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조선사 - 군자의 얼굴을 한 야만의 오백 년 지배와 저항으로 보는 조선사 1
조윤민 지음 / 글항아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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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초반에 재미있는 2명의 유학자가 나왔다. 하나는 우암 송시열이고, 다른 하나는 백호 윤휴이다. 윤휴는 그가 죽은지 350년 넘게 세상에 나와서 안될 인물이었다. 주자의 가르침이 절대적으로 군림하던 조선, 그 조선이란 국가에서 윤휴는 주자학의 절대적 관점을 다르게 보는 학문적 자율성과 개방성을 추구했다. 그 덕분에 주자의 성리학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송시열에게 공격당했고, 윤휴는 서인들의 집권전략에 따라 사약을 받들고 그 운명을 달리했다. 윤휴가 왜 이렇게나 안타까운 죽음을 당해야 했는가?

 

시작은 기축옥사부터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임진왜란부터일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가장 활약한 인물은 바다에서는 충무공 이순신, 육상에서는 권율 장군이었다. 이순신의 평가는 지금에 따지면 국가를 살린 성웅으로 묘사되나, 조선시대 중 선조 때는 그야말로 최악의 무관이었다. 그가 최악인 이유는 다른 것은 없다. 임금인 선조보다 백성들에게 더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고문을 당하고 3군 통제사 신분을 잃은 채 백의종군할 적에 많은 군인들과 백성들이 이순신의 귀환을 보면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고 한다.

 

백성들에게 나라를 버리고 간 선조보다 같이 옆에서 같이 싸워준 이순신이 더 높은 인물이었다. 역사적 자료에서 이순신은 회의를 할 때 무관직 참모 외에도 일반 사병과 백성들조차 발언권을 주면서 전략을 짰다고 한다. 이순신을 인재로 발탁한 인물로 대부분 이순신의 친구 서애 유성룡만을 생각하나, 그 이전에 영의정 동고 이준경의 안목이 있어서 가능했다. 이준경은 남인의 영수로 있었고, 명종시기 을묘왜변 때 직접 해남일원을 방문하여 왜적을 격파했다. 그때 그가 추천한 전략을 현직 무관보다 그 지역의 사람들에게 많은 조언을 받았다.

 

남인의 활약은 바로 붕당정치에서 다른 당파에게 눈에 거슬린 행위였다. 이준경은 율곡 이이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자신이 죽기 전 율곡 이이 때문에 당파싸움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 예견했다. 이이와 많은 조정대신들은 유언을 남기는 이준경을 탓했으나, 후에 진짜 붕당정치로 고역을 치룰 때 이이는 이준경의 교훈을 뼈저리게 새기고 붕당의 폐단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왜 붕당정치가 문제이고? 임진왜란이 어떤 발화점이 되었고, 윤휴의 죽음은 왜 다시 재조명된 것인가?

 

조선의 사대부는 진실한 유학자가 있다면 거짓으로 물든 유학자가 있다. 유학자(儒學者)는 정치인 이전에 철학자이며 사상가이다. 철학사상에서 정치적 판단은 곡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연마하고, 그것은 곧 백성의 생활이 안락할 수 있어야 한다. 공자의 유학정신은 그랬다. 하지만 양반이란 계급, 사대부란 이름을 가진 자들은 백성에게 좋은 선정을 베풀기보다 오히려 폭력을 합법화하여 통치했다. 유학이란 시스템은 충효가 중요하고, 이 모든 것은 정치적 맥락에서 연계된다.

 

물론 충효는 중요하다. 나라가 위기에 빠져 아무도 나서지 않을 경우 지난 일제로부터 수모를 당하고, 부모를 업신여기면 그 당사자의 자녀 역시 그 이상으로 업신여기게 될 것이다. 인간의 도리와 가치관에서 충효는 중요하나, 그 근본은 인간의 도리로서 여길 것이지 그 자체로 모든 이데올로기를 결정한 순간 나라는 망하고 만다. 양반 사대부 통치이념은 충효사상이고, 그것은 조선의 명나라 숭배사상이다. 사대주의는 강자에게 약자는 머리 숙이고, 그 약자에 속한 약자는 또 다시 머리를 숙이어야 한다.

 

만일 나라가 잘 운영되면 무슨 문제인가? 그러나 그게 되지 않아 문제이다. 윤휴의 죽음은 바로 여기서 부터이다. 효종임금은 아버지 인조가 겪은 수모, 자신이 청나라 볼모로 잡혀 간 것에 원한을 새기며 평생 무력을 연마하고, 여색을 멀리했다. 먹는 것도 검소하고, 평소 양반이란 것은 문무의 일치를 몸소 실천한 임금이다. 효종의 이야기가 많이 회자되지 않으나 적으나 다른 임금에 비해 총명하고 의지가 있던 군주였다. 하지만 그는 30대 되는 나이게 병으로 죽고 만다. 그가 평생 걸쳐 하고픈 업무란 청나라를 치는 것이다.

 

북벌론, 명나라는 이미 기운 달이나, 그래도 매달리는 모습은 다소 한심하더라도, 지금과 당시 국가적 가치관이 달랐다. 효종의 북벌론에 우암 송시열이 집중적으로 헌신했다고 하나, 다시 사관의 실록과 당시 기록들을 보면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백호 윤휴가 북벌에 목숨을 걸었고, 그가 북벌을 완수하기 위해 문과에 충실한 조선에 무관정치인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백호 윤휴는 무관을 당상관으로 당겨오고, 무관을 많이 뽑기 원했다. 여기까지 다소 당파의 소음이 있으나, 결정적인 문제는 병사와 하급무관의 발탁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가장 많이 재산을 불린 방법은 농지를 수탈하고, 주변 양민이나 농민을 종으로 삼아 곡식을 불려가고, 게다가 환곡을 빌려주면 2배 가까운 이자를 붙이는 경우가 허다했다. 일반 사대부도 아닌 왕족의 후예까지 그러니 그 폐단이 얼마나 심각했을까? 윤휴는 평민을 늘리야 하고, 세금의 납부를 농민이 아니라 양반까지 늘려야 한다고 했다. 평민들은 16세부터 60세까지 군역을 한다. 만일 군복무를 하지 않으면 군포를 내야 하나, 노비가 늘어나는 평민이 줄면 국고가 부족하다.

 

무관을 임용하기 위해 국고를 채워야 하나, 양반들은 군포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내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집안의 족보를 보니 나의 직계 할아버지는 군역과 관련하여 실제 무관직을 수행하여 변방에서 수명이 다해 순국했다. 나이가 70중순을 넘겨 변방을 지킨 것도 있지만 군역과 관련하여 보인(保人)까지 맡았다. 군정의 의무에서 이미 무관직을 맡았고, 거기에 군정의 병역에 필요한 군포도 제공한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도 군포를 낸 기록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뒤에 군포를 내는 자는 농민이고, 농민 대부분이 수탈로 인해 노비로 되자, 국고를 거두어야 할 재원이 부족하게 되었다.

 

윤휴는 바로 저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문제는 저기서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으면 반대로 이익을 얻는 자들도 있다. 이익을 받는 자들은 산림에 거주하는 사대부들이고, 그들은 거대한 벌열세력으로 권력과 재력을 누렸다. 그들에게 노비 숫자를 줄이고, 평민을 늘리며, 농민이 내던 군포를 줄이는 대신 양반에게 전가시킬 경우 많은 반발이 따를 수밖에 없다. 결국 윤휴는 사문난적이란 이름 아래 역사에서 사라져갔다.

 

이순신 역시 남인이란 점에서 정치적인 압력을 받았다. 이순신 장군이 서거한 날은 친구 유성룡이 탄핵을 받아 실각할 때이다. 자신을 구원할 친구가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그 친구는 임진왜란 그렇게 나라를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정치적 당략에 의해 물러나게 되었다. 남인의 대착점에 서인과 북인이 있었고, 서인들은 대부분 선조와 함께 갔다면, 북인들은 주로 의병활동, 남인들은 무관으로 전장에서 많이 싸웠다. 이순신의 공을 올리기보단 선조는 오히려 명나라의 구원군에게 더 큰 공로를 치하했다. 이여송 장군이나 진린 장군에게 더 큰 치적을 남기고, 살아있는 사람을 배향하는 사당까지 만드니 그 어리석음을 어디 말할 수 있을까?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책임지어야 할 왕과 사대부들은 모두 피신하고, 대부분 백성들이 당했다. 그나마 백성과 같이 싸우던 사대부들은 전장에서 목숨을 잃거나 전쟁 후에는 유성룡의 실각으로 남인들은 소외되었다. <두 얼굴의 조선사>에서는 이런 역사적 형태를 사대부의 관점보단 일반 민중, 백성들의 시각에서 봤다. 조선의 역사를 우리가 버릴 수는 없지만, 그런다고 무조건 옳다고만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권력층이 피지배계급에게 향한 폭력과 억압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종이란 이유로 때려죽여도 죄가 없고, 종이 상전에 욕을 했다고 교수형에 처했다.

 

조선 최고의 명군주인 세종대왕 집권 당시 능지처사가 가장 많았다고 한 것은 충격이다. 능지처사, 능지처참은 말이나 소를 이용하여 억지로 사람의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이다. 아주 고통스러운 형벌이기에 극단적인 역모가 아닐 경우 실행하지 않는다. 백성들의 양반에게 대들면 참형은 기본이고, 장형으로 몸을 불구로 만든다. 형조에서는 백성의 문제를 다루고, 의금부만이 사대부 관료를 다룬다. 형조와 의금부의 분리로 계급적 차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한계성은 백성의 고통을 잘 기록하고 연구한 것은 좋으나, 몰락한 양반세력이나, 백성의 고통에 동조한 양반에 대한 관점이 많이 부족한 점이다.

 

의금부에 갇힌 양반이 형조에 갇힌 평민에 비해 대우가 좋은 것은 분명하나, 그것은 권력을 가진 집권세력일 경우이다. 부당한 권력에 저항한 지식인은 옥중에서 사망한 경우가 상당히 많다. 사화나 옥사의 경우 그 피해는 말로 할 수 없다. 책에서 소개한 정개청의 서원철거 문제가 나오는데, 정여립 모반사건이 사실이 아닌 조작에 의한 옥사이다. 당시 사대부들이 1,000명 정도 화를 당해 죽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권력층 비리를 비판하던 많은 선비들이 장형으로 맞아 죽었다.

 

유학자의 이름 아래 통치하던 예절의 나라 조선은 권력자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폭력을 정당화한 국가였다. 부정과 부패가 들끓었고, 거기에 동조하지 않으면 귀양을 가거나 보복을 당했다. 국가의 문제를 비판하는 자들의 상소가 사라지면, 추위와 배고픔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은 늘어만 갔다. 여성의 인권에서도 조선 초기 딸도 부모의 재산에 대해 공평하게 받을 수 있었고, 그들도 부모의 제사에 관여하여 재산권을 실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을 겪을 후 장자중심으로 이끌어갔고, 장남 이외 아들은 그나마 유산을 받을 수 있지만, 딸은 출가외인이 되어야 했다.

 

한명기 교수의 서적에서도 환향녀의 운명은 더욱 가혹하다. 열녀문화에 미친 듯이 집착하여 죄 없는 여성이 스스로 자결하고, 때로는 집안에서 죽음을 재촉하니 그 폐단이 얼마나 골수에 미친 것인가? 책 후반에 갈수록 조선사회 문제점을 거론하기보단 조선시대 향촌문화를 중심으로 말하는 부분은 아쉬운 것 같으나, 서원의 설립과 운영은 폐단 중에서도 심각했다. 중앙권력층과 지방 세력의 가교 점은 서원이고, 특히 제일 심한 곳은 우암 송시열을 기리는 화양서원이었다.

 

이 책의 읽을 때부터 내가 서평을 적을 시점부터 우암 송시열을 언급하나, 그는 성리학자로 보자면 매우 탁월하고 훌륭한 인물이나, 백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주 나쁘고, 폐단 그 자체를 종속을 시킨 인물이다. 송시열의 정치적 입지는 노론과 소론의 붕당세력으로 나뉘게 만들고, 송시열 사후에 송시열의 이름을 들먹이며 지주사대부들의 횡포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정치적 사적이익 당론이 그렇게 만들었다. 물론 노론만 아니고 남인과 북인 세력들도 백성에 대해 횡포를 부린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나, 신하의 권력이 왕권을 넘어 가면서 왕도정치는 이미 기울여졌다.

 

왕권강화는 곧 정치적 개혁시도이고, 백성에게 유일한 소망은 암행어사가 출도 하여 탐관오리를 붙잡아 형벌을 처하는 것이다. 왕권이 약하고, 그 암행어사조차 비리에 눈을 감는다면 답이 없다. 심지어 그 비리를 고발한 암행어사가 후에 정치적 보복까지 당하니 백성들에게 억울한 일이 있어도 어찌 풀어나갈 길이 없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조선시대 이야기라고 하나,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일부 잘 나가는 사대부집안은 친일파세력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해방 후에는 재산을 모아둔 자본으로 쌓아 이윤을 챙겼다. 돌아보자니 참으로 기가 막히고 슬픈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작가는 조선이란 나라 자체를 모두 부정할 생각이 없으나 이렇게도 적나라하게 양반을 비판한 이유는 그 시대의 오류가 아직도 한국을 지배한다. 한국사회에서 말대꾸는 용서되지 않으며, 이른바 답정너(답을 이미 정해졌으니 너는 대답만 해!)라는 방식의 기원은 조선 사대부들의 권위의식에서 시작된다. 공장에서 일하거나 농사짓는 것을 하잖게 보는 것도 사농공상의 시점이니 안타까운 일이다. 법의 집행은 위에서부터 가장 엄하게 해야 하나, 조선이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를 느낄 수 없으니 왜 이리 씁쓸한가?

 

인터넷 유머게시판을 운영하는 한 블로거의 게시물을 보았다. 거기에 절도죄를 한 사람의 징역형량이 나와 있는데, 배고픔에 견딜 수 없어 몇 만 원과 라면을 훔친 자는 4, 사기를 친 자는 나중에 특사로 2년 반 정도 복역에서 나왔다. 가진 것이 없어 먹을 것을 훔친 자에게 가해진 형벌의 참혹함이 왠지 비수가 내 가슴을 찌르는 기분이 들었다. 과거를 보며 현실을 돌아보고 미래를 찾아보는 것은 현명한 인간의 선택이다. 지금 현명한 인간이란 그런 역사적 인식보다 내 수중에 돈이 얼마나 오는지만 본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파멸을 주더라도 나와 관계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조선시대 양반의 두 얼굴이 있다면, 오늘날 자유민주의 대한민국에서도 두 얼굴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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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3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24 1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7-07-24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헬조선의 원류가 5백년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적시하는 책으로 보이네요.
독서와 구매를 자극하는 리뷰였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전국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던
근왕병/의병이 44년 뒤에 벌어진 병자호란 때는
거의 없었던 것도 주목할 만한 사실이라고 생각
합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도 조국은 나의 희생을
기억하지 않는다.

전세계에서 최악의 신분제 국가였던 조선에 대한
생생한 리포트가 아닐까 추론해 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07-24 09:13   좋아요 0 | URL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제가 쓰는 조선사들은 현재의 헬조선 기원을 찾아가는 게 되어버렸습니다. 예전에 이덕일 작가의 <윤휴와 침묵의 제국>,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보며, 저 망할놈의 사대부들이 펼친 행동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X나게 백성걱정하여 정책을 펼친 자는 사약 극딜시키고, 유배를 보내도 최악의 장소로 보내고, 몽둥이로 사람패서 그냥 보내고,

병자호란 시기 의병이 없는 이유는 임진 시기에 기껏 나와 싸웠더니 본인 내지 순국자 후손에게 대해준 일말들은 안봐도 비디오이죠

유성룡이 원래 훈련도감을 별도로 설치해 평민이라도 왜적을 일정수준 처리하면 무관으로 기용하고, 그 공이 높으면 높은 직까지 주자고 하니, 결국 후에 탄핵당해버리죠.

성웅 이순신도 선조시대 봉헌 된 게 아니라 한참 뒤에 봉헌되었으니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죠.
 


적당히 인터넷과 뉴스기사를 보고 경제를 말하는 사람과 진짜 경제학 도서를 보고 경제를 말하는 사람의 생각은 너무 다르다.

친구와 통화하면서 임금 최저1000원 넘게 올랐는데, 하루 8시간 1달 24일 1년이면, 일인당 받을 금액은 대략 200만원, 전국 비정규직 내지 알바생 중에서도 최저임금보다 더 받는 분을 제외해도 100만명을 안 될 것이다.

2백만 × 1백만 = 2조 정도 된다.


이런 돈이 화폐로 시중에 나가면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오른다고 보나, 사실 제일 중요한 것은 임대료와 부동산이다. 아덤 스미스의 <국부론>이나 마르크스 <자본론>까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대 자본주의에서 케인즈 이론에서도 임금뿐만 아니라 지대도 중요한 화폐공급원으로 본다.

부동산이 미친듯이 상승할 때 몇 년 사이 최고 200~300% 증가했다. 아파트 세대 1당 2억이 오르고, 아파트도 대기입 아파트라도 최소 전국이 몇 십만 세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10만 세대로 하여 2억이 상승했다고 가장하면

2억 × 10만 = 20조 정도 된다.

화폐의 시중유통에서 사람들은 현금 즉 동산의 개념으로 물가를 판단하나, 중요한 것은 부동산 역시 화폐의 기능에 따라 인플레이션을 자극한다. 최근 임금상승율과 원자재 비용이 크게 오른 것은 없는데도 물가는 계속 올랐다. 그러면 나머지 비용은 무엇인가? 알바비도 5000원 내외에 통닭원가도 마리당 1500원이면, 통닭 1마리당 2만원까지 오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경제학적 구조로 사람들에게 설명하면 나에게 오는 눈빛은 이상한 녀석이라 하거나 너는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냐는 것인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경제학은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단지 경영학을 경제학으로 여기는 형태일 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을 읽으면 경제학에 대한 전반적인 진면목을 알 수 있다. 인구와 산업의 관계, 빈곤과 국력의 문제 등등이다. 애덤 스미스가 빵을 파는 상인은 돈을 벌기 위해 빵을 팔아 국가경제가 잘 돌아가는 과정을 말하고 있지만, 그 빵을 사람들이 제대로 사먹을 수 있어야 가능하지 그게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한국의 1980년대 과소비가 문제지만, 지금은 과소소비가 문제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장에 물건을 팔면 그것을 사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토대로 자본을 회수하여 재생산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적는 내가 바보인지, 국가경제가 어렵다고 하며 서민이 죽겠다고 말하면서 정작하는 행동은 정 반대로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누가 바보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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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1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21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7-07-21 1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금의 최저임금 인상과 관련해서 보수 언론에서는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과 관련되어, 자영업자들이
반발하고 있다는 식의 아전인수식 해석까지 내놓고
있습니다.

기득권층의 저항은 대단하네요 정말.

만화애니비평 2017-07-21 16:04   좋아요 1 | URL
임대료와 관련하여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 웃깁니다.
소상공인들이 그렇게 힘들면 자기 옆에 일하는 알바생은 얼마나 힘들지
생각하지 않은 이중성을 가지고 노는거죠.

자영업 입장에서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임대료가 시냐에서 500만원에서 1000만원을 오른 상황에서
알바 1명당 일일(6시간 기준) 3만6천원에서 4만원2천 정도 받으면
알바 4명을 고용하는 식당이라면 70만원이 부담되겠죠.

그러나 막상 임대료 500만원에 대한 부분을 누락하고 인건비만 운운하죠.
알바생들도 교통비나 생활비 문제가 있는데 고려하지 않고
서민의 생계를 말한다면 자승자박이겠죠.


루쉰P 2017-07-21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좋은 글 쓰고 계시네요 ㅎ 너무 오랜만이죠 ㅋㅋ

만화애니비평 2017-07-21 17:03   좋아요 0 | URL
더운날 더위는 잘 피하고 계시는지요..ㅎㅎ
 
성호사설 한길그레이트북스 39
이익 지음 / 한길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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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7월 나는 해남에 위치한 고산 윤선도 고택과 그의 후손인 공재 윤두서의 고택을 찾아갔다. 윤선도의 고택은 현재 직계후손이 거주하고 있어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대신 박물관을 관람했다. 그러나 윤두서의 집은 개방이 되어 건축물 내부에 들어가지 못해도 마루 끝에 앉아 여름비가 하염없니 내리는 그 모습을 바라봤다. 어린 시절 시골에 가면 기와지붕 아래로 떨어지는 빗물소리는 참으로 경쾌했다. 하지만 이 곳에 오니 그 어린 시절의 빗물소리보다 더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전통 사대부 기와집 아래 떨어지는 빗물은 마치 거대한 음악이 되어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집에 아무도 거주하지 않았지만, 가끔 이집의 후손이 찾아와 가끔 머무는 느낌이 들었다. 방안에 옷걸이가 있었고, 마루 끝에 이런저런 간단히 책이나 신문들이 놓여있었다. 해남 백포마을에 위치한 윤두서의 고택, 그의 이름은 잘은 몰라도, 그의 그림은 잘 알 것이다. 최근 외국게임 블라자드에서 제작한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한국판 영상광고에서 이른바 시공조아라는 단어가 나올 때, 시공의 폭풍을 탐구하던 한 사람이 어느 초상화 이마 부분을 떼니 게임 로고가 나왔다. 그 초상화 주인공이면서 그린 사람이 바로 공재 윤두서이다.

 

게임 영상광고에 나온 이 그림은 국내 미술학계 내지 세계 미술학계에서도 큰 연구소재거리이다. 한국의 전통화풍에서 사실주의적으로 인물을 표현한 그림이 18세기 초반에 나온 점이 큰 반향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소치 허련 같은 조선화가는 공재 윤두서의 화풍을 따라 그렸다. 양반사대부 집안인 윤두서는 조선시대로 말하자면 지배계층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거기서 많이 멀어진 자이다. 윤두서는 친구의 형님이 장살(杖殺)당한 사건이 있었다. 장살이란 곤장을 죄인에게 수십 수백 차례 가격하여 죽게 만드는 잔인한 형벌이다.

 

윤두서의 친구 형님이란 누구인가? 우선 윤두서는 해남 백포마을에 고택이 있지만, 자신의 직계조상은 고산 윤선도이다. 윤선도는 효종이 하사한 집을 다 해체하여 해남 연동마을 종택으로 사용했다. 녹우당(綠雨堂)이라 불리는 이 집의 현판을 누가 멋지게 획을 그려넣었다. 그 글을 넣은 사람은 옥동 이서이고, 옥동 이서의 큰형인 이잠은 숙종 당시 노론당파의 부패와 모순을 지적하고 상소하다 미움을 받아 장살을 받아 죽었다. 이잠의 죽음에서 이미 조선사대부들의 정신은 소진 중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말했다고 하지만, 권력자의 심기를 건드린 이유로 선비 하나가 매를 맞아 죽었다. 바른말을 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한 이잠에게 동생인 옥동 이서, 그리고 막내 동생인 이익은 헤어 나올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이들은 벼슬의 길을 포기하고, 평생 재야에 묻혀 학문을 연마했고, 그 학문은 당시 빛을 보지 못했다. 오늘날 한국의 유교를 말하자면 과거에 민중을 탄압한 썩은 물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 조선의 유학을 다시 눈을 뜨고 있고, 중국에서 공자의 정신이 움을 트고 있다.

 

한국이 세계화가 되어 널리 알려지고, 많은 사람들은 한국이란 나라는 무엇이고, 그들의 정체성을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때까지 버려온 성리학유학은 그야말로 폐단 중에 폐단이었다. 그런다고 어디서부터 다시 우리의 정체성을 되찾아할지 몰랐다. 그때 등장한 인물이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다산은 한국 전통사상만 아니라 성리학유학, 심지어 천주교회사가까지 관여되고 있는 인물이다. 다산이 한국의 전통사상의 그 끝이고, 조선의 문을 이룩한 인물이라면, 그가 어디서 자신만의 문을 쌓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는가?

 

정약용과 친한 유학자 중에 이가환이란 인물이 있다. 신유사옥 시 천주교박해와 관련하여 죽음을 당한 학자이다. 그는 이익 선생의 후손이다. 이익이란 인물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다산 정약용이란 인물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인물 중 하나가 이익이었고, 그가 저술한 성호사설(星湖僿說)은 이익 선생이 살아생전 적은 글들은 그분의 후손이 모아 집필한 도서이다. 이익이 왜 중요한가? 이익은 노론과 대치되던 남인들에게 큰 정신적 지주였고, 그의 가르침은 조선 명재상 채제공, 불세출의 천재 정약용, 조선 역사학의 지평 순암 안정복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남인 그리고 세도세자의 죽음을 슬프게 여기는 시파 무리에게 성호사설은 중요한 책이다. 사도세자는 당시 집권당인 노론보다 소론하고 친하고, 남인의 영수가 되던 번암 채제공에게 큰 신임을 주었다. 노론과 반대되는 정치세력은 전통적 봉건제도가 아니라 개혁적인 정책을 원했다. 조선시대 가장 심한 정치적 폐단은 군정폐단이다. 양반과 양반이 소유한 노비는 군에 가지 않으나 일반 농민 같은 양민들은 16세에 군적에 올라 60세까지 병역을 이행해야 한다. 군역을 이행하지 않을 시 이에 따른 군포를 납부해야 하나, 그 폐단이 너무 심했다.

 

다산 정약용의 애절양(哀絶陽)이란 시조를 보면 강진 갈대밭 아내가 방에 들어가니 남편이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가까이 보니 남편이 칼로 자신의 성기를 잘랐고, 피가 온방을 젖게 만들었다. 이렇게 된 계기는 죽은 시아버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내아이가 군적에 올라 군역을 내야 하나, 낼 수 없어 농민의 재산인 소를 끌고 가서 남편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일을 저지른 것이다. 자신의 성기가 결국 이렇게 만들었다는 그 분노와 절규에서 말이다.

 

군적의 문제는 성호 이익이 늘 지적한 부분이다. 양반은 높은 자리에 올라 폼만 부리는 게 아니라 직접 일을 해야 하며, 글을 쓸데없이 과거만 보는 게 아니라 실제로 농민이나 백성을 위한 실학적 요소를 강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성호사설을 보면 공자의 논어(論語)가 계속 나온다. 공자는 그 당시 기준으로 2200년 이전 사람인데도 왜 공자인가? 공자는 실제적인 유학정신을 백성을 위한 정치적 제도로 구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현실의 성리학은 지배이데올로기만을 강조했고, 백성들은 거기에 시름을 앓아가고 있었다.

 

백성들이 추위와 배고픔에 쓰러져 가는데도, 그들은 늘 풍악을 올리고 술잔치를 올린다. 그리고 백성의 쌀을 빼앗아가고, 그들이 빚을 지면 노비로 부려 평생 짐승처럼 부린다. 이익의 그런 현실이 너무 싫어했다. 자신의 형인 이잠이 이런 현실에 분노하여 강개 굳은 의지를 표출했지만, 그도 역시 희생되었다. 조선의 엘리트들은 약자를 늘 착취했고, 약자의 슬픔을 동조하는 엘리트들은 그 최후가 매우 끔찍했다. 성호사설을 보면 이런 부분을 지적하고, 다양한 현상을 연구하고, 경전을 다시 재해석했다.

 

만일 100년 전에 이익이 이 책을 썼다면 위험했을지 모른다. 노론의 정신적 지주는 주자의 성리학을 절대적으로 신봉했고, 만일 거기서 글자 하나라도 잘못 인식하면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여 버렸다. 학문은 늘 자유롭게 연구하고, 기존의 것을 다시 작금의 현실에 따라 새로이 해석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런 학문의 정신이 이미 조선에게 없었다. 벼슬을 위한 학문하는 자만큼 가장 백성에게 해로운 존재는 없었다. 이익은 백성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을 잊지 않고 책에 기록했다. 나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었다.

 

어느 글귀 한 편을 적고 있을 때, 이익은 30년 일을 떠올렸다. 아주 추운 겨울 어느 거지가 어떤 집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 거지의 옷은 모두 헤져 있었고, 앞을 볼 수 없던 맹인이었다. 그 거지가 문을 두드리며 하던 말은 죽여주세요! 죽여주세요!”라고 했다. 이익은 그 일이 본지 30년이 지났는데도, 그 일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노복이 죽고, 그 노복의 아들이 아버지 묘 관리를 하지 않자, 종복의 외손자를 불러 묘 앞에 참배할 수 있도록 재물을 주고, 제문까지 지어 올려주었다. 그것도 자신의 농지를 잘 돌봐주어 자신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었다고 말이다.

 

아무리 몰락한 사대부라도, 상민보다 높은 계급이었다. 그런데도 양반도 일을 해야 하고, 피지배계급이라도 그들의 인권과 삶을 존중했다. 노복이라도 하나의 생명이었고, 그들의 고단함을 알아주고, 고마워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위에 있는 강자들은 자신보다 약한 자들의 고단함을 고마워하기보다 오히려 더 착취하려고 한다. 성호사설이 개혁적 지식인에게 귀감이 된 이유는 성호 이익이 제시하고 있던 인간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깊은 학문이라도 그것이 백성의 입에서 환호성이 아닌 탄성이 나온다면 무슨 의미가 있으리라?

 

백포마을의 윤두서 고택을 방문하면서 윤두서가 한 업적이 생각났다. 그가 어느 날 집에서 어떤 문서를 들고 농민이 사는 마을로 갔는데, 그곳에 간 후 그 문서를 불태웠다고 한다. 그 문서는 돈이나 곡식을 대출해준 것을 기록한 장부였다. 세금도 제대로 못 내고, 군포에 시달린 그들을 본 윤두서는 결국 장부를 소각했다. 성호사설을 읽은 후 고산 윤선도가 가족에게 남긴 유후을 보면 비슷한 내용이 많다. 노복의 생활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노복이 가족이 있으면 그들의 생활을 보장해야 하는 점이다.

 

이런 점을 보면 윤선도나 윤선도의 후예 윤두서, 윤두서와 친구이던 이익은 아주 탁월한 정치경제학자이다. 만일 노복에게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조치하고, 일을 할 때 아무리 종이라도 그 일한만큼의 노임단가를 준다면 그들은 계속 그 지역에서 생활을 할 것이다. 그들 스스로 일을 열심히 한다면 자기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고, 그것이 다시 고용주에게 이익이 된다면 서로 간 의지할 수 있는 형상이 된다.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립되는 현실 속에서 상생의 관계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물론 있는 자는 고용되어 일하는 자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나, 그들의 노고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성호사설에도 그런 가르침이 그대로 녹아있다. 경세치용, 농상중심 경제구조에서 농민이 잘 살아야 국고가 부유하고, 국고가 부유해지면 국력이 상승해서 외적의 침입을 대비할 수 있다. 또한 국력의 상승과 인구가 불어나면 그만큼 나라가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대의가 있어도 현실적으로 실행할 수 없다면 얼마나 아쉬운가? 성호의 가르침은 조선이 끝날 때까지 완성되지 않고, 단지 그들의 후학들로 하여금 그의 정신이 옳다는 점만 증명했다.

 

21세기 조선의 역사는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영화 <대립군>은 광해군과 같이 사지를 헤쳐 나온 이름 없는 조선의 민중이 곧 조선의 주인이라 보여주었고, 앞으로 개봉할 <군함도>에는 일제에게 강제 징용당한 조선인이 죽음의 섬에서 벗어나 자신의 운명을 되찾고자 했다. 이준익 감독의 <박열>은 조선의 아나키스트 청년과 일본의 가난한 여성의 혁명과 사랑을 다루었다. 조선은 패망해도 우리에게 조선인이라 꼬리표는 조선인의 후예가 살아있는 그 순간까지 같이 갈 것이다. 조선의 망해도 조선인을 살아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대한민국 역사는 자랑스럽다고 보기에는 많은 무리수가 있다. 대다수 백성들이 권력자에 의해 핍박과 억압을 당했고, 그런 부조리를 느낀 왕족과 선비들은 독살당하거나 참수당하거나 유배 살이 등을 당했다. 그러나 적어도 이런 자들이 있기에 우리의 역사는 자랑스럽다고 말하기 어려울지도 몰라도 우리 역사는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희망이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성호(星湖) 이익의 호처럼 성호는 태호(太湖)처럼 크고 넓은 호수이다.

 

호수의 물은 우리에게 식수를 주고, 생물에게 생명을 주며, 농부에게 작물을 키울 수 있는 원천이 된다. 모든 생명과 시작의 중심이 물은 우리 인간만 아니라 지구전체 역시 마찬가지이다. 성호 이익은 우리 민족에게 그 크기와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호수이다. 거대한 호수이기에 머나먼 존재가 아니라 그 거대한 호수의 물이 모두의 오아시스가 되기를 바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이 살아있을 때 그들은 언제나 가려진 존재였다.

 

당시 권력자들은 역사의 이름아래 역적 내지 간신이 되어있고, 아니면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이익 선생의 이름과 성호사설은 여전히 남아있고, 그가 가진 사상은 옳았음을 입증되었다. 시대에 따라 살아있는 자와 그에 따른 환경은 달라도, 결국 인간이 살아가는 그 세상에는 항상 모순과 부조리가 살아있다. 그리고 모순과 부조리에 의해 고통 받는 인간 역시 계속 존재한다. 그런 사회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성호 이익 선생의 안목에 깊은 감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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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9 01: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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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9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화 <박열>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박열이 누군지 잘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박열이란 사람이 과거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게다가 그가 일본사회에 큰 풍파를 일으킨 조선인이란 사실도 알았다. 단지 재판과정이라 상세한 내용까지 몰랐다. 근대사와 관련하여 독립운동 내지 항일운동, 혹은 이와 유사한 민족 내지 민중운동들을 살펴보면 박열의 이름이 나온다. 영화 <박열>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박열의 아내이며 동지인 가네코 후미코이다. 그녀는 자서전을 낸 것까지 나도 알았지만 직접 읽지는 않았다.

 

단지 아는 사실은 후미코는 어린 시절 매우 불우한 삶을 보내고, 자신이 일본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박열과 혼인신고를 올렸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에서 그녀의 유해는 박열의 고향에 묻혀있다는 점이다. 박열의 시신은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 있다. 박열과 후미코는 죽어도 같이 묻히자는 약속은 했다. 안타깝게 육체는 분리되고, 박열과 후미코의 신위정도만 같이 남을 뿐이다. 영화 <박열>1923년 관동대지진을 배경으로 만든 작품이다. 지진은 국가재난 중에서 가장 무서운 사건 중에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화재나 수해는 그 자체로 끝이 나지만, 지진은 수해와 화재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지진이 일어나면 우선 지반이 갈라지고 땅 밑의 빈 공간에 추락할 수 있다. 게다가 지하에는 단순히 자연토양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일본의 근대화가 진행되었다고 하나, 지하에는 각종 선로나 관이 매설된 경우도 많다. 지금 지진이 일어나면 2차적 피해로 화재가 되는 이유는 지하에 매설된 관로 중에는 대부분 전기선로와 가스관이 있다는 점이다. 가스관에서 가스가 새어 전기선로에서 일어나는 스파크현상에 따라 폭발이 일어날 수 있다.

 

현대사회처럼 당시 일본이 그 정도로 도시시스템이 구비된 것은 아니나, 화재가 많이 일어났다. 일본 내각대신들이 회의할 때 모두 덥다고 짜증을 부린다. 그러는 와중 누군가가 대답한다. 밖의 온도는 46도라고 말이다. 화재로 인해 기온이 국부적으로 상승하여 주변까지 열기를 타고 간 것이다. 당시 일본 건축물이 고층건물이 없다는 점에서 열섬현상 같은 공기순환 장해가 없었을 것이다. 국부적인 화재가 빈번하게 일어나니 지진의 무서움이 바로 이런 것이다. 지하에 가스관은 없어도 집안에 전기는 들어온다. 전기로 인한 화재, 혹은 아궁이에서 불씨가 나와 화재로 이어진다.

 

이 심각한 사태를 두고 일본내각은 제대로 정리하기보단 이 상황은 타개하기 위해 대안을 내놓는다. 현재 조선인들이 일본에 대한 불만으로 이 혼란을 이용하여 반란을 도모한다고 말이다. 우물에 독을 타고, 불을 지르며, 각종 폭력적인 행위를 일삼으며 정국을 마비한다는 식으로 정보를 날조한다. 영화에서 관동대지진으로 수십만 명이 사망했지만, 대지진 이후 불안심리를 잠재우기 위해 조선인들은 수천명이나 살해되어야 했다. 자경단이 몰려와 칼로 베고, 창으로 찌르고, 강에 수장시키는 등 아주 잔혹한 행위를 하고 있었다.

 

일본입장에서는 이런 혼란을 조선인에게 넘기고, 그 마무리 정점을 수괴를 지목해야 했다. 불령사에서 활약했던 박열은 일본정부에서 불온한 인물로 지목받았다. 일본이 조선을 침범하고 나쁜 짓을 한 것은 사실이나, 일본 내에서도 일본정부를 규탄하던 자도 많았다. 1923년은 19193·1운동 후이기도 하나, 3·1운동은 러시아 소비에트에 의한 볼셰비키혁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당시 세계에서는 제국주의 씨앗이 퍼져간 것처럼 이에 대비되는 좌파 세력도 많았다.

 

한국에서 현재의 좌파는 위험한 존재로 취급되나, 당시 사회주의 내지 자유주의조차도 좌파라고 볼 수 있다. 국가의 천황을 중심으로 내각이 이루어진 일본에서 개인의 자유를 중심하는 자유주의조차 용납할 수 없고, 사회주의 노선 같은 경우 반봉건을 넘어 반국가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회주의자 내지 아나키스트를 비교하면 유사한 접점도 있는 반면 그 기본은 다르다. 박열은 기본적으로 아나키스트였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광복군 내지 임시정부만 생각하겠지만, 주로 공작과 암살을 주도하던 이들은 아나키스트들이다.

 

아나키스트들이 암살을 하던 자 중에 조선총독부 주요인물, 을사오적 같은 친일파 세력들이었다. 이들은 암살만 아니라 관공서에 폭탄을 투척했다. 의열단이 조선총독부 폭파사건이 있은 후인지 영화 <박열>에서 폭탄을 구하기 어렵다는 장면이 나온다. 아나키스트는 무정부주의자로써 극단적 자유주의를 추구한다. 한국의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로 이상하게 가고 있는데, 진정한 의미에서 아나키스트들이 추구하는 자유주의란 국가나 사회가 무엇이든 그 개인이 하고자 하는 행동에 아무런 제재를 가할 수 없다. 단지 그 자유적 책임이 죄가 없는 사람에게 피해가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권총과 폭탄을 들고 죽음을 각오하고 갔다. 성공할 수 없을 줄 알면서도 혹은 가서 아무런 성과 없이 죽임을 당할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의 공간에 찾아간다. 친일파와 일본 관료를 무참하게 살해해도 일본의 민중은 건들지 않는다. 아나키스트들의 마음은 그게 중요했다. 일본의 민중 역시 억압받는 또 하나의 인간이라 본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의 국제사회에서 보여준 행동들은 민족과 국가가 있더라도 아나키스트들에겐 그것은 이미 초월한 개념이다.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은 일본인이지만, 조선의 독립을 지지했고, 일본의 제국주의를 부정했다. 아나키스트 역사에서 대표인물로 이회영이 있겠지만, 이회영과 같이 활동하던 단재 신채호도 있다. 신채호에 대한 자료를 본다면, 그가 세계 아나키스트 대회에 참석할 때 일본, 중국, 조선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영화 <밀정>을 보면 조선독립운동에 헝가리 아나키스트가 도움을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역시 제국주의를 부정했기에 그들과 접점이 있은 것은 사실이다.

 

영화 <박열>에서 갑자기 후미코가 노래를 부르니, 옆에 있던 불령사 회원들도 모두 같이 노래를 따라 부른다. 그 노래의 기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만든 국제노동자조직 인터내셔널을 상징하는 노래이다. 인터내셔널가는 러시아 볼셰비키혁명 시기에 프랑스국가인 라 마르세예즈와 같이 불러진 노래이고, 결국 인터내셔널가는 초기 소비에트연방의 국가가 된다. 하지만 그 노래는 가끔 노동자의 날에 길거리에서 들을 수 있는 노래이다. 지배계급에 대한 피지배계급이 가진 분노와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의지가 담긴 것이다.

 

무엇 때문에 후미코가 박열에게 빠지고, 죽음을 닥칠 것을 알면서도 불령사에서 활동했는가? 박열은 시 개새끼를 짓는다. 부당한 권력 앞에 힘없는 자가 조롱당해 억울함에 복받쳐 나오는 눈물을 해학적으로 써내려갔다. 후미코는 이 시를 보고 박열에게 반했고, 그 마음은 평생 이어갔다. 후미코는 가난한 이유로 어린 시절에 수많은 고생과 핍박을 받았다. 단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조선인만 고통 받는 게 아니라 일본인 내에서 가난하고 힘 없는 자도 억압에 시달린 점이다.

 

영화에서 일본 변호사 중에서 후세 다쓰지란 인물을 등장시킨다. 후세 변호사는 영화에서 소개한 것처럼 한국건국 훈장을 받은 최초의 외국인이나, 2·8 독립선언문 제작에 도움을 주고 한국의 독립운동가만 아니라 일본의 가난한 노동자를 대변한 변호사이다. 평생의 약자를 위해 헌신했으며, 대한민국 헌법조차 그가 초안을 제공했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 아닐 수가 없다. 영화 <박열> 구성은 박열과 후미코의 만남, 일본내각의 음모, 그리고 관동대지진에 따른 조선인 학살, 박열의 구속과 재판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은 후미코가 죽고, 박열은 후미코의 의문사와 관동대지진에서 희생된 조선인들의 원한을 역사에 남기기 위해 마지막까지 삶을 택한다. 시나리오라면 이미 역사도서 내지 평전 혹은 인터넷 자료에 잘 나왔을 것이다. 단지 영화에서 이런 시나리오의 토대가 되던 당시 상황을 어떻게 각색 하는 가이다. 박열은 영웅의 이미지보단 광인 내지 광대로 자체했다. 일본 검사와 법원에 당당했고, 보통사람으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보여주었다. 이에 후미코 역시 박열 이상으로 광기를 보여준다.

 

검사가 박열에게 협박을 받았냐는 말에 오히려 자신이 박열을 협박하고, 사상적으로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영화에서도 이야기 흐름은 박열을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그 중심인물을 이끌어가는 인물은 후미코였다. 이야기의 최고조는 법정이다. 법관에게 자신의 사상을 당당하게 말하는 박열과 후미코의 연기가 돋보인 상황이다. 박열과 후미코 역을 맡은 배우는 한국인이나, 대사를 말하는 과정은 롱 테이크로 할 수밖에 없다. 일어로 말을 해야 하나, 일어에 대한 발음과 대사, 그리고 감정표현 모두 신경을 써야 하는 고난이도 연기이다. 법정에서 긴 대사만으로 작품의 의미를 내세울 때 배우의 연기력과 감독의 연출력이 없으면 어렵다.

 

한국에서 법정에서 롱 테이크로 명장면을 연출한 영화는 송강호 씨가 등장한 <변호인>이다. 부림사건 때,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를 위해 야학을 해준 대학생들은 불온사상가로 매도해 정식 심문을 거치지 않고 고문을 가한 한국에서 잊을 수 없는 용공조작사건이다. 피고가 된 자들은 모두 죄가 없지만, 죄인이 되어야 했다. 관동대지진 때 죄 없는 조선인들이 권력자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희생되어야 했다. 법치국가에서 죄의 유무는 법정 안에서 밝혀지는 게 당연하나, 오히려 법정은 권력을 대변하는 하나의 도구로 되어버린 것이다.

 

이준익 감독은 관동대지진이란 대재앙을, 그때 억울하게 희생된 조선인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후세에 남겨준 박열과 후미코, 그리고 불령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기린 것이다. 영화에서 시대는 일제강점기이지만, 그 맥락은 현대적으로 유사한 점들이 많아. 권력계층들은 자신들의 잘못이나 혹은 군중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다른 희생양을 찾아 제거하고, 거기에 반발하는 자들은 철저히 왜곡한다. 정보를 차단하여 원하는 방향으로 정국을 나가는 모습은 비단 일본 관동대지진 사건만은 아니다.

 

영화 <박열>말고도 역사적 사실을 근원으로 만든 작품들이 많다. 이런 작품에서 주장하는 바는 역사라는 기록에서 당시 누군가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각본을 만들지만, 왜 각본을 짰는지를 우리 관객은 생각해야 한다. 영화 <박열>은 상영시간이 2시간 10분 정도 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관람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주말의 킬링 타임 영화으로 마무리 된다면 너무 아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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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당 - 해남윤씨 댁의 역사와 문화예술
정윤섭 지음, 서헌강 사진 / 열화당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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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소 시대유행에 따라가는 것보다 그냥 내가 좋아서 선택하여 취향 및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 때로는 진보적이고, 때로는 보수적이고, 혹은 전통적인 가치관을 내포하고 있다. 전통과 관련하여 21세기 중국을 보면서 내가 생각한 것이 있다. 중국이 문화대혁명 아래 기존 중국의 전통문물 및 사상을 파괴했다. 공자의 출신이 중국이나, 중국은 공자를 묻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공자의 사상은 다시금 세계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중국의 공자의 위패를 모조리 없앤 바람에 그나마 공자의 위패가 있고 향교를 운영하고 있는 한국에 와서 다시 찾아갔다고 한다. 그런 공자의 사상이 왜 다시 생각해야 하는지 판단하면 답은 나온다.

 

근대화란 이름 아래 서구화를 이룬 것은 좋으나, 결국 자기정체성이란 이름 아래 문화적 모순에 빠진 것이다. 중국이 그동안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했으나, 정작 마르크스가 가르친 교훈은 전혀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주도로 이루어진 관료주의 사회주의 체계만 존재한다. 거기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중국은 자본주의형 사회주의 국가로 된 것인가? 그런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 이름 아래 과거에 버렸던 공자를 찾고, 유학을 찾는다. 우리는 유학 하면 고리타분한 것으로 알겠지만, 우리 일상생활에서 유교의 문화, 아니라면 조선의 문화가 강하게 숨 쉬고 있다.

 

하다못해 우리 언어라고 하는 한글조차 사실 그 기원은 조선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의 성과품이다. 유교문화 국가에서 나온 성과품이 계속 이용하고 있다. 과거의 훈민정음이 한자를 읽지 못하는 백성을 위한 언어라고 해도, 결국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정치사회를 이끌어간 왕조와 사대부들이 창조한 하나의 체계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 20세 말에 시작되어 한국에서 21세기 초반에 담론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의 사상을 해체 및 보완을 하는 것도 있지만, 3세계의 문화가 소외되지 않고 자기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도 볼 수 있다.

 

아프리카나 남미, 중동아시아 등 비서구화된 세계가 있는 공간에도 그들만의 문화와 사회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일본이나 한국처럼 서구화된 국가조차 서구화 이전의 문화가 없던 것은 아니다. 한국 전통문화가 예전에는 별 소득이 없는 것으로 봤지만, 이제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매년 관광객이 찾아온다. 20세기까지 중공업이 주요한 산업경쟁력이면, 이제는 탈산업화에 따른 문화적 관점, 즉 취미와 취향, 그리고 문화유산인 것이다. 한국이 김치가 유명하다면, 그 김치의 기원은 조선에서 시작된다.

 

조선이 전근대사회이고, 조선은 일제침략과 산업화에 따른 문화적 해체를 겪는다. 20세기 중반까지 한국의 주요경제활동은 농업이고,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기존 향약체계에 따른 문화적 전통이 남아있었다. 조선의 시작은 훈구대신이란 공신들이 있었지만, 차후에 사림 선비에 의해 운영되었다. 사림의 선비는 권력을 잡기도 했지만, 권력에 소외되면 향리에 남아 농사를 짓거나 글공부를 하였다. 그런 선비들 중에서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많았다.

 

과거에 나가지 않고, 현세의 문제를 찾아 고민하고, 그 고민의 결과를 책으로 남겨 실학적 면모를 남겼다. 한국의 실학사에서 지봉 이수광, 반계 유형원 등이 시작하고,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이란 거대한 학맥을 이룬다. 지금 한국의 유교를 보면 길재와 정몽주, 김종직과 정여창, 김광필과 조광조를 내세우고, 이언적과 이황, 율곡과 송시열, 조식과 서경덕 등을 내세운다. 그러나 유교연구에서 가장 많이 검토되는 대상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다. 그들이 그나마 앞자리에 있던 선배들보다 뒤에 있는 점도 있지만, 그들은 단순히 조선을 사대부들만의 국가가 아니라 그 이상의 국가를 원했기 때문이다.

 

유교의 학문은 성리학에서 많은 장점과 단점을 만들었다. 공자의 유학은 정치적 도를 추구하나, 죽음과 세상만물 이치에 대한 부분에서 부족했다. 이것을 보완한 게 주자의 성리학이다. 문제는 성리학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견고하게 만들어진 학문체계이고, 그것이 그대로 정치적으로 큰 효과를 보았다.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예송논쟁 같은 거대한 혈쟁을 펼쳤지만, 그 이면에 생각하면 통치술이란 어떻게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사유지만, 성리학은 그 원래 취지를 벗어난 길을 걷고 있었다.

 

조선에서 광해군 시대를 막을 내리게 만든 인조반종에 따라 서인들이 집권하고, 서인들이 정치적 암투로 인해 소론과 노론으로 분리되고, 조선이 망하는 그 마지막까지 노론이 지배했다. 을사조약에 서명하고, 동참한 대신 중에 거의 대부분 노론이라 한다. 조선을 말아먹은 노론의 형태에 대해 생각하면 조선의 유학은 정말 버려야 할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조선의 유학은 노론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다양한 의견이 있었고, 그 중에서 오히려 21세기에도 위대한 세계적 위인으로 칭송되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2012년 유네스코 기념 세계인물로 장 자크 루소, 로드 드뷔시, 헤르만 헤세와 같이 올라갔다. 세계적인 음악가 드뷔시, 문학가 헤세,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에 민주주의 정치사상을 확립한 루소, 이 거대한 인물 속에 정약용이란 이름이 당당히 올라갔다. <왜 조선유학인가>란 책을 보면 정약용에 대한 부분이 책자의 1/3에 이른다. 정약용이란 이가 있기에 조선의 유학은 세계적으로 큰 학문으로 인정받았고, 세계 유학 학술에서도 당당히 그의 사상은 매우 중요한 학술적 검토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다산이 역사적 조명을 되찾기 위해서 아주 기나긴 시간을 참아야 했다. 그의 명성을 다시 찾은 것은 100년 뒤다. 18362월 고향 마재에서 회혼식을 맞이하던 중 눈을 감은 그는 평생 정치적 박해로 시달렸다. 형제와 가족, 일가친척, 친구들의 목이 형리의 칼에 무참히 베어졌다. 그가 유배를 마치고 와도 아무도 그를 기용하려 하지 않았다. 열수가 무너지면 수만권의 서고가 무너질 것은 알아도, 그 서고를 아무도 이용하지 않으려 했다. 그 이유는 정약용 선생은 벽파노론이 아니라 시파남인이었다.

 

벽파와 시파의 차이는 사도세자, 정조의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죽은 사건을 두고 애절함을 느끼는 자가 시파이고, 오히려 제거가 잘 되었다고 보는 자가 벽파이다. 정약용의 아버지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보고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왔다. 이때 정약용이 태어나고, 귀향하여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에 지은 아명이 귀농(歸農)이었다. 정약용의 본관은 나주정씨이고, 어머니는 해남윤씨이다. 아버지 정재원이 화순현감에 있을 때 외갓집인 해남에 내려가 책을 읽기도 했다. 정약용의 사상은 단순히 그의 천재성이 아니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조성된 집안 환경이 매우 컸다.

 

어머니의 할아버지는 공재 윤두서이고, 공재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종손이다. 또한 공재 윤두서의 아내는 지봉유설 저자 이수광의 후예이다. 지봉유설이 실학의 시작점이고, 그 뿌리는 다른 줄기로 타고 가서 정약용이란 거대한 대양(大洋)에 흘러간 것이다. 독립운동가 위광 정인보는 다산을 두고 조선의 마지막 등불이라고 했다. 다산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다산의 업적을 기리는 박물관 및 기념관, 다산에 대한 책들은 계속 우리 주변을 돌고 있다. 정약용은 역사기록에서 권력자에 의해 패배자로 기억되었지만, 후대에 이르러 한국의 위대한 위인이 되었다.

 

문제는 그의 기록이 지금까지 무사하게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정약용 선생의 가족과 제자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은 조선왕조 시절 가장 큰 죄를 지은 죄인의 사촌이었다. 2014811, 한국 천주교회사에 가장 성스러운 행사가 있었다. 교황 프란치스코 신부님이 한국에 방문하여 천주교 유적지를 방문하고, 명동성당에 미사를 봤다. 프란치스코 신부님이 한국에 방문하여 하신 업무 중에 한국 천주교 성인을 시복하는 일이었다. 그 시복대상자 중에 1791년 신해사옥 때 참수당한 윤지충이란 진사였다.

 

윤지충은 다산 정약용 선생과 사촌이었다.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 사촌동생 권상연도 천주교 문제로 참수를 당했다. 국가반역죄인과 동급으로 취급당한 윤지충의 죄목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유교식으로 장례를 치루지 않고, 신주를 불사른 후 천주교방식으로 장례식을 치룬 것이다. 관아에 고발되어 배교를 하지 않은 채 참수당한 그는 정약용 선생만 아니라 해남윤씨 일족까지 여파를 주게 되었다. 윤지충이 죽은 후 1801년 신유사옥에서 정약용의 친형 정약종, 매형 이승훈이 참수를 당한다.

 

정약용의 유배 18년의 시작이 가족들의 비극적인 죽음에서 시작되었다. 정약용의 유배지 중에 가장 유명한 장소는 강진 다산초당이다. 다산초당은 다산 외가의 먼 친척들의 소유물이었다. 다산의 어머니는 해남윤씨 어초은공파 귤정공댁이고, 다산초당은 해남윤씨 어초은공파 행당공댁이었다. 다산의 주변을 보면 해남윤씨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다산은 학문을 쌓을 때 평생 성호 이익 선생을 흠모했다고 한다. 성호 이익은 다산 외증조부 공재 윤두서와 아주 친했다. 게다가 이익의 형인 이잠과 이서 역시 윤두서와 매우 친한 친구였다.

 

이익의 아버지 이하친은 숙종 때 경신대척출로 귀양지에서 사망하고, 큰형 이잠은 상소문을 올리다 노론의 공격에 의해 장살되어 죽었다. 이 사건으로 이익과 윤두서는 벼슬을 포기한 채 학문에 매진했고, 단순히 성리학만 아니라 지리학, 천문학, 의학, 음악 등 다양한 학문을 연구하는 잡학가가 되었다. 잡학은 벼슬에 도움 되지 않으나, 조선의 백성에게 필요한 기술이었다. 기상을 알면 농사가 보이고, 지리를 알면 무역이 보이고, 의학을 알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 기술을 쌓으면서 성호 이익은 박학다식한 학자가 되었고, 남인들 대부분은 성호 이익에게 가르침을 받아 성호학파란 거대한 실학학파가 탄생했다.

 

윤두서 역시 그런 실학적 가치관을 지녔고, 그의 관점은 백성의 삶을 연구하고 그들을 관찰했다. 이런 사상적 흐름이 다산에게 이어진 것이다. 다산의 외가 해남윤씨 녹우당, 한국 최초 천주교 순교자의 집, 한국 국문학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고산 윤선도, 녹우당 터는 해남윤씨가 기거한지 500년이 되었고, 고산이 효종에게 하사받은 가옥은 400년이 되었다. 한국 전통고택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과 학문적 연구대상이 되는 녹우당, 한국 전통가옥 연구에서 녹우당은 매우 중요한 건축연구 대상이다.

 

몇 백 년 동안 전쟁과 풍파를 견디고 살아남은 그곳은 조선의 문화가 그대로 숨 쉬고 있는 세계이다. 예전에 전주 한복마을을 놀러간 적이 있었다. 한복마을 인근에 전동성당이 위치해 있다. 그곳은 정약용의 사촌 윤지충이 참수당한 곳이고, 그의 피가 서린 곳에 성당이 올라가있다. 해남윤씨 문중 홈페이지에 그동안 그늘에 숨어 있었던 윤지충의 초상화가 등장하고, 518 광주 민간인학살사건에서 마지막 수배자인 윤한봉도 다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낼 수 있었다.

 

과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해남윤씨는 그렇게 바람 잘 곳이 없는 집안이다. 나의 아버지는 배를 타시고 몇 개월 동안 외국에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부자의 정을 깊게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어디를 놀러가는 일은 전혀 없었으며, 집에 오시면 집안 내부 수리일을 돕기만 했다. 그래서 대화의 주제는 그렇게 많지 않았으나, 유일하게 제대로 이야기한 부분이 정약용 선생과 고산 윤선도 고택에 대해서였다. 아버지는 정약용 선생의 따님이 강진 항촌마을에 시집을 왔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이 터져도 녹우당이 무사한 것은 국군과 북한군이 교대로 지켜주었기 때문이라 말했다.

 

해남윤씨 기원은 윤선도의 고조부 어초은 윤효정이 해남에 장가와서 생활하던 도중 나라에 가뭄이 심하게 들자, 백성들이 세금을 내지 못해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가뭄에 시달려 배고픔도 한탄스럽지만, 가난이란 이유만으로 옥살이를 해야 했던 많은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있었다. 이때 어초은공이 자신의 재산을 나라에 기부하여 옥문에 갇힌 백성의 빚을 대신 갚아주었다고 한다. 그것도 1번도 아닌 3번이었다고 한다. 해남윤씨 종가와 관련하여 본관이 해남이라 해도 본래 해남윤씨 집성촌은 강진군이고 문중의 장손 역시 강진에서 터를 내리고 있었다.

 

조선시대 무관직을 주로 역임하다 조선 후기로 가서는 문관을 주로 많이 배출했는데, 양반 사대부 집안이라 해도 일반적인 양반의 모습으로 살지 못했다. 어초은의 스승인 금남 최부는 윤효정의 아내 언니의 남편이었다. 최부는 연산군 시절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화를 당해 죽임을 당하고, 윤효정의 아들 윤구는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해 유배가게 되었다. 개혁적인 정치세력에 따라 권력으로부터 견제를 당했고, 신해사옥과 신유사옥 시에는 더 큰 위기에 봉착했다. 해남윤씨는 8대 종파가 있는데, 그중 어초은공파가 가장 많이 활약했지만, 그만큼 시련도 많았다.

 

선조시대 정여립 반역사건 시 동인의 영수 이발이 죽임을 당할 때, 그의 노모는 윤구의 딸이었고, 윤선도에게 고모할머니가 되었다. 고산 윤선도 역시 유배로 이루어진 삶이었고, 그런 비운의 삶은 한국의 국문학을 성장시켰고, 그의 흔적은 한국 대표 문화관광지가 되었다. 21세기 한국이 세계적으로 계속 인지도가 상승하면서 한국이란 그 나라는 무엇인지에 대해 계속 되묻게 되었다. 영국이나 프랑스를 방문하면 국가적으로 전통적 문화를 유지하고 있으며, 얼마 전 한국에 방문한 벨기에 여군대령은 그 나라의 공주였다. 벨기에의 공주라고 해도 그녀는 특권을 가진 권력자보단 시민의 한 사람으로 당당히 살아가고 있다.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그동안 멀리했지만, 다시금 찾아가게 되는 회귀현상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중국 문화대혁명 시절 유교는 모조리 뿌리 뽑았지만, 지금의 유교는 전 세계에 공자학교가 세워질 정도로 다시 활약하고 있다. 조선유학에 대한 책을 보고 난 뒤 서양철학을 보면 그 말을 취지는 조금 상이할지어도 거기서 의미하는 맥락은 유사하다. 서구의 학문이 들어와 서구화된 것처럼, 그 서구화의 사상적 토대 역시 서양 철학가 내지 사상가에 의해 존립된 것이다. 그런 학문적 전통을 살리기 위해 각국에서는 그들 나라의 위인들의 역사적 기록과 업적을 기리며, 그들이 살았던 공간을 문화적 배경으로 삼는다.

 

과거의 가치가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니나, 적어도 지켜갈 가치가 있다. 지금이라도 당장 전통문화 기념한 유적지 및 관광지를 찾아가면 많은 관광객들이 온다. 지금은 어느 정도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은 그들의 후손들이 꾸준히 잊지 않고 지켜온 것이다. 녹우당 외에도 많은 전통한옥에 오랫동안 지켜오고 살아온 자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자유로운 인생을 포기하게 만들지언정 자신의 인생철학에서 오히려 더 소중한 것을 지켰다고 여긴다.

 

사람들이 봐서는 답답할지 모르나, 더 심각한 문제는 그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은 휴가와 휴일을 이용하여 그런 장소를 찾아 떠난다는 점이다. 누군가 즐기기 위해서는 누군가 그 토대를 구성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나, 누군가 그것을 맡기기만 하면서 그것조차 비웃으면 참으로 바보가 아닐 수가 없을 것이다. 해남과 강진의 관광문화지도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 정약용의 외가만 아니라 정약용의 친구 겸 사돈, 그리고 사위의 집과 무덤도 올라간 것을 보았다.

 

정약용 선생의 어머니가 해남윤씨지만, 자신의 딸도 해남윤씨 집안에 보냈다. 다산의 외가가 어초은공파라면, 다산의 따님이 시집간 곳은 해남윤씨 참봉공파 만호공댁 집안이다. 다산의 친구 윤서유,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의 친구 윤광택, 다산의 따님과 외손자가 같은 장소에 잠 들어 있다. 그들의 묘를 관리하고 제사를 받들어준 것은 역시 그들의 후손들이다. 집안의 틀에 얽매여 거기에 헤어 나오지 못하는 굴레지만, 그 굴레가 없다면 한국의 전통문화는 모조리 사라졌을 것이다.

 

<녹우당>이란 책을 보면서 다시 또 느낀 점은 조선시대 사대부는 남성중심이라 해도 여성들의 업적이 너무 감동스러웠다. 여성 국문학에서 규한록을 저술한 광산이씨의 기록에서 애한과 갈등 그리고 운명적 기로가 돋보인다. 나의 가까운 친족이 많지 않은데, 내 할아버지들이 독자로 내려왔기 때문이라 들었다. 나의 고조부는 30살 되기도 전에 운명했다. 아직 10살 채도 안 된 증조할아버지는 고조할머니 손에 이끌려 강진군 항촌마을에 왔다고 한다. 몰락한 가난한 양반에 시집와서 남편을 여의고 하나뿐인 아들을 키운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파온다.

 

집안 족보시작은 임오보라 하고, 그것은 고산 윤선도가 시작하여 그의 외손자가 마무리했다고 한다. 남자만이 아니라 딸의 생년월일도 기록하고, 어디에 시집간 것까지 기록했다. 제사문제는 유교문화 이전에 한국전통문화이기도 하지만, 제사를 지내야 하는 점은 단순히 친척을 모이기 위한 문화적 장치만 아니라, 힘들게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나라는 존재를 세상에 나오게 해준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이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으나, 아버지의 빈자리란 공백이 이렇게 만든 모양이다.

 

<녹우당>은 해남윤씨 댁의 역사와 문화예술이라고 말하지만, 한편으로 내 아버지와 나와 이야기한 것에 대한 각인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이야기했던 많은 내용들이 이 책에 소개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평생 가난과 배고픔, 서러움이란 한에 눈을 감은 내 아버지를 돌이켜본다면 내게 남은 것은 아버지가 나에게 해준 이야기들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그 이야기를 정리하고, 그런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책을 읽고 거기서 또 다른 이야기를 찾는다. 해남윤씨 집안에 태어나면 그 집안의 특성에 따른 문화적 영향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물론 그것과 무관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고, 배제할 수도 있다. 허나 그것을 아직도 버리지 않았기에 해남 녹우당 뒷산에는 비파나무 숲길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다산초당에 있는 정자에서는 강진만의 푸른 바다가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한다. 시대는 계속 변화하고, 사회는 계속 이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나온다. 한국인이 한국 사람으로 남는 것은 문화적으로 계속 교류하는 것도 있지만, 기존의 것을 버리는 게 아니라 계속 새롭게 해석해 나가는 것이다. 실학자들은 기존의 것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것을 늘 받아들여 색다른 결과로 이어갔다. <녹우당>의 책에서 소개한 녹우당은 기존의 것을 버리지 않고, 그 기존의 그릇이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는 큰 그릇이 되어 우리 삶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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