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뉴스 보기가 겁난다. 누가 그랬었지. 뉴스를 보거나 듣지 않는다고.


  왜? 안 좋은 일이 너무도 많아, 사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내보내는 뉴스는 좋은 소식보다는 안 좋은 소식이 더 많으니, 마음이 깨진다고...


  [물은 답을 알고 있다]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좋지 않은 소식이 우리에게 좋을 리가 없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세상사에 눈 감고, 귀 닫고 살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가끔 듣거나 보는 뉴스에는, 생각하기 싫은 소식들이 실린다.


  헤어졌다고 무참하게 살인을 하는, 또는 보복을 하는 이야기. 한때 좋은 관계였을 텐데, 아니면 좋은 관계를 만들려고 노력했을 텐데, 헤어지는 순간, 또는 헤어지자고 하는 순간 상대를 증오하고, 무슨 불구대천의 원수를 보는 듯이, 한 하늘에서 살 수 없다고 너가 없어져야 한다는 식의 폭력을 휘두르고 있으니...


최근에 읽은 클레르 마렝이 쓴 [단절(들)]이 생각났다. 헤어짐 역시 단절일 텐데, 우리 삶에 일어나는 수많은 단절(들)에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대응을 한다면 어떻게 인간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


헤어짐을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로, 또 헤어짐을 자신이 맺은 관계를 다시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을 줄 알아야 하는데, 아니다. 


헤어짐은 죽음이다. 죽음을 각오해야 헤어질 수 있는 관계(들)이 너무 많은 사회, 그런 사회는 행복할 수 없는 사회다.


세상에 목숨을 걸고 상대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 사랑한다고 했던 사람들도, 그렇지 않고 같은 공간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관계 맺기의 어려움을 겪는 요즘이지만, 관계 맺기의 어려움만큼이나 헤어짐의 어려움도 겪고 있지 않나 싶다.


잘 헤어짐, 그러니 헤어짐에도 예의가 있어야 한다. 헤어짐에도 존중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존중을 보여줘야 할 존재들이 앞장서서 헤어짐을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몰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권진희 시집을 읽다가, 헤어짐의 존중이라고 할 수 없지만, 관계 맺기의 진실성을 만날 수 있는 시, 이 시를 읽으면서 이것이 헤어짐의 예의 아닐까, 헤어지는 대상에 대한 예의, 존중, 그리고 그 대상을 만나는 새로운 존재에 대한 예의와 존중.


우리 사회는 보내는 예의, 존중도 잃고, 나를 떠난 존재와 관계 맺는 새로운 존재에 대해서도 예의와 존중을 잃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게 됐다.


이 시를 헤어짐에 대한 예의와 존중, 또 새로운 관계를 맺을 존재에 대한 존중과 예의로 읽었으니... 오독(誤讀)이라면 오독일 수 있는 이런 시 읽기가 그래도 내 마음을 따스하게 하고 있다.


하, 어렵더라도 뉴스보다 시다. 시!


계단길 되짚어 오르는 사이


폐지 줍는 할머니가 있길래

묵은 책들을 끈에 묶어서 내놓았다.


종이가 많은 것은 반가우나

저걸 들고 어떻게 계단을 내려갈꼬-

서너 차례 계단길을 내가 오르내렸다.


내게 없어도 그만인 책과

종이 몇 묶음 나르는 것이야 대수롭잖은 것이

누구에게는 대수로운 것임을 모르지 않지만


고맙고 또 고맙다며

당신보다 새파랗게 어린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휜 허리 깊이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며


여태 내가 내놓지 못한 것들이,

아래까지 함께 들어주지 못한 것들이

얼마나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지

계단길 되짚어 오르는 사이 세고 또 세었다.


권진희, 죽은 물푸레나무에 대한 기억, 푸른사상. 2012년.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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