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날은 가고.


  즐거워 했던 날들도 가고.


  무엇으로 충만했던 날들도 가고.


  이제는 남탓을 하면서 자기 잘못을 덮는 날들이 오고.


  나는 옳다는 신념으로 남들을 거짓으로 몰아붙이는 날들이 오고.


  행복이란 그냥 그렇게 순응하며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날들이 오니.


  진정 행복한가?


최영미 시인이 쓴 첫 번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젊은 시절을 끝내고 이제 기성세대가 된 사람들, 시대의 변화를 감지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면 이 두 번째 시집은 거기에서 더 절망쪽으로, 외로움 쪽으로 나아갔다는 느낌을 준다.


무언가 쓸쓸하고 외롭고, 절망적인, 함께 하지 못하고 홀로인 듯한 느낌을 주는 시들이 많다. 제목이 된 시만 해도 그렇다.


'꿈의 페달을 밟고' 얼핏 보면 긍정적으로 보이는 이 구절이 '네가 쌓은 돌담을 넘지 못하고'(11쪽)라는 표현을 통해 부정을 나타내는쪽으로 간다. 잔치가 끝난 것을 넘어 어쩌면 환멸의 시대에 도달했다는 표현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그렇다고 마냥 그렇게만 보아서는 안 된다. 시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같은 시에서 '꿈의 페달을 밟고 갈 수 있다면 / 시시한 별들의 유혹은 뿌리쳐도 좋았다'(11쪽)고 하고 있으니.


그러나 여전히 시대는 과거의 시대가 아니다. 이 시집이 나온 때가 1998년이니, 우리나라가 아이엠에프로 자본주의가 성숙한 단계를 지나서 자본주의로 인해 고통을 겪는 시기에 접어든 때다. 그러니 이미 자본이 잠식한 이 사회에서 시인은 현실의 페달이 아닌 '꿈의 페달'을 노래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성장을 구가하던 우리나라가 어떤 상황에 처했다고 시인은 판단했을까? '달팽이'란 시를 보면 시인이 그 시대를 어떻게 판단했는지 알 수 있다.


         달팽이


그 찬란했던 시간의 알맹이들은 사라지고


껍데기뿐인 추억만 남았나


최영미, 꿈의 페달을 밟고. 창작과비평사. 1998년. 54쪽.


하하, 참 이렇게... 알맹이들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달팽이와 같은 시대. 그런 시대를 바라보는 시인이 밝은 시를 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희망이 있어야 하지 않나. 시인은 절망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나. 너무 가혹한 기대인가? 시인마저 포기한 사회는, 그런 사회는 암흑사회에 불과할텐데...


왜냐하면 후기에서 시인은 '시가 나를 부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가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인데...


이 시대를 풍자한 시인데, 과연 그 시대에만 해당하는지, 다시 읽으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늘 어느 시대든 이런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들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이 우리에게 환기시켜 주고 있으니까.


        행복론


사랑이 올 때는 두 팔 벌려 안고

갈 때는 노래 하나 가슴속에 묻어놓을 것

추우면 몸을 최대한 웅크릴 것

남이 닦아논 길로만 다니되

수상한 곳엔 그림자도 비추지 말며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 것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아예 하지도 말며

확실한 쓸모가 없는 건 배우지 말고

특히 시는 절대로 읽지도 쓰지도 말 것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버리되

엎질러진 물도 잘 추스려 훔치고

네 자신을 용서하듯 다른 이를 기꺼이 용서할 것

내일은 또 다른 시시한 해가 떠오르리라 믿으며

잘 보낸 하루가 그저 그렇게 보낸 십년 세월을

보상할 수도 있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을 것

그러나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더라


최영미, 꿈의 페달을 밟고. 창작과비평사. 1998년. 51쪽.


이 시대에 말하는 행복이 과연 행복일까? 시인이 왜 '그러나'라고 했을까? 아직도 시인에게는 포기하지 못한 무엇이 있다는 말 아닐까. 우리 역시 포기하지 말아야 할 행복이 있지 않을까. 무조건 수용하는 것이 아닌, 또는 무한한 긍정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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