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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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소설이다. 읽기 시작하자마자 몸 상태가 안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뗄 수가 없었다. 소설의 구성도 흥미를 자극하고.


사실과 허구를 적절히 섞었다는 점에서도 성공을 했다고 한다면, 한 여성의 기구한 삶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결론을 섣불리 내리지도 않는다. 결론은 독자의 몫이다. 다만 소설을 통해서 주인공의 목소리를 들려줌으로써 주인공에게 공감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생각은 든다.


어린 시절 가족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 캐나다로 이민 오는 과정에서 죽은 어머니. 그럼에도 가족을 돌보지 않아 겨우 열세 살의 나이에 하녀로 일을 시작하다 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은 그레이스.


이 그레이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레이스가 기억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찾아내려는 젊은 정신의학자 사이먼이 그레이스와 면담을 한다. 이렇게 소설은 그레이스의 이야기와 사이먼의 관점이 교차하면서 진행이 되는데, 각 부가 바뀔 때마다 사건의 기록이나 다른 구절들이 앞부분을 장식한다.


그리고 각 부는 퀼트 패턴의 이름이라는데, 이는 소설이 퀼트를 하듯이 각 조각들을 짜맞추는 식으로 구성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끝까지 읽으면서 과연 그레이스는 살인범일까를 찾아보지만 명확한 답은 없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다만, 그레이스가 처한 그 상황을 통해서 당시 여성, 그것도 하층민 여성들의 생활이 어땠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림자 노동이라는 말이 지금은 흔하게 쓰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게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 그러면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대가라고는 주인의 선처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단지 월급만이 아니라 몸까지도 탐하는 주인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그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고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겼던 당시의 상황.


그렇다고 상류층에 해당하는 여성들이 당당하게 자신들의 삶을 살았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작가는 그 점을 사이먼이 묵고 있는 집의 여주인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그들의 삶 역시 남편의 삶에 종속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작품에는 여러 죽음이 나오지만 세 여자의 죽음이 의미가 있다. 그레이스의 어머니는 살기 위해서 살던 곳을 떠나 낯선 나라도 오는 도중에 죽는다. 이는 어머니의 삶은 남편에게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장소라도 비참한 삶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남편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남편에 종속된 삶들이 이르게 되는 종착지. 


다음 죽음은 메리 휘트니의 죽음이다. 그레이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메리. 매사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부잣집 아들과 사랑에 빠져 임신을 하고, 불법으로 낙태 수술을 하고 나서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전형적인 하층민 하녀들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아무리 똑똑해도 자신의 처지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삶에 대한 태도를 그레이스에게 가르쳐준 메리지만, 자신의 삶에는 그런 지혜를 적용하지 못했다. 적용할 수 없는 구조였으리라. 임신시킨 사람에게 청혼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애를 낳아도 자신이 키울 수밖에 없는데, 사생아를 낳았다는 이유로 쫓겨날 가능성이 농후했으니, 이를 비밀로 할 수밖에 없었던 메리. 당시 하녀들이 겪을 수밖에 없던 삶.


이런 메리의 죽음으로 그레이스는 큰 혼란을 겪는다. 실신도 하고. 이것이 이 소설의 복선이다. 위기 상황에서 그레이스는 정신을 잃는다. 기억을 하지 못한다. 낸시와 주인인 키니어가 죽었을 때를 흐릿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세 번째 죽음은 그레이스도 관련된 낸시의 죽음이다. 그레이스가 마지막으로 만난 가정부 낸시. 그레이스와 비슷한 처지지만 낸시는 집주인의 내연녀 역할을 한다.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 오래 가지 못한다. 이를 죽음으로 표현한다. 한데, 그냥 죽음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지배층들의 윤리가 무너진다. 그러니 낸시의 죽음은 질투로 인한 죽음이어야 한다. 하층민들이 벌이는 질투. 상층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하층민 여성들이 통상 겪은 결과.


작가는 이렇게 세 죽음을 통해 당시 여성들의 삶을 퀼트처럼 잘 짜맞추어 간다. 여기에 상류층 여성들의 위선을 사이먼의 어머니나, 또 소령의 부인 등을 통해서. 더하여 남성들이 지닌 이중성. 위선들까지도.


읽으면서 계속 추리를 하게 만들지만, 작가는 아무래도 그레이스에게 더 많은 공감을 표하고 있나 보다. 그레이스가 서술자로 등장하는 부분에서 독자들도 그레이스에게 공감을 하게 만들고 있으니.


누가 살인자일까는 중요하지 않다. 그레이스의 삶을 통해서 당시 하층민 여성들의 삶을 들여다본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과연 그러한 삶이 지금은 달라졌을까 생각을 해야 한다. 어쩌면 그때보다는 보이지 않는 그런 차별이 보이기 시작했고, 보이지 않는 노동들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차별과 그림자 노동이 존재함을 생각해 봐야 한다.


  더이상 이런 그레이스들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 아니, 그래도 그레이스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지 못한 그레이스의 어머니, 메리, 낸시들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 


  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소설. 역시 애트우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소설이다.


  읽으면서 캐나다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고 해서 검색을 해보니, 미국에서 애트우드의 이 소설을 원작으로 드라마로 만들었다고 한다.


  드라마를 본 사람들 평가를 몇 살펴보니 상당한 호평들이 많던데... 관심 있는 사람은 드라마를 찾아 보아도 될 듯하다. 


  소설을 먼저 읽고 드라마를 보아도 좋을 듯하고, 드라마를 본 다음에 소설을 읽어도 좋을 듯한데, 난 역시 드라마 쪽은 좀 거리가 멀어서 이렇게 소설로만 읽어도 좋은 소설이었으니...


<사진 출처> 넷플릭스/미드/그레이스(Alias Grace)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시녀 이야기],[증언들],[미친 아담 3부작 -오릭스와 크레이크, 홍수의 해, 미친 아담]에 이어 정말 애트우드 소설에 감탄을 하게 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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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한 날은 가고.


  즐거워 했던 날들도 가고.


  무엇으로 충만했던 날들도 가고.


  이제는 남탓을 하면서 자기 잘못을 덮는 날들이 오고.


  나는 옳다는 신념으로 남들을 거짓으로 몰아붙이는 날들이 오고.


  행복이란 그냥 그렇게 순응하며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날들이 오니.


  진정 행복한가?


최영미 시인이 쓴 첫 번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젊은 시절을 끝내고 이제 기성세대가 된 사람들, 시대의 변화를 감지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면 이 두 번째 시집은 거기에서 더 절망쪽으로, 외로움 쪽으로 나아갔다는 느낌을 준다.


무언가 쓸쓸하고 외롭고, 절망적인, 함께 하지 못하고 홀로인 듯한 느낌을 주는 시들이 많다. 제목이 된 시만 해도 그렇다.


'꿈의 페달을 밟고' 얼핏 보면 긍정적으로 보이는 이 구절이 '네가 쌓은 돌담을 넘지 못하고'(11쪽)라는 표현을 통해 부정을 나타내는쪽으로 간다. 잔치가 끝난 것을 넘어 어쩌면 환멸의 시대에 도달했다는 표현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그렇다고 마냥 그렇게만 보아서는 안 된다. 시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같은 시에서 '꿈의 페달을 밟고 갈 수 있다면 / 시시한 별들의 유혹은 뿌리쳐도 좋았다'(11쪽)고 하고 있으니.


그러나 여전히 시대는 과거의 시대가 아니다. 이 시집이 나온 때가 1998년이니, 우리나라가 아이엠에프로 자본주의가 성숙한 단계를 지나서 자본주의로 인해 고통을 겪는 시기에 접어든 때다. 그러니 이미 자본이 잠식한 이 사회에서 시인은 현실의 페달이 아닌 '꿈의 페달'을 노래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성장을 구가하던 우리나라가 어떤 상황에 처했다고 시인은 판단했을까? '달팽이'란 시를 보면 시인이 그 시대를 어떻게 판단했는지 알 수 있다.


         달팽이


그 찬란했던 시간의 알맹이들은 사라지고


껍데기뿐인 추억만 남았나


최영미, 꿈의 페달을 밟고. 창작과비평사. 1998년. 54쪽.


하하, 참 이렇게... 알맹이들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달팽이와 같은 시대. 그런 시대를 바라보는 시인이 밝은 시를 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희망이 있어야 하지 않나. 시인은 절망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나. 너무 가혹한 기대인가? 시인마저 포기한 사회는, 그런 사회는 암흑사회에 불과할텐데...


왜냐하면 후기에서 시인은 '시가 나를 부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가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인데...


이 시대를 풍자한 시인데, 과연 그 시대에만 해당하는지, 다시 읽으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늘 어느 시대든 이런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들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이 우리에게 환기시켜 주고 있으니까.


        행복론


사랑이 올 때는 두 팔 벌려 안고

갈 때는 노래 하나 가슴속에 묻어놓을 것

추우면 몸을 최대한 웅크릴 것

남이 닦아논 길로만 다니되

수상한 곳엔 그림자도 비추지 말며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 것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아예 하지도 말며

확실한 쓸모가 없는 건 배우지 말고

특히 시는 절대로 읽지도 쓰지도 말 것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버리되

엎질러진 물도 잘 추스려 훔치고

네 자신을 용서하듯 다른 이를 기꺼이 용서할 것

내일은 또 다른 시시한 해가 떠오르리라 믿으며

잘 보낸 하루가 그저 그렇게 보낸 십년 세월을

보상할 수도 있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을 것

그러나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더라


최영미, 꿈의 페달을 밟고. 창작과비평사. 1998년. 51쪽.


이 시대에 말하는 행복이 과연 행복일까? 시인이 왜 '그러나'라고 했을까? 아직도 시인에게는 포기하지 못한 무엇이 있다는 말 아닐까. 우리 역시 포기하지 말아야 할 행복이 있지 않을까. 무조건 수용하는 것이 아닌, 또는 무한한 긍정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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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수 있는 여자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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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살벌하다. 먹을 수 있는 여자라니... 먹는다는 행위는 삶을 유지하는 기본적인 행위인데, 세상에 먹을 수 없는 여자도 있나 하지만, 있다.


먹는다는 행위가 능동적인 행위 같지만, 상당히 수동적임을 알 수 있다. 먹는다는 행위는 어떤 틀에 맞춰 있을 때가 많다. 사실 우리는 장소에 따라서 먹는 음식도 다르고, 먹는 방법도 다르지 않은가. 심지어는 의상까지도 다르게 해야 하니.


그렇다면 먹을 수 있는 여자라는 말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여자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다른 관계들에 의해 틀지워진 삶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가는 삶. 주인공 메리언 이야기다. 전도 유망한 변호사 피터와 연애 중인 메리언은 어느 날 피터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이유는 없다. 그냥 몸이 움직인다. 이것은 무엇일까? 피터라는 남성으로부터 조여오는 틀을 몸이 먼저 거부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도망친 메리언에게 피터는 결혼하자고 말한다. 그냥 그렇게 둘이 결혼을 한다면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때부터 메리언에게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이 하나 둘 생겨난다. 먹을 수 없는 음식이 생겨난다는 것은 메리언이 결혼을 했을 때 자신의 뜻대로 행동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는 것이다.


우선 직장을 그만두어야 한다. 남성이라는 성별을 지닌 친구를 만날 때도 눈치를 봐야 한다. 애를 낳으면 애에 종속되어 다른 활동을 할 수 없다. 또한 남편의 취향에 맞게 집안을 꾸며야 한다. 남편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 등등.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생기고 이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할 수 없는 일이 된다. 자신의 취향에 맞게 자유롭게 먹었던 음식도 이제는 남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을 잃어간다.


그러니 먹을 수 없는 여자가 되어 간다. 하나 둘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이 늘어갈 때 메리언은 피터와 결혼을 앞둔 파티에서 또다시 도망친다.  다른 남자 덩컨에게 가지만, 덩컨 역시 메리언과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덩컨은 메리언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존재로밖에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덩컨은 오로지 자신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


메리언은 결국 피터와 헤어지게 되고, 직장도 다시 구하려고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메리언은 여자 모양의 케이크를 만든다. 이것을 먹는 메리언. 그래서 제목이 먹을 수 있는 여자다. 이중의 뜻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이제 자신의 의지대로 먹을 수 있게 된 메리언, 또 하나는 메리언을 먹을 수 있는 여자 케이크.


먹을 수 있는 여자는 여성의 몸을 한 케이크를 먹음으로써 메리언은 자신이 먹을 수 있는 여자임을 보여준다. 이제는 어떤 음식이든 제 뜻대로 먹을 수 있다. 이는 강요된 여성성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모습이다. 이제는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살아가려 한다는 선언이다. 


남자 또는 다른 어떤 관계에 종속된 삶이 아니라 자신이 주체로 살아가겠다는 선언. 이 선언이 바로 여자 모양의 케이크를 먹는 메리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애트우드가 쓴 거의 첫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음식을 비유로 들어서 여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실 천박하게 먹는다는 표현을 여성에게도 쓰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처음 이 제목을 보면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먹을 수 있는 여자는 자신에게 만만한 여자라고. 그러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어, 아니네, 하게 된다. 먹을 수 있는 여자는 세상을 당당한 주체로 살아가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되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 자신을 찾아낸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도 당당하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녀이야기]나[증언들] 또는 [미친 아담 3부작]과 같지는 않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흥미를 돋우는 소설이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애트우드의 첫소설, 그리고 다음 소설들에서 애트우드가 다루는 내용들이 어느 정도 나타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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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평전
이광호 지음,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 기획 / 사회평론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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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 개인이 진 것이지 인간이 진 것은 아니다."

알파고와 바둑을 둔 다음 이세돌이 한 말이라고 한다. 


"한 인간의 작은 발걸음에 불과하지만 인류 전체에서는 위대한 도약"

달에 첫걸음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의 말이라고 한다.


노회찬 평전을 읽으면서 이런 구절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를 비롯한 진보정당 사람들이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그들 개인에게도 큰 일이었겠지만 (이는 결코 작은 걸음은 아니다. 다만, 개인보다는 진보주의자들을 대표했다고 할 수 있으니, 이런 말도 통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정치사에도 위대한 도약을 이룬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그들이 국회의원이 되고 많은 변화도 있었지만, 기대만큼 일을 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고, 또 진보들이 스스로 고질병이라고 하는 분열로 인해 여러 번 이합집산도 거쳤지만 (오죽하면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있을까), 그래도 진보정당이 국회에 입성했기에 이룰 수 있었던 일들이 많았다고 본다.


바로 그 중심에 노회찬이 있었다. 과거형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슬프지만 그는 갔으니, 과거형일 수밖에 없다.


그만큼 많은 어록을 남긴 정치인이 있을까 싶기도 한데, 말들뿐만 아니라 행동에서도 그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정치인이었다.


그런 그가 돌연 세상을 등졌다. 부끄러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영향을 준 책을 하나 고르라면 '교과서'라고 답을 하겠다던 노회찬.


교과서가 무엇인가? 좋은 말만 적혀 있는 책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교과서에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있는 차별들을 살펴야 한다. 그래도 대체로 교과서는 옳은 말을 하는 책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미래 세대에게 전수했으면 좋은 것들이 교과서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교과서가 지니고 있는 편향성이라든지, 부정적인 면을 언급하지 말고, 그냥 통상 교과서적 인간이라고 할 때 쓰는 그런 비유적 표현으로 쓴다)  


노회찬은 교과서대로 행동하지 않는 정치인을 보고 저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왜 자신들에게 가르친 대로 그들은 행동하지 않는가? 그는 그렇게 교과서적 인간이 되었다. 앎과 행동을 하나로 한 인간.


자신의 이익보다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고, 당장은 아니더라도 꼭 해야만 할 일을 했던 사람. 스스로 낮은 곳으로 내려가 그런 사람들과 어울렸던 사람.


사회에서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사람을 우리 눈 앞에 보여준 사람. 그런 정치인이 노회찬이었다. 그러니 어떤 말로 자신을 변명하지 않고 세상을 등졌으리라. 


하지만 정치인 누구나 이렇게 행동하지는 않는다. 온갖 비리를 저질러 놓고도 자기변명으로 일관하고,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법망을 피해가려고 하는 정치인이 얼마나 많은가. 또 법망을 못 피할 것 같으면 정치 탄압이라고 주장하면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이 자신의 잘못을 가리려고 하는 정치인이 얼마나 많은가.


교과서적 인간 노회찬은 그런 정치인이 될 수 없었다. 그는 교과서에 실린 대로 옳다고 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비록 실수라고 해도, 그 실수로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난 노회찬.


요즘 부쩍 그가 생각났다. 정치판이 참... 그러다 노회찬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의 평전을 샀다. 56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다. 한 사람의 일생을 600쪽 내외에 담는다는 일이 우습기는 하지만, 이 정도 두께면 노회찬이 한 많은 일들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태어나서 자란 환경. 교과서적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 그리고 노동운동가로서의 삶. 여기서 그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정당의 필요성을 깨닫고, 진보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일하는 정치가로서의 삶. 진보정당원으로서 국회의원이 되어 한 활동들.


국회의원은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라 대변하는 자리, 봉사하는 자리임을 너무도 잘 알고 행했던 사람. 정치를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서, 특히 힘없는 약자들을 위해서 할 줄 알고 또 하려고 했던 사람.


많은 일들을 겪고, 진보정당의 부침도 겪으면서 진보정당이 국민을 위해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실천했던 사람.


그런 그의 삶이 이 책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읽으면서 노회찬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기기보다는 우리 곁에 있었던 우리가 필요로 했던 정치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6411번 버스 연설로 알려진 그의 말. 이 책에 그 연설이 실려 있다. 그가 어떤 정치를 하려고 하는지 잘 알 수 있는 연설. 지금 읽어도 감동적이다. 마치 마친 루터 킹 목사가 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나는 꿈이 있습니다 보다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를 생각나게 한다. 우리도 기억할 수 있는 연설을 남겨준 노회찬이 고맙기도 하다.

  

우리가 투명인간 취급했던 사람들을 우리 앞으로 불러내었던 정치인. 하지만 이 연설에서 더 큰 감동을 준 것은 바로 '투명정당'이라는 말이다. 숨어 있는 정당. 정작 자신들이 대변하고,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일해야 하는데, 절대 앞으로 나서지 않는 그런 정당. 그러면서 자신들의 이익은 절대 놓치지 않는 정당. 그런 정당이 투명정당이다. 


투명인간을 생각해 보라. 우리가 투명인간 취급한다고 했을 때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약자를 의미하지만, 투명인간은 본래 보이지 않는 것을 이용해 이익을 취했던 인물 아닌가. 그러니 노회찬이 말한 투명정당은 바로 그런 투명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정치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지만 이 분들이 필요로 할 때 이 분들의 손에 닿는 거리에 우리는 없었습니다 .존재했지만 보이지 않는 정당, 투명정당,, 그것이 이제까지 대한민국 진보정당의 모습이었습니다.' (431-432쪽)


통렬하다. 통쾌하다. 투명정당, 진보정당이 투명정당이었다면, 그간 다른 정당들은 보이지 않는 정당이 아니라 아예 드러내 놓고 빼앗아가는 정당이었을 것이다. 한데 어떤 정당 정치인도 노회찬처럼 이렇게 반성하지 않았다.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들은 노회찬이 비판한 투명정당보다 더한 정당으로 남아 있다. 그런 정당들의 본질을 알게 해주는 말, 투명정당. 그래서 이 연설은 더 소중하다.


더 많은 말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촌철살인. 노회찬의 말하기였다. 적절한 비유. 그렇다. 비유는 길어지면 안 된다. 그러니 이쯤에서 마치자. 다만, 앞의 말들을 좀 바꾸어서 끝내고자 한다.


"노회찬의 국회의원 당선은 한 인간의 작은 발걸음에 불과하지만 진보정당 전체에서는 위대한 도약이었다"


"노회찬 개인은 죽었지만 진보정당이 죽은 것은 아니다."


그의 마지막 말도 이러했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5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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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대체로 쉬운 언어로 쓰였는데, 그럼에도 무슨 말인지 쉽게 와 닿지 않는 시가 있다. 자꾸 읽어보게 되는데, 그래도 모르겠다.


  그 중 한 시가 바로 '옷 벗는 나무'다. 나무가 옷을 벗는다? 긍정적일까, 부정적일까? 


  이 시집에 실린 다른 시들을 찾아보니 어느 쪽으로도 가능하다. 뭐지 이게?


한 그루 나무를 그린다. 이롭겠지만 / 마침내 혼자 살기로 결심한 나무./ ... / 요즈음에는 내 나이 또래의 나무에게/ 관심이 많이 간다. / 큰 가지가 잘려도 / 오랫동안 느끼지 못하고 / 잠시 눈을 주는 산간의 바람도 / 지나간 후에야 가슴이 서늘해온다. / 인연의 나뭇잎 모두 날리고 난 후 / 반백색 그 높은 가지 끝으로 / 소리치며 소리치며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그림 그리기4'에서. 12쪽)

                                            

그리던 나무를 아무래도 지워야겠다. // 혼자서 멀리 떠나야만 / 길고 편한 잠 이룰 수 있는 것 알면서 / 땅에 떨어지기 싫어하는 / 낙엽이 있다면 어쩌겠냐. ('그림 그리기 5'에서. 44쪽)


벌판에서 혼자 떨던 나무도 / 저 멀리 다음해까지 / 옷 벗어던지고 혼절해버렸구나. / 내가 아는 하느님은 편안하구나. ('겨울 기도 2'에서.62-63쪽)    


눈을 뜨고 꿈꾸는 나무가 되고 싶었다. /열매를 거두는 일은 어차피 내 몫이 아닌 다음에야 / 여름이 가기 전에 꽃잎을 눈부시게 다 뿌리고 / 세상의 자초지종에 태연하고 싶었다.('영희네 집'에서 97쪽.)


그러나 서울 가로수는 냉혈 식물인가, / 해마다 눈부신 장식으로 봄을 빛내다가 / 때가 되면 주저없이 입던 옷도 벗는다. / 두 눈 부릅뜨고 우리를 보는 / 늙고 지혜로운 선각자처럼.('서울 가로수'에서. 98쪽)                             


그럼 그냥 감으로 시를 읽어야 한다. 나무가 옷을 벗는다? 이는 계절적으로 보면 가을이란 말이고,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지점이란 성숙의 과정을 거쳐 결실을 맺은 때라는 말이다.


또 나무가 옷을 벗는다는 말은 가리지 않고 모두 보여준다는 말일 수도 있다. 나무가 숲을 이루는 경우를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숲 속에 들어가면 너무도 울창한 나무로 인해 하늘을 볼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니 한쪽으로 해석하자. 이번에는 나무가 옷을 벗는다는 말을 가리는 것을 치운다로 보자. 그래도 이 시가 잘 이해 안 되기는 마찬가지지만.  


옷 벗는 나무


왕이여,

당신의 슬픔은 遺傳이다.

사방에서 눈치보며 숨죽이는

당신의 아까운 겨레들,

숨죽이고 몸 흔드는 겨레의 눈들,

아무리 타일러도 옷 벗고 나서는 나무들.


왕이여,

높은 산 주위에는

낮은 나무들 허리 굽혀 살고

낮은 산 둔덕에서

크고 곧은 나무가 허리 펴고 산다.

당신의 슬픔은 유전이다.

천천히 넘어지는 무리의 나무들.

아무리 가지쳐서 불태워도

한세월의 어두운 王道의 하늘.


마종기, 그 나라 하늘빛, 문학과지성사.1996년 재판 2쇄. 16쪽.     


'왕이여 당신의 슬픔은 유전이다'가 1연과 2연에 반복되고 있다. 슬픔이 유전이라는 말과 '어두운 왕도의 하늘'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하늘이 맑지 않다.


즉 왕도가 실현되지 않고 있다. 왕도를 정치로 바꾸면 제대로 된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사방에서 숨죽이며 눈치볼 수밖에 없다. 왕도가 아닌 패도(覇道)의 시대는 그렇다. 그러니 나무들이 옷을 벗을 수밖에 없다. 보라고, 하늘을 보라고, 지금 이 하늘이 과연 왕도의 하늘이냐고?


정치가 잘 될 때는 굳이 옷을 벗을 필요가 없다. 하늘이 잘 보이므로. 하지만 패도 정치가 이루어질 때는 옷을 벗어야 한다. 누가? 바로 주변에서 나름대로 힘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이. 충언을 할 수 있는 존재들이.


이 나무들이 옷을 벗는 이유는 하늘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현실을 직시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데 하늘을 보지 않고 나무를 베어낸다. 나무를 쓰러뜨린다. 잘 자란 아름드리 나무들을. 


보이지 않게 한다고, 막는다고 어두운 하늘임을 모를까? 


옷 벗는 나무들, 하늘을 보여주려 하는 나무들. 그 나무들을 찍어내기만 하면 결국 슬픔은 유전될 수밖에 없다. 지속될 수밖에 없다.


나름대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읽는데, 여전히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이 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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