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세자 - 칼을 품은 춤, 세도정권을 겨누다
이상각 지음 / 서해문집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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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조선 후기, 다시 한 번 조선을 중흥시킬 수 있었던 군주. 그러던 그가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하고, 어린 나이의 순조가 왕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겪게 되는데... 정순왕후는 정조의 개혁정책을 지지하던 신하들을 하나하나 내치고 만다. 이러니 순조는 왕이 된 처음부터 허수아비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자신의 아버지가 이루려 했던 정치가 사그러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무능력한 왕으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참 오래도 왕 노릇을 했는데.. 무려 30년이 넘게 왕노릇을 했지만, 그야말로 이름뿐인 왕이었을터. 그러던 그가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그의 아들에게 정치를 맡기게 되는데...

 

왕이 살아있음에도 세자에게 정치를 맡기는 경우가 종종 있어왔으니 그것은 별 무리가 아니었고... 이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왕도 있었지만, 순조는 정치적으로 욕심이 없던 왕이라는 평가를 받으니 그는 그냥 쉬고 싶었을 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아들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하고 자신은 뒤로 빠지게 되는데...

 

그 아들이 바로 효명세자다. 우리 역사에서 별로 다루어지지 않는 인물. 그러나 3년간 실질적으로 조선을 다스렸던 왕노릇을 했던 세자다. 그가 왕이 되지 못한 이유는 축출당해서도 아니고 병으로 갑작스레 죽었기 때문인데... 3년간 조선을 다스리다 갑자기 죽어 왕이 되지도 못하고,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고 꿈을 접어야 했던 사람.

 

그의 죽음으로 인해 조선은 중흥의 기회를 완전히 잃고 말았으니... 그가 세도정치를 견제하려는 정책을 펼치고 있었음에... 그의 죽음과 함께 세도정치는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었으니... 효명세자의 죽음과 더불어 조선은 몰락의 길을 밟았다고 해야 하겠다.

 

간간히 효명세자의 이름을 듣기는 했으나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알지 못했는데.. 이 책의 제목에서 강조하는 것은"칼은 품은 춤, 세도정권을 겨누다"이니, 그는 세도정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서 왕권을 강화하려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그가 채택한 방식이 바로 '궁중 무용'이었으니... 춤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이런 왕권 강화를 통해 세도정치를 척결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중심에는 늘 친인척들이 문제가 되는데.. 고려시대에도 외척들의 힘이 왕권을 누른 적이 있었고, 조선 초기에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으니, 그래도 왕의 힘이 강했을 때, 태종같은 왕은 자신의 자손을 위해서 외척들을 일소해버리는 피비린내나는 숙청을 하기도 했는데, 왕권이 약화된 상태에서는 이러한 숙청은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신권의 강화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친인척들을 등용하는 방법을 조선 후기에 썼다고 할 수 있고, 이렇게 신권을 견제하려던 외척 등용이 결국은 왕권을 약화시키고 세도정치를 하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세도정치...여기에는 백성들의 삶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들의 권력을 잃지 않는 정치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들이 말하는 어떤 명분도 결국은 자신들의 정권유지로 귀착이 되고, 이들은 이러한 정권유지를 위해서라면 어떤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다.

 

왕이 자신의 조카라해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동안에만 친인척일 뿐이다. 자신들의 정권에 칼을 들이대려고 하면 어떤 방법을 택해서든 왕의 권력을 무력하게 하려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 성공한다. 왜냐하면 이미 이때는 왕의 권력이란 종이호랑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러니 효명세자가 세도정치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칼을 직접 들이대어서는 안되었다. 간접적으로 돌려서 칼을 대어야 한다. 그래서 그가 채택한 방법이 바로 예악, 즉 궁중 무용이다. 이 분야는 신하들보다 자신이 더 잘알았고, 이를 통해서 왕실의 힘을 회복하려고 했다.

 

하지만 과연 그런 궁중 무용, 즉 예악으로 세도정치를 견제할 수 있을까? 이것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세도정치를 타파하는 방법으로는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궁중무용이 이루어지는 공간에 참여하는 사람들 역시 친인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친인척은 세도정치의 중심에 있다. 그러니 예악을 정비한 것은 왕실의 위엄을 높이는 방법이기는 했겠지만, 결국 세도정치를 견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세도정권이 이러한 예악에 대해서 반대를 하지 않은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고.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정치를 펼치려고 하나, 당시 환경이 도와주지 않는다. 잦은 자연재해와 온갖 사회문제들이 발생하고, 이를 해결해야 할 관료들은 백성들의 안위보다는 자신들의 영달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백성들이 죽고 다치고 굶주리는 것보다는 자신들의 벼슬자리 유지에 더 관심이 많았다. 아무리 효명세자가 명령을 내린다해도 밑에서 움직여주지 않고, 또 세자의 주변에 있는 막강한 세도정권이 그들 부패한 관료들을 뒤봐주고 있으니 세상이 변화될 리가 없다.

 

지금...우리도 이렇게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집단들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은가. 효명세자는 이렇게 세도정권과 부패한 관리들에 포위되어 있었으니 그의 개혁정책이 먹혀들 이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대리청정 3년 만에 갑작스레 죽고 만다.

 

그의 죽음과 더불어 조선의 중흥은 멀어지고 말았으니...어쩌면 우리는 영·정조 이후에 마지막으로 찾아온 중흥의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순조 이후 헌종, 철종, 그리고 고종에 이르러 조선은 몰락의 길을 걸어가니 말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효명세자에 대한 이야기. 역사책이라서 역사적 사실을 건조하게 나열한 것이 아니라, 팩션이라는 장르를 이용하여 효명세자의 일대기를 재구성해 낸 책이다. 따라서 역사소설을 읽듯이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럼에도 '예악'에 너무 중점을 두어서 그가 도대체 어떤 정책을 펼쳤는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어쩜 그는 자신의 정책을 펼치지도 못하고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당시 사회에서 그가 3년 동안 했던 백성을 위한 정치가 어떤 것이었는지 이 책을 통해서 알기는 힘들다. 다만, 그가 세도정권을 견제하려고 했던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니...그게 조금 아쉽다. 조선의 중흥은 세도정치를 견제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국민이 되게, 그들이 실질적으로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정치를 펼치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일반 백성에게는 왕이나 세도정권이나 그들을 수탈하는 집단에 불과할 수도 있기에.. 효명세자의 어떤 정책이 백성을 위하는 나라를 건설하려고 했는지를 밝혔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재난이 일어났을 때 구휼정책을 폈다는 것 말고. 그럼에도 이 책은 효명세자라는 사람에 대해서 자세하게 조명하고 있다는 장점은 확실히 지니고 있다. 조선 말기 세도정치에 대해서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밑그림이 그려졌으니 말이다.

 

이런 세도정치, 지금의 정치와 닮은 점이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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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보이는 창" 98호를 읽다.

 

한 때 '개미와 베짱이'라는 우화에서 우리는 베짱이를 게으름뱅이의 전형으로, 그러면 망한다는 것을 보여준 대상으로 배워왔다. 놀이는 게으름과 통하고, 그것은 곧 인생을 잘못 산 것으로 치환되는 그런 시대.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베짱이 다시 보기가 이루어졌고, 베짱이는 그냥 논 것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조명을 받았다.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고, 오히려 일만 하는 개미가 골병이 들어서 힘들어하는 내용으로 바뀌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베짱이는 예술가라고 해도 그것은 놀이가 아니다. 그는 논 것이 아니라 일을 한 것이다. 이런 상황을 공유한다면 베짱이나 개미나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 또는 하고 싶은 일을 한 것에 불과하다.

 

여기에 놀이가 들어설 틈은 없다.

하지만 '호모 루덴스'라 말이 있듯이 인간은 놀이적 인간이다. 놀지 못하는

 

인간은 인간으로서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놀이는 인간의 본질과도 같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아이들을 놓아두면 아이들은 기가 막히게도 놀이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즐겁게 논다.

 

이런 내용은 미하엘 엔데의 소설인 "모모"에서도 나온다. 그 소설에서 모모는 가진 것 없는 누더기를 입은 소녀지만 남들보다 많은 시간을 갖고 있는, 남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소녀로 나오는데.. 이 소녀와 함께 있으면 환경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모모와 함께 있는 그 자리에서 아이들은 온갖 놀이를 만들어낸다. 아주 즐겁게...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시간을 잊고 즐긴다.

 

이것이 진정한 놀이다. 이런 놀이가 우리 삶에서 낭비라고 생각되고, 놀이를 부정적인 대상으로 치부하여 거부하는 문화를 만들어간 것이 요즘 우리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사회 상황도 상황이리만큼 놀이를 추구한다는 것은 무슨 죄를 짓는 듯한 느낌까지 주고 있으니...

 

삶창 저번 호는 '잠 좀 자자'가 기획이었다. 우리는 밤에 너무도 많은 시간을 가지려고 했다는 것. 이것이 결국 우리를 피곤에 절게 했다는 것을 다루었는데..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엇을 할까?

 

이번 호의 기획이 이것과 연결된다. 즉, '놂'을 찬양한다.  '놂'...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이다. 놀지 못한다는 것은 삶에서 유머가 없다는 얘기와 같다. 이는 늘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긴장 상태는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긴장을 이완시켜 주지 않으면 긴장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소모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하여 이 '놂'은 우리에게 명사로 다가와서는 안된다. 이 '놂'은 우리가 연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그냥 실행하고 즐겨야 할 동사다. '놂'은 곧 '놀다'다. 잘 놀아야 한다.

 

아이들도 잘 놀게 해야 한다. 하여 잘 논다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니 생각을 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놀 시간을 주어야 한다. 결국 논다는 것은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하여 아이들에게 시간을 주어야 한다. 전자기기에 매달려 보낼 시간이 아닌, 학원이나 학교에서 공부에 찌들어 보내야 할 시간이 아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보낼 시간... 너무도 무료해서 도저히 무언가를 하지 않음면 안되게 할 시간.. 그래서 무언가를 자신들이 만들어갈 시간. 그 시간이 바로 '놂'의 시간이 된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어른들에게도 놀 시간을 주어야 한다.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을 자랑하지 말고, 놀 시간이 많게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 휴일도 지금 많은 것이 아니다. 더 늘려야 한다. 실질적인 휴일을.

 

그래서 국민들이 놀 시간이 많으면 자연스레 '놂'은 우리의 문화가 된다. 이제 '놂'은 '놀이'라는 명사에서 '놀다'라는 동사가 된다. 우리는 즐겁게 놀 수 있다. 즐겁게 놀아야 한다. 고통을 잊게 해주는 것은 웃음이라는 말이 있다.

 

사회가 어지러울수록 놀이는 필요하다. 잘 노는 사람... 그 사람은 삶이 풍요로운 사람이다. 그런 풍요로운 삶들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사회... 좋은 사회다.

 

'놂'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이번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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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세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곽복록 옮김 / 지식공작소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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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는 전기 작가로 유명하다. 그런데도 아직 그의 이름을 듣는 것에 비해서는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 그가 자살했다는 사실도 잘 알지 못했고..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도 잘 알지 못했다. 그가 한1960년대까지는 살아있지 않았을까라는 막연한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이 책은 츠바이크의 자서전이라고 해도 좋다. 그가 자신이 살아온 세계를 바라보며 시간 순서대로 내용을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겪은 일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가 만난 사람들 이야기도 많기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유럽의 지성사를 알게 되기도 한다.

 

츠바이크가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극작가이자 전기작가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시인으로 이름이 났고, 그의 작품들은 대단한 인기를 끌어서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이 되어 그의 작품이 읽혔으며, 또 그는 수집가로서도 능력을 발휘하여 작가의 친필 원고들을 많이 모았다고도 한다.

 

그러니 그의 생애를 좇는 이 책은 츠바이크 개인사이기도 하고, 당대 유럽의 지성사가 되기도 한다.

 

제목이 "어제의 세계"다. 어제의 세계란 이미 지나간 세계를 뜻한다. 자신이 지금 발딛고 있는 세계가 아니라 지금 있는 자리까지 거쳐온 세계를 말한다. 그래서 그런 세계는 바로 자신을 만들어낸 세계이기도 하다.

 

2차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영국에서 츠바이크 자신이 생각한 것으로 이 책을 끝맺고 있는데.. 그에게 어제의 세계는 긍정의 세계이기도 하고 부정의 세계이기도 하다.

 

마치 자신의 그림자를 보는 듯한... 그러나 그림자는 빛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모든 그림자는 궁극적으로 빛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벽과 황혼, 전쟁과 평화, 상승과 몰락을 경험한 자만이, 그러한 인간만이 진정으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52쪽)

 

그는 자신을 고향이 없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그는 자신의 고국을 등지고 마는데... 단지 육체적으로 고국을 등졌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어느 한 나라에 국한된 사고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코스모폴리탄. 세계주의자. 그는 유럽을 자신의 고향으로 삼고 살았는데... 그것이 바로 그가 살았던 어제의 세계였는데.. 이런 어제의 세계에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웠고, 이 그림자는 너무나도 어둡고 커서 결국 빛을 몰아내 그를 어제의 세계에서 격리해 버리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

 

범 유럽주의자임을 자처했는데.. 세계는 국가로 나뉘어 전쟁을 치르고 있는 현실. 그 현실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는 지성인. 그가 바로 츠바이크다.

 

오스트리아라는 지정학적인 약소국에서 태어났다는 것.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알려진 작가라는 것.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것.

 

이것이 결국 2차세계대전 때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되자 자신의 목숨을 끊게 되는 결과를 낳게 하는데...

 

전쟁을 피해 남미의 브라질로 이주해 나름대로 삶을 유지해가던 그에게 또다른 전쟁은 그를 견디지 못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에게 전쟁으로 점철된 어제의 세계는 이제는 사라져야 할 세계인데... 그가 원하는 어제의 세계는 국경으로 사람들을 가르지 않는, 세계의 지성인들이 자유롭게 교류하는 그런 세계였는데... 함께 공존하는 그런 사회. 그 사회를 여지없이 깨뜨려버린 히틀러라는 사람. 그에 대한 증오가 이 책에서는 가감없이 나오고 있다.

 

이 책이 지금 우리 사회에 의미가 있는 것은... 우리도 츠바이크처럼 어제의 세계를 겪었기 때문이 아닐까? 공동체로 서로 평화롭게 지내던 어제의 세계도 우리는 겪었고, 츠바이크가 겪었던 두 번의 전쟁과 같은 비극을 우리 역시 겪었으며, 히틀러만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독재자들을 겪었으니...

 

그 어제의 세계가 그냥 어제로만 머물었으면 츠바이크의 이 책은 서양의 과거를 겪었던 한 지식인의 초상에 불과했을텐데... 우리도 츠바이크와 비슷하게 어제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지는 않았는지.

 

다만, 그는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어제의 세계로부터 도피하고 말았지만...우리는 이 세계를 오늘도 겪고 있지는 않은지.

 

그렇다면 이미 우리에게는 먼저 간 길이 있으니.. 그 길을 우리에게 맞게 다시 만들어 가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이것이 이 책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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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름이 약동하는 오월임에도 우리의 마음은 아직도 겨울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새로운 옷을 입고 즐기기 시작할 때, 아직도 어두운 심연에서 차갑게 드러누운 채 세상에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존재들이 있고...

 

까르르 까르르 밝은 웃음으로 세상을 더욱 환하게 밝혀줄 존재들이 그 웃음을 미처 다 웃지도 못하고 우리와 다른 곳으로 가버린 이 시절.

 

구구한 변명은 필요없다. 우리의 잘못이다. 오월을 오월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봄을 봄으로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일만이 남았다. 황금연휴라고 하는 이 때 전국민의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우리가 했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야 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우울하여 여행은 포기하고... 헌책방 나들이로 대체하였다.

 

헌책방은 자신의 첫주인에게서 떠난 책들이 다른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곳. 자신의 생명이 아직도 다하지 않았음을 절절하게 보여주고 있는 곳. 이처럼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삶이 계속 이어진다면... 마음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려나...

 

강은교의 "풀잎"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시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사랑법' 아니던가. 또 '우리가 물이 되어'인데...

 

지금 이 때는 '우리가 물이 되어'와 어울리지 않는다. 강은교의 '물은' 긍정의 물이자 생성의 물, 생명의 물인데... 올 4-5월 우리게에 다가온 물은 부정의 물이자 소멸의 물, 죽음의 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는 어느 정도 위안을 준다. 마음을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해준다고 할까? 마음 속에 꽉 차 있던 어떤 울분, 억울함 등을 시를 통해 달래보려 한다. 그래서 강은교의 시집을 서슴없이 고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시에는 죽은이를 관장한다는 '비리데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저승에 가서 자신의 부모를 살릴 물건을 가져와 살렸다는.

 

이 시집에도 '비리데기의 여행' 5곡(曲)이 실려 있다. 그에 대한 시를 읽으며 마음을 조금 달래보고... 그러다가 이미 하늘로 간 혼들에 대한 마음에 김소월의 시를 읽으며 달래본다.

 

초혼(招魂)

 - 김소월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이렇게 애타게 혼을 부르는 일이 없기를...

 

강은교의 이 시집에도 수록되어 있는 '사랑법'을 보자.

 

  사랑법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있는 누워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위에 있다.

 

강은교, 풀잎. 민음사. 1994년 초판 20쇄. 90-91쪽.  

 

이제 우리가 진정으로 이들을 사랑하는 법은 무엇일까? 우리 시대 우리 사회를 사랑하는 법은 무엇일까? 그러한 사랑법.

 

가장 큰 하늘은 바로 우리의 등 뒤에 있다는데.. 바로 우리들 자신이 하늘을 엎고 있는 그런 존재들인데... 하나하나 소중한 하늘같은, 아니 하늘인 우리들이 잘 살 수 있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그런 사회.

 

우리 어른들이 그런 사회를 이제 약속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법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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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의 털 사계절 1318 문고 50
김해원 지음 / 사계절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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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이 말은 효경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우리 몸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으므로 감히 다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처음이라는 말. 맞는 말이다. 부모에게 하는 효도가 별것 아니다. 자신의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면서 살아가면 그것이 바로 효도가 된다.

 

자식이 아프면 부모의 마음은 편하지 않다. 온통 자식에게 신경이 간다. 그러니 자신의 몸을 돌보거나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이 때문에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 그것이 바로 효도의 처음이 된다. 공부, 출세... 이것은 나중일이다. 

 

그런데 이 말을 정면에서 거역하는 일이 일어났다. 조선말에, 아니 대한제국 시기라고 해야 하나... "단발령"

 

우리나라가 개화를 하기 위해서는 머리를 잘라야 한다는 명령, 그것도 자발적으로가 아니라 반대하는 백성들의 머리를 강제로 자르기도 했던,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가야 했던 그 어마어마한 재앙.

 

아마도 우리 조상들에게 이 "단발령"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재앙이었으리라. 조상을 배신하는, 부모를 욕되게 하는 그런 일. 하여 어떤 이는 목숨을 걸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지키기도 했는데...

 

몇 십년이 지난 뒤 세상은 다시 단발령이 난무하였으니.. 어른들에게는 장발 단속으로(이래서 역사는 반복되는가?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 스스로 판단하고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성인들의 머리카락을 자르라 마라 하는 공권력은 그 나라 성인들도 진정한 성인으로 대우하지 않고 미숙한 사람으로 대우하고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일이 바로 장발 단속령이라는 사실을 알려고 하지도 않았으니...), 학생들에게는 두발 규제로 나타났다.

 

단발령이 포고되고 머리를 자르는 사람이 '체두관'이었다면 몇 십년 뒤에는 경찰관이 또 학교에서 학생부장이 그 역할을 맡았다.

 

이 소설은 이런 점에 착안해서 내용이 전개된다. 주인공은 열일곱 살이 된 송일호. 그는 태성이발관 주인의 손자이고, 그의 고조할아버지는 사람들의 상투를 잘랐던 체두관이었다. 그야말로 그는 짧은 머리를 하고 지내야 할 태생이었던 셈.

 

그런 그가 두발 규제에 반대하는 시위를 계획하다 정학을 당하게 된다. 학교 교문 앞에서 벌어지는 현대판 체두관 학생부장 '오광두'의 머리깎기를 보고, 그 비인간성에, 비교육적인 면에 반발해 두발 자유를 외치는 시위를 계획하지만 사전에 탄로가 나고...

 

학교에서는 정당한 학생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오히려 학교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부모님 소환을 하고(이게 학교에서 가장 잘 쓰는 방법이다. 학교는 늘 '악법도 법이다'는 말과 '중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는 말을 상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일호의 아버지가 학교의 방침을 비판했다는 이유까지 가중치가 되어 정학 30일 처분을 받는다.

 

시위를 한 것도 아니고, 시위 계획에 정학 30일이라.. 이는 괘씸죄가 추가된 것일텐데...문제는 주인공이 이발소집 자손이라는 것. 조상은 단발령을 철썩같이 신봉하고 실행했던 사람이라는 것. 현재의 이발소 주인인 할아버지 역시 나라에서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옳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 그러니 그 집 자손이 두발 규제 반대 시위를 하는 것은 모순되어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 중재하는 역할로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아버지... 20년 전 집을 나가 세계를 유랑하다 돌아온 사람. 그는 자유를 찾아 떠났다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 그로 인해 아들은 송일호는 더 먼곳을 볼 수 있게 되고...

 

재개발 문제가 겹치면서 할아버지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게 되고 결국 할아버지의 결단으로 학교는 두발 문제를 재심의하기에 이른다.

 

열일곱살의 털... 제목으로 이상한 생각을 하겠지만 이 때의 털은 바로 머리카락이다. 그리고 이 머리카락은 바로 청소년의 신체다. 그들의 몸이다. 또 그들의 권리다. 그들의 자유다.

 

이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침해하면서도 너희는 아직 어리니까.. 너희는 한참 공부해야 할 때니까.. 또 이것은 학교 규칙이니까라는 말로 합리화하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

 

또 여기에 예전에는 한 학교마다 꼭 존재하는 별명 '미친개'가 있지 않은가. 이 작품에서는 현대에 맞게 영어로 '매드 독(mad dog)'이라는 교사가 등장하고, 아이들은 요즘 추세에 맞게 이를 줄여서 '매독'이라고 부르는데... 아이들의 인격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하는 교사.

 

아이들의 행동을 촉발시키는 그런 교사가 등장하여 소설의 내용을 더욱 흥미롭게 해주고 있다. 물론 그의 역할은 사건이 터지는 순간까지이다. 그 다음부터는 이런 인물의 역할은 중요해지지 않는다. 이미 사건이 터졌다면 그것은 그에 대한 두려움이 해소되었다는 이야기고... 그는 다음부터는 풍자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하여 열일곱의 털은 행복한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도 청소년 소설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고, 청소년들의 성장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주려는 의도를 어느 정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분위기도 많이 바뀌어 많은 시,도에서(비록 서울시교육청에서는 기껏 제정된 청소년인권조례를 무력화하려는 움직임도 있지만) 청소년 인권조례를 제정하여 학생체벌 및 학생의 신체표현의 자유를 명문화하고 있으니... 그렇게 지방자치 조례로 학생들의 털에 대한 자유가 명문화되기까지는 이 소설에서 전개된 그런 사건들이, 그런 싸움들이 수없이 많았음을 소설이 보여주고 있으니...

 

이 소설은 이렇게 청소년들의 인권이 보장되는 쪽으로 사회가 변해가고 있음을, 아니 변해가야 함을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렇게 '털'에 대한 문제가 아니더라도 아직도 학생들에게, 청소년들에게 규제되고 있는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보고 그것에 대해서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찾는 노력을 하라고 이 작품은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의 권리는 자신이 지켜야 함을 이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럼에도 내용 전개가 무겁지 않고 경쾌하게 이루어져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아버지를 통해서는 하늘을 보는 법을 배웠고, 할아버지를 통해서는 땅에 발을 딛는 법을 배운 주인공을 통해, 우리는 청소년들은 이상은 높고 멀리 하되, 실천은 현실에 발을 굳건히 디디고 해야 함을 알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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