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불편한 진실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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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자극적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반론이라고 여기는 제목이다. 불편한 진실이라니...


그렇다면 한글에 대해서, 세종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이 진실이 아니었던 말인가? 이런 주장이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설득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꼼꼼하게 자료를 살펴야 한다. 한글의 창제과정부터, 창제된 이후에 한글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주로 누가 사용했고, 남아 있는 기록은 무엇인지 등을 살펴야 한다. 그런 다음에 한글에 대한 진실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한글이 창제된 지 600년이 되어 간다. 1443년에 창제했고, 1446년에 반포했다고 기록에 남아 있으니 반포한 년도로 따져도 한글은 580년이라는 세월을 우리 곁에 있었다. 그동안 한글에 대한 연구도 많았고...


하지만 한글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두 가지 요인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당시에 인쇄술과 종이의 문제다. 금속활자가 있었다고는 인쇄를 나라에서 관리를 했기에, 누구나 인쇄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 그것을 찍어낼 종이는 많지 않았던 시대 아니던가.


그래서 옛날 이야기를 읽다보면 종이가 없어서 이면지를 사용하는 것은 기본이고, 그러한 이면지조차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개울가에서 모래에 쓰던지, 아니면 바위에 글씨를 썼다고 하지 않던가. 정보를 장악한 국가가 정보를 취사선택해서 인쇄해서 유포하느냐, 인쇄하지 않느냐를 결정했으니, 한글로 인쇄된 종이가 많이 남아 있을 수가 없다.


또한 신분제 사회에서 문자를 쓰고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였다. 근대에 들어서도 문맹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가. 조선시대에는 문자를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이 대다수였을 것이고, 그것이 그들의 삶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처럼 수시로 문서를 주고받는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인쇄 역시 대량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하나는 우리나라가 겪었던 전쟁이다. 한글 창제 이후에 겪은 큰 전쟁만 해도 임진왜란, 병자호란, 그리고 일제강점기와 해방이 되고나서 벌어졌던 전쟁까지.


대체로 전쟁은 많은 기록을 없앤다.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할 때에 기록물까지 챙기기는 힘들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벌어졌던 많은 전란으로 기록들이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몇 안 되는 한글 기록들이 사라진 것.


여기에 그러한 기록물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근대 이후의 삶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먹고살기 바빠서 불쏘시개로 쓴 경우도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국가에서 편찬한 기록물들이야 철저하게 관리를 했겠지만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경우), 또 권세가들에서, 나름 전통있다고 자랑하는 집안에서는 자신들의 문집을 보관했겠지만, 대다수를 차지하는 민중들은 그러한 기록물을 보존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자신들이 쓴 글들이라야 주로 계약에 관한 사항이거나 개인의 생활을 이야기하는 편지글들이었을 테니.


이런 기록물의 제약을 염두에 두고 한글에 대한 논쟁을 살펴야 한다. 당연히 지금 우리가 살필 수 있는 자료들은 국가의 공인을 받은 기록물들이 많고, 명문가라고 할 수 있는 집안들에 전해져 내려온 기록물들인 경우가 많다.


저자가 살피고 있는 기록물도 그렇다. 그런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저자의 주장은 제목에서 제시한 것처럼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다.


훈민정음에 세종의 서문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서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큰 차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서문을 읽으면 세종은 백성을 가엾게 여긴 것이 맞다. 그들이 편리하게 쓰도록 한글을 만들 생각을 한 것도 맞다. 이 점은 '불편한 진실'이라고 제목을 단 저자도 인정한다.


다만, 창제 이후의 과정에서 백성들을 위한 문자가 그들에게 다가갔느냐, 또한 그들이 편리하게 썼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자료들을 살피면서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부민고소법(部民告訴法)'이라고 한다. 지방 수령이 잘못했을 때 그 고을의 사람들이 수령을 고발하는 제도. 조선 초기에 이 제도가 살아있었다고 하는데, 이 법이 폐지된 때가 바로 세종 때라고 하는 것.


백성들이 자신들의 뜻을 펼치게 하려면 수령들의 잘못을 한글로 적어 호소하는 법을 시행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 법을 폐지했으니, 어떻게 백성들이 자신들의 뜻을 쉽게 펼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 점을 들어 '불편한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글을 사용한 사람들이 과연 일반 민중이었을까? 오히려 사대부라고 하는 양반들이 더 많이 사용했다고 하는 여러 자료들을 인용하면서 이 역시 '불편한 진실'이라고 한다. 저자는 이 두 가지를 구체적인 사료(史料)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불편한 진실일 수 있다. 한글이 창제된 이후 그것을 사용한 사람들은 당연히 양반층이 많았을 것이다. 왜냐? 이들에게는 시간이 많았으니까. 또한 이들은 읽고 쓰는 일이 생활이었으니까.


반면 민중들은 먹고살기 바빴다. 글을 배워 읽고 쓸 시간이 거의 없었다. 하루하루 노동하면서 사는 사람들, 그들이 한글을 익힐 여유가 있었을까? 결국 한글에 얽힌 불편한 진실은 세종의 의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아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민중들이 문화생활을 할 수 있게 노력해왔는가를 살피는 일이다. 소수의 집권층이 자신들은 경제적 부와 정치 권력, 그리고 문화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들의 삶을 받치고 있는 민중들의 삶을 개선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음을 문제삼아야 하는 것이다.


한글이라는 훌륭한 문자로 누구나 문화 생활을 할 수 있는 조건은 갖추어졌으나, 사회제도로써 그것을 뒷받침하지 못했다는 것, 이것을 세종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세종이 살았던 조선 초기, 왕권이 막 강화되기 시작한 때, 세종은 한글이라는 누구나 익히고 쓸 수 있는 문자를 선물로 남겨둔 것이 아닌가. 그 한글을 통해 어떤 사회를 만들어갈 것인가는 후대의 몫이지 세종의 몫은 아닌 것이다. 물론 후대 왕들이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조선은 왕조 사회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왕-사대부-양인-천민으로 구성된 신분제 사회에서 문자를 익힐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집단은 사대부 이상이었다. 그것이 경제가 발전하면서 양인들도 여유가 생기게 되니, 여항문학이 생겨나게 되고, 이들에게도 문자의 필요성이 대두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천민들도 삶에 여유가 생기면 문자를 익히려고 한다.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때문이다. 이때 한글은 그들에게 배우기 쉬운 문자로 다가갈 수 있다. 아니, 다가갔을 것이다. 그러니 1894년에 한글을 나라의 공식 문자로 선포할 수 있었던 것 아니었을까?


즉, 한글은 처음에는 양반층을 중심으로 사용되었지만 점차 백성들에게로 다가갔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세종 당대에 일어난 일이 아니더라도, 한글이 있었기에 민중들이 점차 문자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주로 사대부(양반)층에서 한글을 사용했다고 하는 것은 불편한 진실이라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책은 한글이 창제된 이후 그 쓰임이 어떠했는가를 살피고 있어서, 한글 창제 이후 한글의 쓰임을 살피는데 도움이 된다. 한글이 꾸준히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배우기 쉽고, 우리 말을 문자로 표기하는데 좋은 문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오히려 '불편한 진실'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저자의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다.


한글 창제 이후, 한글의 쓰임을 알고 싶으면 꼼꼼하게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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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팅 - 유령화 시대의 사랑
도미닉 페트먼 지음, 최리외 옮김 / 동녘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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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화 시대의 사랑'이라는 작은 제목을 달고 있다. 실체를 만나지 않고 관계를 맺어가는 사회를 유령화 사회라고 할 수 있다면, 현대처럼 기술이 발전한 시대는 분명 유령화 시대가 맞다.


우리는 수많은 관계를 사회적관계서비스망(SNS)을 통해서 맺고 있다. 어떤 이는 엄청나게 많은 이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사회학자 로빈 던바의 연구에 의하면 '150명이 넘어가면 진정한 추동력을 가진 우정이나 지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으며, 관계는 공허한 유사-사회적 제스처로 허물어진다'(16쪽)고 하니, 이런 관계를 중심으로 유지되는 사회를 유령화 시대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유령화 시대에 너무도 쉽게 관계를 끊는 일이 발생한다. 끊기도 하고 끊김을 당하기도 하고... 이를 '고스팅'이라고 한다.


'2012년에 나온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고스팅은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모르는 척하는 행동, 특히 SNS나 문자 메시지 등에서 갑작스럽게 응답을 중단하는 행동. 모든 의사소통을 중단함으로써 관계나 연결을 끝내는 행위'(26쪽)라고 정의된다.


이 정의만 봐도 지금 시대는 유령화 시대가 맞다. 너무도 쉽게 고스팅을 하고 또 고스팅을 당한다. 많은 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 관계가 계속 유지될지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불안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끊든, 끊김을 당하든.


하여 '고스팅은 우리 자신의 내면과 영혼에 빈 공간을 만든다'(12쪽)고 하는데, 저자는 이러한 고스팅을 연인 관계, 가족이나 친구 관계, 그리고 사회 관계로 나누어 살피고 있다.


가장 친밀한 관계라고 할 수 있는 가족 간에도 고스팅이 빈발하고 있음을 문학, 영화, 그리고 실제 사례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이 사람의 삶에 큰 상처를 남긴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같은 공간에서 지내는 가족 간에도 이런 고스팅이 일어난다면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연인 관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어느 순간 연락을 끊어버리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 것. 상대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런 암시도 없이 연락을 끊는 경우도 많다고.


영화나 소설을 보면 이러한 일들을 만나볼 수 있으니 이러한 고스팅이 낯선 일은 아니다. 다만, 고스팅으로 인해 상처를 받게 된다는 점. 그러한 고스팅이 빈번하다면 그 사회는 실체들이 관계를 만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유령들과 같이 실체가 없는 관계들만 난무하게 된다는 점을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이런 고스팅이 빈발하게 된 데는 사회-문화적 요인이 크다고...특히 이윤을 앞세우는 기업들이 자신들이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사회적으로 고스팅을 유발하고 있다고...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정치-경제적 권력자들도 사람들을 한 순간에 고스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고스팅 중 대표적인 것을 들라면 우리가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하는 것들과 '재개발'을 들 수 있겠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한 순간에 쫓겨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것. 이것은 정치권이 시민들을 고스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사회적 약자들을 쉽게 고스팅 하는 사회라면 다른 분야에서도 고스팅이 빈번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 고스팅은 전염성이 강하니까.


그렇다면 대책은 무엇인가? 가상현실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관계들. SNS를 통해 이루어지는 관계들. 이런 관계들을 모두 끊어야 할까? 아니, 그런 관계들을 모두 끊으라는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


이미 우리는 그런 세상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까. 되돌릴 수는 없더라도 우리가 잊어서는, 잃어서는 안 될 것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은 직접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즉 특정한 공간에서 서로 부딪히며 살아가는 존재, 지금처럼 SNS 속 관계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그 관계는 우리 몸과 몸이 만나는 관계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것.


하여 '가까운 이들과의 싸움, 갈등 그리고 좌절은 그저 진솔한 대인관계의 연결감으로부터 형성되는 질감, 역사, 궁극적으로는 보상의 일부'(178쪽)라고 한다. 즉 이러한 갈등은 피할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맺어가는 데 필수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보상이라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으니...


기술이 발전하고, 인공지능 시대가 온다고 해도 인간들이 인간들과 만나 관계를 맺는 일은 사라져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가상 현실 속으로 들어간다면, 그야말로 유령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유령이 될 것이다. 그러니 만나야 한다.


만날 수 있는 장소들, 그런 장소들의 소중함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 만나는 사람들, 그들이 나와 다르다고, 나를 귀찮게 한다고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나를 조금 내어주고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고스팅'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게 하기 위한 방법이 아닐까, 결국 이 책은 비대면 사회를 지향하는 우리에게 '대면 사회'의 중요성을 알리고, 사람들이 서로 만나 함께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 고스팅을 우리말로 '손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무언가 다른 느낌을 주고 있으니, 손절, 배제, 따돌림 또는 자발적 고립 등이 모두 포함된 말이 고스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 그것이 바로 고스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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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라예프 사건 ㅣ 빛소굴 세계문학전집 16
빅토르 세르주 지음, 조재룡 옮김 / 빛소굴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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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의 총성이 숙청으로,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발판이 된다. 정권이 사건을 조작하는 과정을 이토록 잘 그려낸 소설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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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설계자들 - 트랜스휴머니즘에서 바이오해킹까지, 실리콘밸리 영생 프로젝트를 추적하다
알렉스 크로토스키 지음, 최정숙 옮김 / 미래의창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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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 대답을 해 보자.


불멸주의자 중 한 사람인 존슨이 한 말이라고 한다.


"인생 최고의 신체적-정신적-영적 건강을 주는 알고리즘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그 상태에 닿는 대가로 여러분은 알고리즘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알고리즘이 먹으라고 할 때 알고리즘이 짚어준 것을 먹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겠습니까?" (337쪽)


죽음을 늦추는 방법. 그 대가는 자율성을 잃는 것이다. 알고리즘, 인공지능이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한다. 과연 그런 삶을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니... 이에 대한 대답은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겠지만...


두려운 죽음. 삶과 늘 함께하지만 그 존재를 의식하고 싶지 않은 죽음. 어떻게든 멀리 떨쳐버리고 싶은 죽음,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죽음. 하지만 아직까지는 피할 수 없는 죽음. 필멸의 존재, 인간.


필멸의 존재이기에 불멸을 꿈꾼다. 인간이 애초부터 불멸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신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러한 신이 불멸의 존재를 창조한다면 과연 그에게 생식 능력을 부여할까?


아마, 생식 능력을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에... 생식 능력이 있다면 불멸의 존재들이 한 없이 늘어날 텐데, 그것을 감당할 장소가 없게 될 것이기 때문에... 


또한 신을 믿지 않고 진화론을 믿는다면, 과연 불멸의 존재에게도 생식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을까? 신의 창조와 마찬가지로 진화의 관점에서도 불멸의 존재에게는 생식 능력은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진화란 적응과 생존인데, 불멸의 존재가 계속 생식을 한다면 적응과 생존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창조론과 진화론을 보아도 인간은 또 생물은 불멸의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필멸,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는 것이 바로 이 지구에서 인간이나 생물들이 살아가는 온당한 방식이다. 그것이 그들의 생존을 유지하는 비결이기도 할 것이고.


그런데 불멸을 추구하는 존재들이 있다.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 의식을 통해 죽음을 생각하면서, 또 주위 존재들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죽음에 대해서 두려움을 지니게 되었다. 


알지 못함이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다는 욕망을 낳는다. 그러한 욕망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한다. 인류가 기록을 남긴 때부터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욕망들이 얼마나 많은 기록으로 남아 있는가?


하지만 성공한 사례가 있던가? 없다. 없으니 지구에서 인류가 계속 생식을 통해 지구 상에 존재했으리라. 이것이 지금까지의 과정이다. 그런데 다른 변수가 생겼다. 인간이 신의 자리에 오르려 하고, 오를 수 있다고 여기는 존재들이 나타났다.


범용인공지능, 그것을 통해서 인간은 불멸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기대를 한다. 지금까지 인간이 몰랐던 사실을 인공지능을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이고, 늙지 않는 법을 발견하고, 그를 실현할 수 있는 시대가 곧 올 것이라고 믿는 존재들... 이 책에서는 그들을 불멸주의자들이라고 부른다.


불멸주의자들(IMMORTALISTS). 최첨단 과학기술을 자랑하는 실리콘밸리에서 불멸을 추구하는 집단들이 나타났고, 이들은 그 가능성을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있다.


이런 이들의 사고를 지탱하는 것은 우선 인간은 기계라는 관념과 객관적이고 측정가능한 정보이론, 그리고 시스템 이론이라고 한다.


인간도 디지털처럼 0과 1로 나눌 수 있다는 것, 고도로 복잡한 기계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 인간의 신체를 이렇게 해체하고, 부분들로 나누어 그 부분들의 역할을 파악한다면 죽음을 극복할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다양한 관점을 지닌 불멸주의자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이론과 지금까지 해왔던 실험들을 살피고 있다.


지금까지는 인간의 능력을 동원해 실험과 연구를 했다면, 이제는 인공지능을 통해 그것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하여 '실리콘밸리의 독실한 불멸주의자들은 ... 죽음을 정복하는 데 필요한 것은 그저 기계에 문제를 맡긴 후 답을 찾아내게 만드는 일 뿐이라고'(157쪽) 한다. 즉 '끊임없이 전진하는 기술이, 인간존재 자체를 포함해 우리가 직면한 모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리란 신념'(173쪽)을 지닌 이들이 바로 실리콘밸리의 불멸주의자들이라고 한다.


엄청난 규모의 자본을 투자하고, 네트워크 국가를 창설한다고 한다. 단지 네크워크 상에만 존재하는 국가가 아니라 국가로부터 땅을 사들여 그 나라의 법에서 자유로운 자신들의 이념을 자유롭게 실행할 수 있는 국가를 마련하고 있다고... 좀 섬뜩하기도 하다. 이들이 국가로부터 땅을 구입해 자신들의 네트워크 국가를 만들 때, 이미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쫒겨나고 말 뿐이니...


또한 이들이 불멸을 추구하는 사업을 하는데, 여기에 가난한 사람, 사회적 약자,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특히 무슬림)은 그들의 네트워크 국가에 들어갈 수도 없다. 또한 그들이 수명 연장을 위해서 하는 갖가지 방법들도 돈이 없는 사람들은 시도조차 해볼 수도 없다.


즉, 이들이 추구하는 네트워크 국가, 이 앞에 '불멸'을 붙이고 싶겠지만 이들 역시 아직 범용인공지능이 나오지 않았기에 '불멸'이란 말 대신 '장수'라는 말을 붙여 '장수 네트워크 국가'라고 하기도 한다는데... 그런 국가에는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이 자리할 수 있는 장소는 없다.


이 책의 저자는 많은 불멸주의자들을 인터뷰한 결과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과연 현재의 삶을 개선하는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가진 자들의 미래를 더욱 있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런 사회가 과연 바람직한가? 저자는 아니라고 한다. 저자는 '죽음은 결국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것을 맞이하는 우리의 태도뿐이다.'(333쪽)라고 하고 있다.


이렇게 죽음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함께하는 삶을 인식하고,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현재의 내가 만족스러운 삶,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죽음, 그것을 피하는 불멸. 하지만 인간에게 불멸은 생물학적으로 몸이 죽지 않음을 넘어서는 그 무엇일 수도 있음을, 그래서 인간과 다른 생물들에게 생식 능력이 존재함을, 나라는 개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집단으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불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실리콘밸리에서 추구하는 인간의 몸을 기계로 대하면서 고치려고 하는 모습과 더불어 먼 미래 기술을 바라면서 냉동하는 기술도 지금 쓰이고 있다고 하니, 인간에게 죽음이란 여전히 피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물론 내게도.


그래서 더 많이 죽음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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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제국: 권력, 자본, 노동 - 샘 올트먼과 오픈AI의 빛과 그림자
카렌 하오 지음, 임보영 옮김 / 생각의힘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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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AI. 아마 이 회사는 이제 이름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이름에 있는 '오픈'이라는 말을 부정하기 시작했으니까.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기술을 함께 공유하자는 의미로 '오픈'이라는 말을 썼을 테고, 이 '오픈'이라는 말은 독점이 아니라 공유를 의미하는데, 그 동안 오픈AI가 걸어온 길을 보면 이들은 '오픈'과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였다.


오픈AI의 최고경영자라 할 수 있는 샘 올트먼이 권력을 독점하고, 자신의 이윤을 위해서는 앞뒤 안 가리고 기술 개발을 해 온 결과, 또 그러한 기술 개발로 이윤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독점하기 위해서 '오픈'이라는 말을 부정하고 비밀로 하는 모습이 이 책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다.


이 책을 쓴 저자는 기자다. AI 열풍이 불 때, 그것을 심층 취재한 사람이다. 특히 오픈AI에 대해서 직접 방문해서도, 또 관계자들을 만나고 다양한 학자들을 통해서, 여기에 오픈AI의 기술을 위해 일하는 세계 각국의 노동자들을 만나서 오픈AI라는 회사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재구성하고 있다.


처음부터 박진감 있게 시작한다. 


'2023년 1월 17일 금요일 ... 올트먼은 해고되었'다고. 


어라? 샘 올트먼이 우리나라에 온다고 하면 정치인들부터 기업인들까지 열광을 하는데, 그가 해고된 적이 있었다고? 무슨 스티브 잡스야?


모르던 사실, 관심이 없었으니... 미국의 한 회사 최고경영자가 해고되었든 말든 그것이 내 삶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하지만 아니다. 지금은 샘 올트먼이라는 사람이 해고되느냐 되지 않느냐는 내 삶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가 오픈AI를 통해서 독점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으니까. 초창기에 그의 비전에 동의하고 함께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가고 이제 남은 것은 이윤을 선점하기 위한 기술개발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그에게는 인류의 행복이라는 것은 이윤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니 그(또는 그와 같은 신념을 지닌 사람)가 오픈AI에서 계속 권한을 행사하면 우리 삶이 어떤 쪽으로 가게 될지 예측할 수가 없다.


바로 이 책의 제목에서 말한 것처럼 '빛과 그림자'인데, 이것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인류를 유토피아로 이끌지 않고 디스토피아로 몰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오픈AI라는 회사가 발전할 때 자신들의 기술이 초래할 위험을 인지하고, 그것을 막을 방법이 구체화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제품을 출시하자는 쪽과 다른 기업이 제품을 내기 전에 먼저 내야 한다는 쪽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좋은 기술이라고 여러 측면에서 검토를 해야 한다는 쪽이 오픈AI에 있었을 때, 샘 올트먼이 자신의 이윤을 위해서 그들을 기만하는 말을 하는 모습을 여러 취재를 통해서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도록 서술해주고 있다.


그러한 서술이 상상이 아니라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따라서 소설처럼 인물들의 갈등이 잘 드러나고 있지만 독자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한 표현기법이지 결코 허구가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


수차례 자신의 서술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르니 검토해 달라고 오픈AI쪽에도 글을 보냈다고 하니, 저자 역시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오픈AI 쪽에서 답변읋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은 침묵으로 무시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내용은 부풀려서 홍보하는 거대 기업의 모습이라고 보면 된다.


샘 올트먼이 해고되었다는 내용으로 시작해서 그러한 결론을 이사회가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이 방대한 분량으로 펼쳐지고 있는데, 결국 올트먼의 해고는 해프닝으로 끝나고, 그가 다시 복귀하고, 그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오픈AI를 떠나는 것으로 이 책은 끝나게 된다.


아니, 그들이 떠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기술이 사회적 책임, 인류의 행복에 대한 공헌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다른 방향에서 다시 시작하고 있음을, 또한 오픈AI와 정반대의 길을 걷는 사람들도 있음을 보여주면서 끝내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은 무조건 AI기술을 반대하는 책이 아니다. AI를 인류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고민하자는 책이다.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또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AI를 활용할 수 있다면 누가 반대하겠는가? 그렇지 않고 기술이 독점되고 권력이 집중되어 통제하기 힘들어졌을 때 어떤 일이 생길지 고민해야 한다.


또 AI의 뒤에 가려져 있는 최소한의 임금으로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이 있음을, 또한 자원을 수탈하는 거대 기업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거대 기술은 독점으로 나아가기 쉽다. 왜냐하면 그것은 엄청난 규모의 자본이 필요하고, 그러한 자본을 조달할 수 있으려면 거대 기업이 되어야 하고, 그 투자 기금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기술을 독점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점을 샘 올트먼과 오픈AI라는 기업을 통해서 저자가 잘 보여주고 있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는 책인데, AI라는 기술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을 이용한 기업의 행태를 보여주고, 인류를 위해서 과연 그러한 기술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AI에 열광하는 사람, 또 비판적인 사람 모두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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