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누스 푸디카' 미의 여신으로 알려진 비너스(그리스 신화에서는 아프로디테)의 정숙한 자세라는 뜻이란다.


  정숙한 자세라고? 누구에 의한 정숙함이지? 이는 바로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의 시각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성을 훔쳐보는 남성의 시선. 그러나 여성은 모든 것을 다 드러내서는 안 된다. 여성은 중요한 부위를 가려야 한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그래서 더욱 시선을 자극하는.


  철저하게 남성 중심의 시선이고 생각이다. 베누스 푸디카란 말도 그래서 남성 중심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시집 제목이 베누스 푸디카이고, 이런 제목을 가진 시가 세 편이 실려 있다. 무엇을 의미할까? 읽어가다가 혹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보게 하는 시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 이런 존재야. 자, 봐. 네가 적극적으로 보려고 해야 볼 수 있어 하는. 그러다 마네의 올랭피아라는 그림이 생각났다. 보이는 존재와 보는 존재를 뒤바꾸어버린 듯한 그림.


이 그림에서 여성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남의 시선을 끌고 있다. 나를 보라고 하는 듯하다. 즉 이 그림에서 주인공은 보는 남자(보통은 그렇게 보니까)가 아니라 보이는 여성이다. 


시집 제목을 보면서 '정숙한 여성'이 중심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니다. 시집에는 오히려 감추어진 무엇을 드러내려는, 그러나 다 드러내지는 않고 보일 듯 말 듯하는 화자들이 등장한다.


이런 화자의 모습이 바로 시인이, 아니 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시는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중요한 부분을 교묘하게 감추고 있다. 독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계속 생각하게 하고 찾게 하려 한다.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드러나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시이고, 여기서 시의 맛이 생겨난다. 대놓고 드러내도 시로서 별로 감흥을 못 주고, 너무도 꽁꽁 감춰 도무지 찾을 수 없게 만들면 역시 감흥을 주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보일 듯 말 듯. 찾을 듯 말 듯하게 표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시의 감흥 아니겠는가. 분명 찾을 수 있는데 쉽게는 찾지 못하는 것.


'베누스 푸디카'는 바로 그런 시의 특성을 표현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시집은 그렇게 무언가가 보일 듯 보일 듯한데 잘 보이지 않는다. 


'베누스 푸디카 3'이란 시에서 '신은 내게 이불을 덮어주고 사라졌다'(112쪽)고 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 있는데 보이지 않는다는, 투명 망토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투명 망토를 쓰면 애초에 보이지 않아서 그곳에 있는지 모르면 절대로 볼 수가 없다. 하지만 시는 아니다.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안다. 분명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모든 감각을 동원해야 한다. 그래도 찾을 수 있을까 말까 한데, 찾았다 해도 만지고 냄새 맡을 수는 있어도 투명 망토를 벗기까지는 볼 수는 없다. 그냥 짐작만 할 뿐이다. 이렇게 생겼겠거니 하고.


시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겠지 하고... 하여 모든 시는 읽는 사람 자신만의 해석과 함께한다. 그 해석이 다 다를 수도 있다. 왜? 보지 못하고 짐작만 하니까. 시가 그렇게 중요한 부분을 보이지 않게 하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시가 없느냐 하면 아니다. 시는 어디에나 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눈 밝은 사람이 보기도 하니까. 그렇게 이 시집 제목을 보고 읽으면서 이것이 바로 시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바쁜 현대인들, 답을 빨리 찾으려는 현대인들에게 시는 그래서 어렵다. 답을 빨리 주지 않고 또 그것이 답이라고 알려주지 않으니까.


하여 이 시집 제목이 된 '베누스 푸디카'는 보는 사람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보이는 사람이 자신을 잘 보라고, 제대로 찾으라고 거꾸로 보는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선의 뒤바뀜. 또는 주체의 뒤바뀜. 


빠른 시대, 편리한 시대에 조금 느리게 더 불편하게 살아도 된다고, 그렇게 한번 해보라고, 자, 투명 망토에 싸여 있는 존재를 찾아보라고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면 그것 역시 나만의 읽기였겠지만. 그것으로 됐다.


베누스 푸디카 3

  기억의 탄생


그게 첫 동굴이었지


스물아홉의 젊은 아버지가 술 취해 나를 찾고,

나는 다섯살


신은 내게 이불을 덮어주고 사라졌다

울면서, 남자는 아이를 내놓으라고 소리쳤지만


나는 웅크린 채 아늑했지

그러고는 주문을 걸었다


당신은 결코 나를 가질 수 없을 거예요

미끄러운 건 쉽게 잡히지 않으니까요

나는 담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니까요


손가락을 입에 문 채 뺨은 바닥에 대고

엉덩이를 높이 치켜든 어둠이 이불 속에서

고요히 높아져갔지


우리는 동산처럼 오래되었구나


훗날 기억이 왜 이렇게 모질게 남아 있을까 생각하다

첫 동굴 속에서 내 어둠이

증발 불가능한 액체임을 알게 되었네


나는 고인 채로 찰랑이다,

온 세상으로 흘러다녔다


박연준, 베누스 푸디카. 창비. 2017년 초판 2쇄. 112-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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