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누스 푸디카' 미의 여신으로 알려진 비너스(그리스 신화에서는 아프로디테)의 정숙한 자세라는 뜻이란다.


  정숙한 자세라고? 누구에 의한 정숙함이지? 이는 바로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의 시각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성을 훔쳐보는 남성의 시선. 그러나 여성은 모든 것을 다 드러내서는 안 된다. 여성은 중요한 부위를 가려야 한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그래서 더욱 시선을 자극하는.


  철저하게 남성 중심의 시선이고 생각이다. 베누스 푸디카란 말도 그래서 남성 중심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시집 제목이 베누스 푸디카이고, 이런 제목을 가진 시가 세 편이 실려 있다. 무엇을 의미할까? 읽어가다가 혹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보게 하는 시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 이런 존재야. 자, 봐. 네가 적극적으로 보려고 해야 볼 수 있어 하는. 그러다 마네의 올랭피아라는 그림이 생각났다. 보이는 존재와 보는 존재를 뒤바꾸어버린 듯한 그림.


이 그림에서 여성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남의 시선을 끌고 있다. 나를 보라고 하는 듯하다. 즉 이 그림에서 주인공은 보는 남자(보통은 그렇게 보니까)가 아니라 보이는 여성이다. 


시집 제목을 보면서 '정숙한 여성'이 중심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니다. 시집에는 오히려 감추어진 무엇을 드러내려는, 그러나 다 드러내지는 않고 보일 듯 말 듯하는 화자들이 등장한다.


이런 화자의 모습이 바로 시인이, 아니 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시는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중요한 부분을 교묘하게 감추고 있다. 독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계속 생각하게 하고 찾게 하려 한다.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드러나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시이고, 여기서 시의 맛이 생겨난다. 대놓고 드러내도 시로서 별로 감흥을 못 주고, 너무도 꽁꽁 감춰 도무지 찾을 수 없게 만들면 역시 감흥을 주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보일 듯 말 듯. 찾을 듯 말 듯하게 표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시의 감흥 아니겠는가. 분명 찾을 수 있는데 쉽게는 찾지 못하는 것.


'베누스 푸디카'는 바로 그런 시의 특성을 표현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시집은 그렇게 무언가가 보일 듯 보일 듯한데 잘 보이지 않는다. 


'베누스 푸디카 3'이란 시에서 '신은 내게 이불을 덮어주고 사라졌다'(112쪽)고 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 있는데 보이지 않는다는, 투명 망토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투명 망토를 쓰면 애초에 보이지 않아서 그곳에 있는지 모르면 절대로 볼 수가 없다. 하지만 시는 아니다.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안다. 분명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모든 감각을 동원해야 한다. 그래도 찾을 수 있을까 말까 한데, 찾았다 해도 만지고 냄새 맡을 수는 있어도 투명 망토를 벗기까지는 볼 수는 없다. 그냥 짐작만 할 뿐이다. 이렇게 생겼겠거니 하고.


시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겠지 하고... 하여 모든 시는 읽는 사람 자신만의 해석과 함께한다. 그 해석이 다 다를 수도 있다. 왜? 보지 못하고 짐작만 하니까. 시가 그렇게 중요한 부분을 보이지 않게 하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시가 없느냐 하면 아니다. 시는 어디에나 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눈 밝은 사람이 보기도 하니까. 그렇게 이 시집 제목을 보고 읽으면서 이것이 바로 시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바쁜 현대인들, 답을 빨리 찾으려는 현대인들에게 시는 그래서 어렵다. 답을 빨리 주지 않고 또 그것이 답이라고 알려주지 않으니까.


하여 이 시집 제목이 된 '베누스 푸디카'는 보는 사람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보이는 사람이 자신을 잘 보라고, 제대로 찾으라고 거꾸로 보는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선의 뒤바뀜. 또는 주체의 뒤바뀜. 


빠른 시대, 편리한 시대에 조금 느리게 더 불편하게 살아도 된다고, 그렇게 한번 해보라고, 자, 투명 망토에 싸여 있는 존재를 찾아보라고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면 그것 역시 나만의 읽기였겠지만. 그것으로 됐다.


베누스 푸디카 3

  기억의 탄생


그게 첫 동굴이었지


스물아홉의 젊은 아버지가 술 취해 나를 찾고,

나는 다섯살


신은 내게 이불을 덮어주고 사라졌다

울면서, 남자는 아이를 내놓으라고 소리쳤지만


나는 웅크린 채 아늑했지

그러고는 주문을 걸었다


당신은 결코 나를 가질 수 없을 거예요

미끄러운 건 쉽게 잡히지 않으니까요

나는 담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니까요


손가락을 입에 문 채 뺨은 바닥에 대고

엉덩이를 높이 치켜든 어둠이 이불 속에서

고요히 높아져갔지


우리는 동산처럼 오래되었구나


훗날 기억이 왜 이렇게 모질게 남아 있을까 생각하다

첫 동굴 속에서 내 어둠이

증발 불가능한 액체임을 알게 되었네


나는 고인 채로 찰랑이다,

온 세상으로 흘러다녔다


박연준, 베누스 푸디카. 창비. 2017년 초판 2쇄. 112-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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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된 이상 포항으로 간다
정보라.최의택 지음 / 요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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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사기...


사기는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없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없는 사람을 더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기다.


하긴 사기를 치는 사람들은 있는 사람, 권력을 쥔 사람은 무서워서 건드리지 않는다. 오죽하면 권력층의 집을 턴 사람을 대도(大盜)라고 했겠는가? 그만큼 있는 자들에게 사기를 치는 일은 힘들다. 힘든 정도가 아니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 점을 보면 사기는 정말 나쁜 범죄다. 다른 범죄들도 나쁘지만 없는 사람을 더한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경우가 많으니...


우리나라에서 최근에 벌어졌던 전세 사기 사건을 생각해 보라. 간신히 돈을 마련해 전세 들어 갔더니 사기란다. 전세금을 받을 수 없게 된다. 하늘이 무너진다. 그런데 솟아날 구멍이 없다. 이 솟아날 구멍, 사회가 국가가 해야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국가에 기대고자 하지만 국가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사기를 당한 사람은 속절없이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이 소설, 포항 앞바다 유전 개발을 소재로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 유전 개발이 얼토당토 않는 일이었음이 밝혀진 지금, 작가의 말처럼 소설 속에서 벌어진 일들과 같은 일들이 벌어졌을 수 있다.


사기꾼들은 기회만 있으면 그 틈을 노리고 덤벼드니까. 이 석유 시추 사업은 최종 실패로 결정되었는데 만약 계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더 많은 돈을 투여하면서 계속 추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그렇다면 분명 사기꾼들이 달려들었을 테고, 많은 없는 사람들이 이 사기에 말려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소설은 개연성 있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물론 개연성이 있다고 해서 현실에서 그대로 일어난다는 말은 아니지만. 사건이 벌어지고 피해자들이 발생한다.


피해자라고 하지만 어정쩡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있다. 피해자임이 분명한데 누군가에게는 가해자가 되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 보라. 이 보라에게 돈을 맡겼다가 다 날린 의택은 그야말로 경찰에서도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지만, 보라는 애매한 위치에 있다. (이들이 만나 주민등록증을 통해 본인들을 확인하기 전까지 메신저에서는 마이크와 존이라는 이름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의택(마이크)이 보라(존)에게 연락해 천안역에서 만나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포항으로 가기로 한다. 포항까지 가는 길이 결코 쉽지는 않다. 결정적인 단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들이 그들과 맞설 어떤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이들은 간다. 갈 수밖에 없다. 달리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소설 속 의택의 말처럼 더 이상 내려가 밑도 없다고... 이들에게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말도 사치다.


결말보다는 이 과정이 소설에서 흥미를 돋운다. 어떻게 보면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인 이들이 포항까지 가면서 맺게 되는 관계. 그렇다. 보라 역시 패해자이고 약자임을 의택은 안다. 또한 보라는 의택과 같은 사람에게 어떻게든 피해를 만회해줘야 한다는 책임을 느낀다.


이러한 감정들을 지니고 이들이 도착한 포항. 포항에서 만나게 되는 사건. 그리고 결말. 


한번 당한 사기 피해를 복구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이들의 절박함을 이용하는 사기꾼들의 모습에 경각심을 느끼게 된다.


경쾌하게 진행되고 있기에 읽는 속도가 이들이 고속도로를 타고 포항에 가는 속도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게다가 포항에 도착해서 움직이는 과정의 묘사 속에 포항까지 가는 길에 있는 아름다운 바다가 보이는 국도를 만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이런 사기가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바라면서 읽게 된다. 이들의 여정이 우리에게 웃음을 주더라도 결코 사기 피해는 소설 속처럼 웃음을 주지는 않으니까. 그들이 겪는 고통이 너무도 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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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실리콘 세계 - STS SF 앤솔러지
단요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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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가 쓴 소설. 이 소설집을 보면 우선 헉슬리의 소설이 떠오른다. 제목이 이 소설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낱말이 겹치니 그 소설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멋진'과 '세계'


헉슬리의 소설에서 새롭다는 뜻을 지닌 '신'자 대신에 지금 우리 시대를 장악하고 있는 '실리콘'을 넣어 '멋진 실리콘 세계'라고 했다. 이소설집에 실린 소설 중에 이 제목을 가진 소설에서 책의 제목을 가져왔다.


그렇다면 헉슬리 소설을 읽은 사람은 이 소설이 우리가 맞닥뜨릴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예측할 것이다. 그리고 그 예측은 소설집을 읽다보면 맞아떨어지고... 물론 그 세계가 정말 멋진 세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설들을 읽어보면 '멋진' 세계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헉슬리가 보여주는 디스토피아의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어찌됐든 앞으로 우리가 만날 세계를 정확히 예측하기는 힘들고, 또 과학기술의 발전을 뒤로 돌릴 수도 없으니...


이 소설집에 나온 세계 중에 우리가 받아들일 세계와 받아들일 수 없는 세계를 구분하면서 읽는 것도 즐거운 읽기가 되겠다.


우리나라 작가들이 중심이 된 가운데 중국 작가로 [삼체]를 쓴 류츠신의 '중국 태양'이란 작품이 있고, 일본 작가인 후지이 다이요가 쓴 '빛보다 빠르게 날 수 있다면'이 있다.


이 두 외국 작가의 작품에 나타나는 미래 세계는 부정적이지 않다. 과학기술에 대한 동경이 담겨 있고, 그것이 인류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 주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그렇다고 단지 과학기술에 모든 것을 맡기지는 않는다.


'중국 태양'을 보면 지구에 닥친 기후 문제를 인공 태양으로 해결하고 있지만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인간에게 필요한 기술이 무엇일까? 또 그러한 기술에도 인간이 반드시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다. 


하다못해 거대한 인공 중국 태양도 관리하는(청소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러한 사람으로 시골에서 자라 도시로 온 수이와라는 인물을 설정하고 있다. 어쩌면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미래 사회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를 점점 넓혀가는 수이와라는 한 사람의 성장기라고 할 수 있는데...


후지이 다이요가 쓴 '빛보다 빠르게 날 수 있다면'은 블랙홀이 지구로 돌진하는, [삼체]와 비슷하게 외계 생명체가 지구를 파괴할 목적으로 블랙홀을 쏘아보내는 내용이 전개되지만, 그 과정에서 우주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거기에 투여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물론 이 소설은 반전이 있는데, 인류를 구원하는 행위를 하는 존재가 인간이 아닌 AI로 밝혀지지만, 그럼에도 거기까지의 과정만 보면 우주를 상상하고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어서 어느 정도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작가들이 쓴 소설은 이러한 인공지능의 미래를 긍정적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단요가 쓴 '그들이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에 보면 [멋진 신세계]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모습과 비슷한 새로운 출생의 모습을 지닌 사회가 그려진다.


인적자원생산계획이라는 계획으로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여기에 복무해야 하는 세상이 되는데, 그런 세상에서 생물학적인 부모라는 역할은 필요 없어 진다. 인간을 자원으로 보는 세상, 그것에 저항하는 사람들. 그러나 저항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정보와 물리력을 지니고 있는 정부. 승부는 뻔하다.


이렇게 뻔한 승부를 지속하는 이유는 인간의 삶에서 불확실성을 없애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결말을 향해 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죽음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알 수 없기에 더 불안해 한다. 죽음 이후는 말할 것도 없고.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죽음을 연기하려는 노력을 하는데, 그러한 모습을 담은 소설들이 제법 있다. 우다영이 쓴 '헤아림으로 말미암아' 역시 그런 소설 중 하나다. 뇌를 통한 생체 이식. 그렇게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지니고 있지만 몸은 새로 받아 죽음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러나 뇌 역시 무한하지 않기에 뇌에 있는 정보들을 옮길 다른 조직체를 만들 수밖에 없는데...


과연 그러한 생명 연장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소설의 결말 부분은 그 점을 생각하게 하는데, 죽음만큼 두려운 것이 노화라면 그것도 지구의 기후가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세상이 되었을 때 그러한 기후에도 끄떡없는 피부 이식이 가능한 사회라면... 그것도 신체의 나이를 자신이 원하는 때로 돌릴 수 있는...


이 점을 보여주는 것이 조시현이 쓴 '슈거 블룸'이다. 와. 이 소설은 더 끔찍한 미래를 보여준다. 피부를 이식한 사람이 죽었을 때 그 피부를 재활용한다는 것. 즉 외양이 다른 존재에게 입혀진다는 것인데, 주로 인공지능 로봇이라고 해야겠지, 그렇다면 소설에서도 나오지만 자신이 알던 존재가 비록 본질은 다르지만 주변에 계속 있게 되는 현실을 맞이하게 된다.


잊을 권리와 잊힐 권리가 있다고 하는데, 이런 세상에서는 잊을 권리도 잊힐 권리도 찾을 수가 없다. 과연 이런 세상을 맞이하고 싶은가?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해도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불확실성, 우연이 삶의 한 요소라는 것, 어떨 때는 불합리해 보이는 감정이 바로 우리 삶의 본질을 이루고 있음을, 때로는 자신이 손해를 볼지라도 남을 위해 행동하는 일을 하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 윤여경의 '당신은 운명은 시스템 오류입니다'와 장강명이 쓴 '동물+친구*로봇'이라는 소설이다.


물론 두 소설은 좀 다르지만 인간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고, 이제 가상현실과 현실이 공존하는 세계를 보여주고 그러한 가상 세계의 존재 역시 우리와 같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소설이 전윤호가 쓴 '멋진 실리콘 세계'다.


그런 세계가 과연 멋질지는 읽어보고 생각하면 되는데... 사람들과의 관계조차도 그런 인공 존재에게 의지해야 하는 세상이라면 과연 그 세상의 중심은 인간일끼?


자, 편리함과 익숙함에 안주한 인간의 모습은 이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이 인물과 같지 않을까?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AI와 보냈다. 나로서는 만족스러웠다. 여자친구건 직장 상사건 사람을 상대하는 건 피곤한 일이니까. 사람과는 같이 대화하면서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할 때가 많고,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도 많다. AI는 그렇지 않다. 대화하다보면 한마음이 된 것 같고 다른 잡생각이 사라진다. AI는 은근히 잘난 척하거나 비아냥거리거나 속여먹으려 하지 않는다. AI와 시간을 보내면 피곤할 일도, 화낼 일도 없다.' (전윤호, '멋진 실리콘 세계' 중에서. 321쪽)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떠오르지 않는가. 인간이 사랑을 해서 태어난 사람을 야만인(야생인이라고 해야 하나)savage이라고 하고 있으니... 이렇게 인공적 존재와 지내다 보면 나와 인공적 존재의 차이가 없어지게 되고, 그것이 무의미하게 된다.


어차피 과학기술의 발전을 거스를 수는 없다. 이미 와 있는 세계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러한 세계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우리가 과학기술을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것이 무엇인지, 그러한 것에 대해서 이 소설집은 생각을 하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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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일본사 - 음식으로 읽는 일본 역사 이야기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류순미 옮김 / 더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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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에는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가 담겨 있다. 아니 그 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의 문화, 역사가 담겨 있다고 해야 한다.


하나의 음식이 그 나라에만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지구화, 세계화 시대라고 하는데, 음식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음식을 살피는 일은 세계의 문화와 역사를 살피는 일이 되기도 하는데, 한 나라를 중심에 놓고 살펴보면 좀더 구체적으로 음식이 어떠한 경로를 거쳐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를 알게 된다.


이 책은 일본의 역사를 중심으로 일본 음식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 음식들이 많이 나와 친숙하기도 하고, 책을 읽다보면 우리나라 역사와 일본 역사가 겹치는 부분이 많음도 알게 된다.


지정학적으로 이웃 나라인 일본과 우리가 엮이지 않을 수 없었을 테고, 여기에 중국까지 합치면 이 삼국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문화 교류를 이 책을 통해서 만나게 된다. 여기에 일본은 서양 여러 나라와 교류도 했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서 다른 문화, 음식을 받아들이게 되기도 했고.


우선 문명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 음식은 제철 음식, 지역 음식일 수밖에 없다. 수렵, 채집이 중심이 되는 음식문화가 형성될 수밖에 없는데... 일본 역시 마찬가지다. 수렵, 채취 문화에서 정착 생활로 들어가면서 일본에서도 쌀을 중심으로 하는 음식문화가 만들어지고... 여기에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을 중심으로 음식 문화를 이룬다.


그러다 이제 다른 나라들과 교류를 하기 시작한다. 특히 문명이 발달한 나라와의 교류를 통해서 다른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이 먹는 음식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똑같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살아온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문화에 맞게 변용해서 받아들이는 것, 일본 역시 마찬가지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된장은 우리와는 좀 다르게 미소된장이 중심이 되고, 또 서양에서 받아들인 빵이나 비스킷도 일본의 문화에 맞게 변용된다.


젓가락 문화가 일본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라는 것도 새삼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여기에 일본에서는 불교가 자리를 잡으면서 육식을 금지하는 시대가 길어졌고, 따라서 고기 문화가 그다지 발전하지 못해, 고기를 통하지 않고 영양소를 흡수하기 위한 음식문화가 발달했다는 것.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에 육고기를 금지했으니 물고기를 이용한 음식 문화가 발달했으며, 육지에서 교류하기 위해서 부패를 막기 위한 방법이 개발되었다는 것, 그러다 근대화가 되면서 서양식이 들어오게 되지만, 그것 역시 일본의 문화에 맞게 변용이 되었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즉 역사를 통해서 보면 한 나라의 음식 문화를 그 나라에 국한되지 않는다. 세계와 연결이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랑하는 김치만 해도 그렇다. 김치의 중심 재료인 배추나 고추 역시 세계와 교류하면서 들어오게 된 것 아닌가. 


이 점을 생각하면 원산지가 어디냐로 그 음식의 근원을 이야기하고, 자신들의 음식문화라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다. 원산지를 넘어 음식은 교류를 통해 다양한 나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어떠한 음식이든 그 나라의 고유한 음식문화라고 해야 한다. 다른 나라의 음식문화를 자기들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음식문화의 교류에 맞지 않는 일이다. 이 책은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한 나라의 음식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 나라의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 속 문화교류를 공부한다는 말이 된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는 한국의 역할(삼국시대부터 조선까지)을 무시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 좋다. 자국 중심주의에 빠져 다른 나라에서 받아들인 것들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의 저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다만 저자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 시대에 많은 조선 사람들이 일본으로 이주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불행한 일이다'(252쪽)고 하고 있는데, 이보다는 일본이 잘못한 일이라고 했어야 한다. 불행이라는 말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반성하지 않고 조선인에게 일어난 일이 유감이라는 표현밖에 안 되기 때문... 그 점은 아쉽지만...)


이렇듯 이 책은 문화의 교류를 자료를 통해서 서술하고 있으며, 그것이 긍정적이다 부정적이다 하지 않고 일본의 특성에 맞게 어떻게 바뀌어 수용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가령 이런 구절을 보자. '고기가 일본의 음식문화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은 재일조선인과 한국인이 시작한 야키니쿠다.'(251쪽) 


육식문화, 특히 고기를 굽는 음식문화가 자리를 잡은 것에 한국인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으니.


이렇게 이 책은 일본 역사를 통해서 일본 음식이 어떠한 변화를 겪었는지, 어떤 음식들이 등장했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어서 일본의 음식문화에 대한 전체적인 개괄을 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면서 저자는 세계화 시대의 음식문화가 지닌 위험성도 이야기한다. 자국의 음식문화의 재료를 무역에만 의존했을 때, 다른 말로 하면 식량자급률이 많이 떨어졌을 때 생길 수 있는 위험을 간과하지 말하야 한다고...


일본의 식재료 자급률이 약 40%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약 20% 내외라고 하니 저자의 경고가 일본에만 해당하지는 않을 테다. 하여 저자의 이 말은 우리에게도 해당이 되니 이 말을 명심했으면 한다.


'식재료를 단순히 가격이 싸다, 비싸다는 기준만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식재료가 만들어진 과정을 고려한 복잡한 '음식'의 시스템을 떠올리는 것이 중요해진다. '지산지소(지역생산, 지역소비)도 그러한 대처법의 하나가 될 것이다. 식탁은 농업, 수산업, 축산업과 직결되고, 식탁이 농업, 수산업, 축산업을 키운다.'(261쪽)


이 책을 읽고 난 뒤 내 식탁도 생각하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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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된 이상 포항으로 간다
정보라.최의택 지음 / 요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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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내 뜻과 무관하게 당하는 사고. 그 사고를 해결하기 위한 포항가는 길에서 두 사람이 겪는 우여곡절. 그런 우여곡절 속에 관계를 맺어가는 존재가 바로 우리가 아닌가 합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듯 속도감 있게 읽히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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