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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제1회 김학철문학상 수상 작품집
황정은.최진영.전춘화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6년 7월
평점 :
우리나라에 많은 문학상이 있다.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문학상이 있는데, 그 중에 또 하나의 문학상을 보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학상도 문학상 나름이다. 상 이름에 자부심이 묻어 있다면, 그 상을 받는 사람들도 기꺼워하면서 상을 수상하리라.
어떤 상처럼 받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거나 또는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을 테니. 그런 상, 반드시 필요한 상이 바로 '김학철 문학상' 아닌가 한다.
일제시대 항일투쟁을 했던 분. 평생을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분. 식민 세력과 맞서, 또 독재와 맞서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갔던, 그야말로 자신의 삶이 문학 자체였던 분.
그렇다고 마냥 무거운 작품만을 쓰지는 않았다. 그의 작품에는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이 있다. 즐거움이 있다. 사실 항일무장투쟁을 할 때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럼에도 이 수상작품집에 실린 김학철 실록소설인 '맹진나루'를 보면 웃음이 있고, 낙관이 있다.
포기하지 않는, 그러한 신념이 어려움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낙관성, 그것이 바로 김학철 문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김학철 문학상은 어떤 작품이어야 하는가? 선정에 참여했던 홍기돈이 밝힌 바에 의하면 '첫 번째 원칙은 불완전한 현실에 맞서서 그 너머로 이월하려는 치열한 작가정신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원칙은 친일 문학인을 기리는 문학상 수상자를 배제한다는 것입니다.'이다.
이만큼 수상작들은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세 명의 작가가 수상자가 되었는데, 황정은, 최진영, 전춘화이다. 이 세 작가의 작품들이 따로 발표가 되었지만 수상 기준이 있으니 어떤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세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을 대하는 자세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황정은의 작품은 세계 곳곳에서, 특히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학살을 다루고 있는데, 우리는 그 학살을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군사작전이라는 이름으로 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게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눈 감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에 눈 감지 못하는 누군가에겐 그것이 너무도 큰 고통일 수 있음을 외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황정은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가만두지 못하는 사람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하는 일, 그러한 일을 사소한 일로 치부하는 일, 당장 내가 겪는 일이 아니니 너무 신경 쓰는 것이 오히려 과한 일이라고 하는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 세상의 불의가 이러한 무관심 속에서 지속되고 있음을, 그 무관심 속에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내 무관심이 누군가의 고통일 수 있음을, 따라서 작가는 그러한 고통받음에 무관심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필요함을 작품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
소설 제목은 '문제 없는, 하루'지만, 세상에 문제 없는 하루는 없다. 그 문제를 생각하지 않으려 할 뿐이다. 그러니 작가는 문제 없는 하루가 아니라 문제 없어 보이는, 아니 문제 없다고 여기면서 살아가는 하루에서 문제를 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최진영의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의로운 일을 하다 죽은 아빠. 그러나 아들이 기억하는 아빠의 모습은 늘 훈계하는 아빠일 뿐이다. 자신의 사소한 것까지도 지적하는 아빠. 그러한 아빠가 일찍 죽어 화해할 수 없게 된 상황.
하지만 단절로 끝나지 않는다. 비록 아빠와 직접적으로 화해할 수는 없지만 아빠와의 연결을 끊을 수는 없다. 시간을 몇 년으로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 길게 길게 연장한다면, 결국 어느 순간 아빠와의 끊어진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작가는 '우리에겐 그를 되살릴 기회가 있다. 다만, 시간이 필요하다'(89쪽)고 하고 있다. 가족이라는 한 번의 만남으로 모든 것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영겁의 시간 속에서 가족의 자리를 보는 것.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 속에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을 좀더 길게 본다면, 어쩌면 다른 관계를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아주 짧은 시간 안에서 모든 것을 확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서 아빠가 자식에게 훈계를 일삼던 이유도 바로 짧은 시간 속에서 자식의 삶을 보려는 것에서 나온 것 아니었을까? 마찬가지로 자식 역시 아빠를 짧은 시간에 잃었으니, 다른 아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이 시간을 만났던 시간에 한정짓지 않고 더욱 확장한다.
확장된 길고 긴 시간 속에서 다시 관계를 생각한다. 단기적인 눈에 보이는 성과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길게 길게 보면서 관계를 맺어가는 것, 그러면 다른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음을 작가가 말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황정은의 소설에서는 무관심이, 최진영의 소설에서는 짧은 시간이 삶에 문제를 일으켰다면 전춘화의 소설에서는 자본주의적 욕망이 문제가 된다.
이것을 거르는 체를 가동시키는 주인공이지만, 그 체는 가끔 뚫리기도 한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또 미래의 삶에 어떤 일이 닥칠지 불안하기 때문이다.
'웰컴 투 빌라'라는 제목... 왜 '웰컴 투 아파트'가 아니지? 하는 생각을 먼저 하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집은 아파트'이기 때문이다. 단지 살기 위한 집이 아니라 팔기 위한, 투자를 위한 집이기도 한 아파트.
하여 주인공은 빌라에 살지만 바로 뒤에 아파트 단지가 있다. 이렇게 비교되는 삶 속에서 최소한의 물질로 살아가려는 주인공들에게 최소한 이것은 해야지 하는 욕망들이 제시된다.
이 속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인물들. 그가 지녔던 체망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한다. 구멍이 뚫리면 그 동안의 삶을 다시 보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이 살아왔던 과정에서 문제를 느끼게 된다.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신념도 흔들리게 되고.
하지만 그렇게 체망이 뚫린 상태로 끝나지 않는다. 제목이 '웰컴 투 빌라'인 이유가 있다. 그렇다. 소설은 '빌라에서도 허리를 펴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중'(154쪽)이라고, 자신의 체망이 조금 넓어졌다 해도 그 체망을 버리지 않는다.
이것이다. 수상작품집에 실려 있는 세 작품이 모두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삶의 자세다. 균열이 생기고 흔들리고는 있지만,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고 있다. 이것이 바로 '김학철 수상작품집'에 실린 소설들의 힘이다.
자, 당신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 생각해보라고 하는 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