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 살아내고 말하고 저항하는 몸들의 인류학
김관욱 지음 / 현암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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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관한 책이다. 생물학이 아니다. 몸이 무슨 기능을 하느냐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질병에 관해서, 그 질병의 치유에 관해서 알려주는 책도 아니다.


처음부터 몸에 대한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들어가며'에서 세 개의 몸을 이야기하는데, 그 몸들은 '지하철 속 무거운 몸, 멈출 수 없는 택배기사의 몸, 빨간 조끼 속 몸'이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몸'에 관한 책이 아닌 것이다. 의료인류학이라고 하는데, 몸을 인류학적 관점에서 살피고 있다고 보면 된다.


즉, 생물학적인 몸에 국한하지 않고, 생물학적인 몸에 영향을 주는 사회-문화를 살피고 있다고 보면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몸이 사회-문화적으로 규정되고 있음을, 그래서 몸에 대한 이해나 반응이 상황에 따라 달라짐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몸'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지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말한 '몸의 가장 큰 특징은 보인다라는 사실'(193쪽)에 그렇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 우리 몸은 내 몸이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다. 몸은 보이는 것이다.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몸에는 수동성과 능동성이 모두 들어가 있다. 남을 의식해서 자신의 몸을 그들의 시선에 맞추려는 노력을 하기도 하고, 그런 시선을 의식해서 오히려 반대로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바로 몸이다.


이런 몸을 저자는 '문화가 사람들의 몸을 통제하는 머리 위 양동이 속 물과 같다'(195쪽)고 사유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몸이 생물학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은 보이기-보여주기 때문에 오히려 문화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한 문화에 자신의 몸을 맞추려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 그 문화에 맞지 않는 몸은 위축될 수밖에 없음을 여러 사례를 통해서 보여주기도 하고.


하지만 몸은 이렇게 보여지기에 문화라는 통제에 어느 정도 따르기도 하지만, 보여주기에 문화를 바꾸려는 능동성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개인의 몸이 다른 개인의 몸과 만나 함께하는 순간, 변화의 지점으로 나아가게 된다. 즉 기존에 몸을 규정짓던 틀을 벗어날 수 있고, 새로운 틀을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나의 몸이 타인의 몸과 마주칠 때 새로운 시공간의 궤도가 형성될 수 있다'(242쪽)고 표현하고 있다. 몸은 이렇게 규정당하기도 하지만 규정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몸이고, 몸을 생물학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여 저자는 사람의 변화가 의식(이성)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도 많이 의존하고 있음을 3부에서 다르고 있다. 바로 몸이 변해야 하는 것이다. 몸이 기억한다는 말이 있듯이, 몸은 기억을 통해서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


'몸'이 경계를 넘어설 수 있도록 한다는 것. 이러한 몸에는 사회-문화가 담겨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 이러한 관계는 추상적 관계가 아니라 직접 몸을 맞대는 관계일 때 더 좋다는 것을 '포옹'의 예를 들어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우리 사회는 '보여지는 몸'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나, 그런 사회-문화적 분위기를 만들어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과 그럼에도 '보여주는 몸'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회-문화적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 그렇게 우리는 몸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경계를 인식할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몸'에 관해서 다양한 방향에서 설명하고 있어서 새로운 관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저자는 끝부분에서 문화적 시공간을 넘어선 세 몸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장애, 퀴어, 애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들어가며'에서 만난 몸과 연결이 될 수 있는데, 이러한 몸들을 통해서 경계에 대해 생각하고, 그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몸에 대해서, 꼭 자신이 그러한 몸이 아니더라도 그 몸들에 대한 편견을 걷어내고 함께할 수 있어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


'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어서 좋았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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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묻는 사회 -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
정회옥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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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묻는 사회'


우리 사회에 딱 맞는 말이다. "너 몇 살이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이!" 이런 말을 많이 쓰는 사회 아니던가.


이 책에서도 언급하지만 쌍둥이에게도 위아래를 정하는 나라가 이 나라니, 한 해, 두 해 이상 차이가 나면 어떻겠는가.


나이에 따라 철저한 위계를 따지던 나라에서 이제는 그것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최근에 듣기로는 대학가에서도 학번에 따라서 너나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를 따져서 형-누나 한다고 하던데... 적어도 예전에는 너무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으면 같은 학번은 그냥 친구였는데...


이렇게 같은 학년에서도 나이를 따지는 사회이고, 학년이 다르면 철저하게 위-아래를 구분하는 사회가 바로 우리 사회니, 나이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초중고등학교에서 학년은 넘을 수 없는 벽이 되는 사회, 고작 한 해 먼저 학교에 입학했다고 마치 윗사람이 된 양 행세하게 하는 학교라니... 학교의 이런 위계질서를 12년 받고 나면 자연스레 나이에 따른 위계가 고착되지 않겠는가.


단지 나이가 많은 사람을 존중하면 그것은 좋다. 그런데 존중을 넘어서 위-아래를 구분지으려 하니 문제다. 또 그 나이 대가 누려야 할 권리라고 생각하면 다른 나이 대의 사람들이 그것을 침해할 수 없다고도 여기기도 하고.


대표적인 예가 저자도 언급하고 있지만 교통약자석 아닌가. 말 그대로 교통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좌석인데, 예전에 '노약자석'이라고 노인들의 전용 좌석이라고 착각해 다른 사람들이 앉으면 무슨 큰일이 나는 것처럼 얘기한 때가 있었다.


노약자라는 말에도 노인이라는 말과 약자라는 말이 합쳐져 있는데, 몸이 불편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인데, 노인만의 자리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어서 이제는 '교통약자'라는 말로 바꾸었는데도 여전히 편견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편견이 언어에 반영이 되면 멸칭이 된다. 특정 세대를 비하하는 말이 쓰이게 되는데, 이것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세대 간에 담을 쌓는 결과는 낳는다. 저자는 이 책에서 각 세대를 비하하는 멸칭을 보여주고 있는데, 어떤 세대도 이러한 멸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이런 멸칭들이 버젓이 쓰인다면 세대 갈등이 내면화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


그래서 저자는 이러한 멸칭을 쓰지 않아야 한다고, 이 멸칭이 특정 세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에 쓰이고 있다고 하니, 이것 참 문제다.


세대가 무엇인가? 누구나 한번은 거쳐야 하는 시기 아닌가. 사람이라면 모두가 겪어야 할 그런 시기들을 비하하면 결국 자신을 비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세대라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고 함께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함께 무언가를 해야 한다. 관계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서로 부대끼면서 만들어 갈 수밖에 없다.


만나야 이해든 뭐든 할 수 있으니, 세대를 가르거나 또는 특정 세대를 배제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 하여 저자는 '노 키즈 존'이나 '노 시니어 존'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당연한 말이다. 어떤 공간에서 특정 세대를 배제하는 것은 연령 차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인권을 무시하는 행위고, 이런 행위가 일어나면 다른 차별도 우리 삶에 들어오게 된다.


따라서 이렇게 특정 세대를 배제하는 행위는 해서는 안 된다. 다양함이 사회를 풍요롭게 하듯이 각기 다른 세대가 어울리면서 살아가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이렇게 서로가 어울리는 사회라면 늙지 않으려는, 젊음을 유지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도태될 것 같은 느낌은 사라질 것이다. 오히려 자신들의 나이를 받아들이고, 그 지점에서 다른 세대들과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려 할 것이다.


연령차별주의가 낳은 멸칭 문화. 이것은 하루바삐 사라져야 한다. 지금은 많이 순화가 되고 있지만, 여전히 특정 세대를 겨냥해 쓰고 있는 멸칭들, 쓰지 않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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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는 어디서 태어나는가
신시어 밀러 이드리스 지음, 조인석 옮김 / 동아시아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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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적으로 극우가 세력을 얻고 있다. 보통 좌와 우로 나눌 때, 좌는 과거나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기에 미래에는 과거-현재가 아닌 다른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 또는 집단이라 하고, 우는 과거-현재가 만족스럽기에 과거-현재를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 또는 집단을 말한다.


그런데 극우라고 하면 문제가 좀 달라진다. 물론 극좌도 마찬가지다. 극단으로 치우치면 문제가 생기는데, 사람이라는 존재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허점이 있고, 이 허점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사회를 이룬다.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면서 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 인간인데, 그런데 극단으로 치우치면 나는 허점이 없는 존재가 되고, 상대는 허점이 많은 존재가 되니,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사이가 된다. 즉, 나에게 방해가 되는 존재로 상대를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누가 말했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사회에는 좌도 있고 우도 있다. 이런 좌우가 서로 공존하면서 사회를 이루고 살아왔다. 그렇게 인간은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치지 않았는데, 이는 서로가 살 만하다고 느꼈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살기 힘들다고 할 때 원인을 찾기 시작한다.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남에게서. 그러면서 남을 배척하기 시작한다. 저들만 없었다면, 또는 없으면 내 삶이 더 나아질 텐데. 단순히 생각에만 그치지 않는다. 상대를 몰아내려 한다. 몰아내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위협을 가한다. 혐오, 증오 표현. 그리고 폭력까지.


이렇게 되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이제 상대는 나와 어울릴 수 없는 존재, 배척해야만 하는 존재가 된다. 이들이 있는 한 내 삶은 더욱 힘들어진다. 이제 내 삶에서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하기 시작한다. 개인에서 집단으로. 


집단이 되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자신은 이미 그 집단에 빠져 나오기 힘들어진다. 혐오감정은 더욱 거세지고, 폭력으로 나아가기는 더욱 쉬워진다. 결국 폭력으로 폭발한다. 이렇게 세계 곳곳에서 증오 폭력이 발생하고 있다.


이 중 많은 폭력이 '극우'에게서 나오고 있는데, 극우는 과거의 삶을 회상하면서 지금 이렇게 된 데에는 상대에게 책임이 있다고, 그들을 몰아내고 과거의 우리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는 쪽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극우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의 영광을 현재에 구현하고자 한다. 남을 배척하면서. 이렇게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민주주의는 포용과 타협, 다양성의 조화 아니던가. 그런데 '극우'는 이러한 다양성을 부정한다. 오로지 순수성, 단일성을 주장한다.


이런 순수성-단일성을 위해서 상대는 배척해야만 한다. 그러면서 온갖 논리를 끌어온다. 과학까지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재단한다. 사실을 왜곡한다. 책임을 상대에게 떠넘긴다. 그러면서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유머로 위장한다.


혐오 표현을 하면서도 남들이 문제 삼으면 농담이었어요라고 한다. 그런 장치들을 마련하고 있다. 이는 우리도 많이 겪은 일 아닌가? 단지 재미로요 라는 말들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하지만 이는 재미가 아니다. 알고 있다. 이들도. 혐오라는 것을. 다만 빠져나가기 위해서 이중으로 해석할 수 있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남들은 다 혐오 표현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중의 뜻이 담겨 있기에 넘어갈 수 있다는 듯이.


이런 '극우'가 갈수록 힘이 세지고 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더 심한가 보다. 이 책을 보니, 미국의 극우는 정도를 넘어섰다. 하긴 그들 나라는 총기를 자유롭게 소지할 수 있는 나라지. 미국 극우들 중에는 백인들만의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이런 극우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 책은 그 지점을 추적한다. 극우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극우들이 활동하는 공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특정한 공간에서만 극우들이 활동한다면 해결은 간단하다. 그 공간에 집중하면 된다.


한데, 이 책을 보니, 아니다. 극우들은 자신들의 이념을 사람들에게 주입하기 위해 일상으로 이미 들어왔다. 그것도 세련된 외양을 하고서. 이는 극우들이 의류 산업에까지 진출해서, 의류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홍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음식 쪽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여기에 스포츠 특히 격투기 분야에 극우들의 진출이, 또 청소년(청년)들을 극우로 끌어들이고 있다고 한다. 남성성을 강조하면서, 신체의 강인함을 키워야 한다면서, 그러면서 그것이 멋있는 남성이라고 하면서. 단지 신체의 강인함을 키우는 것이라면 문제가 안 되겠지만, 그 과정 속에서 극우 이념을 퍼뜨린다고 하니...


게임도 마찬가지고, 온라인 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단체들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도 문제가 되니 언급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을 테고...


더욱 심각한 것은 학교, 대학교를 극우들이 공격한다는 것이다. 진보적인 교수, 학생들을 위협하거나 또는 자신들의 주장을 홍보하는 장소로 삼고, 대학가가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인식하게 함으로써 지식을 신뢰할 수 없게 하고, 지식의 권위를 떨어뜨리려 한다고 한다.


또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전문가(?이들에게 과연 전문가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지 의문인데, 교수나 또는 박사, 석사 등의 자격증을 지닌 인간들이라고 해야 하나?)들을 양성해 자신들의 논리를 공론장으로 끌고 온다고 한다.


극우 논리를 지식의 공론장으로 끌고 온 것, 우리나라도 그렇지 않은가. 이렇게 되면 소수의 주장이었던 또는 드러나지 않았던 극우 논리가 공개적으로 표명된다고 한다. 주류 언론이라고 할 수 있는 방송을 통해서도 극우의 주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면 자연스레 정치계로 넘어간다.


즉 주류 정치계에 극우가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극우는 자신들의 영역을 조금씩 조금씩 넓혀간다고 한다.


읽으면서 이거 무섭네. 이렇게 해서 세계에서 또 우리나라에서도 극우가 자신들의 입지를 넓혀왔구나 하는 생각. 이런 극우들이 더 힘을 얻게 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그런데도 해결책은 조금 아쉽다. 물론 이렇게밖에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노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


독일의 한 정치인이 했다는 말.


"모든 사람이 자신이 사는 나라에서 편안함으로 느끼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288쪽)


그것은 민주주의가 강화되어야 한다. 아니 민주주의가 정착이 되어야 한다. 하여 저자는 '극단주의 예방과 민주주의 보호가 본질적으로 맞물려 있다는 인식에서 찾아야 한다. ... 모든 개인이 자신의 일상적인 공간과 삶의 현장에서 포용성을 증진하고,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며, 인종차별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이에 맞서 싸워야 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자각하도록 해야 한다.'(311-312쪽)고 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또 가정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다. 그것이 가능하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하고... 저자는 책의 끝부분에서 독일의 사례를 들고 있는데, 참조할 부분이 많지만, 과연 우리나라에서 가능할까 하는 지점도 있다. 


무엇보다도 먹고 살 수 있다는 안정감, 미래에도 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삶의 예측가능성이 확보되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현재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미래가 불안하면 그 책임을 다른 이에게 전가하기 쉬우니 말이다. 그러니 우선 우리들의 생활을 살펴야 한다.


생활이 안정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누군가의 부유함이 누군가의 궁핍으로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했다. 생활이 안정되고, 미래가 예측 가능하면 '극단'이 설 자리는 자연스레 없어진다.


이렇게 서로가 살 수 있는 사회로 가기 위한 방편, 그것이 민주주의 아니었던가. 남을 딛고 서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서는 것. 그러니 '극우'에 대해 생각할 때는 '민주주의'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위태로울 때 '극단'이 준동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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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스하다. 시집을 읽으면서 봄의 따스함을 느끼게 된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시들 한편 한편이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마치 시집 제목이 된 시 '아침은 생각한다'처럼, 자신만이 아니라 누군가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 이 시집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자연스레 읽으면서 그러한 마음에 동화가 된다. 많은 말이 필요없다. 그만큼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짧다. 짧지만 오래 간다.


  그 중 만난 시. 제비. 봄이 오면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새. 예전엔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우리와 함께 살던 새.


  우연히 원주에 있는 '빙하미술관'에 갔다가 그곳에 집을 짓고 사는 제비들을 만나게 되었다. 반갑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제비와 제비들이구나. 새끼들에게 부지런히 먹이를 날라주는 어미-아비 제비들.


집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먹이를 보채는 새끼 제비들. 그런 제비들을 본 행복. 문태준의 시집에서 '제비1, 제비2'를 만나고 그곳에서 본 제비들이 생각났다. 


지금쯤 새끼들은 자라서 스스로 날개짓을 하며 먹이를 찾아다니겠지. 그러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제비집을 두고 다시 떠나가겠지. 그렇게 그들의 삶이 반복되겠지.


제비 1


  제비를 뒤쫓아 날아가리 광평빌라 제일 아래층 모서리에 지은 제비집으로 날아가리 콘크리트 벽 모서리에 지은 당신의 집으로 날아가리 당신의 진흙집으로 날아가리 달무리 같은 집으로 날아가리 날아가 엄마, 하고 불러보리 둥지에서 부리를 족족 벌리고 먹이를 기다리던 딸 넷과 아들 하나를 기른 내 엄마 


문태준, 아침은 생각한다. 창비. 2022년.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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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 2


  제비 가족을 보러 광평빌라에 갔다 제비집에 제비들이 없었다 내부가 대낮처럼 텅 비었다. 사랑의 둘레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세계 곳곳은 진흙을 쌓아 지은 제비집 아닌가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야 제비집에 어떻게 오목하게 환하게 상공(上空)이 담기겠는가 제비집을 떠나 제비들은 흰 빛과 치렁치렁한 빗속과 엉긴 안개와 무너지는 노을 아래를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제비야, 내 언젠가 맑은 물과 꿈 위에 띄워놓은 꽃 같은 제비야


문태준, 아침은 생각한다. 창비. 2022년. 41쪽




<원주 빙하미술관에 자리잡은 제비 가족과 제비집. 2026년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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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없는 단어는 없다 - 읽기만 해도 어휘력이 늘고 말과 글에 깊이가 더해지는 책
장인용 지음 / 그래도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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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은 책상이다]라는 소설을 생각한다. 제 멋대로 단어의 뜻을 바꿔 쓰는 사람 이야기. 그는 왜 그 단어를 이렇게 써야 하지? 란 생각을 했다. 내 맘대로 그 단어를 쓰면 어떨까 하면서 자기가 만든 의미로 단어들을 쓴다.


그에게 그 단어들은 사연이 있지만, 문제는 이미 그 단어가 지니고 있던 사연을 무시하고 다른 사연을 덧붙인 데 있다.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단어. 그러면 소통이 되지 않는다. 고립될 수밖에 없다. 자기 세계에 갇혀 나오지 못한다. 언어는 자기 세계와 다른 세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데, 그 이음을 끊어버리는 것이 바로 자신만의 언어를 쓰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단어를 쓸 때 그냥 막 쓰는 것이 아니다. 이미 남들과 의미를 공유하는 말들을 쓴다. 소통하기 위해서. 남들과 의미를 공유하기 힘든 말을 쓰는 작가들이 있지만, 공유하기 힘든 것이지 공유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여러 장치를 통해서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넣고 있기 때문인데, 특히 시인들이 그렇다. 따라서 시를 읽을 때 우리는 보통 알고 있는 그 단어의 의미를 넘어서 어떤 의미를 품고 있을까를 고민한다.


이렇게 시인의 경우는 [책상은 책상이다]에 나온 사람과는 다르다. 그는 아예 언어의 연결을 끊어버렸다면, 시인은 연결을 유지하되, 그 연결을 찾으라고 한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우리가 처음부터 단어를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학습을 통해서, 또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통해서 그 단어의 의미를 익히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그 단어들을 사용하게 된다. 그 단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생각하지 않으면서. 단어가 세상에 나오고 사람들에게 쓰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단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잊힌다. 단어의 유래를 알지 못하게 된다.


다른 말로 어원(語源)을 잊어버린다. 더 시간이 흐르면 어원을 모르는 말들이 더 많아진다. 물론 어원을 몰라도 그 말을 쓸 수 있다. 어원을 모른다고 단어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어원을 알면 그 단어에 실린 사연을 알기에 그 단어를 좀더 잘 알게 될 수 있다. 또한 그 단어의 유래를 통해서 비슷한 어원을 지닌 말들을 만나기도 하고.


따라서 어원에 관한 책을 읽으면 재미 있다. 맞는 어원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간혹 이런 어원. 오징어. 한자어로 오적어(烏賊魚)였다고. 까마귀를 유인해 잡아먹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 오적어가 오징어가 된 것이라고.


하, 과연 까마귀가 바다에 떠 있는 오징어를 먹으려고 하다 도리어 잡혀먹히는 일이 생길까마는 이런 오징어란 말의 유래에 대해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에도 나온다고 하니(116쪽), 그런가 하면서 읽는 재미도 있다.


이 책에서는 오징어에 관해서 또 다른 사실.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야말로 재미와 지식이 함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인데... 우리가 지금 오징어라고 하는 것은 옛날에는 '피둥어꼴뚜기, 곧 꼴뚜기의 한 종류'(116쪽)라고 한다. 


처음 알게 된 사실. 예전에 오징어는 지금 우리가 '갑오징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고 하니, 참...


이와 비슷한 말이 '오이와 참외'다. 


'원래 '외'였던 참외가 줄기와 잎이 비슷한 오이에게 이름을 빼앗기고 '참외'가 되었다. ... 실제로 참외는 삼국 시대부터 있었고, 오이는 그보다 천 년 뒤인 1500년 즈음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참외를 지금은 과일로 여기지만 사실 장아찌를 담가 반찬으로 먹기도 했다.'(141-142쪽)


'참외' 이름에서 '외'가 오이의 줄임말일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참외가 오이에게 밀려 제 본래 이름 앞에 '참'자를 붙이게 되었다니... 


동네 이름으로 가면 더 재미있는 말들이 있다. 많은 곳에 있는 '가좌동'이라는 동네. 이름이 같은 동네가 많은데, '가좌'가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이 책에서 저자가 '가좌'는 '가재'를 한자어로 쓴 것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즉 '가좌동'은 '가재동'인 것이다. 물이 맑아 가재가 살고 있던 마을들 이름이 가좌동이었던 것.  이런 식으로 이 책에는 우리가 자주 쓰는 단어들에 실린 유래, 사연을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읽는 재미가 있다. 또 읽으면서 우리말에 대한 지식을 넓힐 수도 있고.


앞에 든 몇몇 단어들 말고도 참 많은 단어들이 그 사연을 지고 이 책에 나온다. 한번 읽어보면 우리말에 깃든 사연들, 또 그 단어들이 어떻게 자리잡고 변해왔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천천히 내가 쓰고 있는 말이 어떤 사연을 담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한번 들춰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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