 그동안 주화파와 척화파는 서로 나누어 대립했다. 그 사이 남한산성을 지키는 군졸은 얼어 죽고, 성 밖에 살아가는 백성들은 도륙을 당했다. 청나라 군대가 몰려와 백성들을 묶어놓고 산 채로 태웠다는 기록이 있다. 400년 전의 기록이나, 현대사회에 살아가는 나로써도 너무 마음이 아픈 일이다. 전쟁의 비극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 어떤 자비와 희망도 없이 오로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숙명에 놓인 것이다.

 

<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를 읽으면 조상들이 겪은 고통과 그리고 권력자들이 행한 위선에 다시금 통탄을 금치 못한다. 호란이 일어날 때 인조가 즉위했고, 인조는 공신들이 준 명검을 지니며 항상 마음을 다스렸다. 그러나 인조는 현실을 몰랐다. 조선은 우물 안의 개구리고, 늘 명분만 중시했지만, 그 명분을 의미하는 진정한 실천을 하지 않았다. 광해군을 혼군이라 하여 반정을 일으킬 세력조차 다시 광해군 시대에 보여준 모순들을 그대로 재현했다. 그것도 모자라 이괄의 난에서 평양감사 박엽이 만든 정예소총부대가 완전 붕괴되었다.

 

청나라는 조선이란 국가가 약하지만, 명나라와 대결에서 조선에 의한 공격으로 후미가 무너질 경우 모든 것이 무너진다. 그래서 명나라 조정 내부의 혼란을 이용하여 조선을 공격하고, 우선 명나라와 전쟁에 집중하고, 명나라 붕괴 후 조선을 정벌하고자 했다. 청나라에게 조선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청나라의 기병대는 날 새고, 사나우며, 수렵으로 인한 생계로 창술과 궁술이 뛰어났다. 조선군대는 기강도 없고 훈련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더 약한 군사력을 가졌고, 거기다가 지휘관들도 자기 안위만 원했다.

 

임진왜란 당시 많은 의병들이 창궐하여 서로 목숨을 내놓았지만, 청나라와 전쟁에서 많은 관군들이 눈치만 보고, 의병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병기도 형편없고 군사기강도 무너지니 이미 나라는 끝을 본 셈이다. 광해군을 폐위한 김류를 비롯한 고관대신들은 임진왜란의 재조지은이란 명분 아래 명나라만 바라봤고, 그것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섬겼다. 백성들은 명나라든 청나라든 아무 상관없었다. 제발 군역을 제대로 세우고, 세금을 지나치게 거두는 횡포만 없으면 될 뿐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가고, 인조의 가족과 친척들이 강화도로 들어갈 때 김류의 아들은 자신의 이득을 노렸고, 결국 강화가 무너지자, 사약을 먹고 죽었다. 김류의 첩과 딸이 청나라에 끌려가자 그는 자신의 권력과 부를 이용하여 많은 은을 포로 대금으로 지불했다. 돈이 많은 권력자야 돈을 만들 수 있지만, 일반 백성에겐 어림없는 일이었고, 그 돈을 설사 가졌다 해도 늘 순위 밖이었다. 만일 청나라에서 조선인 포로가 도망쳐오면 다시 잡아 청나라로 송환되고, 거기서 모진 수난을 당한다. 나라가 나라다운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노예로 전락한 것이다.

 

그 상황에서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이권만 챙기고, 더욱더 화가 나는 건 그렇게 척화를 주장하던 고관대료들은 처음에 강하게 반발하다, 이제 청나라에게 몰락하자 태도를 바꾸었다. 청나라에서 척화신을 데리고 와서 심문하려 할 때 목소리 큰 고관대신은 어디가고 이제 중간 위치에 이른 신료만이 자진해서 갔고, 그들은 끝까지 청나라에 저항하다 모진 고문을 받은 후 참수를 당했다. 죽으면 더 이상 모욕은 받지 않으나 죽음은 너무 가혹한 처사이다. 그러나 죽음조차 감내하던 사람이 많았다. 천인 여성은 모르나 양반이나 양인 규수들과 부인들은 몸을 강제로 욕볼 바에 차라리 자살을 선택했다.

 

남자들도 그렇다. 스스로 목을 매거나 칼로 자해하거나, 종을 시켜 목을 조르게 했다. 종은 주인의 명을 받자 눈물을 흘리며 주인의 목을 줄로 졸려 죽였다.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물건처럼 취급받았고, 홍타이지 죽음 이후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머물면서 받은 설움과 억울함이란 말할 수 없고, 노예시장에 팔려간 조선의 백성을 볼 때마다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에서 병자호란과 관련되어 또 다른 사람의 사연이 소개된다. 어느 사대부 무관의 아내가 청나라로 잡혀갈 때 집의 아이가 엄마를 놓치지 않자, 청나라 병사가 아이의 왼손을 잔인하게 잘려버렸다. 아 아이의 어미는 어떻게든 도망쳐 친정집으로 돌아왔다.

 

청나라의 횡포는 심했지만, 조선의 횡포 역시 심했다. 도망친 파로인들이 만일 내려오면 남자들은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여자들은 겁간을 당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성리학의 도의는 사라졌다. 성리학은 정치권력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이지, 정치적 신념은 전혀 없었다. 어미는 몰래 친정아버지 집에 살았다. 자신의 친정어머니, 시댁식구, 남편 모두 전쟁 중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우연히 아들은 살아있었다. 몇 해가 지나고 과거시험이 열렸을 때 어느 선비가 왼쪽 손목이 없었다. 손이 없던 그 선비가 소문이 나자 인조는 직접 그를 불러 손을 잡아주며 축하해주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 잃어버린 손과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축하의 자리가 눈물의 자리가 되었다. 이 소식이 그의 어미에게 가도 어미는 아들에게 찾아갈 수 없었다. 파로인들이 도망치면 그의 후손들이 엄청난 패널티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조차 용서되지 않은 천륜의 관계이다. 이 책을 보니 뭔가 조금 이해되는 게 있다. 우리는 중국인들을 두고 되놈(때놈)”이라 한다. 그 말의 어원이 병자호란에서 시작했다. 성남에 위치한 남한산성 인근 마을주민들은 가끔 떡국을 나누어 먹는다고 하는데, 이는 인조가 정월 하루 겨우 떡국을 먹을 수 있을 때 성 안에 있는 모든 백성에게 떡국을 내렸기 때문이다.

 

400년이나 된 전쟁의 상처가 아직도 언어로 내려온다. 특히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리는 여성들의 운명은 가혹했다. 화냥년이란 말은 심한 욕이다. 그런데 그 말의 어원은 환향녀이고, 그들은 아무 잘못도 없이 정조를 잃은 이유로 시댁에게 버림받고, 친정에서는 출가외인이라 하여 받아주지 않았다. 억울한 한을 풀어야 하는데, 권력층은 이들은 버렸다. 나라가 약하면 이런 비극을 당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위안부로 끌려간 그 많은 소녀들은 성노예가 되어 죽임을 당했고, 원혼도 달래지 못한 채 그렇게 세상을 하나 둘 떠나가고 있다.

 

힘이 없는 이유로 당한 수모의 역사는 피로써 글을 남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 효종에 대한 글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효종은 봉림대군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같이 청나라에서 고생을 한 임금이다. 누구보다 더 가까이 백성들이 겪는 고통을 보았고, 개방주의자 소현세자와 달리 군권주의자 무관임금으로 임했다. 모두들 청나라에 대한 원한을 말하고, 심지어 청나라에 머리를 숙인 이유로 사대부들이 벼슬을 거부하고 숨는 경우도 많았다. 자신의 벼슬이 판서에 이르러도 누구에게 소개할 때 현감이란 지칭을 쓰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명나라 황제 만력의 연호에 내려진 벼슬은 인정하고, 청나라 태종의 연호는 거부하는 이들도 많았다. 복수를 꿈을 꾸고 청나라를 치고 싶다면 무관을 우대해야 하나 여전히 문관의 권력이 걸림돌이었다. 병력을 모우기 위해 장정을 모아야 하나 양반들은 군포조차 내지 않고, 죽은 시아버지와 배냇물도 마르지 않은 갓난아이들이 군적에 오른다. 병역비리는 곧 나라를 망하게 만드는 징조이다. 사형 찬반론에 대해 많은 의견이 있지만, 병역비리의 죄질이 나쁜 자는 총살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바로 연유이다.

 

군인이 잡은 총이 적이 아니라, 자신의 백성에게 총구를 겨냥해 권력을 탐하고, 장정들은 혹독한 처사에 죽어가고, 농민은 수탈만 당하니 어떻게 희망이 있을까? 작가는 효종의 정신을 다시 찾은 이유는 엄정한 군기를 내세우고, 정예 병사를 만들고 키우기 위해 국가 전반의 부조리를 수정해야 했다. 백성들이 잘 살아야 강한 국력이 되어야 하나, 여전히 사대부들의 반대가 심했다. 서인들의 계보 중에 소론과 노론이 있지만, 이전에 한당(漢黨)과 산당(山堂)이 있다. 대동법과 농민조세 부담 경감이 한당이고, 그것을 반대하는 세력이 산당이다. 나라가 청나라에 밟힌 이유가 명확한데, 그 책임조차 외면하고, 남에게서 빼앗은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구군분투 하던 그들을 보면, 17세기에 끝나야 할 인간들이 아직도 21세기에도 답습하고 있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다.

 

치욕의 역사는 부끄러움과 분노를 일으킨다. 피가 끓고, 뼈가 녹는 기분이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을 우리가 잊는다면 다시 역사의 비극을 반복된다. 이 책에서 청나라에 끌려간 많은 조선인들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채 그들이 끌려간 땅에 대를 이어간다는 말을 한다. 조선인들이 구한말 간도로 넘어가거나, 일제의 잔인함에 만주로 넘어가 고국을 등진 분들이 많다. 해방되어도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못한 채 영원히 타국의 주민이 되어 한국인이 되지 못한 조선인 동포들, 그들이 조상을 한에서 이어져온 삶에서 우리는 그들의 삶과 우리의 삶이 결코 우연이 아닌 연속적인 사건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이란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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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야담 - 보유편
이월영 역주 / 한국문화사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조선의 역사를 한국에서 언제부터 민중이란 존재가 서적에서 오고가고 했을까? 한국의 문학에 대한 연구에서 설화(舌禍)를 중심으로 이어져갔다. 그 의미는 기록이 아닌 구술적 체계로 통해 전해진 것이다. 한국의 설화문화는 신화나 민담 등과 이야기로 흘러간다. 그러므로 구설의 가치는 지금이야 이야기의 소재이지만, 과거에는 민중에서 흘러가는 이야기일 뿐이다. 말로 구전되므로 이야기 내용에서 인물과 장소, 사건과 흐름조차 계속 변해간다. 문자로 기록되지 않으면 자세한 전후를 알기 힘든 부분도 많다. 그런 점에서 조선의 역사에서 기록문화를 담당한 사대부 중에 제대로 백성의 삶에도 관심을 가진 자가 있다.

 

유학(儒學)의 가치에서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기록이 아닌 그냥 사람 사는 이야기를 적은 학자가 있었다. 우리는 흔히 어우야담(於于野談)이란 말을 얼핏 들었을 것이다. 어우(於于)라는 것은 어우당(於于堂) 유몽인이 저술한 책이며, 야담이란 말처럼 정사만이 아니라 야사나 혹은 전설이나 민담조차 넣는 경우도 있었다. 유명한 역사적 기록에도 재미난 내용도 나온다. 유몽인을 임진왜란 당시 중국 명나라 외교를 진행하고, 분조와 무군사를 이끈 왕세자 광해군을 보필했다. 선조 말년과 광해군 집권 시기에도 유몽인은 계속 활동을 했다.

 

전쟁을 겪고, 어지러운 조선 중후기를 보냈기에 어우야담은 온갖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전설의 고향이나 혹은 조선의 야사를 다룬 드라마에 나올 법한 이야기 소재가 <어우야담>에 나온다. 명종 시기 을사사화로 인해 대윤 윤임 일파는 숙청을 당한다. 대윤의 일파 중에 유인숙, 유관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그 시체마저 부관참시를 당하는 화를 당한다. 여기 유관의 하녀인지 혹은 유인숙의 하녀인지 조금 다르게 전개되는 바가 있으나, 어우야담에서 유인숙의 하녀는 주인을 죽게 만든 정순봉의 집에 들어가게 된다.

 

처음 다른 종들은 모두 슬퍼하고 있으나, 얼굴이 고운 이 하녀만 오히려 생기 있는 표정으로 주인을 섬기고, 주인 가족 모두 그 하녀를 아꼈다. 하지만 어느 날 주인 정순봉이 계속 병을 앓다가 죽고 말았다. 가족들은 가장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고, 무당을 불러 점을 친 결과 주인이 사용하는 베개 안에 해골이 있었다고 한다. 인간의 해골이 베개에 있으니, 그 당시로는 저주, 지금으로는 전염병에 걸려 죽은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죽은 사람의 시신을 욕되게 하는 짓은 최악의 행위이다. 그러나 시체의 유골을 가져올 수 있는 이유는 해골의 주인이 병으로 죽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정순봉은 자신이 꾸민 계략에 결국 복수를 당한 셈이다. 문초과정에서 주인 가족에게 스스로 죄를 밟히고 그녀는 정순봉의 빈소 옆에서 맞아 죽었다고 한다. 이후 대윤 일파의 무고가 풀리고 명예를 회복하자, 그녀의 시신을 주인의 묘지 옆에 묻혔다. 지금도 문화유씨 일족은 그 무덤을 소중히 여기고 제사를 지내준다고 하니 600년 전의 일이지만, 인간의 도리는 그 자신이 생명이 다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정신이 살아있는 한 영원한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정순봉에게 아들이 있었지만, 부친이 저지른 죄악에 괴로워하며 평생 벼슬을 나가지 않고, 은거하여 살았다는 점이다.

 

어우야담은 전반적으로 이야기의 전개는 길게 가나, 결론 부는 너무 담백하다. 그가 보여준 글의 깊이는 그 간략성과 결과에서 보이는 삶의 자세이다. 인간은 글에서 자신의 생각과 인품을 보여준다. 한글이 아닌 지식인 계급인 사대부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유몽인의 글은 억지로 자신을 내세우려 하기보단 그저 주변 이야기를 듣고 촌평을 날리는 형태이다. 그가 보여준 글의 정신은 인간의 삶은 순탄치 않은 점, 그리고 과거와 권력에 대한 풍자, 전쟁이 안겨준 고통과 슬픔이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직접 수습했던 이로써 안타까운 사연도 많다.

 

사연의 주인공은 비단 양반 사대부일까? 전쟁 이후로 도적이 늘었다. 하지만 도적은 사람의 목숨을 노리는 게 아니라 배고픈 배를 해결하는 게 목적이다. 강도짓을 해도 살인을 하지 않은 이유는 대부분 그들이 양민이었지만, 현실의 빈곤과 어려움이 그렇게 만들었다. 유몽인은 다른 사대부와 달리 시문놀이에 젖은 정치가가 아니라 현실을 제대로 보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광해군 시절 임진왜란과 명나라 청나라 교체라는 최악의 시기였다. 어려운 시기였으나 어우야담에는 운명론적인 내용과 점복(占卜)에 대한 글이 많다.

 

점복으로 운명을 치는 사람은 양반보단 중과 천민 갖가지 사람이 많다. 또한 전쟁이란 큰 위기를 맞이했으나 귀신이야기도 나온다. 광해군 시대를 검토하면 유일하게 이때 외적의 침입이 없었다. 북으로 청나라에 대해 기미술을 사용하고, 왜국과는 외교와 통상을 재개했다. 북쪽의 평양감사로 박엽이란 인물이 있었다. 박엽이 북쪽에서 지키고 있을 때 청나라는 함부로 조선을 넘보지 못했다. 박엽이 지휘하는 조총부대는 아시아 최고의 사격부대였다. 물론 인조반정 이후 이괄의 난에서 이들은 모조리 박살났다.

 

그런 박엽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박엽은 성격이 호탕한데, 그가 전쟁 전후로 밤길을 가다 아름다운 여성이 자신의 옷깃을 일부러 스쳐가자, 그녀에게 말을 건 후 그녀의 집에 간다. 그녀의 집에 가니 가족들은 잠들어 있고, 그녀는 박엽에게 술을 접대하고 밤을 그렇게 보냈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녀는 사람이 아니고 차가운 시신이었다. 제대로 식사하지 못해 굶주림과 병으로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모두 죽어 있었다. 옆집에 가서 갖바치에게 사정을 알아보니, 그 집은 사대부 집안이었으나 전쟁 중 굶주림으로 집안 식구가 모두 죽었다는 것을 알자, 박엽은 관을 가지고 와서 그 집 식구 모두 장례절차를 수행하였다.

 

귀신이 단순히 나쁜 존재로 본 게 아니라 귀신조차 현명한 존재로 그려낸 셈이다. 인간의 운명이 죽음을 당할지라도 그 본분을 잊지 않았고, 하물며 유관의 어린 하녀는 자신의 주인을 위하여 복수를 했다. 민중이라도 신분적으로 하잘 것 없어 보이는 종복들도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런 유몽인이기에 그의 최후 역시 뭔가 모르게 마음이 아프다. 유몽인은 본래 동인이었고, 동인이 남북으로 갈렸을 때 북인으로 전향한다(그래서인지 동인에서 북인의 영수로 활동한 이산해의 이름이 자주 거론된다).

 

임진왜란 당시 남인 서애 유성룡이 북인의 탄핵을 받고 물러나자, 북인 이산해와 그 중심세력이 등장하고, 이때 광해군은 어려운 시기를 보낸다. 광해군은 의병과 같이 활동한 세력이므로 북인 내에서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나누어지고, 선조가 죽자 소북 영수 유영경은 광해군 세력인 이이첨에 의해 귀양 후 사약을 받고 죽는다. 유몽인은 북인에서 중북이었고, 권력에 지향하기보단 그저 업무에 충실히 이행하고, 글을 봐도 권력을 향하기보단 인간의 운명과 도리에 관심을 가진다.

 

말년은 권력의 중심보다 조용히 자연과 함께 살고자 했던 그의 꿈은 박살난다. 1623년 인조반정에서 유몽인은 직접적으로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나, 자신의 아들과 주변인물들이 광해군지지 세력이었고, 인조반정에 대한 반정을 계획하다 발각되어 연좌되어 죽게 된다.

 

유몽인은 세상물정에 밝은 사람이다. 그의 글을 봐도 세상의 풍파가 얼마나 심한지 더구나 기묘사화의 조광조, 을사사화 윤임, 기축옥사 최영경을 거론한 자체로도 당쟁과 정치권력의 문제를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인간의 도리를 알았다. 아들이 인조반정에 반발할 때 유몽인이 말리려다 참은 이유는 많은 사료에 나온 것으로 유몽인의 시 <상부탄(孀婦歎)>을 아들이 매우 좋아했기 때문이다.

 

일흔 된 늙은 과부, 안방을 지키며 홀로 사는데(七十老孀婦, 單居守空壺)

이웃이 개가를 권하며 무궁화 같은 얼굴의 선남이라네(傍人勸之嫁, 善男顔如槿.)

여사(궁중에서 글을 맡은 여관女官)의 시를 많이 읽고 태임(太姙)과 태사(太姒, 각각 문왕과 무왕의 어머니로 덕 있는 부인을 상징한다)의 가르침도 익히 아니(慣讀女史詩, 頗知妊姒訓)

흰 머리에 화려하게 단장하면 고운 화장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白首作春容, 寧不愧脂粉.)

 

인조가 왕이 되어도 자신은 광해군에 대한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유몽인이 이미 세자시강원에게 광해군에게 학문을 가르쳤고, 그와 더불어 임진왜란을 수습했기에 누구보다 광해군에 대한 마음이 아련했을 것이다. 북인의 특징, 박엽에 대한 글이 있는 점에서 그가 바라본 정치적 상황은 어림잡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우야담에서 어떻게든 발버둥치려 해도 운명의 길을 접어드는 이야기가 많다. 가령 점술사가 무덤에서 벌이 나오면 나를 죽일 것이라 했는데, 바로 그렇게 되는 이야기나, 아니면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이란 예언조차 그렇다.

 

이산해와 관련된 내용에서 아계 이산해의 스승은 토정비결을 저술한 이지함이다. 이지함은 이산해의 작은아버지였던 것이다. 인간의 운명은 바뀔 수 없는 것인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준경이 천거한 인물 중에 구수담이란 학자가 있다. 그는 명종 때 억울하게 죽었다, 그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여자에게 빠져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 이준경이 그에게 큰 호통을 친 후 다시 공부하여 벼슬에 올랐다. 구수담의 아들 구영준이 손톱 하나가 빠져서 이준경이 왜 그런지 물어보니, 아버지 구수담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자 구영준은 너무 슬퍼서 땅에 손을 계속 움켜쥐었다가 그래 된 것이다.

 

인간의 천성을 고칠 수 있지만, 단지 이준경 같은 희대의 명재상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운명의 행운일지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 구수담이 죽은 이유도 이준경의 천거로 조정에 나갔기 때문일 수 있다. 인간의 운명은 알다가 모르고, 일이 끝난 것을 보면 그게 어찌할 도리가 없이 되었다는 것도 볼 수 있다. 어우야담은 그가 직접 보거나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기록했기에 일정한 소재가 아닌 다양한 내용을 등장한다. 하지만 책을 보면서 참 불행 중 다행이라 여겼다. 광해군 시기 한국의 국문학은 새로운 길을 열어간다.

 

한국 국문학에서 한글로 시조를 읊은 고산 윤선도가 광해군 시절 이이첨을 비판하다 귀양가고, 한국 국문학 소설에서 홍길동전이 허균에 의해 만들어진다. 조선의 야사 중에 하나인 어유야담 역시 광해군 시절 나온다. 허균은 능지처참으로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기에 그의 서적은 모두 소실될 뻔했다. 다행히 그의 후손이 소중히 보관하여 400년 후 우리나라에서 소중한 소설이 되어주었다. 유몽인 역시 그런 위기에 겨우 벗어난 인물이다. 시대의 아픔에서 저자들은 힘든 여정과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들의 글은 우리에게 영원한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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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3-15 08: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의「어유야담」은 중국의 「요재지이」와 같은 성격의 민담설화집인 것 같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03-15 09:23   좋아요 1 | URL
민담과 설화를 문자로 남겼으니 그가 해낸 업적은 가히 높다고 봅니다
 

최근 일본의 행태가 심심치 않은 양상을 보여준다. 과거의 잘못된 일들을 사과하고 풀어나가기 보다는 오히려 은폐하고 부정하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전번 정권에서 가장 치욕적인 외교전략 중에 하나가 일본군성노예로 학대받은 그분들에 대한 처우이다. 100억에 국가와 민족의 자존심을 팔아먹는 현실에서 많은 갈등을 빚었다. 그리고 그런 처우를 하던 인간들만 모이다보니 과거에 일어난 비참한 역사를 드러내기보단 오히려 감추려고 노력했다. 일본군이 과거 촬영한 사진 중에 위안부에 끌려간 여성의 사진이 있었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그녀들을 유린하고 밟는 것도 모자라 끔찍하게 살해한 기록이 사진으로 나온 기사를 보았다.

 

예전에 그런 사진을 찾았지만, 국가에서 예산을 반영해주지 않고 그런 사진을 드러내는 것을 원하지 않아 수면 아래 감추었지만, 후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람을 끔찍하게 살해하고 그 시신을 땅에 매장하는 사진이 세상에 나오자 UN에 간 일본 외교성 직원은 그것은 자신들의 과거가 저지른 죄가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최근 일본에서 이런 관점을 정치권과 언론, 심지어 교육계까지 침투했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일본 유치원 교육방식을 보는데, 순간 소름이 돋았다. 독도를 자기들 것이란 점, 중국과 한국이 일본을 왜 미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점, 게다가 일본 천황의 신위에 계속 참배하도록 하는 방안이다.

 

일본에서 최근 법안개정 중에서 정부의 정치적 색과 맞지 않거나 그런 기미가 보일 경우 그 일본국민을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악법을 준비한다는 기사를 봤다. 이미 아베 총리의 조상이 일본전범 A급이란 점, 그가 전형적 극우성향 정치인이란 점에서 일본의 형태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로 다시 회귀하는 무리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조류에서 역사는 아주 중요한 전략이다. 역사는 교육이기도 하나, 역사 그 자체가 그 나라의 국민을 대변하는 하나의 이야기들이다. 역사라는 이야기 거리는 교육만이 아니라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소설, 드라마 등 다양한 콘텐츠로 쏟아 나오는 것이다.

 

일본 청소년이나 청년들은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 그 중에 좋아하는 장르는 당연히 전쟁이나 전투 장르이고, 전쟁 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국시대를 좋아한다. 오다 노부나가를 비롯한 아케치 미츠히데, 다케다 신켄 등 같은 영주 군도 있지만, 제일 중요한 인물로 보자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쓰 같은 인물이다. 임진왜란 전후와 일본 내 세키가하라 전투는 일본역사에서 에도시대를 열게 된 관문이었다. 문제는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존재성이다. 히데요시 일족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로 모조리 섬멸시켰다.

 

그가 일본 전국을 통일한 점에서 대단한 인물이나, 그의 모습은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에서는 상당히 미화되어 있다. 특히나 전국무쌍에서 보여준 히데요시는 천하인(天下人)로 묘사고, 그의 정부인 네네는 상당히 포용성이 높은 여성으로 보여준다. 역사적 사료에서는 전혀 다르나 게임과 애니메이션이란 콘텐츠는 그러하다. 이게 문제가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한국사회를 두고 말하자면 칭호는 참으로 많다. 하지만 이것만은 그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바로 드라마천국이다. 한국사회에서 드라마는 모든 대중들의 공통관심사이고, 월화 내지 수목, 주말드라마의 흥행은 한국사회에 늘 새로운 신드롬을 안겨준다.

 

드라마 장르에서 한국역사를 소재로 한 사극 역시 많이 등장한다. 예전에 인상 깊게 본 드라마 중에 <불멸의 이순신>이란 작품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드라마로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사실적 역사자료를 토대로 이야기를 붙인 것이다. 그러나 막상 보면 조금 다른 내용들이 종종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순신과 원균을 어린 시절 만난 적이 없고, 또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원균이 보여준 모습은 상당히 무인 그자체로 묘사한다. 남자답고 거칠게 없는 자로 말이다. 원균을 바라본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가 실제로 선조 후기 임진왜란 공신목록에서 선무원종공신록권(武原從功臣錄券)에서 이순신과 권율과 함께 1위로 책정되어 있다.

 

원균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불멸의 이순신>을 보면 그를 나름 훌륭한 무관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사료를 다시 정리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드라마와 역사적 사료는 기본적인 배경은 유사할 수 있지만,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관점은 올바를 수 없다. 역사는 바로 이런 것이다. 어떤 실제 행위에 대한 기록에서 진실에 대한 관계성을 두고 사실에 대한 관점은 보는 이만 아니라 정치적 권력과 시대적 흐름에 따라 새롭게 조우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그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깊은 문제의식을 가진다면 당연히 전쟁관련인물에 대한 평가를 어떤 식으로 내릴 것이다.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두고, 영웅시하는 문화콘텐츠를 비롯하여 그가 조선을 침공할 때 침략자의 이름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업무에 지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변질시킨다. 도쿠가와 정권은 조선침략에 대한 문제점을 바로잡기 위해 조선 앞바다를 노략질하는 왜구를 관리하고, 히데요시 일족과 그의 수뇌부를 모조리 숙청한다. 게다가 조선과의 외교와 교역을 재개하는 방식을 택한다. 임진왜란 당시 히데요시의 권력을 일본 천황보다 더 우위에 있었다. 히데요시 발언에 수많은 일본인들의 생명이 오고가는 시대였다.

 

임진왜란의 사료를 찾아보면 왜군들은 처음에 승기를 몰아 점령해 나갔지만, 일본 열도는 기본적으로 조선보다 온도가 높았고, 이에 따른 의복이나 음식문화가 많이 틀렸다. 일본과 한국의 음식을 뭔가 유사한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엄연히 존재한다. 임진왜란이 4월에 일어난 일이나, 조선시대 4월은 음력으로 계산했기에 지금으로 따지자면 5월 중후반 정도이고, 왜군이 충주의 신립부대를 섬멸하고 한양과 평양에 간 시점이 여름이다. 그 말은 곧 일본기후가 습하고 더운 점에서 일본보다 덜 습하고 더운 조선의 여름이 그들에게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토 마사요시를 비롯한 고니시 유키나가 군은 늦가을이 옥 눈이 내리는 겨울이 되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조선의 겨울은 일본에서 느끼지 못한 추위였고, 그들이 침공 시기에 가지고 온 옷은 겨울용이 없었다. 남측 부산과 거제 일원은 그나마 따뜻한 지역이나, 한양 위로 올라갈수록 추위는 무서운 적이었다. 왜군이 조선과 접전하면서 사망하게 된 이유가 전투 중 교전보다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병에 의해서였다. 풍토가 맞지 않은 점, 겨울에 추위에 의한 동사(凍死)와 감기 등은 치명적인 고통이었다. 가토 마사요시가 함경도로 가면서 정문부의 전술에 걸렸을 때 가장 큰 고역이 함경도의 차가운 겨울바람과 눈이었다.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아도 많은 병사가 죽었고, 숫자가 수백에 지나지 않은 의병에게 쫓김을 당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쟁에 끌려나온 왜군 내에서 동요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임진왜란 사료를 보면 왜군 일반병사들은 어서 전쟁을 끝내고 집에 가고 싶어 한다. 전쟁에 나온 대부분의 장정은 영주의 명령에 의해 오거나, 조선에 가서 공을 세워 가계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들에게 온 것은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각종 질병, 바다의 이순신이 가로막고 있었다. 전쟁을 계속 하는 한 그들은 조선에 남아 생명을 잃을 각오로 총과 칼을 잡고 있어야 했다. 이런 상황이니 그들은 자신의 군주인 관백 히데요시에게 원망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선의 임금 선조 역시 조선의 민중에게 원망을 받았지만, 왜군의 군주 히데요시 역시 일본의 민중에게 원망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전쟁에 나가면 자신의 아버지, 아들, 남편, 형제를 보내야했다. 먼 길을 떠나 시체조차 돌아오지 않으면 남은 가족의 마음은 어떨까? 수 십 만에 이르는 병사를 위한 군수물자 조달로 생필품이 부족해지니 더더욱 원망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군 전체가 배를 스스로 가르고 할복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사무라이들이 아니다. 히데요시의 존재가 박멸될 때 일본은 에도를 지나 메이지를 맞이했다. 그리고 조선을 침략하게 되었다. 조선침략이 제대로 된 것은 임진왜란 밖에 없었다. 을묘왜변에서 전남지역의 왜구는 도순찰사 이준경에게 패배를 당했다. 임진왜란을 임금이 한양에서 몽진하여 의주까지 가고, 7년 동안 치룬 거대한 전쟁이다.

 

하지만 그 일이 일에게 하나의 역()에 불과했다. 그래서 풍태합조선역(豊太閤朝鮮役)이란 책이 나온 것이고, 일본 역사교과서에 임진왜란을 두고 문록경장의 역(文祿慶長)이란 하는 것이다. 다행히 왜군은 조선의 수군과 의병에게 무릎을 꿇게 되었지만, 그 때가 잠시였지 을사늑약 이후 합일병합 그리고 해방 후 역사와 외교문제를 보듯이 우리는 결코 임진왜란이 끝난 것이 아니다. 임진왜란의 승리를 거둔 전쟁이나 정말 승리한 전쟁인 것일까? 조선 인구 반 정도가 죽었고, 밭과 논을 황폐화되고, 성리학의 도리조차 사라졌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만든 주인공은 1위를 당연히 이순신이다. 그리고 이순신을 천거한 유성룡, 권율과 곽재우, 이항복과 이덕형 같은 문무 관료와 의병이 없었다면 우리의 국어는 훈민정음 한글이 아닌 가타가나의 일어였을 것이다. 이순신은 6갑자가 도래한 420년 전 사람이다. 그가 서가한지 400년이 넘어도 임진왜란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해주게 한다. 전쟁이란 참 끔찍한 일이고, 전쟁에서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힘이 없는 일반 민중, 지금으로 보면 국민이다. 일제에 밟힌 그 어둠의 36년도 점점 잊어져 가는데, 임진왜란은 오죽할까?

 

하지만 이순신의 전쟁사는 세계 4대 해전에서 한산도 해전이 있었고, 그보다 더한 것이 명량해전이다. 이순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 이순신이 대단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최근에 읽은 <이순신과 임진왜란>과 그리고 <난중일기>, 더 나아가 비봉출판사에서 제작한 <충무공 이순신 전서>에서 더 많은 것을 알았다. 비봉출판사 사장이면 창립자가 직접 책을 출판했는데, <난중일기><징비록>을 비롯하여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 각종 장계와 사료들을 정리하여 이순신의 7년 전쟁을 찾아 떠났다.

 

그 내용 하나하나를 일일이 나열할 수 없지만, 진정한 적은 외적이기도 하나,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았다.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 <현자 곽재우>가 있었다. 곽재우 장군은 홍의장군으로 유명한 인물이나, 그가 최초로 의병을 거사한 인물인 점을 잘 모를 것이다. 곽재우 장군이 없었으면 이순신 장군의 전술이 성공할 수 없었다. 조선에서 유일하게 무사한 곳이 전남지역이었다. 전남의 길목을 진주성과 의령 정암진에서 잡아두었기 때문이다. 곽재우 장군이 경상남도에서 전라남도로 진출하는 왜군을 막았기 때문에 전라좌수영이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다. 곽재우를 비롯한 많은 의병들이 우후죽순으로 창궐하고, 산속에서 수행하던 승려들도 의승군으로 참전하여 조선의 민중을 구원하려 했다.

 

불교의 가르침에서 살생은 금지하고, 더구나 인간의 목숨을 헤치는 것을 최악으로 여겼지만, 조선의 백성들이 왜군의 칼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 있는 게 더 큰 죄였다. 악귀의 칼날에서 조선의 민중을 구하는 게 진정한 불도였다. 문제는 이런 의병들이 너무 활약한 점이다. 곽재우는 조선선비 남명 조식의 마지막 제자이고, 조식 선생의 외손녀의 남편은 곽재우였다. 조식 선생이 차고 있던 방울과 칼은 수제자 김우옹과 정인홍에게 주었다. 정인홍을 비롯하여 김면 등 조식 선생의 문하생들은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웠다.

 

곽재우가 공을 세우자, 임금 선조는 시기했고, 게다가 관료들도 동서로 분당되어 서인의 관리들은 동인계열 관료 내지 의병을 모함하거나 서로 갈등을 빚었다. 곽재우와 경상감사 김수의 일화도 그렇고, 동인계열에서 남인과 북인 역시 갈등을 빚었다. 선조가 의주행재소로 호종할 때 많은 신하들이 외면하다 행재소가 안정되자 여기저기서 찾아와 전쟁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망치고 있었다. 이순신의 승전에 좋게 여겼지만, 백성들이 이순신과 곽재우를 더 공경하자 선조는 질투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잘못된 소식이나 소문 그리고 주변 간신배의 말을 듣고 충신들을 헤치려 했다.

 

김덕령 장군은 아무 죄도 없는데, 반란군과 억지로 엮여 장살당해 죽게 되고, 그 계기로 수많은 의병들이 산으로 숨어들어갔다. 이순신 장군이 모함에 의해 백의종군하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발탁되는 과정에서 김덕령의 동생 집에 간 일화가 있다. 김덕령의 동생 역시 의병활동을 했으나 임금 선조와 간신배의 계략으로 형과 친우들을 잃었다. 평생 세상에 드러나지 않으려한 그의 모습에 안타까움만 더해간다. 이순신이 모함에 걸린 이유는 그의 인기도 있었지만, 그가 남인의 영수 류성룡의 비호를 받는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류성룡의 정치적 정적인 윤두수는 어느 정도 보면 영리한 신하지만, <충무공 이순신 전서>를 보면 정말 역적 간신배가 따로 없다. 원균을 기용한 점에서 선조와 똑같은 발상을 했지만, 막상 원균이 칠천량에서 패배 후 조선수군이 몰살하자 그 문제를 오히려 윤두수 같은 서인계열 신하에게 몰았다. 그리고 이순신이 명량에서 극적으로 승리하여 명나라 장수들이 이순신의 공을 치하하자, 선조는 오히려 이순신의 업적을 일개 무관이 해야할 일로 표현했다. 명나라 장수 앞에 머리를 숙이고 절을 하고 아부를 떨던 선조, 백성들은 죽어가고 있는데 정치적 입지만 신경 쓰고, 그가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기 위해서 왕좌를 전위한다는 교서를 내리고, 정치적 이권에 눈이 밝은 신하는 전위 양도를 반대하기 위한 사죄 모드로 돌입한다.

 

전쟁에서 각종 병권과 인사 업무, 그 외에도 처리할 공사업무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조정은 마비된 채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런 이야기는 <충무공 이순신 전서>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책을 읽으면 이순신 직접 만든 <난중일기>와 장계만 아니라 7년 전쟁동안 <선조수정실록>을 토대로 시기적으로 차례를 구성했기에 당연히 조정의 일들이 이순신 장군이 행하던 업적을 어떻게 풀어 가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이들은 모함을 당하고, 정작 전쟁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자들은 시문놀이 빠져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급했다. 이런 자들을 몰아내지 않고 계속 조선을 지배했으니 히데요시의 원한은 뒤에 가서 풀린 셈이다.

 

일본은 그런 히데요시의 흔적을 지우려 하다 이제는 다시 국가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역사를 인지하는 방식이 곧 그 나라의 민족성이고, 그들이 원하는 이념이다. 일본이 그렇다면 한국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순신 장군이 보여준 군사 경영은 군비만 충당하는 게 아니라 백성들의 생계를 구원하고, 행재소의 임금에게 공물을 보내 조정에 큰 보탬이 되었다. 정치경제학이란 학문은 없어도 정치경제학적인 자세, 게다가 목민관의 자세도 보여준다. 하지만 현실은 권력에 의해 내몰리고, 그 이후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면사(免死)라는 교지를 받는데, 그 면사첩은 선조가 내린 것이 아니라 명나라 황제가 이순신에게 내린 것이다. 이순신은 당색을 갖추진 않으나, 당색은 당연히 친구 류성룡에 의해 남인에 가깝다. 원균을 중용한 선조와 간신배 일원을 보면 대부분 서인계통이었다. 윤두수는 원균의 아내와 가까운 친척이었고, 서인의 조력을 받았던 원균은 통제사 자리를 이순신에게 빼앗을 수 있었다. 이순신은 평생 변방의 무관으로 고생했으나, 원균은 중앙정계와 연줄이 있었다. 전쟁 와중에 윤두수의 집에 뇌물이 갔다는 기록에서 조선의 백성은 배고 고파 굶주려 죽고, 저잣거리에 시체가 널려 있으며, 아비와 자식이 서로 잡아먹는 비참한 지경이 되었다.

 

모함을 받고 죽음의 위기에서 백성을 위해 몸을 던진 이순신의 삶을 두고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군사정권 시기 이순신의 이름은 군인이란 신분을 우상화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다 어느새 묻어질 것으로 생각했지만, 다시 이순신은 영웅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영웅은 영웅주의적인 인물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보통 사람과 교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늙은 노모를 두고 소식을 늘 기다리던 아들 이순신, 아들들이 아픈 것을 두고 고민하던 아버지, 비가 많이 와서 농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목민관 이순신, 군졸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덕장 이순신, 그는 강철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마음이 아주 섬세하고, 생각이 치밀한 사람이었다. 늘 위장이 좋지 않아 약을 입에 달고 다녔고, 몸살로 며칠이나 방에 앓아눕기도 했다. 그래도 늘 송사를 처분했고, 전장에서 부하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겼다. 원균은 술이나 마시고, 기생을 불려 음탕한 일에 재미만 보았다. 최후에 조선수군을 모조리 수장시켰으니 그 죄가 얼마나 깊은가? 이 책에서 이순신에 대한 행장록만 아니라 원균의 행장록을 수록했다. 이 책을 저술한 작가의 눈에 보이는 원균과 선조의 처사는 참으로 한심했다.

 

곽재우에 대한 기록을 봐도 그가 과거에 2위를 했는데도, 임금이 보기에 거슬린 문구가 있어 과거합격을 취소시켰다. 의병장을 탄압했고, 임진왜란 이후 청나라가 침공한 정묘호란 때 의병의 창궐이 거의 없었다. 나라를 구하는 자는 백성이고 나라를 만드는 자 역시 백성이니, 그 간단한 진리를 잊으니 그저 하늘을 원망하고 또 원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조금 재미난 기록이 나오는데, 선조는 원균이 실패해도 이순신에 대한 정치적 대항마로 이용했고, 원균이 전사한 뒤 원균의 부인에게 나라의 녹을 내려주었다.

 

그런데 광해군이 집권하자 말자 바로 원균의 처에게 나라의 녹을 내리지 않게 되었다. 이후 인조반정 이후 다시 서인들이 집권하자 원균의 아내에게 국가의 녹이 다시 내렸다는 것이다. 광해군은 알고 있었다. 이순신이 얼마나 분투했고, 원균이 얼마나 한심한지 말이다. 서인들과 선조의 전교양위 사건을 두고 가장 큰 피해자는 광해군이고, 그때 중간에 중재해 준 자는 류성룡과 일부 충신이었다. 나머지는 선조와 더불어 권력을 유지하려 했고, 변방의 장수는 군수물자도 제대로 보급 받지 못한 채 고생만 했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말고도 무의공 이순신(李純信)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무의공 이순신이 생각보다 많이 시련을 겪는데, 그가 종친인 점도 있지만, 한편으로 학봉 김성일의 문인인 점, 학봉 김성일은 퇴계 이황의 제자이고, 류성룡과 같은 남인이기에 당색에 따른 견제가 있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자들은 외면 받고, 중앙에서 나라에 좀만 내는 자들이 승승장구하는 과거 그리고 현재에 이르는 사태를 보자니 역사란 반드시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할 하나의 가치이다. 지나간 역사의 기록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어떻게 가야할지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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