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 흔들리는 제국의 초상
이정민 지음 / 사이드웨이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이 어떻게 무너지는가에 대한 분석이라기보다는, 이미 세계 패권국으로서의 면모를 잃어가는 미국의 모습을 살피고 있는 책이라고 봐야 한다.


미국이 움직이면 세계가 따르던 시대가 지나고, 이제는 미국 역시 강대국 중 하나로 떨어지고 있는 시점이 아닌가 하는데, 트럼프라는 사람이 무지막지하게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이것이 꼭 트럼프가 아니더라도 지금 이 시대에 미국 대통령이 된다면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트럼프와 똑같이 그렇게 막무가내로 하지는 않겠지만, 이미 힘을 잃은 미국으로서는 더 이상 힘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정치, 경제, 외교, 군사 분야에서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도 흔들리고 있지만 군사적으로도 흔들리고 있다.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라고 한다. 계획을 짜고 미래를 도모하는 철수도 아닌 허겁지겁 그야말로 쫓기듯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물러난 미국.


이때 미국과 함께했던 동맹국들에게도 제대로 통보하지도 않았고, 미국에 협력했던 많은 사람들, 하다못해 미국의 지지로 성립되었던 아프가니스탄 정부에도 알리지 않았다고 하니... 참. 세계의 경찰이라는 미국의 현재 모습을 볼 수 있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 이렇게 힘을 잃어간 것을 간파한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그것을 제대로 제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미국의 현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지금까지의 미국과는 다른 정책을 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 주장에 동의한다. 다만, 미국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이 그럼에도 약 50%정도라고 한다면, 미국이 쇠퇴하는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트럼프와는 다른 방향으로 미국을 이끌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왜냐하면 지금 미국이 중국을 경쟁상대로 여기고 중국을 견제하는 정책을 펴는데, 이는 여전히 패권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미국의 이익을 최대로 챙기려는 모습. 그것을 자신들이 세계 최강국이었을 때는 민주주의와 세계평화라는 탈로 가릴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해진 상황.


그러니 노골적으로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정책을 펼 수밖에 없는데, 미국의 이익만이 아니라 세계와 이익을 함께하는 정책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으니, 그것은 이익을 앞세우는 세력들이 있기 때문이다.


기존에 자신들이 지녔던 이익을 잃지 않으려 하는 집단들은 그 이익을 위해서 적을 만들어낸다. 내부의 분열은 외부 적을 만들어냄으로써 봉합할 수 있으니까. 이런 미국에서 외부의 적으로 삼은 나라가 중국이다. 


중국을 적대시하고, 중국의 위협을 과장하여 자신들의 정책을 합리화하려 한다. 그렇게 나아가고 있다. 또 중국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다른 나라들에 압력을 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관세와 방위비 분담. 심지어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나라 영토까지도 내놓으라고 한다. 미국이 이란을 공격한 이유도 이것과 상당한 관련이 있음을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으니...


지금 미국이 세계 패권국의 자리를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그런 정책들이라면, 앞으로는 어떨까?


미국이 달러의 영향력을 잃지 않기 위해 또 자신들의 패권을 잃지 않기 위해 집중하고 있는 것이 블록체인(스테이블코인)과 AI라고 하는데... 이것이 세계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미국의 패권을 잃지 않기 위한 것이라면, 미국의 동맹국이라고 하는 우리나라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가 마지막 부분에서 짧게 언급하고 있지만, 미국과 중국 사이에 있는 우리나라. 지금 현명하게 외교를 할 때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에 겪었던 비극을 또 겪게 될지도 모르니...


다행히 우리는 저력이 있는 나라다. 이미 그러한 강대국 사이에 낀 경험을 한 역사도 있고. 기술 발전이나 군사력이 세계 최고는 아니어도 세계에서 손꼽히는 나라이고, 경제력으로 말해도 선진국에 올라섰으니... 당당한 자립국가로서 균형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지금 트럼프로 인해 시험대에 올라섰는데... 어떻게 될지.


이 책은 그간 미국의 정책이 왜 이렇게 흘러왔는가를 살피는 데 도움이 된다. 패권국에서 그 힘을 잃어가면서 미국이 정책을 바꿀 수밖에 없는 이유, 과정이 잘 나와 있으니 말이다. 여기에 중국과의 관계, 지금 양대 강국이라고 하는 미국과 중국이 대립하는 과정, 그리고 세계에 진출하는 상반된 모습 등이 잘 나와 있어서 현실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금 우리나라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어떤 말을 미리 하는 것은 성급하겠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적인 흐름을 읽고 그 흐름 속에서 우리나라의 국익을 해치지 않는 정책을 펼치도록 해야할 때라는 점만은 확실하다.


적어도 이 책을 읽으면 트럼프만을 욕하지는 않게 된다. 트럼프 역시 쇠락하는 미국을 이끄는 사람일 수밖에 없으니까. 다만, 그 방식이 참,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지. 그러니 트럼프 개인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세계적인 추세를 읽고 거기에 대비하는 준비를 해야겠다.


진단은 훌륭한 책이다. 이제 진단이 나왔으니 처방을 할 차례. 그 처방이 어떨 것인가? 우리를 위한 처방일지, 미국에 끌려다니는 처방일지... 지켜봐야 한다. 아니 우리를 위한 처방이 되도록 우리 역시 눈 똑바로 뜨고 지켜봐야 한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겪었던 비극을 또다시 겪으면 안 되지 않겠는가.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미국의 군사정책을 간단히 소개한다. 이렇게 미국이 변했다고...


'국방부는 미국 국방의 우선 순위는 중국 견제와 본토 방어에만 한정된다고 선언했다. ... 중국은 유일한 주요 위협이며, 중국의 대만 점령을 저지하는 동시에 미국 본토를 방어하는 것이 미국 국방부의 '유일한' 주요 시나리오다.' (49쪽)


이런 점에서 '한반도는 더 이상 동맹 방어의 종착점이 아니라, 미중 전략 경쟁의 핵심 거점이 된다'(36쪽)라고 한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타이탄의 세이렌
커트 보니것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냥 재미 있다. 내용이 현실적이지 않아도, 허황되다는 생각이 들어도 재미 있게 읽을 수 있다. 도대체 뭔 얘기야? 의미를 찾을 수가 없네 하지만, 굳이 의미를 찾지 않아도 된다. 재미 있게 읽고 나면 그뿐.


그것이 삶일 수도 있다. 삶의 의미! 참 중요하다고 한다.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삶은 건강도 해친다고, 빅터 프랭클을 인용하지 않아도, 우리는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 붙이기를 좋아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대체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하게 되니까. 하지만 모든 행동에 의미를 찾기 시작하면 삶이 피곤해진다. 의미 없는 일이 무엇인지 규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을 하지 않아야 하는데, 도대체 삶에서 의미 없는 일이 무엇인지 찾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힘든 일이다.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고, 또 모든 것에는 의미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의미 찾기를 하는 사람들은 종교에 빠져들기도 한다. 자신이 찾지 못하고 있으니 전능한 존재에게 의미를 맡기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 존재가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했고, 우리는 그 뜻에 맞게 살면 된다고 하면 자신의 책임을 벗어날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의미를 찾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종교를 믿더라도 가끔은 이것이 신의 뜻인가 하고 의심하기도 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삶을 살게 될 때는 특히 더.


소설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작품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집중해서 읽고, 어떤 단서 속에서 아, 이것이 이 소설의 의미구나 했을 때 잘 읽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많은 작품들에서는 그러한 의미를 찾지 못한다. 그냥 미로 속에서 헤맬 뿐이다. 그러다 에라 모르겠다. 의미는 무슨? 그냥 읽으면 되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이 작품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종교 이름을 보라. '철저히 무관심한 하느님의 교회'라고 나온다. 인간에게 관심이 없단다. 그러니 나는 신의 선택을 받아서 하는 일들이 잘돼라는 말은 헛소리가 된다.


그냥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소설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주인공이 사람들의 질문에 답한 말이 이미 이렇게 적혀 있었다는 것. 


'나는 일련의 우연에 희생당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299쪽)


삶은 우연이다. 아니, 이 소설은 필연이다. 트랄파마도어라는 행성에서 메시지를 나르던 존재의 우주선이 고장나서 부품이 필요한데, 이 부품을 그 우주인에게 가져다주기 위해 지구인들의 행동을 조절했다고 하는.


그것을 알고 분노하는 사람도 나오는데, 그럼에도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런 짜여진 구조 속에서 인간이 살아가더라도, 인간은 그때그때 자신의 행동에 최선을 다한다. 자신이 선택을 한다. 그 선택조차도 조정된 것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이렇게 우주인에 의해 조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도 주인공은 살아간다. 그 나름대로의 삶을. 시간이 지나면 그 우주인에게 부품을 전달한 다음에 지구인들의 생활은 어떻게 되는가? 그때도 트랄파마도어에 조정당하게 되는가?


아니다. 그들이 지구인을 조정할 이유가 없다. 지구인은 그냥 지구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소설을 읽어보면 트랄파마도어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마치 예정조화설을 만나는 듯한 느낌을 받는데 이러면 커트 보니것이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다.


커트 보니것이 어떤 작가인가? 냉소적인 풍자를 하는 작가 아닌가. 종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트랄파마도어를 도입해서 그들이 지구인을 조정했다는 장면, 부품을 나르게 하는 과정이 지구의 역사였다는 서술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트랄파마도어인(소설에서는 기계로 나오지만 여기서 그냥 등장인물이라고 '인'이라 하자)이 나르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안녕이다. 안녕은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 서로의 경계를 낮추고 함께 만나는 장을 만드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안녕'이란 말은 서로 대등한 관계로 인정하는 말 아닌가. 하여 소설 속에서 정해져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삶을 되돌아보면서 우연 또는 자신의 행동으로 이루어진 일들을 하나의 체계 속에 넣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일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소설 속에서도 끝부분에서야 이런 일이 밝혀지니, 그 전까지는 조종당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자기 의지를 가지고 기억을 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으니, 결국 큰 틀에서 보면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삶의 궤적을 따라갈 수밖에 없지만, 그 궤적 속에서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 아닐까.


각자의 삶이 소중한데, 그것을 망각하고 큰 틀에 자신을 맞추려고 하는 것, 그런 것이 문제라고 작가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것도 이 작품의 매력이겠지만, 정말 작가가 어떤 의미를 주려고 했는지 찾기는 힘들다. 그냥 재미 있게 읽고, 어, 이런 삶도 있었네. 와, 이 중에 지금 우리가 받아들여도 되는 삶도 있네 하면 되지 않을까.


소설에서 철저히 무관심한 하느님의 교회를 믿는 사람들은 남들보다 잘난 점을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이들은 스스로 핸디캡을 적용해 살아가는데, 가령 체력이 남보다 좋은 사람은 무거운 주머니를 달고 다녀, 남들과 비슷한 체력이 되게 한다거나 하는 등, 결국 그들은 '누구도 다른 사람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사실'(293쪽)이 그 종교를 믿는 사회라는 서술이 나온다.


이 핸디캡을 이용하면 '아무도 당신이 운이라는 무작위적인 방식을 이용했다고 당신을 책망하지 못할 겁니다.'(296쪽)라는 표현으로, 지금의 능력주의를 이미 오래 전에 비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니...


뭐, 이런저런 현대 사회에서 참조할 만한 사항들을 찾을 수 있다는 것에서 만족을 하면서... 나중에 다른 해설들도 참조해서 한번 더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해설에 이런 말이 있다. 김선우라는 시인에 대해, 그의 시에 대해 종합적으로 이야기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시에는 늘 다채로운 감각과 사유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빛을 낸다. 생명에 대한 예민한 관찰, 시민성에 대한 적극적 발언, 기후위기와 생태적 환경의 파괴에 대한 직설적 반성, 자본을 향한 씩씩한 비판, 차별 없는 사랑과 연대에 관한 섬세한 이미지 등등.' (122쪽)


딱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김선우의 작품은 그랬다. 시만이 아니라 소설도. 그렇지만 이렇게 총평으로 이 시집을 평가할 수는 없다. 이것은 김선우 시 전반에 관한 이야기지, 이 시집에 관한 정리는 아니라고 본다.


물론 이 총평이 이 시집에도 적용이 되지만, 그럼에도 이번 시집에는 그 전의 시집에서 주던 느낌과 다른 무엇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어쩌면 이 시집의 시들은 의미가 더 쉽게 전달되도록 쓰여졌는지도 모른다. 


시인이 자신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모습. 시로 서로 얽히는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고나 할까. 어쩌면 시인이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시인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이 시집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시인과의 대화'란 시가 있다. 이 시에 나오는 몇 구절.


'본래 쓸쓸한 세상인걸요. 사람에게는 사이가 있으니. ... 시가 없으면 반드시 시가 태어나죠. 인간(人間) - 사람 사이는 채워야 하기에. ... 시인이 없는 세상은 없어요.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 사람에게서 사이를 보았다면 당신은 시인이에요. ... - 사이가 더 커지지 않는 세상. / 우리 모두 시인인 세상을 엿보며 / 시인은 이렇게 무사태평이다.'('시인과의 대화' 중에서. 30-31쪽)


그렇다. 시인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시인이 되어야 하는 세상. 그런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이 시집이다. 하여 시인은 자신의 조카가 짖는 모습을 보고도 '네가 짖는 대신 개에게 사람의 말을 가르치면 되잖아, 이런 따위 말만큼은 하지 않는 걸로 시인 이모의 소임을 다하는 시간.'('쉬잇! 조심조심 동심 앞에서는' 중에서. 36쪽)이라고 표현한다.


인간 중심에서 벗어난 것이다. 다른 모든 존재를 인간과 동등한 존재로 대하는 모습. 그런 모습은 '야생 사과나무 앞에서 열매 하나를 얻기 위해 / 나무에게 말을 걸던 만년 전 사람을 떠올린다/.../사슴 한마리 앞에 인간 한마리로 온전히 대결하던 조상을 떠올린다'('마스크에 쓴 시 2'에서. 62쪽)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사이'는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다른 존재들 사이에도 있다. 그리고 그 사이를 채울 때는 자신의 관점에서 채우는 것이 아니다. 상대와 나를 둘 다 존중하고 인정하는 상태에서 그 사이에 자신을 놓아두는 것. 그것이 바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 아닐까.


어느 한쪽으로 끌어당기는 일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 그러니 동물들에게 사람의 말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동물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는 상대가 되어보는 일, 그것이 바로 사이를 채우는 일이라고 하는 듯하다.


이렇게 사이를 채우지 않고 자신 쪽으로만 끌어당기려고 하는 존재가 있으니, 시인은 그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이다. 그 존재는 바로 자본이다. 자본은 성장, 성장 하면서 상대를 자신에게 속하게 만들려고 한다. 어느 것이든 있는 그대로 놓아두지 않는다. 


계속되는 잠식. 이런 잠식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들이 살아갈 공간을 스스로 파괴하고 있다고 시인은 보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멈추어야 한다고 외친다. 이 시집 곳곳에서 이렇게 멈추라는 말이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멈추지 않으면 온갖 감염병으로 시달리게 되는데, 이 시집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삶의 모습이 제3부에 '마스크에 쓴 시 1~14' 연작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연작시에는 '멈춰야 해'라는 말이 강하게 나오고 있다.


이런 감염병은 결국 인간이 다른 존재에게서 빌린 것이 아니라 '함부로 빼앗은 것들'이라고, 그래서'존재의 벼랑 앞에/한줄의 시로 부끄럽게 엎드린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이렇게 부끄러운 마음을 우리 모두가 지닌다면 '내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마스크에 쓴 시 13'에서 인용. 80-81쪽)


이렇게 시인은 인간들만의 관계에만 사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에는 사이가 있고, 이런 사이들을 채우되 한쪽으로 끌어들이는 채움이 아니라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그 사이에서 함께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한다.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 반성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그런 마음이 이 시집 전체에 나타나 있으니, 해설에서 말하고 있는 정리가 이 시집에도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좋은 시가 많은데, 이 시, 기억해두고 싶다. 어쩌면 사이를 채우는 일을 이렇게 잘 표현한 시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그러니까 사랑은, 꽃피는 얼룩이라고


    네가 있던 자리에는 너의 얼룩이 남는다

    강아지 고양이 무당벌레 햇빛 몇점

    모든 존재는 있던 자리에 얼룩을 남긴다


    환하게 어둡게 희게 검게 비릿하게 달콤하게

    몇번의 얼룩이 겹쳐지며 너와 나는

    우리가 되었다


    내가 너와 만난 것으로 우리가 되지 않는다

    내가 남긴 얼룩이 너와

    네가 남긴 얼룩이 나와

    다시 만나 서로의 얼룩을 애틋해할 때

    너와 나는 비로소 우리가 되기 시작한다


    얼룩이 얼룩을 아껴주면서

    얼룩들은 조금씩 몸을 일으킨다

    서로를 안기 위해

    안고 멀리 가면서 생을 완주할 힘이 되기 위해


김선우. 내 따스한 유령들. 창비. 2021년. 10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세 색깔의 표지가 있는 시집이다. 북펀드에 응모했더니, 내게는 초록색 바탕의 시집이 왔다.


  표지에 있는 네 가지 색깔, 팔레스타인 국기에 있는 색깔이다. 내가 알고 있는 국가의 깃발이 몇 개 되지 않지만, 왜 세 표지 중에서 랜덤으로 보내줄까 했더니, 이것이었다.


팔레스타인 국기에서 따온 것. 그렇게 시집은 표지에서부터 팔레스타인에 응답하고 있다. 시집 제목을 보라. '(팔레스타인을 향한/위한) 응답의 시' 아니던가.


괄호가 마음을 울렸다. 괄호, 직접적인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멀리서나마 마음으로나마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혼자가 아니라고,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고, 당신들에게 응답하는 존재들이 세계 곳곳에 있고, 멀디 먼 한국에도 있다고 하는 듯한, 괄호. 그리고 응답.


이 시집을 읽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스라엘? 지금은 나라 이름이지만 사람 이름이기도 했는데, 누구였더라? 오래 전에 본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검색했더니, 야곱이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었다더라.


성경 (대한성서공회가 번역한 개역한글판 성경전서-1995년-) '창세기 32장 28절에 보면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라고 나온다.


이 야곱이 누구냐?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기 위해 형과 아버지를 속인 사람 아니던가. 여기에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다니,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는 민족이라고 하겠다.


선민의식, 그것을 지니게 된 것이 이 야곱,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싶은데, 그간 서양의 역사에서는 '예수'를 팔아넘긴 민족이라고 해서 온갖 억압과 탄압을 받았다지만 그들이 지닌 이 선민의식을 버리지 않았으니...


현대에 들어 남들이 살고 있던 땅을 점령하고, 공존하기보다는 또다시 이기려고 점점 팔레스타인을 침략해 땅을 점령하고, 유대인들을 정착시키는 정책을 펴고 있으니... 단순한 정착이 아니라 배제와 추방을 동반한 정착이니...


또 이기려는 것인가? 누구를? 강한 자가 아니라 약자를,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사람들을 물과 식량부족으로 스스로 나가게 하려는지, 저항하려는 사람을 군인, 민간인,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폭격으로 죽게 만들고 있으니...


그럼에도 세계는 침묵하고 있다. 유대인에 대한 원죄의식이 있어서인지, 나서지 않으려 한다. 그들이 자신들이 당한 것처럼 팔레스타인을 학살하고 있는데도 세계는 침묵하고 있다. 아니, 침묵하지 않는데, 많은 언론들이, 더욱 강한 자들이 다뤄주지 않고 있다.


그들의 입을 막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귀를 막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참상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렇지 못한 시인들이 있다.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직접 행동을 할 수 없더라도 조그마한 목소리라도 보태려 한다. 아니, 보태야 한다. 그래야 이 참상이 멈출 수 있으니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응답, 그것이 직접적인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할지라도 팔레스타인이 홀로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겐 할 수 있다. 또 더 큰 비극을, 참상을 막으려는 움직임을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필요하다. 응답이... 시인들이 침묵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일 것이다. 미약한 목소리나마 내려고 하는 것. 이런 시인들의 응답이 저 멀리 가 닿기를... 직접적이 아니더라도 그 마음이 그들에게 전해지기를...


시인들이 이런 응답을 할 때 나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응답은 무엇일까? 지금 할 수 있는 일, 이런 시인들의 응답에 나 역시 응답하는 것. 시집이 널리널리 읽히도록 하는 것. 팔레스타인의 진실이 가려지지 않도록 하는 것.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몰아내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 진정으로 이기는 것이라는 것을, 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배제가 아니라 포용으로 사용하기를 바라는 것.


현대에 과학기술은 인류를 불멸로까지 이끌려고 하는데, 그러한 불멸로 가기 전에 전쟁으로 인해 사람이 죽어나가면 안 되지 않겠는가? 최첨단 무기들이 사람을 죽이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데 쓰이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평화를 향한 외침. 그것이 우리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시집을 읽으며 팔레스타인에 응답한 시인들에게 고맙단 마음이 들었다. 이젠 시인들만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응답할 차례라는 생각이 들고.


이 시집에서 '못 묻는다'는 송정원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다녀올게만 있고 다녀왔어는 없는 무수한 하루가'(145쪽)... 이런 현실이 지금 팔레스타인, 특히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세상에, 이 땅에는 '안녕'이 없다. 우리가 흔히 하는 인사 '안녕하세요'를 하기 힘든 상황. 그러니 시인들이 나설 수밖에. 팔레스타인에 응답할 수밖에.


이 시집이 응답하는 시라면, 직접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책들이 있다. 그 책들도 함께 읽으면 좋을 듯하다. 많겠지만, 내가 읽은 책으로는 이 정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죽음의 에티켓 - 누구도 말해주지 않은 당신의 마지막에 관하여, 개정판
롤란트 슐츠 지음, 노선정 옮김 / 스노우폭스북스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음, 누구나 피하고 싶은 것. 


알지 못하기에, 더더욱 두려운 것.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결코 평화롭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더 맞이하고 싶지 않은 것.


그렇지만 피할 수 없는 것. 아직까지는. 언젠가는 피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지구가, 우주가 견디지 못하겠지. 포화상태가 될 테니까.


이렇게 죽음은 생각하기조차 싫은 것. 남에게 일어날 수는 있지만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 또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 그러나 살면서 점점 죽음을 만나게 되는 횟수가 늘고, 언젠가는 그것이 자신에게도 올 것임을 생각하게 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지만, 누가 죽음을 즐길 수 있을 것인가. 죽음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죽음 앞에 담담할 수는 있겠다. 담담함. 그것이 겉으로 꾸미는 일일지라도 그렇게 보이도록 한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덜 충격을, 슬픔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한때 '유언장 쓰기'가 유행했었다.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어떤 말을 남길까 생각해 쓰는 활동. 이는 죽음을 생각한다기보다 죽음으로 인해 삶을 더 잘살기 위한 방편으로 하는 활동이기도 했다. 죽음이라는 끝을 향해 가면서 삶을 의미 있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이와 비슷한 활동이 '관 속에 누워보기'란 활동이 있었다. 죽은 다음 들어가는 관. 그 속에 들어가 있으면서 죽음과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상황을 경험해보라는 것. 다 삶을 잘살기 위한 방편의 활동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비슷한 활동을 하면서도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더 의미 있게 보내는 방편으로 활용을 한다. 역시 죽음은 내 일이 아닌 것이다. 내 일이 아니기에 이런 활동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역시, 내 삶은 소중해! 하면서.


하지만 이 책은 그것과는 다르다. 우리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죽은 다음의 과정은 어떻게 되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아파서, 나이들어서 또는 사고로 죽은 세 명의 사람을 예로 든다. 그들 죽음의 원인은 다를지라도, 또 죽음의 원인에 따라서 다음 과정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죽음 직전에 신호가 오고(사고는 물론 다르다), 고통이 함께하며, 그 다음에 숨이 멎는다. 숨이 멎으면 신체에 변화가 오고, 의사가 와 죽음을 확인하고 증명서를 내준다. 다음 장례 절차가 진행이 되고, 매장 혹은 화장이 된다. 그 다음에 기일을 맞이하여 주변 사람들이 추모를 하고, 점점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다.


이런 과정을 자세하게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어서 알려주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 우리는 대체로 죽음 하면 죽어가는 과정에 중심을 두고 있지만, 이 책은 전체적인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표를 보라.


삶과 죽음의 곡선이 위아래가 반대인데, 이상하게 두 곡선이 만나서 연결되지 않는다. 이 말은 삶과 죽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마치 영화기법 중에 OL(오버랩) 기능처럼 겹치는 시간.


이렇게 삶 속에서 죽음이 시작하기 때문에 가장 좋은 방법은 죽음을 자신이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것. 죽음은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 구절을 읽으면서 예전 우리나라 어른들이 죽음을 준비하던 것이 생각났다.


자신의 무덤을 미리 마련하고 (선산이 있는 경우 말고도, 근대에 들어서도 자신의 무덤을 미리 마련해두는 어른들이 많았다), 죽어서 입을 수의를 맞추어 놓았으며, 또한 죽은 후에는 어떻게 하라는 말까지 (유언이라고 할 수 있다) 하고, 어떤 이들은 죽음을 맞이하여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고 하니.


그런 전통들이 사라져가고, 이젠 죽음마저도 의사의 손에 맡겨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럼에도 죽음은 자신의 것이라고... 준비하는 것이 죽음의 에티켓이라고 하는 듯하고... 죽은 다음에야 이제는 장례 절차에 따라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이지만,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장례를 끝내는지를 다큐멘터리 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면 예전의 '유언장 쓰기, 관 속에 누워보기'와 비슷한 역할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래, 적어도 갈 때 올 때보다 좋은 모습으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니, 그만큼 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고.


여전히 죽음은 두렵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는 없으니, 저자의 말대로 '그렇기에 우리는, 당신은, 나는 준비해야 합니다. / 내 삶이 오직 나 자신의 방식이었던 것처럼 죽음 또한 온전히 내 방식대로 이뤄져야' 하기 위해서라도 기본적인 준비는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은 그만큼 죽음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잉크냄새 2026-09-19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프가 ‘만나지지 않는 연장선상‘ 이란 느낌이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