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처럼 - 보고, 배우고, 삶을 디자인하라
오하시 가나.오하시 유타로 지음, 염혜은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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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몇 해 전부터 핀란드를 배우자는 말이 유행처럼 떠돌았다. 학력도 복지도 매우 잘되어 있어 배울 점이 많은 나라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계속 주지시키고 있다.

 

이제는 교육 분야나 복지 분야에서 핀란드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번역이 되어 있기에, 북유럽 저 끝에 있는 나라가 마치 우리나라 근처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핀란드다. 핀란드라는 말을 들으면 이번에는 또 뭐가 있나 하는 궁금증이 인다.

 

아직도 배워야 한다고, 그러나 그 배움은 부러움만 지니는 배움이 아니라, 우리나라에 적용할 수 있는 배움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최소한 배울 수 있을 만한 것들은 모두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평생교육이라는 말을 우리도 사용한다. 그런데 교육이라는 말이 가르치는 입장에 서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으리라. 이는 위에서 아래로 무언가를 준다는, 배우는 사람이 수동적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교육이라는 말보다는 배움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려고 하는데...

 

이 교육이라는 말을 중심에 놓고 있을 때는 스승이 없다고 한탄을 하기도 했었는데... 이것이 잘못된 태도라는 생각을 요즘에 하고 있다. 스승이 없다고 한탄하지 말고, 자신이 과연 제자가 되려고 노력해 봤냐고 반문해봐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을 탓하지 말고, 자신의 배움의 자세에 대해서 성찰해 보라고, 그래야 배울 수 있다고 요즘은 생각을 바꿔가고 있는데...

 

이처럼 우리는 핀란드에서 배울 점은 배워야 한다. 세상 도처에 존재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스승이 아니던가. 배우려는 자세를 갖고 주변을 살피는 순간, 모든 존재가 스승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테니 말이다.

 

이 책에서는 핀란드의 공식적인 학교제도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쩌면 학교제도는 배움이라기보다는 아직도 교육에 가깝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반면에 학교 교육과 나란히 갈 수 있는 사회를 통한 배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박물관, 미술관, 자연학교, 도서관, 방송국과 각종 시민단체들을 통해서 배우고자 할 때 주변에서 쉽게 배울 수 있다. 또한 이들은 자기들의 자리만 지키고 사람들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학생들을, 청소년들을, 어른들을 찾아가 배움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다. 하여 도처에서 언제든지 배움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배움은 단지 지식의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삶을 바꾸는, 삶에 대해서 고민하는 배움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렇듯 배움이 언제든, 어디서든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사회를 디자인하고 있는 나라가 핀란드라고 한다. 돈이 없어서, 지역이 낙후되어서, 이주민이어서 배움에서 멀어지는 일이 없도록 이러한 배움의 제도를 디자인하고 있는 나라.

 

이 책을 읽으면서 약간의 씁쓸한 마음이 들었는데... 시골에 학생이 별로 없다고 학교를 폐교시키고, 먼 거리를 통학하게 만드는 우리나라 교육정책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학생 수가 적고, 자연과 늘 접할 수 있고, 또 지역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학교를 단지 학생수가 적다는 이유만으로, 이는 학교를 유지하는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를 들고서 폐쇄시키는 교육정책은 배움의 정책과는 반대이지 않나 싶어서이다.

 

박물관, 미술관, 방송국, 도서관 등등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배움의 장소가 주로 어디에 있나를 살펴보면 아직도 우리나라는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지 않나 하고, 이 때문에 대학입시에서 농어촌특별전형으로 이 지역 학생들에게 특혜를 주는 제도가 있는데, 이것이 악용되고 있는 현실이니... 오히려 배움에서 더 멀어지고 있는 실정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은 경제나 정치적 요소만으로 결정이 되어선 안된다. 여기에 교육보다는 배움을 중심에 놓는다면 경제나 정치적 요인은 우선 배제하고, 한 사람이 행복하게 자신의 인생을 가꾸어갈 수 있게, 언제 어디서든 배울 수 있는 곳이 있도록 사회를 디자인해야 한다.

 

적어도 우리나라에 교육정책을 펴겠다는 사람은, 또 우리나라를 살기 좋은 나라로 디자인하겠다는 사람은 그러한 의지를 지녀야 한다. 대학입시를 위해서, 취업을 위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배울 수 있는 공간들, 그러한 장소들을 디자인한 사회에서는 건강한 정신들이, 사람과 사람들이 어울리고, 사람과 자연이 어울리고, 사람과 자연과 건축물들이 어울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배움이 언제든, 어디서든 이루어지고, 그것이 자신의 삶과 연결이 되는 그러한 사회를 디자인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핀란드에서 배워야 한다.

 

그것이 이런 종류의 책을 읽는 이유다. 우리가 배움의 자세를 지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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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디자인 공부 - 불필요한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스테판 비알 지음, 이소영 옮김 / 홍시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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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많이 들은 말이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쓰고 있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 디자인에 대해서 우리는 단순히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이미지 효과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지 않았나 한다. 즉 상품에 딸린 부속 요소로 디자인을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하지만 디자인이란 개념을 이렇게 협소하게 유지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상품에 딸린 부속 요소로 디자인을 생각한다면 디자인은 우리에게 불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게 만드는 안 좋은 역할을 하는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많은 물건들이 넘쳐나는 세상, 이 책의 부제처럼 '불필요한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필요보다는 무언가를 단순히 소유하고 소비하게 만드는 역할을 디자인이 한다면 디자인은 우리 사회에서 사라져야 할 무엇이 된다.

 

과연 그럴까? 여기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디자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고 한 책이 이 책이다. 디자인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고 짧막한 글들을 통해 디자인의 역사를 훑고, 디자인의 개념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살펴보며, 지금 시대에 필요한 디자인은 무엇인지를 성찰하고 있는 책이다.

 

상품과 관련된 협소한 개념으로 디자인을 파악하지 않고, 우리네 삶 전반과 관련된 개념으로 디자인을 파악한다. 즉 우리들이 향유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디자인과 관련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문화까지도 포함이 된다.

 

그렇다면 디자인은 혁신을 자신의 개념으로 삼아야 하는데... 어떻게 혁신을 이룰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디자이너는 이런 식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한다. 이를 "디자인적 사고(130쪽)"라고 하는데, 첫 번째 단계는 사람들의 필요를 관찰하는 단계로, 문화와 맥락을 파악해야 한다고 한다. 이를 영감이라고 한다. 두 번째 단계는 아이디어를 낳는 수단으로서의 실험 단계(만들면서 배우기)라고 한다. 마지막 단계는 실행 단계라고 한다. 이는 디자인 과정이 끝날 때는 소비만이 아닌 참여를 추구해야 한다고 하는데...(130-131쪽)

 

이는 디자인이 우리의 삶을 혁신하는 능동적인 요소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럴 때만이 디자인이 자기 구실을 할 수 있고,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의 삶에 디자인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스티브 잡스도 디자인에 그토록 열중했던 것 아니었던가. 그가 자신의 회사가 만든 제품의 디자인에 열중했다면, 우리는 이런 단계를 넘어서서 우리의 삶을 디자인 하는데 열중해야 한다. 이는 바로 자신의 삶을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외부에서 주어진 조건에 자신을 맞추기만 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삶 내부에서 오는 욕구를 외부에 투영하여 외부의 조건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디자인의 혁신과도 연결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생각이 필요하겠지.

 

이 책에 나와 있는 디자인에 관한 명제 세 가지를 적어 본다. 이를 우리의 삶과 관련지어 보면 우리는 지금까지 알고 있던 디자인에 대한 개념을 수정할 수 있을 것이다.

 

명제 1 디자인은 형태를 사용하여 경험을 구상하는 창조적인 활동이다.

명제 2 디자인은 물건의 장이 아니라 효과의 장이다.

명제 3 산업 디자인은 단지 디자인의 한 분야일 뿐이다. (138-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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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눈, 갈색 눈 - 세상을 놀라게 한 차별 수업 이야기
윌리엄 피터스 지음, 김희경 옮김 / 한겨레출판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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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차별을 구별해야 한다고, 양적인 동일성을 추구하면 안된다고, 각자의 특성을 존중해야 차이를 차별로 바꾸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지만, 과연 나는 차별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그런 생각을 하면 차별에서 자유롭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땅에서 남성이자, 고학력자(?), 중산층(?), 수도권에서 지내는 일은 차별을 의식하지 않고 지낼 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차별을 느끼지 못한다고 차별을 하지 않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예였으면 좋겠는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예라는 대답보다는 아니요라는 대답이 더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차별을 느끼는 순간은 자신이 어떤 분야에서 약자가 되어 있을 때일테니 말이다. 약자가 되기 전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무심코 지나쳐버리기 일쑤다. 

 

알지 못하고 하는 차별. 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학생들을 갈색 눈과 푸른 눈으로 나누고 하루씩 엄청난 차별을 받게 한 수업. 실제 미국에서 일어난 수업이라니... 일명 차별 체험 수업

 

철저하게 눈 색깔만으로 우월하다고 인정하고 온갖 특권을 주고, 다른 집단은 눈 색깔만으로 열등하다는 소리를 하루 동안 들어야 하다니... 게다가 반론을 제기할수록 그것이 자신이 속한 집단이 열등한 집단이라는 증거로 되돌아오니... 엄청난 차별임에 틀림없다.

 

이것을 수업으로 했다. 그것도 온종일, 하루씩, 이틀을. 이 수업을 한 교사인 엘리어트도 항의 전화가 오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차별 교육이었는데...

 

무엇보다 우선은 교사와 학생 간에 신뢰가 쌓여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실험이라고 해도 의지나 감성이 한창 발달 중에 있는 초등학교 3학년 학생에게 하루동안 온갖 차별을 받게하는 일은 그 학생에게 어떤 상처를 줄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하루의 수업으로 학생은 평생동안 상처를 안은채 (우리는 이를 트라우마라고 하는데...) 살아갈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수업을 한다는 사실은 학생과 교사간에 쌓인 신뢰의 정도가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수업이 끝난 뒤 학생들을 어루만져주고, 그 학생들로 하여금 그 하루동안의 차별교육이 자신의 몸에 각인이 되어 평생을 가게 한 사실... 이는 참으로 중요하다.

 

그럼에도 두 번째로 든 생각은 누구도 전제를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인간이 지닌 유약함을 보았다고나 할까. 권위에 매달리는 성질, 또는 집단에서 일탈될까 두려워하는 마음. 이런 것들이 전제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서 할 일만 생각하게 되지 않았나 한다. 아무리 초등학교 3학년이라도 눈 색깔만으로 자신들의 능력을 구분하는데, 그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아니, 이는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이 책의 2부는 이런 차별 수업 그 후라고 할 수 있는데, 어른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어른들 역시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는 우리가 기존에 깔려 있는 전제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생각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권위나 기존 상식에 반하는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존재를 걸어야 하고, 자신을 낯선 장소에 내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을 지탱하고 있던 전제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루시퍼 이펙트였던가? 권위를 지닌 인간의 말을 거역하지 않고, 주어진 역할에 충실함을 보여주었던 실험. 이 실험과 엘리어트가 한 차별수업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전제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고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이 차별수업은 사람들의 몸에, 마음에 완전히 녹아들어가게 된다. 즉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장점이 있다.

 

이런 수업을 모든 학교에서 하기는 힘들다. 교사와 학생 간에 신뢰가 쌓여 있지 않다면 이 수업을 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느 정도의 신뢰관계가 학교에 있는가?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렇다면 이 수업을 응용해야 하는데... 이것은 이 책의 번역자가 실험한 역할극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역할극을 통해 다른 사람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왜 차별 수업을 차별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차별을 받지도 않고 하고 있지도 않은 사람이 배워야 하는가? 이것은 이 책에 답이 나와 있다. 보통의 사람, 또는 상류층에 속한 사람은 차별을 받고 그것을 몸에 체화하여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별을 받는다는 사실이 어떻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 도처에 차별이 존재함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차별과는 상관없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차별 수업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면 된다.

 

신선한 충격. 나는 차별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생각해보게 만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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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한 번 보고 싶었던 영화였는데... 영화관 가서 보지 못하고, 집에서 DVD를 빌려서 보게 되었으니...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남자.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씨름부에 들어간 아이. 그 아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해가기 위해서 분투하는 모습을 그린 영화다.

 

집 나간(?) 엄마, 전직 권투 선수인 마초라 할 수 있는 아빠 그 사이에서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남자의 일보다는 여자의 일을 더 좋아하는 아이가, 엄마에게 자신의 성정체성을 인정받고, 아버지에게도 확실하게 말하는 그러한 영화.

 

가볍다고 할 수 없는 주제를 그리 무겁지 않게 표현해 낸 영화여서 여러 가지로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내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은 여성이 되고 싶어하는 남주인공의 친구이다. 분명 고등학생이 분명한 남학생이고, 학교 공부와는 거리가 먼 남학생인데, 이 남학생이 주인공을 그리도 잘 이해해 준다. 그냥 너는 너고, 나는 나다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찾는다.

 

어쩌면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스스로 할 수 있기에 이 친구는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자신의 친구를 이해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은 친구가 어떻게 성정체성을 가지고 남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 영화를 볼 때 중심을 주인공에게 두지 말고, 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은 자기의 아들을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아빠에게 두지도 말고, 바로 주인공의 곁에서 끊임없이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찾는 그 친구에게 두면 좋겠다.

 

그 친구에게 두면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하면 행복할까. 그리고 내 친구는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가. 그 친구가 그것을 못할 때 얼마나 힘들어 하겠는가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이 아닌 친구가 추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줄 수 있는 친구. 어쩌면 그 친구로 인해 이 영화는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찾아갈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한다. 

이런 성에 관한 한 구절을 서울시 학생 인권조례에 넣기 위해서도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지금을 생각하면 이 영화는 시대를 앞서갔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은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진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편견에 시달리고 있다. 그만큼 우리는 아직도 성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하다. 무언가 꽉 짜여진 틀에 사람들을 가두려고 한다는 느낌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성에 관해서도 왜 공적인 잣대를 들이대려고 하는지... 이 영화를 봐라. 그 친구의 입장에서. 그 친구가 되어서. 그냥 내가 나이듯이 그 사람도 그 사람일 뿐이다. 그 사람을 그 사람 자체로 인정 못하는 이유는 나에 대해서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른 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그처럼 자유롭게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이 영화 보고 책도 읽자.

 

일리치의 "젠더"를 읽어도 좋고...

아니면 바로 이 책 "성적 다양성, 두렵거나 혹은 모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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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사회 - 벌거벗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기
한홍구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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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6.

친숙한 숫자다. 아니 친숙해서는 안되는 숫자다. 이는 악마의 숫자라고 하니까. 적그리스도. 그리스도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나 인류의 파멸을 이끌 존재라고 하고, 이 존재를 상징하는 숫자가 바로 666. 신의 숫자를 3이라고 하면 6은 악마의 숫자이고, 이 악마의 숫자인 6이 신의 숫자인 3으로 나타나니 악마가 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신처럼 행세하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무서운 종말론이다. 젊은 시절, 휴거를 믿는 사람도 있었고, 이러한 666에 대해서 공포감을 지닌 사람도 있었다. 곧 인류 종말의 시대가 오리라고. 하긴 마야의 달력에 2012년이 없다고 인류의 멸망이 2012년에 일어난다고 하는 공포 조장도 있었으니.

 

그런데 이런 666이 우리에게 편리라는 이름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 진짜 무서운 일이다. 우리는 편리라는 이름으로 많은 것들을 양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이 책에도 나오지만 국가인권위에서 파악한 바로는 우리가 하루 동안에 CCTV에 나오는 횟수만 해도 80회가 넘는다고 하니, 이런 공적인 통계말고 사적인 출연하기 합치면 우리는 하루에도 100회 이상 CCTV에 등장하게 된다는 얘기가 성립한다. 이 얘기는 무슨 얘기냐 하면 안전을 이유로 도처에 설치되어 있는 이 CCTV에 나라는 존재가 무작위로 촬영되고 남의 눈에 띈다는 얘기다. 내 사생활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얘기다.

 

이것보다 더 무서운 건, 그래도 CCTV는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고, 우리가 의식을 하기도 하지만 아무 생각없이 사용하는 카드는 우리를 더 잘 드러내준다. 무엇을 사고, 어디에 가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등등의 생활 패턴이 카드 사용으로 드러나게 되며, 공적 권력이 아닌 사적 권력이 이러한 취향을 수집, 분석해서 자신들이 이윤을 창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우리들이 자주 겪는 일이지 않은가. 취향을 분석해서 상품 홍보에 관한 메일이 온다든지, 아니면 인터넷서점 같은 경우에는 취향에 맞는 추천도서 목록이 온다든지 하는 일 말이다. 굳이 고민을 하지 않아도 밖으로 돌지 않아도 되니 참 편리하다. 이런 편리함은 또 있다. 

 

직장인이라면 한 해에 한 번은 하는 연말정산을 생각해보면 안다. 이 책에서도 나오지만, 연말정산을 할 때 연말정산 간소화라고 하여 국세청에 들어가 내가 사요한 신용카드 액수 및 지출한 교육비, 그리고 의료비, 여기에 기부금까지 국세청에서 자료를 받아 제출할 수 있다. 이상하다. 본래 이를 국세청에 내가 제출해야 하는데, 반대로 국세청에서 받아 다시 국세청에 제출한다. 그런데 편리하다.

 

이 편리함 속에 들어 있는 감시와 공적 권력에 대한 내 사생활의 공개는 늘 겪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데... 이번엔 대형 통신사인 KT에 가입되어 있는 수백만 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되었다는 소식도 있다. 이런 일에는 분개를 하고 대책을 마련하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 공적 권력에 자료가 넘어가는 일과 사적 권력에 자료가 공개되는 일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공적 권력은 이윤이 아니라, 통제와 관리를 편리하게 하기 위한 이익을 얻고 있지 않은가.

 

정보의 집적은 언젠가 정보의 유출을 초래하고, 또 정보의 집적은 권력의 집중을 초래하게 되는데... 너무도 쉽게 위는 이를 간과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 책은 다섯 번의 강연을 모은 책이다.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감시가 이루어졌는지 역사적 고찰을 하고, 자발적으로 우리가 우리의 정보를 어떻게 넘겼는지,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왜 존중되어야 하느니, 또 그것과 법과 인권의 관계는 어떤지,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사람이면 특정한 나이가 되면 누구나(요즘은 지문 채취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어서, 주민등록증 발급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누구나가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니고 있는 주민등록증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실, 무섭다. 언젠가는 아마도 카드 형식으로 이런 주민등록증을 들고 다니게 하지 않고, 사람 몸에 칩을 이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니 말이다. 그럴 때 우리 몸에 바코드가 새겨질 때 이 때가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라고 했는데...

 

설마,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 있는 21세기에 자신의 편리를 위해서 인간을 기계로 대체하려는 그런 움직임에 찬성하지는 않겠지 하면서도 공적 권력인 국가와 사적 권력인 시장이 이렇게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면 이게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생긴다.

 

정보의 집적을 막고, 정보가 한 군데에서 통제되는 일을 막아야 한다고 하는데... 이 책에서도 언급이 되고 있지만 학교에서 실시되고 있는(분명 실시하고가 아니라 실시되고라는 피동형이다.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제적으로 실시되었기 때문이다) 교육행정정보 시스템(NEIS)만 해도 예전에는 각자 떨어져 있던 학교 전산 프로그램들이 이제는 업무포털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고, 이 곳에 엄청난 양의 정보가 집적되고 있다.

 

아마도 몇 십년만 지나면 우리나라 국민의 모든 정보가 이곳에 모여 있게 되리라. 우리나라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학생 때는 심지어는 자신이 읽은 책까지도 이곳에 기록이 되기 때문이다. 신체정보는 물론이고.

 

이런 감시사회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을까? 사실 벗어나기는 힘들겠단 생각이 든다. 그렇담, 벗어날 수 없다면 감시를 해야 한다. 감시란 권력을 쥔 자가 권력을 쥐지 않은 사람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권력을 쥐지 못한 사람이 권력을 쥔 자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일부터 해야 하는데... 우선은 전자주민등록증이 도입되지 않도록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할테고, 전자사회가 반드시 우리에게 편리만을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이의 부작용에 대해서 인식하는, 편리 뒤에 숨어있는 권력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어야 한다. 

 

힘든 일이겠지만, 깨어있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통제는 더욱 힘들어질테니...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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