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제1회 김학철문학상 수상 작품집
황정은.최진영.전춘화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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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많은 문학상이 있다.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문학상이 있는데, 그 중에 또 하나의 문학상을 보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학상도 문학상 나름이다. 상 이름에 자부심이 묻어 있다면, 그 상을 받는 사람들도 기꺼워하면서 상을 수상하리라.


어떤 상처럼 받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거나 또는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을 테니. 그런 상, 반드시 필요한 상이 바로 '김학철 문학상' 아닌가 한다.


일제시대 항일투쟁을 했던 분. 평생을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분. 식민 세력과 맞서, 또 독재와 맞서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갔던, 그야말로 자신의 삶이 문학 자체였던 분.


그렇다고 마냥 무거운 작품만을 쓰지는 않았다. 그의 작품에는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이 있다. 즐거움이 있다. 사실 항일무장투쟁을 할 때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럼에도 이 수상작품집에 실린 김학철 실록소설인 '맹진나루'를 보면 웃음이 있고, 낙관이 있다.


포기하지 않는, 그러한 신념이 어려움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낙관성, 그것이 바로 김학철 문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김학철 문학상은 어떤 작품이어야 하는가? 선정에 참여했던 홍기돈이 밝힌 바에 의하면 '첫 번째 원칙은 불완전한 현실에 맞서서 그 너머로 이월하려는 치열한 작가정신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원칙은 친일 문학인을 기리는 문학상 수상자를 배제한다는 것입니다.'이다.


이만큼 수상작들은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세 명의 작가가 수상자가 되었는데, 황정은, 최진영, 전춘화이다. 이 세 작가의 작품들이 따로 발표가 되었지만 수상 기준이 있으니 어떤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세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을 대하는 자세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황정은의 작품은 세계 곳곳에서, 특히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학살을 다루고 있는데, 우리는 그 학살을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군사작전이라는 이름으로 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게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눈 감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에 눈 감지 못하는 누군가에겐 그것이 너무도 큰 고통일 수 있음을 외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황정은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가만두지 못하는 사람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하는 일, 그러한 일을 사소한 일로 치부하는 일, 당장 내가 겪는 일이 아니니 너무 신경 쓰는 것이 오히려 과한 일이라고 하는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 세상의 불의가 이러한 무관심 속에서 지속되고 있음을, 그 무관심 속에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내 무관심이 누군가의 고통일 수 있음을, 따라서 작가는 그러한 고통받음에 무관심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필요함을 작품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


소설 제목은 '문제 없는, 하루'지만, 세상에 문제 없는 하루는 없다. 그 문제를 생각하지 않으려 할 뿐이다. 그러니 작가는 문제 없는 하루가 아니라 문제 없어 보이는, 아니 문제 없다고 여기면서 살아가는 하루에서 문제를 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최진영의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의로운 일을 하다 죽은 아빠. 그러나 아들이 기억하는 아빠의 모습은 늘 훈계하는 아빠일 뿐이다. 자신의 사소한 것까지도 지적하는 아빠. 그러한 아빠가 일찍 죽어 화해할 수 없게 된 상황.


하지만 단절로 끝나지 않는다. 비록 아빠와 직접적으로 화해할 수는 없지만 아빠와의 연결을 끊을 수는 없다. 시간을 몇 년으로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 길게 길게 연장한다면, 결국 어느 순간 아빠와의 끊어진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작가는 '우리에겐 그를 되살릴 기회가 있다. 다만, 시간이 필요하다'(89쪽)고 하고 있다. 가족이라는 한 번의 만남으로 모든 것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영겁의 시간 속에서 가족의 자리를 보는 것.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 속에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을 좀더 길게 본다면, 어쩌면 다른 관계를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아주 짧은 시간 안에서 모든 것을 확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서 아빠가 자식에게 훈계를 일삼던 이유도 바로 짧은 시간 속에서 자식의 삶을 보려는 것에서 나온 것 아니었을까? 마찬가지로 자식 역시 아빠를 짧은 시간에 잃었으니, 다른 아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이 시간을 만났던 시간에 한정짓지 않고 더욱 확장한다. 


확장된 길고 긴 시간 속에서 다시 관계를 생각한다. 단기적인 눈에 보이는 성과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길게 길게 보면서 관계를 맺어가는 것, 그러면 다른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음을 작가가 말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황정은의 소설에서는 무관심이, 최진영의 소설에서는 짧은 시간이 삶에 문제를 일으켰다면 전춘화의 소설에서는 자본주의적 욕망이 문제가 된다.


이것을 거르는 체를 가동시키는 주인공이지만, 그 체는 가끔 뚫리기도 한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또 미래의 삶에 어떤 일이 닥칠지 불안하기 때문이다.


'웰컴 투 빌라'라는 제목... 왜 '웰컴 투 아파트'가 아니지? 하는 생각을 먼저 하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집은 아파트'이기 때문이다. 단지 살기 위한 집이 아니라 팔기 위한, 투자를 위한 집이기도 한 아파트.


하여 주인공은 빌라에 살지만 바로 뒤에 아파트 단지가 있다. 이렇게 비교되는 삶 속에서 최소한의 물질로 살아가려는 주인공들에게 최소한 이것은 해야지 하는 욕망들이 제시된다.


이 속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인물들. 그가 지녔던 체망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한다. 구멍이 뚫리면 그 동안의 삶을 다시 보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이 살아왔던 과정에서 문제를 느끼게 된다.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신념도 흔들리게 되고.


하지만 그렇게 체망이 뚫린 상태로 끝나지 않는다. 제목이 '웰컴 투 빌라'인 이유가 있다. 그렇다. 소설은 '빌라에서도 허리를 펴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중'(154쪽)이라고, 자신의 체망이 조금 넓어졌다 해도 그 체망을 버리지 않는다.


이것이다. 수상작품집에 실려 있는 세 작품이 모두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삶의 자세다. 균열이 생기고 흔들리고는 있지만,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고 있다. 이것이 바로 '김학철 수상작품집'에 실린 소설들의 힘이다.


자, 당신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 생각해보라고 하는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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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뉴스 보기가 겁난다. 누가 그랬었지. 뉴스를 보거나 듣지 않는다고.


  왜? 안 좋은 일이 너무도 많아, 사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내보내는 뉴스는 좋은 소식보다는 안 좋은 소식이 더 많으니, 마음이 깨진다고...


  [물은 답을 알고 있다]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좋지 않은 소식이 우리에게 좋을 리가 없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세상사에 눈 감고, 귀 닫고 살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가끔 듣거나 보는 뉴스에는, 생각하기 싫은 소식들이 실린다.


  헤어졌다고 무참하게 살인을 하는, 또는 보복을 하는 이야기. 한때 좋은 관계였을 텐데, 아니면 좋은 관계를 만들려고 노력했을 텐데, 헤어지는 순간, 또는 헤어지자고 하는 순간 상대를 증오하고, 무슨 불구대천의 원수를 보는 듯이, 한 하늘에서 살 수 없다고 너가 없어져야 한다는 식의 폭력을 휘두르고 있으니...


최근에 읽은 클레르 마렝이 쓴 [단절(들)]이 생각났다. 헤어짐 역시 단절일 텐데, 우리 삶에 일어나는 수많은 단절(들)에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대응을 한다면 어떻게 인간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


헤어짐을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로, 또 헤어짐을 자신이 맺은 관계를 다시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을 줄 알아야 하는데, 아니다. 


헤어짐은 죽음이다. 죽음을 각오해야 헤어질 수 있는 관계(들)이 너무 많은 사회, 그런 사회는 행복할 수 없는 사회다.


세상에 목숨을 걸고 상대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 사랑한다고 했던 사람들도, 그렇지 않고 같은 공간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관계 맺기의 어려움을 겪는 요즘이지만, 관계 맺기의 어려움만큼이나 헤어짐의 어려움도 겪고 있지 않나 싶다.


잘 헤어짐, 그러니 헤어짐에도 예의가 있어야 한다. 헤어짐에도 존중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존중을 보여줘야 할 존재들이 앞장서서 헤어짐을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몰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권진희 시집을 읽다가, 헤어짐의 존중이라고 할 수 없지만, 관계 맺기의 진실성을 만날 수 있는 시, 이 시를 읽으면서 이것이 헤어짐의 예의 아닐까, 헤어지는 대상에 대한 예의, 존중, 그리고 그 대상을 만나는 새로운 존재에 대한 예의와 존중.


우리 사회는 보내는 예의, 존중도 잃고, 나를 떠난 존재와 관계 맺는 새로운 존재에 대해서도 예의와 존중을 잃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게 됐다.


이 시를 헤어짐에 대한 예의와 존중, 또 새로운 관계를 맺을 존재에 대한 존중과 예의로 읽었으니... 오독(誤讀)이라면 오독일 수 있는 이런 시 읽기가 그래도 내 마음을 따스하게 하고 있다.


하, 어렵더라도 뉴스보다 시다. 시!


계단길 되짚어 오르는 사이


폐지 줍는 할머니가 있길래

묵은 책들을 끈에 묶어서 내놓았다.


종이가 많은 것은 반가우나

저걸 들고 어떻게 계단을 내려갈꼬-

서너 차례 계단길을 내가 오르내렸다.


내게 없어도 그만인 책과

종이 몇 묶음 나르는 것이야 대수롭잖은 것이

누구에게는 대수로운 것임을 모르지 않지만


고맙고 또 고맙다며

당신보다 새파랗게 어린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휜 허리 깊이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며


여태 내가 내놓지 못한 것들이,

아래까지 함께 들어주지 못한 것들이

얼마나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지

계단길 되짚어 오르는 사이 세고 또 세었다.


권진희, 죽은 물푸레나무에 대한 기억, 푸른사상. 2012년.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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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운명의 집 ㅣ 쏜살 문고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미선 옮김 / 민음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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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 많은 글을 쓴 사람. 그의 소설 몇 편을 읽어보긴 했다. 그가 쓴 평전을 읽은 적도 있고. 여행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여행기. 그가 많은 나라를 여행했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그 많은 여행 기록 중에서 몇몇을 발췌한 것이 이 책이다.


1902년 벨기에 브루게가 제일 먼저 나온다. 근대 도시지만 중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 그는 브루게를 통해서 도시가 간직하고 역사, 그 역사가 쉽게 지워져서는 안 됨을 이야기하고 있다.


근대적인 건물들 역시 중세 건물들을 가리거나 없애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존하는 모습을 지닌 도시가 바로 브루게라고. 


'오래된 집들이 전혀 변형되지 않은 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고, 드문드문 새로 지은 건물들 (그중 하나는 역이다)마저 끝부분이 세 갈래로 갈라진 벽돌 박공을 높이 올린 옛 건축 양식과 아주 정확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그저 주민들만 바뀌었다.'(8쪽)라는 표현에서 츠바이크가 브루게에 갔던 당시 건물들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브루게 여행을 통해 젊은 시절의 츠바이크는 과거는 현재에 묻혀 잊혀져서는 안 됨을, 과거는 현재 속에 살아 있음을 이미 발견하고 있다.


이 브루게란 도시에 관한 글이 그가 죽은 이후에 나온 글인 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1946 과거의 빈'이라는 글과 통한다. 빈이 대단한 이유는 바로 예술에 있다는 것. 그러나 예술은 '자유 없이 번창할 수 없다'(191쪽)는 그의 말.


두 번에 걸친 세계적인 전쟁이 그를 더욱 견디지 못하게 했으리라. 브라질에서 결국 세상을 버리고 말았으니... 


빈에 대해 그가 한 말. 


'모순의 혼합 그리고 이렇게 끊임없이 조화하려는 시도에서 유럽 문화의 새로운 요소를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바로 이 도시가 지닌 본래적 천재성이다'(171쪽)


이 모순의 혼합에는 상대를 배제하거나 억압한다는 생각 자체가 들어있지 않다. 유럽 곳곳에서 온 사람들이 그 자체로 인정받으며 살 수 있었던 도시가 바로 빈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예술이 꽃필 수가 있었다고.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 예술은 자리를 잡을 수가 없다. 


그가 꿈꾸던 세상. 


'내 생각에 인간은 -마찬가지로 한 민족은 - 지배해서도 헌신해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 인간은 자유로워야만 하며, 각각의 타인에게 자유를 주어야만 한다.'(184-185쪽)


이런 그에게 전쟁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자유로운 인간, 자연과 함께하는 인간. 그가 영국에 머물 때 전쟁 소식을 듣고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 영국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왜 그럴까라고 의문을 가지면서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데...


영국인들이 전쟁 소식에도 담담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을 자연과 함께하는 생활에서 찾고 있다. 바로 영국인들이 정원을 가꾼다는 것. 이 정원이 특별히 아름답다거가 크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자신의 집에 자신들이 가꿀 수 있는 만큼의 정원이 있다는 것.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정원에 들러 식물들을 가꾸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사는 모습들이 전쟁을 견디도록 했다는 것.


츠바이크가 쓴 이 글을 읽으면서 리베카 솔닛이 쓴 [오웰의 장미]가 생각났다. 아, 오웰도 영국 사람이었지. 그가 정원에 장미를 가꾸는데 그렇게 열심이었던 것도 이러한 영국인들의 성품이었나 싶은 생각을 했고.


이렇게 츠바이크가 쓴 여행기를 읽으면서 단지 그 도시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러한 도시 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다른 삶을 본다는 것. 여행기를 읽는다는 것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츠바이크 역시 그런 말을 하는데... 아마도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바로 이 구절에 다 들어가 있다고 보면 된다.


'집에서 안내서와 함께하는 여행의 매력은 정말 환상적이다. 자신의 공간을 낯선 세계로 바꿀 뿐 아니라 현재의 시간을 과거와 바꿀 수도 있다. 집에서 여행기를 읽는 우리는 갑자기 먼 과거의 낯선 집에서 살 수도 , 빛바랜 옛날 옷을 입을 수도, 우편 마차와 작은 돛배를 타고 여행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난 세기의 사라진 공기를 들이마시며, 활발한 유희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할 수도 있다.' (91-92쪽)


이런 여행. 바로 이것이 여행기를 읽는 재미다. 단순한 재미만이 아니라 자신을 집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이 방법에만 안주하면 안 된다. 츠바이크 역시 집 안에서 여행기만을 읽지는 않았다. 여행기를 읽는 것도 좋지만, 직접 여행하는 일 역시 필요하다. 다만, 직접 여행할 때는 편한 여행을 추구하지 말고 예측하지 못한 일이 발생하는 여행을 하기를 그는 권장하고 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여행이라는 단어에는 모험과 위험, 변덕스러운 우연과 유혹적인 불확실성의 은은한 향기가 맴돌았다.'(131쪽)


'진정한 여행을 하려면 차라리 불편함, 성가심, 불쾌함이 낫다. 이것이 제대로 된 여행이다.' (132쪽)


이러한 여행을 한 사람이 집에 있을 때 여행기를 펼친다면, 츠바이크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신의 여행과 다른 사람의 여행이 합쳐지는 또 다른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런 여행을 하는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자유롭게 하는 사람이지 않을까. 이를 확장하면 그런 민족은 닫힌 민족관을 지닌 민족이 아니라 열린 민족관, 즉 세계시민을 지향하는 민족이 된다.


이런 민족들이 있다면 지구에 전쟁은 없을 텐데. 한 민족이 다른 민족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 


그렇게 처음 글에 나오는 조화, 그리고 마지막 글인 자신의 고향 '빈'을 이야기하면서 '삶이란 ... 근심 없이, 또 자유롭고 시기심 없이 친절하게 사는 것'(184쪽)이라는 츠바이크의 말을 마음에 심는다.


그가 살았던 시대처럼 전쟁이 끊이지 않는 지금 이 시대, 츠바이크의 이 책은 과거에 머무는 책이 아니라, 또 개인의 경험으로 끝나는 책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읽어야 할 책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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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구입할 때 엄정한 기준이 있지는 않다. 그런데도 '유고'라는 말이 붙은 책을 보면 구입해야겠다는 마음이 인다.


  왜일까? 작가들이 살아서 독자들의 반응으로 자신이 쓴 작품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살피고, 그것을 다음 창작활동의 밑거름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하는데...


  세상을 떠난 작가들은 작품을 내놓아도 독자들의 반응을 알 수 없다. 그는 그냥 작품을 던져 놓은 것이다. 아니, 그가 내놓으려 하지 않은 작품을 누군가가 찾아서 독자들에게 읽어보라고 추천하는 것이다.


  카프카. 생전에 발표한 작품이 적은 작가. 유언으로 자신의 작품을 모두 불태워달라고 했다던,


하지만 유언 집행자였던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의 유언을 지키지 않는다. 그는 카프카의 작품을 편집해서 세상에 내놓는다. 지금, 우리가 카프카의 작품을 읽는 것은 이렇게 해서 가능해졌다.


즉, 카프카는 죽었지만 작품은 살아남았다. 그의 작품에게도 '유고'라는 말이 붙을 수 있는데...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니겠지만, '유고'라는 말이 있는 작품엔 유독 마음이 간다.


이 시집도 그랬다. 김기홍 시인, 분명 [일과 시] 동인시집을 읽은 적이 있으니, 머리 속에 시인의 이름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생소한 시인... 참. 기억력이 이렇게 안 좋아서야.


집에 있는 시집을 찾아보니 [일과 시] 동인 제7집이 있다. 2002년 발간 시집이다. 김기홍 시인이 2019년에 세상을 떴고, 이 유고시집이 2020년에 나왔으니, 한참 전에 발간된 시집이다. 물론 나는 나중에 읽었지만... 여기에도 김기홍 시인의 시가 실려 있다. 아마 다른 동인지에도 실려 있겠지.


카프카보다는 나은 편이라고 해야 하나. 생전에 시집도 두 권을 냈다. 그런 그가 세상을 뜨고 유고시집이 나왔다. 


'여는 시'라고 시집의 앞에 있는 시가 마음을 울린다. 이 시가 이 시집의 `제3부'를 시작하는 시다.


  고개에 앉아서


찬바람이 살갗을 파고든다

지난 시절은 주저 없이 가버렸다

그러나 살아야 하리라

저주하듯 온갖 고통들이 나를 에워싸고

외로움에 지쳐갈 때

그 외로움은 거울이 되어 나를 깨우리라

속속들이 어제와 오늘의 나를 비추어 깨우리라

늘 내 안과 밖에 내가 있으리라


김기홍, 뼈의 노래. 푸른사상. 2020년. 91쪽.



그가 살아온 시절. 한국 현대사의 비극들이 일어난 때. 노동자들이 힘겹게 힘겹게 자신들의 권리를 얻어가던 때. 민주주의를 외치며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받던 때.


그 역시 노동자로서, 시인으로서 그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유롭지 않았을 것이다. 그 역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고자 노력했으리라.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그에게는 따스한 바람이 부는 세상이 아니라 여전히 '찬바람이 살갗을 파고드'는 세상이었을 것이니,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함께하던 시절은 가고, 이제는 고통들이, 그가 겪은 고통들이 '기나긴 잠 - 오랜 잠에서 깨어나다'는 시에 '백일해 뇌막염 뼈 으스러짐 교통사고 결핵....../ 불행의 난전이여 병마의 백화점이여'(130쪽)라는 표현으로 나타나 있으니...


하지만 고통들로 인한 외로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다른 외로움들을 살피는 시인의 모습. 그러한 모습이 '숲에서 보낸 편지' 연작에 잘 나타나 있다. 마찬가지로 '마늘 상처'란 시에 보면 '하루 한 번이라도 내 외로움이 / 그대 외로움을 만났더라면 싹이라도 틔웠을까'(102쪽)라고 외로움이 홀로가 아니라 다른 외로움들과 함께한다면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자신을 비추면서 내 안과 밖에서 내가 있으리라고 외치는 시인. 그러한 시인의 표현 속에서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를 생각한다.


세상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또 세상에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내 외로움 속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외로움을 보고 밖으로 나올 수 있어야 하는 것.


이 시집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는 홀로가 아니라는 것을, 결코 홀로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외로움은 지금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라고, 그러니 그 거울을 통해서 나를 보았다면, 이제 나를 거울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거울 밖으로 나오게 해야 한다고...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이 시집을 '여는 시'가 맞다. 이 시 구절들을 연상시키는 시들을 쉽게 다른 시들에서 찾을 수 있었으니...


안 좋은 소식이 많은 요즈음, 김기홍 시인의 유고시집에서 위안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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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미술 ㅣ Art & Ideas 1
비드야 데헤자 지음, 이숙희 옮김 / 한길아트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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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함과는 거리가 먼 나라가 인도 아닐까 하는데... 어떤 이들은 이를 혼란이라고 하겠지만, 또 다른 이들은 이를 역동성이라고 한다. 


단일함보다는 다양함을 추구하는 나라가 인도 아닐까 하는데, 인도 미술은 어떨까? 도대체 인도에서는 어떤 미술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했을까? 또 인도 미술에 영향을 준 것은 무엇일까?


이런 궁금증에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인도 미술 전반을 다루는 책이 아니구나 했다. 오히려 인도 역사와 관련지어서 미술, 특히 건축과 건축과 관련된 미술을 다루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종교와 관련된 건축, 그런 건축의 양식들과 건축 내부를 장식하는 미술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는 내용이 많은데...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미술은 삶과 떨어질 수 없었을 테고, 삶에는 또한 종교가 빠지지 않았을 테니, 종교와 관련된 미술을 살피는 것도 의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인도는 신들의 나라 아닌가?


우리가 아는 종교만으로도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가 인도(파키스탄, 방글라데시)와 관련이 있지 않은가. 여기에 기독교까지 가세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신들의 나라가 인도다.


저자는 이런 종교와 관련지어 미술을 살피면서 인도의 특징으로 어느 특정 종교가 우세하더라도 다른 종교를 대놓고 배척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든다.


하여 힌두교 왕국이어도 불교 사원을 인정했으며, 이슬람 왕국에서도 힌두교를 받아들이곤 했다는 점. 불교 역시 다른 종교를 받아들였다는 점은 우리나라 역사를 봐도 알 수 있는 문제니...


세계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는 종교들이 모두 인도에서 자리잡고 있으니, 그야말로 다양성으로 살아가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와 종교 속에서 인도 미술은 다양하게 변화해 왔는데... 주로 건축물을 중심으로 살피고 있어서 인도에 이 많은 건축물들이 아직도, 비록 온전한 형태라고 할 수 없는 건축도 있지만, 많이 남아 있다는 것에 놀라기도 했다.


영국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근대화와 전통 속에서 인도 미술이 어떠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장면까지가 이 책에 나와 있는데, 근대화라고 전통을 완전히 무시하지도 않고 또 전통을 살려야 한다면서 근대의 성과를 무시하지도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우리나라도 겪었고 또 겪고 있는 일이었으니... 


이 책을 읽으면서 인도 미술을, 인도 건축을 잘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인도 미술에 대해서 개략적으로 훑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책에 실린 많은 사진들로 인도 미술(건축)을 보는 눈호강도 할 수 있으니, 그것으로도 즐거운 읽기가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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