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츠메 우인장 1
미도리카와 유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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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츠메 우인장은 기본적으로 나츠메 타카기라는 한 소년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 나간다. 나츠메 타카기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영혼과 귀신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으며, 게다가 인간이 아닌 영적인 존재에게 물리적인 힘을 전해줄 정도로 강력한 영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보다 훨씬 월등한 신체능력이 다른 모습을 보이면 이상하게 보거나 배타적으로 대하기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나츠메 타카기는 자신의 이상한 능력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남들로부터 외면을 당한다.

단지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이 타인들에게 보이지 않은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남들에게 심한 배척과 따돌림을 받는다. 그의 따돌림에 가지는 상처는 타인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인간도 귀신도 피해 사는 외로움 인생을 살게 하였다.

게다가 그는 태어나기 시작하여 부모님들이 일찍 돌아가시어 주변 친척 손에 길러졌으나, 그의 이상한 행동에 다른 친척들까지 외면하기 시작한다. 그는 세상의 모든 인간에게 외면당하는 진정한 외로움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날 자신의 먼 친척집에 오게 되었는데, 그 곳의 아저씨와 숙모는 슬하에 자녀들이 없었다. 아주 작고 소박한 마을에 위치한 작은 집이었으나, 매우 평화롭고 조용하고 인간을 느낄 수 있었던 공간이었다. 나츠메에겐 이곳이 유일한 안식처이며 보금자리이었다.

그러나 그런 좋은 자리라도 그를 괴롭히는 귀신들에게 여전히 공격당하고 있었다. 그럴 때 우연히 고양이 모습을 한 야옹선생을 만나기 시작하였고, 그 뒤로 다른 친구들도 만났으며, 어느덧 인간과 귀신, 정령까지 나츠메 타카기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나츠메 타카기가 계속 귀신하고 어울리면서 그는 우인장을 발견되면서 우인장에 적힌 귀신들의 이름을 돌려주기로 한다. 그런데 그 귀신들과 만나면서 나츠메 타카기는 잃어버린 할머니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나츠메 레이코라는 사람은 나츠메 타카기의 친할머니다. 그녀도 타카기처럼 어린 시절부터 귀신을 볼 수 있었고, 게다가 영력이 강해 왠만한 귀신들은 다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도 너무 외롭고 불행했는지 나츠메의 아버지를 놓은 후에 일찍 세상을 하직한다. 나츠메가 우인장에 적힌 이름을 귀신들에게 돌려줄 때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할 때마다 할머니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추억이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잡는다.

그리고 할머니를 이해하고 아저씨와 고모의 소중함을 느끼고 주변 친구들도 만들며 주변 귀신과 정령들과 같이 친하게 지낸다. 이렇게 외로운 한 소년과 그리고 불완전한 존재들이 어울리면서 서로 돕고 하는 모습에서 나츠메 우인장은 하나의 잔잔한 소설처럼 다가온다.

 흔히 치유계 작품이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인간의 무의식적인 심리나 욕구에 맞추기만 급급한 것이 현대 만화와 애니메이션, 소설, 영화의 추세이다. 그러나 나츠메 우인장은 인간의 욕구와 심리보단 그 작품 내에 함유되어 있는 그 이야기로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세상에 버림받은 존재들이 그리고 외롭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항상 서로를 의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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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강림 1
유현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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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에게 신화, 전설, 민담은 아주 오래 전의 선조들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어째서 이상하게도 그 예전에 선조들이 즐기던 그 이야기들이 다시 고전으로 되풀이되어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에서도 계속 논의되고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는 역사보다 철학적이라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는 곧 신화라는 뜻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고대 그리스 비극이나 신화 역시 아리스토텔레스가 살기 수백년전에 나온 작품들이다.

그런 점에서 예전에 입으로나 혹은 서적으로 전승되어 내려온 고전들이 왜 아직까지도 유효할까 생각해보면 그 이야기 속에는 인간이 간절하게 원하고 이루지 못한 많은 소원과 욕망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와 같은 전설이나 신화도 결국 오늘날의 인간들에게 계속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오히려 옛날 이야기라는 수식어로 통해 나와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식으로 돌려 말하기 쉬운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고전이야기를 다시 각색한 만화들은 과거 인간과 혹은 현재 인간이 원초적인 갈등이나 이야기가 변화없다는 것을 알려주기에 정말 좋은 사례이다.

한국 만화 중에서 이런 전설을 다시금 보여주는 작품이 있다. 그것은 선녀와 나뭇꾼 전설로 토대로 만든 선녀강림이다. 본래 선녀와 나뭇꾼의 전설에서 나뭇꾼은 극심한 효자로 병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매우 착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유일한 걱정거리가 있으니 나이가 이미 찬지가 오래이나 극심한 가난으로 인해 혼기를 맞추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뭇꾼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자신의 입장을 돌보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어머니는 아들이 걱정되어 결혼을 어서 해주기를 바란다. 그런 나뭇꾼은 어느날 나무하러 산에 들어가는데, 어느 사슴이 사냥꾼에게 쫓기자 이에 불쌍히 여겨 사냥꾼의 포위망에서 숨겨주게 된다. 사슴은 나뭇꾼의 자비에 감동받아 선녀가 목욕하는 곳을 찾아가는 길을 알려준 뒤에 사라진다.

그리고 나뭇꾼은 사슴의 말대로 선녀가 목욕하는 호수를 찾아 선녀옷 하나를 훔쳐내고, 다른 선녀들은 모두 날개옷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는데, 옷을 분실한 선녀는 날개옷이 없어서 결국 나뭇꾼에 의해 나뭇꾼의 집으로 가게 되고 둘은 혼인하게 된다. 그리고 선녀는 나뭇꾼이 선량하고 효자라는 점에서 아이 3명을 낳아주고, 어느날 나뭇꾼에게 자신의 고향인 하늘나라에 가고 싶다고 한다.

나뭇꾼은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날개옷을 주자 선녀는 이옷을 받고 하늘나라에 가버린다. 여기서 다른 이야기 2가지가 있다. 하나는 나뭇꾼이 선녀에게 날개옷을 주고 난뒤에 홀로 지상에 남는 것과 하나는 나뭇꾼이 선녀의 도움으로 하늘나라에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온 나뭇꾼은 지상에 있는 어머니가 그리워 아내인 선녀에게 부탁하여 용마를 타고 지상에 내려오나 용마에서 내리게 되면 죽는다는 금기를 듣고 내려간다. 그러나 나뭇꾼은 사랑하는 어머니를 보는 것에서 그 반가운 마음을 진정하지 못해 용마 아래 떨어져서 죽고, 나뭇꾼은 닭으로 환생하여 사랑하는 아내인 선녀와 아이들이 있는 하늘을 보고 슬피 울었다고 한다.

물론 선녀강림의 모티브는 선녀와 나뭇꾼이나 기본적인 맥락은 같다. 단지 차이점은 선녀인 환타가 자신이 알던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가 아니라 추하고 더러운 존재라는 것이다. 거기서 자신의 가치관이 무너지고, 동생과 어머니를 배신한 자인한 형은 환타의 아버지는 그 자신의 죄로 인해 하늘나라 어느 비밀장소에 봉인된다.

소재전개가 비슷하나 형제의 유무와 가족의 비극사는 약간 추가되었다. 하지만 선녀라는 존재가 고귀하고 인간이란 존재가 하등하다는 기본 관념은 바뀌지 않았다. 아마 이 전설이 나오던 시절은 남녀가 자유연애가 가능한 한국사회에서 어느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와 살았으나 자신의 신분이 미천하여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거나 거기에 좌절하여 만든 신화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반대되는 신화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가 있다. 고구려 바보로 소문난 온달은 극심한 효자이나 지적능력이 매우 떨어진다. 얼마나 바보냐면 도성에 있는 임금님의 귀에 들어갈 정도이다. 임금에겐 사랑하는 공주인 평강이 있었으니, 평강은 어릴적에 상당한 울보였고, 평강이 울때마다 임금인 아버지는 평강에게 자꾸 울면 바보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했다. 그러면 평강은 마법처럼 울음을 멈추고 웃었다고 한다. 그리고 평강이 나이가 차서 혼기를 맞자 평강은 아버지의 어린시절의 농담을 근거삼어 온달을 부마(임금의 사위)로 삼아달라고 한다.

그러나 임금은 온달같은 바보와 결혼한다는 평강공주의 말에 크게 노하여 평강을 도성에서 내보낸다. 그리고 평강은 온달집에 가서 온달과 결혼하여 그에게 학문과 무술을 연마하도록 도와주고 온달은 문무를 쌓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한 사람의 장수로 인정받아 임금의 부마가 된다.

이 바보온달 전설과 선녀와 나뭇꾼의 전설은 당시 여성은 계급적으로 높으나 남성은 미천했으며, 그 남성은 여성과의 사랑으로 통해 신분 상승을 하기 원했던 욕망이 보인다. 그러나 바보온달은 좋은 결말로서 이야기를 마무리짓지만, 선녀와 나뭇꾼은 아이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비극으로 끝난다. 당시 여성은 결혼 후에 아이를 가져도 재혼이 가능한 시대에 나온 이야기일 확률이 높다.

그러나 이런 신화와 전설로 통해 오늘날에 살아가는 우리 한국사회의 많은 대중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는 계속된다고 본다. 왜냐면 신분이나 배경은 다를뿐 그런 인간은 변함없이 유지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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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미가 1
사쿠라바 코하루 지음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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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들은 영웅성을 표대로 하는 웅대한 모습보단 작고 사소하지만 누구에게 공감이 갈 수 있는 작품이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메시아를 바라거나 혹은 광기에 빠질지도 모르는 한 영웅을 추앙하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이 좋다는 의미이다.

그 추앙받는 영웅보다 더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은 사실 내가 살아감에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소중하고 아름다운 존재를 찾아보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히 가족, 친구라고 말하겠다.

가족과 친구는 언제나 옆에 존재하므로 그 소중함을 망각하기 쉽다. 물론 글을 적는 나 역시 그럴것이다. 사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공기가 소중하나 그 공기가 오염되어 자신의 호흡기관을 괴롭히지 않을때까지 눈치채지 못한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한계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미나미가란 만화책은 가족과 친구에 대한 소중함과 그 소중함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룬 작품이다. 하지만 가족이라고 모두 완벽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미나미가에서는 부모가 등장하지 않는다. 큰 언니 하루카가 어린 동생인 카나와 치야키를 돌보면서 하루하루를 아주 평화롭게 때로는 시끄러운 일상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차갑고 고집쟁이인 막내 치야키, 장난꾸러기에 사고뭉치 카나, 엄머같은 하루카 이 세자매는 서로를 의지하며 매일같이 재미난 일상을 보여준다. 거기에 3자매의 학교친구와 주변 사람들은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인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매우 친숙하다.

그렇게 어디서나 존재할 것 같은 사람들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미나미가는 그런 소동과 이야기들을 아주 유머스럽게 풀어나가는 한편의 꽁트이다. 하지만 그런 유머가 넘치는 미나미가에는 다른 만화책에서 볼 수 없는 깊은 감동과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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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에반게리온 12
GAINAX 지음, 사다모토 요시유키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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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애니메이션 역사에서도 큰 획을 보여준 명작 애니메이션이다. 그러나 원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제작하였으나 각본은 에도카와 요우지가 했고, 각 작품별 콘티나 작화는 다른 애니메이터가 작업하였다.
이 신세기 에반게리온 애니메이션 판이 아닌 만화책판은 안노 히데아키가 만든 것이 아니라 안노 히데아키와 더불어 오래동안 같이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온 사도모토 요시유키라는 일러스터이다,
그는 가이낙스 첫 작품인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에서 시작하여 현재까지 발표된 신세기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서와 파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고수한다.
이번 신세기 에반게리온 12권의 특징은 그 전에 모든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가이낙스 소유판권이었으나 안노 히데아키와 사도모토 요시유키가 카라라는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는 바람에 가이낙스와 카라가 공동으로 판권을 소유하게 된다.

카라를 만든 안노 히데아키는 기존에 자신이 가졌던 가이낙스적인 모습에서 좀 더 나아가 실사영화나 다른 작품을 만들기도 하였으나 예전에 가이낙스에서 같이 활동하던 마사유키, 츠루마키 카즈야까지 같이 합류한다. 현재 가이낙스의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감독은 가이낙스 초대 작품 감독과 각본을 맡아 야마가 히로유키가 있으며, 그의 회사 밑에 대표적인 감독은 이마이시 히로유키이다. 그런 점에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기존 1995~1997년 사이와 많은 노선을 걸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일단 그런 가이낙스 분기점에서 사다모토 요시유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비교해보면서 감상하는 것이 정말 제맛이다. 이번 12권은 신세기 에반게리온 극장판 end of eva의 1번째 편에 해당된다. nerv 본부가 제레와 자위대에 의해 폭바되고 nerv 요원들은 모두 군암살전문가들에 의해 살해된다. 여기서부터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란 작품은 인간의 적은 사도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극단적인 아이러니가 발생된다.

여기에 에바 파일럿인 레이는 이미 소멸되어 자신의 또 다른 복제품이 움직이고 있고, 아스카는 정신오염으로 인해 폐인이 되어 있었고, 신지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로 인해 바보처럼 가만히 죽기만을 바랬다. 그런 위기의 nerv에서 에바와 파일럿은 마지막 자신들의 희망이다. 그 희망을 버리는가 아니면 자신의 몸을 던져 막는 것에서 그들은 죽음을 불사한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애니메이션과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는 이카리 신지의 아버지인 이카리 겐도의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아들인 신지를 매우 냉혹하게 대하고 마치 아들이기 보다는 하나의 부속품으로 대한다. 이카리 겐도는 이때까지 자신이 가진 속내를 신지에게 털어놓는다. 신지가 미웠다고, 자신에게 유일한 구원의 빛인 이카리 유이를 독차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사실 이카리 겐도는 어떻게 보면 이카리 신지와 다름 없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그는 언제나 어둠에 가려진 인물이고, 신지 역시 아야나미 레이에게 상당히 무의식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 두 부자의 어긋난 질투는 결국 죽음이란 최후의 상황에서 솔직해 진다. 이카리 사령관은 자신이 낳은 미움자식인 이카리 신지를 위해 신지를 초호기를 타는 곳까지 가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이카리 사령관이 자위대 요원들을 방어해주는 동안 때마침 미사토가 다가와서 신지를 초호기 격납고 앞까지 데려가 준다. 그러나 격납고에 가는 도중에 문앞에 기다리는 자위대 요원에 의해 미사토는 총에 맞아 죽어가게 된다.

그리고 신지는 미사토의 희생으로 통해 엄청난 책임과 슬픔을 안고 초호기 앞으로 다가간다. 이제 죽을지도 모르는 신지는 슬픔 마음으로 초호기에 향해 어머니라고 외친다. 때마침 격납고 안에도 자위대요원이 들이닥쳐 신지를 죽이려고 했으나, 초호기는 신지의 애절한 비명에 반응하여 자위대요원들은 저지한다. 사실 극장판에서는 자위대요원이 아니라 nerv 기지가 습격받아 건물 잔해가 신지에게 떨어지는 것은 초호기가 보호해주는 것이 조금 다른 점이다.

이렇게 자신의 아이를 구해준 에바초호기는 앞으로 일어날 지구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신세기 에반게리온 12권 안노 히데아키와 조금 다른 이야기와 양상으로 가고 있지만 파국으로 치단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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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털도사 박스세트 (3disc) - 머털도사 + 머털도사와 108요괴 + 머털도사와 또매
황선길 감독 / MBC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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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요새 추억에 잠시 잠겨 어린시절에 보는 애니메이션을 다시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 작품은 바로 머털도사입니다. 머털도사가 처음 tv에 방영한 시기는 1989년 지금(2010년)으로부터 21년전입니다. 21년 전이라면 애니티운 회원 분들 중에서 대학생 이하인 고등학생 및 중학생, 초등학생 회원분들은 접하기 어려운 작품일겁니다. 그래도 한국에 살아 한국 애니메이션을 본다는 것은 조금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일본 애니메이션이 대부분 한국 애니메이션 향유자들로부터 사랑받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본 애니메이션이든 미국 애니메이션이든 혹은 유럽 애니메이션이든 어느 것을 본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나 그것만 본다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일본 애니메이션도 좋아하는 것도 좋으나 한국 애니메이션도 혹은 그 외의 작품들도 한번 보는 것이 좋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내 오타쿠라는 존재에 대해 편파적인 부분을 어느 정도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제가 소개할 머털도사도 한국 애니메이션도 재미난 작품이 있구나 생각하기 위해 한번 리뷰를 적어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화면 처음에 기획 황선길이란 나옵니다. 황선길 교수는 홍익대학교 명예교수로 계시며, 예전에 애니메이션 영화사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한국 만화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 나옵니다. 원작자 이두호 화백, 황선길 교수님이 홍익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신다면 이두호 화백은 현재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로 계십니다. 한국 만화애니메이션 석사학위논문이 가장 많은 곳이 세종대학교인데, 거기에는 이두호 화백말고 이현세 화백도 계십니다. 그래서 이 머털도사 시리즈에서는 한국 만화애니메이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거장이 만든 작품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계기로 리뷰를 적어봅니다.

머털도사가 진행되는 공간은 대략 조선시대인듯 합니다. 옷을 보면 한복이 등장합니다. 머털도사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한국적인 요소가 상당히 많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한복이 등장하고 한옥과 초갓집이 보이며, 주변 경치와 배경 게다가 그림체도 조금 한국 전통의 맛이 느낄 수 있습니다. 게다가 ost 배경음악도 한국 농악이나 민속악기를 연출함으로서 한국 정서를 잘 표현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주요인물입니다. 누덕마을에 누덕봉에 사는 머털이와 누덕도사입니다. 누더기도사는 나이가 300살이 된 도인으로 상당한 도력을 가지고 있으며, 하늘에 있는 옥황상제와 같이 바둑과 장기를 둘 정도로 매우 고귀한 도사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도력이 높고 자신의 신분이 옥황상제와 바둑둘 정도이나 가난한 누덕마을에서 제자 머털이를 데리고 안빈낙도를 즐기는 노인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머털이는 어린 시절 고아로 자라 10년동안 누더기 도사 아래 살아온 인물로 그렇게 머리가 영특하지 못하고 잘생기지 않고 또한 잔머리를 굴리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말썽만 부리고 눈치보고 게으름과 엉뚱한 생각만 하는 바람에 항상 누더기도사에게 혼쭐이 납니다. 누더기도사는 도력이 상당하나 자신의 도력을 함부로 내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머털이가 잘못하면 자신의 하얀 긴수염과 나무지팡이로 머털이의 머리를 여기저기 두드려 줍니다. 그래서 머털이는 스승인 누더기도사를 존경하기는 하나 한편으로 매우 원망합니다. 도력은 가르쳐주지 않고 맨날 자신을 부려먹기만 한다고요.

머털이는 누더기도사의 행동에 대해 언제나 불만을 느끼고 누더기도사를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누더기도사는 인간의 마음을 아는 독심술이 가능했습니다. 머털이가 그저 마음속으로 생각한 내용을 그대로 입으로 애기해주고 그리고 또 머털이는 혼쭐이 납니다.

그러던 어느날에 누더기도사에 왠 청년 하나가 찾아옵니다. 그의 이름은 꺼꿀이, 꺼꿀이는 머털이와 달리 키고 크고 인물도 비상하며 체력도 좋고 게다가 타고난 재주까지 겸비한 완벽한 사나이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타고난 재주가 있음을 알고 자신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 이 누덕마을로 찾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누덕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는 누더기도사에게 가서 자신을 제자로 삼아 도술을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꺼꿀이를 앞에 나두고 누더기도사는 평소에 하지 않은 행동들을 합니다. 위옷을 벗어 효자손으로 자신의 등을 긁고, 게다가 방안은 지저분하여 쥐와 고양이가 서로 내쫓는 장면까지 나올 정도로 지저분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영락없는 노인으로 묘사하합니다. 여기에 꺼꿀이는 자신이 찾아올 곳이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누덕마을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꺼꿀이가 찾아간 곳은 누덕마을 건녀편의 지락마을이었습니다. 지락마을에는 누덕마을의 누더기도사 못지 않은 강력한 도인이 있었습니다. 그의 인물은 왕지락도사였습니다. 그는 지락마을의 지도자이기도 하지만 상당한 능력을 가진 도사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락도사는 욕심이 강하고 매우 잔인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누덕마을에서 나온 꺼꿀이를 자신의 제자를 삼은 이유도 꺼굴이가 남들보다 잔인함과 욕심이 많은 점이었습니다.

물론 꺼꿀이가 능력을 타고난 인재라는 점에서 지락도사는 처음부터 그가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 것을 알았습니다. 지락도사는 꺼꿀이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서 수제자로 삼아 약 3달 동안 자신이 가진 비기를 전수해 줍니다. 이에 꺼꿀이는 지락도사의 강력한 도력과 교육으로 인해 상당한 실력을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수련기간이 어느정도 되어갈 무렵 지락도사는 자신의 제자 꺼꿀이에게 누더기도사 제자인 머털이와 대련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락도사는 누더기도사를 만난 후에 머털이와 꺼꿀이의 도술대회를 열자고 합니다. 그리고 날을 잡아 두 스승의 제자는 누덕마을과 지락마을 중간에 있는 공터에서 대결을 펼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지락마을과 누덕마을의 관계는 사실 좋지 않습니다. 누덕마을 가난한 마을이나 모두 다정하게 오순도순하게 살아가는 마을이라면 지락마을은 모두 욕심많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많은 동네였습니다.

그래서 이 시합에서는 두 마을의 대표가 나감으로써 서로 간의 자존심 대결까지 이어집니다. 이런 긴장감이 팽팽한 대결에서 만약 패배한다면 그 사람은 상당한 모욕과 조롱을 받아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대결을 펼치고 처음에는 머털이가 지는 듯한 상황이었으나 사실 머털이는 깊은 도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단지 그 사용법을 이때까지 몰랐던 것입니다. 머털이가 도술을 부릴줄은 아나 사실 스승의 부탁에 의해 참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락도사는 상당한 도술을 갖춘 도인일 뿐만 아니라 상당히 높은 수완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머털이에게 최면을 걸어 머털이의 도력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고 그를 함정에 내몹니다. 그리고 함정에 걸린 머털이는 자신의 도력이 숨어있는 머리털이 모두 잃어버리고 흉칙한 얼굴을 가지게 됩니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머털이를 그동안 돌보던 누더기 도사가 지락도사의 공격으로부터 머털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합니다.

이에 머털이는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과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자신은 흉칙한 모습이 되어버리고 스승님이 눈앞에서 죽은 것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누덕마을 주민들은 지락도사에 의해 모두 지락마을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지락마을 사람들은 누덕마을 사람들을 억압하기 위해 갖은 폭력에 모자라 누덕마을을 불살려 버립니다.

그리고 이런 마당에 머털이의 행방이 문제였습니다. 비록 누더기도사는 죽어버리고 머털이는 도력을 잃었으나 사실 알고 보면 상당한 도력을 가진 인간이었습니다. 누더기도사가 눈에 사라져도 머털이의 목숨을 나둔다면 차후 화끈이 될 것이라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락도사와 꺼꿀이는 머털이를 죽이려 합니다. 그런데 이때 지락도사의 하나뿐인 외동딸인 묘선이가 앞에 가로막아 머털이를 죽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묘선이는 아버지 지락도사와 달리 그렇게 마음이 모질거나 오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묘선이가 평소 아버지를 잘 따르는 딸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날 이때까지 아버지인 지락도사에게 반항조차 하지 않은 묘선이가 눈앞에서 불쌍하게 되버린 머털이가 죽게 되자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반항을 한겁니다. 누더기도사도 죽었는데 가엾을 머털이까지 죽인다면 너무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서이죠.

이렇게 머털이는 묘선이에 의해 무사하게 목숨을 부지하지만 머털이는 자신이 흉칙한 모습이 되었다는 사실과 자신의 실수로 인해 누더기도사가 죽은 사실과 게다가 자신의 패배로 인해 누더기마을 주민들 지락마을 사람들의 노예가 되어 매일매일 힘든 노역에 시달린 것을 보고 매우 괴로워 합니다.

이런 불쌍한 머털이에게 꺼꿀이는 계속 장난치면서 머털이에게 마음의 상처를 안겨주고 머털이는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에서 매우 슬퍼합니다. 이때 유일하게 머털이를 챙겨준 것은 자비로운 묘선이었습니다. 하지만 상처받은 인간은 남에게도 상처를 주듯 머털이도 묘선이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의 상처를 받는 머털이와 묘선을 보는 꺼굴이는 매우 즐거워 합니다.

인간의 잔인함과 오만 그리고 욕심은 드디어 최후에 화를 부르게 됩니다. 꺼꿀이는 머털이와 누더기도사를 물리친 후에 더 이상 자신 앞을 가로 막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꺼꿀이는 능력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라 배운 것이 하나면 여러가지를 배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천재적인 능력을 가졌기에 어느 순간 꺼꿀이는 자신의 스승인 지락도사를 앞서게 되었습니다.

꺼꿀이는 지락도사가 가르쳐준 모든 도술과 거기에 몰래 어깨너머 배운 도술까지 익혀 어느 순간 스승을 능가하게 되었습니다. 스승을 능가한 꺼꿀이는 자신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욕에 가득하여 먼저 스승인 지락도사에게 도전합니다. 꺼굴이는 지락도사에게 배운 그 도술로 그대로 지락도사에게 공격합니다.

그리고 꺼꿀이는 결국 스승인 지락도사을 무찌르고 지락도사는 결국 제자의 손에 의해 은혜를 원수로써 받아 죽기에 이르게 됩니다. 지락도사는 죽어가기 전에 주마등화처럼 누더기도사의 얼굴을 떠오르게 됩니다. 자신의 눈에 그렇게도 거슬리던 누더기도사가 이제는 자신이 가장 이해하게 된 인물로 변했습니다. 지락도사의 마지막 절규처럼 왜 누더기도사가 똑똑한 꺼꿀이보단 멍청한 머털이를 제자를 들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제일 중요한 것은 능력이나 재능이 아니라 그 인간 됨됨이란 점이었습니다. 아마 이게 머털도사 작품에서 가장 교훈이 있었던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지락도사의 입처럼 우리는 인간을 평가함에 있어서 그 사람의 능력, 재능, 성적만 보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공부를 잘하거나 돈을 잘번다고 해도 결국 그 사람이 인간적으로 올바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지락도사를 죽여버린 꺼꿀이는 자신이 지락도사가 되어 마을주민과 묘선이를 속입니다. 그렇게 속이던 꺼꿀이에 대해 머털이는 처음에는 잘 따르는 것처럼 굴다가 마을공사가 끝나자 말자 자신의 본심을 밝혀 꺼굴이에게 도전합니다. 머털이는 아직 도술이 완벽하지 않았지만 이제 자신의 도술을 드디어 각성하게 됩니다. 자신의 머리털을 뽑아 주문을 외우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머털이의 도술은 그 시대 최고의 도인인 누더기도사에게 그대로 전수받은 것이라 도력 자체가 상당히 높았습니다. 머털이는 자신의 도술을 이용하여 자신과 묘선, 그리고 누덕마을주민을 억압하는 꺼꿀이에게 대항하게 됩니다.

꺼꿀이는 최후의 공격으로 독수리로 변하여 머털이를 공격했으나 머털이는 자신의 도술로 이용하여 독수리의 털을 그대로 뽑아버립니다. 머털이의 도술에 걸리면 당분간 걸린 존재는 꼼짝하지 못하게 되어 꺼꿀이는 맨살이 들어난 통닭같은 독수리가 되어 결국 지면 아래 떨어져 죽게 됩니다. 사실 머털이와 승부하던 꺼꿀이는 아무리 머털이에게 공격하여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머털이의 도력은 이미 오래전부터 상당한 경지에 올라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머털이가 꺼꿀이에게 이기자 이제 더 이상 누덕마을 주민들은 지락마을 주민들에게 억압당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머털이는 지락마을과 누덕마을 주민들이 서로 경쟁하지 않고 같이 돕고 잘 지내기를 바라면서 마을을 떠납니다. 이게 사실 머털도사에서 밝히는 다른 교훈 중에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작품 초반에 보면 누덕마을 주민들은 가난하지만 모두 사이좋게 지내는 반면 지락마을 주민들은 모두 시기가 많아 사이좋지 못한다고 합니다.


게다가 지락도사가 누더기도사를 공격하여 죽게했을 때에 지락마을 주민들은 누덕마을 주민들을 억압했는데, 사실 지락마을 주민들은 상당히 부유하고 잘 사는 동네 주민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진 것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지락도사의 회유에 의해 누덕마을 주민들을 괴롭게 합니다. 자신들이 부귀영화를 즐기기 위해서 말이죠. 어떻게 보면 지락마을 주민들은 돈많은 부자들이고 누덕마을 주민들은 가난한 소시민일지도 모릅니다. 가난한 소시민을 억압하는 부자들에 대한 애기들은 자주 한국전설동화에서 나옵니다. 머털도사에서 주장하는 것은 인간은 능력과 재능보단 인간성이 중요한 점과 인간은 인간의 존엄성을 받아야 한다는 평등의식도 있습니다.


그렇게 머털도사 이야기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교훈적으로 보여준 뒤에 이야기를 마치게 됩니다. 본래 지락마을은 지락도사가 지도자로 군림했으나 이제 지락도사도 꺼굴이도 없고 게다가 지락도사의 외동딸인 묘선이도 마을을 떠납니다. 앞으로 마을은 누군가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 의해 살아가겠지요? 머털이는 그렇게 마을에 평화를 준 뒤에 누덕마을로 올라갑니다. 이때 묘선이는 머털이를 따라 같이 가는 것으로 애기는 끝이 나고, 1990년도에 머털도사와 108요괴로 이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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