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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테
차학경 지음, 김경년 옮김 / 문학사상 / 2024년 11월
평점 :
'DICTEE'
낯선 말이다. 프랑스어라고 한다. '받아쓰기'라고. 받아쓰기. 지금 아이들도 학교에서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국민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저학년 때 받아쓰기 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단지 국민학교에서만이 아니라 중, 고등학교에서도 외국어를(중학교에서는 영어를, 고등학교에서는 제2외국어라 해서,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 등등을 배웠다.) 배우면서 받아쓰기를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교사가 불러주는 단어나 문장을 제대로 썼는지 확인하는 과정. 그런데 소설이라고 하는데 제목을 프랑스어로 달고 받아쓰기라고 했으니 제목부터 생각을 하게 한다.
받아쓰기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라는 말인가? 정답은 있다. 그 정답을 제대로 옮기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점수가 달라지는 시험, 그것이 받아쓰기라 생각했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러한 받아쓰기라 아니라 삶을 인식하는, 삶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받아쓰기라고 이 말을 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 부분에 나오는 받아쓰기는 아마도 작가의 개인 체험이 들어간 것이겠지만, 개인 체험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태어나면서 받아쓰기를 한다. 그것을 글자로 적지 않더라도...
엄마의 말을 받아쓰기 하면서 언어를 익히게 된다. 단지 언어를 익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배우고, 자신을 알아가게 된다.
그런데 그러한 언어를 빼앗겼다면? 엄마로부터 자연스레 배우는 언어를 억압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자연스런 받아쓰기 과정이 인위적인 받아쓰기 과정으로 바뀌지 않을까? 그러면서 자신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과 자신을 알아가는 방법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데...
이 소설을 쓴 차학경의 삶을 보면 이 소설이 왜 받아쓰기이고, 다양한 형식이 시험되고 있는지 대략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차학경 자신도 어린 시절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 사람이다. 미국의 언어를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 사람. 그러니 그에게는 이제 생활해야 하는 언어를 받아쓰기 해야 한다. 엄마로부터가 아니라 그 사회로부터.
그러면서도 엄마로부터 익혀온 언어가 사라지지 않는다. 엄마가 들려주는 언어를 끊임없이 받아쓰기 하면서, 다른 언어도 받아쓰기를 해야 한다. 여기에 차학경은 프랑스어에도 관심이 있고, 배웠다고 하니, 이 소설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하시오'라는 부분이 있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단지 언어의 번역, 받아쓰기 문제가 아니다. 바로 세계를 인식하고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해가는 과정이다.
이 받아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넷이다. 유관순, 잔 다르크, 성녀 테레즈, 그리고 엄마. 유관순과 잔 다르크는 나라와 관련이 있다면, 성녀 테레즈는 종교와, 그리고 엄마는 이 모두와 연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이 소설은 엄마를 중심으로, 엄마의 이야기를 받아쓰기 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는데, 이는 엄마를 통해서 우리나라의 역사, 그리고 그와 비슷한 세계 속 역사를 살피고 있으며, 자신의 신념인, (차학경은 테레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그의 형제자매들도 모두 이러한 세례명을 지니고 있다), 종교에 대한 믿음에 대한 표현을 통해 자신이 바라는 세상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단순히 엄마의 말을 받아쓰기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식을 통해서, 또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서 역사와, 종교와 사랑을 이 소설 속에 녹여내고 있다.
하여 소설 속 문장을 인용하면 '원 속의 원, 동심원의 연속'(187쪽)이라는 표현처럼, 이 소설은 자신의 삶이라는 원에서 엄마의 삶이라는 원, 유관순 - 잔 다르크의 삶의 원, 성녀 테레즈의 삶의 원과 역사의 원이 동심원처럼 중첩되어 있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 다양한 삶들을 'DICTEE'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러므로 어떤 하나의 형식으로 소설을 전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받아쓰게 하는 존재에 따라 받아쓰기 방식이 달라질 수 있기에, 또한 받아쓰기를 하는 주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받아들였느냐에 따라 받아쓰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 하나의 형식이 아니라 다양한 형식들이 이 소설 속에 혼재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들을 하나로 꿰기는 힘들다. 읽는 사람 역시 차학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받아쓰기'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받아쓰기'에는 백 점이란 없다. 자신의 관점에 맞게 변용해서 받아들이고, 다시-쓰기를 할 뿐,
소설에 여러 언어가 혼재되어 나타나, (책의 말미에 있는 오빠의 글에 의하면 '테레사는 한국어, 영어, 불어,그리스어를 인용해서 [딕테]를 구성했다'(211쪽)고 나와 있다) 번역자도 이 점 때문에 많은 고심을 했을 것인데, 읽기도 쉽지 않은데, 그럼에도 읽으면서 무언가 어렴풋하게 어떤 형상이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런 느낌을 좀더 구체화하고 싶으면 소설 뒤에 실린 차학경 오빠의 글과 번역자의 말, 작품 해설 두 편을 읽으면 좋을 것이다.
한 번에 읽고 끝낼 소설이 아니라는 것, 두고두고 읽으면 그때마다 받아쓰기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소설. 읽고 나서도 무언가가 계속 남아 있는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