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시몬 베유 - 여성, 유럽, 기억을 위한 삶
시몬 베유 지음, 이민경 옮김 / 갈라파고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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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책에 있는 말을 그대로 갖다 붙였다. 이 말이 이 책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단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내게 시몬 베유는 시몬느 베이유라고 알고 있는 사람과 헷갈리는 존재였다. 도대체 아주 예전에 세상을 뜬 사람이 왜 지금에야 다시 언급되는 거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시몬 베유가 두 명이었어 하는 의문을 지니게 했다.

 

[중력과 은총]을 쓴 시몬 베유는 2차 세계 대전 중에 사망했는데 (1909-1943) 유대인이기도 했다. 프랑스인으로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려고도 했다는데, 참여하기 전에 사망했고, 그가 쓴 글들이 나중에 책으로 엮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다고 한다. 이렇게 시몬 베유라는 사람이 우리에게도 알려지게 된 것은 바로 이 사람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읽게 된 [나, 시몬 베유]란 책의 주인공은 또다른 시몬 베유다. 공교롭게도 이름이 같고 유대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쓴 시몬 베유는 1927년에 태어났으니, 앞에서 말한 시몬 베유보다는 18년이나 늦게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 시몬 베유는 2017년까지 살았으니 바로 우리 시대에 함께 살아온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1927년생 유대인이라면 2차세계대전 때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되었기 때문에 시몬 베유의 가족도 수용소로 가게 된다. 아버지와 오빠는 수용소에서 죽었을 거라고 추측이 되고,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하니, 어머니도 수용소에서 죽게 된다. 바로 위 언니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체포되고, 맏언니와 시몬은 수용소에서 함께 지내다 풀려나게 된다.

 

이것이 2차 세계대전 때 시몬 베유가 겪은 일이다. 그런데 이 경험을 미화하지 않는다. 물론 잊지도 않는다. 이렇게 이 책에서는 수용소에서 겪은 비극에 대해서 담담하게 전해주고 있다. 자신들을 박해했던 사람들과 그럼에도 자신들에게 호의를 베풀어주었던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수용소 생활을 했건만 그 때문에 더 어려운 일을 겪게 되기도 한다. 그것을 딛고 공부하고 자신의 일을 찾아가는 과정이 이 책에 나와 있다. 남편을 만나 일찍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지만, 그것도 셋아니 결코 자신의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베유.

 

판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고 판사로 일하다 정치권과 연이 닿아 보건부 장관이 되어 프랑스 임신중단법을 이끌어 낸다. 유대인으로서가 아니라 여성으로서 권리를 찾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유럽의회로 나아가고, 다시 보건부 장관이 되기도 하고, 헌법평의회 위원으로 다시 법에 관련된 일을 한다. 그러니 이 책에 나와 있는 작은 제목이 이 책을 너무도 잘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여성으로 겪어야 했던 일, 그리고 프랑스가 아니라 유럽으로 자신의 활동을 넓혔던 일, 그런 삶들을 결코 잊지 않아야 인류가 살아가는 삶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질 수 있다는 것. 즉, 우리는 과거를 통해서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음을, 그렇게 해야 을 시몬 베유가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여성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런 능력을 발휘하는 여성에게는 그만큼의 고통도 또 그만큼의 반대로 있었음을 잊지 않게 해주고 있는 책이다.

 

여성의 권리가 많이 신장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갈 길이 남아 있다. 시몬 베유가 자신의 삶을 책으로 남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차뿐만이 아니라 젠더적인 차이가 살아가는데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는 사회, 국경에 갇혀 다른 존재들을 밀어내는 지구촌이 되도록 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그런 과제들과 더불어 이제는 자연과도 공생할 수 있는 방법도 찾아야 한다는 것.

 

이 책 [나, 시몬 베유]를 읽으며 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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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살아가다 어느날 탁 하고 막히는 때가 있다. 그 자리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상태.

 

  그러나 마냥 그러고 있을 수는 없고,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보다는 행동을 먼저 해야 한다. 먼저 움직여야 한다. 끝이 보이지 않더라도. 우공이산이라는 말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자신이 막혔다고 느낄 때 그때 원인 분석을 하고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는 머리로만 일을 하면 어떤 일도 되지 않는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 그 자리에서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베르베르의 개미에 관한 글에서 장애물을 만났을 때 개미는 '왜?'보다는 '어떻게?'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어떻게 이 난관을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만이 아니라 행동을 해야 한다. 그래야 문제가 풀린다. 그냥 문제를 안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머리만 굴리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움직임이라고 해야 한다.

 

그 자리에서 막고, 품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요즘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2007 현대문학상 수상시집을 읽다가 '막고 품다'란 시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야지 하는 생각.

 

   막고 품다

 

김칫국부터 먼저 마실 때

코가 석 자가 빠져 있을 때

일갈했던 엄마의 입말, 막고 품어라!

띄엄띄엄 무슨 말일까 싶었는데

서정춘 시인의 마부 아버지 말을 듣는

미당이 알아봤던 진짜배기 시인의 말을 듣는

오늘에서야 그 말을 풀어내내

낚시질 못하는 놈, 둠벙 막고 푸라네

빠져나갈 길 막고 갇힌 물, 다 푸라네

누구에게 맞든 무엇을 막든

누구를 품어 안든 무엇을 품어 내든

길이 막히면 길에 주저앉아 길을 파라네

열 마지기 논둑 밖 넘어

만주로 일본으로 이북으로 튀고 싶으셨던 아버지도

니들만 아니었으면, 을 입에 다신 채

밤보따리를 싸고 또 싸셨던 엄마도

막고 품어 일가를 이루셨다

얼마나 주저앉아 막고 또 품으셨을까

물 없는 바닥에서 잡게 될

길 막힌 외길에서 품게 될

그 고기가 설령

미꾸라지 몇 마리라 할지라도

그 물이 바다라 할지라도

 

2007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현대문학. 2006년. 정끝별, 막고 품다. 140-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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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자
실비아 플라스 지음, 공경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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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자'

 

그냥 제목을 보았을 때는 사람이겠거니 했다. 실비아 플라스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니, 아마도 '벨 자'란 사람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려주는 내용이겠거니 했는데... 책을 읽어가는데 '벨 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 거의 끝부분에 가서야 '벨 자'란 말이 나온다. 246쪽에. 종 모양의 유리관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는데... 이를 억압과 통제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요즘 용어로 바꾸면 유리 천장이라고 해도 좋고.

 

에스더 그린우드. 대학생활을 장학생으로 보내고 있으며 뉴욕에 파견되는 학생으로 뽑혀 인턴생활을 하는 능력있는 여학생. 글도 잘 쓰고 공부도 잘하는 전도유망한 학생. 그러나 그녀가 뉴욕에서 겪은 일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결코 좋을 수가 없다.

 

무언가 자신을 계속 남에게 보이기 위해 살아왔던 시절. 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지내왔는데, 그들이 이중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고, 여성에게는 더 많은 제약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게 될 때 에스더는 자신 속으로 침잠한다.

 

자신 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다른 사람과 어울릴 수 없다.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가 없는 것.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다. 그 정신병원에서 만나는 여성들 또한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에 머리를 부딪친 사람들일 것.

 

에스더는 이런 현실 속에서 지내야 함을 깨닫게 된다. 나중에 정신병원에서 나와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으로 소설은 끝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알 수 있다. 에스더가 비록 정신병원을 나왔다고 하지만 사회는 변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신병원은 '벨 자'를 에스더에게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병원이 아닌 사회에서도 능력있는 여성에게 주어진 보이지 않는 한계. 그것으로 인해 질식할 것 같은 마음. 정신병원에 가기 전 '벨 자' 속에 갇힌 에스더는 탈출할 수 있는 길이 죽음밖에는 없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에게 침잠해 얻은 결론. 그러나 그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을 깰 수도 있지 않을까. 깨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에스더는 그렇게 유리 천장을 깨겠다고, '벨 자'를 벗어던지겠다고 정신병원을 나왔는지도 모른다. 병원이라는 장소에서 자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의사를 만났고, 그로 인해 '벨 자'를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벨 자가 내 머리 위 2미터쯤 되는 곳에 매달려 있었다. 내 몸은 순환하는 공기를 향해 열려 있었다. (284쪽)

 

그런데, 바로 이 표현에서 에스더가 벨 자를 벗어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내 머리 위 2미터, 그것이다. 벨 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에스더는 벨 자를 깨뜨리지 않았다. 없애지 못했다. 단지 그것에서 잠시 벗어나 있을 뿐이었다. 달랑 머리 위 2미터. 언제든지 내려와 자신의 몸을 가둘 수 있는 높이.

 

사회에 나간 에스더가 어떻게 될지를 예상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삶의 순간 순간에 벨 자는 에스더의 몸으로 내려와 가둘 것이다. 에스더는 그 벨 자 속에서 고통스러워 할 것이다. 인간들이 지닌 위선, 가식 등이 더욱 빨리 벨 자를 내려오게 할 것이다.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 벨 자란 생각이 든다. 자신 스스로 벨 자를 만들고 그 속에 들어가 갇혀버리는 것이 아닐까. 남들과 같이 살기 힘들기 때문에, 에스더가 첫성관계를 해치워버리듯이 하는 것이 그것을 말해주지 않을까.

 

위악에 위악으로 대응하려는 것, 그것이 자신에게서 벨 자를 없앨 수가 없음을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것.

 

실비아 플라스라는 인물에 대해 여러 번 읽은 적이 있다.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었을 거라는 생각. 그런 사람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 것. 소설 속 주인공 에스더에게서 실비아 플라스를 본다. 그리고 그녀의 삶을 본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우리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벨 자'를 쓰게 하지 않았는가 반성도 하게 된다. 여기에 꼭 여성들만이 아니다. '벨 자' 속에 갇힌 사람들이 여전히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한 유리 천장, 벨 자를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없애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벨 자'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벨 자' 속에 있으면서도 편안해 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벨 자'를 인식하는 사람들이 견딜 수 없는 사회를 만든다. 그래서는 안 됨을, 이 소설을 통해 생각하게 된다. 적어도 자신이 '벨 자' 속에 갇혀 있음을 생각하지 못하고 사는 남자 버디와 같은 수많은 남자처럼은 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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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월시문학상 작품집을 읽다가 시 한 편이 마음에 쏙 들어왔다. 소월이 애상적인 사랑을 노래한 시를 썼다고만 알면 안 되는데... 일제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으로서 소월이 어찌 사랑노래만 했겠는가.

 

  사랑은 바로 남녀간에도 일어나지만 민족에 대해서도, 국토에 대해서도, 또 함께 살아가는 민중에 대해서도 일어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소월의 시를 어느 하나로 국한해서는 안된다.

 

  소월시문학상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시들, 수많은 시인 가운데 매해 수상자를 선정하는데, 수상작들이 그때마다 다양한 시적 경향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또 이런 작품집의 경우 나와 같은 독자에게는 수상작보다는 다른 작품이 마음에 와닿는 경우도 많으니... 이번 작품집도 마찬가지다.

 

세월이 하 수상하니, 시들이 자리잡을 틈이 없다는, 오로지 자리를 잡지 못할 상처가 되는 말들만이 판치는 세상이니 시는 우리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농담을 한다.

 

시가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사회는 좋은 사회라고. 시를 많이 읽는 사람은 나빠질 수가 없다고. 시를 읽지 않는 사회 너무도 삭막한 사회라고. 우리나라 국회의원들 중에 시를 세 편 이상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암송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있겠지. 한 명도 없다고 하면 그것이 농담이겠지.

 

우리나라 기자들 중에 시를 세 편 이상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암송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있겠지. 없다고 하면 그것이 농담이겠지. 그래도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이고, 자신들이 지식인이라고 자칭하고 있는 사람들이니.

 

우리나라 재벌들 중에, 장관들 중에 시 세 편을 언제고 암송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있겠지. 없다고 하면 농담이 되겠지. 재벌은 경제 총수인데, 경제 총수라고 하면 돈벌레가 아니라 세상의 흐름을 읽고 시대를 앞서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니.

 

장관이라고 하면 행정부를 이루는 핵심들인데, 정부의 대표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 나라 정부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시 세 편도 암송하고 있지 않다고 하면 그것보다 심한 농담이 어디 있겠는가.

 

웃자고 하는 소리겠지. 농담이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데... 있다고 하는 것이 모두 농담이라면, 이런 끔찍한 일이 있을까? 어린 시절부터 시하고는 거리가 멀어지고, 시를 외우면 입시에도 돈에도 도움이 안 되는 짓이라고 핀잔을 받을테니... 하, 참.

 

이 작품집에 있는 이문재 시인의 '농담'이란 시를 본다.

 

농담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제15회 2001년도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김혜순, 잘 익은 사과(외), 문학사상사에서.

이문재, 농담. 124쪽.

 

누군가 쇠를 계속 두드리고 있다. 강한 종을,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을 만들기 위해. 쇠를 두드리고 두드리고, 그래서 쇠가 아름다운 소리를, 깨지지 않고 낼 수 있게 아주 강하게 두드린다. 사정없이. 전후 살피지도 않고.

 

쇠는 두드릴수록 강해진다고 하는데, 이들은 강해지라고 치는 것이 아니라 깨뜨리기 위해서 친다는 느낌이 든다. 그들이 깨뜨린 종이 어디 한둘 이어야 말이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 쇠가 깨지지 않고 종이 되어, 강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되면 그때는 이렇게 외칠 것이다.

 

내가 두드린 말들, 모두 농담이었어. 당신을 위해서 그랬던 거야!!!

 

이런 이 앞에 쓴 글들이 모두 농담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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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어 수업 - 다음 세대를 위한 요즘 북한 말, 북한 삶 안내서
한성우.설송아 지음 / 어크로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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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소이(大同小異)라는 말을 떠올리면서 읽었다. 북한말에 대해서 책 한 권을 내다니. 그것도 '문화어 수업'이라는 제목으로.

 

문화어는 북한의 표준어를 말한다고 보면 되는데, 평양말을 중심으로 삼았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문화어와 표준어는 많이 다를까? 많이 다르다면 의사소통이 되지 않을텐데... 우리나라가 분단된 지 70년이 넘어가지만 함께 해온 역사는 그것의 열 배가 넘으니... 아직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단계는 아니다.

 

가끔 남쪽으로만 국한하더라도 각 지방의 사투리들을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말의 뜻은 정확히 모르더라도 말을 하는 상황에 따라서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사실 표준어를 쓰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표준어를 모두 알고 있지는 않다. 책을 읽더라도 모르는 낱말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가. 그 말들을 하나하나 찾지 않아도 전체적인 문맥에서 뜻을 유추해내고 의미 파악을 할 수 있지 않은가.

 

북한말도 마찬가지다. 단어가 다른 것도 있지만, 그것들이 의사소통을 하는데 큰 어려움을 주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의사소통에 문제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할 때 통역을 동반하는가. 하지 않는다. 그만큼 외교적인 수사가 필요한 정상회담에서도 통역없이 대화가 가능한 것이 남과 북이다. 그러니 자꾸 남북의 말이 다르다고 강조할 것이 아니라 같은 점이 더 많다고 강조해야 한다.

 

이 책에서 계속 주장하는 것이 그것이다. 대부분은 같다. 약간 다르다. 그 약간 다름을 가지고 지나치게 과장하지 말자. 또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서로의 말을 잘못되었다고 하지 말자. 틀리다고 하지 말자. 누구네 말이 더 우월하다고 하지 말자. 그냥 세월이 흐르면서 지역에 따라서 언어가 약간씩 변화했을 뿐이다.

 

거기에는 우열은 없다. 자연스런 현상이다. 다만 남과 북이 철책선으로 가로막혀 서로 왕래를 하지 못하다 보니 생경하게 느낄 뿐이다. 우리가 가끔 텔레비전에서 듣는 지역 사투리들을 가지고 저급한 언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냥 와 다르네... 할 뿐이다. 다름에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자주 교류하다 보면 서로가 언어를 맞춰가게 된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그러니 언어의 통일성을 주장하기보다는 먼저 서로 만나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서로 교류해야 한다.

 

장벽없이 만나면 언어는 서로의 공통점을 찾아 서로 변해가게 된다. 그 점에 대해서 계속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읽을 만하다. 어느 한쪽의 언어를 중심으로 상대방의 언어를 폄하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강제성이나 인위성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다 북한에서 실질적으로 방언조사를 할 수 없는 여건에서 생활 속에서 문화어가 어떻게 쓰이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가상으로 장면과 인물을 등장시켜 책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그래서 실생활에서 문화어가 어떻게 쓰이는지를 알 수 있어서 좋다.

 

이제 남북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어야 한다. 철책선이 굳건히 가로막고 있는 현실을 벗어나야 한다. 이 스마트한 시대에, 지구촌이라는 시대에 남과 북이 각자 자기들의 세계만을 고수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주 만나야 한다.

 

고위층이라고 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일반인이라고 하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만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레 표준어와 문화어 또 다른 지방언어들까지 다 포용하는 그야말로 대동소이한 우리말이 될 것이다.

 

남과 북의 교류는 우리말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 것이다. 이 책을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빼기의 언어정책이 아니라 더하기의 언어생활이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북한 사람들을 뿔 달린 도깨비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난 지금, 이제는 그들의 말과 우리들의 말이 모두 우리말의 일부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이 책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에필로그(313-318)에서 이 책의 내용을 너무도 잘 정리해주고 있다. 다만, 문화어 수업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고, 완전할 수는 없지만 우리말을 되도록 쓰려고 하고 있는 문화어에서 책의 맨앞과 맨뒤 이름을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로 한 것은 좀 아쉽다. 그냥 머리말, 맺음말 하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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