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 겨울호를 받아보았다. 늘 이야기하지만 집 안에서 문학관을 나들이 하는 기분이 든다.

 

  이번호에는 읽을 만한 동화가 실려있다. 어쩌면 아직도 우리가 해결하고 있지 못하는 국제문제...

 

  벌써 몇 십년 전부터 이런 문제들에 대해 많은 작품들이 나왔지만, 문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러니,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 우리는 이렇게 지내야 하나. 이제는 우리 힘으로 스스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고.

 

  토끼와 원숭이에 빗대어 우리나라 국제관계를 쓴 동화, 마해송의 '토끼와 원숭이'라는 동화가 원본을 영인하는 형식으로 이 문학관 75호에 실려 있다.

 

평화롭던 토끼 나라가 원숭이 나라에 병합이 되고, 그들과 같아지기를 강요당하는 모습이라든지, 다시 주변의 센이리와 뚱쇠나라가 나와 그들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토끼의 모습이라든지, 마치 우리나라 국민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그런 동화다.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이 동화를 통해서 알려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여전히 진행중인 이런 문제...

 

문학관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미래를 열어갈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이 책자에 실린 이런 동화를 보면서 느끼게 된다.

 

이것과 더불어 이번 호에는 바다를 소재로 한 우리나라 시인들과 작품이 실려 있다. 식민지시대 우리나라 시인들에게 바다가 어떻게 다가왔는지, 그들이 바다를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알 수 있어서 좋다.

 

문학관의 이런 노력이 나를 문학관으로 한 발 더 끌어당기고 있으니, 그도 좋은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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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9 16: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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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9 1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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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가 쓴 작품 중에 네 번째로 읽은 책, 소설로는 세 번째.

 

제7일, 무언가 환상 속에 이야기가 펼쳐지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제목이다. 중국어판에도 이런 구절이 들어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번역본에는 시작하기 전에 성경의 창세기 구절이 쓰여 있다.

 

'하느님께서는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제목이 된 제7일은 모든 것이 완성되는 날이다. 모든 것이 완성되는 날, 그 날은 어떤 날일까 하는 궁금증을 유발하는데...

 

시작부터 이상하다. 죽었다. 주인공이 죽었다. 주인공이 죽었는데, 죽은 주인공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분명 괴기스러운 소재인데, 전혀 괴기스럽지 않다.

 

오히려 읽어갈수록 마음이 따스해진다. '허삼관 매혈기'를 읽을 때 저절로 웃음이 머금어지는 그런 전개와는 다르게, 또 '가랑비 속의 외침'을 읽으며 참 어두운 분위기구나 하는 느낌과 다르게, 이 소설은 죽음 이후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따스하다.

 

밝다. 사랑이 넘치고 있다. 그 사랑 넘침을 죽음 이후에 무덤 속으로 가지 못한 주인공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가난하지만 서로를 위하며 사는 사람들, 죽음 앞에서도 결코 평등할 수 없는 사람들. 빈의관이라고 쉽게 말하면 화장터에서조차도 권력과 금력에 따라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지만,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중국에서, 권력과 금력을 소유한 자들이 어떻게 떵떵거리고 사는지, 그리고 죽은 뒤에도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이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이런 사회비판적인 면도 있지만, 이것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냥 빈의관에서 귀빈석과 평민석이 따로 있다고 표현하는 것, 그들이 쓰는 화장로도 다르다는 것 정도가 나타나 있을 뿐이다.

 

이런 모습보다는 가난하지만 서로를 사랑하고 돕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 소설에서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사건사고를 감추는 모습이야 어느 권력이고 비슷하다지만, 이 소설에서도 그런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소설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주인공은 양페이와 그가 만나는 보통 사람들, 아니 더 가난한 사람들이다.

 

위화 소설이 지닌 짧고 경쾌한 문장으로 인해 이들의 비극이 무겁고 칙칙하게 펼쳐지지 않는다. 이들은 비극적인 사고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삶을 긍정한다.

 

무덤조차 마련하지 못해 구천을 떠돌고 있을지라도 서로를 위로하고 함께 하는 모습을 통해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서로를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죽을 때가 되자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자신을 철로에서 주워 키워준 아버지 양진바오, 그리고 자신을 떠난 여인 리칭, 가난한 셋집에 살던 우차오와 류메이, 아버지의 친구로 양페이를 돌봐준 리웨전 아줌마 등등.

 

모두가 가난하지만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간 사람들, 죽어서도 서로를 위하며 지내는 사람들, 돈이 없다는 이유로 무덤조차 갖지 못하고 또 관료의 책임회피로 자신의 유골이 아닌 다른 유골을 매장한 상태로 지내고 있는, 그들이 모여 지내는 곳.

 

마지막으로 류메이가 무덤으로 떠나갈 때 들어온 우차오는 양페이와 함께 이곳에 간다. 양페이가 자신의 아버지 양진바오를 찾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날이 바로 '제7일'이다. 양페이가 이제는 편히 쉴 곳.

 

양페이가 의혹에 차 있는 우차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곳에는 가난도 없고 부유함도 없어.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고, 원수도 없고 원망도 없어 ……. 저기 사람들은 전부 죽었고 평등해.

"저곳은 어떤 곳인가요?"

그가 물었다.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 

내가 대답했다.      (314쪽)

 

이렇게 제7일은 끝난다. 가난한 사람들, 이들은 죽어서도 자신들의 쉼터인 무덤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게 끝이 아니다. 이들은 함께 모여 산다.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에서.

 

톨스토이는 사람에게 얼마 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작품에서 사람에게는 한 평의 땅, 죽어서 묻힐 그 땅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아니다.

 

현대 중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 한 평의 땅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화장한 유골을 넣고 보관한 0.1평정도의 땅도 허용이 되지 않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렇게 죽음 이후에도 이들이 불행하게만 살아서는 될까. 아니다. 위화는 소설을 통해서 이 사랑이 넘치는 이들에게 쉴 곳을 제공해야 한다고, 죽음 뒤에도 불평등이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죽은 사람인 양페이가 주변 사람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면서... 그렇게... 정말로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죽음 앞에서조차 불평등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죽어서 서로를 위하는 가난한 사람들,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죽음을 통해 '제7일'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제7일'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사회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에게 삶에서 그런 '제7일'을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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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세밑 닭과 개의 대화

     - 정유(丁酉)년이 가고 무술(戊戌)년이 오니


민주주의 새벽을 깨운 올해

새로운 시대를 향해

깨어있으라고

우리는 목청껏 울었다네

우리의 울음으로

시민들은 잠을 깨

세상 어둠을 몰아내고

새로운 걸음을 걷고 있다네

이젠 자네 차롈세

이들의 걸음을 막는 세력을

자네가 막아주고

이들과 함께 가기를


늘 사람과 함께 하며

사람을 지켜 주는 안내견처럼

나는 민주주의를 충실히

안내하겠네

누군가 침입하면

컹컹 경고하며

자네가 깨운 민주주의가

지켜질 수 있도록

나는

충직한 문지기

충직한 안내자로

풍요로운 다산의 사회를

만들고, 넘겨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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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기의 괴로움. 어쩌면 시를 읽으며 세상을 해체한다는 것에 대해, 해체된 세상을 다시 재구성한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명확하지 않은 시, 시인의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찢겨버린 시들을 읽을 때는 편안하지가 않다.

 

그럼에도 세상이 갈가리 찢겨져 있는데, 어찌 시가 온전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 이런 시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시인은 잠수함의 토끼요, 광산의 카나리아라고 하지 않았던가. 시인이 이런 시를 쓸 수 밖에 없는 상황. 그것이 바로 현 시대 상황이 아니겠는가.

 

최치언의 시를 읽으며 참 많이도 해체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세상은 온전하지 않다. 세상은 단순하지도 않다. 세상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다. 이게 바로 세상이다.

 

혼돈, 카오스. 그러나 카오스에서도 질서를 찾는 것, 그것이 바로 시인이다. 아니 우리 인간들이다. 태초에 어둠이 있었을텐데, 이 어둠에서도 말은 있었다. 성경에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하지 않나.

 

아무리 혼돈이라도, 암흑이라도, 갈가리 찢긴 세상이라도 말이 존재하는 한, 세상은 재구성된다. 재탄생된다.

 

이런 재탄생의 주인공, 그가 바로 시인이다. 이 시집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다.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는 시집의 제목과, 그 제목이 된 이 시집의 첫번째 시를 읽으며 이렇게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는 것.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것. 이념으로 나뉘어져 있으면 결국 그것은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됐다.

 

시를 보자.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

 

우리는 모두 우측으로 걷고 있었다. 그때 좌측에서 소리가 들렸다

듣지 마라

소리는 계속해서 우리들의 귓전을 때렸다

귓속에서 시뻘건 태양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좌측은 연필의 힘을 믿는다

나무의 치졸함을 믿고

의사당의 순결을 믿는다

좌측은 형제들의 오만을 믿는다

그러므로 좌측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우리가 늙는다는 것도

너희들이 여자이었다가 남자가 되고 그리고 여자로 사랑하는 나약한 방식을 믿는다

 

귀를 도려내라

 

그리고 우리는 귀 없이 계속 걸었다. 그때 좌측에서 움직였다

보지 마라

움직임은 계속해서 우리들의 눈꼬리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담장의 덩굴이 눈알을 휘감아 낚아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걸었다

 

좌측은 우리들 반대쪽으로 기울어 있다

높은 담장을 드리우고 좌측은 아무것도 치료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좌측의 말이

칼처럼 우리 몸을 찌르고 들어왔을 때 우리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많이 순진해졌다

우리가 더 이상

선한 꿈을 꾸지 못한다는 건 좌측에게 우리들의 악몽을 맡겼기 때문이다

움직일 수 있을 때

눈알을 파라

 

눈알 없이 우리들은 우측으로 걷는다

좌측이 우측이 될 때까지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우리는 우측하고만 싸웠다

그리고

모두 죽었다

이것이 좌측이 준 선물이다

 

최치언, 어떤 선물은 피를 선물한다. 문학과지성사. 2011년 초판 2쇄.  10-12쪽.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맹목의 상태. 이것은 이념의 늪에 빠진 사람의 상태다. 이런 맹목의 상태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세상은 다양함으로 구성되어 있고, 다양함으로 인해 존재하게 되는데, 이를 어거지로 하나로 통일시키려 하는 것, 이것은 곧 죽음이다.

 

좌측이 준 선물이 죽음이라면, 우측이 준 선물 역시 죽음이다. 좌와 우가 함께 존재해야만 삶으로 갈 수가 있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 시.

 

툭하면 종북, 종북하는 이 나라는 우측이 준 선물이 너무도 가혹하다. 그러나 좌측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상대의 소멸을 바란다. 상대와 공존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귀도, 눈도 없어야 한다.

 

오로지 자신들의 말만 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된다. 이 시집의 제목을 거꾸로 읽는다.

 

피를 요구하는 선물은 거부해야 한다로...  시가 발표된 지 꽤 됐을텐데... 지금 우리나라 상황을 보면, 이 시에서처럼 어쩌면 피를 요구하는 선물이 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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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 속의 외침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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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위화의 작품으로는 세 번째, 소설로는 두 번째 읽은 책.

 

두 번째로 읽은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소설을 읽으며 '허삼관 매혈기'에 나오는 장면과 연결시킬 수도 있었고, 또 위화의 그 책에 나온 자신이 성장하면서 겪었던 일들이 소설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입양이 되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 그 아들의 눈으로 보게 되는 집안일과 어른들의 세계, 그리고 자신들의 성장과정.

 

중국의 어린이들이 어떻게 성장해왔는지를 이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어찌보면 한 손씨 집안의 내력을 이야기해준다고 할 수도 있는 소설이다.  중국판 '삼대', '태평천하'라고 할 수도 있는데...

 

삼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우리나라 '삼대'나 '태평천하'에서는 할아버지 세대는 돈을 많이 벌어 떵떵거리며 살게 되고, 아버지 대에서 흥청망청 돈을 물쓰듯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할아버지도 쫄딱 망해버리는 상태로 나온다는 것이 다르다.

 

또한 아버지 세대는 좌절된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우리나라 소설인데, 위화의 이 소설에서는 아버지 역시 제대로 배운 것이 없는 무지랑이에 해당한다는 것이 다르고...

 

그러나 아들 세대는 역시 배우고 무언가를 해보려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삼대의 맨 마지막 세대의 눈으로 소설을 전개하고 있어서 그런지, 그 점에서는 위화의 이 소설이나 우리나라 '삼대, 태평천하'가 비슷한 점이 있다.

 

다만 위화의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아들 세대는 우리나라 아들 세대보다 더 세속적인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 다르다.

 

이 소설은 이처럼 할아버지 손유원, 아버지 손광재, 그리고 그의 아들 셋 손광평, 손광림, 손광명의 이야기에 덧붙여 소설의 서술자인 손광림이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참 본능에 충실한,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사는 민초들의 모습이라고 해야 할지, 가난으로 인해 파탄에 이르지만 그럼에도 최소한의 정을 끊지는 않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살이가 이토록 지난하지만, 그럼에도 살만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온갖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는 손광평이지만 결국 자신의 아버지를 어쩌지는 못하고, 동생이 대학에 들어가 도시로 갈 때 배웅해 주는 모습이라든지, 첫째 형을 닮았지만 자신보다 어린아이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손광명이라든지... (그것이 비록 자신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위선적인 행동이었을지라도)

 

여기에 주인공의 친구들, 이들 역시 버림받거나 가난에 찌들어 살게 되는데... 그런 시대를 중국이 거쳐왔다는 것.

 

이 소설에도 도회지에 대한 부러움이 드러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창 개발이 될 때 서울로, 서울로 올라왔듯이, 중국 역시 도시로, 도시로를 외치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어른이 되어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것, 위화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되돌아보면서 이를 소설로 형상화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어린시절을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독자들에게 자신들이 거쳐왔던 과거에 대해 다시 한번 상기시키면서 그 시절을 잊지않도록 하고 있다고나 할까.

 

이미 변해버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 그 시절이 지금의 자신들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소설. 이것이 위화의 이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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