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에티켓 - 누구도 말해주지 않은 당신의 마지막에 관하여, 개정판
롤란트 슐츠 지음, 노선정 옮김 / 스노우폭스북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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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누구나 피하고 싶은 것. 


알지 못하기에, 더더욱 두려운 것.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결코 평화롭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더 맞이하고 싶지 않은 것.


그렇지만 피할 수 없는 것. 아직까지는. 언젠가는 피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지구가, 우주가 견디지 못하겠지. 포화상태가 될 테니까.


이렇게 죽음은 생각하기조차 싫은 것. 남에게 일어날 수는 있지만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 또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 그러나 살면서 점점 죽음을 만나게 되는 횟수가 늘고, 언젠가는 그것이 자신에게도 올 것임을 생각하게 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지만, 누가 죽음을 즐길 수 있을 것인가. 죽음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죽음 앞에 담담할 수는 있겠다. 담담함. 그것이 겉으로 꾸미는 일일지라도 그렇게 보이도록 한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덜 충격을, 슬픔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한때 '유언장 쓰기'가 유행했었다.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어떤 말을 남길까 생각해 쓰는 활동. 이는 죽음을 생각한다기보다 죽음으로 인해 삶을 더 잘살기 위한 방편으로 하는 활동이기도 했다. 죽음이라는 끝을 향해 가면서 삶을 의미 있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이와 비슷한 활동이 '관 속에 누워보기'란 활동이 있었다. 죽은 다음 들어가는 관. 그 속에 들어가 있으면서 죽음과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상황을 경험해보라는 것. 다 삶을 잘살기 위한 방편의 활동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비슷한 활동을 하면서도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더 의미 있게 보내는 방편으로 활용을 한다. 역시 죽음은 내 일이 아닌 것이다. 내 일이 아니기에 이런 활동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역시, 내 삶은 소중해! 하면서.


하지만 이 책은 그것과는 다르다. 우리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죽은 다음의 과정은 어떻게 되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아파서, 나이들어서 또는 사고로 죽은 세 명의 사람을 예로 든다. 그들 죽음의 원인은 다를지라도, 또 죽음의 원인에 따라서 다음 과정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죽음 직전에 신호가 오고(사고는 물론 다르다), 고통이 함께하며, 그 다음에 숨이 멎는다. 숨이 멎으면 신체에 변화가 오고, 의사가 와 죽음을 확인하고 증명서를 내준다. 다음 장례 절차가 진행이 되고, 매장 혹은 화장이 된다. 그 다음에 기일을 맞이하여 주변 사람들이 추모를 하고, 점점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다.


이런 과정을 자세하게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어서 알려주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 우리는 대체로 죽음 하면 죽어가는 과정에 중심을 두고 있지만, 이 책은 전체적인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표를 보라.


삶과 죽음의 곡선이 위아래가 반대인데, 이상하게 두 곡선이 만나서 연결되지 않는다. 이 말은 삶과 죽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마치 영화기법 중에 OL(오버랩) 기능처럼 겹치는 시간.


이렇게 삶 속에서 죽음이 시작하기 때문에 가장 좋은 방법은 죽음을 자신이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것. 죽음은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 구절을 읽으면서 예전 우리나라 어른들이 죽음을 준비하던 것이 생각났다.


자신의 무덤을 미리 마련하고 (선산이 있는 경우 말고도, 근대에 들어서도 자신의 무덤을 미리 마련해두는 어른들이 많았다), 죽어서 입을 수의를 맞추어 놓았으며, 또한 죽은 후에는 어떻게 하라는 말까지 (유언이라고 할 수 있다) 하고, 어떤 이들은 죽음을 맞이하여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고 하니.


그런 전통들이 사라져가고, 이젠 죽음마저도 의사의 손에 맡겨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럼에도 죽음은 자신의 것이라고... 준비하는 것이 죽음의 에티켓이라고 하는 듯하고... 죽은 다음에야 이제는 장례 절차에 따라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이지만,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장례를 끝내는지를 다큐멘터리 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면 예전의 '유언장 쓰기, 관 속에 누워보기'와 비슷한 역할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래, 적어도 갈 때 올 때보다 좋은 모습으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니, 그만큼 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고.


여전히 죽음은 두렵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는 없으니, 저자의 말대로 '그렇기에 우리는, 당신은, 나는 준비해야 합니다. / 내 삶이 오직 나 자신의 방식이었던 것처럼 죽음 또한 온전히 내 방식대로 이뤄져야' 하기 위해서라도 기본적인 준비는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은 그만큼 죽음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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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9-19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프가 ‘만나지지 않는 연장선상‘ 이란 느낌이 드는군요.
 
독일. 어느 겨울동화 / 공산당 선언 - 시와 사상의 만남
하인리히 하이네 & 카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홍성광 옮김 / 연암서가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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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네의 시와 한때 우리나라에서 읽으면 안 되었던 '공산당 선언'이 묶여 있다. 서정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하이네지만 참여시라고 할 수 있는 시들을 썼다는 점. 그리고 그와 마르크스가 교류를 한 적이 있다는 점에서 시와 사상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네가 쓴 '독일, 어느 겨울 동화' 제1장에 이런 표현이 있다.


'우리는 여기 지상에서 벌써 / 하늘나라를 세우려고 한다.


우린 지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려 하며 / 더 이상 궁핍을 원하지 않는다 / 부지런한 손이 번 것을 / 게으른 위가 탕진해서는 안 된다.


이 지상에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 충분한 빵이 자라고 있어 / 장미와 도금양도, 미와 즐거움도 / 또 완두콩도 적지 않아.' (47-48쪽)


이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바라던 혁명 아니던가. 하늘나라가 아닌 지상에 사람들이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


그런 그들의 주장을 선언으로 만든 것이 바로 '공산당 선언'


너무도 유명한 구절들이 들어 있는, '유령 하나가 유럽에 돌아다니고 있다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240쪽)로 시작해서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다. 그들이 얻는 것은 하나의 세계이다.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295쪽)로 끝나는 공산당 선언.


우리나라야 지금도 좌파라고 하면 못 잡아 먹어서 난리인 나라지만, 좌파를 공산주의자라고 하면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할 수도 있는 나라지만, 이제 이런 '공산당 선언'은 읽어도 되는 나라가 되었다.


이렇게 되었다는 건 그만큼 사회가 성숙해졌다는 것, 다른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사상의 자유를 누리는 사회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겠지.


이런 것도 있지만 공산주의가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할 수 있기에 그런 여유가 생긴 것 아닐지... 그러면 이 공산당 선언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할 문헌이 되어야 하는데...


물론 많은 부분에서는 실현이 될 수 없는 선언이다. 그럼에도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은 무언가 아직도 받아들일 것이 있어서일 텐데...


가령 이 선언에 이런 대책들이 있는데, 지금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방향과 일치하는 것들이 많다. '소득에 대해 높은 누진세를 적용, 도시와 농촌간의 차별을 점차 제거, 공립학교엣 모든 어린이를 위한 무상교육을 실시 등등'


이것이 바로 역사다. 무조건 배척하는 것이 아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받아들이는, 그래서 사회가 조금이라도 좋은 쪽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


하이네와 공산당 선언을 묶고, 비슷한 점을 해설에서 잘 설명해주고 있지만, 하이네의 시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고 있다. 서양의 문화, 역사를 알아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시라서 그런지, 그의 풍자가 확 와닿지 않았는데, 공산당 선언도 역사 속에서 다시 평가해야 할 선언이니... 


지금 우리 현실에서 무엇을 받아들여야 할지, 그들이 이 선언을 작성할 당시의 의도에 맞게 우리 현실을 파악하고 개선할 방법을 찾는 것이 이 선언에 충실한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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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프티 피플 - 2017년 제5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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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50명의 사람이 나와야 한다. 제목이 이러면 꼭 나오는 사람을 세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차례를 보면서 한 명, 두 명 세어본다. 어? 51명인데... 뭐야? 잘못 세었나? 다시 세어본다. 외국인이 두 명, 한 번에 세 명이 동시에 나오는 장이 있고, 마지막 장은 '그리고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아무리 세어도 51명이다. 이런... 제목에 맞춰 합리화해본다.


그래 세 명이 나온 장을 한 사람으로 치고, 마지막 장을 또 한 사람으로 보면 50명이네, 딱 맞네 하면서. 그러다 소설을 다 읽고 작가의 말을 읽으니 이런 작가가 이런 말을 한다.


'어쩌다보니 51명입니다. 혹 세어보시다가 한명이 더 있어 놀라실까 말씀드립니다. 제가 넘치게 썼는데 제목을 '피프티 원 피플'이라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보다 자기 장(章)을 가지지 않으면서 드나드는 인물도 있어서 사실은 52명, 53명 ..... 세는 방식에 따라 달라질 것 같습니다.'(393)


역시, 나와 같은 사람이 많구나. 사람을 세는 것이 별 의미가 없겠구나. 하지만 사람의 호기심이란 꼭 제목에 맞게 사람 수를 세어보게 하니... 참.


각자의 인물이 짧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런 삶들 중에 저런, 저런 나쁜 놈이 하는 삶은 여기서 거의 나오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사랑을 기본으로 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누구나의 삶은 누구나 존중받아야 하니까. 그럼에도 나쁜 놈들은 나온다. 자기만 아는 놈, 다른 사람을 해치는 놈. 세상은 좋은 사람만 살지 않으니까. 별별 사람이 다 있으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좋은 것만 보고 살면 좋지 않을까 하지만, 어려움을 아예 겪지 않았을 때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대처를 잘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 중에 '김시철'이란 인물의 아내인 혜린에게서 그 점을 발견한다.


자신들이 내지도 않는 층간 소음이라고 아랫집이 따질 때 아내인 혜린이 많이 힘들어하는데, 이때 시철은 이렇게 생각한다.


'혜린의 낙천성과 둥근 성격은 타인의 공격성을 적게 겪으며 자라는 동안 형성된 것이어서, 막상 공격적인 상대를 마주하니 면역성이 쉽게 무너졌다.'(304쪽)


하, 타인의 공격성에 면역이 생기기 힘들지만, 자신이 먼저 무너지지 않아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이 장면에서 '학교'를 생각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정말로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가는 장소.


이 장소에서 온갖 갈등을 겪으며 그것을 해결하면서 때로는 묻어두면서 지내온 기간들이 결국은 사람들로 하여금 낯선 타인을, 타인의 낯선 방식을 견디게 하는 힘을 길러주지 않을까? 따라서 학교란 단순히 지식을 전수하는 곳이 아니라 관계를 맺어가는 방식을, 다름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익히게 하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꼭 학교가 아니어도 된다. 사람들은 성장하면서 다양한 관계를 맺는데, 이 관계들이 자신의 삶에 긍정적인 쪽으로 오게 하면 되니까. 그런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에 소설만큼 좋은 것이 있을까 싶다.


소설에는 온갖 인간들이 다 나오니까. 그들의 삶이 나오고, 정말 나하고는 하나도 같지 않은 삶들도 소설 속에서는 만날 수 있으니까. 그러면서 그들 삶에도 나름대로 애환이 있음을 볼 수 있으니까.


이 소설에 나오는 무려 51명, 아니 그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세상은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구나, 그들이 서로 단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더라도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겠구나, 그리고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 일을 겪고 기억하겠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작가가 마지막 장에서 많은 이들을 영화관에 모아놓는데, 이 건물에 불이 나고 대피하는 경험을 모두 하겠지만, 그 경험은 각자에게 다른 기억으로 남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니. 바로 이 마지막 장이 소설이 하는 역할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해도 좋겠다.


마지막 장 말고도 꼭 기억하고 싶은 장면은 '소현재'라는 인물이 '직업환경의학과(예전에는 산업의학과라고 했다고)'를 선택하고 여전히 많은 산업재해에 마음 아파하면서 도대체 해결되지 않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같은 병원의 원로 교수인 '이호(이 인물 역시 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가 해주는 말.


"우리가 하는 일이 돌을 멀리 던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어떻게든 한껏 멀리. 개개인은 착각을 하지요.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사람의 능력이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돌이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시대란 게, 세대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소 선생은 시작선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내 세대와 우리의 중간 세대가 던지고 던져서 그 돌이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주워 던지고 있는 겁니다. 내 말 이해합니까?"


"릴레이 같은 거란 말씀이죠?"


"그겁니다. (...중략...) 가끔 미친 자가 나타나 그 돌을 반대 방향으로 던지기도 하겠죠. 그럼 화가 날 거야. 하지만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조금만 긴 시간을 가지고 볼 기회가 운 좋게 소 선생에게 주어진다면, 이를테면 40년쯤 후에 내 나이가 되어 돌아본다면 돌은 멀리 갔을 겁니다. 그리고 그 돌이 떨어진 풀숲은 소 선생 다음 사람이 뒤져 다시 던질 겁니다. 소 선생이 던질 수 없던 거리까지."  (380-381쪽)


이것이 바로 삶 아닐까. 우리 삶이 제자리를 뱅뱅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뒤로 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뒤로 가는 것처럼 보여도 길게 보면 조금 더 나은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그렇다고 내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나는 기껏 내가 던질 수 있는 거리 만큼만 돌을 던지면 된다는 것을. 그 다음 돌을 다른 사람이 던질 수 있게끔 조금이라도 앞으로 돌을 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삶의 의미는 충족된 것이라고.


그럼 나는 돌을 어디서 주울까? 내가 돌을 던질 자리는 어디일까? 소설에 나오는 각 인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돌을 던진다. 어떤 이는 이호의 말처럼 뒤로 던지기도 하지만, 이 소설에 나오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앞으로 돌을 던진다. 그 돌이 얼마나 멀리 나갔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돌을 던진다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


이렇게 소설을 통해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나 역시 돌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 지레 돌이 원하는 곳까지 가지 않는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그냥 내가 던질 수 있는 만큼 힘껏 던지면 된다고... 그렇게만 하면 된다고...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거리에 돌을 던지는 사람들 이야기. 좋았다. 그런 인물들을 만날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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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an 2026-09-18 1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람 수를 세어보았었습니다.^^ 쓸데없는 호기심은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가 봅니다. 어쨋든 책은 제가 읽어본 책 중 손에 꼽힐만큼 재미있었습니다.

kinye91 2026-09-18 16:50   좋아요 0 | URL
하하, 저만 그런 것이 아니군요. 저도 이 소설 참 좋게 읽었습니다.
 
킬러 문항 킬러 킬러
이기호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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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답이 없다. 

답이 있어서 그것을 찾는 것이 교육이라고 알고 지내왔던 시절이 있었다. 정답은 있다. 그것을 찾기만 하면 된다. 그것도 실수 없이. 시간 안에. 이것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교육 방식이었다.


하지만 '교육'에 답이 있을까? 있는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답을 스스로 만들어가게 하는 것, 따라서 답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교육 아니었을까?


답이 여럿이 있다. 복수 정답? 아니다. 복수 정답이라고 해도 그것은 이미 정해진 답을 찾는 과정일 뿐이다. 복수 정답이라는 말이 아니라 정해져 있지 않은 답을 만들도록 해야 하는데, 지금 우리나라 교육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수능을 없애고 자율적으로 학생을 뽑는 대학? 상상하기 힘들다. 공정이라는 벽이 가로막고 있다. 그렇다면 서술형 출제를 하자? 이것 역시 공정이라는 벽에 막힌다. 그 채점이 공정하냐고 하면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학교에서, 초중고에서부터 대학교까지 교육은 늘 정답을 찾는 과정이었다. 답이 있다는 가정에서 비롯한 교육. 그 답을 잘 찾는 사람이 우수한 학생이 되는 현실.


이런 현실에서 교육에 관한 다른 많은 것들이 감춰지거나 억압된다. 오로지 답 찾기. 답을 잘 찾아 높은 점수 기록하기. 이것이 교육의 목표가 된 듯하다. 그러니 사교육이 기승을 부리지. 왜냐? 모두가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나만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다는 느낌. 그래서 모두들 사교육으로 내몰린다. 단지 사교육만일까? 아니, 공교육을 한다는 학교도 마찬가지다. 성적, 성적, 대학 진학... 이것이 학교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공통의 기준이 있고, 여기에 도달하느냐 마느냐로 학교를 평가하면, 학교의 다양성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학업이라는 면에서 이렇게 획일화를 추구하고 있는데, 교육이 성적만을 획일화할까? 아니, 학생이라는 특정 시기에 거의 모든 사람이 거쳐야 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포기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학생이라는 시기에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기준이 있다는 듯이, 그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은 미뤄두거나 없는 것으로 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지 않은가.


그것이 무엇일까? 다양하다. 너무도 많다. 그 많은 것들 중에 각 소설가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소재로, 주제로 삼아서 소설을 썼다. 그리고 한 권의 소설집으로 엮어냈다.


성적도 있고, 교우관계도 있고, 사교육도 있고, 가족 간의 관계도 있고, 무어라 하나로 정리할 수 없는 수많은 교육에 관련된 일들. 그러한 일들이 이 소설집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소설집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이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것이 더욱 안타까운데, 얽히고 설켜 도무지 해결의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우리나라 교육 문제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여전히 대학입시라는 것에 목 매다는 학생들, 여기에 특정 대학에 모든 것을 거는 입시 과정, 그러한 과정 속에서 포기해야 하는 다른 많은 것들.


관계도 관계지만 공부를 잘한다는 말을 성적이 좋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만 여기게 되는 풍조가 사라지지 않는 것도 문제다.


짧은 소설들이 모여 있는데, 그래서 읽기에 편한데, 읽은 다음에 뒷맛이 개운하지는 않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음에... 소설 속 인물들의 고민이 지속되고 있음에...


인공지능 시대를 앞두고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교육 문제들, 이 소설집을 통해 만나보자. 그리고 그것들이 지속되지 않는 사회를 꿈꾸도록 하자.


다른 소설들도 생각을 많이 하게 하지만 서윤빈이 쓴 '소나기'가 섬뜩하게 다가왔다. 성적을 내기 위해 늘 고1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아이. 우리가 그렇게 만들고 있지 않은지... 오로지 성적이 제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런 세상을 만들어온 것은 아닌지...


어쩌면 아이들이 다른 학년으로 진학을 해도 그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니라, 성적이라는 쳇바퀴 속에서 계속 같은 곳을 달리게 한 것은 아닌지. 하, 이 소설 속 윤이와 같은 아이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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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시집을 읽는다. 소설보다 짧은 시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더 긴 시간이 있을 때에야 시집에 손이 간다.


  짧음을 짧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길게 느끼기 위해서, 드러나지 않은 것들을 찾는 시간이 있어야 하기에. 그럼에도 늘 찾기에 실패하고, 도대체 시인은 무엇을 숨겨놓았을까 생각해야 하기에.


  이번에 고른 시집은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다. 하긴 시인을 모르는데, 선택을 하려면 여러 조건을 따져야 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제목이다.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비열한 거리' 중에서. 59쪽) 라니. 이만큼 현대인의 생활을 생각하게 하는 표현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함께 산다고 하지만 현대인들은 각자 살고 있다. 그 각자가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듯하지만, 이상하게도 남을 더 의식한다. 주체로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의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면서 살아간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시인이 제목이 된 구절이 있는 시에서 '비열하게 이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 '예스'라고 말해줘야 한다-고'('비열한 거리'에서. 59쪽)고 표현한 것이 바로 이것 아닐까 했다.


자신이 아니라 남이 바라보는 자신으로 살아가려 하는 것. 현대인의 삶 아닐까. 그만큼 남을 의식하면서 산다는 것인데... 그런 삶을 '기하학적 실수'란 시에서 발견했다.


       기하학적 실수


모든 사랑의 체위는 인간이 지닌 가장 고귀한 감각이다.

그걸 알면서도

사랑을 나눌 때

나는 한 번도 내가 좋아하는 체위를 요구하지 않았다.

말없이 상대가 원하는 대로 따라가기만 했다.


그게 내 사랑의 비극이고

내 사랑이 실패한 이유였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어떤 체위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

늘 꿈꾸어왔던 나만의 체위는

내 마음속 깊이깊이에만 간직해두고

척추를 타고 흐르는 파르르한 사랑의 경련에만

전율했다는 것.


모든 물이 다 증발하고 난 뒤에 남는 소금처럼

사랑의 체위야말로 그 사람의 유일한 진실임을

모른 체하고 모른 체했다는 것.


김상미,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문학동네. 2017년. 33쪽.


이 시를 보면 사랑을 나눌 때조차도 자신이 아니라 상대를 의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주체로 서지 못하는 사람에게 사랑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것. 결국 '비열한 거리'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러한 관계는 '아무 관계도 아니'게 된다. 마찬가지로 '예스'만 하는 삶은 상대와 하나가 될 수 없음을 뜻하기도 하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보헤미안 광장에서'란 시에서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보헤미안 광장에서


갑자기 내리는 비

그 비를 피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펼쳐지는 우산들


그러나 우산은 지붕이 아니다

아내 있는 남자가 남편 있는 여자가

몰래 잠깐 피우는 바람 같은 것이다


갑자기 내린 비가 멎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그러니 사랑을 하려거든 

진짜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을 하려거든

한 지붕 아래에서 하라


갑자기 내린 비는 금방 지나가고

젖은 우산에 묻은 빗방울들은

우산을 접는 순간 다 말라버린다


김상미,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문학동네. 2017년.40쪽.


이 시에서 우산이 상대에게 맞춰주는 사랑이라면, '한 지붕 아래에서 하는 사랑'은 나를 잃지 않으면서 상대 또한 인정하는, 다르면서도 함께하는 그런 삶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한 지붕 아래서 우리는 함께 밥을 먹으며 살아가게 된다. 희노애락을 함께 겪으면서... 오로지 상대에게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또 상대를 나에게만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따로 또 같이 사는 장소로서의 한 지붕 아래, 그러한 곳에서 하는 사랑은 자신을 주체로 서게 하고, 상대 역시 주체로 서게 하는 사랑이지 않을까 한다.


이런 곳에서 먹는 밥, 그것은 우리의 사랑을 확인하게 해주는, 또는 사랑을 지속시키는 '성기'와 같지 않을까. 하여 시인이 '밥은 삶의 성기다'(밥의 힘'에서. 96쪽)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여 이 시들을 읽으면서 상대의 눈에 비친 나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당당하게 살 때에야 비로소 상대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음을, 이 때 먹는 밥이, 시인이 이 시에서 말한 것과는 다르지만, 두 시와 연결지으면, 삶의 성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식구(食口)라는 말. 사랑의 지속. 그것 또한 밥심아니겠는가. 밥심은 곧 사랑이다. 주체로서의 당당한 사랑. 이런 생각을 하게 한 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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