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섬과 세운상가 - 왜 시장이 바뀌면 서울이 바뀔까
박경선 지음 / 돌고래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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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愚問)이라고 해야 할까? 당연히 서울시장에 출마했다는 것은 자신이 서울을 어떻게 이끌겠다는 정책을 지니고, 그 정책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니까. 여기에 서울이라는 곳이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이고, 서울시장은 곧 더 큰 권력으로 가는 경유지가 될 수 있으니까,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되는 정책을 추진하고자 하니까.


자신의 정책과 비슷한 정책을 지닌 시장이 전임이었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자신과 다른 정책을 펼친 시장이 전임이었다면, 서울 정책이 바뀔 수밖에 없다.


즉 왜 시장이 바뀌면 서울이 바뀔까? 라는 질문은 어째서 우리는 서울시장을 정책의 연속성 상에 있는 사람을 선출하지 않았을까? 라는 질문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 책은 역대 서울시장 중에서 오세훈과 박원순이 번갈아 시장을 한 20년 정도를 살피고 있다. 둘의 정책이 극명하게 대비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최근에 서울시장을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년, 강산이 두 번 변할 시기에 이들은 오세훈-박원순-오세훈 순으로 서울시장으로 재직했다. 현재 오세훈이 당선된 시점에서 이 구도는 여전히 유효하기도 하고.


서울시장이 바뀌면 서울이 바뀔까는 질문이 오세훈 바로 전에 서울시장이었던 이명박과 오세훈을 놓고는 할 수 없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같은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명박에 이어 오세훈을 선출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명박이 추진한 청계천 복원 사업(사실상 복원이 아니라 청계천이라는 인공 하천을 다시 만든, 청계천 개발 사업이라고 해야 하지만, 여하튼), 뉴타운 사업, 버스 전용차로 도입 등등에 대해서 서울 시민들이 그리 반발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즉 당시까지는 개발이 통했다는 것인데, 오세훈이 급식 문제로 중도 사퇴한 이후에 당선된 박원순은 이러한 눈에 확 띠는 사업들과는 달리 과정을 중시하는, 시민들이 참여하는 사업을 중심으로 정책을 운영한다. 그리고 다시 박원순 이후 당선된 오세훈은 박원순이 했던 사업들을 지워나가고 있는 중이고...


이러한 서울시장이 바뀌면서 정책이 바뀐 사례를 '노들섬'과 '세운상가'를 통해서 살펴보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


노들섬은 서울시 소유라, 서울시장이 자신의 정책을 쉽게 펼칠 수 있는 반면에, 세운상가는 민간인들의 소유가 많아 서울시장이 자신의 정책을 펼치려 해도 여러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하여 이 책은 우선 노들섬에 대한 두 시장의 정책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간단히 정리하면 오세훈은 노들섬을 서울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하려 했고, 박원순은 시민들이 참여하는 장소로 하려 했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첫눈에 알아볼 수 있는 외양을 지닌 건축을 노들섬에 건설하려고 하는 정책이 오세훈의 정책이라면, 시민들이 가꾸고 변화시켜 가는 노들섬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 박원순의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지금 시장이 오세훈이니... 노들섬을 더 지켜볼 필요가 있고.


이와 같은 경우가 세운상가다. 세운상가 건물을 철거하고 재개발하려 하는 것이 오세훈이라면, 그 건물을 유지하면서 새로움을 더해가려 했던 것이 박원순이라고... 하지만 다시 오세훈이 당선된 이후 100미터가 넘는 고층건물을 짓겠다고 해서 문제가 되고 있는데... 그 과정이 이 책에 잘 나와 있다.


이 두 시장의 정책을 저자는 책의 뒷부분에서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하고 있다.


'두 명의 서울시장은 동일한 공간을 전혀 다르게 구상해 왔다. 오세훈 시장에게 노들섬은 글로벌 경쟁력을 상징하는 한강 위 랜드마크였고, 박원순 시장에게는 사용자가 중심이 되는 복합문화공간이었다. 세운상가 역시 오세훈 시장에게는 철거와 재개발을 통한 '도심 재창조'의 대상이었고, 박원순 시장에게는 역사적, 산업적 장소성이 축적된 '창의제조산업의 혁신기지'였다. 동일한 장소가 전혀 다른 미래상으로 기획된 것이다.' (251쪽)


그렇다면 이 두 곳을 통해서 서울의 미래를 그리는 정책이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누구의 정책이 더 좋다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두 정책이 지닌 장점과 단점을 살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읽어가면서 어떤 식으로 이 두 장소를 변화시켜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과연 외부자의 시선으로 볼 것인가, 내부자의 시선으로 볼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지금까지 이 책을 보면 오세훈의 정책은 외부자의 시선이 강하다 할 수 있고, 박원순의 정책은 내부자의 시선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즉 박원순은 '어떤 공간을 만들겠다는 하드웨어의 제시보다, 그 공간에 어떤 사람들이 모이고 어떤 활동이 이루어질지에 대한 소프트웨어적 비전을 강조'(195쪽)했다고 한다면, 오세훈은 이와는 대척점에 있는 비전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 점을 광화문 광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시민들이 자유롭게 만나고 무엇을 할 수 있는 장소로 광화문 광장을 생각하는 것이 내부자의 시선이라면 광장은 열린 공간으로 만들고 많은 전시물들을 설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광장을 외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눈길을 끌 무언가를 설치해야 한다. 이 점을 생각해도 두 시장의 정책이 상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들섬과 세운상가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마 오세훈 임기 4년 안에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다음 시장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이 곳들의 사업은 또다시 변화를 겪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변화를 겪지 않으려면, 적어도 서울시장의 정책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서울에서 대표적인 두 곳의 개발을 놓고 서울시민들이 냉철하게 평가하고, 그 평가를 받아들이고 서울시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을 선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개발 추진 -> 중지 -> 변경 추진 -> 중지 ->변경 추진의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다.


즉 누가 시장이 되느냐에 따라 바뀌는 서울 정책이 아니라 서울 정책의 일관성을 시민들의 의사에 맞게 추진할 수 있는 사람을 선출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렇게 우왕좌왕하면서 예산과 시간, 그리고 사람들의 노동까지 낭비하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단기적 성과를 넘어서는 장기적 계획 체계, 다양한 행위자가 참여하는 거버넌스, 그리고 정책 전환에 대한 제도적 견제 장치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도시공간은 단기간의, 오락가락하는 정치적 투기 행위에 휘말려 낭비될 것이다.'(257쪽)고 하고 있다.


이렇게 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깨어있는 시민들이 해야 할 일 아니겠는가. 서울시장이라는 자리를 자신의 정치적 출세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는 사람이 아니라, 서울시장으로서 서울시민들과 함께 서울의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 그러한 장소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을 알아보고 선출하는 안목.


그래서 아쉽다. 이 책이 조금 더 빨리 나왔어야 하는데... 이번 지자체 선거가 끝나고나서야 읽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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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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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서민 여성, 바로 저자의 어머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토대로 [랭스로 되돌아가다]를 썼다면, 이번엔 어머니의 죽음으로 이 책을 썼다고도 할 수 있다.


단지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 자신이 노동자 계급의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그 계급을 벗어났다. 그는 진보적인 정치 사상을 지닌 사람으로 노동자 계급임에도 자신들의 정체성에 반하는 투표를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그들이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게 되었다.


저자의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다. 젊은 시절, 노동자였을 때 어머니는 조합원으로서 노동조합의 주장에 동조하고, 그들과 함께 행동을 했다. 그러다가 나이 들어서는 극우 쪽에 투표를 하기도 했으며, 인종 차별적인 발언을 하기도 한다.


즉 노동조합원이었다고 해서 모두가 진보 정치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노동조합원이었던 어머니가 극우 쪽에 투표를 당당히 하는 모습, 이 책에 나와 있는데, 왜 그럴까? 


그것은 나이 들어가면서 자신이 동일시할 집단이 없어졌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을 읽은 소감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이 건재할 때는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 할 수 있다. 노동조합의 정책에 찬성하면서, 노동조합과 같은 정치적 성향을 지닐 수도 있다. 그때 자신은 노동조합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원으로서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집단에 속할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주장을 집단이 대변하고 있다는 인식, 하여 집단과 함께 행동할 수 있는 상태. 그것이 노동조합원이었을 때 어머니의 처지였다고 한다면, 나이 들어 이제 노동조합원도 아니고, 사회적으로도 밀려날 수밖에 없는 노년에 이른 어머니는?


어머니는 어느 집단과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시 할 수 있을까? 이제는 가족과도 떨어져 홀로 지내면서 많은 시간을 텔레비전과 함께, 요즘은 여기에 더해서 핸드폰으로 만나게 되는 온갖 모임들에서 보내는 영상들과 함께 보내게 된다.


자연스레 자신의 의식이 그쪽으로 편향되게 되는데... 그러므로 저자의 어머니 역시 극우 성향의 정치인에게 투표를 하기도 하는 것이다.


아마 우리나라는 이보다 더 심하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인터넷이 워낙 잘되어 있는 나라라서, 온갖 정보가 넘쳐나고 있고, 한번 만나게 된 영상은 알고리즘으로 그것을 계속 강화하는 영상들, 방송들을 만나게 하고, 다른 성향의 방송은 만날 기회를 박탈하고 있으니...


이들은 자신을 동일시할 집단을 이러한 방송에서 찾는 경향이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그러한 노인들의 모습을 비판하기 위해서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저자는 노년에 접어든 사람들이 겪는 일들을 자신의 어머니가 겪은 일을 바탕으로 서술하고 있다. 물론 이 책에서 말하는 부르조아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들은 노년에서 충분한 돈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누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노동자계급의 노인들은 그렇지 않다. 이들은 사회제도에 노년을 의탁할 수밖에 없다. 저자의 어머니 역시 나중에는 요양원에서 삶을 마감한다. 이 책에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지만 프랑스의 사회복지 제도가 많이 퇴보하고 있다는 점을 저자의 어머니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이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자식들도 독립해 살고 있고, 자신을 보살펴 줄 사람을 고용할 돈이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가는 곳, 물론 요양원도 천차만별이라 돈에 따라 환경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자신이 살던 곳에서 삶을 마감하기는 힘들다.


저자의 어머니가 겪은 일이 일반 서민들이 나이 들면 겪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저자는 이런 경험을 통해서 노년이 어떻게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다른 말로 하면 노년이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노년에 이르러 정당한 대우를 받기 위한 말과 행동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 사람들이 어떻게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지...


그들에게 필요한 사회 제도들을 어떻게 요구하고, 요구 사항이 관철될 수 있도록 행동할 수 있는지를 이 책의 후반부에서 살피고 있다.


결론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움직일 힘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미래라는 바꿀 수 있는 시간이 없는 사람들, 지금 자신의 몸을 움직일 힘도 없는 사람들이 서로 서로 연대해서 행동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저자의 말을 보자.


'남들에게 들리도록 소리를 낼 수 있는 고령자들의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의 가능한 '우리'가 없기 때문이고, 따라서 현실에서나 심지어 상상의 영역에서도 가능한 공적 발언이 없기 때문이다.'(289-290쪽)


이 불가능성이 노년들이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없게 하는데, 그렇다면 노년은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가려진 존재로 있다가 사라져야 하는가?


그들에게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끝까지 누릴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질문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한번은 반드시 겪어야 할 일이다. 물론 자신의 노년을 풍요롭게 지낼 수 있는 돈이 있는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노년에 겪을 일들이다.


이렇게 누구나 겪어야 할 일임에도 우리는 남의 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직 자신에게 오지 않은 일이고, 자신에게 닥쳤을 때는 이미 말도 행동도, 집단을 이룰 힘도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자신이 주체적으로 나서서 문제제기를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기 때문이다.


자, 닥쳤을 때는 할 수 없고, 할 수 있을 때는 남의 일처럼 여기는 이 상태, 이것이 바로 '노년'의 문제 아니겠는가. 저자는 이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회에서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노년을 그냥 없는 셈 칠 수는 없다.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 대변하고 그것을 정치적인 힘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내부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더라도 외부에서 대신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겪어야 할 일이라고, 그러므로 미리미리 바꾸어야 한다고... 이런 상황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문학의 힘이라고... 간접경험을 통해 미래를 미리 경험하는 것이 노년을 대변할 수 있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데...


노동자들이 극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그들 역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힘들다. 저자는 아르바이트를 할 때 불합리한 지시를 하는 관리자에게 저항할 수 있었지만 그 직장에 생계를 걸고 있는 어머니는 저항할 수 없었음이 이 책에도 나와 있는데, 이때는 이러한 처지에 있는 노동자들의 소리를 대변하는 노동조합과 진보 정치 집단이 이들을 대변한다. 


마찬가지로 노년을 대변할 수 있는 집단이 존재하게 된다면, 그때 '노년'도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자신의 어머니와의 경험을 통해서 이 책을 쓴 것이다. 적어도 이들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하여 저자는 소리를 낼 수도, 행동할 수도 없는 노년을 위해, 아니'노년만이 아니라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 소리를 내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 세상이 바뀌고, 누군가가 가려진 채로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결국 근본에 있는 정치적 문제는 이것이다. 누가 말하는가? 누가 발언할 수 있는가? 이 기본이 되는 정치적 행위가 가장 극심하게 지배받고 박탈당하고 취약한 사람 가운데 그렇게 많은 이에게 여전히 접근 불가능하다면 그들에 관해서, 그들을 위해서 말하고 그들을 보이게 하는 것이 작가에게, 예술가에게, 지식인에게 돌아오는 과제가 아닐까?'(299쪽) 


이 책을 읽으면서 이것은 다른 나라 이야기,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구나. 바로 우리 이야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저자의 마지막 문제제기가 계속 마음에 남는다. 우리에게 돌아오는 과제, 이 과제를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우리 사회에서 큰소리치고 있는 '노인'들이 아니라, 정말 힘 없는 노인들, 그리고 그만큼이나 더 힘 없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해야 하는 과제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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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만드는 일 - 윌리엄 모리스 산문선
윌리엄 모리스 지음, 정소영 옮김 / 온다프레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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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모리스.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사람. 삶에서 아름다움이 없다면 그 삶은 너무나 공허하다고 한 사람.


남들은 중세를 암흑기라고 하지만 모리스는 중세야말로 아름다움을 살았던 시대라고... 그때 사람들은 삶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왜냐? 이유는 간단하다. 삶과 예술이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장식예술을 중요하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쓰는 많은 도구들을 그냥 실용적인 목적으로, 그 쓰임새만을 위해 만들지 않고, 쓰임새와 더불어 아름다움을 생각해서 만들고 썼다는 것.


건축도 마찬가지다. 겉모습의 웅장함만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면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건축이 좋은 건축이라고.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우리가 집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을 보면 모리스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다. 단지 쓰임새만 생각하고 사지 않는다. 디자인을 본다. 아름다움을 본다. 그래서 우리가 쓰는 물건들에는 쓰임새와 더불어 아름다움도 함께하고 있다. 이런 것들을 우리 삶 전반에 걸쳐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모리스의 주장이다.


이렇게 인간은 생활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정치적으로는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하며, 경제적으로도 평등해져야 한다. 먹고살기 위해서 억지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해서 일을 하는 사회.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야 아름다움이 삶 속에서 실현된다고 모리스는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사회주의자라고 주장한다. 사회가 변해야 한다고... 가난한 사람, 자신의 노동을 남을 위해서만 하는 사람들이 없는 사회. 그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바로 아름다움을 생활에서 추구하는 것과 방향이 같다고 한다.


그는 '제가 뜻하는 사회주의는 ~ 모두가 동등한 조건에서 살고, 낭비 없이 만사를 꾸려가고, 어느 누구에게 해가 되면 곧 모두에게 해가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의식하는 그런 사회적 조건이지요. 마침내 공화(共和)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가 구현되는 사회라 할 수 있어요'(165-166쪽)라고 한다.


이런 사회는 삶 속에서 아름다움이 자연스레 구현되는 사회이고, 이런 사회에서는 쓰임새만이 아니라 아름다움도 함께 물건에 요구하고 실현하는 사회가 된다.


그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물건에 즐거움을 입히는 일, 그것이 바로 장식이 수행하는 하나의 위대한 역할입니다. 사람들이 만드는 물건에 즐거움을 부여하는 일, 그것이 또 다른 역할입니다.'(104쪽)고 장식예술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즐거움은 곧 아름다움과 통한다는 것.


이러한 아름다움이 즐거움이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면 곧 '자연에 조응하며 도움이 되면 아름다운 것이고, 반대로 자연에 어긋나며 방해가 되면 추한 것입니다.'(103쪽)고 하고 있으니, 이런 상태에서의 아름다움은 즐거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아름다움이 넘치는 사회는 사람들이 살 만한 사회라 할 수 있는데, '현대의 삶이 살 만한 것이 되려면 두 가지 미덕이 꼭 필요합니다. 만드는 사람과 사용하는 사람 모두에게 행복이 되는, 민중에 의해 민중을 위해 만들어지는 예술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정직함과 소박한 삶'(54쪽)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나침, 낭비가 없는 사회. 어느 곳에서는 넘쳐나서 버리고 있지만 어느 곳에서는 없어서 고통을 받는 그런 사회가 아닌, 정직함과 소박한 삶이 넘치는 사회일 수밖에 없다.


모리스는 필요를 창출하지만 그 필요에 아름다움을 덧붙일 수 있는 사회, 그리고 모두가 그러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누리는 사회를 그는 바라고 있는데, 이런 사회에서 '살 만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들은 ... 첫째는 건강한 신체, 둘째는 과거,현재,미래와 교감하는 활달한 정신, 셋째는 건강한 신체와 활달한 정신에 적합한 직업,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주거환경'(255쪽)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유용한 주장 아닌가. 살 만한 삶. 아름다운 삶. 그러기 위해서는 건강, 정신, 일,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가? 이 중 하나만 없어도 우리는 살 만한 삶이라고, 아름다운 삶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리스가 주장한 이런 살 만한 삶은 아름다운 삶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동료 인간을 두려워하는 일을 그만두고 그들을 믿고 의존하는 일, 경쟁을 없애고 협력을 쌓아가는 일, 그것이 우리가 꼭 해야 할 일'(240쪽)이라는 모리스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름다움에 관한 모리스의 글들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단순히 미학에 관한 책이 아니다. 우리 삶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있기에 사회학, 정치학과도 연결이 된다. 그가 삶의 환경을 바꿔야 한다고, 사회를 변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름다움은 우리 삶 전반에 걸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에서 한 가지 더 좋은 점이 있다면 모리스가 만든 아름다운 문양들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얼마나 삶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했는지, 그 문양들을 보면서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을 추천한 박노자의 말을 보자. 이 책을 가장 잘 정리한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리스가 세운 뜻은, 쉽게 이야기하면 근대가 망까뜨리고 획일화시킨 인간에게 미(美)를 통해 다시 한번 자유와 개성을 돌려준다는 것이었다.'(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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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테
차학경 지음, 김경년 옮김 / 문학사상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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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CTEE'


낯선 말이다. 프랑스어라고 한다. '받아쓰기'라고. 받아쓰기. 지금 아이들도 학교에서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국민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저학년 때 받아쓰기 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단지 국민학교에서만이 아니라 중, 고등학교에서도 외국어를(중학교에서는 영어를, 고등학교에서는 제2외국어라 해서,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 등등을 배웠다.) 배우면서 받아쓰기를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교사가 불러주는 단어나 문장을 제대로 썼는지 확인하는 과정. 그런데 소설이라고 하는데 제목을 프랑스어로 달고 받아쓰기라고 했으니 제목부터 생각을 하게 한다.


받아쓰기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라는 말인가? 정답은 있다. 그 정답을 제대로 옮기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점수가 달라지는 시험, 그것이 받아쓰기라 생각했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러한 받아쓰기라 아니라 삶을 인식하는, 삶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받아쓰기라고 이 말을 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 부분에 나오는 받아쓰기는 아마도 작가의 개인 체험이 들어간 것이겠지만, 개인 체험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태어나면서 받아쓰기를 한다. 그것을 글자로 적지 않더라도...


엄마의 말을 받아쓰기 하면서 언어를 익히게 된다. 단지 언어를 익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배우고, 자신을 알아가게 된다.


그런데 그러한 언어를 빼앗겼다면? 엄마로부터 자연스레 배우는 언어를 억압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자연스런 받아쓰기 과정이 인위적인 받아쓰기 과정으로 바뀌지 않을까? 그러면서 자신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과 자신을 알아가는 방법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데...


이 소설을 쓴 차학경의 삶을 보면 이 소설이 왜 받아쓰기이고, 다양한 형식이 시험되고 있는지 대략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차학경 자신도 어린 시절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 사람이다. 미국의 언어를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 사람. 그러니 그에게는 이제 생활해야 하는 언어를 받아쓰기 해야 한다. 엄마로부터가 아니라 그 사회로부터. 


그러면서도 엄마로부터 익혀온 언어가 사라지지 않는다. 엄마가 들려주는 언어를 끊임없이 받아쓰기 하면서, 다른 언어도 받아쓰기를 해야 한다. 여기에 차학경은 프랑스어에도 관심이 있고, 배웠다고 하니, 이 소설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하시오'라는 부분이 있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단지 언어의 번역, 받아쓰기 문제가 아니다. 바로 세계를 인식하고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해가는 과정이다.


이 받아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넷이다. 유관순, 잔 다르크, 성녀 테레즈, 그리고 엄마. 유관순과 잔 다르크는 나라와 관련이 있다면, 성녀 테레즈는 종교와, 그리고 엄마는 이 모두와 연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이 소설은 엄마를 중심으로, 엄마의 이야기를 받아쓰기 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는데, 이는 엄마를 통해서 우리나라의 역사, 그리고 그와 비슷한 세계 속 역사를 살피고 있으며, 자신의 신념인, (차학경은 테레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그의 형제자매들도 모두 이러한 세례명을 지니고 있다), 종교에 대한 믿음에 대한 표현을 통해 자신이 바라는 세상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단순히 엄마의 말을 받아쓰기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식을 통해서, 또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서 역사와, 종교와 사랑을 이 소설 속에 녹여내고 있다.


하여 소설 속 문장을 인용하면 '원 속의 원, 동심원의 연속'(187쪽)이라는 표현처럼, 이 소설은 자신의 삶이라는 원에서 엄마의 삶이라는 원, 유관순 - 잔 다르크의 삶의 원, 성녀 테레즈의 삶의 원과 역사의 원이 동심원처럼 중첩되어 있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 다양한 삶들을 'DICTEE'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러므로 어떤 하나의 형식으로 소설을 전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받아쓰게 하는 존재에 따라 받아쓰기 방식이 달라질 수 있기에, 또한 받아쓰기를 하는 주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받아들였느냐에 따라 받아쓰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 하나의 형식이 아니라 다양한 형식들이 이 소설 속에 혼재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들을 하나로 꿰기는 힘들다. 읽는 사람 역시 차학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받아쓰기'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받아쓰기'에는 백 점이란 없다. 자신의 관점에 맞게 변용해서 받아들이고, 다시-쓰기를 할 뿐,


소설에 여러 언어가 혼재되어 나타나, (책의 말미에 있는 오빠의 글에 의하면 '테레사는 한국어, 영어, 불어,그리스어를 인용해서 [딕테]를 구성했다'(211쪽)고 나와 있다) 번역자도 이 점 때문에 많은 고심을 했을 것인데, 읽기도 쉽지 않은데, 그럼에도 읽으면서 무언가 어렴풋하게 어떤 형상이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런 느낌을 좀더 구체화하고 싶으면 소설 뒤에 실린 차학경 오빠의 글과 번역자의 말, 작품 해설 두 편을 읽으면 좋을 것이다.


한 번에 읽고 끝낼 소설이 아니라는 것, 두고두고 읽으면 그때마다 받아쓰기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소설. 읽고 나서도 무언가가 계속 남아 있는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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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유튜브에서 아들을 구출해 왔다 ㅣ 교양 100그램 8
권정민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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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유튜브'에서 아들을 구출했다는 말. 쉽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너무도 쉽게 유튜브 영상을 통해서 다른 이들을 혐오하고 배제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는 현실.


그럼에도 유튜브를 어떻게 할 수 없는, 너나 할 것 없이 유튜브를 하겠다고, 어떤 곳은 이들이 광장을 점령해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재미, 흥미, 관심사를 유튜브로 만들어 보여주는 이들을 모두 비판할 수는 없다.


다만, 유튜브를 통해 혐오와 배제의 논리를 전파하고, 행동을 촉구하는 이들마저도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허용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표현의 자유는 소중하니까. 이렇게 소중한 표현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면? 그것도 표현의 자유일까?


표현의 자유를 빙자해서 혐오하고, 배제하고, 폭력을 선동하는 것이 과연 용납되어야 할까? 이들에 대한 규제가 이루어지지 않고 잇는 상황에서, 그러한 발언-선동들이 '사이다'라고 인정받는 사회에서 입시에 찌든 학생들이 쉽게 빠져들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감정을 분출할 수 있는 통로가 유튜브에 있으며, 이들은 표면상으로는 자신들을 지지해주고 응원해준다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또한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니, 시원하단 느낌이 들게 해주기도 하고...


감정이 요동치는 나이, 질풍노도의 시기에 반항하는 시기라고 하는 사춘기에 단정적인 말은 그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도 있다. 무엇보다 앞에서 하는 말과 뒤에서 하는 행동이 다르지 않다고 여길 테니까. 사실 그들의 행동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런 극우 유튜브를 보면서 재미를 느끼고, 그것을 놀이라고 생각하는 청소년이 늘고 있다고 하는데, 단순히 놀이를 넘어서 혐오와 배제로 나아가면 극우로 빠져들게 되기 쉽다.


저자의 아들 역시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보는 유튜브에서, 또 친구들의 말에서 극우적 표현들을 익혔다고 한다. 이런 점을 알게 된 저자가 아들과 대화를 통해 극우 논리에서 벗어나 진실을 찾는 비판적 사고를 하는 아들로 자라게 하고 있다고 하는데...


학교에서 늘 '민주시민교육'을 강조한다. 비판적 사고력을 함양하고... 하는 말들이 교육 목표로 실려 있기도 하다.


이렇게 민주시민과 비판적 사고력을 함양한다는 학교에서 극우 논리가 판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교육만으로 이러한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 학교 현장이 오히려 극우 논리가 스며들고 확산되게 하는 공간으로 작동한다면, 지금 학교 교육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왜 학교에서 가르치는 그 좋은 내용들이 학생들에게 다가가지 않고, 유튜브나 다른 매체들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극우 논리, 또는 극단적인 논리가 학생들에게 다가갈까?


답은 뻔하지 않은가? 바로 우리 사회에서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사랑과 신뢰가 있다면 극단적인 사고로 가지 않는다. 적어도 상대가 한 말이나 행동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된다.


무조건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말할까? 왜 저렇게 행동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사랑과 신뢰가 없으면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부터 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더 강화하게 된다.


이 책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도 이것이다. 가족 간에도 '사랑과 신뢰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부모가 좋은 말을 그렇듯하게 하면서도 자식들에게는 학원을 강요하고, 입시에서 성공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둔다면, 과연 그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 간에 사랑과 신뢰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말과 행동이 다른 존재로 부모를 인식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부모 자식 간에 대화는 힘들어진다. 부모는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고, 아이는 부모의 생각을 거부하는 모습으로 굳어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극우 유튜브를 비롯한 극단적인 성향을 띠는 매체들이 자리를 잡게 된다. 마음에 파고들게 된다.


혹해서, 와, 통쾌하네 하는 생각으로 한두 번 보다 보면 알고리즘에 의해 이와 비슷한 영상들이, 매체들을 계속 보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각을 굳히게 되고, 부모와는 더더욱 멀어지게 된다. 부모를 꼰대라고 여기게 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 또는 앞과 뒤가 다른 이중인격자로 여기게 된다.


또한 학교의 그 좋은 목표들보다 자기 자식의 성적이 더 중요한 부모가 학교에 와서 교사들을 대하는 태도들을 보면, 어떤 학생이 교사의 말을 따르겠는가? 자신의 부모조차 무시하는 교사들의 말을.


이렇게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깨진 가정과 학교에서 아이들은 어른들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이끌어줄 어른은 집에, 학교에 있지 않고 사이버 상에 존재한다. 그것이 유튜브든 게임에서 자신들을 이끄는 사람이든, 단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을 어른으로 착각한다.


부모, 교사가 아니라 이것이다, 이래야 한다, 저들이 나쁘다. 저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혐오와 배제의 말하기를 하는 그들을 어른으로 착각하는 순간, 극우 쪽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렇게 극우 논리에 함몰된 자식을 구출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저자는 부단히 대화를 한다. 그것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가 이해하기 쉽게. 이런 일은 대부분의 부모가 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일이다.


하지만 저자와 같지 않더라도 가족 간에 '사랑과 신뢰'가 있다면 짧은 시간에도 대화를 할 수 있다. 진심을 다하는 대화. 그래서 상대를 배제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나만이 아니라 상대의 말에도 경청을 하는 그런 대화를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극우 유튜브에서 아들을 구출'한 방법이다.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가까워야 할 부모-자식 간에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 부모도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실수할 때도 있음을, 다만 그 실수를 인정하고 고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자식이 느끼게 하고, 자식에게도 완벽함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실수를 통해서 배워나가는 모습을 기대한다는 것을.


남을 배제하고 혐오해서는 절대로 자신도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다른 존재들과 함께 어울려 즐겁고 행복하는 사는 삶을 부모가 원한다는 것을, 그래서 극단적인 논리를 주장하는 존재들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부모-자식 간에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 관계가 있어야 대화도 가능하다. 어디 이것이 부모-자식 간에만 해당하겠는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무너진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우리 사회가 극단주의에 빠지지 않게 된다. 특히 미래세대들에게는 더더욱 그런 관계 회복이 절실하다. 


그 점을 이 책에서 저자는 잘 보여주고 있다. 자신과 아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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